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7:14:17

제말 귀르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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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0a17>
튀르키예 공화국 제4대 대통령
제말 귀르셀
Cemal Gürsel
파일:Gürsel.png
출생 1895년 10월 13일
오스만 제국 에르주룸 주 에르주룸
사망 1966년 9월 14일 (향년 70세)
튀르키예 앙카라
재임기간 제4대 대통령
1960년 5월 27일 ~ 1966년 3월 28일
당적

[[무소속(정치)|
무소속
]]
학력 군사공학 대학교 (학사)
종교 수니파 이슬람 ( 세속주의)
배우자 멜라하트 귀르셀 (결혼: 1927)
자녀 외즈미히르 귀르셀
[clearfix]
1. 개요2. 생애
2.1. 1960년 5월 27일, 군사 쿠데타 전후2.2. 대통령 시절2.3. 사망

1. 개요

1960년 쿠데타를 일으켜 아드난 멘데레스 민주당 정권을 전복시키고 집권한 이후, 1966년 사망할 때까지 제4대 튀르키예 대통령을 역임했다.

2. 생애

2.1. 1960년 5월 27일, 군사 쿠데타 전후

튀르키예 육군 사령관을 지내던 1960년 5월 3일, 역사적인 편지를 국방부장관에게 보낸다.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도, 총리가 분열된 국민을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그 상징적인 조치로 젤랄 바야르 대통령을 하야시키라고 요구했다.

이에 격분한 멘데레스 총리는 즉각 귀르셀 사령관을 직위해제 시킨 뒤 이즈미르로 근신성 강제 휴가를 보냈는데, 귀르셀은 사령관직을 놓으면서 남긴 작별 편지에서 군대에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호소하는 내용을 적었다. 아무래도 이미 이때부터 군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1960년 5월 27일, 세속주의 성향 청년 장교단이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바야르 대통령, 멘데레스 총리 등 정권 지도부와 주요 민주당 인사들을 구금하고 이스탄불 앙카라에 있는 주요 민관 시설을 장악했다.

하지만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단 중 최고 계급이 대령 정도로 쿠데타 정국을 주도하기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작전을 성공시킨 후 강제 휴가 중인 귀르셀을 군용기를 통해 데려왔고, 군부가 세운 통치기구인 국민통합위원회(MBK)의 명의로 바야르의 뒤를 잇는 튀르키예 대통령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귀르셀이 이를 수락하면서 튀르키예의 제4대 대통령이자 군사 쿠데타의 지도자가 되어버렸는데, 약 한달 정도가 지난 7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청년 장교단의 쿠데타를 막으려던 입장이었지만 바야르 대통령과 멘데레스 총리 때문에 상황이 악화되어 막을 수 없게 되었고, 정의와 도덕에 기초한 행정부를 재건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맡았다고 항변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취임 당일 즉시 주요 법학자들을 소집해 신헌법 초안을 잡도록 지시하고, 3일뒤인 5월 30일에는 대국민의회를 소집해 UN 헌장, 세계인권선언 등을 기반으로 제2공화국을 출범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민주당 정권 시절 수감된 언론인들과 학생들을 전격 석방하고 강제 폐간된 신문들을 다시 발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자유화 조치를 연이어 밀어붙였다. 이때 총리직과 군 최고사령관직을 겸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이스메트 이뇌뉘 전 대통령과 손잡고 야스아다(Yassıada)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군사재판에도 개입해 바야르 전 대통령 등에 대한 감형을 요구했다. 결국 멘데레스 전 총리 등에 가해진 모든 처형을 막지는 못했지만 바야르 전 대통령 등 대부분의 구 민주당 정치인을 살리는데 성공했다.

한편 귀르셀을 포함한 군부가 제출한 신헌법은 1961년 7월, 국민투표를 통해 61.7%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신헌법에는 인권 관련 조항을 강화하는 한편 3권 분립을 더 강화하고 의회를 양원제로 개편하는 한편 대통령에게 무소속이 될 것을 강제하는 등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신헌법에 따라 치러진 1961년 총선에서는 공화인민당이 1당, 민주당의 후신인 정의당이 2당이 되었는데 두 당이 연정을 구성했고 이스메트 이뇌뉘 전 대통령이 어렵사리 총리직으로 복귀했다. 이후 공화인민당과 정의당은 귀르셀을 대통령으로 재선출하는데 동의했고, 귀르셀은 이번엔 의회의 지지를 통해 대통령직을 유지하게 됐다.

2.2. 대통령 시절

1961년 10월 26일, 튀르키예 대국민의회에서 열린 간선 선거를 통해 68% 득표율로 당선되며 대통령 임기를 연장했다. 귀르셀 대통령은 이 시점부터 군부와는 거리를 두고 이뇌뉘 총리와 공화인민당의 손을 잡고 오히려 급진적 군부세력을 억제하는 동시에 舊 민주당 지지층을 포용하는데 정책 중점을 둔다. 하지만 구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포용적이었던과는 별개로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MİT) 설립법 역시 귀르셀 임기 중 승인된다.

임기 중 폴란드가 사퇴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계승해 1년간 대행하고, 1961년 신헌법에 따른 헌법재판소를 1962년 새롭게 설치했다. 또한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 경제 공동체와 앙카라 협약을 체결해 준회원 자격을 획득했다.

튀르키예방송공사(TRT)가 만들어져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튀르키예 전국으로 보급된 것도 이 시기로, 특히 워낙 낙후되어 있어 방송은 언감생심이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 역사상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민주당 정권 때와 달리 강력하게 공화인민당이 주도하는 국가 주도 개발 정책을 지지했는데 국가 계획 기구(DPT)와 국가 통계 연구소(TUIK) 설립을 승인했고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인구 통제 계획이 진행된 것도 이때다. 또한 문화·관광 산업 발달에 관심이 많아 이를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또한 세계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행동을 하나 벌이는데,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란에서 1964년 추방되자 그의 망명을 받아줬고, 호메이니가 이라크로 떠나는 것을 요청하자 이 역시 허락한다. 이렇게 팔라비 왕조의 탄압으로부터 살아남은 호메이니가 결국 이란 이슬람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 이란을 신정국가로 만들어버렸으니 그 영향이 적지 않은 셈.

2.3. 사망

1960년부터 좋지 않았던 몸상태가 해가 지날수록 악화되자, 1966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전용기 지원을 받아 치료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지만 급작스럽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일단 다시 미국을 떠나 다시 앙카라로 돌아왔지만, 한달 넘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자 의사 위원회의 보고를 받은 대국민의회에서 3월 28일자로 귀르셀의 대통령 임기를 종료하기로 의결하고 제브데트 수나이를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결국 귀르셀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채 1966년 9월 14일, 사망했다. 사망 직후에는 아타튀르크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 구역에 묻혔다가, 1988년 케난 에브렌 대통령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어 현재는 국립묘지에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