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21:41:19

정순왕후(조선 단종)

정순왕후 송씨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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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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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 定順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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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조 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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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순왕후사릉.jpg
사릉 능침
출생 1440년
조선 전라도 정읍군 태인면
(現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사망 1521년( 중종 16년) 7월 17일( 음력 6월 4일)
(향년 81세)
조선 한성부 정미수 사저
(現 서울특별시)
능묘 사릉(思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454년 2월 19일 ~ 1455년 6월 24일
조선 왕대비
1455년 6월 24일 ~ 1457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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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여산 송씨
부모 부친 여량부원군 송현수
(礪良府院君 宋玹壽, ? ~ 1457)
모친 여흥부부인 여흥 민씨
(驪興府夫人 驪興 閔氏, 1418 ~ 1498)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녀
배우자 단종
종교 불교
봉작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
→ 노산군부인(魯山郡夫人)
존호 의덕(懿德)
휘호 단량제경(端良齊敬)
시호 정순왕후(定順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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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친정3. 생애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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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6대 국왕 단종의 왕비. 단종보다 1살 많았으며, 본관은 여산. 시호는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이다.

계유정난 이후 문종의 국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수양대군의 강권으로 단종과 혼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성대군 혜빈 양씨 등 자신의 지지세력들이 숙청당하자 남편이 숙부에게 양위하면서 정순왕후도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존봉되었다. 하지만 단종복위운동이 계속되자 남편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되고 그녀 또한 서인으로 전락했다.

2. 친정

여산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여흥 민씨[1]의 딸이다. 여산송씨의 중시조이자 고려 원종때 찬성사 중찬을 지낸 송송례의 8대손으로, 송송례는 왕의 밀명을 받들어 삼별초를 동원하여 권신 임유무를 처단하고 무신정권을 끝내므로써 왕정을 복고시킨 공이 있었다. 이에 두 아들과 손자들까지 고려말 권세와 지위가 높았던 세족이다. 정순왕후의 7대조는 추성보리찬화안사공신 도첨의사사중찬을 지낸 낙랑부원군 송분이며 5대조 송교는 문과를 거쳐 벼슬하던 중 아버지 송인(린)과 집안일족이 충선왕에 의해 주륙되자 벼슬을 버리고 운주산에 은거하였다. 고조부 송희는 후에 조선을 세우고 태종이 되는 이방원과 가까운 사이로 가정대부 공조전서를 지내며 태종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이는 송희가 태종의 부인 민씨(훗날의 원경왕후)의 외가 일족이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부 송복원의 누이는 정종의 7남 수도군의 부인이었고(정순왕후의 대고모) 부친 송현수의 누이도 세종대왕의 8남 영응대군에게 시집 가 왕의 며느리가 되었다. 영응대군은 단종의 친숙부로 대방군부인 송씨는 정순왕후의 친고모이자 숙모가 된다. 정순왕후 어머니 여흥부부인 민씨는 한명회의 부인인 황려부부인 민씨와 사촌지간이므로 예종비 장순왕후, 성종비 공혜왕후와 정순왕후는 외가로 6촌 지간이다. 부친 송현수와 세조도 어릴적 친하게 교류했던 죽마고우였으며 중종의 사부였던 순충보조공신 여원군 송연손이 정순왕후의 당숙인 것으로 보아 친정가문이 이전부터 왕실과 인연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말 충렬왕 충선왕의 권력싸움에서 패해서 노비로 전락하는 풍파를 겪었고( 천운으로 집안의 인척이었던 기황후로 인해 그들의 신분이 복원된다) 다시 세조에 의해 집안이 두번째로 노비로 전락하는 기구한 운명을 겪게된 것이다.

3. 생애

민담에 따르면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유배된 후에 결국 출가했으며[2], 단종이 죽은 후엔 무척이나 슬퍼해 매양 앞산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한다.[3][4] 청계천 영도교가 그녀와 단종이 헤어진 다리라고 하며, 이를 소재로 김별아가 <영영이별 영이별>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사실 신숙주가 폐서인된 정순왕후를 으로 삼았다거나 노비로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육신 사건과 같은 반정이 터지면 관련 부녀자들은 노비가 되는데, 이중 직접 관련 인물들은 관노도 아니고 대신들에게 사노비로 하사한 사례가 특히 조선 초기에는 많았다. 때문에 사육신 사건 이후에도 그 부녀들이 대신들에게 하사되었는데, 그 목록이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에게 내려진 것은 최면의 누이 선비와 조완규의 아내 소사와 딸 요문뿐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저런 청을 했다면,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 그야말로 미친듯이 까였을 것이다. 안 그래도 숙주나물 소리를 들으며 인간 말종으로 취급받는 판국이다.

