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6:17:51

프랭크 녹스

제47대 미합중국 해군장관
윌리엄 프랭클린 녹스
William Franklin Knox
파일:1000128405.jpg
출생 1874년 1월 1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사망 1944년 4월 28일 (향년 70세)
미국 워싱턴 D.C.
복무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미국 육군 대령
복무 기간 1898
1917~1919
학력 앨머 칼리지
정당 공화당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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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1874년 보스턴에서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에서 이주한 건축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축업자로 성공했고 캐나다로 돌아가 노바스코샤주에서 바닷가재 통조림 공장이 실패해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로 이주했다.

15세때 학업을 그만두고 판매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앨머 칼리지에 진학해 학업을 했다. 그러다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의용 기병대로 쿠바에서 공을 세웠다. 그랜드래피즈로 돌아오자 영웅으로 반겼고 그를 영웅으로 기사를 쓴 그랜드래피즈 해럴드의 기자로 채용되었다.

또한 사업담당으로 부서를 옮기고 여러 언론들을 매입하기 시작해 세력을 불렸다. 그러면서 정치쪽에 발을 들여 미시간주 공화당 당대표, 선거 홍보대표로 일했다. 뉴햄프셔 주지사인 로버트 퍼킨스의 도움을 받아 뉴햄프셔의 언론잡지 리더를 설립해 여러 언론을 매입했다.

1916년 군에 복귀해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자 서부전선에서 제78보병사단 사격 교관으로 복무했다. 이후 대령으로 진급했다. 전후 복귀해 언론쪽에서 일했으며 1930년에는 시카고 데일리 뉴스(Chicago Daily News)의 발행인이 되었다.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대통령 후보 알프 랜던과 함께 출마했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밀려 대패했다.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의해 해군장관으로 임명되어 2차 대전당시 영국에 대한 해상지원을 본격화했다. 장차 참전을 대비하기 위해 미 해군의 규모를 크게 키워놓으며, 그의 노력은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을 전개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면서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이 되자 일본계 미국인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진주만 공습이후 일본계 미국인을 수용하는 행정 명령인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를 입안했고 18만명의 일본계들을 수용소에 수감했다.

1944년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5월 1일 사망했다. 사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임 해군장관은 제임스 포레스탈이 임명되었다.

3. 여담

미 해군 기어링급 구축함 11번함 DD-742 프랭크 녹스
1944년에 취역해 오키나와 전투 등에 참전했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일본에 주둔해있다가 6.25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여했다.

1970년대에 그리스군에 매각되어 테미스토클리스라는 이름으로 재취역했다. 1992년에 퇴역했으며, 2001년에 그리스 해군 네레우스와 어뢰정 키클론의 표적함으로 소모되어 침몰했다.

전함소녀에 의인화되어 등장한다. 프랭크 녹스(전함소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