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4:22

세가 콘솔 게임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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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가 게임기들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이다.

2. 가정용 게임기

2.1. SG-1000

1970~80년대를 걸쳐 세가는 아케이드 게임의 강자였다. 그러나 아타리 쇼크의 영향으로 세가는 큰 타격을 입었다. 나카야마 하야오(中山隼雄)는 당시 세가의 모회사였던 걸프 & 웨스턴에 아케이드 하드웨어 지식을 이용해 가정용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걸프 & 웨스턴은 나카야마 하야오의 계획에 대해 승인을 내렸으며, 그 덕에 가정용 컴퓨터 SC(Sega Computer)-3000 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나 개발 도중 닌텐도가 게임기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본체에 키보드를 제거하고 게임 컨트롤러를 연결해 SG(Sega Game)-1000 게임기도 같이 만들기로 결정했다. 자사 유명 아케이드 게임들의 이식 작업을 외주로 맡겼다.

메가 드라이브와 새턴 개발을 주도한 세가의 컨슈머 하드웨어 개발부 부장이었던 사토 히데키(佐藤秀樹)는 인터뷰에서 예를 들어 경주 아케이드 게임 '슈퍼 더비'의 경우 가격이 1500만엔이었는데 매출 총이익이 500~600만엔이나 했을 정도로 사업성이 좋았지만, 가정용 제품은 고작 2만엔도 안 되는 제품을 박리다매로 팔아야 했고 사업성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내부에서 가정용 제품 개발 계획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다른 부서에서 인원을 내주는 걸 꺼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SC-3000과 SG-1000의 개발 인원은 고작 5~6명뿐이었다. 게다가 아타리 쇼크를 직접 목도하고 있던 세가 미국 지부에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C-3000과 SG-1000 모두 패미컴 발매일과 같은 날에 발매했다. SG-1000은 1983년 한해에만 16만대나 팔려나갔는데, 이건 세가의 예측치인 5만대를 상회했으며 패미컴의 판매량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는 세가의 풍부한 아케이드 게임 이식작들과 패미컴의 초기 결함으로 인한 리콜이 겹쳐서였다. 사토 히데키는 아케이드 하드웨어에 비하면 조악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5개월만에 16만대나 팔려나간 것에 대해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1984년부터 남코 허드슨이 패미컴에 다양한 게임들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패미컴과의 경쟁에 밀리게 된다. 닌텐도도 패미컴 초기엔 서드 파티를 고려하지 않았지만, 허드슨은 패미컴용 BASIC 인터프리터를 닌텐도에 납품한 덕에 상세 하드웨어 사양을 알게 되면서, 남코는 패미컴을 해킹해 시연 게임을 만들어 닌텐도에 들고 가 보여주면서 게임 발매를 허락받았다. 그리고 이 두 회사가 1984년에 내놓은 게임들이 빛을 발하면서 SG-1000이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이다. 또한 세가도 남코와 코나미, 타이토 등을 경쟁 회사로 생각해 서드파티 유도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타사에서 자발적으로 세가에 게임 이식과 관련된 계약을 상담하러 찾아가도 담당자가 시큰둥했더라는 증언이 있었을 정도로 대응도 그저 그랬으며, 세가가 자신의 아케이드 게임들을 이식하다 보니 서드파티들이 자신들이 들어갈 곳이 보이지 않아 참여를 꺼리기도 했다.

또한 패미컴은 3세대 게임기의 포문을 본격적으로 열어 젖히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고성능이었지만, 패미컴과 같은 날에 나온 SG-1000은 1년 전에 나온 콜레코비전과 구성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1] 부드러운 화면 스크롤 구현도 어려운 등 성능 면에서 패미컴에게 밀렸다.

1984년 개량판 SG-1000 II를 내놓은 다음 세가는 세가 마크 III의 개발에 착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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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세가 마스터 시스템

비슷한 시기에 닌텐도 패미컴과 경쟁했다. 성능 자체는 2년 가량 늦게 나온 만큼 패미컴보다 우위에 있으나[2], 서드 파티 영입 면에서 밀리면서 사실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3]

당시의 세가는 현금 장사이던 아케이드 시장이 주력이었고, 가정용 게임기 사업은 어디까지나 부업 취급이었다. 그래서 서드 파티 영입에도 닌텐도만큼 적극적이지 않았고, 게임기 경쟁에도 그다지 열의가 없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타사에서 자발적으로 세가에 게임 이식과 관련된 계약을 상담하러 찾아가면 담당자가 시큰둥했더라는 증언이 있을 정도.

여기엔 당시에 게임 라인업을 가능한 세가 자신들의 손으로 채운다는 이상하고 미련한 원칙과 함께 가정용 게임기 사업부를 깔본 아케이드 사업부의 영향도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4] 아무튼 메가 드라이브 이전의 세가의 가정용 게임기 사업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괴이한 행태를 벌이고 있었다.

가정용 게임기의 주 소비 국가인 일본과 북미에서는 당시 패미컴(NES)이 대박을 치고 있었으므로 세가 마스터 시스템은 성공을 별로 못 거둔 편이다. 대략 시장 셰어의 10% 정도를 차지했다고. 그러나 유럽, 남미 등의 지역에서는 크게 성공하여 전세계적으로는 1000만대 넘게 팔아서 세가 새턴보다 세계 누적 판매량이 많다.[5]

유럽 시장은 당시에 닌텐도 유럽 지사에서 시장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기에 이 게임기가 무혈입성을 한 것이고, 남미에서는 브라질에서만 약 500만 대를 팔아치우는 기염을 보였는데, 브라질에서는 자국산 상품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제품에 상당한 관세를 부과했으나[6], 세가에서 브라질 현지 기업인 'Tectoy'와 제휴하여 브라질 현지에서 생산을 하여 브라질산 제품으로 판매하여 관세를 피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남미 시장에서 닌텐도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브라질에서는 21세기가 되어서도 서민들이 그나마 장만할 수 있는 게임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 덕분에 일본판, 북미판 게임이 더 이상 출시되지 않고 손자뻘인 세가 새턴이 출시되고 나서도 유럽에서 제작한 오리지널 게임이 몇 개 나왔고, 이를 넘어 증손자뻘인 세가 드림캐스트가 나오기 직전인 1997년까지 12년 동안 공식적으로 신작 게임들을 출시했는데[7], 이는 신작 게임이 발매된 기간이 닌텐도의 패미컴 ( 1983년~ 1994년)보다도 더 긴 것이다. 게임 기어의 게임에서 발색수를 줄인 후 해상도를 늘리고 스테레오 사운드만 조금 손보면 마스터 시스템으로 손쉽게 이식할 수 있는 것도 한 몫 했었다.

