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1:20:48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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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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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20세기 이전에 벌어진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사례로는, 인디언 전쟁 미국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 있다.)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이라면 ⚖️ 표시.
사건 목록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발생 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Reichskolonialflagge.svg.png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홀로도모르 [!]
,1932 ~ 1933,
발생 위치
파일: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발생 위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파슬리 학살
,1937,
발생 위치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미니카 공화국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제2차 세계 대전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발생 위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홀로코스트 ⚖️
,1941 ~ 1945,
발생 위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크로아티아 독립국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관련 단체
체트니크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발생 위치
파일: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발생 위치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발생 위치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발생 위치
파일:방글라데시 국기(1971-1972).svg 동파키스탄
이키자
,1972,
발생 위치
파일:부룬디 국기.svg 부룬디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발생 위치
파일:우간다 국기.svg 우간다
관련 인물
이디 아민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발생 위치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킬링필드 ⚖️
,1975 ~ 1979,
발생 위치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민주 캄푸치아
재판
ECCC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수용소
뚜올쓸라엥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발생 위치
파일:짐바브웨 국기.svg 짐바브웨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안팔 학살
,1986 ~ 198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1963-1991).svg 이라크 쿠르디스탄
재판
안팔 학살/재판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이사크 학살
,1987 ~ 1989,
발생 위치
파일:소말리아 국기.svg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보스니아 전쟁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발생 위치
파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국기.svg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관련 단체
스릅스카 공화국 | 헤르체그 보스니아 | 스릅스카군
스레브레니차 학살
,1995,
발생 위치
파일:스릅스카 공화국 국기.svg 스릅스카 공화국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발생 위치
파일:르완다 국기(1962-2001).svg 르완다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관련 인물
베르나르 투야하가 | 테오네스테 바고사라 | 펠리시앵 카부가 | 장-보스코 바라야귀자 | 하산 응게제 | 조르주 루지우
관련 단체
후투족 | 투치족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발생 위치
파일:자이르 국기.svg 자이르 키부
밤부티인 학살
,2002 ~ 2003,
발생 위치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1997-2003).svg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다르푸르 학살
,2003,
발생 위치
파일:수단 공화국 국기.svg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야지디 학살
,2014 ~ 201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svg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관련 단체
ISIL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발생 위치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위구르 자치구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발생 위치
파일:미얀마 국기.svg 미얀마 라카인주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Հայոց ցեղասպանություն
Armenian genocide
파일:external/1.bp.blogspot.com/ArmenianGenocide1-634x377.jpg
파일:아르메니아_학살_개요도.png
위 사진은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시기 1894년 ~ 1917년
위치 오스만 제국
가해자 통일진보위원회 및 오스만 제국군
피해 사망 60~150만 명 추정

1. 개요2. 학살의 원인3. 아르메니아 학살의 시작
3.1. 오스만 제국판 배후중상설3.2. 러시아 제국의 개입: 독립단체의 등장3.3.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탄압 정책3.4. 학살의 시작3.5. 콘스탄티니예 시내의 학살
4. 아다나 학살: 2만 ~ 3만5. 1915년 대학살: 100만6. 1915년 아르메니아인 강제이주 정책의 타임라인7. 이후8. 아르메니아인이 저지른 학살9. 튀르키예의 입장
9.1. 튀르키예 내 진보파 주장
10. 다른 나라들의 태도
10.1. 유럽10.2. 아르메니아의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에 대해
10.2.1. 러시아&영국&미국 학계
10.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10.4. 중동권10.5. 미국10.6. 한국10.7. 기타 제3국
11. 가짜 자료12. 기타

[clearfix]

1. 개요

그리스어 Γενοκτονία των Αρμενίων
(Genoktonía ton Armeníon)
불가리아어 Арменски геноцид
(Armenski genotsid)
아람어 ܩܛܠܥܡܐ ܐܪܡܢܝܐ
(qṭālʿammā ārimnaya)
아랍어 مذابح الأرمن
(maḏābiḥ al-ʾarman)
아르메니아어 Հայոց ցեղասպանություն
(Hayocʿ cʿeġaspanutʿyun, 하요츠 체가스파누튠)[1]
Մեծ Եղեռն
(Mec Ełeṙn, 메츠 예게른)[2]
영어 Armenian Genocide
쿠르드어 Nîjadkujiya Ermeniyan
튀르키예어 Ermeni Meselesi[3]
한국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일련의 집단학살 사건을 말한다. 근대적 의미로서 최초의 ' 제노사이드'이자[4] 나치 독일 홀로코스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연구된 학살이지만 지금까지도 정치적인 이유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건이기도 하다. 희생자 수는 주장하는 측마다 다르나 대략 48만에서 12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튀르키예 역사 위원회장 유수프 할라치오을루(Yusuf Halaçoğlu)의 2008년 공식 통계는 413,067명이며 영국의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00-120만, 미국정부의 통계로는 약 48만 6000명, 가톨릭 대백과사전은 약 60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렇듯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조사 주체에 따라 다르게 보고 있고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로는 테슈킬랴트 마흐수사(Teşkilât-ı Mahsusa)의 문서고가 1차 대전 및 독립전쟁 전후로 소실되어 당시 오스만 제국의 구체적인 행정내용들이 문서상으로 보존되지 않음을 들 수 있다. 더욱이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방행정력은 부실하여 학살 사건 이전부터 이미 인구통계 등이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오스만 제국 중앙정부는 전쟁 직전까지 지방 인구과 징병 가능한 청년인구의 파악조차도 프랑스와 영국 통계기관의 도움을 받던 게 현실이었다. 두번째 문제로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범위와 성격 그리고 기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가령 학살로 인해 발생한 피난민이 피난길이나 수용소 등지에서 질병이나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하게 된 것을 아르메니아 학살의 범주 내로 보느냐 아니냐 등의 관점 차이로 학살의 규모가 더 커지거나 줄어들 수 있다.

후술하듯 아르메니아인들만 살해당한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 내의 여러 민족들이 서로 독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스만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민족주의적으로 종교를 떠나 튀르크 민족주의에 반항하는 민족에게는 자비란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아시리아인 아랍계 기독교인, 무슬림이라고 해도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희생자보다는 수가 적을지언정 수십만 명 정도가 학살당했다. 그래서 아랍인들도 현재까지 튀르키예에 대한 감정이 영 좋지 않다. 이 학살 이후 흑해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로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 홀로코스트 과정에서도 유대인 외에 많은 슬라브인, 집시, 장애인, 반정부 인사들이 학살당했으나 세간에는 유대인만 피해자로 알려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휘말려 무분별하게 피해를 입은 아랍권 나라들에서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나 대학살이라는 표현에 대해 아르메니아인들만 피해자는 아니거늘 마치 아르메니아인만 죽었다는 듯이 영어로 쓰고 왜 이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다면서 언짢게 여긴다. 영어 위키백과만 해도 아랍인·쿠르드인들에 대한 학살[5]을 설명함에 있어서 고작 초루흐 강 계곡 학살(Massacres in the Çoruh River valley)이라고 표현하며 이조차 자세히 소개된 것도 아니라 이 글 제목으로만 두루뭉실하게 대충 언급하는 수준이다. 이 명칭을 아랍 측에서 무척 안 좋게 여기는데 이는 일개 한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로 이동하던 아랍계 무슬림들을 초루흐 강 계곡에서 쏴죽이거나 밀어 강물에 떨어뜨려 죽인 학살 사건 하나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관련 학계에선 근래 들어 아르메니아뿐만 아니라 오스만 붕괴기에 총체적이고도 다양한 집단을 휩쓸었던 국가폭력 전반을 통틀어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란 포괄적 개념을 밀어주는 편이다. # 비단 순수한 학술적 영역뿐만 아니라 이 참혹한 역사가 근현대 민족, 국가관 관계에 끼치는 역학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아르메니아-오스만 제국(現 튀르키예) 양자 간 관계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꼈던 알레비파 신자, 그리스인, 아랍인, 폰토스 그리스인, 쿠르드인, 아제르바이잔인, 조지아인 등 수많은 집단간 다각적 관계를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2. 학살의 원인

아르메니아 학살을 다루기 전에 우선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스템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사실 오스만 제국은 통치체계가 기본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지방자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인구의 통제가 용이한 도시는 오스만 제국이 직접 파견하는 총독과 지사들이 통치하고, 향촌은 현지의 유력 인사들이나 군벌, 부족들에 의한 자치를 허락받았다. 속주 지역(dependent State)도 현지의 왕이나 총독이 자치하고 단지 세금이나 조공을 제때 코스탄티니예에 보내고 술탄에게 기어오르지만 않는다면 중앙 정부에서는 현지 군벌, 자치세력이 무엇을 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워낙 넓었고 그에 따라 다양한 민족, 문화, 언어가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일례로 심지어 밀레트 제도 하에서는 세금 제도까지도 각 밀레트마다 달라서 기독교인들은 중앙에서 어느 정도의 세금을 거두라고 할당량이 떨어지면 신자들의 명부를 관리하는 교구가 세금을 할당량보다 많은 세금을 거둔 다음 남는 액수를 교회가 운용하기도 했다. 덕분에 파나리오테스의 시기에 이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자리는 그야말로 돈이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에 온갖 대가문들이 돈을 대고 줄을 서는 등 도떼기 시장이 따로 없었다.

다만 이런 자치제는 광활한 지방을 통치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일단 반란이 한번 터지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삽시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번 반란이 일어나면, 오스만 제국은 지방의 독립을 막으려고 상당히 가혹하게 진압하여 학살과 강제이주까지 동원할 정도였다.[6] 아르메니아 학살의 원인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자치제의 단점에 기반하여, 중앙정부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못 갖고 있었던 상황, 러시아의 반란 선동[7], 청년 튀르크당과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 운동의 충돌, 발칸 반도 캅카스에서 영토를 상실하여 대규모 오스만계 난민들로 인해 기독교 이웃들에 대하여 악화 일변도를 겪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여론이 합쳐져 매우 복합적이었다.[8]

오스만 제국은 신민들이 믿는 종교에 따라 각각의 밀레트(Millet)를 조직시켜 각자의 종교법과 관습법대로 사법을 시행했다. 이를테면 발칸지역의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등은 모두 '그리스 정교회 밀레트'로 묶어 정교회 교구제에 따라 판관을 배정하고 이들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내정했으며 튀르크인, 아랍인, 쿠르드인 가운데 수니파를 믿는 사람들은 각 지역의 이슬람 판관(Kadi)와 대율법학자(Ulama)들이 이들을 책임졌다.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들 또한 자체의 밀레트를 갖고 있었는데, 초기에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무슬림이냐, 기독교인이냐, 유대인이냐가 중요했지 그가 사용하는 언어나 민족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2.1. 아르메니아인

2.1.1. 독자적 밀레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압뒬하미트 2세의 반동개혁 이전에는 공식적인 국교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첨언으로 당시만 하더라도 아르메니아 측은 정치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에게 종속되어 있을지언정 아나톨리아 동부 일대에서 자리 잡은 그 오랜 역사와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인정받아 정교회권과 다른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밀레트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세기 들어서도 적어도 초중반에는 발칸 반도의 정교회권 민족주의 열풍이 불 때 아직 아르메니아 쪽은 조용히 당국에 적극 협조했던 편이라 '충성스러운 밀레트(millet-i sadıka)'라는 별명까지 있었을 만큼 돈독할 정도였다. 이렇게 19세기 이전까지 밀레트 제도는 무슬림에게나 기독교인에게나 각자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잘 돌아갔다.

2.1.2. 민족주의의 전파

그러나 민족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이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오스만 제국 내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 18세기 그리스인 상류층인 파나리오테스들이 해외무역과 권력층에 대한 줄대기로 제국 내에서 부와 권력을 축적하였는데 이들의 주도로 서유럽의 자유주의 민족주의가 그리스인들에게 유입되었고 결국 민족의식을 각성한 그리스인들이 오스만의 지배를 거부하면서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은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인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같은 기독교를 믿는 유럽 열강들이 여기에 개입해 결국 그리스가 떨어져나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스의 사례에 머물지 않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이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들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내정간섭을 시도했다.
  • 그리고 탄지마트 이전에는 무슬림은 인두세를 면하는 대신에 군대를 가고, 기독교인은 징집을 면하는 대신 인두세를 내는식으로 나름대로 공평한(?) 협의점이 있었지만 탄지마트 이후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차이를 없앰에 따라 무슬림들은 "우리도 맨날 지는 군대 안 가겠다!"고 반발하고 기독교인들은 "군대를 가느니 차라리 내던 세금 계속 내겠다!"면서 반발하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파들이 득세하면서 탄지마트 개혁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민족주의 운동이 더 넓게 퍼지는 와중에 보수파들이 강화한 것이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차이를 규정한 옛 법률의 강화였다.

쉴레이만 1세의 법에 의하면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거주지와 복장이 구분된다. 이를테면 예루살렘 구시가지처럼 무슬림 거주지와 기독교인 거주지, 유대인 거주지가 전부 구분되어 있다. 대체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 발칸반도에서는 기독교인들은 농촌에 거주하고 무슬림들은 도시에 거주했으며 각자 자신의 구역에서 교회 종을 울리거나 아잔을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코스탄티니예처럼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함께 섞여 사는 지역의 경우 무슬림 지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교회들은 종을 울릴 수 없었다.[9] 현재 이스탄불에서도 대부분의 교회 건물들이 '탁심', '갈라타', '페네르', '베이오을루' 쪽에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당시의 흔적이다. 이 지역은 유럽 대사관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고 기독교인들이 거주민의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러한 법도 별로 의미가 없었던 게, 오스만 제국 초창기에는 새로운 성당, 시나고그의 건립을 강력하게 통제했으나 17세기 정도만 되어도 도시 내 기독교인, 유대인 유력자들이 도시 행정관에게 뇌물을 먹여 이런 규제를 묵인받은 상태로 새로운 성당이나 시나고그를 건설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문제는 이런 뇌물을 먹이거나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진 기독교인 귀족, 상인집단, 영주가 없던 지역들인데 코스탄티니예를 비롯한 도시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대인들보다도 더 강력한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 번성하고 있었지만 아나톨리아 동부 시골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런 특혜도 없이 척박한 땅이나 파먹으면서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부패한 법체계와 중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변방에서 반 기독교적인 관리나 현지 부족장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박해하고 괴롭혀도 딱히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훗날 민족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러시아가 이 지역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을 때 현지 아르메니아인들 중 상당수가 러시아에 호응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불안한 체제 하에서 제국 내 소수파들은 조용히 참고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전 유럽에 확산된 민족주의가 드디어 오스만 제국에도 들이닥치며 이들 차별받는 소수민족들이 민족 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3. 아르메니아 학살의 시작

1894년 오스만 제국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는데 19세기 들어서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그리스를 마지못해 독립시키고 뒤이어서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발칸 지역의 다른 나라들을 독립시키면서 유럽 열강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스만 제국에선 그리스 독립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이 더 이상 그리스인을 요직에 기용하지 않으면서부터 드라고만(Dragoman - 서구와의 교섭을 위해 설치한 외교부) 같은 관료직에 '아르메니아인'을 대거 기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발칸반도의 슬라브인들과 그리스인들이 민족 의식을 각성하고 자치 혹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모습을 지켰고 애초에 도시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정부 덕분에 자신들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동력이나 처지에 대한 불만이 아직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이라고 언제까지 2등 신민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고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 교육받은 지식인층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이들도 자신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875년 경에는 아르메니아 총대주교까지 나서서 토지 몰수, 무슬림들에 의한 약탈과 강제 개종, 강간과 살인을 막아 달라고 청원했지만 내부 문제가 심각했던 오스만이 그들의 청원대로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어도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한 경우는 전무했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열강들과 열강의 지원을 받는 자국 내 민족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반기독교 감정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으며, 또 수 차례에 걸쳐 유럽 쪽의 영토와 종주권을 상실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정체성도 좀 더 관용적이었고 다양성을 인정하던 (동)로마의 계승자라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본격적인 이슬람 제국이자 수니파의 종주국이란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1890년대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동북부 국경에 아르메니아 혁명연맹, 소위 다슈나크(Dashnak)라 불리는 민족주의 계열 무장 반군이 봉기하여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는 대아르메니아주의를 촉진하기 시작한다. 오스만 제국 영내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소위 터키시 아르메니안(Turkish Armenian)이라 하여 예레반이나 트빌리시의 러시안 아르메니안(Russian Armenian)이라 불리는 사회주의 정치인들과 무관한 삶을 살아 왔는데, 이 시기 오스만의 정체성과 국제관계 위축 등 여러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위기의식이 겹치면서 스스로 불러오지 않은 대재앙의 피해를 오스만 영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입게 된다.

3.1. 오스만 제국판 배후중상설

이 와중에 1877~1878년에 벌어진 튀르크-러시아 전쟁에서 러시아에게 패해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지배하던 동유럽 속령들을 독립시키고 허구한 날 털리기 시작했다. 낡고 비효율적인 내부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고 골골거리면서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 라는 소리를 듣던 것이 이 시대 오스만 제국이지만[10] 패전국이 겪는 전형적인 인지부조화 속에 이 모든 것을 동부 지역 기독교인들이 러시아와 짜고 벌인 짓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이 시기 불가리아에서는 이슬람교도 50여만 명이 학살, 약탈, 강간을 당했는데 이때 고생깨나 하고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 처지가 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정착한 곳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주도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결국 돌고 돌아와서 애꿎은 이들이 피해를 당하는 셈.

하여튼 전반적으로 이 시기 오스만은 1차 대전 직후 독일이 ' 내부에서 등을 찌르는 바람에 진 거다' 운운한 것과 소름돋을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캅카스 일대를 상실했던 시점에서부터 발칸 전쟁에서 패하고 1차 대전이 터지는 시기 까지 1~2백만 사이의 발칸 반도, 캅카스에서 쫒겨난 무슬림 난민들이 코스탄티니예, 트라브존, 이즈미르 같은 도시들의 거리를 꽉 매웠고, 이들이 러시아나 다른 정교회 국가들에게 당한 수모와 핍박을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인들에게 전하면서 제국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믿지 못할 내부의 적이라는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중에 같은 이슬람이라고 여겼던[11] 아랍 쪽에서도 오스만에게 반발이 일어나면서 이젠 단순히 기독교 대 이슬람이 아닌 튀르크 민족주의로, 종교적 정체성까지 무너지고 아랍 무슬림들까지 견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이 기독교인 영국과 손잡고 오스만에 저항할 정도였으며 이러한 장면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도 등장한다. 정작 독립하고 나자 영국이나 프랑스는 약속을 다 저버리고 이들을 강압으로 지배했지만.

3.2. 러시아 제국의 개입: 독립단체의 등장

한편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칭하던 러시아 제국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 디야르바크르, 시바스 같은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 권리 향상을 강제했다. 이 결과로 여태껏 제국에 눌려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같은 기독교 열강 러시아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게 되었고 본격적인 아르메니아 독립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국 밖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훈차크, 다슈나크당 등 아르메니아인 독립을 목표로 삼은 정당이 결성됐다. 그들 중 일부는 제국에서 비밀 지부를 설립하고 오스만 관리를 노린 폭탄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12] 그러나 이들의 활동의 여파는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다.

3.3.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탄압 정책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곳곳에서 붕괴 조짐이 보이고 있었고 사회의 유지를 위해 오스만 당국이 선택한 방법은 인명 살상을 동반한 대대적이고 가혹한 탄압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문제에 봉착한 오스트리아가 제국 내 최대 소수민족인 헝가리인들과 대타협을 이뤄 오스트리아-헝가리 체제를 성립시켰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론 두 나라는 조건도 달랐고[13] 잠시나마 안정을 이뤘던 오스트리아도 결국에는 1차 대전에서 패전한 후 소수 민족들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며 붕괴했긴 하지만. 기독교 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기 시작하며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그리스 등 옛 발칸반도 속령들에 살던 튀르크인 무슬림들이 독립 후 학살과 약탈을 당하고 이들 생존자들이 오스만 본토로 피난 오면서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들 사이에 기독교에 맞선 범이슬람주의가 유행한 것도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악재였다. 현대 중동에서도 흔히 보이듯 기독교 외세에 맞서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주요 공격대상은 막강한 서양 열강들보다는 옆 동네에 사는 만만한 힘 없는 현지 기독교인들인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3.4. 학살의 시작

긴장감이 고조되던 가운데 1894년 압뒬하미트 2세는 자신의 이름을 따 '하미디예'라고 이름 붙인 친위부대를 동부 국경에 투입했는데 이들은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이 창설 목적이었으나 대부분 사실상 자신들이 배치된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는 데 동원됐다. 한때는 하미디예가 모든 학살의 행동 대장이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에는 이들의 역할을 낮춰 보는 시각도 등장한다.

