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4 00:00:54

조르주 상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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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대중문화
3.1. 클래시컬로이드

1. 개요

파일:George Sand.jpg
George Sand[1] ( 1804년 7월 1일 ~ 1876년 6월 7일? 6월 8일?)

프랑스 소설가이자 예술 애호가. 필명으로 본명은 뒤드방(Dudevant) 남작 부인. 처녀 시절 이름은 아망딘 오로르 뤼실 뒤팽(Amandine Aurore Lucile Dupin).

2. 생애

귀족 아버지[2]와 평민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전임신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급서한 탓에 지주인 할머니댁에서 자랐다. 1822년 카시미르 뒤드방(Casimir Dudevant) 남작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애초에 재산 노리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려고 급하게 한 결혼이었고,[3] 남편이 교양 없고 사람들 앞에서 아내를 때리는 막장 남편인지라[4] 몇 년 후 남편과 별거에 들어가고,[5] 수많은 남자들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 그 중에는 예명을 짓는 데 도움을 주고 소설작법을 가르쳐 주기도 한 쥘 상도, 시인인 알프레드 드 뮈세[6]나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 카르멘의 원작자인 메리메 등도 포함되어 있다.[7]

남녀차별이 극심했던 19세기 남장을 하고 사교계에 출입하거나, 길에서 줄 담배를 피웠다는 등 꽤 급진적인 에피소드들이 전해진다.[8] 또한 열렬한 자유연애 신봉자로, 남녀가 유별하던 시대에 평생 숱한 애인을 두며 자유연애를 즐겼다. 이를 두고 보들레르 등은 '매춘부'니 '공중변소' 등의 원색적인 비난을 남기기도 했으나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상드와 친구였던 위고는 '사람들이 상드를 욕할 때 그것이 상드를 더 명예롭게 하는 것 같다'고도 평했다. 1840년 이후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다. 또 빅토르 위고나 공쿠르 형제, 투르게네프, 들라크루아, 리스트[9], 폴린 비아르도[10] 등 많은 유명 예술가들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위고는 상드가 죽었을 때 추도사를 쓰러 오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앵디아나》, 《마의 늪》, 《 사랑의 요정》, 《사생아 프랑수아》 등이 있다. 상드가 평생 2,000여명에 달하는 프랑스 유럽 각국의 유명인사들과 주고받은 18,000통의 편지를 엮어 발간한 서간집이 유명하다.[11] 편지를 주고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오노레 드 발자크, 외젠 들라크루아, 카를 마르크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등이 있다.[12] 서간 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며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에서 《편지》라는 이름으로 국역 출간했다.

또한 정치활동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릴 만큼 심각한 성범죄를 당한 장애인 소녀 사건에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으며, 프랑스의 박애주의에 여전히 신분과 성별의 벽이 있다며 전에 없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13] 그리고 직접 창간에 참여한 지역 신문에서 이러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옮기는 문필활동을 하면서 소수자의 불행을 방관하는 당국을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했으며 2월 혁명의 지지자이자 소수당을 창당해 당 활동 자금을 꾸준히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이 와해되면서 노력이 허사가 되어 버렸다.

당대의 명사였으나, 정치활동 실패로 인한 타격과 쇼팽 사후 아들과의 결별을 감수하고 시작한 아들의 친구이자 자신의 비서인 미술가 망소와의 사랑으로 저작활동을 전보다 줄이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유형의 로맨스와 추리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상에 맞춰 그녀의 작품은 그녀의 사후 대중의 관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문인 가문들이 대를 이어가며 인맥을 형성함과 달리, 상드의 자손은 두 손녀가 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떠나면서 가문을 잇지 못했기 때문이다. [14]

