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12:30:54

최준석/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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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3. 두산 베어스 시절
3.1. 2009 시즌3.2. 2010 시즌3.3. 2011 시즌3.4. 2012 시즌3.5. 2013 시즌
4.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5. NC 다이노스 시절6. 2018/19 질롱 코리아 시절

1. 개요

최준석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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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2차 6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 입단시 포지션은 포수였다.

이 때는 신인이라 2002년부터 2004년까지 12경기에 포수로 출장했다. 그리고 절친 이대호와 그의 형 이차호와 같이 동래 모처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더블사이즈 침대 하나에 이대호와 같이 누워서 잤다(…). 침대가 뭔 죄래? 침대: 아니 이 녀석들이?[1][2]

믿기 힘들겠지만, 입단 당시엔 100m를 12초대에 끊는 호타준족형의 포수였다고 한다. 그러다 위에서 언급한 이대호와 같이 살던 시기에 거의 매일 야식을 같이 먹으며 살이 쪄서 주루 능력은 많이 줄게 되었다. 2005년엔 그 당시 주전 포수 최기문의 병풍사건 연루와 부상 등으로 출전 기회가 늘었지만, 후배 강민호의 수비력이 더 좋았던데다 최준석의 타격 능력을 살리고자 한 코칭스태프의 판단으로 인해 포수가 아닌 지명타자로 주로 출장했다. 그리고 이 해 526 대첩의 영웅으로, 9회초 11:11 동점 상황에서 신윤호에게 결승 2점 홈런을 뽑아낸 적이 있다. 최종적으로는 8홈런 42타점으로 거포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2006년부터 이대호의 포지션이 1루로 고정되고, 펠릭스 호세가 돌아와 지명타자를 맡으며 최준석의 자리가 없어진다. 당시 강병철 감독은 어떻게든 최준석을 써보려고 우익수로 출전시키는 무리수도 감행했으나 결과는 안좋았고 결국...

3. 두산 베어스 시절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svg 두산 베어스 선수시절
▲ 최준석 두산 시절 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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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스프링캠프에서. 왼쪽부터 안경현, 최준석, 장원진.

2006년 5월 트레이드를 통해 김진수와 함께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 대신 최경환, 이승준이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였다.

기존 1루수 장원진의 노쇠화가 보이는 상황에서 1루수 및 지명타자로 본격적으로 기회를 받기 시작했다. 고영민에 밀려 1루에서 자주 출전하던 안경현과 나누어 출전했으며[3], 2006년에는 이적 이후 .264 .343 .404의 슬래시 라인과 10개의 홈런으로 가능성[4]을 보여줬고, 2007년에는 .244의 낮은 타율을 기록했지만 121경기에서 16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장타력 하나는 확실함을 보여줬다.

그러나 2008년에는 주전 1루수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225 .318. 361의 슬래시라인에 홈런도 67경기 6홈런에 그치며 대타요원으로 밀려났다. 이 해 두산 1루자리는 팀 타선의 최대 구멍이나 다름 없었던 상황이었는데[5], 최준석의 부진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봐도 될 상황.

3.1. 20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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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망의 2009 시즌, 살을 빼고 포텐셜이 폭발하여, 정규 타석을 채우면서도 컨택도 3할을 훌쩍 넘겨버리는 매우 우수한 타자가 되어버렸다. 물론 팀메이트인 김현수 김동주가 워낙 괴물이라서 빛이 바래보이기는 하지만, 딩시 두산 타선은 홍성흔의 이적과 고영민의 부진, 이종욱의 부상 등으로 구멍이 뻥뻥 뚫린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상무에서 돌아온 손시헌,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준 이원석과 함께 공백을 잘 메워줬으니 두산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활약상이었다.

2009 시즌은 타율 0.302, 홈런 17, 타점 94(리그 6위), OPS 0.860의 뛰어난 성적을 기록,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특히 고향 대구에서 엄청나게 강했다. 29타수 20안타(타율 0.690), 홈런 4, 삼진 0, 출루율 0.722, 장타율 1.172, OPS 1.895. 청주본즈 안 부러울 성적.

3.2. 2010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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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우수한 활약을 펼치며 팀의 고정 1루수와 클린업 트리오로 자리잡았다.

9월 5일 생애 첫 끝내기 홈런을 쳤다.