물론 이들이 주범이 아니란 뜻은 아니고 학살에 대한 이들의 기여율을 이전에는 90~100%로 봤는데 요즘은 7~80% 정도로 낮춰 본다는 이야기. 이 시기 동부에서 제국은 가뜩이나 반란 분위기가 무르익은 지역에서 징세율을 두 배로 올리는 등 일부러 반란을 부추겼다고밖에 볼 수 없는 기괴한 정치를 펴고 있었다. 당연하다시피 반란은 발발하고 말았고 곧 무자비한 학살이 뒤따랐다. 콘스탄티니예에서 하미디예의 잔혹 행위를 막아달라고 술탄에게 청원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나, 오스만은 이 시위대조차 무력으로 진압했다.

3.5. 콘스탄티니예 시내의 학살

이 사건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눈에 보이자 무슬림들은 코스탄티니예 시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고 이는 곧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 전체로 퍼져나가 10만에서 30만에 가까운 인원이 학살당했다. 민간인과 군인 모두 학살에 참여했고 살해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당시 유럽 외교관들이 목격한 것들 중에는 총상은 양반이고 가죽을 벗겨 놓은 시신들도 흔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도와줄 것처럼 해 놓고 막상 학살당할 때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서구 국가들에 항의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운영하던 오스만 은행을 점거하는 무력 시위까지 했지만 결국 서방의 도움은 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아르메니아인 사이에서는 '오스만 놈들도 나빴지만 결국 아르메니아를 돕는 척하곤 나몰라라하던 서구권도 그에 못지않게 나빴다.' 는 비난 여론이 강하다. 사실 아르메니아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강대국들은 어디까지나 아르메니아를 이득에 따라 이용했을 뿐이다. 그 예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독립한 루마니아를 비롯한 나라들에 대하여 러시아는 "늬들이 누구 덕분에 자유를 찾았냐? 그러니까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쳐라. 또는 땅을 내놓아라."는 말을 하고 해당 나라들에 러시아인들이 이주한다든지 친러시아파에게 정치 고위직을 맡기라느니 등 온갖 정치적 간섭을 하고 나아가 러시아인 주교를 통한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하는 등, 말이 좋아 독립이지 오스만과 러시아가 뭐가 다르냐는 반발도 일어났다. 아르메니아도 다를 건 없었다.

한때는 이것을 '1차 학살'로 분류했으나, 제국 통치에 반발하는 집단을 찍어누른 전근대적 진압에 가까우며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학살로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정설이다.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이들에게 같은 튀르크라는 명목으로 밥 빌어먹고 사는 투르크메니스탄 같은 몇몇 국가들이 하염없이 2만 명 피해 설을 주장하는 반면 학계에서는 10만-30만을 정설로 본다. 이러한 이유에서 근현대적 학살의 최초의 사레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아니라 탄자니아 및 나미비아 학살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어디까지가 전근대적 학살이고 어디서부터 근대적 학살인지 그 기준점부터가 불분명해 따지는 게 의미가 없으며[14] 오스만 제국의 학살은 민족주의 갈등, 내부중상론, 정부가 이러한 분위기의 확산을 은근히 조장하는 태도를 보이는 등 나치나 일제의 그것과 핵심적인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고 있다. 위에서 이미 서술되어 있지만 오스만의 학살 분위기 조성 과정은 독일에서 1차 대전 패전 이후 유대인 학살 복선이 깔리기 시작하는 과정과 판박이다.

4. 아다나 학살: 2만 ~ 3만

Adana massacre

1909년 4월 오스만 제국 아다나 주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 오스만 측 주장에 따르면 독립을 요구하며 아르메니아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 오스만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들의 무력 충돌로 782명 무슬림이 죽자 이에 대한 보복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오스만 측에서는 5천여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죽었다고 발표하는데 아르메니아의 주장에 따르면 2만에서 3만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시리아인들까지 이 와중에 3~5천여 명이 덩달아 학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학살에 대하여 미국과 영국 언론 일부가 비난한 정도 외에는 국제적으로 묻혀지고 말았다.

한편 이 학살을 비난하던 오스만 언론인 하산 페흐미(Hasan Fehmi, 1874~1909)는 얼마 뒤에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만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찰도 대충 수사를 끝내 버려 이후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하여 부정적이던 오스만 언론들마저 겁먹고 입다물거나 정부가 하는 학살을 옹호하며 태도를 바꿔야 했다.

5. 1915년 대학살: 100만

파일:시리아 아르메니아 학살.jpg

시리아 사막에 남겨진 아르메니아인들의 유골을 바라보는 한 아르메니아 지도자

오스만은 이후에도 발칸 전쟁, 리비아 전쟁, 1차 대전을 겪으며 나라가 기울어 갔다. 오스만 제국은 결국 1914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오스만 제국의 '성전'에 참여하여 외세와 함께 싸울 것을 요구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해서 러시아를 공격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는 즉시 대응하여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에르주룸 회담이 아르메니아인 대표와 오스만 대표 사이에서 열렸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과 러시아 어느 쪽에도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를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 위협으로 판단한 오스만 제국은 1915년 캅카스에서 오스만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충돌하자 수백만 명의(약 300만 정도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차르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오스만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도 회유하는 정책을 폈다. 오스만 제국의 무능한 정치에 당연히 러시아에 회유되거나 독립을 요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늘어났다.

2차 아르메니아 학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연합진보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를 빼놓을 수 없다. 복잡한 풀네임보다 당시 서구 언론의 애칭이었던 청년 튀르크당으로 더 잘 알려진 이들은 개혁파 군사집단으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적, 법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CUP는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옅어서 초기까지만 해도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 튀르크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헌법을 제정하고 오스만 제국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런데 이 쿠데타가 수도에서 벌어진 반쿠데타에 의해 주춤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던 아다나에서 이 기회를 틈타 현지의 반동주의적 무슬림들이 쿠데타 지지세력 중 하나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압뒬하미트 2세의 반동 쿠데타 자체는 고작 11일 만에 제압되고 헌법이 부활했지만, 이미 아다나에서는 1만 5천에서 3만 사이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된 이후였다. 현대까지도 튀르키예에서는 이 사건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먼저 벌인 폭동이었다든가 단순히 정치적 보복에 불과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면서 이 사건의 인종주의적 성향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이전부터 계속 이어져 오던 일련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의 일환인 (Van) 사건이 뒤이어 터지고 1915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시대가 바뀌어 오스만은 CUP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피지배민족의 권리나 인도주의 같은 것을 함양한 세력은 아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서구 열강의 오스만 침탈을 겪으며 이런 서구의 관념들에 매우 냉소적인 감정을 갖게 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건 이전이나 현대에 들어와서 보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한 반인륜적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당장 학살을 주도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이었던 탈라트 파샤나 해군 장관 제말 파샤, 오스만 제국의 첩보 부대인 테슈킬렛 마흐수사의 수장이었던 베하에딘 샤키르 박사 같은 사람들은 전형적인 '무늬만 무슬림'이지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나 무종교인에 가까운 종교에 냉소적인 인간들이었고[15] 이는 이들이 외국의 저널리스트나 평소의 발언과 행동, 훗날 회고록 등에서도 잘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무슬림적 관점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열등하긴 하지만 그래도 보호해 주어야 하고 이슬람 국가에서 살 자리가 있는 복속과 지배의 대상이지[16], 박멸과 절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탈라트 파샤를 비롯한 CUP 지도부는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철저하게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로 민족적인 문제로 보았고 튀르크인들이 지배하고 영유해야 할 땅인 아나톨리아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박멸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시선 자체가 단순한 징벌, 차별의 대상에서 근대적 민족주의적 의미에서 절멸해야 할 열등 인종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전과 달리 1915년에 벌어진 대학살에서는 추방과 학살을 피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도 박해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추방, 학살하였다. 흔히 튀르키예 측 친정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지정학적 갈등에 의해 터진 게 아니라 조직적이고 인종적 논리에 따라 자행된 근대적 제노사이드라는 걸 입증하는 사실이 이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선 전근대적인 술탄 정부보다 더 잔혹한, 근대적 민족주의로 무장했으며 이 시기 서양 제국주의 열강 혹은 후대의 나치 독일 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적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오스만 정부는 현지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인들에게 협조하려 들 것이라고 의심했는데 누가 그런 상황을 자초했는지만 차치하면 판단 자체는 상식적이었다. 장군 엔베르 파샤 처남이자 반 일대 총독으로 부임해온 정치인이자 제브뎃 베이 벨베즈(Cevdet bey Belbez/ 1878 ~ 1955)는 무슬림이지만 종교 광신을 무척 싫어하였으며 아르메니아가 독이 될 것이라고 여겨오던 매우 강경한 반아르메니아주의자였다. 그는 반 일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촌락을 수색하여 수상한 무기들을 잔뜩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의 20년째 겪고 있었던 학살과 약탈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어느 정도 무장을 갖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또 반대로 오스만군이 자신들의 무기를 사진 찍어 놓고 증거라고 주장했다는 증언까지 나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은 미궁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브뎃 베이가 반 일대의 촌락에서 수색과 학살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살의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체르케스계 보조병들이 벌인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군인들도 학살에 참여한 정황이 많으며, 제브뎃 베이 본인도 아르메니아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거기에 발칸 전쟁 당시 벌어진 학살도 문제였다. 당시 불가리아 포마크인들과 튀르크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는데 학살을 피하여 몸만 겨우 빠져나온 수십여만 난민들을 바로 오스만에서 받아들였다. 이 학살 여파로 정교회나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이를 갈던 이들 난민들은 민병대를 이뤄 기독교인들에게 보복하겠다고 이를 갈았는데 이런 분위기를 읽은 오스만 측이 이들을 정규군으로 받아들여서 아르메니아 기독교 세력 척결에 사용했으니 그 결과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불가리아 놈이나 아르메니아 놈들이나 똑같다고 여기던 이들은 증오심으로 닥치는 대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로선 운 나쁘게도 이 학살에서 살아 돌아온 지 몇 년도 안 되어 생생하게 기억하던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비슷한 경우로 19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의 침략을 받은 체르케스인들이 있다. 이들도 무슬림이 다수였지만 이슬람에서 꽤 관용적이던 수피즘이 상당수였다. 그래서 이들은 주변 기독교인들을 크게 학살하는 것도 없었고 사이가 나쁜 것도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이들에게 쳐들어오면서 이들이 정교회 신도들을 학살했다는 억지를 침략 명분이라고 들이대면서 엄청나게 학살했다. 러시아와 마지막까지 싸우던 체르케스인 지도자 이맘 샤밀(1797~1871)만 해도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게 편지를 보내 대체 '우리가 대체 언제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괴롭혔다는 건지 그 증거를 보이라'고 따졌을 정도. 알렉산드르 2세도 증거가 없으니 억지로 우기기만 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러시아 제국에게 전 인구 1/4이 학살당하거나 억지로 추방당하자 이들은 "종교적 관용으로 이웃 기독교랑 사이가 좋았는데 그 댓가가 이거였냐?"며 증오로 이를 갈았다. 오스만으로 이들이 와서 살게 되면서 이들 체르케스인들도 이를 갈고 있었는데 불가리아가 독립하기 전에 독립 저항을 벌이자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군인으로 받아들여 파병 보내거나 특별 허가 민병대로 참전시켰다. 결국 러시아 제국이 벌인 학살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체르케스인들은 증오로 불가리아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약탈해 분풀이로 삼은 셈. 불가리아도 이를 잊지 않고 똑같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불가리아인 학살과 상관도 없는 포마크인들이나 다른 무슬림들을 똑같이 분풀이로 학살했으며, 이로 인해 이들도 똑같이 오스만으로 들어와 살면서 이를 갈다가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복 학살해 버리는 부메랑의 연속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그리고 후술하는 대로 아르메니아인들도 아제르바이잔인들을 보복 학살해 버리는 또 다른 부메랑이 되어 버렸는데 얄궂게도 이들을 섞여 살게 하는 데 기여한 게 러시아였다.[17]

이러던 와중에 반 시에 도착한 제브뎃 베이는 도시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에게 젊은이 4천 명을 징집하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제브뎃 베이는 이미 반 일대에서 숱하게 학살을 벌인 전과가 있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제브뎃 베이가 먼저 도시의 가용 병력을 제거한 뒤 쳐들어오려는 심산이라 판단하고 징집령을 거부했다. 반 공방전의 시작으로 알려진 1915년 4월 20일 직전인 4월 19일 하루에만 2500여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된 상황이었으니 아르메니아인들의 판단이 정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에 맞설 힘이 없었다.

결국 4월 20일 명령에 저항하는 도시를 봉쇄하고 있던 튀르크군이 도시에 들어가려던 아르메니아 여성을 붙잡아 희롱하자 이를 막기 위해 도시에서 아르메니아 남성 둘이 뛰쳐나왔고 튀르크 군인들이 이들을 사살하자 분노한 아르메니아인들이 튀르크 순찰대를 공격했다. 이에 제브뎃 베이는 도시의 아르메니아 구역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반 공방전이 시작됐다. 도시 내부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과 무슬림들의 전투가 벌어졌고, 도시 외곽에서는 진입하려는 오스만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교전을 벌였다. 한때 러시아군이 동부 아나톨리아로 깊숙히 진격해오고 튀르크군이 후퇴하며 포위가 풀린 적이 있었지만 러시아군이 패배하고 밀려나기 시작하자 반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도 대부분 피난을 갔다. 이 피난 과정에서 쿠르드족의 공격으로 막대한 희생이 발생했다. 반 시에 거주했거나 반으로 피난했던 인원 중에서만 보통 5만에서 6만 정도가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오스만 제국은 곧이어 벌어진 비틀리스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물리치고 시간을 벌자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모두 살던 곳을 떠나 시리아 사막 등으로 강제 이주당했는데 오스만은 이주 중에도, 이주 후에도 제대로 된 도움을 제공한 적이 없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을 의도적으로 아사시켰다. 오스만군은 이주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고 야외에 노출된 아르메니아인들이 쿠르드족을 비롯한 적대 세력들에게 공격받는 것도 사실상 수수방관하거나 오히려 이를 조장했다.

튀르키예는 지금까지도 이 학살을 은폐 축소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튀르키예의 입장을 무분별하게 대변하는 자들은 저 학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노선 갈등으로 자기들끼리도 죽이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싫어한 쿠르드족들도 학살에 나섰고 많은 수가 직접적으로 살해되지는 않고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서 참 복잡한 사건이라고 말하며 애써 오스만의 책임을 희석하려고 시도한다.

그 논리면 홀로코스트 폴란드인들도 유대인들 학살에 동참했다고 많은 수가 직접 살해된 게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기아와 강제노동으로 죽었으니 참 복잡한 사건이 되는가? 결국 홀로코스트의 최종 책임은 독일에게 있다고 보는 것처럼 아무런 지원도 보호도 하지 않으면서 가혹한 환경으로 내몬 것은 직접 죽이지만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오스만 제국이 학살의 의도를 갖고 자행한 일인 것이 당연하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저런 오지로 보낸 당사자들은 명백한 살해의 의도를 갖고 있었고 단지 그들이 선택한 수단이 자연이나 타 민족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다. 애초에 직접적으로 학살한 숫자도 매우 많다.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반미, 반서방 분위기에 의한 무분별한 이슬람교 띄워주기로 인해 오스만의 대학살을 옹호하거나 물타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리 국제 사회에서 튀르키예가 아르메니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게 튀르키예의 극우 민족주의자나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까지 인정해줄 필요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같은 논리를 적용하자면 일제강점기도 같은 조선인 친일파에 의한 탄압과 고문이 횡행했고 독립운동가들끼리 이념 차이로 싸우는 일이 있었으며 조선을 떠나 만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군의 총칼이 아닌 기아와 질병과 마적떼에 죽는 조선인이 허다했다. 애초에 논점도 잘못 잡혀 있는 게 상술되어 있듯 메츠 예게른의 주동자들은 무슨 신실한 무슬림들이 아니라 이슬람교 역시 세월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미신 운운하며 종교 자체를 냉소적으로 봤던 오히려 나치 독일과 유사한 근대적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문명화가 덜 돼서' 메츠 예게른이 터진 게 아니라 다양한 민족, 종교 집단이 적당히 느슨히 공존하고, 국가는 여기서 현실적인 이익 뽑아먹는 거에 초점을 두었지 사회 공동체 자체의 정치적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주물한다는 생각을 안 했던 전근대, 근세적 제국이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과 총력전이란 강제적, 폭력적 근대화를 겪으며 '문명화 과정'에서 터진 사건이다. 이 항목에서 보듯이 이 학살로 죽어간 사람들에 바로 무슬림들 또한 엄청 많았다는 걸 생각해보자.

더불어 이 학살을 두고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 기독교 우파계에선 억울한 기독교도들을 무슬림이 학살한 사건이라고 부르며 반중동, 이슬람혐오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집단으로 불태워 죽이거나, 발에 편자를 박고 춤을 추라며 채찍으로 때리거나, 볼 수 없다며 얼굴을 돌린 신부의 을 뽑아 버리거나, 참수한 머리를 들고 의사에게 붙여 보라고 하거나, 치아를 모조리 뽑은 뒤 이마에 박아 버리거나, 참수한 머리로 때리거나, 남자들을 모아둔 뒤 총살한 다음 총알이 아깝다며 총검으로 확인사살하거나, 여인들을 성노예로 인신매매하고, 아이들을 배에 태우고 나가 물에 던져 죽이는 등 참으로 잔혹하기 그지없는 엽기적인 방법들까지 동원해 가면서 숱한 아르메니아인들이나 아시리아인, 아랍 무슬림들을 대학살했고 통계상 감소한 인구가 100만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18]

게다가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렇게라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지만 덩달아 학살당한 쿠르드족이나 아시리아인, 그리스인, 아랍계 기독교인들은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쿠르드족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살았기 때문에 서로 동족으로 여기지 않아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학살하면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었던 씁쓸한 역사가 있다.

더불어 당연하지만 튀르크인이라고 해서 닥치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죽인 것도 아니며 목숨 걸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지켜준 튀르크인들도 있었다. 2001년 당시 98살이었던 바살프 아티람치안이라는 아르메니아인은 어릴 적 자신이나 가족들과 이웃, 수백여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오스만군이 죽이려 추격할 당시 이제 우린 죽었구나라고 생각하며 다 포기했는데 지나가던 튀르크인 양치기가 대충 보더니 나를 따라오면 목숨이라도 일단 구할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일단 따라가니 작은 변두리 마을로 간 양치기가 대충 설명하고 마을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지하라든지 헛간에 아르메니아인들을 숨겨주고 물건은 대충 창고에 넣고 일상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추격하던 오스만 군인들이 와서 아르메니아인들 행방을 묻자 누군지 모를 이들이 무더기로 저쪽으로 가는 걸 잠깐 보았을 뿐이라고 거짓말하고 며칠이나 숨겨줬다고 한다. 이 마을로 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도중에 병으로 죽은 한두 명 빼고 모두 아르메니아로 무사히 달아났다고 한다. 90년대 들어서야 이 증언을 토대로 아르메니아 측에서 이 마을로 와 보았지만 마을은 흔적도 없어진 다음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일부 오스만 정계나 언론도 '이건 학살이다! 범죄를 왜 저지르는가?'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이들은 매국노로 몰려 같이 학살당하거나 암살, 테러에 시달려 침묵하든가 해외로 달아나야 했다. 정치인이자 언론인 알리 케말 베이(Ali Kemal bey, 1867~1922)가 대표적으로, 케말 베이는 정계, 언론으로 이 학살을 반발하며 비난하다가 누레딘 이브라힘이 이끄는 오스만 군에게 잡혀 이즈미르에서 공개처형되었으며 죽은 후에도 매달린 시체가 돌을 맞는 등 린치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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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케말 베이의 사진

알리 케말 베이는 튀르크인이 아니라면서 당시 오스만 측은 엉터리 아르메니아 이름을 붙여서 매국노는 이름도 아르메니아 놈처럼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2번 죽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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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말 베이와 아내인 마거릿의 사진.

케말 베이는 영국 런던에서 영국 여성 마거릿 윌프레드 존슨과 결혼했는데 아들인 오스만을 비롯하여 아내 마거릿은 영국에서 살면서 베이라는 성을 버리고 외가인 존슨이란 성으로 살아갔다. 오스만도 아버지처럼 영국 여성과 결혼하여 스탠리 패트릭 존슨을 낳았으며 스탠리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스탠리의 아들이 바로 튀르키예계 영국인 정치인인 보리스 존슨 총리. 반대로 케말 베이의 딸인 셀마는 나중에 튀르키예로 돌아와 튀르키예 국적을 얻어 조용히 살다가 갔다. 그런데 그녀도 배터스비라는 영국 남성이랑 결혼해 혼혈 아들을 낳았다.

