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4:31:02

엔리코 키에사

이탈리아의 축구감독
파일:엔리코 키에사.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엔리코 키에사
Enrico Chiesa
출생 1970년 12월 29일 ([age(1970-12-29)]세)
이탈리아 제노바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75cm | 70kg
직업 축구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폰테데시모 칼초 (1986~1987 / 유스 )
UC 삼프도리아 (1988~1990)
SS 테라모 칼초 (1990~1991)
SS 키에티 칼초 (1991~1992)
UC 삼프도리아 (1992~1993)
모데나 FC (1993~1994)
US 크레모네세 (1994~1995)
UC 삼프도리아 (1995~1996)
파르마 칼초 1913 (1996~1999)
ACF 피오렌티나 (1999~2002)
SS 라치오 (2002~2003)
로부르 시에나 SSD (2003~2008)
ASD 피기녜 (2008~2010)
감독 ASD 피기녜 (2010)
국가대표 22경기 7골 ( 이탈리아 / 1996~2001)
가족 아들 페데리코 키에사

1. 개요2. 선수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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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 감독이자 전 선수. 현재 이탈리아와 유벤투스의 선수인 페데리코 키에사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다.[1]

전성기에는 리그 순위권의 공격수이자 탑클래스 프리키커였고, 커리어 내내 미친 활약을 펼친 적은 없어도 꾸준하게 득점을 올려주던 선수였다.

2. 선수 경력

키에사는 89년도에 삼프도리아에서 데뷔해 전성기에는 UC 삼프도리아, 파르마 칼초 1913, ACF 피오렌티나 등에서 활약했으며, 무려 2010년까지 선수생활을 해 왔던 선수로, 선수 통산 516경기에 출전해 196골을 넣은 세리에의 레전드이자 당대 리그를 대표하던 공격수 중 한 명이다. 주 포지션은 중앙 공격수이나 아들처럼 윙어로 뛰기도 했었다.

1989년 삼프도리아에서 처음 데뷔했지만 그 이후 두 시즌간 하위 리그에서 실력을 쌓고 삼프도리아로 리턴한다. 그러나 삼프도리아에서 26경기 2골로 충분한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하고 다시 세리에 B에 있던 모데나 FC로 이적해 36경기 14골을 기록하며 자신을 증명하고 다시 세리에 A의 US 크레모네세로 이적해 34경기 14골을 기록한다. 그리고는 다시 삼프도리아로 복귀해[2] 로베르토 만치니와 듀오를 결성하며 27경기 22골을 집어넣는 미친 활약을 보이면서 다시 파르마로 이적한다.

이 당시의 파르마는 지금처럼 돈이 없어서 4부리그까지 강등되던 팀이 아닌 이탈리아의 신흥 강팀으로, 프랑스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 릴리앙 튀랑과 스토퍼형 센터백 최초의 발롱도르 수상자 파비오 칸나바로, 아르헨티나의 레전드 센터백 로베르토 센시니로 이루어진 철의 스리백과 골대를 지키는 어린 지안루이지 부폰을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수비력에, 미드필드에는 이탈리아 국대에서만 60경기를 뛴 디노 바조, 프랑스 국가대표 미드필더 알랭 보고시앙이, 공격진에는 첼시, 밀란, 라치오, 인테르 등의 강팀에서 뛰게 될 에르난 크레스포가 뛰었고, 사기적인 수비력을 바탕으로 세리에 우승경쟁을 하던 강팀이었다.[3][4] 키에사는 이들과 함께 이적하자마자 29경기 14골을 기록하며 팀내 최다 득점자로서 96-97시즌 세리에 A 준우승을 이룩해내며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다. 그리고 98/99 시즌, 파르마는 UEFA컵, 코파 이탈리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우승하고, 세리에 A에서도 4위에 오른다. 이 시즌 키에사는 UEFA컵에서 8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세리에 A에서는 33경기 10골을 기록했다. 키에사는 파르마에서 세 시즌 동안 125경기 55골을 기록하고 99/00시즌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된다.

피오렌티나의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키에사- 바티스투타- 미야토비치[5] 쓰리톱을 구상하며 키에사를 영입했는데, 이 시즌 키에사는 본인의 폼도 별로였고, 미야토비치와의 포지션 경쟁도 있어 24경기 에서 단 6골을 기록하며 아쉬운 성적을 받았다.[6] 그러나 바로 다음 시즌, 주전 공격수였던 바티스투타가 재정 문제로 AS 로마로 떠나고, 미야토비치가 부상에 시달리며 주전 스트라이커 자리를 차지해 플레이메이커 후이 코스타의 지원을 받으며 리그 30경기 22골, 컵 6경기 5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치며 해당 시즌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한다. 그러나 다음 시즌, 키에사는 무릎 인대를 다치며 단 5경기 출전에 그쳤고, 키에사가 빠진 피오렌티나는 강등을 당하고 만다.

