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9 16:59:05

오스틴 카

오스틴 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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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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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ry N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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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Price)
오스틴 카
(Austin Ca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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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000> 네이트 서몬드
(Nate Thurmond)
브래드 도허티
(Brad Daugherty)
조 테이트
(Joe T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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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캐벌리어스 오스틴 카.jpg
<colbgcolor=#860038><colcolor=#ffffff>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No. 34
오스틴 조지 카
Austin George Carr
출생 1948년 3월 10일 ([age(1948-03-10)]세)
워싱턴 D.C.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노터데임 대학교
신장 193cm (6' 4")
체중 91kg (200 lbs)
포지션 슈팅 가드
드래프트 1971년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지명
소속 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71~1980)
댈러스 매버릭스 (1980)
워싱턴 위저즈 (1980-1981)
등번호 22번 - 클리블랜드[1]
34번 - 클리블랜드[2] / 댈러스 / 워싱턴

1. 개요2. 커리어
2.1. 유년시절과 농구 입성 전2.2. 농구 입성후
3. 어록

[clearfix]

1. 개요

前 NBA 선수. 별명은 Mr.Cavalier. 현재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중계진에서 해설을 맡고 있다.

2. 커리어

2.1. 유년시절과 농구 입성 전

국방성 자재부 직원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엄격한 가톨릭 방식으로 사람들의 배려를 잊지 않는 착한 아이였다.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키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민첩한 몸놀림과 정교한 슈팅으로 고등학교 농구계를 주름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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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 후, 노터데임 대학교로 진학한 카는 NCAA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는 3년동안 대학농구계에서는 2560점을 기록하여 역대 통산 5위를 기록하였고, 그 중 2년 동안에는 시즌 통산 1000득점 이상을 달성[3]하여 2번째 선수가 되었다. 또 1경기 동안 60득점, 1경기당 야투 골 성공률은 25개, 시투수 41개라는 NCCA토너먼트 기록도 보유하고있다. 1970년에 열린 토너먼트에서는 3경기 만에 158개의 득점을 넣어, 토너먼트에서의 평균득점을 52.7득점이 되어 토너먼트 기록이 되었다. 1971년에도 평균 41.7득점을 기록하고 있어,[4] 토너먼트 통산 평균 득점 41.3개는 역대 1위가 되었다. 또 토너먼트에서 사상 6번 달성이 된 1경기 50득점 이상 가운데, 3회가 카로, 토너먼트 1경기 득점 역대 12개 수위 가운데 5회도 랭킹에 들어갔다.

2.2. 농구 입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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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그는, 1971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지명되어 프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리 시즌 때 다리를 다쳐 후유증에 시달렸다가, 한달뒤 부상에서 돌아온 뒤 정식으로 NBA 데뷔전을 치르지만 또다시 도중에 반대쪽 다리를 다쳐 7주동안 결장을 하고 말았다. 그가 복귀 한 뒤에는 항상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게 만들어 처음으로 NBA All-Rookie Team에 선출되었다. 그를 지명한 다음 해인 1972-73시즌에는 시애틀 슈퍼소닉스에서 레니 윌킨스가 입단하여 강력한 백 코트 듀오가 결성되었고, 1973년에는 커리어하이인 21.9 평득을 기록했다. 윌킨스가 1974-75시즌 끝으로 떠난 뒤에는 딕 스나이더, 짐 카메론, 캠피 러셀 등이 빈 자리를 메우고 순조로운 시즌을 보내고 창설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로 가는 고지가 눈 앞에 보였으나, 2월에 발 뒤꿈치 부상의 영향으로 이후에는 모두를 면치 못하고, 시즌 종반에 연패를 당해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1975-76시즌에는 평균 10.1득점으로 끝났으나, 센트럴 디비젼에서 우승하여 창설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하여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전에서 워싱턴 불리츠를 누르고 리치필드의 기적을 만들었지만, 결승전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하여 NBA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그 후 댈러스 매버릭스 워싱턴 불리츠에서 뛴 후 현역생활을 마감했다. 34번은 클리블랜드 영구결번에 지정됐으며 은퇴한 뒤에는 친정팀인 캐벌리어스의 구단 홍보 담당자와 중계해설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3. 어록

Throw the Hammer Down![5]
Get that weak stuff outta here![6]
Deep In The Q[7]


[1] 1971-72시즌 [2] 1972~-1980 [3] 피트 마라비치에 이어 2번째 선수. [4] NCAA토너먼트에서 사상 처음으로 평균 36득점 이상을 넣은 선수는 오스틴 카가 유일하다. [5] 캐벌리어스 선수가 덩크를 꽂아 넣었을 때 쓴다. 물론 앨리웁도 마찬가지다. [6] 상대 팀 선수가 골을 넣으려고 할 때 캐벌리어스 선수가 블록한 뒤에 공이 캐벌리어스로 왔을 때, 또는 공격권에 상관 없이 라인에 닿았을 때 쓴다. 다만 공이 상대팀이 왔을 경우에는 제외. [7] 캐벌리어스 선수가 3점슛을 적중했을 때 쓰는 멘트. 참고로 Q는 퀵큰 론즈 아레나의 별칭. 다만 원정에서 넣었을 경우에는 경기장 이름의 별칭을 쓰지 않는다. (예: 시카고 불스, Deep in the UNITED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