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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타한 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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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ナタハン島事件
アナタハン事件
파일:attachment/아나타한 섬의 여왕벌/Higa_Kazuko.jpg
히가 카즈코(比嘉和子. 1922~1972)의 사진

1. 개요2. 사건의 시작3. 죽음의 시간4. 구출과 그 이후5.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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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크로네시아에 있는 북마리아나 제도의 아나타한(Anatahan) 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면적 32km2 정도인 작은 섬에서 여자 1명과 남자 31명이라는 남초 성비로 7년간 살아야 했던 이야기이다. 이후 여자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고, 살인 등의 사고가 벌어졌다. 미군에 의해 생존자들이 구조되면서 사건은 막을 내렸다.

2. 사건의 시작

1944년 어선 헤이스케마루는 일본 해군에 징발되었고, 5월 24일 화물을 싣고 요코하마항을 출항한다. 사이판 부근을 향해 남하하던 이들은 6월 미 해군 전투기에 발견되어 공격을 받았다. 이때 헤이스케마루와 아케보노마루 두 척이 가라앉았다. 승조원들은 죽을 힘을 다해 근처 섬으로 헤엄쳐 갔고, 마침 침몰한 에비스마루의 생존자를 실은 카이호마루도 아나타한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카이호마루도 다음날 공습을 당해 파괴되어 해군 10명과 민간인 선원 21명이 아나타한 섬에 체류하게 되었다.

아나타한 섬에선 전쟁 전부터 일본 기업에 의해 야자수 농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섬에 70명 정도의 원주민이 생활하고 있었고, 일본인으로는 농원 기술원 주임 1명과 그의 부하 직원의 아내 히가 카즈코가 있었다. 부하 직원 본인은 페이간 섬으로 여동생을 데리러 나가고 소식이 끊겼다. 갑자기 늘어난 30여 명의 남자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섬의 식량 자원은 한계가 있었고, 1달도 못 가서 가지고 있던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남자들은 그룹을 나눠 농사를 시작했고, 수렵도 하였다. 어느 날 폭풍우 속에 1명이 행방불명 되었다. 7월부터 극심한 공습을 받고 원주민들은 상륙한 미 해군들이 데리고 가거나 스스로 탈출하여 일본인들만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9월에는 일본이 항복했으니 섬의 잔류자들도 미 해군 함정에 승선하라 했으나,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았기에 남자 31명과 여자 1명으로 이루어진 이 집단은 계속 섬에 남게 되었다. 사실 이때 투항을 했더라면 1명의 실종자만 발생한 걸로 마무리 되었을 것이다.

공습도 그치고 섬 생활에 적응하면서부터, 적어도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을 안 해도 될 정도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코코넛으로 까지 직접 제조해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식욕과 수면욕에 절어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하나의 욕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섬에 있는 유일한 여자였던 히가 카즈코를 둘러싸고 남자들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주임과 카즈코가 부부 사이가 아니라는 게 밝혀지고 기류는 거의 노골적이게 되었다. 카즈코는 주임과 동거하면서 보호를 받으려 했으나, 오히려 주임이 질투의 화신이 되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946년에는 헤이스케마루의 선장이 피로로 급사했다. 이 때 남자 30명, 여자 1명이 되었다. 1946년 8월에 추락한 미 육군 B-29 폭격기의 잔해를 발견하고, 여기서 누군가는 비행기 동체를 잘라다 칼을 만들었다. 또 남자 2인조가 폭격기 잔해 속에서 권총 3정과 실탄 70발을 발견했다.

3. 죽음의 시간

총기를 얻은 2인조 중 한명과 사이가 나빴던 남자가 사망했다.(29:1)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서 주임, 2인조, 카즈코 이렇게 4명이서 동거를 하게 되었고, 1947년 가을에 2인조 중 한 명이 나머지 한 명을 사살했다.(28:1) 주임은 몸을 피했고, 2인조 중 남은 1명과 카즈코가 같이 지냈는데 어느날 이 남자가 사라졌다.(27:1) 반 년이 지나고, 카즈코의 상사였던 주임이 사망했다.(26:1) 이때부터 '권총을 가진 자가 카즈코를 얻는다'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그 뒤 카이호마루 갑판장이 절벽에서 추락사(25:1), 아케보노마루 갑판장이 식중독으로 죽었다.(24:1) 권총 소유자도 익사했다.(23:1) 이 중 몇 건이 살인이고 몇 건이 사고사인지는 이후로도 확실히 밝혀진 게 없다.

어떻게든 중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최연장자 남성이 카즈코에게 선택권을 주고 남자들은 더 이상 집착하지 말자는 안건을 내놨다. 사실 그대로 방치하면 남자들 중에 하나가 자기들끼리 계속 죽이는 걸 피하기 위해 카즈코를 해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카즈코는 한 명을 골라 결혼했고, 모두의 합의 하에 권총 2정을 부숴 바다에 버렸다.

4. 구출과 그 이후

1950년 6월 미 해군 함정이 섬에 다가왔을 때, 카즈코 혼자서 투항하여 구출되었다. 구출된 후 이 이야기가 알려져 카즈코는 졸지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섬에 남은 남자들은 아직 종전 사실을 믿지 않아 섬에 계속 잔류하였다. 카즈코와 결혼했던 남자가 병사(22:0)하고, 아케보노마루의 선장도 사망(21:0)했다. 다음에 배가 왔을 때 일본 해군 출신 남성 1명이 승선했다. 남은 20명은 다음에 미군이 오면 항복하자고 했고, 실제로 다음에 미 해군 함정이 왔을 때(1951년 6월) 20명 전부 승선하며 아나타한 섬에서의 생활은 막을 내렸다. 히가 카즈코는 재혼했고, 22년간 조용히 살다가 1972년 50세의 나이에 종양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귀국한 남자들의 인생도 카즈코 못지 않게 파란만장한 건 마찬가지였는데, 기혼자였던 남자는 자신이 실종자로 등록된 사이 아내가 다시 결혼해 자식까지 새로 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재결합은 했다고 전해지는 등 역설적으로 카즈코보다 오히려 나은 삶을 산 사람들이 많았다.

5. 미디어

파일:attachment/아나타한 섬의 여왕벌/Anatahan.jpg

1953년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의 아나타한에서 주연 네기시 아케미(1934~2008). 영화 출연 당시 나이는 19세였다.

마를렌 디트리히 주연의 '진홍의 여왕'을 연출한 거장 조세프 본 스텐버그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가져 1953년에 네기시 아케미를 주연으로 아나타한이란 영화를 만들었다.

기리노 나쓰오의 '도쿄섬'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다. 그리고 2010년에는 이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국내에는 '키요코의 은밀한 섬생활'이라는 3류 에로 영화 제목으로 수입되었다.

휴먼버그대학교에서 이 사건을 각색해서 나온 영상이 올라왔다. [실화]섬 전체에 여자가 단 1명... 여자를 둘러싼 처절한 쟁탈전.

따지고 보면 히가 카즈코는 엄연히 피해자라 볼 수 있는 사건이지만 사건의 자극적인 소재 탓인지 미디어에서 여왕벌 사건이라 불리며 피해자가 팜므 파탈처럼 묘사되는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