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9:05:16

태조(막)

막당중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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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조 초대 황제
太祖 高皇帝 | 태조 고황제
출생 1483년 12월 22일
대월 후 레 왕조 의양 고제사[1]
(現 베트남 해방시 건서현)
사망 1541년 8월 22일 (향년 57세)
대월 막 왕조 탕롱 황성
(現 베트남 하노이)
재위기간 안흥왕
1527년 ~ 1527년 4월
막조 초대 황제
1527년 ~ 1530년
막조 태상황
1530년 ~ 1541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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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성씨 막(Mạc / 莫)
당중 (Đăng Dung / 登庸 / 등용)
부황 소조(昭祖)
모후 등태후(鄧太后)[2]
묘호 태조(太祖)
시호 인명고황제(仁明高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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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집안 내력과 초기2.2. 두각을 드러내다
2.2.1. 출세가도
2.3. 안흥왕(安興王)
2.3.1. 황위를 넘보다
2.4. 막조 건국
2.4.1. 새로운 대월의 황제2.4.2. 후 레 왕조 유신들의 부흥운동2.4.3. 에 대한 책봉 문제2.4.4. 치적
2.5. 사망
3. 평가4. 삽화5. 참고 항목6. 가계도7.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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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초기 후 레 왕조의 권신이자, 막 왕조의 초대 황제였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인명고황제'(仁明高皇帝)였으며, '소조'(昭祖)로 추존된 막힉( 막격, 莫檄)의 아들이었다.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봉록을 먹던 국가를 무너뜨린 찬탈자라는 악평과 반대로 부패해가던 황권과 대월 제국의 정치를 재건하고 사회의 안정에 앞장선 명군이라는 이중적인 평가가 공존하며 근대 이전까진 그가 세운 막 왕조와 더불어 비정통, 찬탈자, 중국에게 굴복한 겁쟁이라는 악평이 대다수였으나 현대에 들어 연구가 활발해지자 그의 업적 또한 확인되어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2. 생애

2.1. 집안 내력과 초기

막당중은 1483년 12월 22일, 막힉의 아들로 태어났다. 엄청난 재능을 손보였다고 전해지는 시인 막딘찌, 명나라가 대월을 복속했을 당시 명의 관직을 지낸 막투이의 5대손이었지만 막당중이 태어날 당시 막씨 집안 사정은 어려워졌기 때문에 막당중은 어업에 종사하며 살아야했다. 가난했지만 막당중은 건장하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숙위가 되었다. 이후 위목제 시기에 천무위도지휘사, 반정으로 즉위한 양익제에 의해 무천백(武川伯)에 진봉되면서 레(여)씨 황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2.2. 두각을 드러내다

2.2.1. 출세가도

어느날 찐주이산(정유산)이란 자가 양익제의 폭정을 문제삼아 양익제를 시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후 찐쭈이산은 양익제의 조카인 레꽝찌[3](여광치)를 황제로 옹립시켰지만 찐주이다이[4](정유대)가 레꽝찌를 납치하고 그의 형제들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양익제의 죽음에 반발한 응우옌호앙주(완홍유)가 탕롱을 공격하자 찐쭈이산은 레꽝찌의 뒤를 이어 여의(소종)를 즉위시켰다.

한편, 이전부터 황제를 참칭한 쩐까오(진고)의 세력이 레씨 황실의 혼란을 틈타 탕롱을 공격해왔고, 소종은 여러 제후들에게 쩐까오의 토벌을 명령했다. 마침내 양익제 대부터 이어진 쩐까오의 반란은 응우옌호앙주, 쩐쩐(진진) 등이 진압했지만 머지 않아 응우옌호앙주 쩐쩐이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쩐쩐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제국의 전권을 장악했다.

쩐쩐은 레씨 황실을 허수아비로 전락시킬 만큼 강해졌고 이 시기의 막당중 역시 자신의 아들 조아인을 쩐쩐의 딸과 혼인시킬 정도로 쩐쩐을 두려워 했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쩐쩐이 황위를 찬탈하여 명군이 될 것이다.

