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1-03 01:32:05

이정호(1913)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석천(石泉)
출생 1913년 3월 1일
경상북도 대구군 하수서면 봉덕동
(현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사망 1990년 7월 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가데나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8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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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정호는 1913년 3월 1일 경상북도 대구군 하수서면 봉덕동(현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에서 아버지 이두산(李斗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을 졸업했고, 1935년에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조직부장 겸 화남지부장으로 활동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그는 1938년 봄에 우한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좌익 계통의 정당이 연합한 조선민족전선연맹에 가담했으며, 1941년 5월에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에 소속되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통합되었을 때, 이정호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 지대장 김원봉 휘하의 조원에 편입되어 상위(上尉)로 복무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제1지대 정훈조(政訓組)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또한 1942년 10월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 11월에 개최된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원봉, 김상덕, 손두환(孫斗煥) 등과 함께 외교대표 파견안을 제출했고, 이 법안이 수정 통과되어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은 뒤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도록 노력했다.

1943년 3월 20일 외무부 총무과장에 보임되었고 1943년 경 조소앙, 신익희, 엄항섭 등과 함께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했고, 1943년 1월 20일에 한국청년회 학술부장에 취임하고 청년들이 혁명 자질을 양성하고 독립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944년 6월 1일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장을 맡아 7월 27일까지 재임하며 주중 미국대사관에 특파되어 일본군에 대한 염전사상 주입과 일본군 내의 한인 사병 모집을 위해 한문전단(漢文傳單) 작성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정호는 8.15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에 광복군 제3지대 북경지구 특파공작원으로 활동하여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사병의 탈출 공작을 수행했다가 광복을 맞이하자 조국으로 귀환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비서실장, 총무처 상훈국장을 역임했으나, 6.25 전쟁 중 피난을 가지 못한 것과 아버지와 동생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인해 1953년에는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후속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무혐의로 풀려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영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5년 2월 22일 영남대학교 대학원으로부터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80년 퇴임 후 자녀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1990년 7월 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가데나시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이정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4월 13일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 2020년에는 부인 한태은(韓泰恩)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아 부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