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Третья битва за Харьков Schlacht bei Charkow, Die dritte Schlacht bei Charkow Third Battle of Kharkov |
|
시기 | |
1943년 2월 19일 ~ 3월 15일 | |
장소 | |
소련 우크라이나 SSR 하리코프 | |
교전국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마르키안 포포프| ]] [[틀:깃발| ]][[틀:깃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틀:깃발| ]][[틀:깃발| ]][[필리프 골리코프| ]] [[틀:깃발| ]][[틀:깃발| ]][[루드비크 스보보다| ]] |
]][[틀:깃발| ]][[니콜라이 바투틴| ]]
[include(틀:깃발, 문서=에리히 폰 만슈타인 ,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 [include(틀:깃발, 문서=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 [include(틀:깃발, 문서=파울 하우서 ,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 [include(틀:깃발, 문서=헤르만 호트 ,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 |
전력 | |
최소 21만 명 |
최소 7만 명 최대 12~13만 명[1] |
참전 부대 | |
중부 전선군 제16항공군 |
제1기갑군 제4기갑군 제4기단 제6기단 |
결과 | |
나치 독일의 승리 | |
피해규모 | |
전사 및 실종: 45,219명 부상: 41,250명 |
전사 및 실종: 4,500명[A] 부상: 7,000명[A] |
[clearfix]
1. 개요
독소전쟁 중 1943년 2월 19일부터 3월 14일까지 소련 우크라이나 SSR 하리코프를 둘러싸고 벌인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 독일에서는 '도네츠 전역', 소련에서는 '돈바스-하리코프 작전'으로 부른다. 이 전투에서 독일 국방군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지휘 아래 나치 독일이 승리를 거두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위기에 처했던 동부전선이 잠시 안정화되었다.2. 배경
2.1. 후퇴하는 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막바지에 이른 1942년 12월, 시가지의 독일 제6군을 포위한 소련군은 소(小) 토성 작전의 후속으로 독일 돈 집단군과 A 집단군[4]을 목표로 삼은 공세를 준비하였다. 스탈린그라드 서쪽에서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 안드레이 예료멘코의 남부 전선군이 기병/기갑 전력이 증강된 제1, 2, 3근위군과 제51군을 선봉으로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을 보로실로프그라드와 로스토프로 밀어붙였다. 작전의 목표는 돈 집단군과 후퇴 중이던 독일 A 집단군의 연결을 차단하는데 있었다.한편 독일군 지휘부는 대혼돈 상태였다. 특히 히틀러가 돈 강 남안의 쿠반 반도에 A 집단군이 잔류할 것과[5] 전략 예비대 투입 거부를 주장하여 만슈타인은 A집단군 엄호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군의 공세가 시시각각 몰아치는 와중에도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의 후퇴는 신속하지 못했다. 만슈타인은 A 집단군의 생명줄인 로스토프를 사수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홀리트 분견군과 급조된 프레터피코 분견군[6]이 치르 강을 필사적으로 사수하려 했다.
하지만 두 분견군의 양측 공백이 지나치게 넓었다. 12월 24일, 북쪽으로 소련 제1, 3근위군, 제5전차군, 제5충격군이 압박을 가해 왔고, 남쪽으로는 제2근위군, 제51군, 제28군이 몰려왔다. 1월 3일, 양 분견군은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도네츠 강으로 밀려났다. 이어서 소련 제51군의 제4기계화군단[7]이 로스토프를 목표로 돈 강으로 진격했으나, 이는 6호 전차 티거로 무장한 제503중전차대대에 의해 간신히 저지되었다.[8]
1월 7일, 지모프니키에서 교전이 발생했으나 503 중전차대대의 활약으로 18대의 T-34가 작전 불능이 된 반면, 티거의 손실은 1월 9일에 2대, 10일에 2대에 불과했다. 한편 양군은 혹한에 작전을 방해받았다. 1월 24일, 날씨가 잠시 풀려 도로에 웅덩이가 형성되었으나 26일 강추위로 다시 결빙되는 바람에 기동이 어려워졌다. 이어서 3일간 강풍을 동반한 폭설이 몰아쳐 전황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1월 27일, 만슈타인은 이 때를 틈타 제1기갑군을 로스토프 북쪽에 배치해 홀리트 분견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또한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주장에 따라 제1기갑군 사령부 및 예하 군단 사령부들을 로스토프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서류상으로 기갑군이었을뿐, 실질적으로 이동한 병력은 1개 기갑사단, 1개 보병사단, 2개 보안사단에 불과했다. 나머지 부대는 일시적으로 제17군과 함께 쿠반 교두보에서 수세로 돌아섰다. 만슈타인 입장에서는 무척 실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북쪽에서는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작전으로 필리프 골리코프의 보로네시 전선군의 제40군, 제6군, 제3전차군이 돈 강 상류를 따라 이탈리아 제8군 잔존 병력을 일소하며 진격했다. 1월 24일, 브랸스크 전선군의 제13군이 제38군, 제60군, 제40군과 합류하여 보로네시 돌출부와 돈 강 상류를 방어하던 독일 제2군의 3개 군단 중 2개 군단을 포위했다.
