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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하우스만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
James Harry Hausman
파일:제임스 하우스만.png
▲ 말년의 모습
<colbgcolor=#000><colcolor=#ffffff>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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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8년 2월 28일
사망 1996년 10월 5일 (향년 78세)
복무 미합중국 육군
1934년 ~ 1968년
최종 계급 중령 ( 미합중국 육군)
참전 여순 사건
6.25 전쟁

1. 개요2. 생애
2.1. 이승만 관련2.2. 박정희 관련
3.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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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합중국의 군인이며, 미국 중앙정보국 CIA 소속 정보장교. 미군 군사고문단 참모장, 중앙정보국(CIA) 한국 책임자(미국 육군 방첩대 CIC 한국 책임자), 미8군사령관 특별고문, 주한유엔군총사령관 특별고문직 등 여러 직위를 역임하였다.

한국군의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군의 아버지'로 칭하였으며, 1946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에 머무르면서 한국 현대사의 주요사건들에 관련된 인물이다. 그 중요성에 비하여 CIA 정보장교라서 더글라스 맥아더 존 하지 군정 사령관에 비하여 일반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2. 생애

하우스만은 1918년 미국 뉴저지주 러니미드에서 태어났으며, 16세에 형의 이름을 빌려서 군대에 지원해서 제임스 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40년 하사, 1941년 1월 24일 소위로 진급하였으며, 6개월만에 대위까지 초고속 진급하였다. 1944년 3월에 75사단으로 발령받았고, 벌지 전투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 1946년 7월 26일 한국에 파견되어서, 미 육군 대위로 조선국방경비대 창설을 지원하였다. 광복군 출신 장교 대신에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우대하였다. 춘천 8연대 창설연대장으로 1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8연대를 조직하고 훈련시켰으며, 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 대령의 보좌관을 하였는데, 조선국방경비대 집행국장(Executive Officer)이 되었고, 미군정청 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고문관으로 승진하였다.

베로스 대령이 제주로 발령된 후로는 사실상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역할을 하였다. 하우스만은 김완룡, 이지형을 시켜 미군 조직법을 번역해서 군대조직법을 만들게 하여 한국군 건군에 관여하였다. 1949년 7월 1일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KMAG 주한 미군 군사고문단 참모장으로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하였다. 이승만과 자주 면담하였으며 경무대에서 자주 드나들었다. 1949년 9월에는 숙군으로 사형을 선고 받은 김종석의 총살 장면을 녹화해 이를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 교과서'로 삼았다. 여수와 순천에서 14연대 반란이 일어나자,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으로 진압 작전을 사실상 지휘하였으며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진압한 공로로 미국공로훈장을 수훈받았다.

1950년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하였고, 1951년 미국 국방정보국(DIA) 에 전근하여 한국담당 정보과장을 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미군 군사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56년 3월에 주한미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3월 1일 박정희의 쿠데타 기도를 감지하고 보고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와 만나서 면담하고 미국에 가서 브리핑하였다. 1968년에 육군 중령으로 제대하였으며, 다시 미8군사령관 특별보좌관이 되어서 정년을 맞은 1981년 7월 1일까지 한국에 군사고문으로 머물렀다. 1996년 10월 7일 사망하였다. #

1997년 1월 15일 백선엽, 김일환, 유재흥, 민기식, 임선하, 이용(1923), 류병현, 김완용, 황헌친, 강영훈, 최영희(군인), 김점곤 등 한국군 예비역 장성들과 한미 현역 군인들 1백여명이 모여 하우스만 추모예배를 가졌다. #