2016년 4월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도 이걸 다뤘는데 이 당시 튀르크인 농부가 도와줘 목숨을 구해 무사히 아르메니아로 간 아르메니아인 증손자들이 목숨을 구해준 튀르크인 무슬림 증손자랑 지금도 종종 만나며 친하게 지내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스만에서는 당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반감도 컸지만 아르메니아인을 도우면 매국노로 몰려 같이 처형당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학살을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갈 순 없지만 말이다. 홀로코스트로 악명 높은 나치 독일도 일부 독일 국방군 병사들이나 장교들이 유대인이나 집시들을 살려주거나 국외로 도망가게 해주고 입다물어 살아남게 해 준 경우라든지, 1970년대 후반 킬링필드로 악명 높았던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도 일부 크메르 루주군 병사와 간부들이 킬링필드 당시 일부 캄보디아 시민들을 죽이지 않고 집단 농장과 국립 공장의 노동 인력으로 살려둔 경우가 있었고 1990년대 후반 이슬람 극단주의에 의한 폭정과 학살을 펼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도 멋 모르고 탈레반 정권 치하에서 내린 이슬람 율법령을 위반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을 사형시키지 않고 징역형과 경고 등으로 일정 부분이나마 온건하게 처벌하거나 한 번 정도만 봐 준 것처럼 어디에든 소수나마 이런 건 다 있다. 하지만 이런 소수와 달리 대다수의 학살 피해자가 더 압도적일 뿐이다. 그나마 이런 소수의 생존자들이 목격자로서 제대로 당시 상황이나 여러가지를 증언하게 하여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했으니 이런 소수라도 살아남게 한 것이 조금이라도 의의가 있긴 하다.

6. 1915년 아르메니아인 강제이주 정책의 타임라인

1915년 5월 27일 오스만 제국의회는 "재배치 법" (Tehcir kanunu)을 임시법(Kanun-ı Muvakkat)으로 제정해 각 지방의 행정관 및 지방 사령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임시로 다른 주(vilayet)로 이동시키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5월 30일에 장관회의(Meclis-i Vükelâ)의 결정으로 이 법을 적용받아 이주된 자는 무제한의 기한동안 그 지역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6월 10일, "아르메니아인이 보유한 동산, 부동산, 토지의 관리에 대한 결정" 명령과 더불어 이주된 자의 부동산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제정되었다. 이주조치된 아르메니아인들이 떠난 장소는 무하지르(발칸 전쟁 난민)들에게 제공되며, 이주된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써 이주지 내의 토지를 제공할 것이라는 방침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전후의 혼란과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죽었기 때문에 보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이 남기고 간 연고 없는 토지 및 주택 등의 부동산들은 1930년대에 튀르키예 정부에 의해 국고로 귀속되었다.

이 이주조치는 이스탄불, 이즈미르, 퀴타햐, 발르케시르 등의 치안적으로 문제가 없는 지역들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정부에 의해 안전하다고 간주되는 이, 예술가, 무역업자, 여성, 고아 어린이, 노인은 제외되었다. 또한 이 법에 반발하는 무슬림들도 있었는데, 현재의 콘야도에 속하는 에레일리(Ereğli)에서는 그로 인해 해당 지역 내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주조치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당국에 의해 계속 거주할 수 있었다. 에레일리 군 행정부는 이 법을 '차별주의적'이라며 집행하기를 거부했다. 또한 강제이주법은 이주조치의 대상이 된 아르메니아인들을 색출, 검거할 권한도 주어졌으나 무슬림의 집을 가택수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슬림 이웃들 사이에 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강제이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이주조치가 내려온 이후 자발적으로 이주를 결정한 사람들은 자유롭게 활동이 가능했는데 대략 1500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아나돌루에서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아르샤비르 시라지얀은 이스탄불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었으며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마르딘 및 디야르바크르에 거주하던 시리아 정교도들과 학캬리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 중 일부가 해당 이주법을 위반한 형태로 이주법 대상으로 포함되었다. 디야르바크르에서 아르메니아인과 기타 그리스도교도 약 2천명이 죽었으며, 오스만 제국 정부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격리조치는 다른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해당 법이 제정된 뒤 수개월간 아나돌루 내의 아르메니아 인의 상당수가 '호송'의 형태로 길을 나서 시리아의 데이르에조르와 레술라인 ( 라스알아인)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 중 상당수가 사망했다. 8월 4일에 오스만 중앙정부는 가톨릭 및 개신교 아르메니아인의 강제이주를 중단한다는 명령을 발송했으나 현지 당국과의 연락 문제 혹은 현지 당국의 의도적인 무시로 인해 이 명령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정부는 아르메니아인 이주조치에 있어 강제이주 대상의 설정에서의 비리, 이주 기간 동안의 가혹행위, 직권남용 등의 이유로 현지 군,행정당국에 대한 조사 및 재판을 열어 처벌했다. 1915년 9월부터 1916년 6월 사이에 지방법원에서는 총 1,673명이 기소되었고 65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 중 67명이 처형되고 524명은 징역형, 68명은 벌금, 강제노동,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또 1918년에 열린 재판에서도 1,397명이 유죄 선고를 받고 처벌되었다.[19] 이는 당시 중앙정부와 지방당국들 간의 의사소통과 판단에 문제가 있었으며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강제이주 조치가 전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강제이주조치되어 데이르에조르와 레술라인에 수용된 아르메니아인들은 전후 1919년에 오스만 제국 의회 결정에 의해 풀려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하지만 해당 지역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아나돌루에서의 혼란과 튀르키예 독립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시리아, 레바논 일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아르메니아인이 많은 이유다.

7. 이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고대 이래의 역사적 서부 아르메니아는 완전히 파괴되어 소멸되었다. 전통적인 범위의 아르메니아 고원, 즉 서아르메니아는 20세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투르크 제국과 그 후신 튀르키예로 인하여 아르메니아의 흔적이 지워져 전통적으로 아르메니아 영역에 속한, 자국어로는 바스부라간이라고 하는 역사적 서부 아르메니아에서 쿠르드인이 지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해 쿠르드인 거주 지역 쿠르디스탄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마침내 1918년 5월 28일 독립국가인 '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나라를 가진 기쁨도 오래가질 못했다. 아직도 튀르키예의 지배를 받는 아르메니아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며 튀르키예를 침공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아르메니아는 전체 사상자가 2만 정도로 다른 나라에서 보면 적은 편이었지만 당시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인구가 200만도 안되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피해였다. 게다가 아르메니아 건국 이후로 분열된 문제가 있었는데 이 학살에서 살아남고자 개종한 아르메니아인들의 반역자 여부와 이들을 같은 아르메니아인으로 받아줘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당연하지만 현재 아르메니아에선 이들을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개종하고 학살을 도운 것뿐이며 이들도 피해자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배신자라느니 매국노라느니 비난을 받아야 했고 일부는 그 동족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도 억울한 게 살고자 그랬고 이슬람으로 개종해도 학살[20]당한 피해자도 있기 때문에 무조건 이렇게 비난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논란과 갈등도 빚어지던 와중에 결국 소련에게 흡수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아르메니아로서는 학살에 기여한 오스만 제국의 장군 및 일부 책임자들이 1920년 초반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조금이라도 원한을 풀긴 했다. 1921년 3월 15일 오스만 제국의 학살로 친척 85명을 잃은 아르메니아인 소그호몬 테흘리안(Soghomon Tehlirian, 1896~1960)이 학살의 실무 책임자[21]인 내무장관 마흐메드 탈라트 파샤(Talaat Pasha, 1874~1921)를 독일 베를린에서 대낮에 암살한 게 유명한 사례다.[22] 테흘리안은 독일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재판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의 여파로 범죄 당시 의지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던 '정신 이상자'로 판단되어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나[23] 미국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고, 당연히 사후 테흘리안은 고국에 동상이 여러 개 세워지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인기를 얻을 정도로 고국에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24] 또 학살의 주범 중 하나인 제말 파샤도 아르메니아인의 손에 암살되었다. 다만 이 인물들은 아타튀르크에 반발하여 축출되어 권력을 잃었기에 죽이기 쉬웠던 점이 있었고 아타튀르크를 따르던 학살 관련 장군들은 암살이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써 암살한다고 쳐도 아직도 튀르키예에 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복살해할 가능성을 걱정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반 학살을 비롯한 학살을 저지른 제브뎃 베이는 학살 이후에도 앙카라 주지사를 역임하고 터키의 공화국 전환 후에도 형과 함께 무역회사를 설립하며 부를 축적하다가 1955년 77세로 사망하면서 천수를 누렸듯이 학살자 상당수는 천수를 누렸다.

튀르키예는 냉전 시기에는 소련을 상대하는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서방 국가들이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논평을 내기를 꺼려 왔다. 일부 개인들의 비난과 고발이 있긴 했지만 묻혔다. 참고로 튀르키예 내에서는 50년대에 작가이자 본인이 쿠르드인인 아샤르 케말이 쿠르드인 및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과거를 거론했다가 교도소에 수감되고 온갖 구타와 고문을 당하면서 무지 고생해야 했다. 그래도 이후 풀려나서도 케말은 아르메니아 및 쿠르드, 아시리아인 학살을 고발하며 온갖 글을 쓰고 학살에 대한 증거를 찾고자 노력했다.

이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학살로 인정한 것은 1965년 우루과이가 최초다.[25]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튀르키예의 가치가 하락하자 이제 더 이상 튀르키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느낀 서방 국가들 대부분이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 학살과 이에 대한 부정을 규탄하고 있으며[26] 프랑스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정하면 처벌하는 법안까지 제정하기도 했지만 이 법은 2012년 2월 프랑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내려졌다. # 그래놓고 알제리 학살에 대한 건 프랑스는 튀르키예가 하는 짓을 따라한다[27]

하지만 튀르키예의 가치는 아직도 여전하다. 소련이 무너져도 러시아가 여전히 유럽에서 행패를 부리고 무엇보다 보스포루스라는 지리적 특성과 함께 친서방에서 친러로 외교정책을 전환하면 미국도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다. 결국 상술한 대로 프랑스조차도 아르메니아 학살 부정 처벌 법안을 위헌으로 처리했듯이 미국도 튀르키예에 대한 학살 결의안을 끝끝내 상원에서 통과하지 못한다.

2015년 3월 기준으로 유럽인권재판소에서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정하는 것이 금지되어야 하는가, 표현의 자유로서 보장할 것인가에 대해 심리했는데 만약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한 부정이 금지될 경우 유럽 연합 소속 전 국가가 아르메니아 학살이 사실이라는 증언을 채택하게 되는 것이라 귀추가 주목되었다. 하지만 4년 넘도록 이에 대하여 자세한 결론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에 한해서만 학살이라는 걸 부정하는 걸 금지하고 기독교 열강이 비기독교권에 저지른 학살에 대한 부정은 넘어갈 것이냐?"는 반발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튀르키예의 물귀신 작전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렇게 치자면 그 시대, 유럽 열강이 여러 식민지에서 저지른 학살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 해당 피해국가들의 반발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5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학살을 20세기 최초의 학살이라고 발언하여 튀르키예에서는 분노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벨기에가 저지른 ( 레오폴드 2세 참고) 학살은 거들떠도 안 본다고 분노하고 있다. 튀르키예도 이걸 들먹이면서 유럽 난민 사태로 무슬림 인구가 급증하고 무종교인의 증가로 종교세가 약화되었지만 가톨릭이 대다수인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20세기 초 학살을 외면하는 교황이라고 분노했으며 이로 인해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 모스크로 되돌리자는 움직임까지 부채질했다.

하지만 서구권이나 교황이 말한 학살은 영어로 genocide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genocide라는 단어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단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단어는 경제적 착취, 강압적 통치를 유지할 목적으로 수단으로서 혹은 부수적 피해로서 대량살상이 이루어져도 이를 그냥 무시하고 목적을 관철시키는 경우를 묘사하려고 만든 단어가 아니다. 접두사 geno-가 의미하듯 그저 피해자가 특정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량 살해를 자행하는 것을 말한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난하는 측의 주장과 교황의 발언에서 "학살"을 "인종청소"로 바꾸어 읽어 보자.

하지만 그에 앞선 20세기 초에 독일 나미비아에서 행한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이 있기 때문에 최초의 학살은 아닌데 튀르키예 측에서 분노할 만하다. 게다가 헤레로족을 학살하며 벌인 짓이나 변명도 독일은 튀르키예랑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잡아다가 사막에 놔두었는데 지들끼리 싸우다 죽거나 굷주린 사자, 하이에나들한테 포식당해서 죽은 거니까 우린 모르는 일이다." 라고 하다가 나미비아에서 "유대인도 독일이 아닌 폴란드 아우슈비츠로 보내 죽였으니 우린 모른다고 하는 거랑 차이가 있냐?"며 까이고 위에 서술하듯이 튀르키예가 나몰랑하며 말하는 근거도 "우리가 직접 안 죽였다... 그냥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하니까 지들끼리 싸우다가 늑대나 곰 같은 맹수들한테 잡아먹혀서 죽었지...."라고 하는 거랑 별 큰 차이가 없다. 나미비아에서도 교황에게 우리[28]가 독일 놈들에게 당한 학살은 외면하냐며 무척 안 좋게 대했다. 그러다가 결국 독일에서 2016년 사상 처음으로 정부 차원에서 과거 독일 제국이 저지른 나미비아 대학살에 대해 사과했다. #

그나마 2019년 12월에 와서야 미국 상원결의안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결의안 통과를 주도한 미 민주당 로버트 메넨데즈 상원의원은 "상원이 역사의 바른 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며 "아직도 학살의 생존자가 있는 상황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대해 사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튀르키예와 관계를 고려해 수차례 결의안 통과를 저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결의안이라고 해봐야 이런 게 있었다는 것일 뿐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나 강제적인 배상이라든지 여러가지는 없었다. 튀르키예가 계속 이러면 보스포루스에 러시아 해군을 통과하게 하겠다고 분노했으니 트럼프조차도 난 저 결의안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어 버렸고 2020년 들어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잊힐 정도가 되어 버렸다.

저것을 따지자면 상술한 바와 같이 수백년간 비교적 안정적으로 공존하던 동부와 내륙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와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제노사이드 수준으로 미워하게 된 건 대학살 바로 이전 오스만 제국의 축소와 함께 튀르키예어로 무하지르라고 하는 발칸 반도 출신 무슬림 난민과 재정착 문제가 짙게 깔려있다. 그러나 발칸반도 오스만인 및 다른 무슬림 민족들에 대한 학살과 인종청소 문제는 현대까지도 당사자인 신생 발칸 독립국들, 오스만의 후신인 튀르키예, 서방의 학계를 포함하여 조명은커녕 제대로 된 연구도 아무것도 없다. 이는 단순히 튀르키예측의 피해자 행세와 물타기가 아니라 어떻게 인종적 증오가 되풀이 되었는지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임에도 아무도 역사적 책임, 관심을 안 가지는 문제이니 서구권의 아르메니아 학살 담론 자체가 편향적으로 보이기 딱 좋다. 이런 점 때문에 현대 튀르키예에서 당시 오스만인 학살은 그리도 모른 척하곤 아르메니아인만 그리도 발광하는 서구의 이중잣대라고 온갖 비난이 나올 정도다.

물타기로 볼만하지만 오스만인 및 다른 무슬림 학살 희생자 수 또한 장난 아니었으며 위에서도 서술된 체르케스 인들은 온건 무슬림으로 유라시아에서 기독교인들과 공존하고 있음에도 이들을 학살 및 침략명분으로 러시아가 벌인 추태만 봐도 뚜렷하다.[29] 참으로 얄궂게도 학살과 추방으로 증오에 떤 체르케스인들은 관용을 버리고 오스만에서 기독교라면 닥치는 대로 죽이는 민병대로 쓰여 발칸 반도에서 학살을 벌였고 불가리아도 애꿎은 다른 무슬림 포마크인들을 학살해버렸고 돌고 도는 비극이 계속 벌어져 무슬림 역시 수십여만이 넘게 학살당했다. 오늘날 튀르키예나 아랍 각지로 퍼져 사는 체르케스인들이나 포마크인들은 분노하면서 서구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처럼 이걸 깊게 따지냐고 분노하는지라 이걸 물타기로 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튀르키예 역시 오스만인들도 발칸반도나 당시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도 학살당한 것도 있다. 다만 식민지 같은 곳에서 독립 및 독립 투쟁을 벌일 시 이렇게 피지배국 민간인들도 덩달아 학살된 경우가 여럿 많고 이런 경우가 묻혀진 것은 튀르키예만이 아닌 점이 있긴 하다.[30]

8. 아르메니아인이 저지른 학살

앞서 서술했듯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큰 원인 중 하나는 발칸 전쟁 당시 벌어진 포마크인 및 튀르크인 학살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의 증오심이 크게 차지한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인해 그 불똥이 이번에는 아제르바이잔인에게 튀었다. 본래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중세 이후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트인, 페르시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러시아 지배기 이후 러시아의 인위적인 이주정책으로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늘어나고 아제르바이잔인 인구가 줄어드는 와중에 이 사건으로 대략 3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예레반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주하고 볼셰비키 혁명으로 캅카스 지방의 러시아군이 철수함에 따라 발생한 대규모 안보공백을 틈타 이번에는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아제르바이잔인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졌다.

1918년 3월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한다며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반동들을 처단한다는 미명 하에 1918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바쿠를 포함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장게주르, 나흐츠반, 예레반 일대에서 최소 3만 이상의 아제르바이잔인을 살해하고 구바 지역에서 122개,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150개, 장게주르에서 115개, 예레반 근교에서 115개, 카르스에서 92개의 마을을 파괴했다. 예레반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발행하던 1919년 11월 2일자 아슈하다보르(Aşxadavor, 노동자) 신문에 의하면 예레반 인근에서 순식간에 88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1920채의 집이 불타고, 13만 970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남녀노소 안 가리고 잔인하게 살해[31]되었다고 보도했다.[32] 그리고 이것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의 오래 묵은 적대관계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학살을 지시한 아르메니아인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 1878년 10월 13일 ~ 1918년 9월 20일)은 예레반에 떡하니 동상까지 세워져 있으니 아제르바이잔에서 학살자를 영웅시하는 주제에 아르메니아 대학살 피해자라고 외치지 말라고 분노한다. 아르차흐 공화국 곳곳에도 보란듯이 샤후먄 동상을 세웠지만 2020년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으로 회복한 곳에서 샤후먄 동상은 철거당했다. 샤후먄은 1918년에 만 39세로 반볼셰비키파에게 잡혀 공개 총살로 사망했다.

또 이는 오스만 제국군과 아제르바이잔인의 바쿠 학살로 이어졌다. 1918년 9월 누리 킬리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은 바쿠 전투에서 바쿠를 함락 시킨 뒤 1~3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 민간인을 3월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었다. 한마디로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상호 학살이 이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서 외면하게 됐고 아르메니아는 이에 대해 입다물거나, 자신들 책임을 부정하고 서로의 학살만을 부각시키면서 비난을 이어나가고 있다.

9. 튀르키예의 입장

오스만 제국을 실패한 전근대 국가로 폄하했던 사관이 주류였던 20세기 세속 군부가 주도했던 튀르키예와 달리 21세기 들어서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정권은 오스만 제국을 영광의 시대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래도 튀르키예를 건국한 국부 아타튀르크는 아무래도 자신이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에 대해 정당성을 내세울 점도 있긴 하지만 전통적인 세속주의+튀르크 민족주의 역사관에 의하면 튀르키예와 오스만 제국은 다른 나라이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에게 농락당하고 근대화에 뒤쳐진 무능한 나라로 특히 군사정권에서 인식하고 교육시켰다. 이러다 보니 과거 튀르키예에선 "우리나라 정부는 오스만 제국 같은 이 썩어빠진 색히들을 정치적으로 승계하지 않았어, 예전 오스만 구 황가 인사들에게 찾아가서[33] 보상이던지 사죄를 받아봐!"라는 태도를 취해 왔다.

