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4-19 16:55:38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92호 93호 94호
여주 하리 삼층석탑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

파일:파주_용미리_마애이불입상.jpg

1. 개요2. 내용3. 조선 세조대 조성설4. 외부 링크5. 보물 제93호

1. 개요

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고려 선종 시기, 혹은 조선 세조 시기에 만든 한국의 대형 거불입상.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고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암벽에 새긴 거대한 마애불이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7.4 m, 얼굴 크기는 2.4 m 정도.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1932)[1]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불상에는 다음과 같은 구전설화가 전해온다.
고려 제13대 왕 선종은 평소 자식이 없어 걱정이 많았다. 후궁이 이를 못내 안타까워하다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도승 2명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지금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다오."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후궁이 꿈에서 깬 뒤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니 왕이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

1963년에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었는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거불석상으로 매우 유명한 문화재이다. 참고로 잘 보면 둥글게 패인 자국이 곳곳에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의 탄흔이다.

3. 조선 세조대 조성설

1995년 10월 21일 동아일보 : 파주 용미리 石佛(석불)입상은 世祖(세조)11년 제작. 발원문 탁본서 밝혀져

오래전부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석불로 여겼으나, 최근 연구에서 조선 세조 때 만들어진 불상이라는 설이 등장하여 건립연대를 두고 두 설이 팽팽히 맞붙은 상황이다.

조선 세조 시기 건립설의 가장 큰 근거자료는 1995년에 발견된 조성문(造成文)이다. 알고 보니 이 불상을 처음 세울 때 그 몸체에 새긴 조성명문 2백여 자가 있었으나 기존에는 판독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최신 과학기술을 이용해 판독한 결과 용미리석불이 세조의 왕생정토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며, 성화(成化) 7년(1471) 7월에 세조와 그 부인 정희왕후의 미륵부처 용화회에 참석해 일시에 깨달을 것을 기원한다는 내용이었다.
(願彌勒龍華之中類在初會作上正法, 當來彌勒如來大聖 世祖大王往生淨土)

이 명문에는 이 용미리 불상을 만들 때 시주한 사람들의 내역 또한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세조에 협조한 함양군( 양녕대군의 둘째아들), 한명회의 셋째부인 정경부인 이씨, 세조의 외삼촌 심장기, 당대 왕가와 가깝던 승려 혜심 등 왕실 인물 약 20여 명이다.

즉 이 용미리불상은 조선 세조와 그의 부인인 정희왕후를 미륵불의 형상으로 묘사한 부부상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 세조대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 용미리석불이 있는 파주는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고향이며, 세조 6년(1460)에 정희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된 곳이다.
  • 이 석불 바로 인근에 예종, 성종의 비로 요절한 한명회의 두 딸의 무덤(공릉과 순릉)이 있다. 즉 시주로 참여한 이들은 세조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동시에 예종·성종 비의 능이 부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대불을 조성했으며, 당시 권세와 재력을 겸비한 이들이 기존 석불을 중수하기보다는 새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이 조성기 명문에 새겨진 이들은 당시로선 왕실의 최고위 인물들로, 명문에 열거된 이들의 면면을 볼 때 단순히 고려시대의 불상을 중수한 중수기에 이름을 넣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 불상이 머리에 쓴 원정모(圓頂帽) 형태의 보개. 원정모는 원나라 귀족들이 쓰던 모자인데 연대적으로 선종 재위기인 고려 초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여말선초 시기에만 관리와 승려들이 사용했다.
  • 고려시대 중기인 1144년에 김부식이 찬한 ‘혜음사신창기. 1144년에 김부식이 이 지역을 유람하며 이 불상이 있는 혜음사에 대하여 절뿐 아니라 숙박기관, 행궁의 기능까지도 겸한 특징까지 모조리 설명했는데, 랜드마크로서 부족함이 없었을 용미리석불을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에 용미리석불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이 불상이 정말로 세조 대에 만들어졌다면, 왜 고려 선종의 한산후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붙었을까? 이에 대해서 이한성 동국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역사서에 따르면 한산후 윤은 14대 헌종의 아우인데 헌종에게 양위를 받아 등극하는 15대 숙종(삼촌)에게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하는 아픈 역사가 있었다는 것. 즉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본따 불상을 만들었는데,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그 불상에 350년 시차를 두고 왕위찬탈을 위해 두 왕조에서 벌어진 삼촌에 의한 조카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함께 대입시키면서 세조의 불상에 고려 한산후에 대한 민담들이 함께 붙었고, 더 긴 세월이 흐르면서 아예 그 민담들이 설화로 둔갑되고 불상 또한 세조와 정희왕후의 불상에서 고려 선종이 만든 불상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불상의 모습이 고려시대의 양식을 잇는다는 점, 그리고 최근까지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간주된 점 등을 근거로 여전히 고려 전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아직은 공식 정설상으로 여전히 고려시대의 불상이라 할 수 있다.

현대불교 : 용미리석불 조성연대는 고려 or 조선? 이경화 조선대 강사, 1471년 조성설 제기
불교신문 : 파주용미리석불 조선세조때 조성
오마이뉴스 : 저 입상, 정말 세조임금의 부부상일까? [여행] 경기 파주 용미리 쌍미륵석불입상의 전설과 가치, 용암사 풍경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 30] 의주대로 따라 용미리 마애불로

4. 외부 링크

5. 보물 제93호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1] 일제강점기의 승려 안진호(安震湖, 1880-1965)가 기록한 책이다. 안진호는 1925년에 조선불교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의 사찰이며 중요시설들을 견학하였는데, 특히 사찰들마다 자기네 역사를 기록한 사지(寺誌)를 보여주는 데 충격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온 뒤 자신도 조선 사찰들의 사지를 집필하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외에도 안진호는 당시 조선 불교계의 의례를 집대성하고 표준화한 ≪석문의범(釋門儀範)≫을 출판하여, 조선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 한국 불교계의 의례도 석문의범에 수족된 절차를 조금 단순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