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3:15:39

프루이트 아이고

프루이트 아이고
Pruitt-Igo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ruitt-igoeUSGS02.jpg
<colbgcolor=#f5f5f5,#191919> 위치
[[미국|]][[틀:국기|]][[틀:국기|]]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건설 기간 1951년 ~ 1955년
철거 1972년 ~ 1976년
층수 지상 11층
세대 수 33개동 2,762가구
설계 야마자키 미노루(山崎 實)
1. 개요2. 상세
2.1. 시작2.2. 몰락2.3. 폐건물이 되다2.4. 결말
3. 건축학적 반론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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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 있던 아파트 단지. 프루이트 아이고라고 서술할 때도 있지만 프루이트 이고라고 서술될 때도 있다.

건축가 야마자키 미노루(1912~1986)가[1] 설계하였다. 수많은 건축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후 여러 사정이 겹치고 겹친 끝에 폐건물로 방치되다 해체된 그야말로 아이고였다.

도시계획, 지역개발 강의에서도 주로 사용되는 사례다.

2. 상세

2.1. 시작

세인트루이스의 도시화가 가속되고 인구 유입이 늘면서 남부지방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올라온 이주민에게는 직장에서 가까운 도심지의 거주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거주지는 고급주택 외에는 슬럼가 밖에 없는 상태였고, 주 정부는 슬럼가를 밀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주택단지를 짓기로 결심한다.
파일:attachment/ThepruittIgoe1.jpg
완공 당시

1951년의 현상설계에서 일본계 미국 건축가인 야마자키 미노루의 안이 당선되고, 1954년에 완공되었다. 33개동의 11층 공공아파트에 2,762세대, 12,000여 명의 주민이 이주하기로 계획되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철학의 연장선으로, 이 단지는 모더니즘의 정상이자 주택단지 설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사회학자 심리학자의 자문을 받아가며 설계한 이 단지는 미국건축가 협회의 상을 받으며 그 화려한 역사를 시작했다.

2.2. 몰락

하지만 프루이트 아이고의 주요 거주자는 극빈층, 그리고 대부분 흑인이었다. 이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집앞의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의 방식을 무시하고 고층단지로 지어졌으니 이 건물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이렇게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상황에서 주 정부는 한 술 더 떴다. 정부는 복지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거주자의 삶을 제한했는데, 성인 남자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고 텔레비전 전화 사용도 금지되었다. 사실상 밥먹고 자는 것 외엔 아무 의미가 없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 그리고 예측과는 달리 세인트루이스의 인구는 이후 감소추세를 보였기 때문에 중산층, 백인은 이런 불편한 단지를 나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버렸고 이 때문에 거주자 중 흑인 비율은 98%가 되었다. 지금도 세인트루이스는 이러한 문제로 인해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정치가들의 삽질 또한 비범했다. 제 몫을 챙기려고 단지 건설을 지지했던 이들은 이후 세금으로 단지를 관리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당연히 주거민 대다수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한다. 에 금이 가고, 유리창은 깨진 채로 방치되었으며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2.3. 폐건물이 되다

파일:attachment/ThepruittIgoe4.jpg
폐건물이 된 프루이트 아이고

이 단지의 입주율은 60%를 넘은 적이 없었으며, 1970년에 이르러서는 전체 건물 33개동 중 27개동이 빈집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빈 곳에서는 범죄 사회의 어두운 손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외부인이 침입하여 강간, 약탈 범죄를 저질렀지만 거주민들은 외부의 시각으로는 철저히 범죄자로 인식되었기에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다. 급기야 1969년 이들은 집세 지불 거부 운동을 벌였지만 별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거주자 중 한 명이 단지 내에서 형이 괴한의 습격으로 사망했다고 밝히던 시점에서 이미 이 프로젝트의 실패는 증명된 셈이었다. 거주자의 커뮤니티 공간이라고 지은 실내의 홀은 마약 거래를 하는 데 안성맞춤이었고, 미디어는 단지의 실패와 공공기물 파손 등의 반달리즘 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2.4. 결말

파일:attachment/ThepruittIgoe2.jpg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프루이트 아이고

상황이 이렇게 되지자 정부도 마냥 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었고, 결국 지방 정부 주도로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22분, 단지는 발파되어 완전히 철거되었다. 훗날 건축역사가 찰스 젱크스(Charles Alexander Jencks, 1939~2019)는 이 순간을 " 모더니즘이 끝난 순간"으로 정의하였고, 일각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시작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나의 사상을 끝내고, 다른 사상을 탄생시킨 건축으로서 프루이트 아이고 단지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어떤 의미로는 불멸의 건축물이 되었다.[2]

철거 이후 해당 부지는 공원화되어 이 조성되었다. 그렇게 프루이트 아이고는 결론적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 아이고"라는 한 마디 탄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건축물이 되어버렸다.

3. 건축학적 반론

프루이트 아이고의 건축적 가치가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하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단지가 몰락한 이유는 건축가가 저소득층 거주민에 대해 고려가 부족했던 점도 있지만 정부와 정치가의 무능이 훨씬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폭파라는 너무나 극적인 결말은 미디어의 집중포화 때문이었다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주 저소득층이 워낙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저소득층용 아파트(영구임대 아파트, 국민임대 아파트 등)가 지어졌지만 저것과 같은 문제가 도출된 적은 없다.

프루이트 아이고의 실패는 북미, 서유럽의 아파트 공급 방식의 문제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북미나 서유럽은 아파트 단지를 저소득층 주거 용도(한국의 영구임대와 유사)로 공급했으며 중산층은 대도시 지역에 사는게 아니라면 목조 2층 단독주택을 고집했기 때문에 아파트 단지 자체가 곧 빈곤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한국인 단독주택에서 감천문화마을같은 저소득층 이미지[3]를 떠올리는 것과 완벽하게 대비된다.

한국도 1970년대 초반 시민아파트가 지어지던 시절에는 아파트가 저소득층 주거로 통용되었다. 물론 당대에도 고급아파트가 있기는 했지만 부실공사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로 인해 이미지가 추락하여 기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필두로 한 중산층 대상 대단지가 등장하고 기존의 슬럼가가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었으며, 반대로 단독주택 지역은 주택공급 드라이브 하에 대부분이 다세대주택으로 대체되면서 인식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이는 비슷한 도시 개발 양상이 나타난 중국 등 신흥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도 1963년 입주한 시카고 마리나 시티를 대표로 하는 도심부 고층 분양 주택은 오히려 상류층의 주거로 자리매김하였으나, 여전히 중산층은 교외의 단독주택을 선호하고 있다. 심지어 실리콘밸리처럼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지역조차 저밀도 개발이 일어난다. 이는 개활지가 많고 기본 정서가 개인주의적이어서 주변 사람과 얽히기를 기피하는 미국 문화에 맞지 않은 탓일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2011년에는 The Pruitt-Igoe myth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 건물의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이 영화는 서울건축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파일:attachment/ThepruittIgoe3.jpg


[1] 붕괴 전 세계무역센터의 설계자다. 그리고 이 건물의 몰락과 더불어 또다른 대표작인 세계무역센터 9.11 테러로 붕괴되어 야마자키 미노루는 비운의 건축가로 불린다. [2] 다만 정작 건축가 야마자키 미노루는 이에 대한 기자 질문에 영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3] 달동네 무당집 깃발, 폐지 줍는 노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