그리고 별(즈베즈다) 작전으로 보로네시 전선군의 제40군, 제69군, 제3 전차군과 남서 전선군의 제6군, 제1 근위군, 제3 근위군이 마르키안 포포프 기동 집단을 선봉으로 로스토프 북서쪽에서 쇄도해 왔다. 만슈타인은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의 제 1기갑군 병력과 헤르만 호트의 제4 기갑군 병력도 끌어와 이 공세를 차단하려 했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로스토프에 대한 압박을 풀기는 힘들어 보였다.
2.2. 낙관주의에 빠진 소련군
천왕성-토성 작전의 연달은 성공으로 고무된 스탈린과 스타프카는 곧바로 다음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소련군의 작전 역량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의 전력 회복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전사자 50만의 피해는 쉽게 복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아직 전투 효율성도 독일군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캅카스 수복을 넘어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한다.이는 딱 1년전 모스크바 공방전 직후와 유사한 상황으로, 그 때도 스탈린은 방어전에 승리하고 독일 국방군 전체를 이긴 것인 양 착각하여 전 전선에서의 반격을 명령한 적이 있었다. 제한적 축선에서 모든 자산을 집중한 반격도 힘들 지경인데 독일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라는 건 누가 봐도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었지만 서기장 동지가 까라면 깔 수 밖에 없었다. 일명 '42년 동계 전역'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멍청한 총반격은 재앙으로 끝났으며 이 때 소련군 피해 덕분에 독일군이 청색 작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는 스탈린을 다시 들뜨게 만들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대전에서 큰 전환점 중 하나이긴 했으나, 그 승리 하나만으로 독일 국방군이 전부 붕괴될 것이라는 건 엄연히 착각이었다.[9] 제 6군이 독일 야전군 중에서 상당한 정예부대 중 하나라 할지라도, 대전략 관점에서 냉정하게 따져보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독일군은 기껏해야 1개 야전군 및 제4기갑군과 이탈리아 제8군의 일부였다.[10] 또한 독일군은 6군이 항복하기 직전까지도 구출을 위해 러시아 남부로 대독일 기갑척탄병사단 등 최정예 국방군 사단과 SS 부대들을 집결시키고 있었고, 이들은 최신형 병기들도 우선 보급받은 상태였다. 즉 스탈린그라드의 손실은 컸지만, 러시아 남부전역 자체는 작전술적으로 아직 독일군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련군에게 더 심각한 것은 주코프와 바실렙스키같은 스타프카 수뇌들과 바투틴을 비롯한 전방 사령관들마저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는 것이었다. 1942년 겨울, 스탈린이 총반격을 지시했을 때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강력히 반대했다가 둘 다 좌천된 과거가 있었으나, 1943년 겨울에는 이 둘조차도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탈린과 스타프카[11]가 오판을 깨닫건 말건 소련군은 하리코프와 벨고로드, 쿠르스크에 대한 공세 작전인 '별 작전(Операция Звезда)'과 '질주 작전(Операция Галоп)'을 구상한다. 우선 별 작전으로 보로네시 전선군이 독일 잔존 B 집단군을 격파하여 하리코프와 쿠르스크로 나아가는 사이, 질주 작전을 통해 남서전선군, 남부전선군이 후방의 돈 집단군을 분쇄하여 드네프르 강 너머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 작전의 골자였다.
3. 전개
3.1. 소련군의 별 작전 개시
1월, 골리코프의 보로네시 전선군이 별 작전을 개시하였다. 골리코프는 키릴 모스칼렌코 중장의 제40군과 류발코 중장의 제3전차군으로 하여금 북쪽에서 벨고로드와 하리코프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모스칼렌코가 하리코프 남서쪽으로 파고들면서 헝가리 제7군, 이탈리아 알파니 군단을 강타했고 그 뒤로 제3전차군이 몰아쳤다.1월 28일, 소련 제40군, 제3전차군, 제69군은 독일 제3군과 제3군단의 얇은 남쪽 측면을 돌파하였다. 곧바로 제3전차군이 하리코프로 진격했고, 제40군은 벨고로드를 휩쓸기 시작했다. 하리코프 일대까지 소련군이 몰아닥치자, 이에 B 집단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남작은 후베르트 란츠 산악대장이 이끄는 란츠 분견군을 급조해 4개 사단만으로 버티고 있는 하리코프 북방면의 방어를 지시했다. 또한 최정예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을 벨고로드로 전개하였다. 하지만 란츠 분견군만으로 4개 야전군을 막아내는건 절망적이었다. 유일한 변수는 이제 막 하리코프에 사령부를 차린 파울 하우서의 SS 기갑군단으로, 당시 휘하에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이 편제되어 있었다.
2월 2일, 질주 작전으로 남서전선군도 군사행동에 나서게되었고, 선봉으로 4개 전차군단, 2개 전차여단, 3개 소총병 군단, 2개 스키 여단으로 구성된 포포프 기동집단이 2월 초 돈 강을 넘어 독일군 후방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1근위전차군단과 제25전차군단이 예비대로서 포포프 기동집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2월 4일, 제69군이 독일의 정예부대인 대독일기갑척탄병 사단을 맞아 진격이 지연됐지만 결국 목표였던 볼찬스크에 도착해 하리코프를 남쪽에서 압박하기 시작했다.
