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30 11:30:36

최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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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신세기-SK빅스-전자랜드 시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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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최명도
崔明道
출생 1972년 12월 25일 ([age(1972-12-25)]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직업 농구선수( 가드 / 은퇴)
코치
학력 화홍초등학교 (졸업)
삼일중학교 (졸업)
삼일상업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졸업)
실업 입단 1995년 기업은행 농구단
현역시절 등번호 6[1], 7[2]
병역 상무 (1996~1998)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기업은행 (1995~1996)
광주 나산 플라망스 (1998~1999)
대전 현대 걸리버스 (1999~2001)
인천 SK 빅스-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1~2006)
코치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농구부 (2006~2009)
삼일중학교 농구부 (2009~2013)
구리 KDB생명 위너스 (2013~2014)
경희대학교 농구부 (2014)
울산 모비스-현대모비스 피버스 (2015~2018)
여수화양고등학교 농구부 (2018~2021)
강원사대부고 농구부(2021.12~2022)
군산고등학교 (2022~)

1. 개요2. 선수 시절
2.1. 고교-대학 시절2.2. 실업-프로 시절
3. 지도자 생활4. 여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단신의 공격형 가드로 수비도 좋아 1,2번에서 모두 뛸 수 있는 에이스형 가드였으나, 외국인 선수 2명의 아이솔 중심이었던 2000년대 초반 KBL에선 득점력 좋은 가드의 필요성은 제한적이었고 이로 인해 KBL에서는 대학 시절만큼 활약하진 못했다. 다만 선수 말년인 2001년부터 5시즌간 인천 SK-전자랜드에서 뛰며 주전과 벤치에서 모두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이에 구단에서도 은퇴식까지 열어줬을 정도로 예우받았던 선수였다.

2. 선수 시절

2.1. 고교-대학 시절

삼일상고 시절부터 가드 유망주로 어느 정도 인정은 받았지만 팀성적이 아쉬워[3] 청소년 대표급으로 뽑히진 못했다.

최명도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경희대에 입학한 이후부터인데, 1학년때부터 팀의 주전 가드 한자리를 차지한 최명도는 동기 장창곤과 함께 신입생답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며, 경희대가 1991년 대학농구에서 팀 역사상 첫번째 전국대회 우승(전국체전) 및 3개 대회 준우승(1, 2차 연맹전,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기둥 센터 이창수가 졸업한 뒤에도, 최명도- 장창곤 두 91학번 콤비는 경희대가 연-고-중대에 이어 꾸준히 대학 4강 한자리를 차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농구대잔치에서도 과감한 3점슛과 찰거머리 수비를 보여주며 실업팀들을 연이어 잡는 "자줏빛 돌풍"의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졸업 전 마지막 농구대잔치였던 1994-95 농구대잔치에서도 최명도는 후배 손규완, 윤영필 등과 함께 자줏빛 군단을 이끌며 유도훈- 조성원- 정경호가 있던 현대전자 이민형- 김상식 콤비의 기업은행을 각각 꺾는등 대학돌풍의 일원으로 분투했으나, 정규리그 14팀중 9위(6승 7패)로 아깝게 8강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한채 대학시절을 마감하게 된다.

2.2. 실업-프로 시절

경희대 졸업 후 최명도는 대학동기 장창곤, 심상희와 함께 경희대의 연계실업팀으로 불리던 기업은행 유니폼을 입는다.

입단 직후 대학 선배 김영주(180cm)를 밀어내고 주전 1번 자리를 차지한 최명도는 김상식- 장일- 이민형- 장창곤으로 이어지는 3점슛 군단 기업은행의 리딩 가드로서, 만년 약체팀이던 기업은행을 실업농구 코리안리그 1, 2차 대회 연속 2위에 올려놓는 맹활약을 보여주는데, 제주도에서 열린 1차대회에서는 정재근- 표필상 SBS를, 원주에서 열린 2차대회에선 무적군단 기아자동차를 꺾으며 거둔 성적이라 그 의미가 더욱 컸다.