상드의 마지막 후손들이 상드 가문의 노앙 대저택을 프랑스에 문화유산으로 기증해 남기면서, 이 장소가 세계 쇼팽 팬들에게 쇼팽 명소 중 하나로 인정받아 쇼팽의 연인으로 기억되지만 상드 자신도 이 사랑은 깊은 모성애와 후원에 가까웠던 관계로 회고하며, 사실상 상드의 진정한 사랑은 망소였다. 상드는 친구를 새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아들과 눈물로 이별하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쇼팽은 임종 직전 간호하러 온 상드의 딸 솔랑주에게 상드를 회상하면서 임종 때 너의 어머니가 내게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 죽을 때 품에 안고 눈을 감겨주겠다고 약속했다며 씁쓸해했고[15] 솔랑주는 그런 쇼팽에게 대신 내가 왔지 않느냐며 위로했다. 이를 알게 된 스코틀랜드 귀족이자 쇼팽 최후의 후원자 제인 스털링은 상드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며, 쇼팽보다 망소와 더 오랜 기간 연애하며 아플 때 서로를 간호해 주던 사이였던 상드는 쇼팽에게 지키지 않은 약속을 망소에게는 지켰다. 망소의 임종을 지킨 후에도 상드는 연애를 계속했지만 동거할 정도로 깊은 사이가 된 것은 망소가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을 극화해서 올리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으나,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미형 주연배우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들로만 캐스팅하는 바람에 상드 생전에 본인이 직접 극본으로 개작한 상드의 작품들 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남이 올린 작품들은 적어도 중박 이상이어서, 캐스팅상 문제라고 조언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딸과 결별한 후 딸의 방을 작은 극장으로 개조해 친구들과 소소한 연극을 올리는 일만은 계속했다.

조르주 상드라는 예명을 쓰면서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남편이나 남성 보호자를 대동하지 않으면 출입을 금지한다는 조치에 반발해, 당장 양장점에 들어가 남성용 정장을 맞춰 입은 뒤 공연장에 입장하는 기발한 행동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신분을 숨기고자 소소하게 시도되었던, 여성 작가가 남성의 이름을 쓰는 관례를 전 유럽에 널리 유행시켰다. 당대 여성 작가들과 달리 상드가 남자 이름을 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성 작가에 대한 집요하고 편파적인 악평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여성의 원고료가 남성보다 적게 책정되어 편집자와 싸운 이후로 예명을 결심했고, 또한 아직 이혼소송 과정이기에 성이 바뀐 기혼 여성의 원고료가 남편에게 결제되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16]

3. 대중문화

3.1. 클래시컬로이드

일본 애니메이션 클래시컬로이드 1시리즈 10화에서 쇼팽이 사랑에 빠진 가상 아이돌 캐릭터 졸리가 등장하는데, 조르주 상드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성우는 미나세 이노리.

원래는 아르케 사의 프로그램으로써 같은 말만 반복하는 프로그램으로 쇼팽은 처음에 졸리를 만들고 좋아하면서 연애를 하는 듯한 행동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졸리가 같은 말만 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에 화를 내면서 무지크를 발동시킨다.

그 후에 졸리는 쇼팽의 무지크로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VR클래시컬로이드로 각성하고 평범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쇼팽이 만든 곡인 화려한 대 원무곡을 졸리의 곡으로써 인터넷에 업로드하면서 인기를 끌게 되는데 쇼팽이 더 이상 곡을 만들지 않고 졸리랑 같이 있다고 싶다고 하니까 졸리는 곡을 만들지 않으면 필요없다면서 그대로 쇼팽의 곁을 떠난다.

이후 오토와관에 다른 멤버들이 쇼팽의 비명을 듣고 찾아가고 상황을 설명하자 무지크의 힘으로 졸리를 찾아 사이버 공간으로 떠난다고 하고 환상 즉흥곡으로 인터넷 공간으로 향하지만 정작 도착한 것은 쇼팽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었다. 패드 군이 가짜 초대장을 보내서 졸리는 해당 장소에 도착했지만 아르케 사의 미츠루가 졸리를 붙잡아서 VR클래시컬로이드의 양산 계획에 쓸려고 했다.