2월 6일, 히틀러는 란츠에게 SS 기갑군단을 이용해 하리코프 북쪽으로 쇄도해오는 보로네시 전선군에게 반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남서전선군에 대해 역공을 가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2월 10일자로 벨고로드가 함락되고 서쪽 폴타바를 향한 도로를 제외하고 3면이 차단되었기에 이는 말도 안되는 명령이었다.
란츠는 이 무리한 명령에 진짜 복종할 뻔했지만 하우서는 명령을 거부했고 란츠 또한 반격 계획을 철회하고 바익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바익스는 히틀러에게 하리코프를 포기할 것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바익스를 경질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고, 2월 13일에 B 집단군을 해체하고 돈 집단군과 합쳐서 남부집단군을 재창설하였다. 그리고 그 사령관에는 만슈타인이 임명되었다.
3.2. 소련군의 하리코프 탈환과 만슈타인의 계획
2월 8일, 로스토프에서는 소련군 제2근위군과 제28군이 접근하자 독일 제4기갑군과 홀리트 분견군이 2월 8일을 기해 로스토프에서 철수해 미우스 강 서안으로 밀려났다.2월 9일에 소련 제6군, 제3전차군과 제12전차군단은 야음을 틈타 도네츠 강 도하에 성공하여 하리코프 동쪽의 LSSAH의 방어선을 강타했다. 하지만 요제프 디트리히가 이끄는 LSSAH의 강력한 분전으로 제3전차군의 진격속도가 둔화된다. 제3전차군의 발목을 잡는데 성공한 LSSAH는 14일에 하리코프 시로 철수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168사단도 벨고로드에서 서서히 철수했으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철군 중 소련군의 공격을 받아 169사단이 하리코프 북부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남서로 이동하는 동안 남부로 후퇴하고 말았다.
2월 10일, 상술했듯 소련의 모스칼렌코의 제40군이 독일 제169사단을 축출하여 벨고로드를 완전히 점령하고, 도네츠 강 도하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한편 벨고로드가 함락되자 란츠는 하리코프 동부의 독일군이 포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리코프 시내로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명령에 따라 LSSAH와 다스 라이히, 제168사단은 하리코프로 철수했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벨고로드와 하리코프를 잇는 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2월 11일, LSSAH 사단과 1개의 다스 라이히 사단 소속 기갑척탄연대는 하리코프 남동쪽에서 소련군에게 공격당해 3일동안 30마일의 진격을 허용하며 적의 공세에 밀려난다. 소련의 제6기병군단은 그들의 우월한 험지기동능력을 이용하여 독일 전차들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2월 12일, 포포프 기동집단이 크라스노아르메스카야에 도달했다. 2월 15일에 남서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은 새롭게 들어온 2개 전차 군단을 추가증원하여, 파블로그라드를 관통하여 드네프르 강 상류에 있는 자포로제를 목표로 진격을 시도하여 하리코프 후방을 장악하려 했다. 자포로제는 교통의 요충지로 로스토프로 향하는 철도, 도로의 허브이자 당시 돈 집단군, 제4 항공군의 사령부가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도시였다.
2월 13일, 소련의 제4전차군단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고 하리코프 북쪽외곽에 방어라인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란츠는 소련군에 대한 반격을 명령하고 하리코프의 방어선 정비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끌도록 했다.
2월 14일, 6기병군단을 추격하던 그로스도이칠란트와 SS들은 벨고로드-하리코프의 철로를 따라 진격한 소련 제40군의 맹렬한 공격에 직면했다. 소련의 제183소총사단이 도시 북부 수미 인근에 도착했고, 곧이어 2개의 사단이 추가로 도착했다. 40군의 잔여병력들은 하리코프 후방의 남서쪽으로 이동하였고, 같이 진격하던 제3전차군은 하리코프 외곽에 도시로 진입가능한 10km의 회랑을 개척했다.
한편 같은 14일자, 하리코프 남쪽의 로스토프에서는 소련의 남부전선군 예하 제2근위군, 제28군이 독일 제1기갑군의 잔존 병력과 시가전을 치르며 결국 로스토프를 탈환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로스토프에서 지연방어로 시간을 버는데 성공한 클라이스트의 A 집단군은 1기갑군, 제17군을 포함해 무사히 후퇴하는데 성공했다.[12]
2월 15일, SS 군단의 기갑부대들은 더 이상의 도시 외부에서 교전을 포기하고 하리코프로 귀환했다. 아직 하리코프 자체는 독일군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곧 소련군이 결국 도심 진입에 성공하였다. 이에 독일군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을 서쪽, 다스 라이히는 북쪽, 증강된 LSSAH 1개연대는 동쪽, 320사단은 남동쪽에 배치하여 방어를 명령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SS 기갑군단장 하우서는 결단을 내렸다. 시가전에서 무의미하게 기갑자산을 까먹느니 하리코프를 빠져나가겠다며 란츠에게 통보한 것이다. 뒤늦게 하우서의 탈출 통보를 접한 란츠는 기겁하며 SS 기갑군단의 탈출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소련군이 도심으로 밀려들자 결국 후퇴를 승인했다. 북부 교외의 다스 라이히 사단이 우선 후퇴하자 소련군이 그 틈으로 쇄도해 들어갔고 다스 라이히 소속 기갑척탄병들은 소련군 제160소총사단과 제16전차군단을 맞서 분전했지만 공격을 막아내는데 실패했다.