시의 내용을 들은 일부 신하들은 소종에게 쩐쩐을 죽이는 걸 권했고 마침내 소종은 쩐쩐을 궁으로 유인한 다음 암살했다.

그러나 쩐쩐의 죽음에 반발한 그의 잔당이 반란을 일으켜 탕롱을 약탈하는 등 폭주하기 시작했다. 소종은 가림현 보제진으로 피신해 응우옌호앙주에게 반군을 저지하라고 명했으나 응우옌호앙주는 명을 듣지 않았다. 부득이하게 소종은 막당중을 떠올렸고 그에게 병권을 맡겼다. 막당중은 소종을 보제진으로 맞이하고 반군에게 승리했으며 주요 인물 세 명을 처형시켰다.

그 후 막당중은 보제진이 남은 쩐씨 세력들과 가깝다고 생각하여 자주(慈州)로 소종을 맞이했다. 어사대, 부도어사가 막당중의 결정에 반대하자 막당중은 그들을 죽여버렸다.

한편, 찐뚜이, 응우옌낀(阮敬)은 레방[5]을 옹립하여 조정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막당중은 이번에도 진압에 나섰지만 이전과 달리 손쉽게 반란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소종은 다시 응우옌호앙주를 불러 진을 치게 했다. 응우옌호앙주는 청화병(清化兵)을 이끌고 막당중은 산의 남쪽에서 군대를 이끌었다.

이 중 응우옌호앙주가 참패하여 소종은 어쩔 수 없이 막당중을 더욱 중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를 제영사(诸营事)로 파견하여 완앙(阮盎)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한 모든 병마를 관리하게 했다. 마침내 1519년 막당중은 승기를 잡고 반군에게 승리했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명군공(明郡公)에 봉해졌다. 패배한 완앙 등은 막당중에게 붙었고 막당중은 점점 세력을 키워 나갔다.

1521년 막당중은 인국공(封國公)으로 봉해졌고 레씨 황실의 군권을 장악했으며 진승(陳昇)[6] 의 잔당도 완전히 진압하고 다음해엔 여극망(黎克纲), 여백효(黎伯孝)의 반란을 진압했다. 많은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세력을 불려나간 막당중은 황제마저 건들 수 없는 레씨 황실의 실권자가 되었다.

2.3. 안흥왕(安興王)

2.3.1. 황위를 넘보다

막당중은 서서히 찬탈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소종을 통제하기 위해 딸을 궁중에 보내서 소종을 시중들게 했는데, 사실 소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막당중은 장남 조아인을 제후에 봉하고 금광전(金光殿)을 보게 했다.

실로 강대해진 막당중은 거만해지기 시작했고 무려 본인이 행차할 땐 황제의 의위(儀衛)[7]를 차렸다. 완구(阮構), 염거(覃舉) 등이 막당중의 행동거지를 비판하자 막당중은 그들을 죽여버렸다. 결국 소종은 분개하여 1522년 팜히엔(范獻), 팜트(范恕) 등과 공모하여 막당중 제거 계획을 실행하다 얼마 되지 않아 홀로 탕롱을 탈출했다.

막등용이 이를 알아채고 황유악(黃惟岳)을 보내 소종을 추적하게 하니 소종은 군대를 보내 저항하여, 황유악을 죽였다. 그러자 막당중은 소종이 간신에 의해 외지로 납치당했다고 선포한 뒤, 소종의 동생 레쑤언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 후, 막당중은 소종을 폐위한 후, 타양왕(陀陽王)으로 강등시키고 여러 차례 공제를 협박하여 찐뚜이와 소종을 공격했다. 막당중은 1524년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로 승진했고 1525년 도읍에 임명되어 천하의 병영을 장악하고 소종을 체포한 뒤 탕롱에 압송시킨 후, 다음 해 부하들을 시켜 소종을 시해했다.