한국일보에서 정일화가 하우스만과 인터뷰한 증언록을 1990년 10월부터 1991년 6월까지 '한국 땅서 35년, 미군장교의 증언: 하우스만 회고록' 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일보에 연재하였고, 이를 모아서 1995년 둘의 공저로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美軍대위 : 하우스만 증언>을 출간하였다. #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이 어떤 사람인지는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그의 고향에서조차 그가 한국 땅에서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는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에게 그가 알려진 것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이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이것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면서부터였다. 이 책이 출판되면서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이것조차 이전부터 그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군 관계인물이나 그의 배후 역할에 주목한 언론인·정치학자·역사학자들에 한정되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는 하우스만 개인을 다룬 논문이 이미 2편 나와 있다. 하우스만에 대한 논문을 최초로 쓴 사람은 밀레였다. 최근 도널드 클락은 한국군 형성과정에서의 하우스만 뿐 아니라 한강교 폭파 등의 쟁점에 대해서도 언급한 글을 한 심포지움에서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하우스만의 역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와 있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하우스만이 행했던 역할을 군 형성과정의 비사(秘史) 정도로만 취급하고 인식하는 데에도 일정한 원인이 있다. 하우스만이 주로 정보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우스만과 가까이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정일권이나 백선엽 조차 그들의 회고록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하우스만을 언급하고 있는 정도이다.

정일권이나 백선엽의 책을 아무리 자세히 훑어보아도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다. 전직 한국군 장성들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하우스만을 언급하기를 꺼렸다면, 그 이유는 하우스만이 이들 장성들과 너무나 가까운 사이여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하우스만이 너무나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순사건 때 정보장교 자격으로 최초의 정보군 관계 대책모임에 참석했던 고정훈의 회고록에는 하우스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나와 있다.

하우스만은 1946년 7월 26일 남한에 첫발을 딛은 이래 국방경비대 고문관·미군사고문단장 고문을 지냈고 1950년에는 채병덕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내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배후무대에서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하우스만은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자칭했다. 자신의 회고록 제목 또한 그렇게 지었다. 어떻게 보면 당돌하게 보이는 이런 표현은, 그러나 사실에 가깝다. 아니 미군 장성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일개 미군 대위가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단 말인가? 하우스만의 일생은 국군의 역사, 더 나아가 군부가 수 십년 간 좌지우지했던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대부분의 정보 업무가 그렇듯 그는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베일에 싸여 감추어지기에는 활동영역이 너무나 컸고, 고위층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미국의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30년을 한국에서 보낸 가장 주요한 미국 요원이었으며, 미국과 한국군부 간에 그리고 이들 정보기구 간의 연결자로서 활동했다고 썼다.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었으며, 한국판 에드워드 란즈데일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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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군 수뇌부의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는 하우스만이라는 미군 고문관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우스만은 “그 때 모든 사령관의 파면, 임명이 내 손을 거쳐 갔으며 내가 사령관과 미 대통령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두 사람의 유일한 통로였다. 내가 어떤 사람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화 가능했으며, 내가 원한다면 국방부장관과도 바로 대화가 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모르면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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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정일권과 고문관 하우스만이 토벌중인 백선엽 부대를 조사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빨치산이 매복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도, 정일권은 체면 때문에 예정된 길을 가자고 주장했다. 이때 하우스만은 “정, 당신은 부참모총장이고 나는 참모총장의 고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이 길로 가기를 명령한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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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무쵸 주한 미대사가 재판도 없이 제주도에서 민간인 20명을 총살한 사실을 보고 받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때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과거에는 이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 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진보이다.”라고. 무쵸조차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던 이 의연한 대답은 그의 황폐한 정신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무쵸 대사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었고, 나중에 워싱턴에서 하우스만을 다시 만났을 때, “자네가 당시 그렇게 말했다네”라고 상기시켜 줄 정도였다.
이런 그의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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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우스만은 학살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수 천명의 공산당을 처형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는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었다. 다시 질문이 이어졌지만 하우스만의 대답은 “잔학 행위는 없었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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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초기에 하우스만은 장관들만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 미국인의 신분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경무대에 들어앉아 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하우스만은 10여 년이 넘게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최후 통첩을 한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이에 하우스만은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 하우스만은 송요찬에게 “당신이 가서 미국 정부는 경무대의 탱크를 철수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당시 하우스만은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김득중, 2001,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여순사건 제53주기 학술세미나 발표문 : 여순사건의 진상과 국가테러리즘 수록,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3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사이트가 개편되며 삭제됨 인권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 아카이브 스탠포드 대학 도서관 worldcat 웨이백 머신 아카이브

