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17:32:33

이븐 타이미야


1. 개요2. 생애3. 영향

1. 개요

  • ابن تيمية

시리아의 법학자 및 신학자. 본명은 타키 웃 딘 아흐마드( تقي الدين أحمد)이지만 명망이 있는 학자의 경우 이븐 시나와 같이 대개 Ibn에 부친 이름이나 특징 등을 붙여서 부르는 편이다. 과거 이슬람 신학 관련 서적들이 영어로 충분히 번역되기 이전에는 대표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꼽히기도 했다. 중세 아랍어 서적 번역이 진척되고 논문이 계속 발표되면서, 실상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에게 당대 무슬림 치고는 관대했던 편이었으나 # 이슬람 비주류에 적대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븐 타이미야는 일 칸국과 대치하던 맘루크 왕조 대의 한발리파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몽골 제국 일 칸국의 무슬림들은 아직 진정한 무슬림들이 아니므로 지하드가 정당화된다는 타크피르 이론을 만들었다.

2. 생애

이븐 타이미야는 오늘날의 튀르키예 남동부에 위치한 하란에서 태어났다. 그는 법학을 연구하던 아버지에게 교육받은 영향으로 20세의 나이의 법률 의견서를 발행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 1283년 그의 아버지가 타계한 이후에는 수피파의 수도원이자 하디스 교육기관이었던 '다르 알 하디스 알 수카리야'의 하디스 교수직을 물려받게 되었다. 1285년이 되자 이븐 타이미야는 우마이야 모스크에서 쿠란 주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후 이븐 타이미야는 자신이 거주하던 맘루크 왕조 정권과 충돌 혹은 협조를 반복하기 이른다.
이븐 타이미야의 공개적 행동들은 알 드하하비가 쓴 다수의 관찰문으로 남아있는데, 특히 이븐 타이미야의 자긍심과 성급함, 집요함, 비관용 및 요령 없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차적 사료들에서도 이와 같은 점이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이 중에서는 격분한 그가 몽골 관리와 대치한 일, 맘루크 술탄 왕조를 상대로 몽골에 맞서 지하드를 일으켜야 한다고 대담하게 설교한 일, 예언자에게 바쳐진 성물들을 파괴한 일, 겁도 없이 리파이 데르비시파의 허풍을 폭로한 일, 그를 따르던 알 미찌를 몰래 감옥에서 빼내온 일, 맘루크 왕조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 일, 다른 울라마(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침묵의 지혜를 잃지 않고 있는 동안 요령 없게도 콥트교를 맹렬하게 비난한 일 등 몇 개의 사건들만 살펴보아도 충분하겠다. 그는 종교적 원칙에 대해 너무나도 외골수처럼 헌신했으며, 무위와 허영에 극도로 비관용적이었다. 이븐 압둘 하디에 따르자면 그는 투옥된 이집트의 감옥 전체를 종교 연구기관이자 기도의 장으로 바꾸어버렸으며, 수감자들이 체스나 보드게임을 두는 대신 기도를 올리도록 만들어버릴 정도였다. 하루는 그의 추종자들의 생각으로는 암살이나 다름없었던 일을 벌이러 카이로의 길거리를 행진하다가도, 대장간 발치에서 두 명의 남자들이 도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참지 못하고 달려가 도박판을 발로 걷어차 버린 일도 있었다. (중략) 확실히 그는 훌륭하고 명석한 사람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용기와 독실함, 자제 및 방대한 지식이 돋보이던 자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수의 단점들도 있었는데, 알 드하하비는 이 중 몇 가지를 나열한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폭력적인 분노였으며(그는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고 인정한 바 있다),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비관용, 그리고 극도로 강직한 태도가 그 뒤를 이었다. 장점과 단점을 모두 포함해서도 그는 확실히 예외적인 사람이었으며, 알 드하하비 자신을 포함해 비교적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던 동료 ‘울라마’들과는 구별되는 사람이었다.
도널드 리틀

