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9 15:15:02

축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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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축구의 기원2. 현재의 축구 (Association Football)
2.1. 종주국2.2. 축구의 탄생2.3. 규칙
3. 한국 축구의 역사

1. 축구의 기원

축구와 비슷한 놀이 문화는 세계 여러 곳에서 고대부터 발달하였다. 심지어는 아즈텍 마야 같은 고립된 문명에서도 이러한 놀이 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발로 무언가를 차면서 논다는 것은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14~16세기에 피렌체에서 하던 공놀이가 현대 축구의 모태라고 주장하며 지금도 축구를 '공차기'라는 뜻의 칼초(Calcio)라고 부르고 있다. 꽤 인기가 있었는지 중세 시대 문헌을 보면 금지령이 왕왕 보인다. 이 축구는 현대까지 명맥을 이어왔는데 지금은 현대 축구와 구분을 위하여 칼초 피오렌티노(Calcio Fiorentino) 내지는 칼초 스토리코(Calcio Storico)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심지어 발상지인 피렌체에서 대회까지 한다. 다만 이걸 진짜 축구의 모태로 볼 지는 의문인 것이 공 하나 던져주고 장정 수십명이 패싸움을 벌이는 희한한 경기 양상은 현대 축구의 모습과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

고대 로마 제국 시절에도 공을 발로 차는 스포츠가 있었다. 일종의 군사 훈련이었다는 듯. 하르파스툼이라고 불렸다. #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전통 놀이인 추쥐( 蹴鞠)가 기원이라고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FIFA에서도 중국 축협의 의견을 인정하기도 했다. FIFA는 이 기사에서 ‘중국에서는 기원전 202년에 세워진 한(漢) 왕조 때 오늘날의 축구와 거의 비슷한 형태의 공차기를 즐겼던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1]

미국 고고학자이자 스포츠 칼럼니스트인 존 폭스는 " 중국 축구의 원조라고 부르는 추쥐는 한국 일본에서 축국, 케마리(또는 슈키쿠)가[2] 탄생하는 정도의 영향을 줬을 뿐, 동아시아를 넘어선 영향을 준 바는 없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FIFA는 중국을 기원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영국은 이것이 FIFA의 상업적 고려(립 서비스)라고 주장하고 있다.

종합하면 가장 오래된 형태의 축구로 인정받는 건 중국의 추쥐(축국)이지만, 이것이 전세계로 퍼져 현대 축구의 모태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 현재의 축구 (Association Football)

2.1. 종주국

이렇듯 "어느 나라가 축구의 기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어느 나라가 현대 축구의 형태를 완성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잉글랜드라는 데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1863년 프리메이슨 테이번이라는[3] 선술집에 런던의 풋볼 클럽과 학교 풋볼부들의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가졌고, 회의 결과 축구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 약칭 FA가 탄생하였다. 이는 세계 최초의 축구협회였고, 그 뒤에도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아닌 그냥 ' 축구협회'라는 명칭을 계속 쓰며 자신들이 현대 축구의 발상지임을 계속해서 어필하고 있다.

또한 잉글랜드 축구가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게끔 축구의 규칙을 제정하고, 체계적으로 행정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세계 각국에 축구를 현대적인 스포츠로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실제로 세계에 축구를 퍼뜨린 것은 잉글랜드인들이었으며, AC 밀란, 레알 마드리드 CF나 민족주의로 유명한 아틀레틱 빌바오도 그 시초엔 잉글랜드인들이 끼어 있었을 정도다. 그리고 저 셋을 비롯해 영어권이 아니지만 클럽 이름에 영어가 포함된 경우가 많다는 점을 봐도 잉글랜드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레알 마드리드도 초창기엔 영어식 표기인 '마드리드 FC'였다. AC 밀란도 Football이라고 표기를 안 했을 뿐이지 Associazione Calcio라는 게 바로 영국의 Association에서 정한 규칙으로 경기하는 공차기라는 의미다. 그리고 클럽 이름부터가 밀라노가 아닌 영어식 '밀란(Milan)'으로 표기했으니 말 다했다.