2월 16일, 마침내 소련군은 하리코프를 탈환했다. 하우서의 탈출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엄청나게 분노했다. 히틀러는 란츠가 하우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며 란츠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켐프 분견군을 지휘하고 있던 베르너 켐프 대장을 임명했다. 이때 란츠 분견군도 켐프 분견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월 17일,
2월 18일, 그러는 동안 하리코프의 켐프 분견군과 로스토프에서 퇴각한 제1기갑군 사이로 하리토노프 중장의 소련 제6군이 맹렬한 공세를 감행하여 마침내 두 야전군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했다. 켐프 분견군의 남부를 돌파한 소련 제6군은 곧 SS 기갑군단의 배후인 크라스노그라드를 향해 접근하였다. 게다가 남서전선군 휘하 쿠즈네초프 중장의 제1근위군과 포포프 전차군이 남쪽의 파블로그라드에서 철도망을 차단한 것도 모자라 선두의 전차들은 남부 집단군 사령부 동쪽 약 45km 지점까지 진출하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히틀러까지 소련군에게 잡혀버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히틀러는 극도로 분노해 만슈타인에게 고래고래 화를 냈지만 화낸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 때, 제40기갑군단의 감청반이 어마어마한 대어를 낚아왔다. 다름아닌 소련군이 차량 연료와 기타 보급이 고갈상태로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감청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천왕성 작전 이후 연속된 대규모 공세에서 비롯된 일로, 이 시점의 소련군은 병참선이 지나치게 신장된 상태였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해당 첩보를 기반으로 구성한 기동 방어 작전과 하리코프 역탈환 계획을 설명하며 히틀러를 거듭 설득했다. 히틀러는 당연히 탐탁지 않아 했지만, 만슈타인은 일찍이 OKH의 모든 장성들이 마지노 선 돌파 계획을 생각할 때 구데리안과 낫질 작전을 내놓아 프랑스를 6주만에 함락시켰고, 바르바로사 작전 때는 제56기갑군단을 이끌고 북부집단군의 일원으로 유일하게 작전 목표를 달성했고, 크림 반도와 케르치 반도 공략을 입안하고 수행했으며, 세바스토폴 공략도 예상보다 더 적은 피해를 입으며 완수해온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직전의 겨울폭풍 작전에서도 150km를 진격해 제6군을 거의 구출할 뻔했다.[14]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소 만슈타인을 아니꼽게 보던 히틀러도 개인감정을 빼고 전공만 따지고 봤을 때 결국 만슈타인을 믿을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요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히틀러는 여기에 덤으로 전력이 약화된 7개 기갑, 기갑척탄병 사단을 남부집단군에 배치시켜 주었다.
2월 19일, 보급이 한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제1근위군과 제6군은 자포로제를 향해 계속 진격했다. 만슈타인과 제4 항공군 사령관 볼프람 폰리히트호펜 상급대장[15]은 히틀러에게 즉시 자포로제를 빠져나갈 것을 요청했고, 히틀러는 간발의 차이로 자포로제 비행장에서 전용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떠나는 데 성공했다. 그 동안에도 비행장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으니 정말 간발의 차였다.[16]
이어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예하의 호트의 제4기갑군, 마켄젠의 제1기갑군, 홀리트 분견군, 켐프 분견군, 하우서의 SS 기갑군단, 리히트호펜의 제4항공군의 재정비를 속행했다. 그 결과 남부집단군은 한달 전 만해도 하루 평균 350소티의 항공 지원이 최대치였으나, 이제는 1,000소티에 달하는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만슈타인의 반격 준비는 점차 갖춰지고 있었다.
3.3. 소련군의 작전 규모 확대
한편, 1월에 시작한 하리코프, 로스토프에 대한 공세가 성공적으로 돌아가자 스탈린과 스타프카의 기대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군 후방을 향한 과감한 진격으로 남부집단군이 붕괴 직전 상태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자, 스타프카는 토성 작전의 목표를 훨씬 거대하게 만들어 그 대상을 독일 중부집단군까지 확대한다.스탈린과 주코프는 지난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6군이 항복하자 해당 방면에 묶여있던 병력들을 즉시 재배치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군 사령부와 예하 소총군 중에 제65군, 제21군이 새롭게 편성된 제2전차군, 제70군과 합류하여 보로네시-리브니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았으며 돈 전선군은 중부 전선군으로 개칭되었다. 제16항공군과 제2근위기병군단도 이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나머지 돈 전선군의 제24군, 제64군, 제66군은 스탈린그라드 지역에서 재편성을 거치고 바투틴이나 로코솝스키의 명령에 따라 어디에라도 투입되기 위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확대된 별 작전은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해 연속적으로 3개의 공세 작전을 펼치기로 되어 있었다.
1단계: 2월 12일에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이 협격하여 오룔 돌출부의 독일군을 포위.
2단계: 2월 17일에서 2월 25일 사이에 이들 2개 전선군이 새롭게 투입된 중부 전선군과 조우하여 브랸스크 일대의 독일군을 일소하고, 데스나 강을 넘을 공고한 교두보를 확보.
3단계: 25일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이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남쪽의 이웃 전선군과 협동하여 르제프-뱌지마 돌출부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섬멸.