그러던 튀르키예가 오스만 제국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극히 최근으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의 집권 이후다. 2016년만 해도 유독 튀르키예 서점가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서적이 많이 출간된 것도 이러한 전통적인 케말주의적 역사관을 바꾸려는 이슬람주의자+튀르크주의자들이 역사전쟁이 학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젠 튀르키예의 숨기려고 했던 치부에서 그냥 대놓고 보이는 이중성이 되어 버렸다. 다른 면에서는 틈만나면 '오오 영광스러운 오스만 제국의 후손 오오' 거리면서 오스만 제국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며 자뻑하기 바쁜 튀르키예가 이 피비린내나는 현대 중동사의 심연에서 스타트를 끊은 이 사건만 두고는 "우린 오스만 제국이 아니다. 책임 따지고 싶으면 타임슬립이라도 하든가." 따위로 나오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 항목에 나와 있지만 사실 엄밀하게 역사적 관점에서 따지면 적어도 19세기 이전 오스만 제국은 튀르키예인의 제국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배 계급은 근본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짙게 받았으며 정교회권 유럽 출신의 개종자들이 주도했고 그 이하로는 그냥 다 신민이었으며, 제국이 쇠퇴한 이후에도 차라리 수니파 이슬람의 종주국이란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했지, 딱히 튀르크인이라고 우대하며 중심 민족으로 삼은 건 유럽쪽 속주를 전부 다 빼앗기고, 아랍인들의 충성도 또한 심각하게 뒤흔들린 19세기 후반 들어 제국 역사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튀르크인의 제국이란 정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대 튀르키예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후예가 아닌 건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인, 무슬림만의 제국으로 인식하는 건 명백한 역사학적 오류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현대 튀르키예 정치를 주도해 온 케말주의 군부는 국체의 초점을 튀르크 민족주의를 더 강조하며'오스만 제국은 그래서 망해도 쌌던 실패한 전근대적 다민족국가'란 관점을 어느 정도 일관적으로 유지라도 한 반면 이들과 대립하면서 성장한 현대 에르도안 정권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재평가와 현대 튀르키예 국체와 더 밀접한 직접적 연관성을 주장한다. 이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롯한 말기 오스만 제국의 전쟁범죄가 언급되기 전까지만 말이다. 평소에는 '오스만 제국은 그리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된 제국이 아니었고 여전히 기억하고 배울 가치가 있는 우리들의 조상이었다'면서 튀르키예 국체 담론 내에선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계승의식을 주장하면서 막상 이런 민감하고 현대까지도 임팩트가 큰 정치역사적 문제가 걸리기만 하면 갑자기 본인들이 그리 욕하던 케말주의 성향 튀르크민족주의자들 처럼 갑자기 현대 튀르키예가 오스만 제국과 전혀 무관한양 책임면피용 단절론을 주장하니 현대 튀르키예 정부의 과거사 관련 태도가 욕을 먹는 것이다.

이에 튀르키예는 바로 위에 서술한 것처럼 위대한 오스만 제국 운운하다가 이런 학살 논쟁에 대해 그럼 오스만 제국에게 따져라, 현 튀르키예는 그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지 않았느냐?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저런 서유럽 국가들 측에게 코웃음으로 대하며 프랑스에겐 알제리인, 마다가스카르인, 베트남인 학살, 영국에겐 인도인, 아일랜드인, 케냐인 학살, 독일에겐 나미비아인, 탄자니아인 학살, 벨기에에겐 콩고민주공화국인 학살, 네덜란드에게는 인도네시아인 학살 등 당시 식민제국 열강이었던 이들 서유럽 나라들이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 자행한 학살들을 거론하며 그러는 네놈들은 피해국가들한테 사과 및 보상은 제대로 했냐고 반발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하여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거론하는 서방권 나라들도 튀르키예랑 정확히 똑같은 반응을 보이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니 튀르키예 극우들은 "너희들이 똑같이 보상하고 사죄하고 인정하면야 우리도 그래야지~ 하지만 안 그러잖아?" 라고 비웃는다... 그리고 이 논리는 서양 극우들도 간혹 거론하긴 하지만 여긴 워낙 저질러놓은 일이 많아서 튀르키예랑 다르게 국제적으로 더 까인다(...). 내로남불 이렇게 되니 미국도 상원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하였고 유럽 인권 결의안도 마찬가지다. 만일 통과된다면 다른 학살 사건에 대해서 무수한 반발이 터질 테고 본인들이 가해자였던 사건들의 결의안도 상정되는 꼴이 터질 테니까 결국 이들도 강력한 각오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2015년 4월 24일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년을 추모하는 의식이 튀르키예에서도 아흐메트 다우트오울루 총리가 이스탄불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총대주교좌 성당에 방문한 가운데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다우트오울루 총리는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지만, 이 당시에 전쟁과 학살로 희생된 아나톨리아의 모든 민족들,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시리아인[34], 튀르키예인[35]을 추모하고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염원하며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연설했다. 하지만 오스만 미화를 가득히 내세우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다른 자리에서 "1915년의 비극은 인류적인 비극이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특히 아르메니아가 제시하는 학살자 수, 근거자료들은 사실과 달리 매우 부풀려져 있다." 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이 일로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 간의 갈등은 아주 거세지고 있지만 튀르키예가 어느 정도는 학살을 인정하긴 하고 우호적인 행동을 하면서 조금씩은 반튀르키예 감정이 줄어들긴 했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성지와 같은 튀르키예 악다마르 성당을 2010년 튀르키예가 95년 만에 재건하여 십자가도 세워주고 예배를 허용했을 당시 아르메니아에서는 수만여명이 서로 오고자 할 정도로 난리였다. 그리고 2013년부터는 매해 아르메니아 대주교의 방문 및 예배와 같이 청소년 세례식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아르메니아에서는 엄청 기뻐하고 환영했지만 그 대신에 튀르키예는 아르메니아와 사이가 나쁜 우방 아제르바이잔의 반발과 자국 극우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때문에 이들 예배에 중무장한 튀르키예군이 배치되어 경호를 서 줘야 했다. 그러나 2016년 집권한 이슬람 극우 정당인 에르도안 정권이 이러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세례식을 금지하면서 아르메니아에서 강력하게 반발하여 다시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의 사이가 나빠졌다. 게다가 2020년 치뤄지고 있는 아르메니아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이 강력하게 도우면서 패배하여 아르차흐(나고르노카라바흐) 대다수 땅을 잃어버린 아르메니아와 두 나라와 사이가 엄청 나빠졌다.

2021년 4월 24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총대주교인 사학 마샬랸의 "비극적인 사건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성명에 대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로 답했다. 정치적으론 그나마 에르도안 정권도 군부 독재 맞선 자유주의 민주투사 흉내라도 내며 그나마 역사적 유적이라도 몇 개 풀어주던 2010년대 중반에 비해서 훨씬 더 악화된 상황인데 그나마 국가원수가 이리 나와서 직접 역사적 비극과 현대 정치적 이해 관계 사이 거리를 두고 유화적인 발언을 한게 의미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Türkiye Ermenileri Patriği Sayın Sahak Maşalyan, Ermeni Toplumunun kıymetli üyeleri, değerli vatandaşlarım, sizleri en kalbi duygularımla, muhabbetle selamlıyorum. Birinci Dünya Savaşının zor şartlarında hayatlarını kaybeden Osmanlı Ermenilerini saygıyla yâd ediyor, torunlarına taziyelerimi sunuyorum.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인 존경하는 사학 마샬랸님,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귀중한 일원 여러분, 귀중한 국민 여러분, 여러분들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친밀하게 인사를 드립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어려운 상황속에서 목숨을 잃은 오스만 아르메니아인들을 존경을 담아 추모하며, 그 자손 분들께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Etnik kökeni, dini, dili, rengi fark etmeksizin hepimiz insanlık ailesinin fertleriyiz. Bu topraklarda asırlardır barış içinde hep birlikte yaşıyor, ay yıldızlı al bayrağımızın gölgesinde huzur buluyoruz. Bizi bir arada tutan ne çıkardır, ne de hesaptır; bizi bir arada tutan aynı ülkeye, aynı değerlere, aynı yüksek ideallere olan samimi bağlılığımızdır. Türkiye Cumhuriyetinin eşit, özgür ve onurlu vatandaşları olmak, hepimiz için gurur kaynağıdır.
민족의 뿌리, 종교, 언어, 피부색과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인간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수백년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며, 초승달과 별이 있는 붉은 우리의 깃발의 그늘 아래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단합시키는 것은 이익도 아니고, 계산도 아닙니다. 우리를 단합시키게 하는 것은 같은 나라에, 같은 가치에, 같은 높은 목표인 친밀한 관계입니다. 터튀르키예의 평등하고, 자유롭고, 명예로운 국민이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자부심의 근본이 됩니다.

Ortak kültürümüz, Ermeni toplumunun mimari, musiki ve sanattaki katkılarının yanı sıra yetiştirdiği nice hekim, mühendis, hukukçu, iş insanı ve meslek erbabının bilgi ve alın teriyle zenginleşmiş, gelişmiştir. Türkler ile Ermenilerin yüzyıllarca süren ve insanlığa örnek olan birlikte yaşama kültürünün unutulmasına izin veremeyiz. Tarihçilerin yapması gereken tartışmaların üçüncü taraflarca siyasallaştırılarak, ülkemize yönelik müdahale aracı haline getirilmesinin kimseye bir faydası olmamıştır.
우리의 공통된 문화는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건물, 음악, 그리고 예술에서의 기여와 더불어 키워진 위대한 의사, 기술자, 법조인, 사업가, 그리고 전문직업인의 지식과 이마의 땀방울로써 풍요로워지고, 발전되었습니다. 튀르크인과 아르메니아인의 수백년간 지속된 휴머니즘에 있어 모범이 되는 공존의 문화를 잊혀지는 것을 우리는 방치하지 않습니다. 역사학자들이 해야 하는 토론을 제3자가 정치화시키며 우리나라에 대한 도발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습니다.

Kimliğimizi sadece, ruhumuzda geçmişin bıraktığı sancılar üzerine inşa etmenin yeni nesillere de büyük bir haksızlık olduğuna inanıyorum. Türkler ve Ermeniler olarak bütün engelleri birlikte aşacak olgunluğa eriştiğimizi artık ortaya koymamız gerekiyor.
우리의 정체성을 오직 우리의 영혼에서 과거에 남겨둔 고통 위에 건설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들에게도 크나큰 불의가 될 것임을 나는 믿습니다. 튀르크인과 아르메니아인으로써 모든 장애물들을 함께 넘을 정도로 성장하는 것에 도달하는 것은 이제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Sizlerin de bildiği üzere, bu hususta daima samimiyetle hareket ettik, meseleyi kendi mecrasında çözüme kavuşturmanın çabası içinde olduk. Ermenistan’la iyi komşuluk ve karşılıklı saygı temelinde ilişkilerimizi geliştirmeye hazır olduğumuzu farklı vesilelerle hep ifade ettik.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 맥락에서 우리는 항상 친밀함과 더불어 행동했으며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르메니아와 좋은 이웃관계, 그리고 상호존중을 원칙으로 우리의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우리는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 방법으로 항상 어필했습니다.

Karabağ krizinin çözümünden sonra bu çağrımızı yüksek sesle bir kez daha yeniledik. Aynı çağrıyı tekrarlıyorum. Sevinçleri paylaşmak, acılara ortak olmak, tarihten doğru dersleri çıkararak geleceği inşa etmek bizlerin elindedir. Türkiye, bu hususta üzerine düşen sorumlulukları yerine getirmeye devam edecektir.
카라바흐 사태가 해결된 이후 이 호소를 큰 소리로 다시 한번 더 전했습니다. 나는 똑같은 호소를 반복합니다. 기쁨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는 것, 역사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배우고 미래를 건설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튀르키예는 이 맥락에서 우리의 책임을 지는 것을 계속 하겠습니다.

Milletimizin ayrılmaz bir parçası olan Ermeni vatandaşlarımıza ülkemizin yürüttüğü bu mücadeleye verdikleri samimi destek için teşekkür ediyorum. Bu düşüncelerle Birinci Dünya Savaşında yitirdiğimiz Osmanlı Ermenilerini bir kez daha saygıyla anıyor, yakınlarının acılarını paylaşıyor, hepinize en kalbi selam ve muhabbetlerimi iletiyorum.
우리 민족의 분리될 수 없는 일부인 아르메니아계 국민여러분들이 우리 나라가 수행중인 이 투쟁에 기여한 지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 생각과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생명을 잃은 오스만 아르메니아인들을 다시 한번 존경을 담아 추모하며, 친척분들의 고통을 나누며, 여러분 모두에게 마음 깊이 인사를 전합니다. #

9.1. 튀르키예 내 진보파 주장

참고로 튀르키예에서도 분명히 학살이다. 오스만 제국 탓이라고 해도 과거에 학살이 벌어진 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진보파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엄청난 비난을 감안하거나 심지어 살해협박도 각오해야 하는 판국이기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유명 소설가 오르한 파묵도 "오스만 제국은 100만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나 10만이 넘는 쿠르드인들을 학살한 게 맞다. 지금 튀르키예가 오스만 제국이랑 상관없다고 부정만 하지 말고 적어도 사죄라도 하며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라고 외신 인터뷰에서 이 학살을 언급했다가 엄청난 비난과 협박에 시달렸었다. 이래서 튀르키예 역사상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조차 저런 소신발언을 했다가 튀르키예 극우 및 정부적인 협박을 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2007년 아르메니아계 튀르키예인 언론인 흐란트 딩크(Hrant Dink, 1954~2007)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대해 여럿 보도하다가 극우파인 오귄 사마스트(Ogün Samast)가 쏜 총에 살해당했다. 경악스럽게도 오귄 사마스트는 1990년생으로 당시 나이가 17살이었다. 그리고 범인인 오귄은 잡힌 다음 인터뷰하는 기자들에게 "다음은 오르한 파묵 차례다! 내가 잡혔다고 기뻐하지 마라. 파묵을 죽이려 드는 이들은 얼마든지 많다!"고 말했던 바 있다. 이러니 오르한 파묵이 과연 마음 편하게 튀르키예에서 살 수나 있을까? 이때 파묵은 딩크의 죽음을 추모하며 장례식에도 참여했기에 튀르키예 극우들에게 아르메니아랑 손잡은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결국 그는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컬럼비아 대학교 비교문학과 글쓰기 교수가 되었으며 미국에서 에르도안을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튀르키예 인권침해를 비난하고 고발하는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참고로 흐란트 딩크를 죽인 오귄 사마스트는 22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2023년 11월에 16년만에 가석방되었다.

당시 튀르키예 문학의 양심이라고 불리던 야샤르 케말(Yaşar Kemal, 1923~2015)도 오르한 파묵을 옹호하며 틀림없는 학살이라고 튀르키예 정부에 맞섰었다. 다만 케말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틀림없는 학살이고 비난받을 일이지만 튀르키예를 욕하는 강대국들이 같은 시대에 벌인 학살은 대체 왜 은폐하고 튀르키예랑 똑같이 굴면서 튀르키예만 욕하느냐 양비론적으로 비난하고 맞섰다. 하지만 케말을 두고 단순히 물귀신 언동을 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 우선 케말은 틀림없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위에 서술한 대로 튀르키예 극우들은 학살이라는 걸 되도록이며 피한다든지 수를 줄이지만, 케말은 100만 이상 학살이라고 인정하였다. 게다가 그는 쿠르드족이기 때문에 인종적으로도 차별받아 왔고 이미 국제적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은 묻혀져 있던 1950년대부터 아르메니아 유적 파괴 및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인, 다수 다른 민족 학살 은폐에 대한 걸 비판하여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고생한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악다마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대성당 철거를 사생결단으로 반대하며 국제적으로 알리다가 군부에 의해 교도소에 끌려가 정치범이라며 구타와 고문까지 당해 엄청 고생했던 터라 이 대성당을 역사적인 보물로 중요하게 여기는 아르메니아에서도 케말에 대한 평가는 무척 좋기에 그의 양비론적인 비난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 오르한 파묵도 케말과 같은 "우리가 학살자가 맞지만 우릴 욕하는 너희 강대국들은? 너희도 사죄하고 보상해야지!"라고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고 튀르키예 진보파들도 거의 이런 의견과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우리도 분명히 잘못이고 학살이라고 인정하기에 뭐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들이 말한 양비론 비난에서 튀르키예를 그리도 비난하는 강대국들은 위에 길게 서술하듯이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런 튀르키예 진보파들 주장은 튀르키예 극우처럼 자신들의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열강을 학살자로 비난하기만 하고 자신들이 전쟁 피해자라고 조작하거나 학살 규모도 엄청 줄이며 항변하는 거랑 차원이 다르다.

10. 다른 나라들의 태도

10.1. 유럽

그리스 이웃나라 튀르키예와 정치적으로 앙숙인데다 무엇보다도 비슷한 시기인 1913~1922년 오스만 전역에서 그리스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에 공감을 표하고 튀르키예를 비난하는 편이다. 이때 죽은 사람이 아르메니아 학살 못지않게 사망자가 25만(튀르키예 주장)에서 90만 명(그리스 주장)에 이른다! 이 학살에 큰 기여를 한 누레딘 이브라힘(1873~1932)은 이즈미르 화재 당시 그리스인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던 인물이며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한 알리 케말 베이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인물[36]이다. 심지어 아타튀르크는 그를 우대했고 그가 병으로 죽자 국장으로 장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와는 별개로 오스만 제국 영내에서 살던 그리스인들 또한 저 당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참여한 흑역사도 존재하는데 튀르키예인, 오스만 제국군들과 같이 트라브존 등지에서 학살에 가담한 일에 대해 그리스나 해외 그리스계 이민자들은 '응? 우리나라 사람들도 튀르키예 놈들이랑 함께 손잡고 너네 나라 사람들 죽이는데 동참했어?'라고 모른 척하거나 깜놀하고 있기에 아르메니아와 그리스 사이에서도 갈등이 없지만은 않다. 다만 학살은 주도한 국가는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고 지리적으로 실질 국경선을 맞닿고 있는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와는 달리 그리스와 아르메니아는 거리상 수백킬로나 떨어진 먼 나라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교 분쟁의 강도가 낮은 편이며, 양국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제와 관련해서 튀르키예를 함께 규탄하고 있다.[37]

마찬가지로 튀르키예와 사이가 나쁜 불가리아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제와 관련해 아르메니아를 편들고 튀르키예를 비난한다. 불가리아도 발칸 전쟁 당시 에디르네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 곳곳에서 남아 있던 5만에서 8만 정도의 불가리아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의 이이제이가 먹혔는지 여기에다 그리스를 같이 욕하기도 한다. 일부 오스만 제국 지배에 협조하던 그리스인 민병대에 불가리아인 학살을 맡겼기 때문. 그리스야 살고자 어쩔 수 없이 했고 변명하지만 불가리아는 그리스도 학살자로서 같이 욕먹을 문제가 있다고 받아친다. 하긴 오스만 제국 지배 이전부터 둘이 으르렁 싸워오고 서로 마구 죽이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가리아도 피해자만이라고 할 수 없는게 당시 불가리아군이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 남부에 거주하던 튀르크계+포마크계 무슬림 거의 3~50만을 마구 학살했기 때문이다. 덤으로 위에 상술한 이 전쟁 와중에 난민이 된 무슬림이 100만 명이 넘는데 재산을 잃고 가족이 학살당한 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아르메니아 학살에 열심히 동조했던 돌고 도는 비극이 벌어졌다. 당연히 튀르키예도 으르렁거리며 너희들이 자국에서 벌인 더한 학살은 거론 안 하냐면서 따지고 불가리아도 튀르키예와 그리스처럼 그 와중에 어쩔 수 없다고 하며 자기들이 당한 피해만 외치고 있다.(...) 물론 불가리아와 그리스 모두 오스만 제국에게 수백년 동안 식민 지배를 당하고 이들이 독립 전쟁을 벌일때 튀르키예 또한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독립군 세력들을 토벌하면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기에 오스만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국가인 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편으로 똑같이 오스만 제국의 피지배를 겪었던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 다른 동유럽 국가도 아르메니아를 지지하며 튀르키예가 아르메니아에 대한 과거사 사과를 촉구하고 있지만 이들 역시 20세기 말에 제2차 세계대전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몰도바,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권 지역과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구 유고권 국가들 내에서 대량 학살들을 자행한 가해국의 전적이 있다 보니[38] 이들 역시 너네들도 누워서 침뱉기를 하냐거나 너네 나라들 먼저 제2차 대전, 유고 내전 당시에 저지른 구소련권 내 유대인들과 보스니아인, 코소보내 알바니아인에게 대학살 자행한 것부터 뒤돌아보고 당시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먼저 사과하라며 튀르키예는 세르비아와 루마니아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며 맞받아친다. 또 튀르키예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대해 튀르키예를 비판하는 타 유럽 국가들조차도 루마니아와 세르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때 추축국 시절,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한창이던 밀로세비치 정부 시절에 저지른 만행들을 되돌아보고 피해를 입혔던 주변국들에게 먼저 사과하라며 루마니아와 세르비아를 비난하며 이들에게 학살 등 전쟁범죄 피해를 당했던 우크라이나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주변 유럽 국가들에서는 '야, 저 놈들이 저 말할 자격이 되냐?'라고 말하며 학살 가해국가였던 역사를 무시하는 주제에 튀르키예에게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의 태도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39]

그나마 루마니아는 제2차 대전 시기 추축국의 일원으로 독소전쟁에 참전할 당시 몰도바, 우크라이나 등 구소련권 국가들에서 살던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학살은 80년이나 되어갈 정도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상대적으로 잊혀졌고 제2차 대전 당시의 유대인 학살 역시 추축국의 주요국이었던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량학살의 규모가 루마니아가 저지른 학살 규모보다 워낙 커서 그렇다 치지만 세르비아가 1990년대 유고 내전 당시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자행한 대량 학살은 고작 반세기도 지내지 않은 상황이고, 피해국인 보스니아와 코소보와 세르비아한테 직접적인 피해를 겪지 않았던 여타 유럽 나라들 내부에서도 세르비아에 대한 반감과 증오의 불씨가 아직도 남아있고 그로 인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옛 유고 연방권 국가들과의 역사 갈등 역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크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알바니아 헝가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는 튀르키예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으며, 체코와 폴란드는 아르메니아를 지지하고 있다. 특히 체코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과 구 소련군에게 점령, 학살[40]을 당한 전적도 있었기에 이 학살을 국회에서 결의안으로 발의, 채택하며 아르메니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서유럽 열강들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두고 튀르키예를 비난하면 체코와 폴란드 역시 독, 영, 프 3국은 튀르키예를 비판하기 전에 식민지 제국주의로 타국들에게 가해를 입혔던 과거사들에 대해 먼저 반성하고 오라며 독일과 영국, 프랑스도 튀르키예와 함께 비판하고 있으며 아래 하술된 것처럼 독일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대해 튀르키예에게 사과를 촉구하면서, 반대로 독일 제국 시절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헤레로족 학살에 대해 자기들이 직접 안 죽이고 사자, 하이에나 같은 맹수들에게 잡아먹히거나 사막에 놔뒀는데 굷어죽었다는 내용의 망언을 하자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나미비아를 편들기도 했다.