한국에서는, 1988년 11월에 '한국오크스'라는 회사에서 세가 마크III를 국내에 수입 판매한 적이 있다. 일부 컴퓨터 잡지 등에 광고를 내기도 했지만, 홍보와 유통망의 부족으로 별로 팔리지 않아서 몇 달 만에 금방 잊어졌다. #

이 때는 게임기보다는 키보드[8]를 주변 기기로 내세우면서 게임도 할 수 있는 가정용 8비트 PC로 홍보하였으나, 그 당시 가정용 8비트 시장은 MSX와 애플 2 호환기들이 이미 꽉 잡고 있다 보니... 어찌 보면 마케팅 포인트를 잘못 잡은 셈. 그에 따라 한국오크스판 세가 마크 III는 현재 굉장한 레어 아이템. 그리고 그 오크스판 세가 마크III의 국내 유통사는 '하이콤'이라는 회사였는데, 이후에 삼성전자 게임의 국내 총판으로 전환했다. [9]

이후, 삼성전자에서 1989년 4월삼성 겜보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해서[10] 대만 패미클론이 범람하기 전까지 한때 모든 게임기를 겜보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11] 삼성 겜보이는 일본판 세가 마스터 시스템을 기반으로 해 카트리지 단자가 일본판과 동일하고 자동 연사 버튼과 3D 안경 단자를 탑재했으나, FM 음원은 빠졌다.[12]

당시의 한국 게임기 시장은 대우전자의 재믹스 1985년에 출시된 이래로 장기간 시장 지배자로 자리를 매기고 있었고, 홍콩이나 대만을 통해 패미클론이 소량 들어와 있었다. 그 밖에도 PC 엔진, 세가 마크 III도 들어와 있었지만, 여기까지 가면 그야말로 레어템.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라는 대기업이 정식 발매한 겜보이는 시장을 크게 뒤흔들었고, 많은 회사들이 게임기 사업에 뛰어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오죽했으면 당시에 경쟁사이던 현대전자에서 삼성 겜보이의 성공에 자극받아 북미판 NES를 들여와 '현대 컴보이'라고 작명을 했을 정도였다.


파일:external/myhome.internet.olleh.com/gamboy.jpg
당시 삼성 겜보이 광고.

겜보이가 시장에서 성공하자 삼성전자에서는 환타지 스타, 화랑의 검(원제: 검성전), 알렉스 키드 같은 게임들을 한글화해서 발매를 하는 성의를 보이기도 했고[13], 게임의 유통도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졌다. 후계기인 메가 드라이브가 나오자 자국인 일본에서는 세가 마스터 시스템용으로 더 이상의 신작이 발매되지 않았는데, 마스터 시스템이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남미 유럽에서는 대마계촌 베어너클, 소닉 더 헤지혹[14] 같이 메가 드라이브로 발매된 게임을 게임기어로 이식한 후, 이를 조금 손봐서 마스터 시스템으로 이식해 발매했고, 삼성전자에서 그것을 수입하여 국내에 출시하기도 했다.

국산 게임의 여명기에 국산 게임이 가장 활발하게 개발된 게임기 역시 겜보이였다. 하드웨어 구조가 국내에서 널리 쓰이던 MSX(재믹스)와 유사했기 때문에 MSX용 게임을 제작하던 국내 제작자들이 곧바로 겜보이로 갈아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아기공룡 둘리, 개구장이 까치, 장군의 아들, 수호전사 등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게임들이 나왔다. 하지만 대부분이 비라이센스 게임들이다보니 초창기에는 하드웨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래픽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MS9918A 하위 호환 모드로 쓰는 등[15] 동시대의 일본 게임들에 비하면 품질이 떨어졌고, 장풍 2처럼 노골적으로 유명 게임들을 표절한 티가 나는 흑역사급도 있지만, 현재 한국 게임 산업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겜보이의 성공으로 삼성전자는 이듬해인 1990년, 메가 드라이브를 '삼성 수퍼 겜보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고, 일본에는 발매되지 않은 컴팩트 버전인 마스터 시스템 2도 '삼성 겜보이 2'라는 이름으로 들여왔는데, 겜보이 2에는 알렉스 키드 한글판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 특징.[16] 그런데 기존의 삼성 겜보이는 일본판 카트리지를 사용하므로 삼성 겜보이 2도 당연히 일본판 카트리지를 사용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그 덕에 겜보이 2/알라딘보이가 유일하게 일본판 팩을 지원하는 마스터 시스템 2라고 한다.

1992년 즈음에 삼성전자의 교육용 컴퓨터 브랜드를 ' 알라딘'으로 통일하면서[17] 수퍼 겜보이는 '슈퍼 알라딘보이'가 되었고, 겜보이 2의 이름도 '알라딘보이'라는 좀 괴악한 이름으로 개명했다. 알라딘보이의 후기형은 색상이 같은 회사에서 발매한 유아용 컴퓨터 피코처럼 하늘색/보라색 투톤 색상으로 바뀌었고, 컴포지트 단자 기본 지원 및 메가 드라이브용 패드를 동봉했다.[18] 하지만 알라딘보이 후기형(하늘색/보라색 투톤)의 영상 단자는 이전 모델과 호환되지 않는다. 이 모델은 1994년 후반까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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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메가 드라이브

메가 드라이브의 미국 시장 성공 스토리, 이후 차세대 게임기 시장까지의 상세한 이야기들은 한국에도 번역 출간한 '콘솔 워즈'를 통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19] 또한 2020년 8월부터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다큐 '하이스코어'에도 칼린스키가 직접 출연하는 분량이 존재하니 챙겨볼만 하다.

가정용 게임기 태동기 시절인 1980년대에 수많은 게임기가 등장했고, 닌텐도와 세가도 그것들을 판매하는 회사였다. 닌텐도의 경우 일본에 1983년 7월 15일에 패미컴을 내놓았음에도 에폭의 카세트 비전과 초기 설계 불량으로 말미암은 전량 패미컴 회수 때문에 한 동안 부침을 겪었지만, 동키콩을 시작으로, 1984년 로드 러너, 1985년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의 성공과 닌텐도 특유의 서드 파티 관리 정책 인한 게임 품질 관리 덕에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 기세로 1983년부터 아타리 쇼크로 망한 북미 시장에도 1985년 10월 18일에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으로 가정용 게임기를 출시한 닌텐도에서는 아타리 쇼크를 극복했고, 이에 따라 패미컴이 전 세계 게임기 시장을 재패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세가에서는 SG-1000과 마크II, 세가 마크 III로 계속 닌텐도에 맞서 봤지만 연속으로 실패했고 1986년에 새로운 게임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세가 컨슈머 하드웨어 개발부 부장이었던 사토 히데키의 인터뷰에 따르면, 세가는 문제점이 게임에 있다고 생각하고 당사의 아케이드 게임을 가져오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기에 그냥 8비트 게임기로는 승부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주변을 보니 또 자사의 아케이드 기판 시스템 16이 16비트인지라 이것을 가정용 게임기에 맞게 간략화하면 되겠다고 생각해서 개발에 착수한다.

원래는 시스템 16의 모든 기능을 메가 드라이브에 넣고 싶어했지만, 2만엔이라는 가격에 맞추기 위해서 여러 기능을 제거하다 보니 스프라이트 확대/축소 기능도 제거했고, 색깔도 최대 발색을 64색으로 제한하게 됐다. 스프라이트 배경 모두 16색 4팔레트라는 제약이 개발자들을 괴롭혔다. CPU는 모토로라 68000을 사용해야 했는데 너무 비싸서 교섭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에도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던 모토로라는 거절했으며, 마침 호환 CPU를 만들고 있던 시그네틱스사와 협상에 성공해 300엔에 30만 개라는 조건으로 '혹시 안되면 아키하바라에 개당 500엔씩에 팔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구매 계약을 맺었다.

