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0 22:12:42

엔도 카즈히코

엔도 카즈히코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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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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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ffffff
<rowcolor=#ffffff> 1950 1951~1952 1953 1954~1955 1956
이마니시 렌타로 타카노 히로요시 에다 코이치 곤도 마사토시 에다 타카시
<rowcolor=#ffffff> 1957~1958 1959 1960 1961 1962
오오이시 마사히코 스즈키 타카시 코다 마사루 아키야마 노보루 시마다 겐타로
<rowcolor=#ffffff> 1963~1965 1966 1967~1968 1969 1970~1971
이나가와 마코토 아키야마 노보루 모리나카 치카라 히라오카 이치로 히라마츠 마사지
<rowcolor=#ffffff> 1972 1973~1976 1977 1978~1980 1981~1982
야마시타 리츠오 히라마츠 마사지 와타나베 히데타케 히라마츠 마사지 사이토 아키오
<rowcolor=#ffffff> 1983~1987 1988 1989 1990~1991 1992
엔도 카즈히코 카케하타 미츠노리 사이토 아키오 나카야마 히로아키 노무라 히로키
<rowcolor=#ffffff> 1993~1994 1995 1996~1997 1998 1999
우도 카츠야 노무라 히로키 모리타 코키 카와무라 타케오 미우라 다이스케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2007
카와무라 타케오 코미야마 사토루 미우라 다이스케 요시미 유지 미우라 다이스케
<rowcolor=#ffffff> 2008 2009 2010 2011 2012
테라하라 하야토 미우라 다이스케 스티븐 랜돌프 야마모토 쇼고 타카사키 켄타로
<rowcolor=#ffffff> 2013 2014 2015 2016 2017~2018
후지이 슈고 미시마 카즈키 쿠보 야스토모 이노 쇼이치 이시다 켄타
<rowcolor=#ffffff> 2019~2020 2021 2022 2023 2024
이마나가 쇼타 하마구치 하루히로 아즈마 카츠키 이시다 켄타 아즈마 카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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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PB 로고.svg 1983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키타벳푸 마나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엔도 카즈히코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수상자 없음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키타벳푸 마나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엔도 카즈히코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야마네 가즈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 1984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 1984, 1986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1]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등번호 38번}}}
다나카 아키라
(1976~1977)
엔도 카즈히코
(1978)
카와노 야스히코
(1979~1989)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등번호 24번}}}
코타니 타다카츠
(1968~1977)
엔도 카즈히코
(1979~1992)
모리야마 료지
(1993~1995)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번호 83번}}}
나카죠 요시노부
(1991~1993)
엔도 카즈히코
(1997~2003)
니시오카 요시히로
(2004~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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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30617 엔도 카즈히코.jpg
엔도 카즈히코
遠藤一彦 | Kazuhiko Endoh
출생 1955년 4월 19일 ([age(1955-04-19)]세)
후쿠시마현 니시시라카와군 니시고무라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학력 이시카와 고등학교 (후쿠시마) - 토카이대학 공학부[2]
신체 184cm, 72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77년 드래프트 3순위 ( 타이요)
소속팀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1978-1992)
지도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군 투수코치 (1997-1999)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군 투수코치 (2000-2003)
응원가 타이요 시절(CD판 한정)[3]

1. 개요2. 커리어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시절2.3. 은퇴 이후
3. 플레이스타일4.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엔도 카즈히코 프로필.jpg
일본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1980년대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며, 요코하마에서만 15년간 134승 58세이브의 프로 커리어를 보낸 원클럽맨이다. 또한 현역 시절 선발로 276차례 등판하여 109번의 많은 완투수를 기록하며 철완으로 불리기도 했다.