서유럽 지역 국가들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여기에 의혹을 제기하는 등의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 행위로 보는 입장이다.

우선 영국은 학살로 규정하고 있지만 대영제국 시절 벵골 대기근 아일랜드 대기근을 방관하거나 인도 암리차르에서 인도인들을 학살하고 케냐와 이라크에서 케냐인, 쿠르드인 학살을 벌이던 일처럼 제국주의 시기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능가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벌여 놓은 일이 워낙 많은지라 튀르키예에서는 "너희들부터 사과, 보상하시지?"라고 맞서면서 대영제국 시절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나 인도, 케냐 같은 국가들에서 영국이 저지른 악행부터 먼저 반성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특히 아일랜드 대기근 역시 영국을 데꿀멍하게 만드는 주 소재다. 대기근 와중에 굶어 죽어가던 아일랜드를 영국이 지원도 외면해 그야말로 아르메니아 학살이랑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수도 있는 200만 이상이 죽어나가고 사람들이 아일랜드를 떠나게 만들어 850만 인구가 400만 이하로 줄어들게 한 인재[41]이다. 그러니 지금도 아일랜드가 이를 갈며 학살이라고 영국을 비난하고 있으며 튀르키예의 이런 지적에 동감하며 영국에게 맞섰다.[42]

프랑스는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고 튀르키예가 피해국인 아르메니아에게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할 것을 요구하지만 식민제국 시절 앙숙 영국과 마찬가지로 자기들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마다가스카르, 세네갈, 베트남, 아이티, 캐나다 퀘벡주, 미국 루이지애나주 등 옛 식민지에서 저지른 민간인 및 타민족 학살 만행은 물론 심지어 프랑스 자국 내에서 벌인 방데 학살까지 있으면서도 이것들을 인정하지 않거나 애써 정당화하려는 태도도 판박이라 튀르키예로부터 이걸 놓고 두고두고 역공당하고 있다.

벨기에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 시기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저지른 튀르키예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튀르키예는 벨기에의 지배를 받았던 콩고민주공화국 르완다, 부룬디 아프리카의 3개국에게 '야 니네 나라들 짓밟은 벨기에 새끼들 하는 짓 좀 봐라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43]은 아예 나몰라라 하는 주제에 누굴 비판하는 거야? 너희 국가들은 이거 보고 화 안 나냐?'며 약올리고 역사적으로 벨기에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콩고민주공화국과 부룬디, 르완다는 중동 지역 먼 나라에서 있었던 살육 행위 너네들 욕할 자격이 되냐며 벨기에를 비난하고 있다(...).

네덜란드 역시 학살로 보고 있지만 튀르키예는 네덜란드의 왕족과 총리, 외무장관 등 정치인들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판하거나 언급하면 예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와 수리남,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은 국가들에서 자국이 저질렀던 식민지인 학살과 착취 같은 만행들을 한번 되돌아보라며 반격을 가한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그나마 영국이나 프랑스, 벨기에 등에 비해선 식민제국 시절 인도네시아에서 저지른 식민지 독립운동 탄압과 학살 같은 만행들에 대해서는 꾸준히 사과와 피해배상은 하는 편이기 때문에 '응 우리나라도 인도네시아에게 사과, 배상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네들도 아르메니아한테 사과해야 하지 않겠냐?'며 맞받아친다. 하지만 이는 현재 인도네시아의 국력이 네덜란드보다 강한 점[44]이 있고 남아공이나 수리남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반성을 하는지라[45] 튀르키예가 인도네시아말고 다른 식민지 나라에선 하냐고 이러면 네덜란드도 입 다문다(...)

독일도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하여 튀르키예를 비난했다가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등 다른 서유럽 국가들처럼 식민제국 시절 식민지였던 나라들에서 자국이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튀르키예한테서 역반격을 당했는데 바로 20세기 초반 나미비아,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헤레로 족, 나마 족, 무분가 족, 응긴도 족 등을 비롯한 여러 아프리카 식민지 토착민들에 대한 독일군의 학살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미비아의 헤레로 족만 해도 이 당시, 전 인구 80% 이상이 노약자건 어린이건 마구잡이식 학살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독일은 이스라엘과 유태인에 대한 배상과 사죄와 정반대로 "이 당시 독일이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나미비아나 탄자니아 등지에서 저지른 식민지 토착민 학살에 대해서 이것은 독일 제국의 책임이니 현 우리나라에게는 책임질 의무가 없다. 그 당시에 죽었던 나미비아나 탄자니아 사람들 우리 군인들이 직접 안 죽이고 사막에서 굷어죽거나, 사바나 초원지대에서 길 잃고 해매다가 악어나 하이에나, 사자, 표범에게 포식당해서 죽었다."고 말하며 모른 척했기 때문에제3 제국이 한건 책임지면서 제2 제국이 한건 책임 안지는 내로남불 튀르키예로부터 어? "우리가 하던 소리 똑같이 하네?" 라고 비웃음을 신나게 들었다.

2004년 독일 경제장관이던 하이더마리 비쵸레크-조일(사회민주당)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용어를 들이대면 헤레로 족 사태는 집단학살"이라고 말하며 독일 정부의 이름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그런 사죄가 보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요슈카 피셔 당시 외무장관이 반대했다. 웃기는게 이 요슈카 피셔가 바로 녹색당 소속으로 진보적이라니 뭐니 하던 인물이고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이 아르메니아 학살 비난하던 주제에 본인 자신은 이렇게 나미비아한테 배상금 주면 안된다라는 말이나 하던 인물이었고 막상 지들 나라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벌인 학살에 보상금 여부로 반대했던 거였다. 당연하지만 이 소리에 대해 독일 제국 당시 독일의 피지배국이었던 나미비아, 탄자니아, 카메룬, 토고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는 분노했고, 이 여파로 나미비아나 탄자니아 등 과거 독일에게 식민지배를 겪었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선정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나미비아 같은 아프리카 국가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 당시 자국의 주류 민족인 유대인들이 대량학살당한 최대 피해자인 이스라엘과 똑같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당했던 폴란드와 체코 등 독일과 이웃한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이 발언에 대해 무척 기분나빠하며 나미비아의 입장을 옹호했는데 '유대인들도 독일 국방군 슈츠슈타펠이 직접 안 죽이고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알아서 죽었냐?', '아~ 그럼 제2차 대전 당시 체코 리디체 마을 학살과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 때 사망한 체코 국민과 폴란드 국민들도 독일군들이 안 죽였겠구나?', '너네 나라 역대 총리와 대통령들이 우리나라 방문하면서 했던 나치 만행 사과 성명들은 다 우리들을 속이기 위한 권모술수였구나' 실제로 이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외치는 독일 극단 극우들이 하던 소리다라고 말하며 독일 정치인들의 헤레로족 학살에 대한 망언을 비난하는 등 이러한 독일의 이중잣대적 행태가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 독일은 2010년대와 2020년대에 와서는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자국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정부요인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긴 하다.

이탈리아도 2000년과 2019년에 국회에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인정하면서 튀르키예에게 아르메니아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규탄 결의안을 두 번씩이나 발의하기도 했지만 이탈리아 역시 전간기 말기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비아와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등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피해국가인 이들 국가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튀르키예에게 사과 요구를 할 처지가 되냐며 비난을 받고 있다. 다만 그리스와 리비아는 이탈리아에게 당해온 것과는 별개로 오스만 제국 시절 튀르키예에게 당해온 이력도 있었기 때문에 이 국가들 역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정부 차원에서 공식 인정하고 있으며 이탈리아나 튀르키예나 두 나라 모두 학살 가해국이라며 둘을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튀르키예의 유럽에 대한 반격은 확실히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아주 교과서적인 피장파장의 오류에 불과하며 특히 당시 튀르키에가 핑계를 댄 사안들에 대해 유럽 국가들이 튀르키에와는 달리 과오에 대해 피해보상 및 사과나 유감 표명이라도 하거나 최소한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튀르키예의 반응은 그야말로 후진적인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

게다가 튀르키예는 덴마크에 1783년 라카기가르 화산이 폭발하면서 가축의 80%가 죽고 이 여파로 기근이 다가오면서 아이슬란드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던 일을 가지고 당시 아이슬란드를 지배하던 덴마크를 비난하다가 오히려 역관광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46] 튀르키예가 이걸 거론한 게 튀르키예를 비난하는 영국에 아일랜드 대기근을 들먹여 엿먹인 적이 있었기에 비슷하게 들먹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와 달리 덴마크는 본토까지 피해를 입었기에 이건 자폭이었다.[47]

러시아도 학살로 인정하지만 '튀르키에에서 러시아는 뭐 잘났냐? 19세기에 무고한 무슬림 체르케스인들을 집단학살하여 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건너와 루마니아에서 증오로 기독교인을 학살했고 부메랑처럼 돌고 돌아 발칸 지역 포마크인들이 이 아르메니아 학살에 협조했으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갈등과 양 측 학살 원인도 만들지 않았느냐?' 라는 비아냥에 대하여 부정한다. 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는 애증어린 상대이고 온갖 학살에도 기여한 원인을 만들었기에 반러 감정도 가득하지만, 지리적 요건으로 친러정책을 취해야 하는 현실이다.

일단 현대에 와서 세계적으로 대학살이었다고 인정은 하지만 튀르키예의 끈질긴 피장파장식 물귀신 작전과 같이 아르메니아가 소련에 강제 병합된 후 70년이 넘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냉전 시대에 튀르키예를 더 중요하게 본 미국이 이를 덮어버렸던 역사가 있다. 이러다보니 냉전 시대에는 듣보잡으로 묻혔다. 오죽하면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하면서 '바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지금 거론하는 나라가 얼마나 있느냐? 유대인 및 비독일인과 자신의 사상을 따르지 않은 독일인까지 학살하는 것을 이처럼 얼마든지 문제 없이 덮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을 정도로 당시에도 묻혔음을 알 수 있다.

10.2. 아르메니아의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 같은 경우에는 튀르키예 일각에서처럼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아르메니아와 서구의 역사 왜곡으로 치부하며 부인한다.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랑 같은 투르크족인데다가 아르차흐(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분쟁으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을 치르기까지도 했으며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아르메니아인들이 저지른 호잘르 대학살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대거 희생당한 슬픈 역사 때문에 더더욱 아르메니아인들을 동정하기 힘들다. "그런 슬픈 역사(아르메니아인 대학살)를 가진 주제에 똑같은 짓(호잘르 대학살)[48]을 저지르냐?"는 비판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제르바이잔은 이 사건들을 심각한 학살로 보고 아르메니아를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로 만들었다. 아르메니아에선 숨가이트 학살로 아제르바이잔 인들도 아르메니아인 학살했다고 맞붙지만 여기서 죽은 아르메니아인들은 고작 200명 정도...이마저도 아르메니아 주장대로 최대치가 이 정도라서 3배로 복수한 셈이며 아제르바이잔에선 당시 1000명 이상이 호잘르에서 학살당했다는 최대치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 호잘르 학살은 변명할 거 없이 아르메니아군들이 호찰르 마을로 아침에 쳐들어와 총으로 아이건 여자건 마구 학살한 학살 사건이라 당시에도 아르메니아 지원하던 서방도 학살이라고 인정한 사건이기에....

또한 상술하듯이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아제르바이잔에 자리잡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 보복으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수만 이상이 학살되었으며 이 학살을 명령한 코카서스의 레닌이라는 스테판 샤후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르메니아인이다.[49] 이처럼 아르메니아에서 벌인 학살은 호찰르 학살 말고도 단지 겨우 몇백명 죽었네라며 아제르바이잔이 엄살 부린다고 할 수준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이 문제는 아랍인 학살보다 더할 정도로 묻혔고 아르메니아도 여기서 튀르키예처럼 부정하거나 입다물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1998년 3월 아제르바이잔인 학살 사건 80주기를 맞이하여 학살 추모 기념일을 지정해 국내외에 알리려 하였으나 여전히 외부의 인식은 저조하다. 이 항목의 제목만 봐도 아르메니아인만 학살당한 것처럼 되어 있으니... 당시 학살당한 아시리아, 아랍인 무슬림들, 쿠르드인들 외 수많은 사람들 숫자 합치면 아르메니아인 학살 피해자 150만 명 비슷한 수준이었고 하물며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을 벌인 점을 미국도 유럽도 죽어라 외면하는 사실을 봐도. 이러니, 튀르키예랑 튀르키예를 비호하는 중국은 더 좋아라 비웃고 저런 물타기를 하는 현실이다.

아르메니아로선 당시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은 소련과 같이 저지른 일이고 학살을 명령한 스테판 샤후먄도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보단 캅카스의 레닌이라는 별명처럼 악랄한 공산주의자였기에 이념으로 벌인 일이라고 항변하지만 샤후먄은 그래도, 아제르바이잔 무슬림 및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르메니아 동족을 종교를 빌미로 학살하지 않았다. 게다가 예레반에 떡하니 동상과 추모비가 잘 관리되고 있다는 점으로 아르메니아 측이 샤후먄을 영웅시까지 아니라도 학살자로 비난한 적도 없는 아르메니아가 그를 기리고 있다는 점으로 학살자에 대한 옹호로 볼 것은 있다.[50]

결국 이 두 나라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1994년 호찰르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 학살은 아니라도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수천여명의 아르메니아군 포로들이 행방불명되었고 아제르바이잔군에게 보복학살당했으리라 보지만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제에서 아르메니아를 두둔하는 나라들[51]도 입을 다물었는데 이 전쟁 와중에 아르메니아군 또한 아제르바이잔군 포로를 학살해 그 포로의 인육을 돼지 먹이로 던져 버리는 영상이 공개되어 둘 다 서로 피장파장 짓을 벌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르메니아가 이들 행불 포로들에 대한 조사를 도와달라고 하소연해도 미국도 다른 아르메니아 두둔하던 유럽 나라들도 비난하는 정도일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사실 적극적으로 돕고 싶어도 떡하니 러시아군과 아제르바이잔군이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쫙 깔려 주둔한 상황이라 돕지도 못하고 아르메니아가 벌인 학살 여부도 당당히 영상으로 공개하던 것이라 조작이라 할 수도 없다. 2021년 중순을 넘기며 1년이 다 되어가도 이들 아르메니아군들이 어찌되었는지 전혀 알려진 게 없다. 그러다가 2021년 중순에야 아르메니아군 포로 일부가 석방되어 아르메니아로 돌아왔지만 2022년 1~2월에도 서로 국경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였다. 8월 들어서 아예 아제르바이잔군이 나고르노카라바흐 곳곳 아르메니아 지역에 폭격까지 벌이며 피해가 커지고 있음에도 국제적으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에 묻혀져 아르메니아 홀로 맞서게 되었다.

2022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분쟁까지 터지며 두 나라의 갈등은 더더욱 깊어졌다. 결국, 아제르바이잔은 2023년 아르차흐 분쟁을 통해 나고르노카라바흐도 모조리 되찾았고 아르메니아는 29년전 2년 반이 넘는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가며 얻은 땅을 모조리 잃으면서 두 나라 사이는 더더욱 최악이 되었다.

10.2.1. 러시아&영국&미국 학계

러시아 역사가들은 아제르바이잔 학살은 1998년 아제르바이잔 전 대통령 헤이다르 알리예프 가 아르메니아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피해의식 부각을 위해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을 부각시켰다고 비판한다.

즉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정치분쟁으로 인한 여러 학살을 한 데 묶어서 아제르바이잔 학살로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러시아 역사가 빅토르 슈네렐만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 학살은 트랜스 코카서스의 역사를 재작성하기 위한 아제르바이잔의 국가프로그램의 일부라며 비판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Критика концепции(개념의 비판) 항목 참조.

이러한 주장은 굳이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의 서구권 언론인 및 역사가들에게도 나오는 주장이다. 영국의 언론인 토마스 드 발[52]은 2003년 저서 블랙가든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국제사회가 20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이 견뎌야 하는 고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완전히 정당화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80년대 말 20만의 아제르인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추방된 것과 1940년대 5만 명의 아제르인들이 아르메니아에서 추방된 것, 1918~1920년 사이의 피비린내나는 분쟁에서 수천명의 아제르인들이 아르메니아에서 추방된 여러 이질적인 사건들을 한데 묶어서 1998년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바쿠의 3월 사건이 있던 3월 31일로 통합해 아제르바이잔 대량학살의 날로 지정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항해 아제르바이잔에 왜 이런 기념일이 있으면 안되는가? 하는 관점에 시작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역사가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에 따르면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 하에서 아제리 대학살이 정권 차원에서 개발되었다고 지적한다. 아제르바이잔 지도부는 아제르바이잔 역사의 비극적인 시기를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라는 서양식 관점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엄청난 감정적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자국민의 고통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사실로, 고통 받는 아르메니아의 "이미지"에 맞서야 한다고 가정한다.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목표가 민족 간의 적대감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정의를 지키는 것이며, 3 월 31일은 19 세기 초 영토 분쟁의 희생자가 된 약 200만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무슬림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이클 스미스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유사한 폭력의 사실을 무시한다.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주장한 대로 19세기 초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착한 예레반 일대의 땅이 원래부터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고유영토였다는 논리는 아제르바이잔에서만 인정되는 논리로 외국 역사학자들에게는 국가적 차원의 역사 왜곡으로 받아들여진다.[53] 헤이다르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통계가 여러부분에서 거짓됐다고 주장됐지만 이런 주장은 국제학계에서 반박 받았다. 또 아리프 유누소프 아제르바이잔 평화연구소 소장 겸 역사학자는 소련 시대 이후 아제르바이잔 학교 교과서에서 1990년대 이전에는 아무도 3월 사건들을 "학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개정된 교과서에서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구소련의 전체정책이 집단 학살로 묘사됐다고 지적했다. 즉 아르메니아 도적떼 뒤에 러시아가 항상 있었고, 그 후 레닌과 스탈린은 유혈사태를 피하려고 했던 순진하고 인도적인 아제리를 공격했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54] 이 학살이라는 용어를 정당화하기 위해 교과서의 저자들은 20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이 용어를 귀속시켰다.