이 시기 막당중의 세력이 북중에 널리 퍼져있었는데 마침내 막당중은 찬탈을 결정했다. 이미 1524년 평장으로 임명됐을 때 찐씨 세력의 지지를 구했으며, 1527년 조정은 막당중의 뜻에 따라 구석(九锡)[8]을 하사하고 안흥왕(安興王)에 봉했다.

막당중은 얼마 후 주공 서주 성왕을 보좌하는 것을 칭송하는 시를 한 편 만들었으며 고제(古齋)에서 탕롱으로 향했고 그가 깔아 놓은 판 아래 모든 군신들이 공제에게 선위를 건의했다. 막당중에게 욕설을 퍼붓고 무예(武睿) 등 후 레 왕조에 충성하는 신하들이 불복했으나 그런 자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2.4. 막조 건국

2.4.1. 새로운 대월의 황제

1527년 4월, 막당중은 공제의 선위를 받아 막 왕조를 건국하고 명덕(明德)으로 개원했다. 동시에 레 공제는 이왕삼각에 따라 공왕(恭王)이 되었지만 얼마 후 막당중은 그를 협박해 태후 정씨(鄭氏)와 함께 자살하게 만들었다. 즉위 초 막당중은 자신의 찬탈에 반발하여 소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후 레 왕조의 법도를 지키며 후 레 왕조 유신들의 지지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후 레 왕조 신하들은 외국으로 도피하거나 이름을 감추고 어떤 이는 도적이 되기도 했다. 응우옌호앙주의 양자인 응우옌낌(완감)[9]이 서쪽의 라오스로 피신, 후 레 왕조의 부활을 꾀했으며 막 왕조 최대의 적대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정세가 안정되자 막당중은 수도를 하노이로 옮기고, 군사체제, 토지 제도, 녹제를 개혁했으며, 3년 후에 노령을 이유로 아들인 태종 막등영(太宗 莫登瀛)에게 양위했다. 이후 태상황을 자처한 뒤, 상광전으로 물러나 어업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들 등영이 1540년 자기보다 먼저 사망하자 손자인 복해를 옹립하고 섭정을 계속했다.

2.4.2. 후 레 왕조 유신들의 부흥운동

파일:베트남 남북조시대.png
남부의 통치권을 상실한 막 왕조(1530년)
남부를 빼앗기고 영토가 탕롱 일대로 축소되었다.

같은 해 1530년, 후 레 왕조 종실의 외손을 자처한 청화인 여의(黎意)가 자주(椰州)에서 시해당한 소종의 연호(광소) 부활을 선언했다.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이 그 휘하에 붙으면서 짧은 사이에 각 군현이 호응하여 병사가 수만 명에 달했고 말들이 강을 뒤덮을 수준이 되었다. 태상황 막당중이 몸소 군대를 동원했지만 연전연패하여 탕롱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막국정(莫國楨)에게 방어를 맡겼으나 역시 패배했으며 여의는 서도성(西都城)으로 쳐들어갔다.

막당중은 이를 알아채고 군대를 거느린 후 친히 징집하여 막국정과 함께 협공했으나 패배했고 아들 막당조아인은 탕롱으로 퇴각했다. 이때 여의는 연전연승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해이해져 향락을 즐기게 되었다. 이 틈을 타 막국정이 여의를 격파하며 생포했고 여의는 탕롱에 압송된 뒤 거열형에 쳐해져 죽었다.

여의의 잔여 세력은 응우옌낌(완감) 쪽으로 도망쳤고, 소종의 아들을 자칭하는 황족 레닌(장종)을 옹립하여 후 레 황실을 재건했다.

막당중은 후 레 왕조 유신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전 국민이 갖고 있는 총검과 날카로운 칼 등 각종 무기를 몰수하고 이를 어긴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치안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되면서 '노불습유'(路不拾遺)[10]와 같은 현상이 연출되기도 했다.