최명도와 기업은행의 돌풍은 1995-96 농구대잔치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실업리그에 이어 SBS와 기아자동차를 다시 한번 꺾는 저력을 보여주며 정규리그 7위로 8강에 오르지만, 8강전에서 동갑내기 이상민이 이끄는 호화군단 상무에 1승 2패로 아쉽게 고배를 마시고 만다.

농구대잔치가 끝나고 장창곤과 함께 상무에 입대한 최명도는, 이상민- 김승기- 조성원의 주전 백코트를 보좌하는 식스맨으로서 2년을 보내는데, 입대 첫해에 맞은 1996-97 농구대잔치에선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괜찮게 활약했지만, 이듬해 KBL이 출범하면서 상무가 참가할 대회가 없어지다보니[4] 기량이 한창 절정이던 최명도, 장창곤은 그냥 1년을 허송해야 했다.

1998년 제대 후 원소속팀 광주 나산 플라망스[5]에 합류한 최명도는 바로 주전 포인트 가드 자리를 차지하지만, 모기업 나산그룹이 IMF 금융위기 여파를 제대로 맞고 휘청거렸던 탓에 농구단은 원정경기에서 모텔을 전전하는 등 생고생하며 경기를 뛰어야 했고 당연히 성적도 잘 나지 않았다.(9위)[6] 첫시즌 최명도의 기록은 9.7득점-2.3리바-2.7어시-1.2스틸로, 한팀의 주전 1번이라기엔 평범한 수준이었다.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최명도는 대전 현대 신산 감독의 로렌조 홀(200cm.C) 확보 작전에 포함되며 대전 현대로 트레이드 된다.[7]

대전 현대에는 이상민이라는 넘사벽의 포인트 가드가 버티고 있었고, 조성원- 추승균으로 이어지는 외곽포 군단도 강력해 최명도는 경기당 10분 남짓 나오는 식스맨으로 만족해야만 했고, 이후 팀이 그해 챔피언 결정전에도 진출했지만 최명도는 출장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다.

2000-01 시즌 한시즌을 더 식스맨으로 보낸 후 인천 SK 빅스로 트레이드된 최명도는, 2001-02 시즌 홍사붕을 밀어내고 다시금 주전 포인트 가드 자리를 차지하며 안정된 리딩과 터프한 수비, 불꽃 3점슛을 터트리며 인천 SK가 정규리그 4위를 달성하는데 기여한다. 이 시즌에 올린 평균 3.4 어시스트는 본인의 커리어 하이 기록.[8]

파일:external/www.donga.com/CMD.jpg

2003-04 시즌 평균 스탯이 트리플 더블급이었던 만능선수 앨버트 화이트[9]가 가세하면서 31세로 노장줄에 접어든 최명도는 역할이 다소 줄었지만, 문경은과 함께 팀내 베테랑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팀을 다시금 정규리그 4위에 올렸고, 플옵에서도 서장훈이 버틴 서울 삼성 썬더스를 꺾으며 4강까지 올랐다.

이후 인천 전자랜드와 계약이 종료된 유재학 감독이 울산 모비스로 옮기고, 구단 파괴자 박수괴가 부임하면서 박상률, 정재호 등 어린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고, 노장 최명도는 벤치로 밀려나면서 출전 시간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바로 직전 시즌(2003-04) 4강까지 오른 팀이 2년 연속 리그 꼴찌를 차지하는 꼴을 벤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최명도는, 2005-06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택했다.

3. 지도자 생활

은퇴 직후 단대부고 농구부 코치를 맡아 괜찮은 성적을 올렸으나, 2009년 단대부고가 농구부를 해체하는 바람에 이듬해 모교인 삼일중학교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2013년에는 WKBL에서 당시 우승후보로 꼽히던 구리 KDB생명 위너스의 코치로 임명되어 안세환 감독을 보좌했지만, 팀은 정규리그 5위에 그치고 말았다.

파일:external/www.jumpball.co.kr/news_20170622162954_DP.jpg

이듬해인 2014년 모교 경희대 코치로 옮겨 경희대 선배 김현국 감독을 보좌했고, 1년뒤에는 인천 SK-전자랜드 시절 은사였던 유재학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17-18 시즌까지 3시즌 동안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에서 코치를 맡았다. 이후 여수화양고 코치로 부임했으며, 작년에 강원사대부고와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물러난 김희선 코치의 후임으로 강원사대부고 코치를 맡았다.