최종 성적 타율 0.321, 출루율 0.397, 장타율 0.542 (리그 4위) 22홈런 82타점. wRC+는 149.6로 4위, OPS도 리그 4위

2010년 한국프로야구 1루수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수상 소감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 영광을 돌린다." 라고 감동스러운 코멘트를 남겼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4타수 4안타 1볼넷 2타점 1득점, 타율 .286, 장타율 .357, 출루율 .333를 기록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10타수 4안타 3볼넷 3타점 3득점, 타율&장타율 .400, 출루율 .538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최준석은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24타수 8안타 4볼넷 5타점 4득점, 타율 .333, 장타율 .375, 출루율 .429를 기록했다.

3.3. 2011 시즌

2011년 4월 8일 KIA전에서 생애 첫 그랜드슬램을 기록하였다.

2011년에는 타율 .271 15홈런 75타점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지만 팀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또 신체조건으로 인한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2루타 3위에 올랐다.

3.4.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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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8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손승락을 상대로 결승 3루타를 기록, 김진욱 감독에게 첫 승을 선물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김진욱 감독의 신임을 받았는데도 삽을 계속 푸면서 두산팬들의 욕을 들어 먹었고, 결국 2012년에는 기대와는 달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다. 김동주가 부상으로 골골대면서 중심 타선이 빈약해졌고 김현수가 어떻게든 분투했지만 3할 언저리를 왔다갔다하며 역시 부진했던 탓이었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년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1, 2차전에서는 출장하지 못했으나 10월 11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3차전 스코어 1:0으로 팀이 앞선 1회초 2사 1루 첫 타석에서 롯데 선발 투수 사도스키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쳐내며 팀의 스코어 7:2 승리에 공헌했다.

하지만 다음 타석부터는 안타를 쳐내지 못하면서 준플레이오프에서 3, 4차전에 선발 지명타자 겸 5번타자로 출장하여 6타수 1안타 1홈런 2타점 1득점 2볼넷, 타율 .167, 장타율 .667, 출루율 .375를 기록했고 팀은 1승 3패로 탈락했다.

3.5. 2013 시즌

군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아래에서도 언급할 무릎 수술 문제로 면제를 받았다. 문제는 수비위치인데, 1루에 붙박이로 들어가려고 해도 수비 잘하는 선수를 좋아하는 감독 특성상 오재원이나 김현수에게 밀리며, 지명타자 자리에는 홍성흔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지라 쉽지 않다.

부상이 예상외로 빨리 회복되었는지 시즌 초부터 1군에서 출장하기 시작했다. 4월엔 조금 부진했지만 5월 들어 방망이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FA를 앞둔 상황이라 그런지 3할대의 타율에 홈런도 쳐주며 쏠쏠히 활약하고 있지만, 좌투 선발 상대가 아닌한 거의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 상태라면 FA 선언 후 타팀으로 떠나지 않을까 팬들은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8-9월에는 체력 저하 때문인지 타격감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시즌 타율은 .270 을 턱걸이했다. 하지만...

3.5.1. 포스트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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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2013 시즌 두산 베어스 가을야구의 영웅. 만일 두산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면, 여지없는 MVP였을 것이다.두산이 어떻게든 잡아놨을수도 있었다.

3.5.2. FA 1기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으며 11월 16일까지의 두산과의 우선 협상에 실패하여 손시헌, 이종욱과 함께 시장에 나왔다.

다른 선수들보다 좀 시간이 걸리기는 하였지만 결국 4년 35억원이라는 금액으로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하였다. 기사 이로서 8년 만에 친정 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최준석이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로 복귀하게 되면서 미국 진출을 추진하고 있는 윤석민을 제외하고 2013 스토브 리그 FA 시장이 폐장했다.