여기서 졸리는 프로그램은 맞기는 하나 무지크의 영향으로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고 결국 쇼팽이 스스로의 무지크의 힘으로 스스로 지우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은 졸리는 제거되었지만 졸리는 제거 되기 전에 쇼팽에게 본심을 털어놓고 제거된다.

이후 쇼팽을 눈물을 흘리면서 졸리를 또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패드 군이 졸리는 사실 조르주 상드를 생각하고 만든 것을 알아차렸고 소스케와 다른 모두에게 알려준다.
조르주 상드 , 프랑스의 여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로 음악가로서 원숙기였던 프레데리크 쇼팽의 반려자였다고 하죠.
패드 군의 설명

이후 쇼팽을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입해서 예전보다 퀄리티가 조금 떨어지지만 졸리2를 만들지만 좋다면서 웃는 것으로 에피소드가 끝난다.

그리고 이전에도 1시리즈 8화에서 리스트가 짤막하게 언급한 적도 있으면 리스트의 대화로 보면 조르주 상드에 대해서는 크게 미련이 없는 모양. 리스트 말로는 이미 시간이 꽤 지난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

이후 2시리즈에서 쇼팽의 무지크 곡인 영웅 플로네즈가 나올 때 패드 군의 설명으로 한 번 더 언급된다.