이 모든 공세들은 보로네시 전선군과 남서 전선군의 승전 시기와 맞아떨어지도록 조정되었다. 이런 작전에 근거해 소련군은 3월 중순에 드네프르 강 서쪽까지 진출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2단계: 2월 17일에서 2월 25일 사이에 이들 2개 전선군이 새롭게 투입된 중부 전선군과 조우하여 브랸스크 일대의 독일군을 일소하고, 데스나 강을 넘을 공고한 교두보를 확보.
3단계: 25일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이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남쪽의 이웃 전선군과 협동하여 르제프-뱌지마 돌출부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섬멸.
그러나 계획과 실제로 시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로코솝스키의 충격 집단은 재편성에 불과 6일의 시간밖에 배당받지 못했고, 새로운 지역으로 공세를 준비하는 데 5일만 받았다. 제2전차군과 제2근위기병군단은 이미 리브니 지역에 집결해 있었으나, 제70군은 겨울의 러시아 도로를 200킬로미터 이상 이동해야 했고 제21군, 제65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철도, 도로를 통한 장거리 이동을 감행해야 했다. 게다가 초봄의 눈과 라스푸티차가 수시로 발생해 집결지에서 공격 예정지로 이동하는 도로조차 심각한 상태가 되어있었고 스탈린그라드로부터 북쪽으로는 오직 단선의 철도선 하나만 존재했기 때문에, 위의 계획일정은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로코솝스키도 이 계획에 반대를 표시했지만 상부의 명령이라 별 수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애로사항 때문에 중부 전선군은 2월 25일 당일에도 산하의 제2전차군과 제65군이 철도 하차점에서 공격 집결지로 이동 중이었다.
3월 1일, 이 때까지도 로코솝스키는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북쪽으로는 독일 제2기갑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남쪽으로는 독일 제2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제79군은 전방으로 추진하여 바토프의 우익에서 전열에 합류했으며, 독일군 후방 깊숙한 오룔과 브랸스크로의 진격을 노리고 있었다. 3월 7일, 크류코프의 기병-소총병 집단은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의 외곽에 도달했다. 이로써 독소전 전체의 동계 전역을 통틀어 붉은 군대 최대의 진격 성과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소련군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이미 만슈타인의 낚시바늘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3.4. 만슈타인의 '뒷치기': 포포프 기동집단의 궤멸
만슈타인을 비롯한 남부집단군의 독일군 수뇌들은 애시당초 소련군의 공세를 전면에서 직접 막을 생각이 없었다.만슈타인은 제40 기갑군단의 감청 정보에 기반해 소련군의 공세종말점을 예측하여 전형적인[17] '기동 방어'(Mobile Defence)[18][19]를 통해 소련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소련군은 진격목표 달성이라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들어 독일군이 단순히 패퇴하는 줄로 착각하고 조금씩 함정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남서 전선군의 포포프 기동집단은 드네프르 강 북안까지 진격하며 계속된 출혈과 연장된 병참선으로 인해 진격속도가 저하되고 있었다. 로코솝스키의 중부 전선군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오룔을 향한 로코솝스키의 돌파구는 깊숙한 진격으로 인해 양익이 허술해졌고 해당 방면에 독일군 증원병력들이 집결하고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역으로 포위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로코솝스키는 아직 스탈린그라드에서 재편성 중이던 제21군, 62군, 64군을 끌어오려 했지만 이동에만 한 세월이 필요했고, 라스푸티차로 인해 후속병력들의 집결이 늦어지자 중부 전선군은 오룔의 남서쪽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딫혀 진격을 정지하였다. 로딘의 제2전차군을 브랸스크에서 오룔로 옮겨왔지만 이건 되려 중부 전선군의 좌익과 중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곧이어 독일 제2군의 여러 사단들이 집결하여 반격을 시작하였고, 결국 확대된 토성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다시 시선을 남부집단군 쪽으로 돌리면, 소련군의 공세가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만슈타인은 드디어 벼르던 반격을 개시했다. 제 1 목표는 남부집단군 사령부가 있는 자포로제를 줄기차게 위협하며 후방을 휘젓고 다니는 포포프 기동집단과 그 후속인 제1근위군, 제6군이었다. 당시 포포프 기동집단은 파블로그라드에서 진격이 잠시 돈좌된 상태인데다가 무리한 진격과 보급문제로 가동가능 차량 규모가 군단급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만슈타인은 포포프 기동집단을 일거에 포위해버리기 위해 마켄젠의 제1기갑군 예하 제40 기갑군단은 북서쪽과 북동쪽으로, 하우서의 SS 기갑군단은 동쪽으로, 호트의 제4기갑군 예하 제48 기갑군단은 북쪽으로 진격시켜 파블로그라드 일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2월 20일에 다스 라이히 사단이 파블로그라드 시내에 돌입해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22일에는 소련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마켄젠의 제1 기갑군은 북동쪽과 북서쪽의 사단들을 넓게 전개시켜 포포프 기동집단 및 제6군의 포위망을 넓혔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태를 인지하지 못한 포포프는 "우리 군은 (하리코프에서) 퇴각하는 독일군의 진로를 차단 중."이라는 전문을 모스크바에 보내고 있었다. 마켄젠은 이 전문을 감청하며 낄낄 웃었다.
