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3:43:07

최민호(유도)

올림픽 유도 남자 -60kg 금메달
파일:오륜기(여백X).svg
파일:일본 국기.svg 노무라 타다히로
( 1996, 2000, 2004)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최민호
( 2008)
파일:러시아 국기.svg 아르센 갈스티얀
( 2012)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최민호
崔敏浩 | Choi Min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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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80년 8월 18일 ([age(1980-08-18)]세)
경상북도 김천시 모암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김천모암초등학교 (졸업)
김천석천중학교 (졸업)
진량고등학교 (졸업)
용인대학교 (학사)
용인대학교 (석사)
용인대학교 (박사)
종목 유도
체급 -60kg
신체 163cm, 60kg[1]
종교 천주교(세례명:바오로)
가족 아버지 최수원, 어머니 최정분, 2남 1녀 중 장남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평가5. 수상 기록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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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국가대표 유도 선수이자 現 유도 코치다. 국내 60kg급에선 2003년부터 본좌 자리를 유지했고, 오로지 유도만 바라보며 사는 자타공인 유도 바보다.

2. 선수 경력

2.1. 1996년~ 2001년

고등학교 때부터 전국구 유망주로 꼽히기 시작했다.  -60kg급에서 국내 정상급 선수로 부상했지만, 당시 동체급 정부경 선수와 1,2,3차 선발전까지도 우열을 가릴 수 없어 재경기까지 가진 끝에 효과를 내주며 시드니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지는 못했다.[2] 그 후, 정부경이 -66kg으로 올렸고 최민호의 기량도 일취월장하면서 당당하게 국가대표로 뽑혔다.

2.2. 2002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며 국제대회에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2.3. 2003년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고, 세계선수권 금메달까지 따내며 일약 동 체급 최고의 선수로 부상했다. 이때 세계선수권 정상을 차지한 -73kg급의 이원희, -90kg급 황희태 선수와 같이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 기대주로 손꼽히기 시작했다.

2.4. 2004년

그러나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체중 감량을 하다가 컨디션 난조에 빠졌다. 그래도 하던 가락이 있어 첫판에 4년 후 결승에서 만나게 되는 파이셔를 한판으로 이겼고, 16강전에서 우세승을 거두며 8강까지 진출했지만, 체중 감량의 여파로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며 힘을 못쓰는 상황에서 몽골 선수에게 계속 밀린 끝에 누르기 한판으로 지며 패자부활전으로 밀려나야 했다. 패자부활전에선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몸놀림으로 3판 모두 한판승으로 동메달을 따내며 대한민국 선수단의 대회 첫 메달을 안겼다.다시 말하지만 컨디션 난조로 올림픽 동메달이다. 사실 대회 개막 직전 일주일 동안 -7kg을 뺀 것을 감안하면 동메달이라도 딴 것이 기적일 정도다.[3] 동메달을 따긴 했지만, 대회가 끝난 후 금메달을 따지 못한 박탈감에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거기에 2005년 세계선수권 대표 선발전 종합점수에서 밀려 선발되지 못한 것까지 겹쳤다. 훈련은 거의 안하고 2박 3일 동안 소주를 계속 마시거나 한번에 아이스크림을 20개를 먹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기초 군사훈련을 갔다온 후 다시 심기일전하여 2007년부터 다시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2003년 무렵처럼 세계 강호의 성적은 아니었고 3등을 주로 차지하는 등 정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스로도 동메달만 따서 지겹다고 할 정도였다.

2.5.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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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체중 조절에 성공하며 쾌조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했고, 전 경기 한판승을 거두고 우승했다.  준결승에서 세계랭킹 2위, 결승전에서 세계랭킹 1위를 모두 한판으로 꺾은 가장 완벽한 금메달이었다. 모든 경기를 압도적인 힘으로 지배했는데, 1회전에 아르헨티나 선수를 끝끝내 업어치기 기술로 매트에 꽂아버리는 장면이나 결승전의 파이셔 선수 상대로 나온 마치 딱지를 아래에 내던지는듯한 들어메치기는 보는 사람이 감탄할 정도였다. 특히 결승전에서, 상대인 오스트리아 파이셔의 고간을 잡아 들어 업어 메치는 명장면[4][5]으로 화제가 되었다.

시상식 이후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흘린 그의 눈물은 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울리기도 했다.