[1] 일반적인 프랑스어 발음 및 표기법에 의하면 "Sand"에서 "d"는 묵음으로서 발음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상"으로 표기해야 하지만, 조르주 상드의 성 "Sand"는 한때 연인이었던 쥘 상도(Jules Sandeau)의 성(姓)인 상도(Sandeau)를 축약한 필명이기 때문에 'd' 발음을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상드"로 표기한다. [2] 프랑스군 대원수인 그 모리스 드 삭스가 상드의 증조할아버지 뻘이다. 상드의 할머니 마리 오로르가 모리스 드 삭스의 사생아였다. 마리 오로르는 친어머니 마리-기네비어 린토의 갖은 노력에도 친아버지 모리스에게 한 번도 친자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외모가 너무나 닮아 친자확인이 무의미할 정도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모리스의 추천으로 루이 15세의 며느리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가 소식을 듣고 궁으로 불러 양녀로 맞이했으며 왕족에 버금가는 교육을 시켰다. 마리아 요제파는 양녀를 위해 오로르가 18세가 된 1766년 43세의 호른 백작과 정략결혼까지 시켜 주었으나 마리아 요제파와 그녀의 남편인 루이 왕세자까지 모두 사망해, 프랑스 왕실과의 연이 끊어지는 바람에 이후 오로르는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삭스 가문을 존경하는 왕족들과 귀족들로부터 번갈아 가며 연금 후원을 받아 살았다. 어머니와 사창가로 돌아가 살았다는 한국의 일부 칼럼들은 사실이 아니다. 극장을 순회공연하는 배우이자 하프, 피아노 반주자였다고 하는 오로르의 어머니는 내연남과 동거하며 딸을 키울 후원금을 여러 경로로 받아내며 살았다. 이후 오로르는 아내와 자식을 일찍 잃은 지식인이자 부동산 부호인 루이 뒤팽을 알게 되어 후원을 받던 도중, 뒤팽이 오로르의 이모에게 청년기 시절 연정을 품었던 인연 덕분에 사이가 진전돼 1777년 결혼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계속되는 잦은 혁명 속에서 땅문서를 숨겼다는 이유로 투옥되면서까지 오로르가 지켜낸 뒤팽의 유산 중 하나가 바로 노앙의 240헥타르가 넘는 영지와 저택이다. 조르주 상드는 이런 할머니의 삶에 대한 여러 루머가 보도되는 것에 흥미를 갖고, 이를 반박하기 위해 비교적 상세히 프랑스와 폴란드 왕실계보를 뒤져 가문의 계보와 내력에 대한 자서전을 썼다. 모친인 마리-기네비어 린토와 다른 삶을 살았던 오로르에게 루머가 많은 것은 부동산 부호이자 결혼 당시 처자식을 모두 잃은 루이 뒤팽의 재산을 노리던 이들이 많았는데, 그가 딸뻘이었던 오로르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으면서 닭 쫓던 개가 된 그들이 오로르의 행실에 대해 악의적인 뒷이야기를 많이 남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드는 또한 오로르의 후원 방식에도 흥미를 얻어 미인이자 쇼팽의 제자로 악기연주에 재능을 보이며, 친한 화가들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한 먼 친척뻘인 오귀스틴을 수양딸로 맞아 기르고 친딸의 절반 정도나 되는 상당한 결혼 지참금을 주었다. 이 지참금 액수로 인해 싸움이 생긴 것은 후술. [3] 상드는 상술했듯 조모 집에서 자랐는데, 조모가 죽자 몇 년 간 따로 살던 어머니가 쫓아와 재산을 먹튀하려고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가 반가웠으나 사랑하는 조모의 공간에서 계속 살고 싶었던 상드에게 계속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파리에서 살 것을 강요하기도 했는데, 본래 목적은 그 재산으로 상드의 뜻과는 상관 없이 재혼을 하려 했던 것. 그 시대에 어린 여성이 살아 있는 부모에게서 독립하거나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결혼 외에는 극히 드물었기에 급하게 혼사를 치른 셈이다. [4] 변호인에 따르면 상드의 재산을 마음대로 집행하고 수 차례 외도를 일삼았으며, 미술과 음악, 문학을 주제로 취미나 토론을 제안해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통보도 없이 자주 손님을 초대해 요리와 접대를 강요했으며, 요조 숙녀와 다르게 세상 일에 관심이 많다며 사람들 앞에서 비웃었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상드가 차에 설탕 대신 모래를 넣자 얼굴을 구타했다고 한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잘 하는 편이었고, 별거 중에 태어나 사실상 자신의 아이가 아닌 솔랑주에게는 최소한이나마 아버지 노릇을 하려고 노력했다. 솔랑주가 상드와 척을 졌을 때는 자신의 거처에 잠시 머물게 해 주기도 했다. [5] 이혼이 쉽지 않았던 19세기 실정을 생각하면 사실상 이혼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1835년에는 법적으로도 이혼에 성공한다. [6] 열렬히 사랑했으나, 전 남편의 폭력 트라우마가 있던 상드에게 또다시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결별하게 되었다. 