2월 23일, 그제서야 포포프는 함정에 빠졌다는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북동쪽에서는 마켄젠의 제1기갑군이, 남쪽에서는 호트의 제4 기갑군 소속 제40 기갑군단이, 서북방면으로는 SS 기갑군단이 쇄도하면서 포포프 기동집단과 제6군에 대한 압박을 시작했고 파블로그라드 동쪽에서는 제4기갑군 예하 제48기갑군단이 제1근위군을 강타했다.
2월 24일, 포포프 기동집단과 제1근위군, 제6군에 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자 만슈타인은 공격 암호 "봄이 왔다. 봄이 왔다."를 발령했다. 명령을 받은 호트와 마켄젠은 소련군을 떡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포위당한 소련군은 혼비백산하며 사방에서 몰려오는 독일군의 공세에 무너져 갔고 그리하여 제6군, 제1근위군, 포포프 기동집단은 궤멸되었다. 여기에 하리코프 수복 후 폴타바로 향하던 소련 제3전차군과 제69군 또한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에 협공당하면서 전투 불능 상태에 빠져버렸다. 이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이 퇴로를 차단, 공격하자 두 야전군 또한 궤멸당하고 말았다.
만슈타인의 기동 작전 한번으로 포포프 집단은 완전히 소멸했다. 순식간에 3개 야전군이 사라지며 소련군 남부전선에는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버렸고, 소련의 남서 전선군은 붕괴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3월이 되자 만슈타인은 하리코프에 대한 진격을 속개했다.
3.5. 독일군의 하리코프 재탈환과 전투 종결
포위전의 결과로 삽시간에 소련군의 전선에는 200km에 달하는 공백이 발생했고, 스탈린과 스타프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대재앙에 경악했다. 게다가 토성 작전 확대로 많은 부대들이 르제프와 데미얀스크 공략에 투입되는 바람에 정작 하리코프에는 제25근위소총병 사단과 기타 제대 몇 개 이외에는 별 다른 수비병력이 없어서 사실상 무주공산인 상태였다.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 바투틴은 중부집단군 방면에 배치된 류발코의 제3전차군을 하리코프로 긴급투입했지만, 하우서의 SS 기갑군단이 이를 정면에서 차단했다. 이어서 측면으로 호트의 제4 기갑군 예하 제6, 17기갑사단이 밀고들어오고, 아직 전력이 온전했던 켐프 분견군까지 가세하자 제3전차군은 하리코프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개박살이 나고 말았다.
굉장히 유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얼마전의 대참사를 기억하고 있던 만슈타인은 곧장 도시로 진입하지 않고 제1기갑군을 하리코프의 북서쪽, 제4 기갑군은 북동쪽으로 이동시켜 하리코프를 포위하였다. 그리하여 제1기갑군은 도네츠 강 남안에, 제4기갑군의 선봉은 하리코프 남쪽에서 약 16킬로미터 밖에 있는 모슈 강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3월 5일,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보고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 3월 7일, 흡족해하던 히틀러는 즉시 하리코프를 재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하필 그 때 라스푸티차가 시작되는 바람에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때문에 히틀러가 원하는 대로 하리코프를 재빨리 점령할 것은 힘들어 보였지만, 하늘이 독일 편이었는지 곧 강추위가 시작되어 진흙탕이 됐던 도로들이 죄다 얼어붙어 버렸다. 그 덕에 기동이 원활해지자 만슈타인은 호트와 상의 끝에 하리코프를 스탈린그라드의 속편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SS 기갑군단이 모슈 강을 도하해 켐프 분견군과 합세하여 하리코프를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조금씩 포위망을 좁히기로 결정했다.
한편, 러시아 남부 전선에서 이런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스타프카는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세를 이어나갈 예정이었다. 같은 7일, 로코솝스키는 공세 규모는 축소하되 공격은 지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겨우겨우 제21군을 전선에 합류시키고 공세를 시작하려 하자, 독일 제2군도 같은 날에 제4기갑사단과 헝가리군 부대로 로코솝스키의 서쪽 측면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다. 이에 맞선 크류코프 휘하 소련군 제2근위기병군단은 계속된 진격에 지쳐있던 데다가 너무 넓게 산개되어있어 독일 제2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지 못했다.
3월 9일, SS 기갑군단은 명령을 받고 모슈 강을 도하하여 하리코프 시 외곽에 다다랐다. 하우서는 공격을 망설일 생각이 없었던 데다가 히틀러가 상황이 괜찮으면 하리코프 시를 점령해도 좋다고 하자 LSSAH 사단을 선봉으로 하리코프 시 공략을 시작했다. LSSAH 예하 제1 SS 기갑척탄병 연대는 제1SS기갑연대의 전차와 돌격포 지원을 받아 연대장인 프리츠 비트 대령이 지휘하는 '프리츠 비트 전투단'으로 개편되었고 하리코프 북쪽 방향에서 소련군의 방어망을 분쇄해 나갔다.