몽골 제국의 침략 와중에 직접 살던 고향에서 피난을 간 적도 있었던 그는 특히 몽골인들을 증오하였다. 당시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던 일 칸국의 몽골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상황이었는데 여기에 대해 이븐 타이미야는 "단순히 입으로만 샤하다를 하고 무슬림임을 주장한다고 무슬림이 될 수 없다."라는 논지로 일 칸국이 무슬림 정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한 번은 마르딘 시가 일 칸국에 함락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해당 도시가 비무슬림의 영토인지 아니면 무슬림의 영토인지를 판가름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마르딘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은 여전히 무슬림이며, 비무슬림이 지배하는 도시에 살고 있다고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이들은 몽골 점령군에게 그 어떤 노골적인 도움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몽골) 병사들이 (명목상) 무슬림이라 하더라도 이슬람의 법이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을 이슬람의 영토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심 없는 자들이 거주하는 비무슬림의 영토라고 볼 수도 없다. 마르딘은 세 번째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 내부의 무슬림들은 가능한 나름의 수준에 맞게 행동하며, 할 수 있는 한 이슬람의 샤리아를 위하여 몽골군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1]

이븐 타이미야의 이러한 해석은 후대에 종교 당국자의 허락 없이도 개인적인 지하드 명목의 폭력행위가 가능하다는 교리로 오용되었다. 지하드는 칼리파급의 종교 당국자들이 신중한 숙고 끝에 이슬람의 방어를 위해 선포하여야 하는게 원래 교리인데, 이븐 타이미야는 칼리프의 권위 하에서 해당 타크피르를 시행한 거지만 이후 근세에 오스만 제국 술탄이 칼리프를 겸임하면서, 반튀르크 성향 마흐디주의자들이나 와하브파들은 칼리프의 승인 절차 없이도 무슬림 개인이 멋대로 지하드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사회의 골칫거리인 무슬림 출신 외로운 늑대 테러리스트들이 이븐 타이미야의 해당 해석을 적극적으로 악용한다.

1300년 일 칸국의 가잔 칸이 다시 맘루크 왕조 영토를 침공하자 이븐 타이미야는 다마스쿠스에서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어 활약했다. 가잔 칸과 그의 장수들은 회담 끝에 이븐 타이미야의 요구를 받아들여 무슬림 및 비무슬림 포로 일부를 석방시켜주었다. 이듬해 일 칸국 군대가 다시 시리아를 공격해오자 그는 다른 무슬림들에게 일 칸국에 대항하는 지하드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1301년 1월에는 맘루크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에게 시리아를 적극 방어해줄 것을 탄원할 목적으로 카이로로 건너갔다. 이븐 타이미야는 1303년에도 다마스쿠스 근방의 샤크하브 지역에서 몽골 제국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당시에도 그 자리를 지키며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라마단 단식의 의무를 면제해주는 일과 관련하여 파트와를 공표하는 일을 도맡았다.

이븐 타이미야는 한발리파에 알 가잘리의 철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였으며, 아랍 우월주의 성향의 이슬람 사상을 정립한다. 이븐 타이미야는 주로 쉬아파 수피 사이에 많이 남아있던 이슬람 사변철학자들과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 이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어버리는데 성공했으며,[2] 알라위파, 드루즈교 같은 이단이 비무슬림보다 먼저 타도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등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 중에는 '하나님의 동반자와 사탄의 동반자'[3]라는 책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동반자는 바로 하디스와 꾸란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며, 사탄의 동반자는 당시 명망 높은 수피 철학자 이븐 아라비였다.

이븐 타이미야는 쉬아파들과 수피들이 자주 방문했던 이슬람의 초기 유적 및 메디나의 예언자 모스크까지 우상숭배의 장소가 된다는 이유로 없애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도 이 주장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반튀르크 아랍 우월주의를 드러내던 이븐 타이미야는 몽골 제국의 침략 문제 그리고 레바논 산악지대 알라위파 토벌 문제가 일단락되자 당대 지배층과 대립했다. 맘루크 왕조의 통치자 나시르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을 순례하자, 이븐 타이미야는 "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를 방문하는 것은 경건한 방문으로서의 지위만을 가질 뿐이며 메카를 방문하는 핫지와 동등한 것이 아니다."라고 직언했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대 예루살렘은 맘루크 왕조의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해주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성지순례 사업이 짭짤한 수입원이 되었는데 이를 비판하면서 맘루크 왕조의 심기를 크게 거슬렀던 것이다. 이븐 타이미야는 다마스쿠스 옥중에서 약 40여권에 달하는 쿠란 주해서를 저술한 이후 죽음을 맞았다.