2. 커리어

2.1. 아마추어 시절

이시카와 고등학교 시절 2학년 시절인 1972년엔 중견수 중간계투로 뛰며 여름 코시엔 도호쿠 지역예선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미야기현의 토호쿠 고등학교에게 패배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코시엔 55주년 기념 대회가 있던 1973년엔 팀의 에이스이자 4번타자로 후쿠시마현 지역예선 결승에 진출했지만 후타바 고등학교에 1:2로 석패하며 결국 고등학교 시절엔 1번도 코시엔에 진출하지 못했다.[4][5]

이후엔 토카이대학 공학부에 진학했다. 아예 기계공학을 전공해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야구도 꾸준히 병행해 토카이대학 야구부가 속한 수도대학 야구리그[6]에서 통산 47경기 28승 5패, 200탈삼진, ERA 1.11를 기록하며 리그를 제패했고, MVP도 1차례 수상하며 본인의 주가를 올렸다. 1976, 1977년에 2년 연속으로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장하여 1976년엔 우승[7], 1977년엔 준우승을 달성하며 본인의 기량을 뽐냈다. 대학 졸업 시즌인 1977년 신인 드래프트 회의[8]에서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가 3순위로 엔도를 지명했고, 처음엔 원래 희망했던 엔지니어로 일하기 위해 프로 입단을 거절하고 사회인야구에 진출할 생각이었으나 후쿠시마로 귀향하는 전철 안에서까지 타이요 구단 직원들이 설득에 나선 끝에 결국 입단을 결정했다.

2.2. 프로 시절

프로 첫 해인 1978년엔 벳토 카오루 감독의 육성 방침에 따라 대부분 2군에서 뛰다가 시즌 막판 1군에 승격되어 데뷔 첫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벳토 감독은 엔도에게 언더핸드로 전향할 것을 권했지만, 2군 투수코치로 있던 호리모토 리츠오[9] 오버핸드로 던지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해 이후 파워 피쳐로 선수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1979년 본격적으로 1군에서 풀타임으로 뛰며 전반기는 선발 투수, 후반기는 마무리 투수로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등판했고 그 결과 47경기 203.1이닝 ERA 3.81 12승 12패 8세이브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으나, 해당 시즌 신인왕은 13승 5패로 센트럴리그 승률 1위(.722)를 기록한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지사와 키미야[10]가 수상했다. 이후 1980년에도 불펜투수로 뛰며 54경기 16세이브 ERA 3.17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1981년부터는 사이토 아키오와 보직을 맞바꾸며 선발 투수로 복귀했고 본격적으로 약체였던 1980년대 요코하마의 비운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엔도는 선발 전환 첫해였던 1981년에 135.1이닝을 던진걸 시작으로 1982~1986년의 5시즌 동안 연속 200이닝 이상 소화라는 기록을 찍으며 이닝 이터로써의 활약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 시기엔 연평균 평균자책점 또한 3.17로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며 평균 15승 이상을 책임져주는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다해줬으나, 당시 타이요엔 엔도와 사이토, 은퇴 시기가 다가오던 노장 히라마츠 마사지[11] 외엔 믿을 만한 투수가 전무했던 탓에 우승은 커녕 A클래스에 든 것도 1983년 3위가 유일했다.

그 중 1983년은 단연 백미였는데, 엔도는 18승 9패 3세이브, 186탈삼진, 평균자책점 2.87을 기록하며 베스트나인, 다승왕, 사와무라상을 독차지하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듬해인 1984년에는 아예 276.2이닝을 투구하며 17승 208탈삼진, ERA 3.68의 성적을 남기며 2년 연속 다승왕과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 타선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결국 패수 또한 17패로 리그 1위에 올랐다. 현재까지도 센트럴리그에서 정확히 5할 승률로 다승왕을 수상한 건 엔도가 유일하다.[12]

그 뒤로도 1986년에 31경기 13승 13패, 233이닝, ERA 3.01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 1987년 시즌 막판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코라쿠엔 구장 원정경기에서 주루 도중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며 남은 시즌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후 수술과 재활을 거듭하며 어찌저찌 다음 해인 1988년 개막 때 복귀했지만, 무리하게 개막 시기에 맞춰 복귀를 강행한 탓에 투구 밸런스가 무너져 결국 23경기 5승 12패 109.2이닝 ERA 4.76로 큰 부진을 겪었다. 특히 직전 시즌인 1987 시즌에 1983년에 버금가는 14승 7패 ERA 2.88로 활약해줬기에 엔도의 부진은 그 자신뿐만이 아닌 타이요에게도 뼈아픈 손해였다. 1989 시즌엔 더하게도 19경기 2승 8패, ERA 6.17이라는 데뷔 이래 최악의 시즌을 보내며 결국 선발 투수로서는 제 몫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 1990년부터 10년 만에 다시 불펜투수로 전향했다.

