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21:37:29

이시발


李時發
1569년 ~ 1626년 (향년 57세)

1. 개요2. 생애3.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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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벽오(碧梧).

2. 생애

김종직 시호 문제로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음으로써 사림파의 추앙을 받은 이원(李黿)의 4대손이다. 스무 살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인(西人)[1]에 속하였고 중국어 및 군사·행정 실무에 능한 유능한 관료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조좌랑·정랑[2] 등을 역임하면서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 도체찰사 류성룡(柳成龍)을 보좌하였고, 1593년(선조 26)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통역을 맡아 그의 군대를 안내하였다. 낙상지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명나라의 병법을 배웠고, 그의 재주에 감탄한 낙상지는 본국에 귀국하면서 선조(宣祖)에게 중용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1596년(선조 29)에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 보급을 관장했다. 1601년(선조 34) 선조의 두터운 신임하에 4년간 3차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며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1604년(선조 37)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며 6진(鎭)의 번호(藩胡)[3]를 진정시켰다. 1608년(광해 즉위년) 여진족이 침입하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의 방비를 맡았다.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였다. 1623년(인조 1)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를 지냈고, 1624년(인조 2) 부체찰사(副體察使)가 되어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후금(後金) 세력이 강성해지자 강화도의 군비 시설을 강화하였고 뒤이어 남한산성 수축을 감독하던 중 사망하였다. 군사관계 서적인 주변록(籌邊錄)을 저술하였으나 실전되었다. 사후 80여 년 뒤인 1708년(숙종 34)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자손들도 고관을 지냈는데, 차남 이경휘(李慶徽, 1617~1669)는 이조판서를 지냈고, 3남 이경억(李慶億, 1620~1673)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및 이조·호조·예조·형조 등 각조 판서를 두루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3. 그 외

중국어와 군사, 행정 실무에 모두 능한 유능한 관료로 늘 난리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으나 국사책에 실리지 못한 까닭은 역시 이름 때문...이라는건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고, 대중서도 아니고 교과서에 그런 까닭으로 이름이 실리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되는 소리다.[4] 국사책은 다뤄야 할 시대는 많고 분량은 한정되어 있어서 시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개개인의 이름을 일일이 실어주지 않는다.

여러모로 왕자지, 김자지 같은 케이스라 보면 된다. 호가 벽오라 이벽오라 칭할 수 있으니 등재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생전에 자나 호가 이름 이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5] 대개 이름을 표기하는 쪽이 원칙이다.

김구 선생의 《 백범일지》를 보면 젊은 시절에 김구가 이시발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구절로 보아 백 년 전까지는 그 이름이 욕이 아니었던 것 같다...?[6][7]

미디어에서는 《 녹두전》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다.

웹툰 《 조선왕조실톡 250화 '웃긴 이름 대잔치'에도 등장했다.
[1] 1594년(선조 27) 정철(鄭澈)의 탄핵을 반대하는 등 서인에 속했고, 이경휘, 이경억 등 그 후손들도 대체로 서인에 속했다. [2] 좌랑(佐郞)은 6조의 정6품 관직, 정랑(正郞)은 6조의 정5품 관직이다. 좌랑은 상급자인 정랑과 한 조가 되어 행정실무를 총괄했는데, 6조의 권한이 강화되고 국정의 중심기구가 된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인 청요직(淸要職)이었다. 특히 이조·예조·병조의 정랑·좌랑은 중시되어 문과 출신의 문관으로만 임명하였다. 각 조의 정랑·좌랑을 아울러 낭관(郎官)·낭청(郎廳) 또는 조랑(曹郎)이라고도 하였다. 이조와 병조의 정랑·좌랑은 인사행정을 담당했기 때문에 전랑(銓郎)이라고 하였다. [3] 6진 주변에 살던 오랑캐. [4] 당장 이분만 봐도... [5] 도잠은 자를 따라서 '도연명'으로, 제갈량도 자를 따라서 '제갈공명'으로, 소옹은 시호를 따라서 '소강절'로 부르는 예가 많다. [6] 사실 요즘은 씨발 정도로 발음 하지만 오리지날은 씹팔, 씨팔 정도로 앞뒤 단어에 거센소리가 있다. [7] 씨발은 원래 현대에 나온 말로 과거에는 '씹할'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