2.1. 이승만 관련

한국전쟁의 첫 번째 단계는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부터 야기되었다. 휴화산이고,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 자락에는 한국인과 일본군이 만들어낸 복잡한 동굴 요새와 은신처가 있었다. 1945년까지 일본군의 훈련장과 비행장으로 이용된 제주도는 일본군의 무기 저장소로 사용되었고, 규모가 크고 활동적인 인민위원회는 이러한 무기를 확보하여 저장해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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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위기는 하우스만 대위를 1950년 6월까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미군장교로 만든 일련의 사건들의 시작이었다. 바로스가 서울을 떠나자 하우스만이 경비대 사령관실에 파견된 유일한 미군장교가 되었으며, 경비대 확장과 한국이 독립한 이후 경비대를 국군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담당하는 주요 기획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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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의 강인하고 적극적인 성품은 한국인들과 잘 어울렸다. 군사고문단 부사령관인 스터링(W. H. Sterling) 대령은 하우스만을 만나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좋아하게 되는 육군의 '빌 로저스(Will Rogers)'라고 평하였다. 한국군 고위장교와의 개인적 친분과 이들의 가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그를 군사고문단의 필수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더구나 점차 향상된 그의 한국어 이해능력은 정보와 예측의 핵심적인 원천이 되었다. 로버츠는 하우스만에게 이 대통령을 포함하여 한국 관리들에게 현명한 지침을 제공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우스만은 신 장관의 고문관 자격으로 한국각료회의에 참석하는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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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국방경비대가 내부의 우익과 좌익의 파괴분자들을 일소하고, 규율을 강화하며, 경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이양받고, 경비대 자체의 정보망과 역정보망을 구축해야 제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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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반공주의자인 백선엽은 경비대내의 모든 파괴분자들의 가면을 벗기기 위하여 조용하면서도 대규모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늦여름 무렵, 그의 정보원들은 경비대내의 모든 공산당 하부조직원들을 회유하거나 체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였다. 이들은 여수의 제14연대를 국방경비대내에서 가장 위험한 부대로 간주하였고, 제14연대가 광주의 제4연대, 부산의 제5연대 그리고 대구의 제6연대의 탈주병들과 합세하여 새로 지급된 미군병기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 후, 한반도 남단의 2개 도에 걸쳐 있는 지리산에 게릴라 작전지역을 구축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하였다. 제14연대의 선임 고문관인 핀레이(Joe W. Finley) 중위와 현지 미군 CIC요원 역시 제14연대가 반란 직전에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핀레이는 이러한 의심을 갖고 서울에 왔는데, 임시군사고문단 G-2도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하우스만을 만나 이야기하였으며, 하우스만은 그의 말에 동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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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풀러 대령에게 선임 야전고문관 역할을 양도하였다 할지라도, 여순사건의 진압에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미군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전남에 대한 보급과 수송, 그리고 증원이 적절히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할 때까지 광주에서 백선엽과 함께 머물러 있었다. 그는 반군에 대한 재보급과 증강을 차단하기 위하여 해안경비대로 하여금 여수를 봉쇄하도록 로버츠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하우스만은 고립된 여수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탈환해야 하며, 반군을 궤멸시키기 위한 열쇠는 백암산과 지리산에서 이미 활동중인 소규모의 게릴라 무리들이 반군과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순천 북방의 구례와 동쪽의 하동에 경비대 대대들을 배치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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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여수사건 진압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보충역 대위에게는 흔치 않은 명예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았다. 게다가 로버츠는 하우스만의 정규군 임관신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성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의 신뢰를 얻었고, 한국어를 배웠으며, 그의 정보, 리더십, 성실성 등은 주한미군의 임무수행의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국인과 군인들이 하우스만 대위에게 보내고 있는 존경과 경의는 자신들이 그와 미군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고, 여수에서의 그의 참여와 건실한 자문은 향후 오랫동안 한국인들이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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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4월, 이승만 대통령과 채병덕 소장은 하우스만 대위를 초대하여 대통령의 75회 생일축하 분열식을 관람하도록 하였다. 수도사단과 기병연대의 말쑥한 군인들이 당당하게 행진하자, 이승만은 하우스만을 돌아보며 "당신의 군대가 자랑스럽겠군요"라고 하였다. 하우스만은 "이 군대는 대한민국과 대통령의 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승만은 "아니요, 이것은 당신의 군대요"라고 말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하우스만 대위와 한국군의 창설(1945~1950)
하우스먼은 비공개를 전제로 한국인들은 "잔인한 개자식"이고 일본인보다도 더 나쁘다고 말했으며[1], 한국인들에게 이를테면 처형한 시신을 가솔린으로 제거하여 처형 방법을 숨기고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에게 돌리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잔인성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브루스 커밍스, 2017,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196p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 나는 주한미군고문단장 특사자격으로, 그리고 육군으로 이름이 바뀐 국방경비대 사령관 고문자격으로 중대한 사명을 띠고 광주에 급히 설치된 여순반란사건 진압사령부에 급히 파견되었다. … 다만 내가 공식적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 사령부가 효율적 진압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진압사령부의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영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었던 것만 여기서 밝힌다"
1990.11.14 일자, 한국일보 9면, 하우스만 회고록