현재 군산고등학교 코치를 맡고 있다.

4. 여담

선수 생활 중 모범적인 모습으로 특별한 마찰이나 말싸움등도 없기로 소문난 신사적 이미지였으나 유일하게 이미지를 실추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인천 SK에서 뛰던 2002년 12월 3일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의 홈 경기, 동양과의 인기 가드이자 신성인 김승현이 최명도 선수와 엉킨 팔을 신경질적으로 풀면서 팔꿈치로 턱을 가격 했는데도 김승현이 사과를 하지 않고 대치 상황으로만 대처하자 곧바로 김승현의 안면에다 죽빵을 날리는 모습이 생중계되기도 했다.(이 때 날아가는 김승현의 마우스피스가 씬스틸러 라는 온라인 도배가 주를 이뤘다). 당시 심판의 콜이 없자 어떻게든 인플레이 상황에서 진행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고 사실 이 문제는 해당 경기의 심판의 문제도 조성되어야 마땅했다. 그 당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팀내 최다 득점을 하고 있었고 날다람쥐 김승현도 경기 내내 평소와는 달리 강력한 수비 흐름에 막혀 플레이가 원만히 풀리지 않았던 상황이었는데 의도적으로 감정을 실었다는 의견과 반대로 최명도가 김승현을 수비하면서 김승현의 크로스오버와 페이크에 몇 번씩 속은 게 쌓이고 쌓여서 폭발한 것이란 의견이 서로 상반되게 대립되었고 당시 스포츠 스타에 대한 정서와 여론이 실제 정확하게 발생된 원인과 책임을 묻는 과정이 보복적 폭력을 행사한 최명도에게 거의 일방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는 지경이 되는 지경이었다.

거기에 언론의 대응들도 보면 동반 퇴장건에 대해서도 "그런데 놀랍게도 때린 최명도와 맞은 김승현은 경기 중 동반 퇴장당했고, 이후 사후 징계로 최명도는 3게임 출장정지와 벌금 500만원의 가벼운 징계에 그쳤다!"식으로 이야기 하나 실제로는 KBL 역사상 가장 무거운 징계에 속하는 편이다. 그 후에 있었던 많은 선수들의 직접적이고 더 고의적인 가격은 오히려 그에 비해 솜방망이 처벌 수준이었다. 스타 플레이어에만 포커스가 주어지다보니 맞은 김승현 선수도 원인 제공자라고 1게임 정지 + 벌금 100만원이 부과된 데에 대한 억울함만 더 가중되는 기사들만 실렸다. 관련 기사

5. 관련 문서



[1] 나산, SK 빅스 및 전자랜드 시절 [2] 현대 시절 [3] 3학년 때 동국대총장기 4강이 최고 성적. [4] 프로연맹과 국방부 간 선수출장 관련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에 상무는 1997-98 농구대잔치에 참가하지 않았다. [5] 1997년 기업은행 농구단이 나산그룹에 매각되면서 바뀐 팀명이다. [6] 이때 꼴찌는 세계 신기록인 32연패를 당했던(최종 성적 3승 42패) 대구 동양. [7] 당시 외국인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가졌던 광주 골드뱅크(모기업이 나산그룹에서 금융기업 골드뱅크로 넘어간 후였다.)가 선수층이 얇다는 점을 간파하고, 대전 현대의 쏠쏠한 듀얼가드 정진영과 수비수 박재현 2명을 광주 골드뱅크에 넘기고 최명도 한 명만 가져오는 트레이드를 사전 실행한 덕분에, 광주 골드뱅크는 1순위 외인으로 유력했던 로렌조 홀 대신 득점기계 에릭 이버츠를 지명했다. [8] 하지만 6강 플옵에서 5위팀 LG에 2패로 업셋을 당하며 광탈하는데, 1차전 홈경기에서 고작 3점만 올리고 5반칙으로 물러나면서 팀의 대역전패를 야기한 1번 최명도의 영향이 있었다. [9] 2003-04 시즌 기록 26.2득점-8.8리바-7.5어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