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6:17:23

아키히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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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2. 황태자 책봉과 결혼3. 천황 재위 시기
3.1. 고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3.2. 생전 퇴위 발표3.3. 즉위 30주년과 마지막 기념사3.4. 퇴위 의식과 퇴위식
4. 상황으로 물러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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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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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2월 23일,[1]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2남 5녀 중 장남[2]이자 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간 고준 황후는 결혼 후 줄줄이 딸만 4명을 낳아 '온나바라(女腹, 딸만 낳는 여자)'라며 곳곳으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있었으며, 신하들이 쇼와 덴노에게 "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시라"며 구체적으로 후궁 후보들까지 일일이 알아보고 있었다. 사실 아들과 딸을 결정짓는 건 아버지 쪽 성염색체임을 생각하면... 그러나 쇼와 덴노가 후궁 들이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일본 정부, 일본 황실, 궁내성 등에서 다음 황위를 계승할 후사의 탄생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키히토는 히로히토 덴노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니, 그가 얼마나 귀하고도 귀한 아들이었을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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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어머니 고준 황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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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돌을 맞이한 아키히토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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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살 때의 아키히토 덴노.

아키히토는 2살 때인 1936년부터 부모와 떨어져 동궁에서 지냈다. 본래 일본 황실의 자녀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양육되는 것이 관례이자 전통이었으나[3], 너무도 소중한 아들이었기에 관례를 깬 것이었다. 참고로 아키히토 덴노의 슬하 자녀들( 2 1녀)은 어릴 때부터 쭉 부모와 함께 지냈다. 이는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인 아내 미치코 황후의 뜻이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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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누나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여동생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와 함께.[4]
아키히토의 어린시절 영상.[5]

아키히토는 본래 왼손잡이였는데, 어렸을 때 양손잡이로 교정했다. 1945년 당시 만 11살 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쿄를 보면서 평화를 다짐했다고 회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 피난처에서 전황을 담당 장교에게 설명받던 중, 카미카제[6]에 대해 "그저 병력을 소모하는 것뿐 아닙니까?"라고 되물어, 담당 작전장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어린애도 아는 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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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아버지 쇼와 덴노와 함께.

패전 이후에는 서양의 사상과 생활 방식을 배우게 하려는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미국 태생의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8]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녀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퀘이커[9] 교도 중 하나로, 퀘이커 교도와의 친분은 쇼와 덴노 때부터 전통이었다.

사실 바이닝 부인은 청소년기의 아키히토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일본에선 평가받는다. 그 둘의 일화 중 하나로 바이닝 부인이 아키히토의 영어 수업 시간에 외국인 친구들을 부르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게 하기 위해 황태자가 아닌 '지미(Jimmy)'란 애칭으로 아키히토를 부르려 했는데, 이때 아키히토가 "싫습니다, 저는 황태자입니다.(No, I'm a prince.)"라고 반발한 일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바이닝 부인이 "이 수업에서는 '지미'라고 불려야 한다."고 설득하자, 결국 "예, 알겠습니다. 저는 지미입니다."라며 바이닝 부인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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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닝 부인과 아키히토.

또 바이닝 부인은 혼자서 무언가를 할 일이 거의 없는 아키히토가 수동적인 사람이 될까 우려하여[10] 여러모로 능동적인 사고를 갖추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아키히토도 그런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는지 훗날 결혼식에 바이닝 부인을 주요 하객으로 초대했으며[11], 그녀가 미국에 간 이후에도 주미일본대사관을 통해 생일이면 항상 카드와 꽃다발을 보내줬다고 한다.

1952년 가쿠슈인 대학에 진학하여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나, 장기간의 외유[12]에 따른 학점 부족으로 유급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졸업은 하지 않고 수업만 듣는 일종의 청강생 신분으로 대학을 수료하였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어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낭설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2. 황태자 책봉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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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결혼 당시
오른쪽은 전통의상을 입고 찍은 결혼사진. 아키히토 황태자가 입은 옷은 황태자 전용 소쿠타이인 오니조호 이고, 미치코 황태자비가 입은 옷은 쥬니히토에이다.

1952년 11월 10일 성년식과 함께 황태자 책봉식(立皇太子の礼)이 정식 거행되어 정식 황태자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를 대리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등 반년에 걸쳐 14개국을 순방 및 해외 공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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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가루이자와에서 테니스를 치던 도중 평민 쇼다 미치코와 우연히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어[13] 어머니, 숙모들, 여러 황족들과 화족들의 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쇼와 덴노가 그들의 입을 닫는 데에 결정타[14]를 날려줌으로써 1959년 결혼하여 화제가 되었다. 오랜 전통을 깨고 최초로 평민 출신을 황실 신붓감으로 맞아들였기 때문. 참고로 아키히토의 형제들은 모두 황족 내지는 옛 화족 가문[15]의 자제와 결혼했다.