하우스만의 회고에 따르면, 명목상 계급과는 별개로, 미 8군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재량권으로 행동하였다. 또한 주한 미군 고문단의 계급상 상관인 대령들에게 명령하여 지휘하였다.
당시 나는 대위, 소령 계급이었지만 美고문단의 참모장직이었으며 윌리엄 로버트 고문단장(준장)은 본국 출장이 잦아 참모장인 나에게 단장 직무대행을 맡기곤 했기 때문에 한국 군부대에 나가 있는 중령, 대령 고문관들도 나의 명령권 안에 있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4p

백범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해서도 증언을 하였다. # 이후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 CIC 요원으로 명령에 따라서 누구든지 암살하겠다는 맹세를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김석원 장군이 고분고분하지 않았기에 싫어해서 중상모략을 하였고, 이승만이 참모총장에 임명하려는 것에도 반대했다. KBS와의 인터뷰

한국전쟁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에, 한강 인도교를 건너자마자 폭파해서 거의 죽을뻔했다고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03~204p 에서 증언하고 있다. 국사편찬위 김득중은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논문에서 크로포드의 증언을 근거로 한강 인도교 폭파의 배후로 제임스 하우스만을 지목했다. #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 하우스만 대위 증언록에 따르면, 25일 하오 의정부 전선에서 목격한 채 총장과 이형근 2사단장의 충돌은 볼썽사나웠다. 의정부 정면을 맡고 있던 3사단장 유재흥, 후방에서 증원부대로 온 2사단장 이형근이 참석한 작전회의 때였다. 채 총장은 두 사람에게 각각 포천과 연천 정면을 맡아 책임지고 공격토록 지시했다.
이 지시에 이형근이 불복했다. “부대 이동이 다 안 됐고, 소규모 부대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면서, 명령을 받지 못하겠다고 했다. 채 총장이 권총을 뽑아 쏘려 하는 것을 유 장군이 말렸다. 이 장군은 군번 1번이고, 채 장군은 2번이어서 둘은 사사건건 으르렁거렸다.
"北, 남침 징후" 잇단 보고 軍 수뇌부가 번번이 묵살, 왜?

백선엽의 회고에 따르면, 월튼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이승만이 운전병을 처형하려던 것을 말렸다고 한다.
한 번은 1953년 5월로 내가 첫 번째로 참모총장을 할 때였다. 이때 미 정보국에 근무 중인 하우스만 중령(한국 육군참모총장 고문관 역임)의 안내로 남성인(南星寅) 대위와 함께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펜트하우스에 거주하고 있던 맥아더 원수를 방문했다.
...
스피드광(狂)인 워커 장군이 타고 가던 지프가 국군 6사단 소속 병사가 몰던 트럭에 부딪힌 것이다. 그 직전에는 미9군단장이었던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이 헬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국군 1사단이 정신없이 임진강으로 후퇴하던 도중에 받은 슬픈 소식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운전병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으나 옆에 있던 군사고문관 하우스만 대위가 말리는 바람에 총살을 면했다.
백선엽 #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과의 갈등에 대하여 언급하며 비웃는다.