상드는 뮈세와의 이별이 괴로워 머리를 자르고 한동안 우울하게 지냈지만 뮈세의 폭력성에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연인이 아닌 지인으로만 지내기를 원했다. [7] 다만 메리메는 딱 이틀 만나고 찼으며, 메리메가 일방적으로 좋아한 것에 가깝다. [8] 쇼팽은 성문화에 대해선 보수적인 편이라, 처음 상드를 만났을 때는 '이상한 여자다. 저건 여자가 맞기는 한가?' 수준으로 나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성품이 대범하던 상드는 상드대로 예민하고 극히 섬세한 쇼팽을 보고 '쟤는 남자 맞냐? 뭔 아가씨냐?'라고 생각했고. 다만 첫인상이 그랬을 뿐, 개인적인 만남에서 상드가 피아노와 기타를 잘 연주하는데다 지식과 음악 취향에 접점이 많음을 알고 호감을 키워가게 되었다고 한다. 점차 서로 사랑에 빠져 성격차를 극복해 간 상드와 쇼팽의 관계는 상드의 표현에 따르면 연인 사이였던 기간은 3개월 정도였으며 이후로는 마치 어머니와 아들 같은 관계였다고 한다. 노앙과 파리 집에 있는 프라이팬 갯수만 50개, 접시는 200개가 넘는다고 할 정도로 요리실력이 뛰어난 상드의 음식 솜씨에 반해 거처를 따로 하던 시절에도 자주 저녁을 먹으러 가는 등 긴밀한 관계로 약 10년 동안 무사하게 잘 지냈다. 영지에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길러 먹었으며 매년 잼을 직접 만들었다는 상드는 종종 쇼팽이 좋아하는 프랑스와 폴란드 식의 국수나 크루통이 들어 있는 수프를 아침으로 만들어 주고, 원고 작업이 바쁠 때도 쇼팽이 좋아하는 뜨거운 스위스 코코아를 챙겨주어 새벽마다 기침이 심한 쇼팽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쇼팽의 건강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성격이 신경질적으로 변한 것 등의 이유로 둘의 관계는 점차 위태로워지다가, 끝내 상드의 딸인 솔랑주의 혼사 문제로 완전히 틀어졌다. 쇼팽은 처음에는 솔랑주와 그 남편감의 사이를 마뜩찮게 여겼으나 상드와 솔랑주가 열렬히 찬성해 마음을 바꾸고 그들을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이 젊은 부부는 사치와 낭비벽이 몹시 심해 빚을 많이 졌다. 그 와중 상드가 수양딸인 오귀스틴에게 지참금을 넉넉히 주어 시집보내자, 솔랑주와 그 남편은 수양딸에게 줄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친딸과 사위의 빚을 갚아 줬어야 한다며 난리를 쳤고 심지어 사위는 장모인 상드를 폭행하기까지 했다. 곧 이 부부는 이사를 가게 됐는데, 당시 솔랑주가 임신 중이어서 먼 길을 가기 힘들어 마차가 필요했기에 쇼팽에게 도움을 청했다. 쇼팽은 돈 문제로 싸움이 난 줄은 모른 채 솔랑주에게 마차를 빌려주고, 상드에게는 어머니로서 임신 중인 딸을 이해해 주라는 편지를 썼는데, 상드는 이를 쇼팽이 솔랑주를 편든 것으로 받아들이고 화가 나서 다시는 노앙에서 볼 일이 없길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어 결별했다. [9] 1836년에 리스트가 쇼팽과 상드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때는 쇼팽이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나 2년 후 연인과 헤어져 슬퍼하던 쇼팽을 상드가 위로하며 연인으로 발전한다. [10] 쇼팽과 상드가 가슴으로 낳은 딸이라고 할 만큼, 이들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은 천재 메조소프라노 겸 작곡가. 뛰어난 피아노 실력과 작곡능력 덕분에 쇼팽으로부터 직접 쇼팽의 곡을 가곡으로 편곡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며, 쇼팽은 상드의 자식에게도 만들어주지 않은 자장가를 폴린의 아기를 위해 만들었다. 상드는 폴린을 주인공으로 단편을 쓰기도 했고, 폴린도 상드의 이야기를 읽으며 당대에 드문 가사 내용에 맞게 표정과 제스처를 도입하는 연기파 성악을 시도해 전 유럽의 전설이 되었다. 훗날 사라 베르나르가 보여준 연기 스타일을 미리 성악에 접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쇼팽과 상드 커플이 아이를 돌봐 준 덕분에 투어를 돌 수 있어 이들에게 늘 감사했다고 하며, 그 유명한 상드의 코멘트인 '공연을 망설이는 쇼팽에게 차라리 불 꺼진 홀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피아노를 치라고 했다'가 바로 폴린에게 쓴 편지 내용이었다. 둘을 부모처럼 생각한 폴린 또한 훗날 쇼팽과 상드가 결별했을 때 화해시키고자 최선을 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수많은 예술가들의 짝사랑 대상이었지만 상드가 소개해 준 극장장 비아르도와 결혼해 네 아이를 낳으며 결혼으로 인생이 나락으로 간 상드의 친딸 솔랑주와는 달리 안정적이고 유복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결혼 후에는 개인 살롱을 열어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여담이지만 입양한 다섯째 아이는 바로 평생 그를 짝사랑한 투르게네프가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다. 