불펜 전향 첫 시즌이던 1990년 시즌은 45경기 6승 6패 21세이브 ERA 2.17로 호투하며 컴백상까지 수상했지만, 1991년부터 다시 부진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고,[13] 결국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최후의 시즌이었던 199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0월 7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시즌 최종전이자 훼일즈의 이름을 걸고 치르는 마지막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해 2이닝 무실점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14] 이렇게 1980년대의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를 지탱한 에이스는 훼일즈의 이름과 함께 현역 무대를 떠났다.[15]

2.3.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엔 TBS에서 해설자를 잠시 거친 뒤 훼일즈의 후신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투수코치로 활동했고, 2003년 시즌 종료 후 퇴임하여 다시 TBS 라디오 등에서 해설자를 맡고 있다. 또한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재팬 애슬레틱 아카데미에서 유소년 선수들에게 지도를 맡고 있다.

3. 플레이스타일

본디 대학 시절엔 최고 구속이 130km/h대 중반에 그쳤고 프로에 와서도 140km/h대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엔 140대 후반의 포심 패스트볼 또한 여러번 던져 실제 최고 구속은 그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변화구로는 원래 커브 정도 뿐이었지만 프로에 와서 포크볼을 배워 본인의 최대 무기로 이용했다.

4. 기타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카나가와현 카마쿠라시 관광협회의 전무이사로 취임했던 적이 있다.