많은 두산 팬들이 최준석의 이적을 아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워했다. 손시헌, 이종욱 NC 다이노스로 이적해버리는 바람에 규정상 보상선수를 얻을 수 없었던 것에 비해 최준석은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한 덕분에 보상선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루 플레이나 수비가 안되는 지명타자를 35억원이나 주고 영입했다는 점에서 불안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관리 실패로 인해 체중이 점점 불어나서 고질적인 무릎부상을 안고 있다는 점이 염려스런 부분이다. 최준석이 두산으로 트레이드되기 전이었던 2005년 말 이대호가 체중 감량을 목표로 통도사로 들어갔을 때 일각에서 '최준석은 왜 안 가냐'라고 반응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롯데 구단이나 감독은 최준석 영입으로 인한 우산효과를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기존의 1루수인 박종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굴욕인 것이, 누적 스탯을 보고 따질 것이 아니라 출루율을 비교하면 최준석은 커리어 .351, 13시즌 .376을 기록했다. 박종윤은 커리어 .294, 13시즌 .298로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NC의 대졸신인 권희동에 이어 뒤에서 두 번째이다. 거포라고는 불릴 수 없지만 대타로서는 확실한 일발장타력을 갖춘 박종윤이 1루수로는 노답이라고 평가되는 이유가 선구안임을 감안하면 둘의 타격은 레벨이 다르다. 한편 1루수, 좌익수, 지명타자 자리에 구멍이 뻥뻥 뚫린 롯데의 상황상 지명타자 자리 고정이 큰 문제는 아니므로 수비능력 또한 무조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 최준석의 통산 스탯이 거포라고 하기에 부족한 것은 최준석이 파워툴을 갖추기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늘 부상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건강한 최준석이 잠실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거포임을 부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결론적으로 최준석 영입이 상당히 비판받는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체중관리와 부상이다. 분명히 건강하면 팀에 도움이 될 선수이지만 부상 위험이 정말로 큰 선수포스트시즌 반짝 성적FA시장의 과열로 인해 너무 비싸게 샀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어야 할 것이다.

아파도 경기에 나올 수만 있으면 타자로서의 생산력은 박종윤보다 나았고 FA 계약 선수 중에 이대형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박종윤이 2012년과 2013년에 주전으로 보여준 모습을 감안할 때 최준석이 다이어트로 모범 FA가 되는 것이 박종윤의 선구안 개안보다 현실적이었다.

두산 베어스는 최준석의 보상선수로 투수 김수완을 지명하였다.그리고 세 선수의 공백이 예상치 못한 추락이 있었으나 그 다음의 나비효과가 올라오는 줄은 누가 알았는가.

4.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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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준석 롯데 2기 시절 응원가

4.1.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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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에는 연이은 부진으로 35억은 오버페이라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시즌 중반 이후 타격감이 살아나며 준수한 활약을 보이자 이전의 비난은 상당히 수그러들었다. 시즌 후반들어 페이스가 떨어지는 바람에 시즌 종료 후의 성적은 극심한 타고투저였음을 감안하면 조금 아쉬울 수도 있지만 타율 0.286, 23홈런, 90타점으로 꽤 괜찮은 편. 4년간 35억이라는 가격에 관해서도 괜찮게 나온 시즌 성적과 더불어 계속되는 FA시장의 과열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 가격이면 납득할 수 있다는 식의 재평가도 이뤄지는 중. 그리고 도루 쿠폰도 채웠다

4.2.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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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성적 타출장 0.306 / 0.428 / 0.529, OPS 0.957, wrc+ 148.0을 기록하며 2010년 시즌 이후 최고의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유력 수상 후보였으나 기자단들의 석연치 못한 투표로 이승엽에게 밀렸다.

4.3.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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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활약을 했던 작년과는 다르게 조금 부진했다. 하지만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황재균, 강민호에 이어 팀 내 최다 홈런 3위를 기록했다.

4.4.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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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에는 이대호에 밀려 일명 "짭돼"라고 불리는 굴욕도 맛봤지만 시즌 후반 진격의 자이언츠를 이끈 선봉장으로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기여했다.

4.5. 총평

4년간 기록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506 1612 465 56 1 87 351 224 302 413 69 1 .288 .400 .486 .886
이대호의 해외 진출, 홍성흔의 두산 복귀로 인한 공백으로 완전히 구멍이 나버린 롯데 타선에서 소금같은 활약을 하였다. 풀타임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4년간 누적 WAR이 6.98인데[6], 누적 승리 확률 기여도는 무려 11.63이다. 병살도 많이 치긴 했으나 찬스 상황마다 승리에 보탬이 되는 영양가 있는 한방을 날리며 4번 타자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했다. 4년간 35억이라는 돈값은 멋지게 해낸 시즌들이었지만, 해가 갈수록 기량의 하향 곡선을 보여줘 FA 재계약에는 회의적인 시선을 받았다. 이런 면에서는 두산이 안 잡은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재계약에는 실패하긴 했지만 이대호가 복귀하기 전에는 팀의 4번타자로서는 희소성이 있었지만 복귀 후 안 그래도 이대호 최준석 강민호 박헌도 등 느린 타자가 많아져 효율적 야구 실패의 영향이 크기도 했다. 그래도 롯데팬 입장에서는 앞선 3년간의 활약은 매우 고마워하는 듯 하다.