2.6. 2012년

체급을 -66kg으로 올렸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래도 가락은 있어서 2012 런던 올림픽 출전 선수 선발전에서 조준호를 누르고 우승에 성공했지만, 국제대회에서 영 성적이 좋지 않았던 탓에 세계랭킹 순위에 앞선 조준호에게 올림픽 출전권이 밀리며 런던행에 실패한 뒤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대한유도협회의 잘못이라고 까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이 무렵 국제유도연맹에서 랭킹 위주의 올림픽 출전권 부여를 천명했고, 랭킹에 미달한 선수는 자격을 주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랭킹이 20위권이었던 최민호는 출전권을 얻어도 시드에서 현저히 밀릴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경쟁자인 조준호는 당시 랭킹 9위였다. 실제로 2008년에 치열했던 유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6]은 랭킹 우선주의가 선언되면서 2012년에는 -90kg를 제외하고는 그냥 요식행위가 되었다.[7]

3. 은퇴 이후

2012 런던 올림픽이 끝난 후 2012년 9월에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선임됐으며, 2013년 말에는 용인대학교 교수로 정식 임용됐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유도 국가대표 남자부 코치를 맡아 김원진, 안바울 등을 지도했다. 현재는 필룩스 유도단 감독을 맡고 있다.

현재 +100kg 급 국가대표 김성민, -81kg급 국가대표 이문진 선수 등을 지도하고 있는 중이다.

4. 평가

말아업어치기로 불리는 변형 업어치기 기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외국에서는 Korean Seoi-nage, 혹은 Reverse Seoi-nage로 불리고 있다. 현역시절의 영상을 보면 동체급대비 압도적인 힘으로 일단 말리기만 하면 넘어가는 호쾌한 장면을 연출하는 기술이다.

90kg급인 송대남 선수가 데드리프트 250kg을 할때, 60kg급이면서 자기 체중의 3배 이상이나 되는 230kg을 드는 진짜 죽음 데드리프트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8] 그만큼 동체급내에서 압도적인 힘을 지녔고, 그 힘을 바탕으로 60kg의 체급에서 기술 유도를 하는 말도 안되는 한판승의 사나이로 유명했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2008 베이징 -60kg
<colbgcolor=#cd7f32> 동메달 2004 아테네 -60kg
세계선수권
금메달 2003 오사카 -60kg
동메달 2007 리우데자네이루 -60kg
아시안 게임
동메달 2002 부산 -60kg
동메달 2010 광저우 -60kg
아시아선수권
은메달 2001 울란바토르 -60kg
은메달 2012 타슈켄트 -66kg
동메달 2007 쿠웨이트 -60kg
유니버시아드
동메달 2001 베이징 -60kg

6. 기타

  • 현역 시절 별명은 작은 거인이다.
  • 유도 선수치고는 다소 순박해 보이는 인상에 163cm인 작은 체구의 소유자이다 보니, '3개월 복싱 배운 185cm 내 남자친구가 최민호 정도는 이긴다'는 짤이 떠돌아 다닌 적이 있었다. 이후 경북대학교 대나무숲 당사자의 글로 추정되는 글이 올라왔다. 당시 여자친구에게 허세를 부려 봤다가 이 꼴이 나서 이불킥 수준으로 창피하다고 했다.
    파일:external/file2.instiz.net/9054cd2d37d0b97131a4436984313750.jpg
  • 굉장한 동안이다. 앞 문단에서 언급했듯 유도 선수인 것에 비해 몸집도 작고 순박해 보이는 인상으로 중학교 3학년 때 대회에서 만난 이원희는 최민호를 처음 보고 유도선수로도 보이지 않는 초등학생이 올라온 줄 알았다고 한다. 그를 보고 시합을 빨리 끝낸 뒤 내려 가겠다는 생각으로 쉽사리 덤볐다가 뇌진탕으로 실려갔다고 한다. 그때 이원희는 '유도를 못할 것처럼 보이는 선수를 조심하자'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라면이 먹고 싶었다는 인터뷰를 하였고, 이후 신라면 광고를 찍었다. #
  • 2008 베이징 올림픽 직후 배우 김성은이 이상형이라고 밝혔다. 불후의 명곡에서 음치라도 노래부르는 모습을 보고 첫 눈에 반했다고...
  • 대식가다. 조준호의 말에 의하면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실컷 먹고 나와서 길을 건넜는데 "준호야, 배고프지 않냐?"하고 햄버거를 사먹었고, 그 직후에는 "매운 게 땡기지 않냐?"라고 하고는 떡볶이를 사먹었고, 또 그 직후에는 입가심을 한다며 아이스크림을 30개나 사먹었다고 한다. 현역 시절에 평소에는 체중 조절을 전혀 하지 않다가 시합 일정이 다가오면 급하게 다이어트를 했는데, 한번은 이틀만에 6kg을 감량했다가 거의 죽을 뻔했지만 마침 옆에 있던 이원희가 오렌지 주스를 먹여줘서 살았다고 한다.
  • 2020년 5월 6일, 스브스스포츠 유튜브 채널 배거슨 라이브에 이원희와 함께 출연하여 양학선과 닮은 꼴로 오해를 많이 받아 부득이하게 양학선을 사칭한 사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번은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다음에도 꼭 금메달 따세요. 양학선 선수’라며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데 차마 최민호라고 말하기가 너무 창피했다고 한다. 게다가 식당에서 서비스를 실컷 잘 얻어 먹고 양학선이 맞다며 수근거리는 탓에 양학선 이름으로 사인하고 나온 적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 동체급에서 적수가 없는 수준의 스트렝스로 유명했지만 커리어 내내 극심한 감량고로 고생했던 선수이기도 하며 다른 대회도 아니고 올림픽에서 감량 후유증으로 난조에 빠진 적도 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최민호가 수시로 윗체급으로 올리고 싶다고 어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쯤되면 왜 진작에 빨리 체급을 올리지않았는지 의아할텐데 이유는 대한유도회의 고위층에서 체급을 유지하라고 협박압력이 있었다. 체급을 올리면 경쟁력이 떨어질거라는게 이유였는데[9]실제로 66kg급으로 올린 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니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명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66kg급으로 올렸을 때 최민호는 이미 대표 선수로서는 커리어 후반기였다. 또한 무엇보다도 본인이 지속적으로 감량고를 토로하며 체급 조정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는데도 당장의 성적을 이유로 체급을 강제했다는 건 정당화 될 수 없다. 최민호가 66kg급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단순한 결과론일 뿐이다. 만일 최민호가 좀 더 일찍 본인의 의사대로 자기 몸에 맞는 체급으로 활동했다면 결과적으로 더 좋은 활약을 보였을 것이다.[10]