이 때 쿠르트 마이어 소령이 지휘하던 LSSAH 직할 기갑수색대대는 대담하게 하리코프 시의 중심지인 붉은 광장으로 빠르게 진격해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소련군과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마이어의 너무 과감한 공격이 소련군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제2 SS 기갑척탄병 연대 제3대대장인 요아힘 파이퍼 소령이 단 2대의 하프트랙을 '파이퍼 전투단'으로 편성해 마이어의 기갑수색대대 구출에 나섰다.[20]
소련군의 공격이 파이퍼 전투단으로 집중되어 파이퍼가 직접 MP40을 잡고 교전해야 할 정도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전투단은 결국 붉은 광장에 도달해 제1 SS 기갑수색대를 지원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제2 SS 기갑척탄병 연대 1대대가 증원되면서 SS는 붉은 광장을 거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시내의 소련군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붉은 광장은 LSSAH 기갑수색대대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라이프슈탄다르테'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3월 14일, 치열한 시가전 끝에 소련군 최후의 거점인 하리코프 트랙터 공장이 점령되면서 하리코프 시가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탈출하던 소련군은 다스 라이히와 토텐코프의 포위망에 걸려 섬멸되었다. LSSAH는 벨고로드로의 진격을 속개하여, 벨고로드 또한 점령했다. 이어서 독일 남부집단군이 하리코프, 벨고로드에서 북상하여 중부 전선군의 측면을 압박하려하자 스타프카는 제62군, 제64군을 로코솝스키에게 보내 어떻게든 하리코프 북쪽 방면의 전선을 유지하려 했고, 중부집단군에 대한 모든 공세를 중단하고 로코솝스키에게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 1943년 동계 공세는 만슈타인의 계략에 크게 한방을 먹은채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은 급격하게 소련 측으로 기운 독소전쟁의 균형추를 어느 정도 독일 측으로 되돌려 놓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독일군은 이번 승리로 소련군의 흐름을 한번 크게 꺾어 한숨 돌릴 수 있었고, 해빙기로 도로망이 엉망이 된 덕분에 당분간은 소련군의 공세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반면,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와 르제프에서 입은 인적 손실에 이어 이번 전투에서도 52개 사단을 날려버렸다. 이래저래 양군은 몇개월간은 제대로된 군사활동을 펼칠 수가 없었다.
이 전투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마지막으로 거둔 대규모 승리이다. 만슈타인이 하리코프와 벨고로드를 재점령함에 따라 소련군 쪽에서 한 지역이 전선에서 돌출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전차전으로 유명한 쿠르스크였다. 전선 축소를 위해 독일군은 해당 돌출부를 제거하고 싶어했고, 이 쿠르스크를 둘러싼 전투는 쿠르스크 전투 항목을 참고.
5. 평가
5.1. 독일군
후방이 적 전차부대에게 들쑤셔지는 상황에서 독일군은 파탄날 뻔한 러시아 남부전선을 보전하는 것을 넘어,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이는 작전술적으로 굉장한 전과다.독소전쟁 전황 전체를 보자면 독일 중부집단군까지 몰아붙이려던 소련의 야심 자체를 좌절시켰다. 물론 로코솝스키의 공세는 다소 무리가 있었으나, 그래도 위협적인 공세 중 하나로 평가받음을 생각하면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은 물론이고 중부집단군도 보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전투 직전에 클라이스트가 A 집단군을 무사히 후퇴시키는데 성공해서 남부전선에서 소련군은 더 이상 스탈린그라드에서 얻은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남부집단군의 병력 대부분은 겨울폭풍 작전으로 소모되거나 스탈린그라드 이후 패주한 병력들이었다. 이런 병사들로 해당 전황을 극복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군사학적 관점에서도 의의가 깊다. 본 전투에서 만슈타인은 고전적인 기만 전술의 2차 세계대전식 해석을 보여주었는데, 포포프의 병력을 종심 깊숙히 끌어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도록 유인, 소련군의 양익으로부터 격리시켜 버리고는, 돈좌된 포포프의 병력의 후방을 기동 부대로 차단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만슈타인의 '뒷치기' Schlag aus der Nachhand다. 이걸 실전에서 성공적으로 실행함으로써 만슈타인은 이전의 전투들과 더불어 명장으로 찬양받게 되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만슈타인의 기지로 엄청난 역전승을 거두었음에도 독일군이 처한 전략적 불리함을 무마할 수는 없었다. 유명한 전쟁사가인 데이비드 글랜츠나 앤터니 비버 모두 이 전투는 독일의 전략적-전술적 대승이긴 하지만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독일군이 승리한 1944년의 마켓 가든 작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파멸의 시간을 잠시 늦췄을 뿐,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략적 처지는 하리코프 전투 이전에 비해 그다지 바뀐 것이 없었다.
소련이 50여개 사단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소련군 사단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여파로 이미 하리코프에 도달하기 전에 각 사단의 정원이 3000명 이하로 내려갔고,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병력손실은 8만여명에 불과했다.[21] 그리고 이 정도면 독일의 3배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소련측으로서는 견딜만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독일군은 이미 스탈린그라드에서 수십만명의 최정예 병력을 잃어버렸고 더이상 공세를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서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동안 북아프리카로 파견된 13만명의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집단군이 항복 직전에 있었으며, 서방 연합군의 압박과 전략폭격도 점점 가시화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점점 불리해질 뿐이었다.
또한 이후 히틀러의 행보도 엄청난 문제가 되었다. 독일군 장성들이 이쯤에서 전략적 후퇴를 하기를 바랐고, 베니토 무솔리니 같은 경우는 히틀러에게 그쯤해서 스탈린과 강화하기를 기대했으나[22]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고 이듬해 여름 쿠르스크 돌출부를 향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이후 결과는 쿠르스크 전투 참조.
