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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틀라르수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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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itdlarssuaq

키틀라르수아크(?~1875)[1]는 캐나다 이누이트인 개척자이자 샤먼이다. 달리 키흘라르수아크(Qillarsuaq) 혹은 키흘라크(Qillaq)라고도 불린다.

19세기 중엽 약 50명의 배핀 섬 이누이트인들을 주도하여 그린란드 북서부로 이주하였다. 그것이 살인 사건으로 인한 복수를 피해 감행되었다는 점 외의 상세한 사항에 관하여서는 전승에 따라 내용이 크게 변하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아래는 여러 전승을 취합하고 대조하여 현재 가장 정확하다고 알려진 그 상세이다.

1. 생애

그의 생애에 관하여서는 당대에 기록된 것이 전무하며, 오로지 구전 전승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에 관하여서는 배핀 섬 출신으로서 컴벌랜드협만(Cumberland Sound)에 살았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으나, 대개 19세기 초에 태어났을 것으로 본다. 당대 이누이트가 대개 그러하였듯 그가 살던 마을 또한 몇몇 가족으로 구성된 작은 촌락으로서 날씨나 계절에 따라 그 거주지를 옮기는 전형적인 북극 수렵채집 촌락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누이트 촌락마다 한 명의 지도자(즉, 촌장)가 있었고, 그는 샤먼(angakkoq)으로서 존중받는 지도자였다고 한다.

1830년대 초반에 키틀라르수아크는 이키에라핑(Ikieraping)이라는 사람을 살해하게 되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키틀라르수아크의 친우인 우키(Uqi)[2]가 이키에라핑의 형제를 살해하는 일이 있었고, 당시 이누이트 전통에 의하면 살인자는 별다른 경고나 예고 없이 급습하여 죽여도 정당한 살인으로 인정되었으므로, 우키와 키틀라르수아크는 피해자의 형제인 이키에라핑이 복수해올 것을 염려하여 그 또한 죽였다고 한다.[3] 둘은 그들이 이끄는 사람들과 함께 이때 컴벌랜드협만을 벗어나 배핀 섬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키에라핑 형제의 유가족은 그들을 오랫동안 추적하였고, 그 결과 1850년경 키틀라르수아크와 그가 이끄는 집단의 위치가 유가족들에 의해 발견되어 침공받게 된다. 키틀라르수아크는 이를 격퇴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들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리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더 북쪽으로 이주, 약 5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배핀 섬 북쪽의 데번 섬에서 몇 년간 거주하였다.

키틀라르수아크는 1853년 여름에 영국 해군 장교 에드워드 잉글필드(Sir Edward Augustus Inglefield)와 조우하였다. 그는 당대의 탐험가였던 존 프랭클린(Sir John Franklin)이 실종되어 수색 중에 있었으며, 이때 잉글필드와 동행하던 그린란드어 통역사가 키틀라르수아크에게 그린란드 북쪽에 거주하는 이누후이트(Inughuit)[4]인들에 관하여 일러주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대다수의 전승은 그가 모종의 초자연적인 영감을 얻어 그린란드 북부에 거주하는 이누후이트인의 존재와 그 위치를 깨달았으며, 잉글필드와의 조우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전한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1859년 키흘라르수아크의 개척단은 카약을 비롯해 개척에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비축한 뒤 엘즈미어 섬으로의 이주를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바다를 카약이나 개썰매로 건너야 하기도 하거니와 북극 일대의 자연환경이 기본적으로 상당히 험악한 탓에 개척단의 이동에는 수 년이 소요되었으며, 전승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키틀라르수아크가 몇몇 상황에서 샤먼으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여 일종의 유체이탈을 통해 주변 지리를 파악하고 개척단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 과정 중, 약 1861년 내지 1862년쯤 엘즈미어 섬 동쪽의 부속도서인 잉이르사르비크(Ingirsarvik)섬에 이르렀을 때, 이러한 방랑에 회의를 느낀 우키가 키틀라르수아크에게 요청하여 개척단 가운데 절반을 이끌고 데번 섬으로 돌아갔으며, 나머지 절반은 그대로 키틀라르수아크의 지휘 하에 그린란드로의 항해를 속행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아노리토크 일대에 도착했으나 이 시점에서 아노리토크는 버려진 정착촌이었으며, 살아있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개척단은 1863년 이타 일대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이때 만난 사람은 아카타크(Aqattaq)라는 이름으로서 그들을 약 30km 남쪽에 위치한 피토라르피크(Pitoraarfik)라는 이름의 정착촌으로 안내하였다.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 이 일대에는 이누후이트(Inughuit)라 하여 이누이트의 일파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카약의 제조법을 비롯해 이누이트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여러 사냥 및 생존에 필요한 기술들이 실전된 상태로 고립되어 절멸 위기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배핀 섬에서 그러한 기술들을 모두 가져온 카틀라르수아크와 개척단은 크게 환대받았으며, 키틀라르수아크는 이른바 '위대한 자'라 칭송되었다. 이때 이주한 개척단을 아흘라르수이트(Allarsuit)라 하며, 이들은 빠르게 토착민들과 융화하였다.