여담으로 일본에서 당시로는 고가의 첨단 기계인 텔레비전이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흑백 TV로 중계되는 결혼식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앞다투어 TV를 구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0만대를 돌파했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이 만나게 해준 스포츠인 테니스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미치코 황후는 사진에서 보듯 미인으로 매우 유명했지만, 엄청난 시집살이에 시달린 바람에 황후가 되었을 때는 남편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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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코도 말이 평민이지 사실은 재벌가 장녀로,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郎) 닛신제분[17] 회장의 장녀이자, 외가는 옛 화족인 소에지마(副島) 백작 가문이었다. 게다가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 졸업했고,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했으며, 대학 시절에는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도 매우 뛰어났다. 또한 음악, 미술, 체육까지 정말 못하는 게 없었다. 그런데도 황실 내부에서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

나가코 황후 신적강하된 황족 여인네들은 입방아를 찧다 못해 집단 괴롭힘(왕따)에 나섰다. 쇼다 미치코와 아키히토 황태자가 사귈 때부터 달라붙어 둘의 사이를 끈질게 훼방놓았으며, 그들의 결혼을 극우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게다가 그렇게 힘들게 결혼했음에도 끝내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시종일관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공식석상에서의 집단따돌림 행위도 일삼았다고. 나가코 황후를 포함한 나머지들은, 신분의 벽 운운하기엔 너무나 품위없는 행동으로 며느리를 괴롭힌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당 문서로.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가혹한 시집살이를 당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개혁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주었다. 궁전 내의 산전(産殿) 대신 궁내청 병원에서 출산했고, 자녀들을 부모의 곁에 두고 양육했고, 손수 요리를 하고 자녀들의 도시락도 만들었다. 그야말로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는 수천 년간 내려온 일본 황실의 전통을 깬 파격적인 것이었고, 패전과 인간선언 이후의 시대상에 걸맞는 새로운 황실상이기도 했다. 미치코 황태자비가 이러한 행보를 취한 이유는, 우선 본인이 평민 출신이기도 했고, 연애하던 시절부터 아키히토 황태자로부터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곁에서 떨어져 자라났다"는 말을 듣고 깊은 연민을 느껴, 평범하면서도 따뜻한 가정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2남 1녀인 나루히토, 후미히토, 구로다 사야코 모두 평민과 결혼했다.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 외교관의 딸이자 전직 외교관, 작은며느리 키코 비는 세계적 경제학자이자 가쿠슈인 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지낸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의 딸, 사위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는 후미히토 친왕의 가쿠슈인 동창[18]이자 도쿄도청 공무원이다. 자세한 것은 아키히토/가족관계 참조.

3. 천황 재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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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12일, 즉위식 때 아키히토의 모습
1989년 1월 7일, 장기 투병 중이던 아버지 쇼와 덴노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역사상 2번째로 고령인 55세에 즉위해 헤이세이 시대로 개원했다. 1999년과 2009년, 2019년 각각 즉위 10주년과 20주년, 30주년 축하 행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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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일본을 공식 방문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 내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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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6일, 임시 국회 개회식에서 개회 선언을 하는 모습.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늙었다.

3.1. 고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

2011년 11월 폐렴으로 입원해 19일만에 퇴원했고 그동안의 공식 업무는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가 대신 공무를 수행했다. 아키히토 덴노가 77세의 고령이지만 현행 황실전범상 양위하고 상황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야심 높은 걸로 유명한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덴노 정년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2012년, 1년 전에 발견된 관상동맥경화를 치료하기 위해 약물요법을 받았으나, 호전되지 않고 증세가 악화됨에 따라 2월 18일에 바이패스 수술을 받기로 결정되었다. #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다시 공식 업무에 복귀했다.

2018년 6월에는 빈혈로 다시 몸이 안 좋아졌다. # 아버지처럼 허리도 많이 굽었다. 얼굴 근육의 노화때문에 표정도 굳어졌다.[19]

3.2. 생전 퇴위 발표

고령인 데다[20] 제사가 상당히 많은 천황의 직무가 힘이 부침은 사실인지, 2016년 7월 13일엔 "생전에 천황의 자리를 아들에게 양위하고 본인은 퇴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 일본의 역대 천황들 중에서 생전에 퇴위한 천황은 매우 많으나,[21] 근대로 오면 119대 고카쿠 덴노[22]가 1817년에 아들 닌코 덴노에게 양위한 이후 200년 동안 사례가 없었다.[23] 결국 차기 천황은 아키히토의 장남이자 현 황태자인 나루히토(徳仁)로 확정됐다. 이미 2010년 7월 22일에 생전 퇴위에 대해 밝힌 적 있다. #

일부 일본 언론은 이것을 "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아베 신조 총리에 맞서, 아키히토 천황이 던지는 초강력 승부수일 수도 있다"고 분석하였다. # 하지만 일본 궁내청 장관은 생전양위를 할 수도 있다는 언론 기사를 사실상 부인하였다. # 반대로 아베 신조 총리가 양위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개헌에 대한 반감을 줄이기 위해 황실전범 개정에 관한 논의를 먼저 꺼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루머들과 정반대로 일본 내각에서는 명확하게 '황실전범 관련 개정 의사는 없으며, 논의된 내용 또한 없다'고 딱 잘라 말한 상태이다.

