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2:54:23

찐똥

찐 똥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57 0%, #00008b 20%, #00008b 80%, #000057);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세조 달의공 [ruby(성조, ruby=成祖)] 문조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홍조 소조 희조 유조
<rowcolor=#fff>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의조 [ruby(성조, ruby=聖祖)] 충민왕 영왕
<rowcolor=#fff> 제13대
안도왕
연조 · 목조 · 조조 · 흥조 · 숭의왕 · 순조 · 예조
비정통
서군공
}}}}}}}}}

정주 12대 국왕
靈王 | 영왕
파일:영왕 정종.jpg
{{{#FFFFFF 묘호}}} 없음
{{{#FFFFFF 시호}}} 영왕(靈王)
{{{#FFFFFF 작위}}} 상상태국공
(上相太國公)
{{{#FFFFFF 주군}}} 현종
민제
{{{#FFFFFF 성씨}}} 찐(Trịnh, 鄭/정)
{{{#FFFFFF }}} 똥(Tông, 棕/종)
카이(Khải, 楷/해)
{{{#FFFFFF 생몰기간}}} 1763년 10월 10일 ~ 1786년 7월 23일 (향년 22세)
{{{#FFFFFF 재위기간}}} 1782년 ~ 1786년 7월 23일

1. 개요2. 생애3. 관련 문서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월 여씨 왕조 막부 정주의 12대이자 사실상 마지막 국왕. 대대로 정주는 황제를 대신해 실권을 휘둘렀지만 견제세력인 완주도 아닌 제3의 세력 서산의 개입으로 막부가 붕괴하고 응우옌후에의 침공에 패배하여 압송된 후 자살했다.

휘는 정종[1]이라 알려져 있으나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엔 '정해'[2]로 전해진다. 사후 정권이 붕괴했지만 그의 정주 왕 지위는 5촌 숙부인 정봉이 이었기에 사후 시호 자체는 추시[3]되었다. 생전 봉호는 단남왕[4].이었다.

2. 생애

까인흥 24년 9월 초사일( 1763년 10월 10일), 찐섬(정삼)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모친은 공빈(恭嬪) 즈엉티응옥호안(楊氏玉歡)이었다.

찐똥의 모친은 총애를 받지 못했고, 또한 찐똥 본인도 무(武)를 좋아하고 문(文)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부왕 찐섬은 그를 매우 싫어했다. 찐똥의 이복동생인 찐깐(정간)은 총명하고 영리하여 총애를 받았고, 조정에 있는 찐섬의 당우들도 찐깐의 모친 당티후에(鄧氏惠)에게 많이 붙게 되니 세자 찐똥은 고립되었다.

찐똥은 서차자인 찐깐이 향후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했고, 1780년에 부왕 찐섬이 병을 얻은 틈을 타 정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으나 즉시 찐섬에게 발각되었다. 격노한 찐섬은 그를 폐위하여 계자(季子)로 만들고 유폐시켰으며, 어린 찐깐을 세자로 세웠다.

까인흥 43년( 1782년) 9월, 찐섬이 승하하고, 권신 호앙딘바오가 찐깐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다. 그해 11월, 삼부군(三府軍)이 폐세자 찐똥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켜 호앙딘바오를 죽인 뒤 찐똥을 상주(上主)의 자리로 옹립했다.

황제 현종은 칙명으로 찐똥을 단남왕으로 봉하였다. 찐똥은 즉위한 뒤 즉시, 이전에 선왕 찐섬에 의해 유폐된 폐태자 레주이비의 자녀들을 석방했고, 현종으로 하여금 레주이비의 첫째 아들 레주이끼를 황사손(皇嗣孫)으로 삼도록 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찐똥이 즉위하기 전, 삼부군은 교횡이 심하였고,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찐똥이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자 삼부군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고, 1784년에 반란을 일으켜 응우옌칸(阮侃)과 즈엉쿠옹(楊匡)의 집을 파괴했으며, 심지어는 주부(主府)의 문전에서 조정의 주요 인사를 살해하기도 했다. 응우옌칸은 산서(山西)로 달아나 찐똥이 수도를 나와 피난하는 것을 맞이하고자 했고, 연후에 각 진(鎭)의 제후들을 불러 전횡을 일삼는 삼부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찐똥은 주부에서 삼부군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처했고,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각 진의 제후들은 찐똥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해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부이후이빅(裴輝璧)의 안무하에 비로소 반란이 평정되었다.

까인흥 47년( 1786년), 떠이선 왕조 응우옌후에가 부려멸정[5]의 기치를 내걸고, 부반념(武文任), 응우옌흐우찐(阮有整)을 거느린채 북하(北河)의 찐 주를 향하여 진격했다. 찐씨 막하의 팜응오꺼우(范吳俅), 호앙딘테(黃廷體) 등 부(部)들이 대패하였고, 응우옌후에는 그 기세를 타고 탕롱을 공격해 들어갔다. 찐똥은 상병(象兵, 코끼리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안화문(安華門)을 나가 산서(山西)로 도주했다. 그러나 안랑(安朗)에 이르렀을 때 농민 응우옌짱(阮莊)에게 잡혀 떠이선 군에게 보내졌다.

포로가 된 찐똥은 이를 일종의 치욕으로 여겨 마침내 까인흥 47년 6월 28일( 1786년 7월 23일)에 길에서 자살했다. 그의 시신이 탕롱으로 보내지자 응우옌후에는 시신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였고, 그를 영웅이라고 일컬으며 단남왕묘(端南王墓)에 예장하도록 하였다.

찐똥이 떠이선(서산)군에게 패배하고 자살함으로써 정주는 멸망했지만 현종 황제의 뒤를 이은 소통제가 서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찐똥(정종)의 5촌 숙부 찐봉을 정주 왕으로 봉하면서 명맥을 이었고, 자살한 찐똥을 영왕(Linh Vương / 靈王)으로 추시했다.

3. 관련 문서

4. 둘러보기

정주의 역대 국왕
11대 충민왕 정간 12대 영왕 정종 멸망
정체, 정봉


[1] Trịnh Tông / 鄭棕 / 찐똥. [2] Trịnh Khải / 鄭楷 / 찐카이. [3] 시호가 영왕(靈王) 혹은 영렬영왕(英烈靈王)으로 전해진다. [4] Đoan Nam Vương / 端南王 [5] 扶黎滅鄭, 레씨를 돕고 찐씨를 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