실제로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1978년 스테판 샤후먄을 칭송하고 바쿠에서의 3월 사건을 볼셰비키가 취한 단호하고 확고한 조치 때문에 청산된 무사바트(평등당)들이 저지른 반소련 반란으로 평가한적이 있다. 또 아제르 학살을 홀로코스트와 연관시켜 유대인 대학살과 연계해 이스라엘과의 동맹을 추구해서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맞서 싸울려는 정치-외교적 도구로 이용할려고 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0.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우리는 아르메니아 문제의 파급력을 축소하고 폄하하기 위해 만전의 노력을 가하고 있다... 우리의 첫번째 목적은 야드바셈[55]이 본 학회에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다루는걸 무력화하는 것이다. 다른 (제노사이드 피해자)민족을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동일 선상에 놓는건 세계적으로 해당 기관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킬 것이기에 이는 충분히 달성가능한 목적이라 본다. 또한 아르메니아 문제를 다루는 학회에서 야드바셈이 불참할 경우 세상 어떤 공식 정부 기관도 본 학회를 지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에 중요하고도 의미가 큰 위업이 될것이다.
이스라엘 외무부의 1982년 이스라엘에서 계획되었던 홀로코스트와 아르메니아 대학살 공동 연구, 학회 훼방시도 관련 내부문서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56] 그리고 오늘날의 정치외교적인 이유로 이스라엘은 자신들도 홀로코스트 피해자였음에도 불구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심지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여러 경제적, 군사적 우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아르메니아가 숙적으로 여기는 아제르바이잔과 나날이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016년에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기도 하였으며,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해 상당히 좋은 관계임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아제르바이잔의 공군기지를 임대해 쓰고 있다. 이는 이슬람 나라인 튀르키예, 이집트, 요르단, 과거 팔라비 왕조 시절 이란조차도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고(단 모로코같은 경우는 아랍동맹의 압력으로 이스라엘과 국교를 끊었으나 비외교적으로 친하게 지낸다. 모로코는 독립하기전부터 이스라엘을 인정하던 유일한 이슬람 나라이다.) 튀르키예군처럼 이스라엘과 같이 훈련도 하는 경우도 있을지언정 자국 군기지를 이스라엘에게 빌려주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유일무이하게 군기지를 이스라엘에게 빌려줄 정도이다. 이러다보니 미국도 아제르바이잔을 더 신경쓰게 되었다. 게다가 유사시 아제르바이잔에 배치된 이스라엘 무인기가 이란 작전에 투입될 거라는 보도가 국내에서 나오기도 했다.

사실 이스라엘로서도 견제하는 이란과 친하게 지내는 아르메니아가 껄끄러운 터라 이렇게 직접적으로 군사적 협력이 강화된 아제르바이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의 귀중한 석유 에너지를 엄청 수출하는 나라이다. 이스라엘 군의 연료 절반 가까이가 아제르바이잔에서 나오는 석유다. 즉 미국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연료를 책임지는 막강한 우방 수준이 되어버린 상황에 과거에 당한 학살 동조만 외치며 현재 우방을 적대시할 수 없기에 친아제르바이잔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아제르바이잔으로서도 이스라엘과 깊은 관계인 미국과 우호도 있기에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한다. 덕분에 1990년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 당시 미국이 아르메니아를 편들어주던 일은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아르메니아계 미국 정치인들도 곤란해하고 있는 현실이다. 서술하듯이 아르메니아는 친러 국가에 친이란 국가가 되면서 이란산 석유로 군대가 돌아가는 와중이니 이란에 대해 옹호하고,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에서도 이란을 두둔하고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일쑤다. 게다가 아르메니아는 팔레스타인이 핍박받는 역사가 자신들의 과거랑 비슷하다고 동병상련을 느끼는 이들도 많고, 친튀르키예국가인 이스라엘을 학살자로서 비난하는 이들도 많다보니 이스라엘로서도 아르메니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아제르바이잔 군 훈련을 돕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국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아제르바이잔을 강력하게 지원해 아르메니아 패배에 기여했다. 승리가 확신된 2020년 11월 10일, 바쿠 시 곳곳에 혈맹급인 튀르키예 월성기가 많이 휘날렸지만 곳곳에서 이스라엘 국기도 같이 휘날려 아제르바이잔에서 적어도 이스라엘에 대한 인식이 크게 좋아짐을 입증했다. 더불어, 더더욱 이스라엘은 튀르키예나 아제르바이잔 편들어주고 아르메니아를 더 외면하게 되었는데 이 전쟁 와중에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이스라엘 무기 수출 금지를 촉구하라고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런 정치역학적 관계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선 처맞고 다닌게 뭐가 그리 대단한 줄세우고 경쟁할 일인지 희한한 발상이나, 민족 감정적 면에서도 유대인, 특히 이스라엘 시오니스트들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담론 자체를 불편해 한다. 전 세계 역사상 나치 독일 치하 유대인들이 겪은 홀로코스트는 다른 역사상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만큼 독보적인 사건이니 다른 역사적 학살이나 제노사이드는 비교한다고 들이대지도 말아야한다는 주장인 홀로코스트 독보론 (Singularity of Holocaust)은 현대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자기 인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애초에 그 홀로코스트 과정에서도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비유대인 슬라브인, 집시족, 정치범, 동성애자 같은 다른 집단들도 희생당했다는 사실도 불편해한다.

실제로 2000년대에 루마니아 정치인이 나치에 의해 이뤄진 <집시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한바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반발했다. 그래서, 루마니아 정계나 여론도 욱해서 홀로코스트하는 이름을 마치 유태인만 당했다는 게 오만한 망발이라고 불쾌하게 반론했다. 외부 학계에선 홀로코스트 독보론은 그 규모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같은 산업적 학살의 탄생이란 면에서는 부분적으로, 학술적인 면에선 인정하지만,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건 전혀 공감하지 않으나 노먼 핑켈스타인[57] 같은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반/비시오니스트 유대인 지식인들 본인들이 입증했듯이 어쨋든 이런 홀로코스트 과거팔이는 현대 이스라엘의 굉장히 중요한 국가 이념 중 하나이고, 여기에 자꾸 본인들의 피해자적 성격 가지고 '맞먹으려고' 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주장을 굉장히 불편하게 느낀다.

게다가 이런 역사적 문제와 대학살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이 난민으로 떠돌 시절 현대 팔레스타인인이 된 레반트 무슬림 아랍인들에게 받은 도움도 있거니와 냉전기 PLO 같은 팔레스타인 독립운동 단체들과 ASALA 같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반군/게릴라/테러리스트들은 지속적으로 교류해왔고, 이 와중 이런저런 당시 세계를 휩쓸던 제3세계 좌익 민족주의 담론과 겹쳐 중동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과도 동병상련적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선 더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나고자라 편한 삶 버리고 중동에서 혁명가 게릴라 인생 살다가 90년대 소련 해체 이후 그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의용군 이끌다 전사한 유명한 국제 혁명가 몬티 멜코니안[58]]만 하더라도 레바논 시절 팔레스타인 페다인과 깊게 교류하면서 팔레스타인과 아르메니아는 하나의 투쟁이니, 이런식의 발언을 많이 했으며 여러모로 아르메니아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 상호 공감과 연대에 적극적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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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크 자라에서 서부 아르메니아까지, 제노사이드 No, 식민주의 No, 인종청소 No!
각각 베이루트, 로스엔젤레스에서 있었던 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 연대 시위 모습.

이래서, 팔레스타인은 현재 아르메니아 정부가 팔레스타인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점, 팔레스타인의 일부 튀르키예 지지파 및 일부 아제르바이잔 지지파 외에는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강력하게 편들었고 팔레스타인 무장세력도 아르메니아를 돕고자 나서려고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미국 내 아르메니아계 정치인들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이스라엘과 대적하기로도 유명하며 유태인계 정치인들이랑 갈등도 많이 빚는다.

10.4. 중동권

반대로 미국, 이스라엘과 사이가 나쁘다고 봐야 할 이란이나 시리아는 아르메니아와 매우 우호적이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에 석유를 수출한다면 이란이 주로 아르메니아에 석유를 많이 수출하고 있다. 역사적, 경제적으로도 이란과 아르메니아가 우호적이다보니 이란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강력하게 따져들며 튀르키예를 비난한다. 그 이란에서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비가 만들어졌다. 정작 이란도 자국 영토에서 근세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 과정에서 떼죽음을 당하게 만들거나 근대 노예 인신매매 희생자로 만든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당시 이란, 카자르 왕조는 멸망해가는 분위기로 오스만 제국 저리가라 막장이었다. 1차대전 당시 중립국임에도 영국과 러시아군,오스만군이 마음대로 들어와 신나게 이란 내에서 전투를 벌여 무고한 이란인들이 죽어나갈 판국이었다. 이렇게 졸지에 중립국이라는 거 무시당하고 격전지가 되어버렸고 왕가는 몰락하여 아무 소리도 못하고 이래서, 이란 곳곳에서 독립을 하려는 각 민족들이 내전도 벌어지고 엉망이라서 치안은 당연히 제대로 돌아갈리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란 내에서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오늘날 이란과 아르메니아 모두 외교적으로 고립된 나라이자 이웃나라 중 몇 안되는 우방국이라는 절박한 이유로 어물쩍 묻혀가는 추세이다. 그리고 애초에 역사적 거리 자체가 사파비 왕조의 아르메니아 학살은 전근대 기술적 한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근현대 제노사이드 만큼 조직적일수 없는 16-17세기의 일이고, 본 문맥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20세기 사건이다. 객관적인 피해는 오히려 전자가 더 크다고도 볼수 있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게 몽골의 고려 침략은 먼 과거라 몽골인들에 대한 감정은 무덤덤한 반면 반일 감정은 가까운 과거의 여전히 생생한 감정인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리고 그리스인들과 그리스군이 오스만 내에서 오스만인이랑 아르메니아인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일이 있었음에도, 아르메니아는 이걸 입다물고 넘어가는데 이란에게 이걸 뭐라고 하면 이란에서 그리스는 더 죽였는데 왜 거긴 알아서 넘어가고 우리에게만 뭐라고 하느냐? 반발거리만 만들뿐이다. 그리고 오스만 내 벌어진 학살 규모가 워낙 컸으니.... 더불어 이런 이란 내부에서 벌어진 학살이나 약탈은 똑같이 쿠르드인이라든지 다른 소수민족이나 소수 종교인들에게 벌어졌다. 심지어, 쿠르드인들은 2000년대에도 노예로 팔려나간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판국. 2000년 이란 영화( 칸 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작)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서도 쿠르드인 아이가 부모를 여의고 홀로 이라크 국경으로 당나귀를 팔러가는데 밀수단과 험한 산길을 간다. 하지만 산길 곳곳에 총으로 무장한 도적이 있어 돈도 빼앗고 사람도 잡아가 노예로 팔아치운다는 이야기를 하며 100년 가까이 이란에서 쿠르드인을 노예로 팔잖아? 라는 말이 나온게 영화상 허구로 나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리아도 이 당시 튀르키예 지배를 받던 지역에서 학살을 당한 시리아 정교회인들이 많았기에 동병상련 피해자로서 아르메니아와 이 학살을 서로 추모하고 서로 추모비에 추모 성당까지 세웠다. 즉 시리아에 아르메니아인 학살자 추모 성당을, 아르메니아에 시리아인 학살자 추모 성당이 있다. 하지만 데이르에조르에 있던 이 추모 성당이 2014년 ISIL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시리아와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 시기 튀르키예의 지배를 겪었고, 튀르키예와 역사적으로 앙금이 있는 이라크, 요르단, 쿠웨이트, 레바논 아랍 이슬람 국가들도[59] 이 학살도 인정하고 튀르키예를 비난한다.[60] 상술하듯이 이들은 튀르키예와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전혀 좋게 여기지 않는다.[61] 굴욕으로 여기고 심지어 기독교도 놈들이 오스만 놈들보다야 더 낫다라고 이를 벅벅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서 아랍인들은 그리스 및 기독교계보다는 더 밑바닥인 3류 백성으로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아랍인을 더 밑으로 보고 재상같은 최고위직을 비롯하여 정계 요직이나 멀리 지배지 총독을 튀르크인 아니면 충성을 인정받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리스인이라든지 꼭 개종하지 않았다고 해도 충성을 인정받은 각 지역 기독교인 위주로 임명해 다스렸고 아랍인은 등용한 게 훨씬 적었다. 심지어 일부 지역이나 요직에서는 유태인보다도 더 아래로 대우받거나 등용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래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등 협상국 열강들이 우리나라를 지지해주면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시켜준다는 제안을 하자 이들은 군말없이 영국과 프랑스와 손잡고 오스만에 저항했다.[62] 지금까지도 이 앙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수 있는 게 2000년대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이 이라크내 저항 세력을 손쉽게 진압하기 위해 중동 지역의 역내 강국인 튀르키예의 이라크 전 참전을 고려, 추진하자 당시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수립된 이라크 친미 정부 수반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결사반대했다. 당시 이라크 정부 측에서는 '만약에 오스만놈들의 후예인 튀르키예놈들이 또 이라크 땅으로 들어온다면 우린 반미 저항세력과 손잡아서라도 튀르키예놈들부터 총탄 갈겨 쏴 죽이겠다! 그놈들은 반드시 이라크를 욕심낼 게 뻔하니까! 이 점에 대해선 반미 저항 세력들조차도 군말없이 우리와 협조할 거요!'라고 격렬하게 반발하고 튀르키예와 마찬가지로 이라크와 역사적으로 감정 좋을 일이 없는 앙숙이었던 쿠웨이트 요르단, 시리아 등 주변 아랍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에게 당해온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튀르키예군이 이라크 전쟁에 개입하면 이라크의 안정화는 커녕 분쟁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면서 결국 미국도 튀르키예의 이라크 전 참전을 철회했을 정도였다.

또 여기에 이라크 국민들도 반대했는데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지하는 이라크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사담 후세인 정권의 폭정으로 피해를 입어서 미군을 환영하던 이라크인들조차 튀르키예의 참전만큼은 강하게 반대했다. 이처럼 세속적이고 이슬람 극단적이고 간에 이라크인들에게 오스만 지배에 대하여 지옥 같은 굴욕의 시절이라고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할 정도이다. 오죽하면, 같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그리스와 이라크는 사이가 좋은 편이다. 일례로 이라크의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봐도 그리스 독립전쟁에 대해 억압받고 학살되었던 그리스인들의 정당한 투쟁이자 자랑스러운 봉기로 이라크에게도 동질감이 가는 역사, 그리고 악랄한 오스만 제국의 학살과 약탈이 두 나라에서 벌어졌다라고 서술되었으며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에게해 영유권 분쟁에서도 이라크, 요르단 등 이들 아랍 지역 국가들은 에게해와 산토리니, 델로스, 미코노스, 로도스, 레스보스 등 에게해 제도의 섬들은 그리스 영토, 바다가 맞다며 너네들 갖고있는 영토나 잘 지키라며 그리스의 입장을 편 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위에 먼저 서술했듯이 아르메니아인들이 집중 학살당하던 같은 시절 아르메니아인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 된 현대 이라크-튀르키예-시리아 일대의 아랍 부족들도 집중 학살, 혹은 강제 이주 당한 전적이 있다. 상술되어 있지만 당시 오스만 정국을 주도하던 군부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과 전혀 거리가 먼 뒤틀린 의미에서 근대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집중 타겟이긴 했지만 종교와 상관 없이 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 된 집단이면 쿠르드족, 아랍인 가리지 않고 다 조져버렸기 때문이다. 25만~75만 정도 학살되었다는 아시리아인, 4만(튀르키예 주장)~최대 50만 정도 학살되었다는 무슬림 아랍인, 5만~20만 정도로 추정되는 다른 무슬림( 알레비) 및 쿠르드인들도 이 당시 같이 학살당했다. 그럼에도 위에 서술한 대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엄청 길게, 상세하게 사진 자료랑 같이 기재하고 시리아 기독교인 학살도 크게 다루는 것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이 당시 저지른 코루흐 강 계곡 학살 사건을 비롯하여 아랍인 무슬림들도 분명히 학살당했거늘,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짧게 다루는(글로만 2줄 정도) 수준이다.

그러니 이런 동병상련을 겪은 아랍국가들도 당연히 튀르키예를 욕하고 학살이라며 아르메니아에 사죄나 배상을 해야한다고 공감을 하면서도 이 학살을 두고 밑에 서술한 추모비라든지 미국이나 유럽이 나서는 걸 두고 "아르메니아가 기독교 다수 나라라 더더욱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일 튀르키예가 기독교 국가이고 아르메니아가 이슬람 국가였다면 미국도 유럽도 지금처럼 끈질기게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튀르키예 편을 들어주고 묻어버렸을 것이다." 라며 비난하고 있다 . 이라크나 시리아에서도 "우리도 숫자가 적다고 해도 아르메니아나 시리아 기독교인들이랑 같이 학살당한 피해자들인데? 우리는 나몰라라 하면서 뭐가 어째?" 라고 미국 상원결의안에 대해서도 불쾌하게 대응하는데 어쨌든 나머지 이슬람권에서는 차라리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으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많이 설치면 설쳤지, 종교적으로 튀르키예 편 들어주고 그딴거 없다. 오히려 이란 측에서는 자국 내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역사도 튀르키예 못지 않게 깊고, 튀르키예와는 반대로 딱히 아르메니아와 원수 질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대학살 당시 난민들을 받아주고, 관련 아르메니아 역사학자들의 편의를 봐주는 등 지역 열강 중에 그나마 아르메니아인들을 잘 돌봐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 레바논 등을 비롯한 아랍권에서는 반 튀르키예 감정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학계나 정치외교 차원에서 대학살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랍권 대중 내 만연한 이슬람주의 반기독교 감정 때문에 해당 학살에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말 이전에는 아랍인보다 아르메니아인들을 더 우대했고,(다시 말해서 아랍인들은 같은 무슬림인 경우에도 더 무시당하고 차별당했으며)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일어나던 오스만 제국 말엽에는 아랍인들이 기독교인 무슬림 막론하고 학살당했기 때문에 굳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열심히 가르치고 국민적으로 같이 추모해 줄 이유가 부족하다.상술하듯이 서구적 위키피디어만 봐도 아르메니아 학살은 엄청 세세하게 온갖 정보가 올라와있는데, 같이 학살당한 아랍인들에 대한 영어나 서구 사이트들 기록이나 자료는 턱없이 적으니 아랍 쪽 사람들에게 역시 기독교 쪽만 이렇게 학살당했다고 신경쓴다라고 거부감을 보일테니 말이다.

10.5. 미국

미국으로서도 아르메니아가 독립하고 나서 지리적으로 러시아 입김에서 나오지 못한 상황이라 강력한 친러국가가 되었으니 아르메니아 편들어주기가 껄끄럽다. 90년대 초반에 아르메니아계 정계 미국인 의원들 주도로 미국은 아르메니아를 지지했다가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치룬 아제르바이잔 반미 감정이 강해져 2대 대통령이자 친미 및 서구정책을 취하던 애뷜패즈 엘치배이 정권이 여론 비난 속에 쿠데타까지 당해 붕괴되었다. 정권을 차지한 헤이대르 앨리예프는 강력한 반미 정책을 취하고 친러 정책을 굳혀 지금까지도 대를 이어 정권을 장악 중이다. 다만 아제르바이잔은 당시 러시아도 아르메니아를 편들어준 것 때문에 친러정책은 이후 수그러들면서 미국이나 서구에 중립적으로 대하고 있다. 덤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오랫동안 쓰던 러시아어를 배제하고 아제르바이잔어나 튀르키예어를 더 집중으로 가르치며 영어도 비중을 높히며 러시아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이러니 미국으로서도 알아서 러시아를 배제하고 조금씩 미국에게 우호를 보이려는 아제르바이잔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조지아 남오세티야 전쟁을 당할 당시, 아르메니아 정계는 입다물고 외면했지만(다만 여론에선 러시아를 욕하고 비난했으며 일부 시위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 정치인들도 러시아를 비난했었다.)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비난했던 걸 봐도 아제르바이잔도 이젠 친러 정책만 취하지 않는다.

하여튼 아르메니아에게 1992년 102억 달러나 되는 돈을 지원한 미국은 덕분에 아제르바이잔을 한동안 반미 친러국가로 만들었고 돈을 들이고 외교적으로 지지해주던 아르메니아는 정작 친러국가이기에 미국으로서는 난감한 결과를 만들었다. 이렇게 여러 외교 이득적으로 따져야 하는 점도 있기에 미국도 결의안을 지지하면서도 튀르키예가 주장하는 동시대 기독교 열강이 벌인 학살에 대한 결의안도 같이 나서봐라는 비난에 막히고 있다. 그 예로 2016년에 벌어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국경 분쟁 때에도 아르메니아 편들던 20여년전과 달리 중립을 지켰지만 외교적으로 아르메니아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이젠 거꾸로 아르메니아가 친러시아 국가로 유러시아 연합에 가입하고 아제르바이잔이 친미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술하던 대로 이스라엘이 아제르바이잔과 군사적 우방이 된 상황도 있으니 미국으로선 나날이 아제르바이잔 편들어주던 정계 입김(공화당 중심)이 커지고 있고 반대로 아르메니아는 아오안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보다 아제르바이잔이 독재정부에 중국, 벨라루스, 북한과 밀접하다는게 도마 위에 올라버렸다.

일단 미국은 상원 결의안까지 나섰지만 그렇다고 위에 서술한 유럽인권재판소처럼 논란을 빚으며 국가적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물론 학살은 맞지만 왜 아르메니아 대학살만 그렇게 상원결의안으로 나서고 있느냐?" 는 반론도 많다. 이는 튀르키예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 미국도, 다른 유럽 열강도, 소련도 식민지에서 저지른 무수한 학살이 많음에도 오로지 아르메니아 학살만 결의안으로 나선다면야 다른 학살은?" 서구권이 나서서 다른 서구권이 저지른 학살을 덮어버리곤 결의안을 나선다고 반발만 거세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럽인권재판소나 미국 상원결의안도 튀르키예만이 저지른 학살이 아닌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한 결의안이라고 이야기하며 당시 저지른 학살에 대한 부정을 금지할 것이라고 중립적인(?) 태도로 내세우곤 한다.