하지만 비록 실권은 있으나 그 수명이 있는 정치세력과는 달리, 실권은 없으나 수천 년간 이어진 천황제의 상징성을 제아무리 아베 신조 총리라도 무시하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일본 국민들 또한 85%가 생전 퇴위에 찬성하여 지지 의사를 보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8월 8일 퇴위 의사를 밝힌다는 기사가 떴다.(!) 이에 아베 신조 총리는 생전 퇴위 의향을 밝히면 바로 이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힐 방침이라고 한다. 그리고 8월 8일 오후 3시 자신의 입장을 비디오 형식으로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표 날짜를 두고 고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8월 6일과 9일은 각각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날이고 15일은 패전의 날이다. 궁내청은 각종 기념일과 황실 행사를 피할 수 있는 8일 오후 3시로 정했다고 한다.
2016년 8월 8일 오후 3시, 공식적으로 생전 퇴위 발표를 하였다. 사전에 녹화된 10분 분량의 메시지로, 직접적으로 퇴위를 표현한 것은 아니고 "점차 진행된 신체적 쇠약을 고려할 때 몸과 마음을 다해 상징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며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였고, 일본 언론에서는 이를 "기분 표명(お気持ち表明)"이라고 보도했다.[24] 더불어 아베 신조 정권이 추진 중인 나루히토의 섭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25]

아키히토 덴노가 생전 퇴위를 밝혔으나, 전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의 법률에는 생전 퇴위를 규정하는 명문이 없어 법 개정이 필수적이다.[26] 따라서 실제 퇴위는 최소 6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퇴위하게 된다면 상황(上皇)으로 불릴 것으로 보인다.[27] 본인의 나이 이외에도 나루히토 황태자의 나이도 고려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나루히토 황태자는 생전 퇴위 입장을 밝힌 시점에서 이미 만 57세로, 이대로라면 역사상 2번째로 고령에 즉위했던 본인보다 훨씬 늦게 즉위할 가능성을 고려한 듯하다.

아래는 메시지 전문 번역이다. 출처 정치 개입이 불가능해 우회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졌다. 이에 해당 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전후 70년이라는 큰 시기적 고비를 넘기고 2년 뒤에는 헤이세이 30년을 맞습니다. 나도 80세를 지나면서 체력 등의 면에서 여러가지 제약을 느끼곤 합니다. 최근 수 년 간 천황으로서 스스로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 자신의 할 바와 책무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해설: 오랫동안 천황으로 있으면서 나도 이제 많이 늙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일찌감치 생각해뒀던 천황으로서의 향후 계획을 밝히고자 한다.)

오늘은 사회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하는 속에서 천황도 이제 고령이 된 경우 무엇이 바람직한 처신일지, 천황이라는 입장에서 현행 황실 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삼가면서, 나 개인으로서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해설: 고령화 사회에 접어 들면서 평균 수명이 많이 오른 만큼 고령의 천황에 대한 퇴위 및 양위에 대한 규정이 필요하다. 헌법 상 내가 정부에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으니, 돌려서 말하겠다.)

즉위 이래 나는 국사 행위를 하면서 일본국 헌법 하에서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천황의 바람직한 위상이 어때야 할 지를 날마다 생각해왔습니다. 전통의 계승자로서 이를 계속 수호한다는 책임을 깊게 인식하고, 날로 새로워지는 일본과 세계 속에서 일본 황실이 어떻게 전통을 현대 속에 살려나가며 생생히 사회에 스며듦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해설: 전통을 따른다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현대에 달라진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천황이 노년기에도 계속 직무를 수행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은 일반인들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몇 년 전에 2차례 외과 수술을 받았고, 고령에 따른 체력 저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앞으로 종전처럼 무거운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곤란해질 경우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국가에, 국민에게, 또한 내 뒤를 이을 황족에게 좋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벌써 80세를 넘기고, 다행히 건강하기는 하지만 점차 신체 쇠약이 진행하는 것을 감안할 때 지금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 상징으로서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설: 고령의 나이에는 건강에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고 체력도 저하된다. 아직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 점점 더 책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내가 천황의 직위에 오른 이래 거의 28년, 그동안 나는 우리나라의 많은 기쁨과 슬픔을 국민과 함께 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천황의 책무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 옆에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동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설: 28년 간 재위를 해왔고 천황의 은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많다.)

천황이 상징인 동시에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천황이 국민에게 천황이라는 상징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구하는 한편 천황도 스스로를 깊이 이해하고 항상 국민과 함께 한다는 자각을 자신의 몸 안에 키울 필요를 느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각 지역, 특히 멀리 떨어진 지방과 섬을 여행하는 것도 나는 천황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황태자 시절을 포함해 지금까지 나는 황후와 함께 거의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으며, 어디에도 지역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떠받치는 서민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천황으로서 소중한,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을 위해 기원한다는 책무를,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와 경애를 별다른 준비 없이 받은 것은 행복이었습니다. (해설: 천황은 궁궐에만 있으면 되는 지위가 아니고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국민과 함께 해야 하는 자리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는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다.)