다음에는 그래픽과 사운드 칩셋을 위해 야마하와 협의를 하는데, 그래픽 쪽은 반도체 사업부 쪽에서 쉽게 이야기가 끝났는데 악기 사업부 쪽에서는 칩에는 음원이라는 IP가 담겨있는데 게임기의 칩을 뽑거나 해서 신디사이저를 만들면 어떡하냐는 걱정 때문에 저항이 심해 쉽게 결정되지 못했다고 한다. 사토 히데키는 세가의 게임기와 아케이드에서 FM 사운드를 퍼트린 덕분에 '게임의 사운드가 FM이면 좋겠다'는 흐름이 만들어졌으며 갈등이 있었던 야마하의 악기 사업부장 와치씨도 '옆으로 흘러가는 것은 힘들었지만 덕분에 PC에서 사운드 블라스터가 표준 같은 것이 되어 막대한 수의 칩이 팔렸다. 역시 그 일이 있었으니까'라고 했다고 회고했다.[20]

게임기에서는 커다랗게 16-bit라고 핫 스탬프로 꽝 찍어놓고 황금색으로 칠해 놓았지만 미국인 눈에는 노란색으로만 보여 반응이 별로였다고 한다.

원래 '세가 마크 V'라는 이름으로 게임기 개발을 시작했으나, 나중에 메가 드라이브로 게임기 이름을 변경하여 일본에 출시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메가 드라이브'라는 상표명을 다른 회사에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세가 제네시스'라는 이름으로 출시하게 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삼성전자를 통해서 수퍼 겜보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했다가 나중에 수퍼 알라딘보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발매되었다.

1997년 세가가 생산 중단할 때까지 전 세계에 3,075만 대가 팔렸으며, 이 가운데 일본에 358만 대, 북미 지역에 2,000여만 대, 나머지 지역[21]에 839만 대가 팔렸다.[22] 일본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좋은 성과를 거뒀는데, 세가의 게임기 가운데 가장 좋은 판매량 성적을 낸 제품이기도 하다. 이 당시에 세계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닌텐도의 독주를 유일하게 막았고, 나름의 라이벌 양강체제를 구축한 회사가 세가이다. 생산 중단 이후에도 미국에서는 마제스코(Majesco)에서 세가의 라이선스를 얻어 각각 150만 대를 생산 판매했다. 브라질에서는 테크토이에서 21세기 넘어서까지도 세가에 라이선스를 받아 생산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체유통 게임이나 독자적인 개량 기기들을 생산하고 있다. 남미 시장에서 테크토이판 메가 드라이브 역시 테크토이의 독자적인 마스터 시스템 기기들과 더불어 브라질 서민들의 가정용 게임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23]

일본에는 1988년 10월 29일에 발매했으나, 바로 1주일 먼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를 발매한 바람에 완전히 묻혔다. 나중에도 패미컴은 드래곤 퀘스트 4, 파이널 판타지 III 같은 우수한 게임이 계속 나왔고, 슈퍼 패미컴이 나온 이후로도 한 동안은 계속해서 팔렸을 정도로 인기 좋은 존재였다. 게다가 슈퍼 패미컴이 곧 나온다고 언론에 뻥카를 흘린 '나와나와 사기' 때문에 메가 드라이브를 구입한 유저가 매우 적었다. 그 시기도 고작 2년 여에 불과했고, 슈퍼 패미컴은 게임기의 동시 발색 성능이나 동시 발매작 슈퍼 마리오 월드, 스트리트 파이터 2, 파이널 판타지 IV, 파이널 파이트, 그라디우스 III, 악마성 드라큘라(SFC) 같은 인기 발매작의 선발매 등으로 메가 드라이브가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그 또한 하술할 당시 북미에서 엄청난 폭발적인 인기였던 소닉 더 헤지혹 조차도 일본에서 파이널 판타지 IV가 나오는 덕분에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하거나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일본에서의 메가 드라이브 실패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단은 그 시절 닌텐도의 위상은 너무나도 강했고, 세가 역시도 일본 시장에 통하는 게임을 많이 준비하지 못했다. 물론 세가 마크 3 당시의 패착의 원인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세가의 사업 모델이 근본적으로 아케이드의 성공을 집으로였을 뿐 아니라 닌텐도의 눈치를 보거나 심기를 거스리기 않을려고 했기 때문에 메가 드라이브에 참여하려는 회사가 별로 없었다고도 한다. 세가 역시 자사의 아케이드 게임 이외에도 메가 롤플레잉 프로젝트라던가 팔콤과의 합작회사 세가 팔콤을 만들어 대응했고, 판타시 스타 시리즈를 만들고, 샤이닝 시리즈도 내놓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본 내 보급대 수는 겨우 358만 대. 2002년 5월 10일, 17일자 주간 패미통 700호 특집 기사에 따른 당시 일본에서의 메가 드라이브 고전의 이유로 RPG의 부족을 원인으로 들었다.[24][25] 당시 또 다른 경쟁 게임기였던 해외 시장에선 약 190만 대 팔아 죽을 쑨 PC 엔진의 일본 판매량은 약 390만 대로 그만큼 메가 드라이브는 일본에서 많이 팔리지 않았다.

파일:320px-Welcome_to_the_next_level.png
미국 광고 슬로건

북미에는 '세가 제네시스(Sega Genesis)'라는 이름으로 발매했고, 대한민국에는 삼성전자에서 1990년에 수입하여 '수퍼 겜보이/슈퍼 알라딘[26]보이'로 판매했다. 유럽판 이름은 일본판과 같다.

북미에서는 제네시스 출시에 앞서 마케팅을 담당한 Tonka가 너무나 무능해서 아타리와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거절당해서, 1989년 8월에 뉴욕과 LA에서 제한적으로 출시하게 됐다. 하지만 미국 역시 NES의 천하였기에 공략이 쉽지 않았다. 1989년 아타리 사장 출신 마이클 카츠를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으로 영입하여 "Genesis does what Nintendon't"(아래의 CF 문단 참조) 슬로건을 내세워 유명 인사들에게 게임을 선물하는 등의 마케팅을 펼쳤으나 고전은 이어졌다.