그 외에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과정에 관여하였다.

2.2. 박정희 관련

여수 순천 14연대 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박정희와 처음 만나게 된다.
광주토벌사령부에 내려온 짐 하우스만 대위는 미군사고문단장의 특사자격이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미국사람을 싫어하는 인물'이란 정보가 있어 그는 통역을 중간에 넣어 대화를 걸어보았다. 박정희는 영어를 상당히 이해하는 것 같았으나 영어로 말하려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는 이 때 속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이미 시동이 걸린 숙군수사가 자신에게까지 다가오지 않을까 불안에 휩싸여 있었겠지만 누구한테도 의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런 박정희를 더욱 불안하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사건이 생겼다. 박정희와 함께 남로당에 입당하고 있었던 '군내의 좌익거물' 최남근 15연대장이 토벌사령부로 연행되어 온 것이다.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31)

텍사스 오스틴 자택에서 인터뷰를 했었다.
당시 사령관 고문으로 활약한 제임스 하우스만(78)은 지난 2월 미국 텍사스 오스틴시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합헌정부를 지지한다는 매그루더와 그린의 성명은 제스처(Gesture)”라고 잘라말했다. 그는 “당시 주한미군은 어설픈 민주주의자였던 장면총리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었다”면서 “미국은 오히려 쿠데타를 환영했으며 진압은 말도 안된다”고 말했다. 하우스만은 이어 “성명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미국이 방관했다는 애기를 듣지 않도록 형식적으로 내놓은 것이었을 뿐 진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고 단언했다.
1995년 5월 11일 경향신문 11면, 서울—워싱턴 秘話(비화)50년 (15)「5.16과 美國(미국)」 [2]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카터 행정부 시기 주한 미군 철수 저지에도 관여했으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협력하였다.
하우스먼의 등장

1977년 5월17일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의 자리를 맡고 있던 필자는 오랫동안 가까이 알고 지내던 주한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제임스 하우스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용무가 있으니 가급적 가까운 시간 안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하우스먼은 韓美 군사협력 분야에서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는 1945년 9월 대위 계급의 美 육군 정보장교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남한지역에 진주한 美 육군 제24군단의 요원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그뒤 그는 대한민국 국군 建軍史에서 지워질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는 건국 초기 국군 조직에 관여했고, 1949년 주한미군 철수 후에는 美 군사고문단(KMAG)의 일원으로 남한에 잔류했으며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주한미군 소속으로 한국군과 주한미군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53년의 휴전 이후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양군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윤활유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1979년 朴正熙 대통령이 암살될 때까지 한국軍의 인사·조직·운영·작전 등 모든 영역에 하우스먼의 지문이 남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1977년에도 그는 여전히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의 특별보좌관이었다.)
베시 주한 미군사령관 비밀회담록과 朴正熙 대통령 앞 特上 보고서 全文-카터에 抗命하고 朴正熙를 도와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을 좌절시키다! #
하우스먼의 전화

1977년 5월17일, 그러니 워싱턴 포스트 기사가 나오기 이틀 전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인 李東馥씨는 오랫동안 가까이 알고 지내던 駐韓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제임스 하우스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용무가 있으니 가급적 가까운 시간 안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李보좌관과 하우스먼은 다음날 서울시청 맞은편 프라자 호텔의 한 객실에서 마주 앉았다. 여기서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李특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했다.
駐韓미군 철수저지工作의 내막 - 美 군부, 金載圭·朴正熙와 짜고 카터를 물 먹이다! #