천황의 고령화에 따른 대응으로 국사 행위와 그 상징으로서 행위를 한정 없이 축소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천황이 미성년자이거나 중병 등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천황의 행위를 대신할 섭정을 두는 것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천황이 충분히 그 위치에서 요구하는 책무를 수행하지 않은 채, 생애를 마칠 때까지 계속 천황으로 있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해설: 정부는 천황의 직무 범위 축소나, 황태자 섭정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건 싫다. 나는 생전에 퇴위하고 싶다.)

천황이 건강을 해쳐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경우 이제껏 보았듯이 사회가 정체하고 국민 생활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황실 관례로서 천황의 죽음을 맞이하면 엄중한 장례 절차가 거의 2개월 동안 이어지고, 그 후에도 장례에 관한 행사가 1년 간 계속됩니다. 그처럼 번거로운 행사와 새 시대에 관한 갖가지 행사가 동시에 진행함에 따라 행사 관계자, 특히 유족은 대단히 힘든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사태를 피할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해설: 장례식과 즉위식이 동시에 치러지면 여러 사람들이 힘들다.)[28]

앞에서 말했듯이 일본국 헌법상 천황은 국정에 관한 권능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우리나라의 유구한 천황 역사를 새삼스럽게 돌아보면서 앞으로도 황실이 항상 국민과 함께 하고, 서로 힘을 합쳐 이 나라의 미래를 쌓도록 그리고 상징적 존재인 천황의 공무가 언제라도 중단 없이 안정적으로 이어져 나갈 것을 충심으로 염원하며 이렇듯 나의 기분[29]을 토로합니다. (해설: 천황은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정부는 나의 의견을 잘 수렴해서 내가 생전에 물러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어 달라.)

국민 여러분의 이해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아키히토의 생전퇴위 의사 표명과 관련해 이달 말이나 내달 초 전문가 회의를 구성해 대응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 9월 23일. 천황의 공무 부담 경감 등에 관한 유식자(有識者·전문가) 회의를 설치하며, 내달 중순 첫 회의를 가진다. 또, 호칭에 관해서 특별법 명기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 전문가 사이에서도 크게 엇갈렸다. #

산케이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관련법 정비가 내년에 이뤄질 것이며, 나루히토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례인 '다이조사이(大嘗祭)'[30]를 2018년 11월 여는 방향으로 검토 중이라고 냈다. # 전문가 회의는 내년 초까지 대책을 논의한 뒤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

재위 31주년인 2019년에 퇴위하는 쪽으로 가닥잡히고 있다. # 그리고 2019년 4월 30일에 양위 전망 기사가 나왔다. # 또, 아키히토의 퇴위 시기를 85세 생일을 맞는 2018년 12월 23일로 검토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

전문가 공청회에서 퇴위에 대해서 찬성 9 : 반대 7이며, 찬성파 중 '특별법 제정'vs'전범 개정' 가지고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 그 후, 전문가 공청회는 현 덴노에 한해 허용하는 특례법을 주요 방안으로 제시할 방침이라고 보고있다. #

아키히토의 생일을 맞아 한 언론이 죽마고우인 친구와 인터뷰에서 특별법이 아닌 황실전범 개정을 통한 생전 퇴위, 섭정(攝政) 반대[31] 등 입장을 확실히 밝혔다. # 생전 퇴위 이후 '상황'(上皇)이라는 칭호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를 통과한 "천황의 양위 등에 관한 황실전범특례법"에서 상황(上皇) 칭호를 사용한다고 확정하였다. 이번 '상황' 칭호는 예전 상황들의 정식 칭호인 '태상천황'의 줄임말이 아니다. 해당 법 제3조에 규정된 칭호가 그냥 상황이다.[32] 그리고 미치코 황후는 황태후나 태후가 아니라 상황후라는 칭호를 쓰기로 했다.[33]

퇴위한 뒤에는 마음이 변해도 다시 즉위하지 못하도록 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천황을 대신해 임무를 수행하는 섭정(攝政)을 도입하려는 논의도 생전 양위 결정과 함께 사라졌다. # 2017년 5월 19일. 일본 정부가 현재의 덴노만을 대상으로 생전 퇴위를 인정하는 내용으로 '생전퇴위 특례법 정부안'을 확정했다. # 2017년 6월 2일 일본국 중의원 본회의를 통과했고 6월 9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 역시 통과했다. 남은 건 각의의 승인이지만 아베 신조 스스로 "덴노의 뜻에 반하지 않겠다"고 표명한 만큼 양위에 관한 사실상의 절차는 이제 끝났다.