아이를 맡기고 하녀가 야반도주하자 곤경에 처한 투르게네프를 안쓰럽게 여긴 폴린은 남편과 상의하고 입양을 결정해 사랑으로 길렀다. 이들 부부의 은혜를 입은 투르게네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생 폴린을 뮤즈로 경배하고 플라토닉한 태도로 존중했다. [11] 분실된 것까지 더하면 4만 통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12] 쇼팽과도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지만, 헤어진 이후 유족들로부터 쇼팽의 편지를 전해 받은 상드는 쇼팽의 부고를 듣고 크게 앓아 누웠다 일어난 직후인지라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모두 불태웠다. 시기에 따라 모임에 나간 후 우연히 마주쳤을 때 손을 내밀어 인사했다가 쇼팽으로부터 거부당하자 이후 태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작 쇼팽은 이 순간을 반대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내심 반가워 자식들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건넨 후 다시는 단 둘이 만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13] 이 사건을 심각하게 보고 상드와 공유한 빅토르 위고 또한 레 미제라블에 이러한 소녀가 겪어 온 가혹한 현실을 녹여 넣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서는 생니를 뽑고 머리를 깎이고 굶주리며 죽음으로 내몰리는 프랑스 하층민 여성의 비극을 생생히 볼 수 있다. [14] 10대 시절 상드에게 전원생활을 가르쳐 준 유일한 혈육이자 배다른 오빠 이폴리트는 내연관계로 태어났기에 할머니 오로르에게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프랑스에서도 상드 가문은 사실상 손녀 대에서 끊긴 것으로 본다. [15] 빗방울 전주곡의 뒷이야기로,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 폭풍우를 만나 마차를 잃고 새벽에 간신히 돌아온 상드에게, 당신이 죽고 나 홀로 남겨질 것이 두려웠다고 말하는 쇼팽을 위로하며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먼저 떠나지 않을 것이라며 상드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전주곡에는 원래 제목이 없었으나, 지휘자 폰 뷜로가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해당 곡에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16] 여담이지만 이런 투쟁 덕분에 상드는 앵디아나 연재 시절에는 이미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그리고 인기절정의 시기에는 신인 남성작가의 10배가 넘는 고료를 받았다. 그 수익으로 하인들을 고용해 생활한 대저택과 파리 아파트 시절 임대료, 아이들의 기숙학교 학비와 생활비, 양녀의 양육비는 물론 다양한 기부활동과 창당 자금줄이 될 만큼 파리에서 손꼽히는 부를 누렸다. 쇼팽이 공연을 망설이자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벌어들인 수입으로 여름시즌 3개월을 놀면서 보낼 수 있다는 편지로 종종 쇼팽이 먹여 살렸다는 구절이 넷상에 종종 보이나, 상드는 태생이 상속녀이자 첫 소설부터 히트 작가였기에 이는 사실이 아니며 쇼팽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기 위해 리스트처럼 1회 공연에도 3개월 생활비를 벌 수 있다고 예로 들어 설명하고 상드도 쇼팽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능력자라고 자랑한 것 뿐이다. 상드의 손녀들이 저작권을 넘길 때, 그의 소설 8편이 한화 50억 원 대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상드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상드와 한때 친구로 지낸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는 여기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첫 장편소설을 쓰면서 다니엘 스턴이라는 남성 예명을 지어 활동했고, 상드처럼 출판사로부터 직접 원고료를 받았다고 한다. 마리는 리스트와 사귀면서 여느 귀족들처럼 남편 다구 백작과는 졸혼을 한 상태가 되었으며 공식 서명은 여전히 다구 백작부인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나이 차가 많은 정략결혼 후, 아이를 낳고 살다가 각자 연인을 만나면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나누며 각자 생활하는, 일종의 현대식 졸혼과 비슷한 결혼생활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