그런데, 하우스만은 회고록에서 10.26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김재규와 차지철의 알력은 유명했었고,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밀려나자 참지못하고 충동적으로 박정희를 죽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김재규와 별로 만난적이 없어서 김재규를 잘 모른다는 투로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특별보좌관인 이동복의 월간조선 인터뷰 증언과 상충된다. 하우스만이 10.26 사건에서도 무언가 거짓말하면서 숨기는 것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하우스만은 10.26 사건은 이미 소상히 밝혀졌으므로, 본인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인들도 감히 박정희를 죽일 생각을 못하는데, 어떻게 미국인이 김재규를 부추겼을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아는거 말해서 뽐내지 않으면 근질거려서 도저히 못 참는 성격이라도 되는지, 사실 미묘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면서 말을 풀어놓는다. 그는 박정희 암살과 비슷한 사건으로 이승만이 미국에게 버림받게 된 사건을 언급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닉슨 독트린에 따른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겪고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위의 월간조선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특별 보좌관이었던 이동복의 증언과 살짝 다른 부분이다. 이동복은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철수를 저지할 당시에, 김재규와 미국 군부의 하우스만이 협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밤 8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참모부에서 급히 유엔司 지하상황실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지난 17년간 유엔군사령관 특보로 일해 와 가끔 야간에 8군 지하벙커로 호출되곤 했었다.
당시 한국 정치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을 때였다. 8군 지하벙커에서는 가끔 8군 요원들이 모여 험악해져 가는 한국 상황을 애기하곤 했다.
10월 초 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국회제명사건이 있었고 그후 10월 중순 釜馬사태가 일어나면서 8군은 긴장하고 있었다. 부마사태가 터진 직후인 10월 17일 부산지구에는 계엄이 선포되고 있어 법률상 작전지휘권을 가진 유엔군 · 8군 사령부로서는 지하벙커를 심심찮게 이용하고 있었다.
8군 참모장, 각 참모, 주한美중앙정보국 책임자 브루스터, 그리고 8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나 등이 모여 있는 가운데 유병현 副사령관이 들어와 대통령의 죽음을 알렸다. 지하벙커를 흔드는 급보였다. 긴장감이 엄습했다. 범인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김부장은 참을성이 좀 적어 보이는 분이었다. 뒤에 나의 생각이 꼭 맞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때 나는 '참을성의 기준'을 갖고 이 엄청난 사건을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축적된 긴장감이 마지막 1분을 못 넘기고 폭발한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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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차지철(경호실장)과 김재규(중앙정보부장)과의 알력은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김재규는 내가 창군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시절의 육사 2기생이지만 나와는 별로 만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그는 확실히 위기한계성이 큰 사람은 아닌 듯했다. 김재규는 차지철과 정보 경쟁을 벌이도록 박대통령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으며, 그의 정보가 차지철 정보에 밀려 무시당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상당한 위기감을 갖게 된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이 위기감의 마지막 1분을 참지 못한 채 일을 벌인 것으로 보였다.
이 엄청난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이미 소상히 밝혀졌기 때문에 내가 새삼 말할 입장은 아니다.
기자는 내게 이렇게 물어 왔다. "김재규는 육본 벙커에서 각료들을 모아놓고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말했다는데, 간접적으로라도 이 사건에 미국이 개입된 것이 아니냐"고,
나는 단호하게 이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김재규는 박대통령과 동향인이며, 박대통령과 사관학교 동기이며, 그리고 박대통령이 직접 양육한 인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국인도 金이 박대통령을 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미국인이 김재규에게 그런 부추김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물론 사건의 전말을 보면 사건의 미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한미 관계는 마치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美양원합동회의에 가서 미국 지도자를 훈계하듯 강경 연설을 한 뒤 미국 정부의 이대통령에 대한 신임이 급격히 떨어진 때와 비슷한 양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통령은 휴전 후 미국을 방문하면서 내셔널 프레스클럽, 샌프란시스코 연방클럽, 필라델피아 재향군인회, 로스앤젤레스의 세계문제협의회 등의 연설을 위해 올리버 박사에게 원고를 쓰도록 부탁했다.
올리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올리버 박사가 원고를 써 올릴 때마다 별로 고치지 않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양원합동회의 연설문은 스스로 썼다. 올리버 박사는 여러 번 사정하다시피 그 원고를 한 번만 보여 달라고 했다. 백악관 만찬 후 블레어하우스에서는 단 한 자도 고치지 않을 테니 그저 한 번만 읽어보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그 원고가 든 가방을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않은 채 완강한 거부 태도를 보였다.
올리버의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꺾을 수 없는 고집의 표시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7월 28일 드디어 의사당에 나가 "미국이 한국에서 對공산주의 전쟁을 벌벌 떨면서 그만두게 됐다"고 비난하고 "어리석게도 휴전에 동의했다"느니 "한국이 다시 공격받기 전에 워싱턴은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등의 일장 훈시를 했다.
그날 이대통령의 연설은 많은 박수를 받기는 했으나 미국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이승만과는 애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짓게 됐다.