2019년 4월 30일 퇴위하고 다음날인 2019년 5월 1일 나루히토 황태자가 천황으로 새로 즉위할 예정이다.[34] 새 연호는 2019년 4월 1일에 '신연호(新元号)발표'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하며, 헤이세이 시대는 개원(改元) 31년 만에 역사 속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 #

다음 연호를 즉위 1개월 전인 4월 1일에 발표할 예정이다. 천황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다음 연호를 발표하는 것 자체가 200년 전 고카쿠 덴노에게 생전퇴위 이후 굉장히 이례적이라, 원래는 즉위 당일에 발표한다고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너무 촉박해서 연호가 바뀐 직후가 크게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반대해서, 그나마 타협하여 4월. 연호를 쓰는 나라에서 1달 가지고 개원 후 혼란이 수습될 리는 없고, 이 때문에 행정력 낭비가 많다는 목소리가 크다. 당장 작게는 달력 만드는 업체(…)[35]부터 공무원들, 크게는 일본은행 조폐국까지, 일본 사회 각계각소가 퇴위 및 즉위 전후로 한동안은 혼란스러울 예정이다.

2019년 4월 30일의 퇴위로 인해 천황으로서의 마지막으로 맞은 생일의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의 지지 감사와 평화 강조를 하였다. #

2019년 1월 2일, 도쿄 고쿄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한 새해 축하 일반참하 행사에서 "일본과 세계인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라고 말했다. 이 날 총 15만 4,800명이 고쿄를 다녀가서 1989년 즉위 이후 최다 인원수를 기록했다. 이 새해 축하 행사는 아키히토에게 있어서 천황으로서의 마지막 축하행사가 되기 때문에 인사할 때 기분이 남달랐을 것이다. (보통 이 신년 일반참하 행사는 총 5회 열리지만, 이때 방문객이 너무 많아 천황의 특별 지시로 7회까지 행해졌다)

2019년 2월 25일, 궁내청은 퇴위한 상황, 상황후의 영문 명칭을 상황은 His Majesty the Emperor Emeritus, 상황후는 Her Majesty the Empress Emerita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퇴위 후 거처는 일단 도쿄도 미나토구에 있는 다카나와 황족저에서 임시로 지내다가, 고쇼의 리모델링이 끝나고 새롭게 즉위하는 나루히토 덴노 일가가 황거로 이사간 다음 간단한 리모델링을 마친 상태의 아카사카 어소로 들어가서 지낼 예정이라고 한다.

2019년 4월 1일, 새 연호는 레이와(令和)로 결정되었다. 이 연호는 그동안의 연호의 역사에서 보았을때, 모두 중국 고문서에서 따온 것이었지만, 이번 연호는 처음으로 일본 만요슈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연호는 5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적용되는 연호로서, 2019년 5월 1일 부터는 레이와 시대로 불리게 된다.

3.3. 즉위 30주년과 마지막 기념사

2월 24일, 치요다구 국립극장에서 즉위 30주년을 맞아 정부가 주최한 기념행사가 있었다. 천황 내외와 정부 각료, 각국 대사 등 1,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며 "섬나라로 비교적 풍부한 형태로 독자적인 문화를 키워온 우리나라( 일본)도 이제 세계화 속에서 더 바깥쪽으로 열리며 그 속에서 지혜를 가지고 자신의 입장을 확립하고, 성의를 가지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고 인접 국가와의 진정성 있는 관계 구축을 촉구했다. 행사 영상 링크

3.4. 퇴위 의식과 퇴위식

3월 12일부터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 등을 포함한 선황들을 모셔놓은 고쿄(皇居) 내 큐츄산덴(宮中三殿)에서 치르는 배례(拝礼)를 행한다. 이 행사에서 덴노는 조상들에게 자신의 퇴위를 고(告)하게 된다. #

이어 3월 26일 일본의 초대 덴노인 진무 덴노의 능을 찾고, 4월 18일 이세 신궁을 참배했다. 4월 23일 도쿄 하치오지시에 있는 부친( 쇼와 덴노) 묘소[36]를 참배하였다. #

4월 30일에는 '타이이레이세이덴노기'(退位礼正殿の儀)라는 퇴위식이 약 202년만[37]에 거행되었다. 오전 10시에 다시 고쿄(皇居) 내 규추산덴(宮中三殿)에서 치르는 생전퇴위 당일 배례(拝礼)를 진행했다. #

덴노의 퇴위에 따른 국가 행사로 치러지는 이 의식은 4월 30일 오후 5시 고쿄 내 규덴(宮殿)의 마쓰노마(松の間)에서 일본 황실의 증표로 알려진 검(劍)과 굽은 구슬 등(삼종의 신기)을 어디에선가 갖고 나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약 10분간 마지막 퇴위 의식을 치렀다.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 국민을 대표해 아키히토 덴노의 퇴위를 발표했다.