5. NC 다이노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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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준석 NC 시절 응원가

5.1.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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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감독 덕에 새로운 팀에서 1년의 기회를 부여 받았지만 결국 팀을 만족시킬만한 타격을 보여주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방출되면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 자신은 여전히 현역 연장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이후 "베테랑의 가치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가 속상하다"며 인터뷰를 했는데, 딱히 최준석이 계속해서 안고 가야 할 베테랑도 아닐 뿐더러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다수 팬들은 최준석의 발언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체중 감량을 하겠다던 의지도 시즌이 지나갈 수록 점점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지라 진정성의 부분에서도 많은 의문을 남겼다. 본인은 자신을 포함한 베테랑들이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등을 떠밀린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최준석은 수비, 주루는 안되고 하나 남은 대타 롤마저 수행할 실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방출당한 것이다. 이승엽이나 임창용 같이 실력만 되면 40이 될 때까지 팀의 중심으로 남을 수 있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NC는 그동안 이호준, 손민한, 이종욱, 손시헌 등 실력 있는 베테랑에게는 충분히 기회를 주었다. 물론 그들 역시 자신들의 몫을 다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반면 최준석은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한 발언을 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이미지만 추락시켰다. 해당 시즌의 실력을 감안한다면 불러주는 KBO리그의 구단은 없다.

6. 2018/19 질롱 코리아 시절


최준석 본인도 현역 의지는 있지만 불러줄 곳이 없음을 자각했는지 호주에 있는 질롱 코리아에 연락하여 입단했다. 또한 플레잉코치로 뛰게 되며[7]참고로 우동균, 허건엽도 함께 입단했다.

2018년 11월 30일 멜버른 에이시스와의 경기에서 첫 출전하여 9회초 초구에 3루 땅볼을 쳤다.

위 문단에서 말한 강한 의지와는 달리 여전히 체중 관리가 안 된 몸이었다. 살이 더 쪘다. 호주 포수가 이딴 몸으로도 야구를 하는구나 싶은 표정으로 배를 쳐다봤다

최종 성적은 타율 .243(37타수 9안타), 6타점, 5볼넷 9삼진, 출루율 .333, 장타율 0.270, OPS 0.604. 2주차부터 합류하기는 했지만 선발 출전 경기는 적었고 주로 대타로 기용되었다. 사실상 선수로서의 역할보다는 정식 코치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한국 프로 야구 선배로서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듯. 그런 점을 감안해도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홈런은 하나도 치지 못했고 장타도 2루타 하나에 그치며 출루율보다 장타율이 낮았다.

귀국 후 본인은 여전히 KBO 복귀를 희망하고 있지만 여론의 반응은 싸늘함 그 자체다. KBO 구단 그 어디에서도 2019 시즌에 최준석을 불러주지 않아 은퇴를 하던가 질롱 레전드가 되던가 하는 선택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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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건 이 짤 하나뿐

'유튜버 데뷔' 최준석, "팬들이 원한다면 X예스 먹방도 OK!" 2019년 4월 29일 먹방 유튜버로 데뷔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유튜버로 데뷔했으며 야구선수는 사실상 은퇴하고 말았다.


[1] 이인구의 증언에 의하면 이대호가 무리한 체중감량 지시로 무릎이 아작 났을 때 최준석 역시 똑같은 짓을 당해 무릎이 아작 났다고 한다. [2] 이대호가 밝힌 바에 따르면 4년간 두명이 침대 중앙을 차지하기 위해 많이 다퉜고, 침대는 이대호가 이사가며 버리는 그 순간까지 부서지지 않았다고 한다. [3] 다만 이때까지는 1루수보다는 지명타자로 더 많이 출전했다. [4] 성적 자체만 보면 1루수치고는 조금 빈약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2006년은 KBO 리그의 역대 투고타저 시즌을 꼽으라면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투고타저 경향이 심했기에 조정 득점 창출력인 wRC+는 120에 육박할 정도로 준수했다. [5] 장원진은 노쇠화로 이미 지난시즌부터 밀려나 2008년에는 1군 출전 자체가 없었고, 안경현 역시 나이를 감안했을때 노쇠화는 필연적이었다. 결국 최준석이 활약해주고 백업을 정원석이 맡아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최준석이 삽을 들어버렸다... 그나마 오재원이 1루를 맡으면서 구멍을 어느 정도는 메웠고 가을야구에서 미친 활약을 보여줬지만 결국 준우승. [6] 타격 스탯만 보면 10을 넘어도 놀랍지 않겠지만, 주루에서 까먹은 WAR이 크다. [7] 실제 플레잉코치는 전 KIA 선수였던 유용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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