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46:10

엄종호


성명 엄종호(嚴鍾鎬)
생몰 1907년 12월 20일 ~ 1968년 11월 20일
출생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포저리
사망지 경상북도 봉화군
위패 국립대전현충원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엄종호는 1907년 12월 20일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포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봉화군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봉화에 있는 소년단체인 내성소년구락부(乃城少年俱樂部) 등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후 1928년 5월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1931년 6월 허경인의 권유로 일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 가입하여 토목건축 강동교분회(江東橋分會)에 소속되었다. 1932년 9월 최상준(崔相俊)과 전협 강동지구위원회(江東地區委員會) 재건에 대해 협의하였으며, 메이데이 등 각종 기념일을 이용하여 일반노동자에게 유인물 등을 배포하였다.

한편, 엄종호는 1932년 1월 박희창(朴喜昌)의 권유를 받아들어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강동교(江東橋) 조직원이 되었으며, 그해 9월 허경인의 권유에 따라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 일본출판부 및 노동계급사에 가입했다. 그러다가 경찰에 체포된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933년 3월 4일 기소되어 토요다마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후 1935년 10월 4일 도쿄형사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사상 전향을 위장하여 보석 중 1936년 3월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 후 1936년 3월 제국갱신회(帝國更新會)에 가입하여 표면적으로는 사상전향자로 가장하고, 옛날부터의 동지인 이창정(李昌鼎), 김무영(金武英), 송이돌(宋二乭) 등과 다시 운동을 재개하였다.

그는 김무영 등과 함게 <중간(仲間)>이라는 잡지를 발행했으며, 1936년 3월 영도간사(永島幹司)·김무영 등 6명과 전선통일전적합동간담회(戰線統一全的合同懇談會)를 개최하고, 코민테른 제7회 대회의 방침에 의거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와 같이 사상 전향으로 위장하여 활동을 하던 그는 또다시 체포되어 1936년 12월 7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송치되었고, 1937년 6월 4일 도쿄형무소에 소용되어 8.15 해방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봉화군으로 돌아온 그는 조용히 지내다 1968년 11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엄종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