이 의식에는 나루히토 황태자 내외를 비롯한 황족들[38] 아베 신조 총리 등 중앙정부 각료, 국회 의장단, 지방자치단체 대표 등 약 300명이 참석했다.
아베 총리는 "천황, 황후 두 폐하께서 함께 국민들에게 가깝게 다가가 내일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주셨다"며 국민을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고 말했다.
이에 아키히토 덴노는 퇴위의 변인 '오코토바'를 통해 "오늘로 덴노로서의 직무를 마치게 됐다"며 "국민을 대표해 아베 총리가 언급한 말에 깊은 사의를 표한다. 즉위로부터 30년, 지금까지 덴노로서의 역할(소임)을 국민의 깊은 신뢰와 경애를 받으며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며 "상징(덴노)으로 저를 받아주고 지탱해준 국민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덧붙이면서 "내일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레이와 시대가 평화롭게 많은 결실을 보기를 미치코 황후와 함께 진심으로 바라고, 아울러 우리나라와 세계인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마쳤다.

4. 상황으로 물러난 이후

2019년 5월 1일 0시를 기하여 큰아들 나루히토가 덴노에 등극하면서 상황이 되었으며 2019년 5월 1일 당일 신 덴노 등극 행사에서 일절 참여하지 않고 고쿄 내 거처에서 아내 미치코 상황후와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에 신 덴노 내외가 상황/상황후를 방문해서 인사를 받은 게 거의 유일한 공무였다.

생전 퇴위 특례법에 의하여 현 덴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 어떠한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상황이 된 이후에는 별 다른 공무를 하게 되는 일 없이 좋아하는 부분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낼 것으로 보인다.

2019년 5월 5일 오후,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테니스 클럽을 상황후와 함께 방문해서 그곳에 있던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1시간 뒤에 다시 고쿄로 돌아온 것이 상황/상황후로서의 첫 외출이라고 한다.

2019년 5월 11일 신 덴노가 된 나루히토 덴노와 마사코 황후 내외가 아이코 공주와 함께 고쿄에 방문하여 상황/상황후 부부와 식사를 하였다.

2019년 5월 20일 우에노에 있는 국립과학박물관에 혼자 방문하여 어류 연구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고쿄로 돌아왔다.

2019년 5월 25일 황사(皇嗣)가 된 후미히토 키코 비 내외가 히사히토와 함께 고쿄에 방문하여 상황/상황후 부부와 식사를 하였다.

2019년 5월 29일, 5월 28일 가와사키 흉기 난동 사건으로 사망한 외교관 오야마 사토시(小山智史)씨를 애도하는 성명을 궁내청 명의로 발표하였다.

2019년 5월 30일 궁내청 측은 6월 11일 ~ 6월 13일 상황 부부가 상황이 된 것을 보고하기 위하여 교토 고메이 덴노 메이지 덴노 부부의 능을 방문하여 퇴위하였음을 보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는데 일본 국민들은 과연 상황 부부가 교토로 가는 교통편과 그때의 예우 등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

2019년 6월 6일 도쿄도 내에 있는 다이쇼 덴노 부부의 능을 상황후와 함께 참배하였다.

2019년 6월 7일 아내 미치코 상황후가 심장 이상을 호소해서 궁내청 병원에서 정밀검사해본 결과 10일 중도의 삼첨판 역류증, 부정맥 등의 판정을 받아서 일단 격무를 피하고 경과를 보자는 진단이 나왔으나 이후 예정된 교토 방문은 취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상황후 부재인 상태에서 교토로 가서 조상들에게 참배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9년 6월 8일 사망 5주기를 맞이한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의 추모식에 불참하였으나 다음 날인 9일 오전 묘소에 참배했으며 오후 6시 아카사카 어소를 방문하여 올해 결혼 26주년을 맞이하는 나루히토 부부를 다른 황족들과 함께 축하하면서 저녁식사를 함께 가졌다.

2019년 6월 11일 아내 미치코 상황후와 함께 신칸센 특별 열차 편으로 교토를 방문해서 사실상 퇴임 후 마지막 공무인 교토 일정에 돌입했으며 6월 13일 모든 일정을 마침에 따라서 아키히토 내외는 황족으로서의 공무보다는 사적인 업무와 병 치료[39], 고쿄에서 임시거처로의 이사 준비 등에 전념할 것이라고 한다.

2019년 7월 16일. 지난 11일 저녁을 먹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일어나지 못하자 상황후가 급히 의사를 호출해서 확인한 결과 일시적으로 강한 뇌빈혈 현상이 확인되었는데 원인은 당일 건강검진의 여파로 추정되어 12일 예정된 건강검진[40] 일부가 지연되기도 했으나 16일 기준으로 현재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2020년 1월 2일. 레이와 시대의 첫 새해 일반참하 행사에 미치코 상황후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서 주목을 받았다. 최근 미치코 상황후의 건강에 대해 언론에 이슈가 되자 건강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2020년 1월 30일 궁내청의 발표에 따르면, 전날인 29일에 거처에서 쓰러져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검사 결과 원인으로 보이는 소견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1 #2

2020년 7월 기준 틈틈이 전공인 생물학 연구를 계속 진행하던 중 오키나와에서 신종 망둑어를 발견해 관련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고 # 이듬해 2021년 6월에 신종 망둑어 2종 발견 논문을 발표했다. #