투수의 직업병으로 여겨지는 고관절 통증이 극심해서, 은퇴 이후엔 카와구치 카즈히사에게 본인의 고관절이 잘 안 움직여져서 관리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1] 당시 센트럴 리그에 최다 탈삼진 타이틀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기에,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다. 센트럴 리그의 최다 탈삼진 타이틀은 1991년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2] 3학년 때 하라 타츠노리가 이 대학의 경제학과에 입학해 대학 후배로 함께 뛰었다. [3] 球界一の天才エース むかえ打つバッターを打ち取る姿 マウンドに一段と ああそびえたつ 右腕輝く エース遠藤(야구계 제일의 천재 에이스 맞서는 타자를 물리치는 모습 마운드에 한층 더 아아 우뚝 선다 오른팔이 빛나는 에이스 엔도) / 1990년대에 출시되던 대다수 구단의 선수 응원가 CD엔 투수 전용 응원가도 함께 수록되었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진이나 사이토 타카시, 미우라 다이스케 같은 일부 선수를 제외하면 거의 전부가 실제 경기에서 사용되지 않은 CD판 한정 응원가에 그쳤으며, 이 응원가도 실제로 사용된 적은 없다. [4] 1977년까진 권역을 나눠 2개교에 출전권을 준 홋카이도 도쿄, 개최지 어드밴티지를 받은 효고 오사카를 제외하면 도호쿠, 간토 남/북부, 도쿄, 호쿠리쿠, 시코쿠, 규슈 남/북부 등 현이 아닌 각 지역별로 묶어 1개씩 출전권을 배정했다. 다만 이러한 출전권 배분으로 약소 지역에 대한 유불리 문제가 나왔기 때문에 5주년 기념대회 등에선 각 도도부현 별로 1개교씩 출전권을 줬고, 1978년부터 현재의 방식인 도도부현 별 1개교+ 도쿄, 홋카이도는 2개교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후 80주년인 1998년 대회부턴 10주년마다 예선 참가 학교가 128개교가 넘는 사이타마현, 치바현, 아이치현, 오사카부, 가나가와현, 효고현 대회를 2개 권역으로 나눠 출전권을 2개씩 부여했고, 100주년 대회인 2018년엔 후쿠오카현도 출전권을 2개씩 부여받았다. 참고로 엔도가 고교 시절을 보내던 1972년엔 후쿠시마현 도호쿠 권역에 배정되어 있었고, 1973년은 55주년 기념 대회라 각 도도부현 별로 예선 겸 지방대회를 열었기 때문에 여기에 참가했다. [5] 후타바 고교는 후쿠시마현 후타바군 후타바마치에 위치한 학교였는데,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도시는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가 위치했던 지역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소개령이 떨어져 현재는 무기한 휴교 상태. [6] 1964년 토토(東都, 동도)대학 야구리그에 정식 소속, 준가맹 상태였던 일부 학교가 탈퇴한 후 형성한 대학야구 리그로, 토카이대학, 테이쿄대학, 츠쿠바대학, 일본체육대학 등 수도권 인근의 16개 대학 야구부가 소속되어 있다. 리그 자체는 토카이대학이 통산 75회 우승으로 압도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다른 대학은 24회 우승의 일본체육대학을 제외하면 토카이의 아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편. [7] 당시 결승전 상대였던 오사카상업대학 사이토 아키오와는 2년 후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에서 팀메이트로 만나 함께 1980년대 타이요를 대표하는 주축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게 된다. [8] 이 해 드래프트에서 에가와 스구루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의 1위 지명을 받았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을 희망하여 결국 입단을 거절했고, 미국으로 1년간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가 교섭권 기한이 만료된 직후 요미우리와 드래프트 번외 계약을 체결하면서 편법 입단 논란을 불러왔다. [9] 196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데뷔해 그 해 29승을 기록하며 역대 최초로 신인왕 사와무라상 동시 수상을 달성했다. 이후엔 다이마이/도쿄 오리온즈로 트레이드된 1963년까지 데뷔시즌만큼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선발 투수진의 일원으로 뛰었으나 1964년 이후 급격히 성적이 나빠져 다음 해를 끝으로 은퇴했고, 은퇴 이후 타이요 훼일즈, 닛폰햄 파이터즈, 퉁이 라이온즈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2012년 간염으로 향년 76세에 별세. [10] 1951년생의 사회인야구 출신 늦깎이 신인 투수로 무려 역대 최고 기록인 드래프트 5회 지명 및 4회 거부라는 비범한 타이틀을 보유한 선수였다. 프로에서 성공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지명을 거부한 채 사회인야구에 머무르다 점차 사회인야구에서의 활약으로 프로에서 통하겠다는 자신이 생겨 결국 엔도와 같은 1977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의 1위 지명을 받아서 이듬해인 1978년 드래프트 개최 직전에 입단 제안을 승낙하고 만 27세의 늦은 나이(그것도 결혼해서 자식이 2명이나 있는 상태였다!)에 프로에 데뷔하게 되었는데, 데뷔 첫 해였던 1979년엔 상술할 활약으로 역대 최고령 신인왕까지 수상했으나 다음 해부터 성적이 역으로 추락하며 1승 15패라는 충격적인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고 결국 데뷔 시즌 이후엔 특별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6년 만인 1984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11] 요코하마 구단 사상 유일한 통산 200승을 달성한 투수로, 면도날 슈트라 불린 고속의 뛰어난 궤적을 가진 슈트볼이 주무기였던 선수였다. 현재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 중. [12] 퍼시픽리그에서는 2001년 마츠자카 다이스케가 15승 15패로 다승왕에 올랐는데, 당시 마츠자카의 사와무라상 수상을 두고 저 낮은 승률 탓에 수상 자격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13] 이후 엔도의 뒤를 이어 요코하마의 마무리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였다. [14] 이 경기는 당시 막 1군에서 올라온 미우라 다이스케의 데뷔전이기도 했는데, 미우라는 이후 훼일즈의 후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에이스 투수로써 통산 172승을 기록하며 1998년 우승과 기나긴 암흑기를 지탱해 나갔다. [15] 함께 1980년대의 에이스로 활약한 사이토 아키오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원년이었던 1993 시즌까지 1년간 더 뛴 후 은퇴했다. 덕분에 사이토는 카와사키 시대 타이요- 요코하마 타이요-베이스타즈의 세 시대를 모두 거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