조선 말 3대 문장가로 꼽히는 김택영이 쓴 역사서 '한사경'[5]에 "좌의정 신숙주가 노산군의 부인(정순왕후)을 노비로 삼고자 주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여러 아우들을 살해하여 임금의 지위를 훔친 것도 사악한데 (신숙주가) 단종의 부인을 노비로 삼겠다고 청한 것은 매우 간사하고 악한 짓"이라고 평했다. 물론 김택영의 저 기록은 전혀 문헌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무시당한다. 신숙주의 평가가 얼마나 떨어지고, 이후 신숙주를 비판하는 문학작품들이 나오는 계기 중 하나로 평가 받을 뿐이다.

기록 상으로는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4일 갑인 3번째 기사에 따르면 한편 세종대왕의 부마로 정현옹주의 남편인 윤사로는 공신이 되자 송현수의 딸을 상으로 받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세조 8년 3월 16일 기사를 보면 자녀들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10월 24일 기사에도 "송현수(宋玹壽)의 아내는, 노산군(魯山君)의 아내를 위하여 그 죄를 용서하고, 그 밖의 딸들은 역시 당연히 공신(功臣)에게 주어야 하는데" 라는 표현이 나온다. 앞선 기사에서 송현수는 관노가 되었고 그 일가도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가족들을 공신들이 나눠먹고 싶다고 욕심 부리는 내용이지만 그 와중에도 노산군비의 모친이라는 이유로 송현수의 아내는 풀어주라는 청원이다. 이걸 노산군비를 달라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다. 송현수의 다른 자손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6]

또한 정순왕후 관련 야사 중 한경지략[7]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지금의 청계천 영도교[8] 인근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는데, 이 시장의 유래도 정순왕후에 얽힌 이야기다. 정순왕후를 가엾게 여긴 인근의 여인네들이 정순왕후의 집에 끼니거리를 가져다 주었는데[9],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 일을 금지해 버렸다. 그러자 여인들은 꾀를 내어 정순왕후의 집 근처에 남자들이 들어올 수 없는 여자들만의 작은 채소 시장을 열어 채소를 파는 척 하면서 먹을 것들을 모아 정순왕후에게 몰래 가져다 주었고, 이것이 후에 영도교 인근에 생긴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정순왕후는 출가하지 않았고 지금의 동대문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경혜공주[10]의 아들로 그녀에게는 시조카가 되는 정미수가 수양아들로 들어오면서 그의 집에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고 한다.[11] 무척 장수해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중종 16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조선 역대 임금 중 2번째로 단명한 국왕인 남편[12]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역대 왕비 중 2번째로 장수한 왕비다.[13][14] 즉,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가 요절하고 뒤이어 세조, 예종, 성종의 치세를 거쳐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 한명회를 부관참시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행각을 벌이다가 폐위된 것, 세조의 또 다른 증손자인 중종이 즉위해 첫 번째 아내 단경왕후 신씨를 내쫓고 2번째 아내 장경왕후와 사별한 뒤 3번째 아내 문정왕후와 혼인하는 것까지 모두 보고 죽은 것이다.[15][16] 죽을 당시 세자였던 인종은 그의 먼 증손자뻘이 된다.

정순왕후 송씨는 여막에서 동냥을 하고 염색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17][18] 낙산에 정순왕후가 천을 염색할 때 사용했다는 자주동천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정순왕후가 물에 천을 넣자 천이 저절로 자주색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세조의 도움은 끝까지 거절했다. 세조는 그녀를 노비로 전락시켜 버렸지만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녀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죽기 얼마 전, 중종이 노산군의 묘지를 찾아 봉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 단종과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 그녀의 장례는 나라에서 대군부인의 예로 치렀는데, 정작 단종이 대군의 지위로나마 복위된 것은 그보다 160년 지난 1681년 숙종 때이다. 만일 그녀가 생존했다면, 예종 대 - 성종 대 - 연산군/중종 대에 이르기까지 대왕대비 추봉을 3번은 받았을 세월이었다.