결국 나카야마 하야오 세가 사장은 1년만인 1990년 마이클 카츠 대신 유명 장난감회사 마텔의 전 사장, 막 그만두고 가족 여행을 즐기고 있던 토머스 칼린스키[27]를 하와이까지 가서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토머스 칼린스키는 미국식 게임을 출시할 것[28], 공격적인 마케팅을 지속할 것, 게임기 가격을 내릴 것, 번들 게임인 수왕기 소닉 더 헤지혹으로 바꿀 것이라는 네 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이 계획은 일본 본사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컸으나 나카야마 하야오 사장이 승인해 주었고, '소닉'이라는 게임의 우수성이 매스컴은 물론이고 소비자에게도 인정받아 당장 1991년 8월부터 NES를 큰 차이로 앞질렀다. SNES는 발매 직후라 본체 보급과 게임이 적었던 것도 한몫했고 당장의 성능과 그래픽적 차이도 서양인들 눈엔 별 차이 없이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SNES + 슈퍼 마리오 월드가 199달러일 때 세가는 제네시스 + 소닉 번들이 149달러라는 가격을 내세워 1991년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57.8%를 차지하며 닌텐도를 꺾는다.

제네시스에 소닉이 있다고 한들 닌텐도의 게임들은 우수했기 때문에 이를 게이머들이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고 반응하지 않았지만 칼린스키 팀의 교활하리만치 뛰어난 마케팅 수완은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가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게 만들었다.[29] "형들이 세가를 하면 동생들도 자연스레 세가를 할 수밖에 없겠지?"하는 생각으로 'Blast Processing(블래스트 프로세싱)'[30]이나 'Welcome to the next level' 같은 쿨한 문구로 어린이 대신 청소년, 대학생들을 사로잡았으며( 북미판 CF 문단의 아래 광고 참조) 이렇게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그치지 않고 마리오 카트를 느릿느릿한 트럭에 비유하는 광고를 만들어 닌텐도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식으로 만든 마케팅과 우수한 게임들로 닌텐도를 상대로 1991년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4연속 같은 시즌의 매출량에서 승리를 거두는 대성공을 했다. 마케팅에 무지막지한 돈을 쓰긴 했지만 일본에서 쓰는 돈의 절반도 안되는 돈으로 미국 시장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할 정도로 성과가 높았으며, 덕분에 모토로라의 68000 CPU 사업도 대박을 쳐 세가는 애플과 함께 모토로라로부터 공로상까지 받는다.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이러한 성공으로 적어도 미국 시장에서 만큼은 패권을 차지할 것 같았지만, 공을 넘겨주기 싫은 일본 세가 본사의 집요한 방해와 나카야마의 변덕에 미국 세가도 슈퍼 32X라는 자폭을[31] 했고, 나카야마가 제멋대로 강행한 세가 새턴의 무리한 발매와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강자의 등장으로 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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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메가 CD

1990년대 초반은 CD-ROM 게임기의 태동기였다. NEC 허드슨에서 1988년에 이미 PC 엔진의 CD-ROM2라는 도킹 스테이션을 발매하면서, 게임기 회사들은 롬 카트리지에 비해 생산 단가가 저렴하고 획기적으로 많은 용량을 저장할 수 있는 CD-ROM의 잠재력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닌텐도 역시 소니와의 플레이스테이션 계획을 통해 CD-ROM 확장 기기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세가 역시 같은 계획을 하고 있었다.

세가에서는 처음에 소니와 함께 단순히 메모리를 2배로 증가시킨 2만엔 대의 CD-ROM 드라이브 확장 기기를 계획했으나 동영상을 동작 시키기에는 기존의 메가 드라이브의 CPU 성능과 계획한 메모리 용량으로도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세가에서는 CD-ROM 드라이브 밖에도 메가 드라이브의 주 CPU인 모토로라 68000을 5 MHz 오버클럭해 12.5 MHz CPU를 집어넣었고, 768 KB의 RAM, 16 KB의 CD-ROM 버퍼 및 64 KB의 PCM[32] 사운드 버퍼, 8 KB의 게임 저장용 백업 메모리 등, 메가 드라이브보다 몇 배는 많은 용량의 메모리 서브 시스템과 CD-ROM에 내장한 PCM 음원의 원활한 재생을 위하는 사운드 서브 시스템도 추가로 구성해야 했다.

특히 768 KB의 메모리(6 Mbit)는 메모리를 증설한 PC 엔진 슈퍼 CD-ROM2의 256 KB(2 Mbit)는 물론이고 당대의 개인용 컴퓨터였던 PC-9801의 기본 메모리 용량보다도 대용량이었는데, 세가도 처음에는 2Mbit 정도로 예정하고 있었지만 게임아츠의 미야지 요이치가 끈질기게 메모리의 증설을 요구해서 결국 넘어갔다고 한다. 메모리 가격만으로도 1만엔이 추가되어 기기는 너무 비싸졌고 20만대 정도 밖에 팔리지 않아 서드파티는 게임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게임아츠는 책임을 지고자 CD-ROM 용으로 게임을 열심히 개발한다.

1991년 도쿄 국제 완구 박람회 첫 날인 1991년 6월 1일에 대중에게 최초로 공개했으며, 일본에 1991년 12월 12일, 북미에는 1992년 10월 15일, 유럽과 남미에는 1993년에 발매했다. 대한민국에서도 1992년에 삼성전자를 통해서 발매했다. 당시 표준가는 39만 8천원이었다.

북미에서는 91년 초 기초적인 기술 문서가 전달되기는 했지만 91년 중반 까지도 작동하는 개발기기를 전달받지 못했다. 미국 세가는 여러 더미 유닛들 중에서 부품들을 끌어모아 직접 작동하는 제품을 조립해 냈다고 한다. 미국 세가 직원들은 이를 두고 일본 세가가 실적을 가로채이거나 유출을 우려하려 벌인 방해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메가CD는 CD-ROM이 아닌 시판용 싸구려 오디오 시디급의 물건이라 평했으며 QA 팀이 기기를 테스트하다가 글자 그대로 불이 나버려 원인을 찾는데 일주일 24시간 꼬박 일을 해야 했다고도 한다.[33] 결국 미국에서는 약 1년 늦게 발매된다.


메가 CD 및 바리에이션 기기들의 부팅 화면 모음.[34] 네오지오 CD 등도 보다시피 당시 기술 수준상 CD를 읽는 속도가 굉장히 느려서, 로고를 잡아 늘렸다가 움직였다가 하면서 기다림에 지칠 플레이어의 시간을 떼워 줘야 한다(...). 위 영상에 포함하지 않은 X'EYE[35]의 부팅 화면은 여기를 참조. 그냥 원더메가 부팅 화면에서 W를 X로 바꿔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삼성 CD 알라딘 보이II는 일본판 메가 CD2와 바이오스가 동일하다.[36]

출시 당시에는 49,800엔이라는 상당히 비싼 가격에 나왔다.[37] 한국에는 35만 원에 발매했다. 엄청난 고사양에 슈퍼 패미컴에도 밀리지 않는 사운드 서브 시스템과 스프라이트 확대/축소/회전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대용량의 램과 고속의 CPU로 동영상을 많은 프레임률로 돌릴 수 있었다. 당시 경쟁 기기였던 PC 엔진 CD-ROM2 게임들의 경우 움직임이 없이 음성만 나오거나 입이나 눈만 움직이는 간단한 동작이거나 어쩌다 짧은 움직임만 보이는 것에 비하면 뚜렷하게 진보한 점이었다.