박대통령이 78년 12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엉터리 선거'에 의해 제9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즈음 미국은 한국의 인권 문제와 민주화에 초조할 정도의 관심을 높이고 있었고 약간의 위협용으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있었다.
1979년 6월 29일 카터 美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 이 카터-박대통령의 만남이 양국에 얽힌 많은 문제를 풀어 줄 것을 빌었다. 그러나 박-카터 회담에서 박대통령이 회담 시간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면서 철군의 부당성을 들어 일방적으로 미국 행정부를 공격하는 발언으로 일관해 분위기가 밝게 끝나지 못했었다. 韓 · 美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카터 대통령도 차기 선거를 위해 미국 유권자들에게 줄 선물(인권 문제 등)을 별달리 얻지 못한 채 쓸쓸히 돌아갔었다.
그 뒤 가발 공장 여종업원들을 신민당사에서 끌어낸 소위 YH사건,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제명사건 등 계속 불행한 사태가 한국에서 발생했고, 이때마다 美국무부는 '개탄한다' 등의 非외교적 용어까지 써가며 박정희 정부를 비난했었다.
물론 나는 이 고차원적인 정치 문제를 애기할 처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내 직업 군인 생활을 송두리째 마친 입장에서 볼 때 양국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고 있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 김재규를 움직일 수 있었다거나 움직일 엄두를 낼 수 있었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17~20p

하우스만은 부마사태 계엄령 당시 작전권을 가진 미군이 8군 지하벙커에서 개입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5.18 광주사태에서도 마찬가지로 미국이 작전권을 행사하여 계엄군을 지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3. 관련 자료

내가 르포기자로서 받은 특종상이 하나 있다. 1991년 9월4일자 시사주간지 토요신문에는 전 주한 미군사령관 고문 제임스 H 하우스만을 최초 인터뷰한 ‘하우스만 특별인터뷰-대한민국 창군 비화’가 실렸다.
[차길진의 마이웨이 25] 내가 받은 특종상
김득중(2001),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여순사건 제53주기 학술세미나 발표문 : 여순사건의 진상과 국가테러리즘 수록,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3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사이트가 개편되며 삭제됨 인권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 아카이브 스탠포드 대학 도서관 worldcat 웨이백 머신 아카이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지 제40호, 하우스만 대위와 한국군의 창설(1945~1950)
Clemens, Peter. Captain James Hausman, US Army Military Advisor to Korea, 1946-48: The Intelligent Man on the Spot Th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Vol.25 No.1 [2002]: 163-198.
Millett, A. R. Captain James H. Hausman and the Formation of the Korean Army, 1945-1950 Armed forces and society, Vol.23 No.4 [1997]
Clark, Don. “Jim Hausman, Soldier of Freedom .” In History, Language and Culture in Korea: Proceedings of the 20th Conference of the Association of Korean Studies in Europe (AKSE). Youngsook Pak and Jaehoon Yeon, comps. London: Eastern Art Publishing, 2001.
James H. Hausman Archive, 하버드 대학 한국연구소 아카이브 제임스 하우스만 중령과 John Toland interview, 1988, Austin, Texas, 하버드 대학 한국 연구소 소장, 녹취록은 뉴욕 하이드 파크에 위치한 Franklin D. Roosevelt Library 에서 제공 개별 아카이브 목록
James H. Hausman Oral History Interview, August 198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트루먼 도서관 소장자료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주한미군 정보통 하우스맨 증언
어두운 현대사 가리기


[1] 하우스먼은 1987년 영국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야비한 놈(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이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