피오렌티나의 강등 이후 재정 문제와 강등 등이 겹쳐 SS 라치오로 이적하나 폼을 되찾지 못하고 리그에서는 12경기 2골, 시즌 29경기 7골에 그치며 라치오를 떠나 ACN 시에나로 향한다. 시에나에서 첫 시즌 12경기 2골[7]을 기록하며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다음 시즌 30경기 10골, 그 다음 시즌 36경기 11골, 그리고 38경기 11골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30대 후반에 접어든 노장 키에사는 직후 시즌인 06/07 시즌 전체 25경기에 나서 한 골도 넣지 못하는 부진을 겪었지만 여전히 시에나는 그를 중요 자원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그 다음시즌 그는 겨우 2경기에 나서는 데 그치고 08/09 시즌 현재의 세리에 D에 해당하는 수페르코파 c2에 있는 필라인이라는 팀으로 이적하고, 09/10 시즌이 끝나고 은퇴하게 된다.

3. 국가대표 경력

키에사는 96년부터 01년까지 국가대표에서 22경기 7골을 기록했다. 리그 수위권 공격수치곤 별로 많이 뛴 것 같지는 않아보이지만 이 당시 경쟁자가 로베르토 바조, 필리포 인자기, 크리스티안 비에리, 주세페 시뇨리,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프란체스코 토티, 파브리치오 라바넬리, 빈첸초 몬텔라, 로베르토 만치니, 잔프랑코 졸라, 피에를루이지 카시라기 , 파올로 디 카니오, 마르코 델베키오 , 마르코 디바이오 같은 괴물들이었다. 심지어 그 바조조차 국가대표 출전은 겨우 56경기, 만치니가 36경기에 그쳤을 정도로 이탈리아 포워드들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키에사는 96년에 처음 국가대표에 데뷔해서 UEFA 유로 1996에 소집되었고, 체코전 2-1 패배에서 팀의 유일한 득점을 넣었고, 0-0으로 비겼던 독일전에 출전하였지만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98년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2경기 교체출전에 그쳤다.

4. 플레이 스타일

엔리코 키에사는 상당히 다재다능한 타입의 스트라이커로, 키는 175cm으로 크지 않은 편이었지만 발이 굉장히 빠른 편이었으며, 킥력이 매우 강한 편이었다. 흔히 말하는 어드밴스 포워드 역할과 딥라잉 포워드 역할을 모두 소화 가능했으며, 윙어로 뛸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시야도 좋은 편이고, 테크닉이 상당히 뛰어났을뿐 아니라 오른발 잡이지만 왼발 역시 수준급으로 사용했는데[8] 왼발 킥 역시 강력하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는 날카로운 침투 능력과 강인한 체력도 가지고 있었으며, 고속에서의 볼 컨트롤도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키에사의 플레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슈팅력이었는데, 현대의 인사이드 포워드들처럼 왼쪽 측면에서 잘라 들어와서 감아차는 플레이뿐 아니라 마치 크로스처럼 뚝 떨어지는 슈팅도 자주 구사하곤 했다. 그리고 발리슛 능력도 상당한 편이었는데 거기에 프리킥도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감아차는 프리킥과 강하게 차는 통상적인 프리킥을 모두 수준급으로 구사했다. 그는 미셸 플라티니, 알바로 레코바와 함께 세리에 A 역대 프리킥 득점 순위 9위에 자리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잦은 부상으로 경기에 결장하곤 하였고, 그의 무릎 부상만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1] 프로필 사진의 아이가 페데리코이다. [2] 이 때 나이가 24세였는데 삼프도리아로만 벌써 세번째 이적이다(.....) [3] 심지어 98 시즌에는 그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까지 영입되었다. [4] 참고로 이 당시 파르마는 지나치게 돈을 끌어 쓰다가 결국 파산한다. [5] 직전 시즌까지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했으며, 97년도 발롱도르에서 2위를 기록한 레전드 공격수 [6] 그러나 미야토비치의 폼도 매우 나빴다. 그나마 첫 시즌은 건강하긴 했지만 2년 전 발롱도르 2위에 올랐던 실력은 어디갔는지 리그 16경기 2골, 시즌 25경기 3골을 기록했을 정도로 폼도 나빴고 부상도 잦았다. 그는 피오렌티나에서 보낸 3년 동안 고작 61경기에 출전해 9골을 넣었는데, 저 61경기도 교체가 매우 잦아 마지막 시즌이던 01/02 시즌에는 시즌 17경기에 출전했는데 출전시간은 고작 700분 가량이었고, 00/01 시즌에도 19경기 출전에 출전시간은 900분이 되지 않았다. [7] 라치오 시절과 헷갈린 것이 아니다. [8] 이 점에서는 그의 아들 페데리코 키에사도 상당히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