하지만 그래서 오로지 아르메니아인들만 죽었나? 비난이나 반발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위에 상술한 대로 벨기에나 무수한 유럽 및 미국이 저지른 학살 피해자에 대한 것이 있고 해당 피해 국가들도 "맞아, 튀르키예가 학살을 저지르긴 했다!" 라고 비난하면서도 "그런데 튀르키예 욕하는 너희들은 같은 시대에 우리에게 뭐 했냐? 그런 학살에 대해 어디 미국 상원 결의안 통과해 봐라!" 라고 튀르키예랑 같이 이를 갈며 분노하고 이런 비난에 해당 국가들은 튀르키예처럼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내로남불적 추태를 똑같이 저지르고 있다.

이러니 미국도 안하무인으로 결의안 통과한다고 하면 다른 나라들에게 어느 나라 학살만 봐주고 결의안 통과하고 너희들이나 다른 나라가 저지른 건 넘어가고 모른 척하냐는 비난에 시달리고 외교나 여러 모로 골치 아파질 문제를 무시할 수가 없다. 당장 중국 네티즌만 해도 미국의 이 결의안을 두고 "미국놈들이 아르메니아만 오냐오냐하곤 어디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결의안을 두는지 봐라!" 라고 비난할 정도이다. 이것 때문에 2020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중국 정부는 아제르바이잔을 옹호하다시피 해버렸다.

결정적으로 미국은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튀르키예를 버릴 수도 없고, 등질 수도 없다. 튀르키예가 정말로 빡돌아서 러시아에게 이 해협에 해군함을 마음껏 오고가게 하도록 하면 크나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날이 반미적으로 친러 행보를 보이는 에르도안에 짜증난 미국 상원은 2019년 12월 13일에 난데없이 미국 상원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튀르키예는 강력반발하고 어디 제대로 러시아 쪽으로 붙어본다고 으르렁거리고 있다.[63]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이 아르메니아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간주한다면 우리도 북미 원주민에 대한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는데,[64] 미국 측은 그나마 튀르키예에 비해선 원주민 학살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편이기에 "어... 맞는 말 아님?"이라며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전부 사실이라 0의 데미지를 입었다 하지만 필리핀 학살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하지만 위에 서술되었듯이 정작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동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튀르키예와 관계를 고려해 수차례 결의안 통과를 저지해왔다. 트럼프가 그동안 에르도안에 대해 비난하고 경제제재를 한다 뭐다 이런 말 하면서도 정작 상원결의안을 안 좋게 본 게 이게 결의안이 된다면 다른 나라들이 근현대 겪은 학살사건에 대한 결의안도 똑같이 따라오기 때문이었다고 분석되고 있다. 정작 통과되었지만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현실을 봐도...

결국 2020년 후반기 벌어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에 미국은 그 어떤 도움도 주지않았고 아르메니아가 패배하여 아르차흐 지역 70% 가까운 땅을 아제르바이잔이 도로 차지하는 것을 인정해버렸다. 물론 튀르키예랑 전쟁이 아닌 아제르바이잔이 벌인 전쟁이지만 튀르키예군이 강력한 지원을 하던 전쟁이었기에 아르메니아에선 이 전쟁 패하면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또 벌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제르바이잔 또한 러시아랑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를 쓴지라 아르메니아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는데 그쳤다.

미국 논객 토머스 프리드먼도 아르메니아는 이스라엘, 아제르바이잔이나 튀르키예는 아랍 이슬람권을 두는 반응이랑 똑같다고 했는데[65] 그만큼 아르메니아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보고 옹호한다는 주장도 미국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정치적으로 얼마나 이해관계가 얽혀서 복잡해지는가 보여주는 단면이지, 학자적 관점에서는 헛소리에 무의미한 행위일 뿐이다. 제노사이드는 어디 누가 더 심하게 당했나 경쟁하는 훈장이나 올림픽이 아니고, 절대적인 숫자만으로 따지면 나치 독일이 말기 오스만 제국보다 훨씬 더 역량이 강했고, 깽판친 범위도 넒어서 희생자 수가 더 많은 게 당연하지만, 인구 대비 비율로 보면 당장 역사적 서부 아르메니아가 아예 소멸해 버린 메츠 예게른도 홀로코스트 못지 않다. 그리고 상술된 토머스 프리드먼의 발언도 나무위키로 옮기면서 뭔가 와전된 것 같은데,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동부 지방의 아르메니아인이라 하면 학살이 집중 된 지역이고, 역사적 동-서 아르메니아 입장에서 동부 지방, 즉 예레반과 에치미아진 일대, 즉 현대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강역인 지방이라 하면 애초에 1차 대전 시점에서 오스만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영유하고 있었던 땅이니 학살 자체가 불가능했다. 프리드먼의 발언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서부 지방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 한데, 이 또한 현대 와서 논파된 낭설이다. 당장 총력전을 치루는 나라의 수도 민심을 뒤흔들지 않기 위해 코스탄티니예의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내버려두었을 뿐이지, 이즈미르, 마니사, 아다나 같은 전선과 멀리 떨어진 서부, 남부 지방의 아르메니아인들도 모두 끌려갔다. 심지어 수도에서도 민족주의를 더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된 사도교회 사제, 아르메니아계 지식인, 학자, 언론인들은 모두 골라서 죽였다. 결론은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그 시절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를 자처하고 그 연속성이 대내외적으로 인정 받는 튀르키예는 뒤늦게라도 이 사건을 인정하며, 급진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옛 영토 반납은 헛소리로 일축해도[66], 지금도 제대로 관리를 못 받고 있는 현지의 수백개는 족히 넘는 아르메니아 관련 사적들을 돌보며 과거사 정리를 하고, 다른 제국주의 시절 열강들도 저런 자기 나라의 어두운 과거사를 자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직면하는게 바람직하겠지만, 언제 국제 정치와 특히 과거사 둘러 싼 역학 관계가 그리 도덕적으로 돌아갔는가...

2021년 4월 23일에 바이든 대통령이 튀르키예 정부에 오스만 제국 시절에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하지만 이것으로 튀르키예에 보상을 하라. 사죄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며 현 튀르키예와 미국의 관계를 악화하기 싫다라고 하면서 튀르키예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중요한 동맹이라고 표현하며 이번 성명의 의도는 튀르키예 비난에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총대주교 사학 마샬랸(Sahak Maşalyan)은 과거의 슬픈 기억을 정치적 도구로 남용하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평했다. #

10.6. 한국

한국도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학살이자 제노사이드로 인정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학살에 대하여 튀르키예군이 전쟁 와중에 저지른 학살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언급하는 수준이다.[67]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튀르키예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이 확산되자 한겨레에서 이 학살을 언급하기도 했으며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진상을 아는 일부 한국 민간에서는 피해국가인 아르메니아를 동정하며 가해국가인 튀르키예를 비판하는 여론이 있다.

2015년 5월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 한국인들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5년 5월 14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에서 협연자로 출연한 아르메니아 출신 첼리스트인 나레크 하크나자리안이 본 공연을 마친 후 앙코르 곡을 준비하던 중 작은 소동이 있었던 것. 하크나자리안은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올해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아르메니아인으로서 오늘 앙코르 곡은 이 사건에 바치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에 튀르키예인으로 추정되는 객석의 누군가가 '정치적인 발언은 삼가라'며 야유했으나 하크나자리안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어떤 사건인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68] 그가 앙코르로 선보인 곡은 조반니 솔리마의 '라멘타치오(애통)'. 2013년 6월에 있었던 서울시향과의 첫 협연 때에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바 있는 곡이다.

10.7. 기타 제3국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서방 열강들이 무슬림들을 학살자로 폄하하기 위해 만든 역사 왜곡 조작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현재 탈레반 정권과 대립하는 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 등 아프간내 반 탈레반 저항 세력들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부정하는 탈레반에 맞서 이를 부정하지 않는 편이다.

파키스탄은 아르메니아랑 사이가 나빠서 이 학살이 조작이라며 튀르키예를 편든다.[69] 파키스탄이야 아르메니아와 특별한 충돌이 없었던 만큼 정부의 입장과 별개로 개인 차원에서 아르메니아에 비적대적인 경우도 존재하지만. 그래서 파키스탄과 원수지간인 인도는 아르메니아를 편들며 밑에 서술한 대로 1960년대에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비를 세우며 튀르키예를 비난하고 있는데 이처럼 국제적 이득이나 여러 종교적 갈등까지 얽혀 있기에 아르메니아로서도 섣불리 뭐라고 할 수 없어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는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모두 외교를 맺었다보니 아르메니아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지만, 1992년 아제르바이잔 국경지역에서 아르메니아가 저지른 학살도 비판하며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보니 아르메니아 학살이 잘못된 사건이라는 건 알지만 대놓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콜롬비아의 경우 안티오키아 주의 한 도시에 아르메니아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학살을 비난하며 기리고 있으며 다른 남미의 국가들인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에콰도르, 페루, 브라질 등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국회와 주 및 시 의회에서 가결시키며 튀르키예에게 학살 범죄를 인정하고 피해국가인 아르메니아에게 사과를 통한 관계 개선을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다만 남미 국가들 역시 주변국들과 벌인 전쟁에서 이웃나라 민간인들을 학살, 박해하고 자국내 남미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땅을 빼앗아먹던 전적도 있었기 때문에 튀르키예에서는 야 너네들은 학살 안 했냐?라고 말하며 이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캐나다 역시 학살로 인정하고 있으며 연방정부 뿐만 아니라 퀘백, 앨버타, 브리티시 컬럼비아, 온타리오 등 연방 주 정부에서도 학살을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다만 캐나다 역시 캐나다 국내에서 살던 북미 원주민들에게 학살과 탄압을 저지른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70] 튀르키예에서는 캐나다는 자국내 북미 원주민에게 했던 만행들 먼저 되돌아보라며 캐나다를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캐나다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과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저질렀던 억압과 박해 등을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튀르키예에게도 아르메니아인들한테 저질렀던 학살 행위들을 인정하라며 맞반격을 하고 있다.

세네갈, 마다가스카르, 잠비아,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나미비아, 탄자니아, 카메룬, 콩고민주공화국, 에리트레아, 앙골라 아프리카의 국가들의 경우 프랑스, 영국,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서유럽 국가들에게 식민지배와 탄압, 학살을 당해온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서유럽의 선진국들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두고 튀르키예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며 튀르키예를 비난하기 전에 아프리카 각국에서 저지른 학살에 대해 먼저 사과하고 반성하라며 이 학살 사건으로 서유럽 국가들에게 공격당하는 튀르키예를 사실상 두둔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키스탄이나 아제르바이잔처럼 튀르키예가 저지른 학살 행위를 부정하거나 대놓고 옹호하는 짓같은 선을 넘는 행동까진 보이진 않고 있다.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튀르키예 역시 학살자, 가해국이며 그 피해국인 아르메니아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단지, 튀르키예를 욕하는 미국이나 서유럽 등 서방 국가들도 다를 거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튀르키예와 서방 국가 양쪽 모두 비판한다.

중국과 몽골은 튀르키예를 옹호하나, 일본 베트남은 반대로 아르메니아 입장을 지지한다. 하지만 일본과 베트남도 튀르키예와의 외교관계를 의식하는지라 서방 국가들처럼 강력하게 튀르키예를 비난하지 않으며 거리를 두고 있다. 중국, 몽골도 아르메니아에게 과거에 있었던 그 사건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며 성토하거나 강력하게 나서지 않는다.

11. 가짜 자료

파일:800px-Fake_image_claiming_to_be_Ottoman_official_teasing_Armenian_starved_children_by_showing_bread,_1915.jpg
한국 인터넷상에서도 이 학살 당시 사진이라고 흔히 잘못 알려진 사진. 외국도 마찬가지라 ABC방송에서도 2015년 이 학살 100주기를 다룬 기사에서 이걸 오스만 공무원이 벌인 짓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ABC 당시 기사.

무엇보다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관 관련 사진에서도 이 사진이 있으나 파일 제목이 Fake image claiming to be Ottoman official teasing Armenian starved children by showing bread, 1915.jpg 이다. 즉 이 사진 파일 영어 제목부터도 가짜라고 나와있다. 편집한 이들도 아르메니아인들임에도 이 사진이 페이크 Fake라고 올라와 있는 걸 봐도 그들도 이 자료에 대해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르메니아인들도 이게 진짜다, 가짜다 논쟁을 벌이며 해당 파일 제목을 진짜라고 고쳤다가 가짜라고 재수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삐쩍 말라있는 것처럼 조작이 아님에도 사진에 대하여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데 정말 뼈가 보일 정도로 굶주린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학살 와중 벌어진 사건으로 보기 쉽다. 이러다보니,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아르메니아 학살이라고 여기는 것도 있다. 해당 사진은 아시아에서 벌어진 식민지 대기근 때 사진으로 추정하고 있다. 벵골 대기근같은 나중에 벌어진 일 말고도 식민지에서 이렇게 굶주려 죽어가는 기근은 매우 흔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현장을 가본 미국 사진작가가 남긴 기록에서도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선 여러번 흔히 본 굶주린 사람들인데 백인이 굶주린 건 처음이라고 하듯이...다만 저렇게 약올리는 게 대체 왜 그런지 모를 일이다.

저게 오스만이랑 무관한 증거로 복장이 당시 관복이 아니고 당시에는 실외에서는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관료든 평민이든 무조건 페즈를 썼기 때문이다.[71] 무엇보다 튀르키예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자를 쓰지 않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던 시절[72]이었기 때문에 더욱 말이 안된다. 결정적으로 아르메니아 대학살 구글 검색만 해도 뜨는 당시 학살 사진에 나온 오스만인들이나 군인들은 페스를 쓰고 있는데 왜 이 사진은 보란듯이 페스 자체를 안 쓰고 있는 것일까? 저 사람이 오스만인이 아닌 다른 나라 기근 현장이니 이러한 엉터리 자료에 속지 말아야 한다.

12. 기타

"나는 이 고통, 이 끔찍한 아픔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픔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민족, 우리 할아버지도 이런 끔찍한 집단범죄의 희생자였고,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 (아르메니아인) 또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상처는 가만히 두면 곪아 터질 수밖에 없고, 이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글렌데일(2번 항목) 시장 자레 시난얀 (Zareh Sinanyan) https://rafu.com/2013/08/comfort-women-monument-unveiled-in-glendale/

세계 각지에 이 학살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미국, 캐나다, 프랑스, 우루과이 같은 아르메니아계 디아스포라 커뮤니티가 발달한 나라들 혹은 남키프로스처럼 튀르키예와 긴장 관계에 있는 나라에 있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멀고 터키와 외교적으로 가까운 입지 상 한국과 상관없는 역사 같지만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국외 최초로 위안부 평화비가 새워졌는데 여기에 현지에 굉장히 많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의 연대와 지지 덕분에 일본 정치인, 일부 일본계 주민들의[73]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밖에도 시리아[74], 레바논, 인도, 이란 등에도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이들 이슬람 다수 및 비기독교권 나라들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이전부터 성토해오고 아르메니아를 편들어왔기에 저런 게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말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ErmeniSoykirimAniti.jpg

1919년 튀르키예에서도 추모비가 세워졌으나 3년 만에 파괴되었다.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소녀 에우로라 마르디가니안(1901~1994)이 쓴 책 <유린당한 아르메니아>(Ravished Armenia)가 있다. 1918년 미국에서 출판되어 1919년 무성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흥행은 망했고 잔인성 때문에 여러 나라 개봉도 취소되었다. 게다가 원작자 마르디가니안과 저작권 문제로 고소 소송까지 벌어지며 시끄러운 모습을 보였고 2009년에 아르메니아에서복원되어 DVD가 나왔다. 2016년 아르메니아는 에우로라 프라이즈라는 평화상을 제정했다.

1991년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 앙리 베르뇌유 감독이 만든 자전적 영화 어머니(Mayrig)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세자르 영화제 음악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고 프랑스 국립영화아카데미에서도 수상했다.

2002년, 아르메니아-이집트계 캐나다 감독인 아톰 에고이안은 이 사건을 소재로 아라라트라는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에고이얀은 영화 공개 당시, 칸 경쟁에 출품하지 않고 비경쟁에 출품했는데 경쟁 부문에서 상을 받지 못하면 사건이 묻혀질 것을 우려했다는 뉘앙스로 발언한 바 있다. 실제로 개봉 당시 에고이안 본인에게 튀르키예/무슬림 계열 극우들에게서 협박 메일과 비난이 날아왔다고 한다. 대학살 이후 현대를 살아가는 아르메니아인/이민자들이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며, 에고이얀 특유의 군상극적인 성향이 강하다. 다만 에고이얀의 최고 걸작까지는 아니라는 게 중론.

튀르키예 드라마 아르헨티나나 남미 각지에서 인기를 끌자 아르메니아계들이 조상 모독이라고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튀르키예 드라마랑 아르메니아의 조상이랑 무슨 관련이 있냐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튀르키예 독립전쟁 이후 체결된 로잔 조약으로 튀르키예 공화국 영토에서 거의 추방된 그리스인과 달리 아르메니아인들은 여전히 튀르키예에 남아 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20~5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스탄불에서는 아르메니아어 신문도 발행될 정도로 꽤 큰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학살 당시 강제 이주지로 설정된 튀르키예 남동부 지방과 시리아에도 많은 수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는 자신이 아르메니아인임을 숨기는 경우가 있어 간혹 시골에서 누군가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당연히 무슬림이거니 하고 이슬람식 장례식을 준비하다가 알고 보니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라는 걸 알고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곤 한다. 물론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이슬람교로 개종한 아르메니아인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보라색의 꽃 모양 스티커를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꽃의 정체는 물망초라고 한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뜻이다.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1930~1936) 재임 중 의문사한 아가시 한잔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한 난민이다. 예레반 인근 에치미아진에 살았다고 한다.