이 때문에 아직도 영국이 축구계에서 가지는 특권은 상당하다. FIFA의 1국가 1축협 1국대 원칙을 시원하게 무시하고, 영국이란 하나의 나라에 4개의 축협과 4개의 국가대표팀을 운영하고 있으며[4], 축구의 규칙 제정과 개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제축구평의회, 일명 IFAB 의원 8명 중 무려 4명이 상기한 영국 홈 네이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이렇게 4개의 구성국 출신이다. 나머지 4명은 FIFA에서 선출한다. IFAB의 규칙 제정과 개정은 8명의 의원 중 6명 이상의 의원이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IFAB 내에서 영국 구성국들이 똘똘 뭉치면 FIFA로선 규칙 제정과 개정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초기 FIFA 월드컵만 해도 영국에선 "그런 질 낮은 대회는 안 나감!"이라며 무시했고,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때 '영국의 홈 네이션 4개 팀을 전부 인정하고 자기들끼리만 예선을 치러서 2개 팀을 본선에 올려준다'는 굴욕적인 특혜를 주고서야 영국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5]

2.2. 축구의 탄생

FA가 결성되기 이전의 영국 풋볼은 지역별로 제각각 다른 규칙으로 경기하고 있었다. 184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이튼 칼리지, 해로우 스쿨, 럭비 스쿨, 윈체스터 및 슈루즈베리 스쿨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케임브리지 규칙이 작성되어졌다. 하지만 이 규칙은 널리 채택되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1850년대에 많은 클럽들이 학교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거나 대학교들은 다양한 형태의 풋볼을 하는 영어권 국가들을 통해 형성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6][7][8]

이후 헐(Hull)시티의 법무관(현재 변호사)였던 초대 FA 회장이 되는 에베니저 콥 몰리(Ebenezer Cobb Morley)가 통합 풋볼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 운영 기구 창설과 이를 위한 회의를 제안하는 글을 신문에 실었고, 1863년에 런던 프리메이슨 테이번 선술집에 회의 참가자들을 소집한 그 자리에서 FA를 결성하고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1863년의 회의는 풋볼 클럽들을 통합하기는커녕 럭비 축구를 완벽하게 갈라서게 만들었다. 공을 가진 선수를 붙잡거나(홀딩), 저지하거나(태클), 정강이를 걷어차는 이른바 해킹(Hacking)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섯 번의 회의를 거쳤음에도 구성원들의 전원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FA가 결국 해킹을 금지하는 쪽으로 규칙을 명문화하자 해킹을 찬성하던 당시 대다수의 클럽들은 FA를 탈퇴해버리고[9], FA는 런던 주변 11개 클럽만이 참여한 단촐한 모양으로 발족하게 된다. 해킹을 찬성하는 쪽이 주로 퍼블릭 스쿨 출신의 상류층이었고, 탈퇴하면서 해킹이 없는 풋볼은 천박하고, 계집애 같은 풋볼(Sissyball)이다라며 맹비난하며 떠났기 때문에 이후로 축구는 지금까지 쭉 노동자 계층, 즉 워킹 클래스(Working Class)를 위한 서민 스포츠로서 성격이 잡히게 된다.

FA가 규칙에서 해킹을 금지하면서 공을 잡고 골문을 향해 달릴 수 있다는 규정인 '핸들링'도 같이 세트 메뉴로 빠지게 된다. 해킹이 불가능하다면 공을 품에 껴안고 뛰는 선수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경기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는 핸들링의 유무가 럭비와 축구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보이겠지만 당시엔 해킹이 신사도와 관련되어 있었기에 훨씬 민감한 이슈였다. 이후 FA 규칙대로 진행되는, '공을 들고 뛸 수 없고 사람을 때릴 수 없는 풋볼'을 Association Football(협회식 축구)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것을 하는 사람들을 Association에서 따와 'Assoccer'라 부르게 되었다. 앞의 As를 더 빼서 더 짧게 'Soccer'로 불리게 된다.

단, 이때 FA가 제정한 규칙은 해킹과 핸들링만 금지했다뿐이지 럭비처럼 오프사이드 룰이 매우 강해서 전진 패스가 아예 불가능했으며, 골대가 공중으로 한없이 길고, 공중 볼을 손으로 캐치하면 프리킥을 주는 등[10] 축구라기보다는 여전히 풋볼에 가까운 면이 있었다. 기존의 풋볼과는 다른, 축구만의 정체성은 오랜 기간 동안의 점진적인 규칙 개정을 통해서 갖추어졌다. 규칙 개정에 대한 내용은 규칙 문단 참고.

한편 FA의 가맹 클럽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1871년에는 최초의 축구 대회인 ' FA컵'이 탄생하며 축구는 근대 스포츠로서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1886년에는 잉글랜드의 맨체스터에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의 축협이 참여한 가운데 국제축구평의회(IFAB)가 탄생하여 세계 최초의 국제 축구 규칙이 만들어졌다. 1888년에는 잉글랜드에서 최초의 프로축구 리그인 잉글리시 풋볼 리그가 탄생하였다.

