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23:53:00

정담

1. 조선의 무관
1.1. 대중매체
2. 여말선초의 인물
2.1. 개요2.2. 상세2.3. 여담
3. 동진의 인물

1. 조선의 무관

鄭湛
(? ~ 1592)

본관은 영덕(盈德). 자는 언결(彦潔). 아버지는 정창국(鄭昌國)이다.

1583년 무과에 급제하여 신립장군 기병대의 돌격장으로서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였고 1592년 김제군수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나주판관 이복남, 해남현감 변응정, 의병장 황박 등을 부관 으로 하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에 맞서 전라도의 핵심 목 지점인 웅치를 방어하고자 웅치고개에 3차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강대한 적을 맞아 싸웠으며, 전라도 점령을 위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군의 정예 다수를 격멸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웅치 전투)

전투 이후 일본군은 그 충절에 경의를 표시하여 ‘조조선국충의간담(弔朝鮮國忠義肝膽)’ 라는 묘비를 세웠다. 이는 웅치전투에서 조선군의 모습이 지금껏 일본군이 상대해온 정돈되지 못하고 사기가 떨어진 군이 아닌 죽음을 불사한 관군과 민초들의 모습에 감복한 것이다.
전쟁 직후 전공을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으나(전투 당시 대부분이 전사하여 전투현장에서의 성과를 나타내기 어려운 이유)
추후 그의 공적이 알려지며
1690년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뒤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영해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순조 임금 당시 '장렬공'의 시호를 얻었다.

김제군수 정담의 웅치방어 전투는 관군과 민병으로 분리되어있던 조선의 군대가 체계적인 연합을 구축하여 전면에 나선 선지적 예시가 됨으로써 웅치, 이치 전투 이후에 발생한 여러 전투에서 민,관군이 연합을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웅치전투 진중 어록 : 웅치전투의 막바지 패색이 짙어진 시점에서 종사관 '이봉'이 철수를 권하자 "정녕코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죽을 것이며, 살아서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본인이 물러남에 적의 기세를 높일 수는 없다. 갑옷에 이름을 써 놓았으니, 자식들이 시신은 찾아주겠지" 라 하며, 종사관 이봉과 더불어 최후의 순간까지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255-1에 정려가 있다. 1690년(숙종 16)에 정문(旌門)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마을 가운데에 목비(木碑)로 세웠다가, 1782년(정조 5) 마을 앞 길가에 석비(石碑)로 다시 세웠다. 뒤에 병조참판을 추증받았으며 영해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정담 [鄭湛]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지켜보며 기록을 남겨놓았던 백사 이항복의 ‘백사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의 장인 권율장군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의 功이 크다고 하나 사실은 전라도 웅치싸움을 주도한 정담이 가장 크고, 다음은 행주싸움이다. 그가 1000명도 안되는 약한 군사를 데리고 10배가 넘는 대적을 맞아 잘 싸우다 죽었고, 그러므로 호남이 보전되었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하겠는가!”』
[출처] 호남땅을 지켜낸 김제군수 정담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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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고서원(明皐書院)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명고서원(明皐書院))]
1710년(숙종 3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담(鄭湛)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인 향현사(鄕賢祠)와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그리고 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주소(廚所) 등이 있었다.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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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야성정씨 참판공 종택(英陽 野城鄭氏 參判公 宗宅)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77호 장열공 사당으로 지정되었다가, 2015년 12월 14일 영양 야성정씨 참판공 종택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1]
이곳에는 교지 7점과 장군의 공적을 적은 『충렬록』, 판각 85매와 『충렬록 전적』 2권 등의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후손들이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높은 관직이나 많은 자산을 가지지 못했으나, 국가를 위한 충신의 집안으로 남고자
자손을 귀하게 여기고, 국가에 충성하며, 다수의 중견직 군인(영관장교). 경찰, 공무원(3~5급)을 배출하고 있다.

1.1. 대중매체

"퇴각은 없다. 적 한 명을 죽이고 죽을지언정 어찌 장수가 일보 물러나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냐"
불멸의 이순신에서 한산 대첩 직전 웅치 전투를 묘사할 때 등장했다. 배우는 불명. 작중 대사는 한 줄 뿐이지만 이 대사는 실제로 정담이 했던 말이다.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분전했으나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작품 내적으로는 이 패배로 인해 이치를 지키는 권율과 한산도에서의 이순신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극적 긴장감을 이끌어 낸다.

파일:한산 정담.jpg
2022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편집되어 못나왔으며 확장판인 한산 리덕스에 출연하며 배우 김영웅이 정담을 연기했다.
영화 후반부 관군과 의병이 함께 전투를 준비하고, 의병장들과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모습을 나타냈으며, 한산대첩이 종료 된
상황에서 장렬공 정담의 전사한 모습을 비추며 전라도 방어 전투의 핵심인 웅치전투의 치열함을 순간의 모습으로 담아내었다.

2. 여말선초의 인물

2.1. 개요

鄭湛
(? ~ 1398)

고려 조선 초의 인물. 정도전의 사남. 정진, 정영, 정유의 동생.

2.2. 상세

봉화현 사람으로 고려에서 종부부령을 지내다가 1391년 겨울 10월에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되자 형 정진과 함께 폐출되어 서인이 되었으며,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여덟째 아들인 의안대군 이방석을 책봉해 세자로 세우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이복형들이 불만을 품었으며, 1398년에 이방원이 주도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집에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자결하기 전에 정도전에게 오늘날의 일을 정안군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방원의 편에 설 것을 권고했지만, 정도전이 이미 고려를 배반해서 지금 또 다른 편으로 붙게 되면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냐고 하면서 거절했다.

2.3. 여담

<봉화정씨세보>에 따르면 정담은 정도전의 아들이 아니라 정도전의 둘째 동생인 정도존의 아들이라 정담은 정도전의 조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봉화정씨세보>에 정도전의 가족관계가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조선왕조실록》에서 정담에 대해 사관이 가족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서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그 근거로 넷째 아들로 나온 정담이 있지만 둘째 아들로 나온 정영은 영(泳) 또는 담(澹)이라고 해서 정도전이 자식의 이름을 동일한 음으로 지은 것처럼 나온 부분이 오류라는 것이다.

또한 담(湛)은 정도복의 아들인 기(淇)로 착각해서 담(湛)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집에서 자결한 사람은 정담이 아니라 정도복의 아들인 정기라는 것이다.

3. 동진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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