그러나 로딩 속도는 끔찍하게 느렸고, 동영상 재생 기능도 메가 드라이브의 칙칙한 64색 발색 성능 때문에 빛이 바랬는데, 이는 당시 집에서 흔하게 보던 VHS 비디오 테이프에 담긴 영화 화질보다도 뒤떨어지는 영상이었다. 경쟁 기기인 PC 엔진 CD-ROM2 보다 스펙상 성능은 아득히 앞서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그래픽이 떨어져 보이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메가 CD는 출발부터 세가의 특유의 삽질이 있었는데 대체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 이전에 게임 제작사들은 개발 키트를 미리 받아 제작에 들어가 있게 마련인데, 세가는 메가 CD를 공개한 후 그제서야 제작사들에게 개발 키트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메가 CD 동시 발매 게임으로 덜렁 2개 그것도 게임기 판매 견인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급조한 품질의 게임들[38]밖에 나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초반 기세를 장악하는데 실패했고, 낮은 보급 속도와 더불어 후반에는 세가 새턴 발매 예정으로 세가에서도 사실상 손을 떼버리는 등 생명 주기 내내 게임 기근에 시달렸다. Electronic Gaming Monthly 잡지 1993년 12월호에서는 세가에서 세가 새턴 게임 개발을 위해 더 이상 메가 CD 게임을 만들지 않고 있다는 소문도 보도했다. 여기에 프론트 로딩 방식의 CD 트레이가 약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쉽게 부러진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이미지가 더욱 나빠졌다.

또한 신기종이 발매되면 양질의 게임들을 잇달아 투입해 판매량을 끌어올리는것이 기본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세가는 자사의 대표 게임인 소닉 더 헤지혹 2, 샤이닝 포스 2, 랜드스토커, 판타시 스타 4 등을 '일본에서만 200만이 넘는 메가 드라이브 유저를 저버릴 수 없다'는 명목하에 전부 메가 CD가 아닌 메가 드라이브로 출시한 것 또한 메가 CD의 몰락에 일조했다.[39]

1993년 4월 23일에 메가 드라이브 2의 발매와 더불어 메가 CD 2를 29,800엔이라는 저가로 출시했지만 상술한 문제는 여전한지라 판매량에 별반 도움이 되질 못했고, 그나마도 세가에서 1993년 겨울 소비자 가전 박람회(CES)부터 차세대기 세가 새턴에 대한 홍보를 시작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세가는 세가 새턴 발매 이후 1년여만인 1996년 1분기에 메가 CD의 생산을 종료했다. 최종 판매량은 224만 대이며, 그 중 일본에서는 겨우 40만 대가 팔리는 데 그쳤다.[40] 이런 부진 또한 닌텐도가 CD-ROM 드라이브 기기로 이행하지 않는데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저조한 판매량에도 차세대기의 실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처음으로 CD-ROM 드라이브를 탑재했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많은 PC 엔진 CD-ROM2과는 다르게 게임 저장용 백업 메모리를 내장해 안정적인 게임 저장을 할 수 있고, 강력한 성능을 이용한 독특한 작품도 제법 나왔었다. 북미에서 폭력성 논란으로 유명했던 나이트 트랩[41] 같은 게임이나, 실피드 처럼 폴리곤을 사용하고 배경에는 동영상을 돌리는 식의 놀라운 게임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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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슈퍼 32X

1993년 말부터 3DO, 아타리 재규어 같은 차세대 게임기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가의 나카야마 하야오 사장은 메가 드라이브와 차세대 게임기와의 간극을 메꿀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닌텐도 진영에서도 슈퍼 패미컴 게임들에 슈퍼 FX칩 같은 보조 연산 특수칩을 넣기 시작했고, 세가에서도 버추어 레이싱을 메가 드라이브에 이식하는 데에 보조 연산 특수칩인 세가 버추어 프로세서를 넣었다.[42]

차세대 게임기들이 1993년부터 등장했음에도 1992년부터 개발하던 세가 새턴이 1994년 말까지 내보낼 수 없게 되자 세가는 처음에는 프로젝트 주피터로 새 게임기를 계획했으나 세가 오브 아메리카(세가 미국지사)의 연구 개발 부서의 수장이며 임원이었던 조셉 밀러가 이미 성공한 플랫폼인 세가 제네시스를 제쳐두고 새로운 플랫폼을 6~9개월 만에 개발하려는 계획에 우려를 드러내면서 제네시스의 주변기기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세가와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독립 게임기로 계획하던 프로젝트 주피터를 폐기하고 대안으로서 제네시스의 주변기기 프로젝트 마즈를 추진하여 세가 오브 아메리카에서 개발했는데, 이것이 슈퍼 32X이다. 광고 구호는 "poor man's entry into 'next generation' games."(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차세대 게임기).

북미에는 11월 21일에 <제네시스 32X>('세가 32X'로 알려져 있다)라는 이름으로, 일본에는 12월 3일에 <슈퍼 32X>라는 이름으로, 유럽에는 12월 4일에 <메가 드라이브 32X>라는 이름으로 발매했다. 브라질에는 <메가 32X>라는 이름으로 발매했고, 국내에는 삼성전자에서 일본판과 같은 이름으로 발매했다.

세가에서는 32X를 차세대 게임기라고 주장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게 미봉책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1993년 겨울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 1994년 여름 도쿄 국제 완구 박람회, TBS의 보도 등 새턴 관련 소식들이 미국의 게임 잡지를 거쳐서 알려진 데다가 세가 새턴을 이미 발매했음은 AVGN이 언급한 대로 닌텐도 파워로 대충 다 알려졌기 때문이다. 159 달러의 높은 가격에도 94년 11월 홀리데이 시즌에 32X를 발매하여 60만 대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사실 이마저도 세가 새턴 보급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던 일본 세가의 비협조로 인하여 100만 대의 주문을 소화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6개월 뒤인 1995년 5월에 E3 세가 컨퍼런스에서 새턴을 갑작스레 발매하여 소비자부터 도소매상, 개발사, 심지어 세가 자사에까지 물을 먹였고, 같은 날에 플레이스테이션 발표회장에서는 "299!" 한마디만을 외치는 등 세가는 자신들의 관짝에 스스로 못뚜껑을 박아버렸다. 미국에서 마케팅으로 닌텐도의 숨통을 조르던 세가가 그 마케팅으로써 자신들의 이미지를 다 깎아먹고 만 것이다.

일본에서는 새턴이 이미 나왔는데 뭔 뻘짓이냐며 외면했고, 32X가 발매된 바로 그 날에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을 발매했다. 결국 1995년 말에 80만대만 팔리고 단종됐다. 국내에는 삼성전자에서 정발했지만 너무 고가였던 20만원이었다. 당시 메가 드라이브가 여러 번들 팩을 끼고 무선컨트롤러를 동봉해 10만원 초중반대에 구매가능한 상황이었다.[43] 게임기가 아닌 일개 부속품으로 보기엔 2020년대 기준으로도 만만찮은 가격이었고, 견인할 게임이 전무해서 결국 폭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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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세가 새턴

메가 드라이브로 크게 성공한 세가는 1992년부터 이미 32비트 차세대 게임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무려 4군데에서 프로젝트를 가동해 각각 '새턴', '마즈', '주피터', '넵튠 프로젝트'로 불렸다. 프로젝트 주피터는 뒷날에 프로젝트 마즈로 대체했는데, '프로젝트 마즈'로 불린 것은 4번째 하드인 메가 드라이브의 확장기기라는 의미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슈퍼 32X를 참고하자. 그리고 프로젝트 넵튠은 세가 넵튠 문서를 참고.