2.4.3. 에 대한 책봉 문제

이전에 막등용의 기세에 밀려 산시성으로 소종이 도망가자 소종의 모후 정씨(鄭氏), 소종의 동생 여춘은 탕롱(승룡)에 남았고 막등용이 레씨 황실을 위협하자 명나라에 막등용이 황제(안남 국왕)를 쫒아냈음을 알렸다. 당시 막 즉위한 명나라의 세종 가정제는 손승은(孫承恩)에게 명령하여 유돈(俞敦)을 보내 조서를 안남에 전달하려 했으나 안남에서 소종과 막당중 간의 내분이 일어나자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1525년 소종은 명나라에 공물을 보내 자신을 지원해 줄 것과 다시 안남 국왕으로 책봉해줄 것을 청하여 막등용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막등용의 방해로 이마저도 실패했고, 막등용은 다음해 흠주(欽州) 판관 당청(唐淸)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괴뢰인 공제의 안남 국왕 책봉을 기도했으나 당청이 양광 총독 장정(張嵿)에게 체포당해 수포로 돌아갔다.

1528년 막등용이 찬탈에 성공하여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 정통성을 챙기기 위해 직접 명나라 조정에 입조하여 레씨 자손이 없어 황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고, 또한 군신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안남 국왕 책봉을 요구했다. 가정제는 안남으로 사람을 보내 상황을 조사하게 했는데 사신이 막등용이 사실은 찬탈했고, 그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게 되자 막등용은 명나라의 정벌을 두려워해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 나서야 관계가 완화되었다. 이후 적지 않은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이 명나라로 도망가 레씨 왕조를 부활시킬 것을 요구했으나 막등용이 명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관리들에게도 뇌물을 주어 모든 가능성을 차단시켰다.

1533년 완감의 지지로 즉위한 소종의 아들 장종은 레씨 대월의 부활을 선포하면서 명나라에 정유료(鄭惟僚)를 파견하여 자신이 소종의 아들임과 막등용의 찬탈을 알렸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가정제는 막등용의 10대 죄목을 열거한 후 안남을 정벌하려 했으나 신하의 간언으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얼마 후 운남 순무 왕문성(汪文盛)이 막 왕조의 간첩을 붙잡자 격노한 가정제가 다시금 안남을 정벌하려 했고 왕문성이 막씨 부자를 사로잡는 자에겐 현상금을 지급한다는 지명 수배지를 뿌리자 막등용은 이미 남쪽엔 중흥 후 레 왕조가 있는데 명나라를 적으로 만들어 양면전쟁의 형국이 되면 파멸될 것을 예상했기에 사신 완문태(阮文泰)를 보내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무조건 항복을 청했다.

이후 1540년 태상황 막등용은 조카 막문명(莫文明)과 신하 40여명을 거느린 채 왕문성에게 대월의 토지대장, 모든 장적 및 나라의 중요 문서와 고평(까오방) 일대, 자국의 특산물 그러니까 막대한 뇌물을 바치면서 이전처럼 항복의 자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막등용이 자신을 밧줄로 묶어 죄인처럼 보이게 하여 절대적인 충성을 넘어 비굴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었다. 일국의 황제가 명목상 종주국의 황제도 아닌 일개 관원에게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며 충성을 맹세한 자세는 이후 베트남 역사학자들에게 비난받는 이유가 되었다.

어쨌든 막등용은 명나라에 절대적인 충성을 보였고, 명나라는 마지못해 막등용을 안남의 '통치자'로 인정해줬다. 하지만 명나라는 막등용을 격이 높은 안남 국왕이 아닌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안남도통사(安南都統使)로 봉했다.