[1] '아르메니아인 멸문(滅門)'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튀르키예어로는 Ermeni Soykırımı으로 옮긴다. [2] 아르메니아어로 '대재앙'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탈리아인 만화가 파올로 코시가 그린 《메즈 예게른(Medz Yeghern: il grande male)》(2007)이라는 작품 역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주제로 했다. 그 밖에도 '학살들'을 의미하는 'ջարդեր(ǰarder, 자르데르)'나 'կոտորածներ(kotoracner, 코토라츠네르)'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3] 영어의 Armenian Genocide의 표현을 직역해 Ermeni Soykırımı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튀르키예어로 soykırım은 하나의 일족이나 가문을 말살하는 행위를 의미하므로 학살보다는 '멸문'에 더 가까운 의미다. '학살'을 의미하는 표현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katliam이며 아시리아인 대학살에 대해서는 Süryani Katliamı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튀르키예에서 공식적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관련 문건 표기는 '아르메니아인 문제'라는 뜻의 Ermeni Meselesi이며, 이를 완곡·소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1915 olayı( 1915년 사건) 같은 말을 쓴다. 그 외에도 '아르메니아인 강제추방'을 의미하는 Ermeni Tehciri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4] 제노사이드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애초에 '제노사이드'란 단어부터가 이 사건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5] 아시리아인이나 그리스인 학살이라 별도로 상세히 분석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6] 사실 이 시대는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러시아, 중국, 로마 등 제국들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식민지 주민들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7] 이는 오스만의 힘을 약화시키고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8] 여담이지만 공화국 초기에 이러한 약한 지방 장악력 때문에 피봤다는 것을 깨달은 튀르키예 정부는 국토를 67의 도(현재는 81개)로 세분화하고 도지사부터 말단 군수, 이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방관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중앙집권제를 시도했다. 다만 이건 또 이것대로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동안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적어도 자기 땅, 부족에선 왕이나 다름없었던 쿠르드, 아랍 부족들이 중앙정부가 자꾸만 자신들의 이권(오스만 제국 시기에 쿠르드족, 향촌 구성원들에 대한 조세, 군사, 사법권은 모두 부족장의 손에 달려 있었다.)을 침해하려고 하니 반발한 것이다. 현재진행형인 PKK의 반란과 쿠르드인 문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9] 추가로 덧붙이자면 본래 오스만 이전에도 사용되어 온 도구이기는 했지만 오스만 시대에 들어 수도원이나 일반 성당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악기인 시만드론(Σήμαντρον) - 현대 그리스어로는 시만드로(Σήμαντρο)라고 불리는 일종의 딱딱이를 쳤다. 기다란 나무판을 줄에 매달거나 (수도원의 경우) 수사가 어깨에 매고 망치로 딱딱딱 두들겨서 소리를 내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도구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종 대신 이 시만드론을 기본적으로 쳤었다가 이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날에도 정교회 수도원에서는 시만드론을 평상시에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무슬림들에 의해 '종을 못 치게 하는' 그리스도교 박해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시만드론은 본래 사순 시기에만 사용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소리가 커서 종소리만큼이나 잘 들린다. [10] 유럽 연합 경제 위기 등에서도 사용되면서 약간 보통명사 느낌이 드는 단어지만 이 단어의 기원은 이 시대의 오스만을 칭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러시아 황제가 최초로 사용했다. [11] 물론 아랍 무슬림들은 오스만 치하에서 3등 신민으로 기독교인보다 밑으로 여겨져 같은 무슬림 같은 소리 하네 하고 반발했지만. [12] 반대로 러시아에서는 오스만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튀르크계 독립단체들이 활동을 했었다. [13] 이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무슬림 보슈냐크인을 빼면 어차피 기독교도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오스만은 수니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시아파, 정교회, 드루즈파 등등의 무수히 많은 종교가 있었기에 이들을 다 포용하는 게 더더욱 어려웠다... [14] 피해자인 입장에서는 전근대적이니 근대적이니 따질 필요도 없이 둘 다 이가 갈리듯이 말이다. 게다가 오스만의 학살은 근대 민족주의 확산 이후의 일이다. [15]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치하의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들 중에도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이들과 달리 대체로 불가리아 공산당의 통치에 순응하는 편이었으며 그에 따라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들이 튀르키예 본토로 대거 망명할 때도 이들은 끝까지 불가리아에 남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16] 정치적 대립과는 별개로 신학적으로 이슬람교가 아브라함 계열의 3대 종교의 마지막 후발 주자로서 기독교과 유대교에서 계승한 게 하도 많아 종교적 관점 자체로만 보면 무슬림들이 질색하는 건 가장 먼저 공산주의와 같은 무신론 세속주의고 그 다음으로 토착 다신교 신앙들이지 기독교, 유대교는 오히려 '유일신을 믿지만 틀린 방식이 문제라고 하며 유하게 대한다. 이런 문맥이 있기 때문에 이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그리 살벌한 대립각을 새우면서도 막상 자국 내 유대인 커뮤니티들에겐 의석 보장, 호메이니의 "시오니스트와 유대인은 다르다"는 발언 등으로 나름 유화책을 쓰는 거고 심지어 그 다에시도 막상 기독교인들을 쳐죽이면서도 가식적이지만 '기독교 부서'라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했던 형식적인 개별 부서는 만들었다. 야지디교 같은 아예 기원 자체가 아브라함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들은 이런 서류상 분류도 안하고 그냥 제노사이드적 학살을 한 걸 보면 이슬람에서는 나름 유의미한 차이다. [17] 이 문제의 만악의 근원이었던 러시아는 기독교 세계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만행으로 인해 애꿏은 현지 기독교인들만 학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애초에 그 명분 자체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만에 불과했지만. [18] 아르메니아/역사 문서의 1911년 인구 통계와 1920년대 인구 통계 비교 및 참조 [19] 출처: Şafak Ural, Kâzım Yetiş, Feridun Mustafa Emecen, Çeşitli yönlerden Türk-Ermeni ilişkileri, İstanbul Üniversitesi, 2006, s.196. [20] 상술하듯이 종교 땜에 학살이 일어난 게 아니라 무슬림 아르메니아인들도 학살되었다. [21] 정확히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체포, 대량 추방을 지시한 인물로, 나치 독일로 치면 아돌프 아이히만, 민주 캄푸치아로 치면 누온 체아 포지션의 인물이다. [22] 베를린에서 암살한 이유는 탈라트 파샤가 1차 대전 종전 후 전범으로 기소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베를린으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탈라트 파샤는 1919년 터키의 신 정부 치하의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23] 그의 무죄 판결은 아르메니아인은 말할 것도 없고 보편적 인권에 공감하는 외국인들에게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24] 한국에서의 안중근급 포지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5] 우루과이는 근본부터가 브라질의 지방 중 하나인 '시스플라티나 주'였다가 아르헨티나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루과이의 입장에서는 튀르키예가 과거 자국을 지배했다가 아르헨티나의 도움으로 자국에서 밀려난 압제자 '브라질'처럼 보였다. [26] 어떤 나라든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짓을 하면 전세계적으로 필히 비난한다. [27] 프랑스 극우들은 알제리인들도 일부 프랑스인 학살을 저질렀으니 같다고 주장하다가 더더욱 욕처먹었다. "그렇게 치자면 유대인들도 폭탄 테러라든지 일부 저항으로 나치에 저항하다가 일부 독일 민간인을 죽였다면서 유대인도 학살을 조금이라도 한 셈이라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이랑 차이가 없으며 아르메니아도 일부 저항하여 오스만 민간인을 조금이라도 죽였으니 같이 오스만 측이 학살을 벌인 게 정당방위라고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 뭐라고 할거냐?"는 비웃음과 비난에 대하여 입다물 수 밖에(...). [28] 당시 헤레로족은 나미비아에서 상당한 인구를 차지했다. [29] 기독교 세계의 해방이라고 잘난척했지만 정작 러시아도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에게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속국으로 지배하려고 하고 나아가 이들 종교도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하면서 결국은 오스만이나 러시아나 뭔 차이냐는 반발을 일으킨다. [30] 영국, 이탈리아나 프랑스, 독일, 러시아, 네덜란드 등 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근현대에 오스만처럼 이런 식민지에서 민간인들이 독립 세력 및 현지인들 증오로 마구잡이 대량학살당했지만 입다물 수 밖에 없는 게 이들이 지배국 민간인들을 더 엄청나게 학살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말기에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포이베 학살사건'(Foibe massacres) 같이 곳곳에서 이탈리아인들이나 독일인들이 수만여명 학살당했음에도 이탈리아도 독일도 찍소리도 못하는 게 이들이 쳐들어와 멋대로 민간인을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프랑스만 해도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 곳곳에서 프랑스계 거주민들이 알제리인들에게 학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벌인 학살은 더 엄청났기 때문에 아무 소리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프랑스 극우들이 물타기로 피해자 드립 치고 있긴 하지만. 일본도 한국이나 만주국에서 학살당한 일본인을 들이대며 피해자 개드립을 치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입을 다무는 게 부메랑으로 더 엄청난 학살과 약탈을 같이 따지자면 불리하기 때문이듯이 튀르키예에게만 이런 건 아니다. [31] 이 13만이란 수치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제르바이잔이 주장하는 구바 학살은 수만 정도이며 바쿠에선 3천에서 1만 2천 정도로 추산된다. 예레반에서의 13만 정도의 대량학살은 영어 자료, 러시아어 자료, 아르메니아어 자료에선 확인되지 않고 있다. 즉 교차검증이 되지 않으며 아제르바이잔의 선전이거나 과장 혹은 오보일 수 있다. [32] 일련의 사건들을 1998년 3월 31일부터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인 대학살의 날(Azərbaycanlıların Soyqırımı Günü)로서 추모하고 있다. [33]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구 황족들에게 1년 기한의 편도 비자를 발급해 준 다음 남성은 3일, 여성은 일주일 안에 튀르키예를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34] 터키어로 Süryani, 쉬리야니라고 부르며 주로 마르딘 일대에 거주하고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시리아 정교를 믿는 소수민족이다. [35]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을 지켜주다가 희생된 튀르키예인, 아르메니아인의 피가 흐르지 않는데도 억울하게 아르메니아계로 몰려 죽임을 당한 튀르키예인, 알레비파 박해로 희생된 알레비파 튀르키예인, 단지 아르메니아인의 피가 흐르기만 할 뿐 정체성은 튀르키예인에 가까운데도 그저 아르메니아계라는 이유만으로 희생된 경우 등 [36] 다만 아르메니아 학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37]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벌어질 당시의 그리스는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 겨우 독립하여 외부 국가들에 외교적 영향력까지 행사하기도 어려운 신생 약소국가였다. [38] 이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루마니아와 세르비아는 정부, 국회에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결의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다른 발칸반도의 주변국인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발칸 전쟁이나 튀르키예 독립전쟁때 민간인 학살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회에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결의안을 발의, 통과시킨 것과 대조적이다. [39] 여기에 심지어 이 두 나라는 전범 밀로셰비치와 안토네스쿠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극우 민족주의자들도 존재하며 루마니아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정부에서 안토네스쿠를 정식으로 복권시켰다. [40] 체코- 1942년 리디체 마을 학살, 폴란드-1943년 카틴숲 학살,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나치 독일군의 폴란드 민간인 학살. [41] 200년 가까이 지난 2010년대에도 아일랜드 인구는 이 기근 전의 인구 수를 회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42] 실제로 튀르키예는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에 자국도 어려운 판국에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구호를 위해 1만 파운드를 보내려 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는 2천 파운드만 보냈다며 대영 제국 위신이 떨어지니 1천 파운드만 기부해 달라고 요구했다(심지어 처음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술탄에게 돈도, 식량도 절대 보내지 말라고 요구했다.) 술탄은 이 요구에 응했지만 그 대신 식료품을 가득 채운 배 3척을 몰래 보냈고, 튀르키예 선원들은 영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이를 전달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무척 고마워했고 감사장도 보내주고 일부 지역에서는 오스만 제국 상징이던 초승달을 지역 문장에 넣어가며 고마움을 표하던 일이 있었던 만큼 아일랜드 대기근에 대해서 영국과 반대로 튀르키예가 은혜를 베풀었다. 아일랜드가 쌍수를 들고 바로 맞선 데는 이유가 있다. [43] 레오폴드 2세, 콩고 자유국, 르완다 내전, 부룬디 내전 문서들을 참고할 것. [44] 지금도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지역강국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인구, 군사력 모두 식민지배국이었던 네덜란드를 상회하고 있다. [45] 네덜란드는 17세기 이후 케이프타운과 오렌지강 유역 등 남아프리카 공화국 서남부 지역을 식민지로 합병했으나 1814년 영국과의 아프리카 식민지 세력 경쟁에서 밀려 이 지역들의 영유권을 모조리 영국한테 내어주면서 남아공 지역에 대한 식민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46] 참고로 라카기가르 화산 폭발은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지적 잘못해도 한참을 잘못 한 것.우쭐하고 나대다가 역관광탔다. [47] 자폭도 그냥 자폭이 아니었는데 사실 덴마크 본국도 이 기근으로 약 8만에서 20만 명이 사망했고 당시 덴마크 국왕이었던 크리스티안 7세가 끼니를 걱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 나라의 군주마저 이랬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덴마크는 17세기까지 3백여년 정도는 아이슬란드나 페로 제도에 대하여 차별 없이 잘 지내왔으나 18세기 덴마크가 강압적으로 아이슬란드 의회를 없앤다든지 하는 등 점차 선민적으로 변해 아이슬란드와 갈등을 빚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아이슬란드의 의회는 이후 다시 원상 복귀되었고 오히려 덴마크는 이후 아이슬란드에 자치권을 더 부여하는 등 여타 식민제국들에 비하면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폈고 딱히 핍박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그 흔한 무장투쟁도 별로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도 딱히 서로간의 악감정은 없다. 직접적인 학살을 한 타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48] 해당 지역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현 아르차흐 공화국)에 속한 구(rayon)로 아제르바이잔어로 Xocalı 이다. 러시아어로 Ходжалы 라고 쓰지만, 튀르크어계 단어들을 키릴문자로 옮길때에는 ы를 ı(으)의 대응자로 여기기 때문에 본토 러시아어(호잘르이)와는 달리 여기서도 ㅡ발음이 난다. [49] 1923년 소련에서 그를 기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도시 한캔디를 스테파나케르트로 개명했다. [50] 스테판 샤후먄이라는 인물 자체만 본다면 분명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성향 자체는 있었다.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를 부정하지만 민족해방 개념 자체는 옹호했고 골수 공산주의자인 샤후먄의 입장에서 아르메니아인은 오스만 제국이라는 제국주의(자본주의의 변종)에 탄압받는 피억압 민족이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샤후먄과 바쿠의 볼셰비키들은 후일 대숙청에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반대한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포함되어 있는 '볼셰비키 내 온건파'였다. 이 말인 즉슨 샤후먄이 학살과 관련 없다는 게 아니라, 이 아제리인 학살이 공산주의 이념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 민족갈등으로 일어난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51] 프랑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일본 등 [52] 토마스 드 발은 체첸 전쟁에 대한 비판적 보도로 2006년 러시아에 입국 금지를 당한 적도 있으므로 친러적인 언론인은 아니다. [53] 아제르바이잔은 집요한 유물 날조와 역사 왜곡으로 아르메니아 영토가 고래부터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살던 땅이라고 주장해 온 바 있다. 관련 학계 사람들에게는 악명 높고 잘 알려진 일인데 아제르바이잔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대규모 수백년된 아르메니아 무덤군까지 폭발시키며 당장 역사 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그리스, 로마 역사서에도 나오는 말을 뻥이라고 우기면서 아제르바이잔 땅은 한 번도 아르메니아 민족이랑 상관이 없었고 남아 있는 기독교계 유적은 카프카스 알바니아라는 소규모 고대 왕국의 것이었다며 우기는 역사 왜곡으로 악명높은 나라다. [54] 역사적인 사실을 볼때 레닌은 바쿠 소비에트의 학살을 외교적인 방법으로 풀라고 말렸으며 오히려 스테판 샤후만을 비롯한 바쿠 소비에트가 레닌의 지령을 무시하고 계급 투쟁을 강행했다가 바쿠의 아제리 무슬림들과 충돌해서 학살이 크게 번진 것에 가깝다. 참고글 [55] 이스라엘 국립 홀로코스트 추모 & 기록 연구소 [56]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후손이라고 여긴다. 노아의 후손 하야크(Hayak)가 BC 2,492년에 바빌로니아왕을 물리치고 하야스탄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역사를 내밀기에 당연히 유태인 후예 격이라고 외치면서 대다수 인구가 기독교인이니 이스라엘로서는 노아의 후손을 들먹인다고 아득한 옛날부터 무지 사이 나뻤다. 페르시아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상업적으로 대박을 거두자 유태인들을 밀어냈고 이들 중 일부는 바로 산악 유대인으로 남았는데 이들 가운데 러시아나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스와 석유 재벌로 성공한 이들이 철저하게 아르메니아에 대한 고립, 아제르바이잔과 이스라엘 우호에 거액을 투자했다....이스라엘 건국 이후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아인 거주구역의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이 박해와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사실상 강제이주 당했다. [57] 조부모를 비롯하여 많은 친척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홀로코스트 피해자 유족이다. 그럼에도, '홀로코스트 산업' '돈벌이 홀로코스트 실체' 같은 책을 여럿 내면서 독일 정부가 내준 보상금이 실제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이나 유족들에게 전혀 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58] 아르차흐 공화국에 동상이 세워졌지만 2023년 아르차흐 분쟁으로 아르차흐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동상은 아제르바이잔에게 철거당했다... [59] 단, 쿠웨이트는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령이긴 했어도 역사적 배경이 이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자세한 건 쿠웨이트/역사 문서 참조. [60] 다만 유럽이나 서방권 국가들처럼 학살 결의안을 만들지는 않는다. [61] 한중일 3국이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남미의 스페인어권 국가들이 종교적,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영 좋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62] 물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영국과 프랑스의 통수를 맞고 싹 다 위임통치령, 보호령의 형태로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당했다. [63] 그러나 러시아는 크림 반도 영유권 문제로 우크라이나하고만 대립하는 게 아니라 튀르키예하고도 대립하기 때문에( 크림 칸국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었던 역사와 크림 타타르인들이 튀르크 제민족이라는 것 때문에 튀르키예의 극우민족주의자들이 크림 반도를 자국이 수복해야 할 영토로 여기고 있음) 튀르키예가 러시아 쪽으로 붙는다고 해서 튀르키예와 러시아가 완전히 화해할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둘이 미국 견제를 위하여 크림 지역 문제를 일단 보류하고 서로 손잡는다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상황도 아니다. 문제는 리비아 내전과, 2020년 아르메니아 전쟁에서 서로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 [64] 비교적 평화적으로 미국령이 되었던 알래스카 주의 틀링깃 족이나 하이다 족 같은 일부 원주민 부족들은 제외. 하루가 멀다하고 미군과 백인 개척민, 원주민의 충돌이 찾았던 본토와 달리 그런대로 백인계에 의한 학살피해를 입지 않았거나 적었다. [65] 하지만 유대인인 프리드먼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두고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보단 낫다고 하여 아르메니아계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나치처럼 개종하든 말든 유대인을 마구잡이로 죽이던 것과는 달리 적어도 오스만 제국은 동부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은 놔뒀다고 다르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스라엘은 학살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튀르키예를 좀 생각하여 홀로코스트보단 낫다고 하는 시각을 보인다. [66] 역사적 서부 아르메니아를 구성하는 지방이자 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오스만 제국 당시 아르메니아 6개주 (vilayet)은 현대 튀르키예 영토의 1/3쯤 되는 거대한 땅이다. 아무리 아르메니아 측이 과거사에 피가 맺혀도 사실 학살 시점에서도 오스만 제국이 다스린 지 족히 500년이 넘었던 이 지방을 근대적, 정치적 의미에서 아르메니아 땅이라 주장하며 양도 받는 건 현실성이 없는 소리다.이스라엘 : 에엥? 그거 완전 당연한 거 아니냐?(이스라엘이야 알다시피 유태인들의 경제적 인맥을 통해 미국을 쥐어잡았고 세계 경제계에 무시못할 힘을 가지고 있기에 팔레스타인을 뭉개고 2천여년전 땅이니 뭐니 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팔레스타인 지역일뿐이다. 하레디를 비롯한 극단 세력은 이스라엘 영토에 대해 시오니즘 항목에 나오듯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골란고원도 가까스로 미국이 인정한 수준일 뿐. 하지만 아르메니아가 요구하는 땅부터도 그렇지만 도저히 아르메니아로선 이스라엘이나 유태인들 경제력에 상대가 되지 않으니...) 게다가 그 일부는 시리아에도 있기에 시리아도 우리 보고 땅 내놓으라고 하는 거냐며 당연히 화낸다. [67]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 2016년 10월 29일에 방영한 아르메니아 편을 보면 1915년에 150만 아르메니아인을 튀르키예군이 학살했다라고 가볍게 언급한다. [68] 위에 링크된 기사에는 이때 또다시 'You shut up'이라고 야유가 나왔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 있었던 관객들 중에는 두 번째 야유가 하크나자리안에 대한 아유가 아니라 정치적 발언을 삼가라고 했던 관객을 향한 것이었다고 증언한 사람도 꽤 있었다. 1, 2. 하크나자리안을 비난했던 관객은 튀르키예인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69] 여기서 더 나아가 파키스탄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르메니아란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기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다 못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제로 아르메니아와 갈등을 빚는 튀르키예와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로 치고박고 싸운 아제르바이잔도 아르메니아 자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것과 대조적. [70] 미국의 원주민 학살만큼은 아니지만 베오투크 족, 크리 족 등 자국내 원주민들을 학살한 일도 있었으며 원주민들을 문명인으로 만든다는 명목하에 원주민 어린이들을 부모와 강제 격리하여 원주민 기숙학교에 강제 수감시키는 등 만행을 저지른 바 있었다. 특히 원주민 기숙학교를 통한 북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강제적 동화정책은 캐나다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흑역사로 남아있는데 자세한 건 캐나다/역사 문서 참고. [71] 다만 오늘날에도 크레타 섬의 남성들은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의상을 입을 때 페스를 쓴다. 하지만 수백여년 오스만 지배로 오스만풍 옷차림도 깊숙이 뿌리박힌 점도 있긴 하다. [72] 튀르키예는 수립 이후 페스를 금기시하면서 서구풍 모자를 쓰는 것도 많았다. 1950년대 사진만 봐도 플랫 캡을 튀르키예인 남성들이 바깥에서 많이 쓰고 돌아다녔다. [73] 일부란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게 일본계 미국인 상당수는 사실 본국과의 거리감, 미국생활 하며 체득한 자유주의적 성향 뿐만 아니라 2차대전 시기 태평양 전쟁에 휘말렸기 때문에 겪은 박해의 역사 때문에 일본 본토의 극우 성향에 찬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디까지나 여전히 일본 본토와 부정적인 의미에서 관계가 지나치게 깊은 일부가 설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74] 사실 시리아는 강력하게 이 학살을 비난하며 아르메니아를 편드는데 이 학살 와중에 현대 튀르키예-시리아-이라크 국경 지대에 살던 아랍인들도 대거 학살당하고, 현대 시리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 당한 비극이 있기 때문이다. 추모비도 여럿 되고 아예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 교회까지 따로 세웠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아르메니아에는 시리아 기독교인 학살 추모비도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