영국인들이 즐겨하던 축구는 마침 대영 제국의 전성기와 맞물려 급속도로 전세계에 보급되기 시작한다. 영국의 상인, 군인, 선교사, 유학생들은 자신이 가는 나라마다 축구를 보급했고, 20세기 초가 되면 전세계에서 축구를 하지 않는 나라를 찾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후 1904년, 프랑스에서 로베르 게랭에 의해 FIFA가 설립되면서 축구는 국제적인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고 쥘 리메의 주도로 1930년 우루과이에서 제1회 FIFA 월드컵이 열리게 된다.

위에 서술한 대로 세계 최초 프로 리그가 생긴 잉글랜드에서도 가난한 노동자들의 대회로 무시당하고 심지어 FA컵도 초창기에 엄청 무시당했던 역사가 있다. 참가 팀인 대학 팀이 조정 경기를 보러 간다고 기권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러다보니 초기 축구선수 수입은 엄청 적었는데 1900년대 초반 평균 월급은 5파운드 수준이었다. 헐값이야 아니었지만 거액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보통 직장인 월급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1920년대에는 선수 평균 월급이 100파운드 이상으로 확 뛰어오르기 시작했고, 그 즈음 스페인, 이탈리아에도 차례로 프로축구 리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축구와 축구 리그 붐은 서서히 더 퍼져갔고, 월드컵의 탄생 및 여러 우여곡절로 축구의 인기는 세계적으로 더 퍼지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피폐해진 각국에서 전쟁의 아픔과 전쟁의 욕구를 스포츠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의견들이 있었고,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된 1950년대에 범유럽을 아우르는 축구 대회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의견이 많아지면서 1954년엔 UEFA가 출범하고, 다음 해인 1955년엔 1992년에 UEFA 챔피언스 리그로 명칭을 바꾸는 유러피언 컵이 출범하게 된다. 이후 1960년엔 1994년에 UEFA 컵위너스컵으로 이름을 바꾼 뒤 1999년에 폐지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이, 1971년엔 2009년 UEFA 유로파 리그로 명칭을 바꾼 UEFA컵이 출범한다.

1960년대부터 컬러 TV의 대중화가 시작되고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대회부터 최초의 컬러 TV 방송 중계가 이루어지면서 FIFA를 비롯한 축구 연맹과 각국의 리그는 중계권료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축구는 매우 상업성이 높은 스포츠로 간주되었고 수많은 자본가들이 축구 대회나 리그, 구단, 선수 등 축구에 다양한 방식으로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빅 리그, 빅 클럽의 존재가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2.3. 규칙