2.4.4. 치적

막당중이 세운 막 왕조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서구와의 무역을 개시하여 상업이 크게 발달했고, 여성 인권을 개선시켜 당대의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진취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막당중은 병제, 전제, 녹제를 개혁했고, 멸망한 후 레 씨 왕조의 성종의 업적을 인정해 당시 만들어진 법률의 수정본인 《황조관제전례》(皇朝官制典例)를 편찬했다. 그 외에 화폐의 제조 방식을 바꾸고 옛 화폐 방식으로 주조하게 했으나 이질물을 섞어 만든 화폐의 통용으로 공용화되지는 못했다.

찬탈자라 비판받는 막당중은 기울어진 대월을 재건하고 각종 업적으로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현대에 재평가를 받고 있다.

2.5. 사망

1541년 후 레 왕조의 장종은 완감, 정검, 정공능(鄭公能), 외세영(賴世榮)을 파견, 서도 청화(타인호아)를 공략해 남부의 광대한 땅을 차지하고, 서도에 왕조를 재건했다.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이 줄줄이 그곳으로 달려가고 영토를 양분하면서 베트남은 남북조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듬해 9월 11일 막당중은 57세로 붕어했다. 손자 막푹하이(헌종)가 친정을 시작했으며 시신은 안릉(安陵)에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혼란 종식의 뜻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레씨 부흥군도 수장이 아닌 황제를 칭했고, 막씨와 레씨 간의 전투도 심화되었으며 결국 그가 세운 막 왕조는 1592년 사실상 멸망하고 중국의 중재로 까오방 지역만 통치하는 지방정권으로 전락했다.

3. 평가

찬탈자이기 때문에 사관은 막 왕조 황제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각박한 평가를 남겼다. 근세 베트남 역사학자 진중김(陳仲金)은 그를 매국노로 평했고, 통일 베트남 학자들의 막당중에 대한 평가 역시 저조하며, 명나라에 굴복했다는 사실은 파렴치하다고 평했다.

하지만 상술했듯 현대에 들어 연구가 활발해지며 그의 업적 또한 확인되었고, 재평가받고 있다.

4. 삽화

파일:막등용.jpg
안남내위도책(安南來威圖冊)에서 묘사된 막태조.

5. 참고 항목

6. 가계도

  • 부황: 소조(昭祖)[11]
  • 모후: 등씨(鄧氏)
    • 형제
      • 형제: 신왕(信王)
      • 형제: 의왕(義王)
    • 자매
      • 장화장공주(莊和長公主)
      • 경염공주(慶艷公主)
      • 수화공주(繡華公主)
    • 황후
      • 완씨(阮氏)
      • 무씨(武氏)
    • 자녀
      • 태종(太宗) - 2대 황제.
      • 홍왕(弘王) - 비정통 황제.
      • 정왕(定王)
      • 강왕(康王)
      • 광왕(廣王)
      • 막인광(莫仁廣)
      • 막대광(莫大廣)
      • 가왕(嘉王)
      • 子 - 실전됨.
      • 子 - 실전됨.
      • 단녕공주(瑞寧公主)
      • 태안공주(泰安公主)
      • 보화공주(寶華公主)
      • 막옥자(莫玉姿)
      • 막홍옥(莫洪玉) - 조졸.
      • 막단숙(莫端肅) - 조졸.
      • 막옥난(莫玉蘭) - 조졸.
      • 양녀(養女) - 소종과 혼인함.

7. 둘러보기(계보)

대월의 역대 황제
공제( 후여) 태조 막등용 태종 막등영


[1] 宜陽 古齋社. [2] 등춘(鄧椿)의 딸이다. [3] 양익제의 동생인 목의왕(穆懿王)의 아들. [4] 찐주이산의 형이다. [5] 정수공(靜修公) 레록(黎祿)의 아들. 태종의 증손자. [6] 쩐까오의 아들. [7] 의식(儀式)이나 행차 때의 의장(儀仗)과 시위(侍衛). [8] 옛날, 중국에서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특별히 황제가 내리던 아홉 가지 은전. [9] 완주의 사실상 초대 군주. 완황의 아버지. [10]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는 말. [11] 이름은 막힛(莫檄, 막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