이로부터 약 7년 후 키틀라르수아크는 향수병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몇몇 전승에서는 향수병은 명목일 뿐 실제로는 그와 동료 두 명이 주술사의 친우인 아바탕우아크(Avatannguaq)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복수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는데, 이렇다 할 근거가 되는 전승이 없어 진상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이다. 1873년 키틀라르수아크와 그를 따르는 21명의 주민이 다시 배핀 섬 방면으로 항해를 시작하였으며, 나머지는 새 정착촌에 만족하여 그대로 눌러앉았다.

키틀라르수아크는 엘즈미어 섬 동쪽을 벗어나기 전에 죽게 되었고, 나머지 이주민들은 남하를 계속하였으나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지 못해 이들 중 대다수가 굶어 죽거나, 살해당하거나, 식인의 희생양이 되었고, 최종적으로 다섯 명만이 살아남아 1875년경 다시 그린란드로 가까스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2. 정확성 및 관련 연구

오랫동안 구전 전승으로만 알려진 사람의 생애인 탓에, 그의 이야기는 상세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는 판본이 여럿 존재한다. 상충하는 이야기가 많으며,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며 어디부터가 누대에 걸쳐 전승의 내용이 변조되거나 새로 창작된 것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다만 이 구전이 기록되기 시작할 시점 가장 이른 전승의 수집은 배핀 섬 북부의 이누이트인들과 현 카나크 지구에 거주하는 그린란드인들로부터 이루어졌다.
키흘라르수아크에 관한 전승은 20세기 여러 북극 탐험가들이 당시의 이주민들과 생존자들 혹은 그 후손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을 기록한 것으로, 가장 중요한 연구 결과는 1980년 프랑스 인류학자 기 메리루슬리에(Guy Mary-Rousselière)에 의해 나왔다.

민족음악학자(Ethnomusicologist)인 Michael Hauser는 이누후이트의 음악과 아흘라르수이트의 이주의 관계에 관하여 연구, 키흘라르수아크가 배핀 섬 서남쪽에 딸린 정착촌 킹아이트(Kinngait) 출신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3. 여담



[1] 달리 키흘라르수아크(Qillarsuaq), 키흘라크(Qillaq) 등으로도 전해진다. 본 문서에서는 캐나다 백과사전(The Canadian Encyclopedia)의 표제어를 준용하여 '키틀라르수아크'로 표기한다. [2] 달리 오케(Oqe)라고도 알려졌다. [3] 여기서 우키가 사건의 원인이었다는 전승이 있으나, 상세한 정황증거로 볼 만한 구전이 없기 때문에 이에 관한 진실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4] 북극 이누이트(Polar Inuit)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