'새턴'이라는 이름은 세가의 여섯 번째 게임기 제작 프로젝트라는 뜻으로 태양계의 6번째 행성인 토성에서 따와 임시로 붙인 프로젝트 이름이나 개발 정보 등이 유출되어 이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그대로 정식 명칭이 되었다. 약칭은 ' 새턴'과 ' SS'.

세가 새턴은 1992년부터 약 2년 동안 개발되었고, 32비트 차세대 게임기 개발 프로젝트명이었던 새턴 프로젝트는 일본 세가의 컨슈머 연구 개발부에서 개발했다. 사토 히데키(佐藤秀樹)는 연구 개발부의 부장으로서 프로젝트를 감독했고, 하마다 카즈히코(浜田和彦)를 중심으로 27명의 연구원들이 개발했다. 세가 오브 아메리카에서는 메가 드라이브와의 호환성을 고려하여 모토로라 68020으로 갈 것을 주문했지만 사토는 좀 더 큰 도약이 필요하다고 보고 RISC CPU와 CD-ROM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CPU로 자사의 아케이드 보드인 시스템 32과 MODEL1에 쓰인 NEC V60을 검토했다. 마침 슈퍼H RISC CPU 개발을 완료한 히타치제작소는 세가가 차세대 게임기를 개발하기 위한 CPU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수해 세가에 자신들의 신제품 CPU를 채용할 것을 제안했고, 사토는 사양이 괜찮다고 생각해 협상을 개시했다. 그해 가을쯤에 SH-1이 아닌 세가와 히타치제작소가 조인트 벤처 합작 회사를 만들어 후속 CPU SH-2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 그리고 1993년 1월부터 개발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 히타치제작소에서 개발한 연구원들의 말에 따르면 1993년 5월부터 7월까지는 너무 바빠서 쉬는 날도 없이 일했다고 했다. 그리고 NEC의 SDRAM, 도시바의 플래시 메모리를 채용했다.

문제는 그 뒤에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의 사양서와 프로토타입 실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세가가 전달 받았다는 점이다. 잡지 Next Generation에 따르면, 1993년 11월에 세가와 친한 퍼블리셔에서 이런 정보를 세가에 전달했다고 한다. 이를 본 세가의 나카야마 하야오 사장은 컨슈머 연구 개발부 연구원 전원을 소집해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시스템은 거의 다 완성했기 때문에 크게 수정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지만 발표를 몇 달간 연기했고, 그 몇 달간의 기간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사양에 따라가려고 연구했다. 그리고 2D 성능과 텍스처 매핑 성능을 올릴 수 있는 비디오 칩셋을 하나 더 추가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이 히타치제작소의 VDP1이다. VDP1은 실질 무제한(메모리 한계까지)에 가까운 폴리곤(스프라이트) 발생과 텍스쳐 매핑, 고러드 쉐이딩이 가능한 강력한 프로세서였다.

사토는 3D에 익숙한 개발자가 많지 않았던 당시 상황과 더 많은 스프라이트를 요구하는 수요에 맞춰 보수적으로 새턴을 스프라이트 기반 아키텍처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3D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이 막대한 스프라이트(대략 4~5천 개)가 나오는 것을 이용해 유사 폴리곤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지오메트리 연산 장치 같은 것을 붙이면 플레이스테이션과 다를게 없다보니 이런 형식으로 만들었고 그때는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플레이스테이션이 정식 발표되며 폴리곤이 30만 나온다는 말에 사토는 SH-2를 두 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두고 하마다 카즈히코는 1995년 12월 잡지 Next Generation과의 인터뷰에서 "SH-2는 비용과 효율의 이유로 선택했습니다. 이 칩에는 DSP와 유사한 계산 시스템이 있지만 CPU 하나로 3D 월드를 계산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뭔가 허전해서 CPU를 두 개 쓰는 멀티 프로세서 머신, 64비트 같은 식으로 포장한다. 여기에 CD-ROM 제어용으로 SH-1을 투입했다.

이렇게 만든 새턴은 초기엔 컴파일러도 라이브러리도 없어서 모두 어셈블리어로 병렬 프로그래밍을 해야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세가의 프로그래머야 가능할지 몰라도 서드 파티에게는 무리였고 그림 한 장 띄우는데 일주일은 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버추어 파이터도 데이토나 USA도 실은 2D 스프라이트 기반으로 확대 축소하여 만들었고, 그때까지 3D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았던 업체들의 요청에 의해 버추어 파이터의 코드를 조금 손본 정도의 예제 코드와 라이브러리를 배포했다. 그러는 와중 소니는 빵빵한 라이브러리, SDK, 3D 그래픽 성능, 소니 그룹 차원의 강력한 지원에 심지어 대형 개발사에는 오가 노리오가 직접 참여를 부탁하러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IGN의 '세가의 역사'라는 기획 기사( 번역)에 따르면 이 기계의 프로토타입을 본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 토머스 칼린스키는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64 개발에 참여한 3D 그래픽 전문 회사인 실리콘 그래픽스와의 기술 제휴 계획을 제안했지만 메가 드라이브를 크게 성공시킨 세가 오브 아메리카에 비하면 위축했던 일본 세가 본사 쪽에서 자존심을 세우며 거절하자 세가 오브 아메리카에서 소니와의 협업을 차선책으로 제안했으나[44] 역시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제안한 실리콘 그래픽스와의 기술 제휴 계획이 뒷날에 닌텐도 64로 만들어졌고, 또한 소니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을 내놓았다. 세가 오브 아메리카는 제갈량급 책사였지만, 세가에서는 자존심 하나만 믿고 나가다가 최악의 실책을 두 번이나 저지른 셈이다. 결국 세가 오브 아메리카는 새턴의 개량을 포기하는 대신 슈퍼 32X를 발매하여 메가 드라이브와 새턴의 개발 난이도 간극을 메꾸는 것으로 서드 파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버추어 파이터로 3D 게임 면에서 기술을 선도하고 있었던 세가가 처음부터 새턴을 2D와 3D 성능이 균형잡힌 게임기로 계획한 것과 카트리지 슬롯까지 넣은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1994년 11월 22일에 일본에 출시했고, 미국에는 1995년 5월 11일, 유럽에는 1995년 7월 8일에 출시했다. 한국에는 삼성 새턴이라는 이름으로 1995년 9월 2일에 출시했다. 아래 문단 참조.

뒤늦게 발매한 닌텐도 64는 놔두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 새턴은 그야말로 너 죽이지 못하면 나 죽는다는 식으로 그때까지 게임기 시장에서 볼 수 없던 발 빠른 가격 인하를 단행하는 등 엄청난 경쟁을 펼쳤다.