그녀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사릉(思陵)이다.[19]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思)한 그녀의 일생에 걸맞는 능호. 경춘선 사릉역은 그녀의 이 능호에서 유래한다. 다만 사릉에는 사릉역보다 그 다음역인 금곡역이 더 가깝다.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에는 시자부(媤姉夫, 시누이의 남편) 정종과 시조카이자 양자였던 정미수의 집안인 해주 정씨 가문에서 그녀의 무덤을 관리해 주었다. 현대에도 사릉 인근에는 해주 정씨 집안의 개인묘들이 들어서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단종과 정순왕후를 합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지만 흐지부지.[20] 사릉에 심어진 소나무[21]은 하나같이 가지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왕후가 남편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라 하여 1999년 4월 9일 사릉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하나를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했다. 사후 478년만이다.

세조의 아내 자성대왕대비 성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순왕후에게 의식을 공급해주도록 명했고,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과 세종대왕의 후궁 혜빈 양씨[22]의 자손들을 복권시켜 줬다. 아마도 선왕의 비인 자신이 살아있을 때 어느 정도 물꼬를 터놔야만 나중 임금들이 "후속 조치"를 수월히 취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조선/역대 왕비 중 처음으로 국왕과 혼인한 왕비이기도 하다. 태조부터 세종까지는 잠저 시절에 혼인했으며, 문종의 비 현덕왕후는 아직 세자빈이었을 때 사망하여 남편이 즉위한 이후 왕비로 추증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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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KBS 드라마 < 왕과 비>에서는 배우 김민정이 연기했다[25]. 남편인 단종보다 훨씬 강단있는 캐릭터로 묘사되어 사사건건 수양대군과 정치적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인다. 애초에 수양대군의 입김으로 중전이 된 만큼, 당연히 본인들의 똘마니가 되어줄줄 알았는데[26] 예기치 못하게 반기를 들자 수양대군과 정난공신들은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듯한 반응을 보였을 정도. 인수대비와 계양군부인 자매는 아예 대놓고 이러한 정순왕후더러 불여우같은 X이라고 험담을 퍼붓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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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김별아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소설 <영영이별 영이별>을 썼다.