현대 축구의 형태 정립과 함께 여러 가지 규칙이 정비·보완되면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축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게임성에 영향을 줄 만한 중대한 규칙 변경들 위주로 연도순으로 짧게 정리하면 축구가 어떻게 좌충우돌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갖추게 됐는지 관찰할 수 있다.
  • 1863년(FA 창설과 그로 인한 최초의 축구 규칙):
    • 공을 갖고 있는 선수보다 그 어떤 선수도 앞에 있어선 안 된다.(전진 패스 금지)[11]
    • 해킹(몸통으로 박치기해 넘어뜨리거나(태클), 몸을 붙잡아 저지하거나(홀딩), 정강이를 차는 등의 행위)과 핸들링(손으로 공을 만지거나 감싸는 행위)을 금지한다.
    • 'Fair Catch'(공중볼을 손으로 잡는 행위) 성공시 프리킥 기회를 주었다.
    • 골대에 크로스바가 없어 높이가 안 정해졌으며, 긴 장대 두 개가 평행한 채로 럭비 골대처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 1866년:
    • 오프사이드 적용 기준선이 상대 선수 세 명 앞까지로 바뀌었다. (Three-Player Rule, 세 선수 규칙)
    • 'Fair Catch'(공중볼을 손으로 놓치지 않고 캐치하는 것)를 해도 더 이상 프리킥을 주지 않도록 규칙이 개정되었다.
    • 크로스바가 처음으로 생겨서 드디어 골대의 높이가 정해졌다. 단 이때의 크로스바는 쇠막대가 아니라 가죽띠였다.
  • 1867년: 골 킥이 도입되었다. 단, 공격 측이든 수비 측이든 누가 골라인 너머로 차든지 골 킥을 주었다.
  • 1870년: 'Fair Catch' 규칙을 폐지하고 모든 인플레이 상황에서의 핸들링이 금지되었다. 그 결과 아무도 슛을 막을 수 없어서 골이 엄청 많이 나왔다.
  • 1871년: 그래서 유일하게 'Fair Catch'가 가능한 특수 포지션을 고안하고 이를 ' 골키퍼'라 이름지었다. 이때의 골키퍼는 '골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라면 경기장 어디에서든지 공을 잡을 수 있었다.
  • 1874년: 오프사이드와 그 외 각종 파울에도 간접 프리킥을 주기 시작했다.
  • 1881년: 주심이 경기의 심판을 보기 시작했다.
  • 1887년: 골키퍼가 상대편 하프라인에서는 공을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우리편 하프라인 안에서는 잡을 수 있었다.
  • 1891년: 페널티킥이 도입되었다. 그에 맞춰 골 에어리어, 페널티 에어리어, 센터 서클 등의 표식이 등장했다.
  • 1897년: 90분의 경기 시간과 각 팀당 11명의 경기 인원이 처음으로 확정되었다.
  • 1907년: 이전까지는 모든 구역에서 오프사이드가 적용될 수 있었던 것에서 '본인 진영(Own Half)'에서는[12] 오프사이드가 적용되지 않도록 개정됐다. (본인 진영 오프사이드 해제)
  • 1912년: 골키퍼는 이제 현대 축구처럼 페널티 에어리에 안에서만 공을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 1925년: 오프사이드 라인이 수비 팀 골라인에서 세 번째로 가까운 수비수가 아닌 두 번째 수비수 앞으로 완화되어서 오프사이드 적용에 필요한 인원 수가 지금과 거의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다.[13] (Two-Player Rule, 두 선수 규칙)
  • 1958년: 선수 교체가 도입되어서 부상당한 선수에 한해 교체가 가능해졌다. 그 전까지는 다치면 그냥 경기 인원이 줄어들었다.
  • 1970년: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도입되었다. 영국의 심판 조지 케네디 애스턴의 아이디어로 1970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도입되었는데 아이디어는 신호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그 전까지는 심판이 직접 이유를 설명하면서 경고나 퇴장을 명령했었다.
  • 1990년: 오프사이드 위치 판정이 해당 공격수가 상대 두 번째 선수를 넘지만 않는다면 온사이드 위치로 판정하도록 개정되었다. (오프사이드 동일선상 허용)
  • 1992년: 수비수의 백패스를 페널티 에어리어 내의 골키퍼가 손으로 받을 수 없도록 바뀌었다.[14] 이 시기가 한창 아리고 사키 감독의 압박축구가 유행하던 때라 수비수가 압박만 받으면 골키퍼에게 공을 줘서 게임이 루즈해졌기 때문에 득점도 잘 안 났기 때문이다.
  • 1995년: 오프사이드 적용 대상이 기존의 '이득을 보려는 대상'에서 '이득을 본 대상'으로 완화되었다.
  • 2005년: 오프사이드 적용 대상을 '실제로 플레이에 개입한 공격수'만 적용을 받도록 규칙을 완화했다. 적용 기준도 1990년의 단순한 동일선상에서 더 엄밀해지면서, 골라인에서 가장 가까운 득점 가능한 신체 부위(손, 팔 제외)를 기준점으로 잡고, 대상 선수들의 각 기준점 중 어느 쪽이 더 골라인으로부터 가까이 있는지 여부로 판단하도록 바뀌었다.
  • 2013년: 2013-2014 시즌 프리미어리그를 시작으로 테니스의 호크아이 시스템을 이용한 골라인 판독기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도입되었고 전세계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 2022년: 2005년에 더 정밀하게 측정하도록 바뀐 오프사이드 룰을 육안으로는 초정밀하게 확인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부터 반자동 오프사이드 판독 기술(Semi-Automated Offside Technology, SAOT)이 도입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빠르고 정확하게 오프사이드를 판정할 수 있게 되었고, 판정 시비/논란도 많이 사라졌다.

3. 한국 축구의 역사

고대부터 공을 차고 노는 구기 스포츠가 전승되어 왔으며 축국이라고 했다. 삼국유사에도 나온다.[16] 이는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들여온 것인데 이걸 근거로 중국은 아이들에게 축구의 종주국은 중국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축구와 축국이 비슷할 순 있으나,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있었는지, 또 어떤 규칙이 있었는지 현대에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종주국이라고 부르긴 매우 힘들다.