게임 시장에 처음 진입한 SCE와는 다르게 세가는 이미 전통적인 메이커인지라 서드 파티층도 탄탄했고, 무엇보다도 세가 자체의 게임 자산이 우수했다. 아케이드 시장에서 막대한 게임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버추어 파이터, 버추어 캅 등의 인기 게임을 이식하여 플레이스테이션과 호각, 그 이상으로 대결했다. 새턴 측에서 판매 대수 1백만 대, 2백만 대 라인을 먼저 끊었을 정도였다.[45] 두 게임기 초기에만 해도 "역시 3D보다는 2D가..."하는 경향이 강해서 모두 세가 새턴의 승리를 예상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초반 기세는 새턴이 더 좋았고, 플레이스테이션의 선전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46] 특히 출시 약 1년 뒤인 1995년 12월에는 버추어 캅, 버추어 파이터 2, 세가 랠리 챔피언십의 아케이드 이식작을 잇달아 발매했고, 모두 히트하면서 연말 매출을 싹쓸이했다. 참고로 1995년은 세가가 가정용 게임기 역사상 유일하게 1위를 했던 해이며 세가 역사상 최고의 매출을 올린 해이기도 하다.[47]

1995년은 아케이드 이식 게임들의 인기가 가장 좋은 해였고, 여기에 다른 회사의 게임기로는 자사의 게임을 직접 내지 않던 SNK[48]에서 1995년 11월 새턴으로 게임을 발매하는 것을 선언하며 그 시작으로 더 킹 오브 파이터즈 '95 아랑전설 3를 이식하겠다고 밝혀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한 달 뒤 플레이스테이션으로도 참여를 표명하면서 차세대로의 전환이라는 것이 알려지긴 했지만, 2D에서 우위에 있던 새턴이 이식 품질로서 압도적이었기에 훨씬 호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새턴은 발매 전부터 문제가 생겼다. 새턴은 CPU, 비디오, 오디오 칩만도 각각 두 개씩에 그 외에도 각종 칩들로 도배가 되어 있어서 제조 비용이 기본적으로 매우 비싼 데다가 전부 외부에서 사와야 했기 때문에 가격을 낮추기도 어려웠다.[49] 또한 당초 49,800엔에 발매할 예정이었지만 플레이스테이션이 39,800엔에 발매를 하는 바람에 경쟁을 위해 초기 프로모션이라며 5천 엔 할인판매를 했고 이는 본체를 팔면 5~6천 엔 손해를 보는 구조로 이어져 팔면 팔수록 적자가 났기 때문에 영업 쪽에서는 적자 실적이 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파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었다.[50] 세가가 새턴 판매에 대해 소극적임을 눈치챈 서드 파티들은 새턴으로의 게임 발매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이런 저런 게임을 발매하긴 했지만 남코 캡콤, 코나미 정도를 제외하면 1995년에 출시한 게임들은 모두 하나같이 영 좋지 않은 게임들 뿐이었지만[51] 이듬해인 1996년 3월 바이오하자드[52]와 이후 크래쉬 밴디쿳의 예상치 못한 대흥행, 철권 2의 발매 등으로 아케이드 이식작에 대한 의존도가 높던 새턴보다 더 우위에 서게 된다. 또한 간단한 구조에 따른 경쟁력 있는 생산 단가를 무기로 가격 인하 공세도 펼쳤다.

그리고 1996년 슈퍼 마리오 64, 툼 레이더, 바이오하자드, 크래쉬 밴디쿳을 필두로 전체적으로 3D 게임 시장으로 흐름이 넘어가자 새턴은 빈약한 3D 처리 능력으로 3D 게임에서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이후 급속도로 게임기 시장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1996년은 스퀘어가 플레이스테이션으로의 이적을 선언, 그해 8월 토발 No1의 데모 디스크로 파이널 판타지 VII의 플레이어블 데모를 공개하며 세상을 뒤집어 놓는다. 물론 세가에서도 서드 파티 이탈을 막고자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에닉스에 가서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를 유치하고자 세가 사원들이 3D로 만든 DQ를 들고 가 데모 프레젠테이션을 했다고도 하지만 # 그 에닉스마저 1997년 1월에 플레이스테이션 진영 이적을 선언하면서 영입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53] 또한 닌텐도 64도 그동안의 닌텐도의 횡포로 서드 파티 회사들 대부분이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뛰어난 퍼스트 파티와 세컨드 파티인 레어의 3D 게임 명작들이 차례대로 출시되면서 닌텐도 64에게도 밀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서도 닌텐도가 1996년에 포켓몬스터라는 IP를 대형 프랜차이즈로 성공적으로 데뷔시키며 수명 말기로 여겨졌던 게임보이의 생명을 늘려버리는 데 성공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록맨 8, 록맨 X3 록맨 X4 같이 일부 인기작 서드 파티 회사의 게임들이 새턴으로 출시되긴 했지만 이들 역시 플레이스테이션으로도 출시되었던 멀티작이었기에 세가 새턴의 큰 흥행에 보탬이 되진 못했다.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64, 포켓몬에 완전히 밀린 막장기에 접어들자 세가는 1997년에 난데없이 세가타 산시로[54]를 만들어다가는 "セガサターン、シロ!"(세가 새턴, 해!)라는 광고 카피를 들이 밀며 굉장히 깨는 콘셉트의 광고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 캐릭터는 드림캐스트 발매 결정과 함께 《세가타 산시로 진검유희》[55]라는 《 세가가가》에 맞먹은 희대의 괴작을 내놓고는 (광고 설정상) 어느 테러리스트[56]가 날린 미사일과 함께 우주로 날아가 폭사한다. 중말기 이후로는 시장 경쟁에서 밀려난 PC-FX의 유저층을 흡수하면서 사쿠라 대전과 18추 미연시가 주력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그래도 세가 게임기 사이에서는 가장 많이 팔렸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완전히 참패. 전 세계에 926만 대를 팔았으며, 일본에만 574만 대를 팔았으니 다른 지역에서는 완전히 참패한 셈이다. 전작인 메가 드라이브가 비록 일본 판매량은 358만 대 수준으로 실패했지만, 해외에서는 2,700만 대를 넘게 판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서구권에서 실패한 이유의 하나로 메가 드라이브 최고의 인기 게임이던 소닉 시리즈를 하나도 발매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원래는 슈퍼 32X용으로 개발하다가 기종을 바꿔 세가 새턴용으로 소닉 엑스트림을 개발했으나 도중에 취소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특히나 북미 시장에서는 세가로써 최악의 수를 두었다. 본래의 계획은 일본 출시 10개월 뒤인 1995년 9월에 북미에 발매할 계획이였다. 그러나 나카야마 하야오는 세가 오브 아메리카에게 5월에 출시할 것을 지시했다.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상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카야마 하야오의 지시에 따라 1995년 5월의 E3 쇼에서 데모 쇼케이스를 연 후 "바로 구매 가능하다"라고 깜짝 발매했다. 가격은 399달러. 당장은 좋아 보였지만 이 때문에 문제가 줄줄히 발생하게 된다.