3. 영향

한발파의 대표 학자라는 점 및 몽골 제국의 바그다드 파괴로 힘이 꺾인 이슬람 사변철학에 철퇴를 가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근본주의자의 원류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4][5] 그의 이슬람 해석은 현재 순니파 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쿠란 주해본을 출간한 이븐 카시르로 계승되었다. 이후 그의 사상을 간략화한 것이 근대 발흥한 와하브파의 토대가 되었다. 와하브파의 시조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하브의 저서 키타붓 타우히드는 이븐 타이미야에서 이븐 카시르 등으로 이어진 학풍을 베두인 유목민들도 알기 쉽게 편역한 것으로 오늘날 와하브파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기독교에서는 이혼이 금지되어 있는데 무슬림들은 이혼율이 너무 높다고 기독교처럼 이혼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그러나 이후 한 때 서구에 온건파 무슬림으로 알려졌던 이븐 아라비 같은 수피 신학자들이 번역이 진척되면서 타 종교에 대해 훨씬 더 과격한 입장이라는 점이 알려지고, 이븐 타이미야의 논문 등에 대한 연구가 다시 진척되면서 이븐 타이미야가 과연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의 원류가 맞는지에 대한 이견이 대두되고 있다. 첫 번째로 이븐 타이미야의 살아생전 당시에는 이슬람권이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파탄에 몰렸던 상황으로 이슬람권이 무력을 사용해서 영토를 넓힐 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주장한 지하드 이론 역시 다소 방어적일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이븐 타이미야는 비무슬림도 결국에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한 논문 & 꾸란에 나온 종교의 자유에 관한 구절은 폐기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는 관계로 극단주의자로 분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븐 타이미야는 콥트교의 단성론 신학을 비판한 적은 있지만,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의 이슬람 개종이나 박해를 강요하자고 주장한 적이 없다.[6]

더욱이 중세 이슬람 의학을 이단시했던 당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7]들을 진정시키고 무마시킨 점 때문에 근본주의자로 분류가 곤란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의 후학 이븐 카임 알 자우지야는 스승 이븐 타이미야의 주장을 이어받아 비무슬림이 기독교도나 유대교도가 아닌 다신교 토속신앙을 믿는 경우라도 이슬람 정권 하에서 최소한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했으나, 후학들은 타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해석 대신에 주로 아랍우월주의, 반튀르크 및 반쉬아 사상만 취사선택해서 계승하는 쪽을 택했다.

오늘날 서구 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재해석되는 학자이기도 한데, 그는 하디스를 중요한 논거자료로 삼았으나 하디스에 완전히 구속되지는 않았으며, 오늘날 와하브파 세계에서 쿠란 다음으로 완전무결한 책으로 평가받는 사힛 알 부카리와 사힛 무슬림의 하디스도 완전히 엄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예시로 부카리의 하디스 중 다수의 진위가 의심된다는 식이었다. 굳이 서구 학자들만 그를 재해석하는 것은 아니고, 현대 이슬람 학계에서 하디스 연구가로 명망 높은 셰이크 알 알바니 역시 그의 하디스 해석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한다.


[1] Denise Aigle, "The Mongol Invasions of Bilad al-Sham by Ghazan khan and Ibn Taymiyah's Three 'Anti Mongol' Fatwas." [2] 몽골의 바그다드 파괴와 약탈 이후 순니파 무슬림 사변철학자들이 거의 소멸한 시점이었다. [3] 책의 아랍어 제목은 Al Furqan bayna Awliya Ar-Rahman wa Awliya Ash-Shaytan, 번역하면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동반자와 사탄의 동반자를 나누는 기준과 증거’ [4] 같은 이유로 이슬람 철학자 알 가잘리 역시 이슬람 근본주의의 원류로 비판받기도 한다. 물론 오늘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알 가잘리가 수피였다는 점 때문에 기록 말살을 시도하는 편이다... [5] 이슬람 사변철학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이븐 타이미야가 꽂았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중동 순니파 사회에서 무타질라 학파가 이단화된 이후에도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서부에 해당하는 호라즘 지역에서는 무타질라 학파가 몽골 제국의 침략 전까지 주류 학파로 번성했었기 때문이다. [6] 대신 봉기를 일으킨 후 진압된 알라위파 농민들을 반강제로 순니파로 개종시킨 적이 있다. 당시 이븐 타이미야가 직접 이들의 봉기를 앞장서서 진압하였다. [7] 당대의 이슬람 의학이 지나치게 그리스-로마의 이교도 의학 기술을 많이 받아들였으므로 인정할 수가 없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말한 민간 요법만으로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한 무뇌 수구파들이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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