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6:29:56

조지 밀러(1945)

조지 밀러
George M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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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본명 조지 밀러
George Miller
출생 1945년 3월 3일 ([age(1945-03-03)]세)
호주 퀸즐랜드 주 친칠라
국적
[[호주|]][[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
가족 배우자 샌디 고어(1985년 결혼~1992년 이혼)
배우자 마가렛 식셀(1995년 결혼~현재)
자녀 3명
학력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 (의학 / 학사)
데뷔 1971년 영화 'Violence in the Cinema, Part 1'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활동3. 필모그래피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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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주의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 의사. 본래 이름은 조지 밀리오티스였으나, 아버지가 성을 개명하면서 ‘조지 밀러’가 되었다. 그 당시 성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리스계 이민자 출신이다.

매드 맥스 시리즈의 창조자이자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매드 맥스 시리즈 이후 북두의 권, 폴아웃 시리즈를 비롯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원형을 완성했다.

전연령 가족 영화 감독으로서의 아이덴티티도 확고한 인물이기도 하다. 구 매드 맥스 트릴로지의 완결 이후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직전까지 대체적으로 ' 로렌조 오일', ' 꼬마 돼지 베이브', ' 해피 피트' 등의 푸근한 영화들도 연출한 바 있다. 하지만 해피 피트만 해도 막판으로 갈수록 멘붕하는 연출을 넣어 수많은 꼬마 관람객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2. 활동

원래 의사가 되기 위해 1962년 뉴 사우스 웨일스 의대를 입학하여 다니던 중에 1971년에 멜버른 대학에서 진행한 영화 특강을 공부했고, 이때 그의 큰 동료가 되는 바이런 케네디[1]를 만나서 그와 함께 Violence in the Cinema, Part 1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찍게 된다.

그 후 병원에서 정형외과 전공의[2]로 일하면서 바이런 케네디와 함께 시나리오를 하나 쓰게 되고, 그 시나리오를 저예산으로 영화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매드 맥스였고,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며 그를 감독으로 만든다. 피터 위어와 더불어 호주 영화 뉴웨이브를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주인공으로 열연한 멜 깁슨도 스타로 급부상한다. 이후 매드 맥스 2와 TV 시리즈 작업, 환상특급 극장판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하는 등 큰 활약을 하며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1985년에는 미국 워너 브라더스의 지원을 받아 매드 맥스 3를 만들게 되고[3], 이후 미국에서 스타 캐스팅으로 ‘이스트웍의 마녀들’을 만든 이후 5년에서 6년 사이에 한편을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또한 호주 영화나 꼬마 돼지 베이브의 제작을 맡기도 한다.[4]

다만 꼬마 돼지 베이브의 성공과는 별도로 조지 밀러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제임스 크롬웰의 인터뷰에 따르면 촬영장에서 감독인 크리스 누넌과 제작자인 조지 밀러 사이에 긴장감이 돌았다고 한다. # 꼬마 돼지 베이브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 자체는 딸을 통해서 원작을 접하게 된 조지 밀러로부터 나온 것이긴 한데, 당시 매드 맥스 시리즈와 같이 큰 영화들을 주로 찍었던 조지 밀러는 괜히 아동 영화에 손댔다가 실패했을 경우 자기 커리어에 해가 될까봐 크리스 누넌에게 연출을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되면서 크리스 누넌 감독이 적재적소에 맞게 연출하여 촬영 분위기가 좋아지고 생각보다 결과물이 좋을 것으로 예상되자, 조지 밀러는 자기가 생각한 아이디어인데 크리스 누넌이 감독을 맡아 영화가 대박을 거두면 크리스 누넌이 영광을 누린다고 생각해 자신이 감독을 맡으려고 크리스 누넌 감독을 내쫓기 위해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지 밀러는 촬영장에서 별 이유 없이 크리스 누넌 감독을 불러내 윽박지르기에 이르렀는데 스탭들 중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제임스 크롬웰이 직접 가서 누넌 감독 편을 들어줘야 했고, 그 때문에 본인도 조지 밀러에게 폭언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편집 과정에서 누넌 감독을 힘들게 하는 등 조지 밀러의 심술은 끝이 없었다고. 제임스 크롬웰은 조지 밀러 감독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고 자신도 감독으로서 좋아하긴 하지만[5] 다시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한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후속편이 기획되자 제작사는 대박을 거둔 전편을 연출한 크리스 누넌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전편의 인기로 후속편도 흥행할 것이라고 생각한 조지 밀러가 제작사에게 자신을 감독으로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조지 밀러가 크리스 누넌보다 감독으로 잘나가고 파워가 강했기에 누넌 감독은 밀려나갔고, 이를 본 제임스 크롬웰은 조지 밀러에게 인간적으로 정나미가 떨어져서 그가 감독으로서는 잘났으나 관객으로 그와 다시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한다.

1998년 호주로 돌아가 꼬마 돼지 베이브 속편의 감독으로 내정되었던 크리스 누넌 감독을 제작사에게 압력을 넣어 자신이 직접 감독하기도 했으나 영화가 아쉽게도 흥행에 실패했고[6], 이후 절치부심하다 2006년에 3D 애니메이션인 해피 피트로 다시 돌아왔다. 환경 보호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흥행에 성공했고 아카데미 최우수 애니메이션 상도 수상했다. 이후 해피 피트 2까지 감독을 맡았지만 하지만 속편은 아쉽게도 흥행에서 부진했다.[7]

2007년, 저스티스 리그: 모탈이란 제목의 DC 코믹스 대표 주역 캐릭터들이 모인 작품을 원작/기반한 슈퍼히어로물 영화를 직접 연출하는 것으로 제작할 계획이었으나 여러 악조건들로 인해 결국 무산되었다.