2021년 12월 23일 만 88세를 맞이했다. 신화 속의 덴노를 제외하면 미수(米壽)를 맞이하는 첫 덴노이며, 이미 자신의 아버지가 세운 역대 최장수 덴노 기록을 2021년 9월 2일부로 경신했다. 지금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미치코 상황후와 함께 산책을 하고 책을 소리내서 읽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젊은 궁내청 직원들에게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낸다고 한다. #

2022년 9월 25일 백내장과 녹내장으로 인해 도쿄대학병원에서 오른쪽 눈을 수술받았다. #

2023년 1월 2일 개최된 신년 일반참하에서 아내 미치코 상황후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1] 증조할아버지 메이지 덴노 후궁 소노 사치코와 생일이 같다. [2] 차남은 마사히토 [3] 쇼와 덴노는 생후 70일부터 친부모와 떨어져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4] 쇼와 덴노 나가코 황후의 딸들은 (막내 타카코 공주를 제외하고는) 요절, 질병, 무자녀, 사별, 원만하지 않은 부부관계 등 전반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5] 어린 아키히토 덴노의 학교생활과 부모 쇼와 덴노, 고준 황후 내외를 비롯한 누나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6] 자살특공대/가이텐이나 오오카 등이 카미카제에 대표적으로 사용되었던 자폭용 무기들이다. [7] 덧붙이자면 임팔 작전이나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일본군의 무식함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그 일본군조차도 카미카제만큼은 처음에 '이딴 미친 작전이 이세상 어디있냐?!' 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일본군이 카미카제를 실행한 이유는, 일본군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였다. 즉, 자기들 정권 유지하자고 말도 안 되는 작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1억 총옥쇄를 외치면서 사람 목숨을 갖다버리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 [8] 자식은 없고 남편과는 사별했다고 한다. [9] 개신교 종파 중 하나. 평화주의와 전쟁반대가 주요 모토 중 하나인 교파로, 양심적 병역거부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10] 혼자서 목욕물 받기를 청소년 때 처음 해봤다고 한다. 그것도 바이닝 부인이 아키히토와 별장으로 휴가를 가서 주변인들을 물리쳤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당장에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의친왕의 자녀들 역시 저런 대접을 받고 자랐으며, 이해경 여사 역시 15살때까지 혼자 목욕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물며 일본 제국 시절에 황태자로 태어난 아키히토가 어땠을지는.. [11] 1959년 결혼식 당시의 기록영상. 1분 17초부터 바이닝 부인이 나온다. [12] 1953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참석 관계로 6개월여간 일본을 떠났다. 하기 참조. [13] 세간에 공식적으로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그저 우연히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식의 낭만적인 이야기로만 포장되어 알려졌지만, 사실 두 사람의 만남과 결혼 과정 뒤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과 계획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미치코 상황후/결혼 전 문서로. [14]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15] 1947년의 신적강하(황적이탈) 이후로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모두 평민이 되었으나, 신적강하 이후로도 이들의 콧대는 높았다. [16] 특히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큰며느리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며 괴롭혔고, 2000년에 죽기 전까지 큰며느리를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총 42년간 시집살이를 한 셈. 그 때문에 1993년 10월 20일, 미치코 황후가 만 59살 되던 해에 실어증에 걸려 고생을 했을 정도이다. 이 탓인지 본인은 두 며느리와 대체로 사이가 좋은 듯하다. 다만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와는 태어나지 않는 손자 문제 등으로 고부갈등이 있었으며, 이 영향으로 한동안 황태자 부부와 덴노 부부 사이가 엄청 악화되었던 적이 있다. 여기로. [17] 대만계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 회장이 세운 라면 메이커 닛신식품과는 상관없는 기업이다. [18] 어려서부터 가쿠슈인을 다니며 황실 자녀와 친구로 지낼 정도면, 상당히 유복하며 뼈대 있는 집안의 자녀이다. [19] 퇴위식 내내 똥 씹은듯한 얼굴이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20] 퇴위가 결정된 2019년 4월 기준으로 아키히토 덴노는 85세 3개월로, 역대 천황 중 가장 장수했던 아버지 히로히토(사망시 87세 8개월)와 고작 2년여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21] 천황가가 두 계통으로 나뉘어 있을 때에는 서로 정치적인 합의를 통해 번갈아가면서 천황직을 주고받거나, 아니면 인세이라고 해서 현직 천황인 아버지가 일부러 먼저 퇴위해 상황이 되고나 출가해 법황이 되어서 비선 실세로 권력을 휘두르고 후임 천황인 아들은 바지사장으로 세워놓는 경우도 잦았다. [22] 아키히토의 6대조이며, 첫 간인노미야 궁가 출신 천황. 118대 고모모조노 덴노가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숨을 거두자 일본 조정은 망자의 7촌 아저씨(재종숙부)가 되는 고카쿠 덴노를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에, 고모모조노 덴노는 아키히토에게는 직계 조상이 아니다. [23] 1817년이라고만 하면 대다수 독자들이 얼른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1817년은 조선에서는 정조가 죽고 순조 즉위 17년이고, 유럽에서는 1815년에 나폴레옹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했다. [24] 이는 천황들의 특유의 표현이다. 