[1]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은 민대생의 동생이다. 민대생은 한명회의 장인. 즉, 한명회의 처와 송현수의 처는 사촌간이다. [2] 청룡사라는 에서 지냈다고 한다. 현재 종로구 창신동에 있다. [3] 현재 낙산 줄기의 종로구 숭인동 동망산 동망봉(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이 그곳이며, 2008년부터 정순왕후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또한 이 근처를 정순왕후 유적지로 지정해 놓았다. 대중교통으로는 서울 지하철 6호선 창신역이 가깝다. [4] 달동네 재개발하면서 지은 보문자이파크뷰 시공사에서 정순왕후와 산신령을 모시던 산신각도 재건축했는데, 규모는 전보다 화려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남향으로 짓는 만행을 저질렀다. 본래 단종의 귀양지인 강원도 영월군을 바라봐야 의미가 있다. 또한 강신목인 은행나무도 복원되지 않았다. [5] 김택영이 중국에 망명 간 이후에 쓴 책으로, 조선 역사에서 저자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에 대해서 비판해서 논란이 되었다. 워낙에 자의성이 강해서 김택영 본인도 이걸 역사책이라고 단언하지 못하고 '경'을 추가로 붙인 것. 단적으로 이 책에서는 태조 이성계 조선 건국을 고려에 대한 찬탈로 기록해서, 김택영은 사적(史賊)으로 낙인 찍혔다. 당연히 세조의 집권도 비판 대상이었기 때문에 쓰여진 것이 본문 내용이다. [6] 송현수의 자녀로 기록에 남은 것은 본 인물과, 성종대에 과거를 치를 수 있게 허락 받은 송거뿐이다. 딸이라고 하면 1명뿐이라고 착각해서 적히는 내용이다. [7] 조선 후기 정조 연간에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 지명 등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며 저자는 수헌거사(樹軒居士)라는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는데,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로 추정된다. [8]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때 이 다리에서 정순왕후와 이별한 뒤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헤어졌다 해서 '영이별 다리',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불렸다. 현재의 영도교는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될 때 새로 가설된 것이다. [9] 끼니거리를 가져다 주는 여인들이 어찌나 많이 찾아왔던지, 나중에는 아예 긴 행렬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10] 남편 단종의 누나이다. 즉 정미수는 남편의 조카인 셈. [11] 그러나 정미수가 56세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정순왕후는 양자마저 앞세우게 되었다. 비록 혈연은 아니나 같은 사람에 의해 비슷한 아픔을 겪었던 친척간이었던 만큼 서로 심정적으로 의지하는 면도 컸을 텐데, 정순왕후로서는 이 역시 몹시 서운했을 듯 하다. [12] 가장 단명한 국왕은 10세의 나이로 죽은 추존왕 진종. 그러므로 재위한 임금 중 가장 단명한 왕은 단종이다. [13] 참고로 제일 장수한 왕비는 '조 대비'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신정왕후 조씨. 사실 신정왕후도 실제로는 세자빈에서 바로 대비로 격상된 상황이라 정순왕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왕비 노릇은 거의 하지 못했다. 화려해 보이는 왕후의 삶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고 고생스러운 것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4] 하지만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정순왕후는 동냥에 염색업 등 갖가지 고된 일로 생계를 이어 나갔던 터라, 정순왕후의 장수를 왕후의 삶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의지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위에 언급된 소설 <영영이별 영이별>에서도 '살아남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복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15] 아이러니하게도 문정왕후는 계유정난의 조력자이자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가문인 파평 윤씨 가문이었으며 문정왕후의 시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 역시도 파평 윤씨이다. 덤으로 세자 인종의 친어머니 장경왕후 역시도 파평 윤씨이다. 어찌보면 정순왕후는 본인에게 있어서 세조 못지 않은 원수이기도 한 파평 윤씨 가문의 왕비와 그 소생들이 왕실에 들어앉아 있는 상황에서 말년을 보낸것이기에 속 편한 말년을 보내지는 못한 것이다. 그나마 죽은 정순왕후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문정왕후 윤씨를 끝으로 조선 초기에 왕비 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한 파평 윤씨 가문은 선조 즉위 후 멸망때까지 왕비 자리를 두 번 다시 차지하지 못했다. [16] 추가적으로 명종의 며느리이자 문정왕후의 손주며느리인 공회빈 윤씨는 모친은 파평 윤씨인 무송 윤씨인데 세자빈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임진왜란 직전에 죽어서 직후 왜란의 여파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되었다. [17]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염색업은 정말로 힘든 막노동이다. 왕비였던 양반가 여성이 동냥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야했다는 것은 세조의 탄압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며 후에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말년의 변덕이란 느낌도 없지않아 있다. [18] 다만 세조 사후엔 하지 않았을 듯하다. 성종 즉위 이후 대비가 된 정희왕후가 의식을 공급해줄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19] 정순왕후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세조도 죽은 후 오늘날 남양주시에 묻혔는데, 세조와 정희왕후 내외가 묻힌 광릉은 남양주 진접읍에 있다. [20] 일반적인 무덤도 파묘하고 이장하는 게 큰일 중 하나인데, 그 대상이 문화재인 왕릉이라면 더 말할 게 없다. 애초부터 가능성이 없었다. [21] 문화재청 관할 하에 있는 사릉 내 양묘사업소에서 궁궐과 능원에 필요한 소나무를 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 사적지에서 자라는 어린 소나무들은 대부분 사릉 출신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나무의 생장을 위해 사릉은 일반인에게는 비공개로 유지되고 있다. [22] 단종의 유모이기도 해서 단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 세력을 숙청하려는 세조에게 희생당한다. [23] 2018년 SBS 드라마 < 황후의 품격>에서는 황실을 말아먹는 희대의 싸이코 태후 강씨 역. [24]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정태우 무안대군 부부를 연기했다. 앞서 1995년 KBS <역사의 라이벌>에서도 정태우와 단종 부부를 한번 더 연기했다. 그리고 본작품으로 1994년 KBS 연기대상 아역상을 수상했다. [25]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한명회의 둘째 딸을 연기했다. [26] 삼간택이 진행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수양대군 내외에게 중전감으로 낙점이 된 상태였다. [27] 2003년 MBC 드라마 < 대장금>에서는 이영애의 아역으로 홍시 드립을 쳤던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