2015년,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로 30년 만에 매드 맥스 시리즈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관객과 평론가의 평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는데, 70세가 넘은 노령 감독이 30년의 한을 풀겠다는 듯 사자후를 토해내고 있다는 평가, 혹은 지금까지의 액션 영화들을 소꿉장난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강렬하며, 터미네이터 2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불멸의 걸작이 탄생했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2016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그가 감독한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비록 본인은 감독상을 놓쳤지만 의상상, 분장상, 미술상, 편집상, 음향편집상, 음향상 등 무려 6개 상을 수상하는 본 얼티메이텀 이후로 액션 영화 사상 전례가 없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30년간 다른 영화를 찍어오면서도 여전히 구상을 멈추지 않았던 멋진 시각적 세계관, 혼을 불어넣은 사운드와 편집으로 완성한 한 편의 걸작에 아카데미가 바친 장르영화에 대한 최고의 경의로 풀이된다. 하지만 정작 칸 영화제 수상작 선정에 논란이 생기고 말았다. 자세한 건 자비에 돌란 문서 참조.

한편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평단과 관객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워너 브라더스에서 조지 밀러에게 계약상의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아 소송을 진행했다. 그러다 어찌 서로 잘 합의를 봤는지 퓨리오사의 과거를 다룬 프리퀄 영화를 제작할 거라 발표했다. 안야 테일러조이가 젊은 퓨리오사 역으로 분하였다. 먼저 오리지널 신작, < 3000년의 기다림>이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선공개했다.

3. 필모그래피

조지 밀러 감독 장편 연출 작품
(다큐멘터리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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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width=33.3%> 파일:Mad Max Logo.png ||<width=33.3%> 파일:Mad Max 2 Logo.png ||<width=33.3%> 파일:Twilight Zone The Movie Logo.png ||
파일:Mad Max Beyond Thunderdome Logo.png 파일:The Witches of Eastwick Logo 2.png 파일:Lorenzo's Oil Logo 2.png
파일:Babe Pig in the City Logo.png 파일:Happy Feet Logo.png 파일:Happy Feet Two Logo.png
파일:Mad Max Fury Road Logo.png 파일:2022 3000년의 기다림 로고.png 파일:2024 퓨리오사 로고.png
매드 맥스: 웨이스트랜드 (미정)



각 작품의 장르가 액션, 드라마, 의학 가족 영화, 그냥 가족 영화, 애니메이션, 또다시 액션 식으로 넘어가며 서로 심한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팬아트[9] 그려질 정도.

4. 기타

  • 정형외과 전문의라 매드 맥스 1, 2편을 찍을 때 부상당한 스턴트맨[10]을 직접 치료해주면서 제작비를 아꼈다고 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찍을 때도 다친 스태프들을 직접 치료해 주었다는 후문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의사양반
  • 슈퍼히어로 영화에 대해 현재 슈퍼히어로의 인기에 당연하다고 발언했다. #


[1] 매드 맥스 2까지 엄청난 동지였고 제작에 있어서 큰 힘이 되었으나, 1983년 헬기 추락 사고로 요절했다. 호주 영화진흥원은 그를 기념하여 1984년부터 바이런 케네디 상을 만들어서 호주 영화계에 업적을 남긴 이들에게 상을 기여하고 있다. 밀러 본인도 매드 맥스 3를 그에게 헌정했다. [2] 의사인 덕분에 엑스트라들이 액션씬으로 부상을 입었을 때 직접 진료를 해주면서 많은 제작비를 아꼈다고 한다. [3] 바이런 케네디의 사망 사고로 인해 작품에서 물러나려 했으나 사정상 액션씬만 연출한다는 조건으로 감독을 맡았다. 드라마나 다른 부분은 공동 감독인 조지 오길비가 담당. [4] 여담으로 니콜 키드먼과 의외로 엮여있는 사람이기도 한데, 그녀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인식된 죽음의 항해를 제작한 게 바로 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방콕 힐튼이라는 TV 시리즈와 청춘 기숙사라는 그녀의 배우 생활에 의외로 큰 기점이 되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5] 제임스 크롬웰은 조지 밀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후속편에도 출연했다. 후속편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좋은 사람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6] 제작비가 9000만 달러인데 미국에서 얻은 수익이 고작 1800만 달러, 전세계적으로 얻은 수익이 6913만 달러에 그쳤다. 이 정도면 확실한 실패. [7] 본래 해피 피트 1 이후에 저스티스 리그를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헐리웃 작가조합 파업+촬영 예정지였던 호주의 세금 혜택 취소 등 연이어 악재를 맞았고, 크리스토퍼 놀란 다크 나이트가 대박을 치면서 워너 브라더스사에서 제작을 취소했다. [8] 바이런 케네디가 사망하자 감독자리에서 물러나려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액션씬만 연출한다는 조건으로 연출을 맡았다. [9] 차량과 운전자는 매드 맥스 시리즈 V8 인터셉터 맥스 로카탄스키, 그 옆에는 해피 피트의 펭귄 멈블, 꼬마 돼지 베이브의 돼지 베이브이다. [10] 2편에서 폭주족 중 하나가 차를 들이받고 공중을 몇 바퀴씩 돌며 날아가는 장면이 있는데, 왼쪽 다리가 차에 치여서 정말로 부러졌다고 한다. 이걸 밀러가 고쳐준 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폭주족을 맡은 스턴트맨은 분노의 도로에서 스턴트 감독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