옥음방송 참고. 물론 이 이유에서 뿐만은 아니고, 천황이 직접적으로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덴노의 퇴위 규정이 황실전범에 없으니 황실전범 개정을 해 달라"는 얘기로 해석될 수 있고, 이는 나아가서 천황의 정치개입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인 점도 있다. [25] 아베 신조 정부는 "몸에 큰 무리가 없더라도 섭정을 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알려졌다. [26] 그동안 생전 퇴위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규정에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 1984년 궁내청의 야마모토 사토루 차장은 국회 답변에서 “상황이나 법황이란 존재가 폐해를 불러올 우려가 있고, 덴노의 자유의사에 근거하지 않은 퇴위 강제, 천황에 의한 자의적 퇴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로 일본 역사를 보면 인세이라는 사례가 있었는데, 막부 정치의 원인이 되었다고 지목될 정도로 국가 통치 체계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그렇기에 야마모토 사토루의 말이 근거 없는 해명은 아니다. [27] 호칭은 법황(法皇)도 있지만 상황(上皇)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전의 덴노들이 인(院), 또는 법황(法皇)이라 불린 이유는 양위 이후에 불교에 입문하는, 한 마디로 출가하여 불교를 이끄는 입장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출가한 천황 소생의 황자들을 법친왕(法親王)이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똑같이 덴노에서 퇴위해도 일반인이면 상황, 승려 신분이 되면 법황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담이지만 일본에서 불교의 입지란 전직 덴노의 호칭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 [28] 아키히토가 부황 쇼와 덴노 사망 직후의 일본 사회상을 두 눈으로 직접 봤음을 감안하면 진정성이 높은 대목이다. 쇼와 덴노는 1988년 여름부터 골골대다가 1989년 1월 사망했다. 거진 반년간 골골거린 셈이며, 직접적으로 쓰러진 9월 기준으로도 3개월이나 중병으로 와병하며 공무를 전혀 돌보지 못했다. 때문에 쇼와 덴노의 와병 기간에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했었으며, 쇼와 덴노의 와병과 그의 사망 직후 국상 기간에 촉발된 사회적 엄숙주의는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걸 옆에서 후임 천황으로서 직접 지켜본 아키히토는 현임 천황의 와병과 국상 기간이 어떤 의미이며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29] '심경' [30] 황위 계승 후 처음 여는 일종의 추수감사 제사. 법적인 정통성과 별개로, 천황의 종교( 신토)적 정통성을 승계하는 의례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워낙 비밀리에 거행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례과정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의 학자들조차도 다른 사례들을 참조하여 '상상만' 할 뿐이다. [31] 아키히토는 부황 쇼와 덴노가 병으로 쓰러지고 죽을 때까지 섭정을 실제로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쇼와 시대의 마지막 총리이자 헤이세이 시대의 첫 총리인 다케시타 노보루의 총리 인준안도 대리 서명했고 임명식에도 자신이 참석해 임명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때 아키히토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쇼와 덴노도 부황 다이쇼 덴노의 재위 후반기에 섭정을 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과 아버지가 직접 섭정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섭정을 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람이었다. [32] 特例法 第三条."前条の規定により退位した天皇は、上皇とする。" [33] 원래 일본에선 이런 경우에 황태후나 태후를 썼기 때문에 '황태후나 태후를 써야지 상황후는 대체 뭐냐?'며 비판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나, 결국 상황후로 확정했다. 상황후 칭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또한 대개 퇴위한 천황의 공식 칭호는 '태상천황'이어야지, '상황'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34] 왜 이렇게 되었냐면, 천황 내외의 결혼기념 6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해당 결혼기념일은 천황과 황후로 보내고 싶다는 아키히토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35] 일본 달력에 연호를 넣기 때문에 2019년에는 연호를 바꾸거나 병기해야 하지만, 이미 한 해가 1/3이나 지난 후에 이를 하려면 달력째로 바꿀 수는 없으니, 스티커질을 해서 덮어쓰거나 해야 할 것이다. [36] 일명 무사시노능이라 하며, 아키히토의 어머니 고준 황후와 할머니 데이메이 황후도 여기에 묻혀 있다. [37] 제 119대 덴노인 고카쿠 덴노가 1817년에 생전 퇴위하면서 진행한 것이 마지막이였는데 공교롭게도 고카쿠 덴노가 현 덴노 가문의 직계 시조라는 점 때문에, 생전 퇴위가 확정되면서 일본 내에서 고카쿠 덴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38] 아이코 공주 히사히토는 미성년이라서 참석하지 않았지만, 의식이 끝난 직후 황궁에 들어가서 최후의 인사를 나눌 예정이라고 한다.참고로 해당 행사에는 현존하는 모든 성인 황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상당히 보기 드문 상황을 이루어졌다. [39] 미치코 상황후는 6월 중순에 백내장 수술 등이 예정되어 있다. [40] 건강검진을 한 곳은 도쿄대학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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