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25 01:13:01

원주연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원주 원씨[1]
출생 1911년 12월 23일
함경남도 정평군 부남면 동천리
(현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읍)
사망 1936년 3월 15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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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원종집은 그의 아버지이며, 원충연 반혁명 사건의 주동자 원충연은 그의 둘째 남동생이다.

2. 생애

원종집은 1911년 12월 23일 함경남도 정평군 부남면 동천리(현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읍)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원종집과 어머니 전주 노씨(全州 盧氏) 노유옥(盧惟玉)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함흥군 함흥면 동흥리로 이주하였고, 함흥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여 다녔다.

그는 함흥공립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14일, 동급생인 최예진(崔禮鎭)·엄윤식(嚴允植)·윤치선(尹致善)·문경탁(文京鐸) 등과 함께 광주학생항일운동 지원과 일제 총독정치에 대한 반대투쟁을 결의하였고, 거사 때 쓰일 격문을 제작하는 등 준비를 갖췄다.

거사 당일 원주연 등은 조회시간을 이용하여 같은 학교 학생들을 인솔해 교문을 뛰쳐나왔으며, 신탄(薪炭) 장터를 거쳐 경찰서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한편 항일전단 200여매를 뿌리는 등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해 동조하는 가두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1930년 2월 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같은 해 3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공소에 이유가 있다는 판결을 받아 징역 4개월(법정통산 39일),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1931년 1월 15일 고향 정평군에서 정평농민조합에 가입하였고, 주소지를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로 옮기면서도 농민조합 활동을 계속했다. 그 뒤 정평군 전체로 투쟁을 확대하기 위한 농민대회(農民大會) 개최를 계기로 2,00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항일시위를 벌이다가 재차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32년 12월 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재정통산 180일)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여 1933년 12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에 이유가 있다는 판결을 받긴 했으나, 원심 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 법정통산 370일 등으로 미결 기간이 형기에 산입되었을 뿐 형기는 징역 2년형으로 유지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1936년 3월 15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원주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 시중공계-교리공-정민공파 29세 연(淵)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