구한말까지도 축국이 전승되어 오다가 개화기에 들어 현대식 축구가 들어오며, 기존의 축국을 대체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883년에 인천 항구로 들어온 영국의 해군들이 축구 경기를 했던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2003년 120주년 기념행사로 인천에서 당시의 해군복 차림 영국인들과 한복 차림의 한국인들이 축구 대회 이벤트를 하기도 했었다. 당시 축국은 높이 제한이 없는 장대에 망을 쳐놓고, 그 곳에 공을 넣으면 점수를 얻는 것이 규칙이었기에 막 축구가 들어왔을 때에도 축국을 하는 것마냥 뻥뻥 높이 차는 것이 인기였다.[17] 아무튼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축구란 서양 사람들이 하는 축국의 취급을 받았기에 축구도 별 거부감 없이 빠르게 정착할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축구는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적이 있었다. 특히, 일본 팀들을 상대로 격파하는 것을 본 한국인들은 희열감을 느끼고 축구장에 모여들어 독립 정신을 품었다. 일본은 1993년 J리그가 창설되기 전까지 한국에게 역대 성적에서 크게 뒤쳐졌었다.
[1] 다만 피파의 가장 큰 물주가 중국이 된 지 오래고 중국 시장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2] 둘 다 축국의 일본어 발음으로 각각 훈독과 음독으로 읽은 것이다. [3] 현재는 코넛 룸이라는 호텔이다. [4] 축구협회, 스코틀랜드 축구협회, 웨일스 축구협회, 북아일랜드 축구협회 [5] 그러나 그 1950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세미프로급 팀인 미국에 충격패하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모두 시원찮은 성적을 보인 탓에 1958년 스웨덴 월드컵부터는 없던 일로 하고 홈 네이션 모두 각각 다른 예선 조에서 평범하게 예선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그 특혜를 철폐한 58년 월드컵에 홈 네이션 4개국이 전부 본선 진출한 덕분에 오히려 홈 네이션에 티켓을 늘려준 꼴이 되었다. [6] 특히 케임브리지 규칙은 협회 축구(Association football)를 포함한 후속 풋볼 코드들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7] 참고로 케임브리지 규칙이 제정되기 3년 전인 1845년에는 럭비 스쿨의 세 학생에 의해 럭비 풋볼 규칙이 제정되어졌다. 럭비 풋볼은 1850년대와 60년대까지 퍼블릭 스쿨을 중심으로 잉글랜드 전역에서 유행했다. [8] 공교롭게도 풋볼 계열 최초의 규칙인 럭비 풋볼의 제정년도가 현대 야구 최초의 규칙이랄 수 있는 알렉산더 카트라이트 룰의 제정년도와 같은 1845년도다. [9] 해킹 금지를 반대했던 럭비 풋볼을 따르던 풋볼 클럽들은 1871년 럭비 풋볼 유니온을 결성하였다. [10] 이는 럭비나 미식축구를 포함한 다른 풋볼에는 Fair Catch나 그와 비슷한 룰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11] 선수가 공을 차는 순간에, 공을 찬 위치와 공을 받을 같은 팀 선수의 위치 중 어느 쪽이 상대팀 골라인에 더 가까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오프사이드 여부를 판정했다. 공을 기준으로 같은 팀 골라인 방향(공 뒤)에 있으면 온사이드, 공 앞 상대 팀 골라인 방향(공 앞)에 있으면 오프사이드다. 즉, 이전까지는 럭비처럼 그 어떤 공격수도 공을 가진 선수보다 앞에 있을 수 없었다. [12] 경기장 중앙에 그어진 하프웨이 라인으로 나눠진 두 구역 중 본인 팀 골대가 있는 구역 [13] 여기서 '수비수'란, 골키퍼 및 수비팀 공격수 등을 포함한, 수비팀 선수 전원을 의미한다. [14] 단, 헤딩이나 트래핑은 여전히 손으로 받을 수 있었다. 발로 주는 패스만 못 받는 것. [15] 일명 카라바오 컵 [16] 김춘추 김유신의 집에 가서 공놀이를 하다가 김유신 김춘추의 옷고름을 일부러 발로 밟아 찢었다는 기록. [17] 이것은 흡사 1866년 크로스바가 도입되기 전 영국의 축구 경기 양상과 비슷하다. 크로스바가 도입되기 전까진 골대에 높이 제한이 없었기에 당연하지만 뻥뻥 높이 차는 것이 대세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