[1] 평체는 68~70kg이다. [2] 그 후 정부경은 2000 시드니 올림픽 남자 -60kg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3] 일반인이 이런 페이스로 다이어트를 하면 급격한 에너지 부족으로 일상 생활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평생 한 번 나가보기도 어려운 올림픽을 앞두고 운동선수로서 막바지 훈련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어마어마한 정도의 체력 손실을 감내한 것이다. [4] 속된 말로 그냥 잡아 뽑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는 딱지치기라고도 했다. 다만 현재 룰에서 이는 반칙이다. 띠 아래쪽을 잡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규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파이셔 선수는 패배 후 최민호 선수가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을 때 가 일으켜 안아주고 마지막엔 최민호의 손을 번쩍 들어주며 축하해주는 매너에 국내에서도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5] 당시 상대 선수의 회고에 의하면 최민호 선수의 힘을 느낀 순간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6] 대표적인 사례가 -73kg의 이원희 VS 왕기춘, -81kg의 김재범 VS 송대남 [7] -90kg에서는 34살의 노장 송대남과 2009년 세계선수권 금메달 이규원이 비슷한 랭킹권에 있어서 선발전이 열렸고, 나머지 종목은 랭킹 차이가 심하게 나면서 하나마나한 선발전이 되고 말았다. [8] 워낙 유명한 이야기다 보니 최민호가 주로 활동한 체급이었던 60kg급을 그대로 최민호의 체중으로 생각하거나 중량을 240이나 250으로 부풀리는 식으로 조금 살이 붙어서 과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최민호는 커리어 내내 감량고에 시달렸던 선수고 결국 선수 커리어 후반에 이르러 66kg급으로 체급을 올리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인터뷰나 기사를 보면 최민호의 평체가 68kg나 70kg로 언급되기도 했다. 즉 최민호의 실제 체중은 적어도 60kg보다는 한참 더 나간다고 보는게 맞다. [9] 사실은 최민호가 체급을 올리면 당시 유도회와 용인대학교가 키우던 66kg급 유망주들에게 영향이 가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60kg를 뛸수밖에 없게 된다. [10] 단순하게 생각하면 가벼운 체급에서 뛰었기에 최민호의 괴력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무리한 체중 감량은 체력을 엄청나게 뺏어간다. 게다가 단순히 경기력 문제를 떠나서 선수의 건강과 장기적인 선수 생명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사우나에서 무리하게 체중감량을 하던 유도선수 정세훈이 안타깝게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최민호는 한판승의 사나이로 불릴만큼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승부를 결정짓는 능력이 있었기에 그런 악조건을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감량으로 인한 체력 문제는 커리어 내내 몇번이고 최민호의 발목을 잡았다. 최민호가 2009 세계선수권에서 광탈했을 때 최민호의 아버지가 아들이 10년 동안 감량을 하다 보니 몸이 곯았다고 언급하기도 했을 정도다. 게다가 어차피 전성기 최민호의 스트렝스는 스스로 힘으로는 81kg급 선수들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한 적도 있을만큼 66kg급 기준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