5.2. 소련군
소련은 독일군이 아직 얕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곤 더 이상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교리 정립에 힘쓰게 되었다. 특히 소모의 한계를 넘어선 공세는 역공을 초래한다는 전훈을 엄청난 피를 흘리고 깨달았는데, 이후 쿠르스크 전투나 바그라티온 작전에서는 전력이 소진되기 전에 진격을 중단하고 재편성시키는 과정이 완전히 자리잡았다. 특히 독일군은 점점 심해지는 총통의 히스테릭한 후퇴불가 명령 때문에 전략 예비대가 부족했는데, 이러한 제파식 종심 돌파교리에 맞설 수 있는 굳건한 방어선을 세우지 못하고 매번 치명적인 돌파를 허용하게 된다.또한 히틀러와는 반대로, 대숙청 등으로 스타프카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쳐온 스탈린이 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쟁 지휘에 간섭을 상당히 줄이게 된다.
6. 기타
- 독일군은 하리코프를 재점령한 후, 미처 후퇴하지 못한 소련군 병원의 부상병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기에 책임이 있는 독일군 지휘관 세 명은 훗날 소련의 군사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 1943년 8월 3일에 소련군은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을 개시, 20일간의 전투 끝에 8월 23일 하리코프를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두 번 다시 나치 독일군은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제3차 하리코프 전투가 실패로 끝난 지 5달 10일이 지난 뒤였다.
- 알파캣이 그리는 월드 오브 탱크의 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에선 이 전투를 다루며 명장 만슈타인의 대승이라고 평했다. # 크롬이나 파이어폭스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7. 같이보기
[1]
반격전 개시 당시
[A]
제2SS기갑군단 기준
[A]
[4]
캅카스 일대로 진출했던 병력.
[5]
이는 추후 캅카스 유전 지대를 재공략할 기회가 생겼을 때
아조프 해 방면의 유일한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
분견군은 독일군의 편제로 군단과 야전군의 중간급 제대로서, 군단과 사령부가 확대되어 다른 이웃 군단들까지 지휘할 때 편제되는 임시 편제다. 대개 지휘관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7]
이후 곧 제3근위기계화군단으로 개칭된다.
[8]
이때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6군의 저항 때문에 상당수의 소련군이 제때 배치되지 못한 것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9]
전황 자체는 소련에게 유리해지긴 했다. 저번 후퇴와는 달리 이번엔 B 집단군의 핵심인 제6군이 아예 소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물량면에서도 소련은 독일을 완전히 압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10]
여기에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과 함께 되려 1000만명을 징발했다.
[11]
소련군 최고사령부
[12]
클라이스트는 그 공으로 원수로 승진했는데 후퇴에 노이로제를 보이던 히틀러가 후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며 그 공을 치하하고 승진시킨 드문 예였다.
[13]
실제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해임해 버리고 자신이 직접 남부집단군을 지휘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4]
겨울폭풍 작전 실패는 50km를 앞두고 돈좌된 것과 그 50km를 돌파할 기력이 없을 만큼 6군이 엉망진창이 된 것이 컸다. 만약 만슈타인이 조금 더 접근했거나 6군에게 최후의 돌파를 시도할 수 있을 정도의 기갑장비가 있었다면 정말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의 기적적 탈출로 끝났을 것이다.
[15]
그 유명한
붉은 남작과는 사촌간이다.
[16]
여담으로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가 떠나자마자 만슈타인은 히틀러 뒷담을 잔뜩 깠다고 한다.
[17]
언제까지나 지금 기준으로 전형적인 것이지, 당시엔 내로라하는 천재들이나 상상할 수 있었던 신개념과 다름 없었다. 바로 그렇기에 만슈타인의 '뒷치기'가 그의 천재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이 뒷치기는 두루뭉실하게 속도 빠른 전차를 쓰면 슐리펜 계획의 실현이 가능하겠지 식으로 고안한 적색 상황 계획과는 급이 다르게 치밀한 계획이었다.
[18]
탄력적 방어(Elastic Defence), 종심 방어(Defence in Depth)라고도 부른다.
[19]
본 전투 외에 르제프 전투에서도 발터 모델에 의해서 실시되어 인간 분쇄기라는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20]
아르덴 대공세의 그 파이퍼 전투단 사령관 요아힘 파이퍼가 맞으며, 그의 '파이퍼 전투단'은 바로 이때 창설된다.
[21]
독일측 손실은 1만여명이다.
[22]
실제로 독일 측에서는 이 시점에서 소련과의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업적으로 생각했던 리벤트로프는 흥미를 가졌고 괴벨스 역시 히틀러에게 소련과의 협상을 요청했다. 또한 스탈린에게 있어서도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재앙을 빠르게 극복해내는 독일군의 저력을 재평가하였고 영토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예상되는 상황에서 공짜로 독일군을 소련 영토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은 흥미가 동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레벤스라움, 특히 우크라이나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스탈린이 이것을 양보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으며 이는 정확했다. 동시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고 있던 서방 연합국 역시 지중해 중심의 전략을 펼치면 소련의 비중이 너무 높아져 소련이 전유럽을 정복해버리는 상황이나 반대로 소련이 단독강화로 전쟁에서 빠져나가 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스탈린이 이전부터 요청해오던 유럽 본토에서의 제2 전선을 구축할 것을 결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