E3 1995는 당시 서양 게이머들에겐 지금까지도 회자가 될 정도로 큰 이벤트였다. 그 이유는 바로 세가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의 발표와 발매가 당연시 되었던 해였기 때문이다. 세가의 컨퍼런스 이후 소니도 플레이스테이션에 대한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당시의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아메리카의 사장이였던 스티브 레이스가 본인이 썼던 대본을 깡그리 무시하고 단 한마디, 299만 외치고 내려갔다. 즉 앞서 발표한 세가 새턴을 그대로 저격한 가격 발표였다. 새턴은 발매 때부터 6개월 후에나 나올 라이벌 기기에 비해 가격부터 지고 들어갔던 것이다.

소매점 쪽에서도 문제가 컸다. 깜짝 발매 당시 세가는 초기 물량을 토이저러스나 Software Etc. 같은 일부 대형 프랜차이즈 소매점들에게만 공급하고 중소형 소매점들에겐 차후에 공급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게임기는 발매 때 폭발적으로 팔려 나가는데 그 기회를 놓친 중소형 소매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북미 지역은 다른 제품의 경우에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금기였다. 그러나 세가 오브 아메리카는 결과가 불보듯 뻔한 데도 불구하고 본사의 명령에 의해 촉박해도 해야만 했다. 인터넷 판매 따위 없었던 1995년 시절, 당시 게임기는 그냥 소매점에 가서 구입해야 했는데, 정작 중소형 소매점들의 상당수가 위와 같은 이유로 게임기 입고를 거부해 구입이 힘들었다. 심지어 새턴의 게임조차 들이지 않은 곳도 많았다.

그 외에도 계획상 20개였던 동시 발매 게임이 6개로 줄었고, 그중 서드 파티 게임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한창 새턴 게임을 개발하던 서드 파티들도 깜짝 발매 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많은 판매를 위해 발매 때 게임기와 함께 나란히 진열하는 관례도 포기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서드 파티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스케줄은 엉망이 되었다. 또한 관계도 상당히 악화되었다. 또한, 가을 쯤 발매를 예상해 가계 계획을 세워뒀던 북미 게이머들도 갑자기 399달러나 되는 목돈을 지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100달러나 싼 플레이스테이션은 그만큼 매력적이였다.

이 덕분에 본래의 계획보다, 플레이스테이션보다 4개월 빨리내서 8만 대 판매라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고, 플레이스테이션은 단 이틀 만에 이 판매량을 뛰어넘었다.

실적면에서도 매우 처참했다. 세가 새턴 발매를 시작하기 직전인 회계연도 1994년 소비자 부문 매출액이 2,358억 엔인 반면에, 세가 새턴의 마지막 해이자 드림캐스트 발매 직전인 회계연도 1998년 매출액은 743억 엔으로 1/3 토막이 난 상태였고, 이 여파로 영업이익 역시 466억 엔에서 137억 엔으로 모두 1/3 토막이 났다. 심지어 1998년부터는 순이익에서 순손실로 적자전환했다. 이로 인해 세가도 자금 사정이 악화하면서 이미 1996년 봄부터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 개발팀을 비롯한 대다수의 개발 인원들을 구조조정하고 있었다.

1990년부터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이었던, 메가 드라이브를 크게 성공시킨 1등 공신 토머스 칼린스키는 1996년 봄부터 세가를 떠날 준비를 했다. 1996년 7월은 결국 세가를 떠났는데, 이 때부터 세가의 문책성 인사 조치를 시작했다. 세가의 창업주이면서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공동 회장, 데이비드 로젠과 나카야마 하야오는 책임을 지고 회장직을 사임했다. 떠난 토머스 칼린스키의 후임으로는 미국 혼다 출신의 이리마지리 쇼이치로를 세가 오브 아메리카 회장 겸 CEO로 임명했고,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아메리카의 부사장이었던 버나드 스톨라를 제품 개발 및 서드 파티 부문 부사장으로 고용했다.

버나드 스톨라는 세가에 오기 전부터 세가 새턴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E3 1997 세가 컨퍼런스에서 "새턴은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를 선언해 즉시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미 새턴을 구매한 북미와 유럽의 300만 유저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버나드 스톨라 부사장은 그들을 위해 출구전략을 만들었는데, 양질의 게임으로 선별한 것만 북미와 유럽 시장에 내놓기로 결정했다. 일본향이 강한 게임들의 출시는 전부 거절했다. 이는 북미와 유럽 시장의 새턴 게임 대기근을 유발했고 그나마 새턴에 게임을 냈던 개발사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하지만 이는 새턴 게임을 즐겼던 북미나 유럽인들에게 새턴에 대해 게임은 비록 적었어도 품질은 좋았다는 세가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고, 드림캐스트를 발매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개발의 어려움과 초반의 실수, 플레이스테이션의 약진 등으로 인해 서드 파티의 참여도 적은 것도 모자라 드림캐스트 발매 직후 서드 파티의 엑소더스가 극심하여 1998년까지는 200여 게임이 발매되었으나 1999년에 와서는 17개로 뚝 떨어졌다. 아무리 새로운 게임기가 나왔다고 해도 기존 플랫폼의 보급률이 높기 때문에 1~2년간은 게임이 더 나와야 하는데 이 정도로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새턴은 돈이 안 되는 게임기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이후 세가 새턴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1983년부터 취임한 나카야마 하야오 세가 사장은 1996년 회장직 사임 이후에도 1998년 6월에 세가 부회장 겸 아케이드 사업부 총괄이라는 명예직으로 인사조치 당했다. 당시 계획하고 있었던 신형 게임기 드림캐스트 발매를 지켜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 1999년 5월에 세가를 떠났다. 후임은 드림캐스트 기술 시연 영상으로 유명한 이리마지리 쇼이치로로 승진 인사였다.

경쟁 후속 기종이었던 PlayStation 2 이전 초기 모델의 하드웨어를 일부 계승하고 에뮬레이션으로 하위 호환성을 유지했으나 드림캐스트는 하위 기종과의 호환성 없이 출시했다. 그 간단한 플레이스테이션 조차도 플레이스테이션의 CPU를 플레이스테이션 2의 입출력 컨트롤러로 채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훨씬 더 복잡한 구조의 새턴을 드림캐스트에서 동작하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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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드림캐스트

세가 새턴은 일본에선 초반 잘 나갔던 기세와는 달리, 1996년부터 바이오하자드 철권 2의 밀리언셀러 달성, 크래시 밴디쿳의 대성공과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 7 플레이스테이션 발매 선언으로 완전히 힘을 잃어버렸다. 1998년 즈음에는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 바이오하자드 2, 철권 3, 메탈기어 솔리드가 차례대로 발매하면서 저항할 힘마저 남지 않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경쟁 기종 대비 애매한 성능으로 만들어진 세가 새턴 자체에 원인이 있기도 했지만 방만한 경영 탓도 컸다. 나카야마 하야오를 비롯한 경영진들은 재고 관리가 엉망이었고, 세가의 게임 개발자들은 많은 개발 비용을 들여 화려한 그래픽 얘기만 할 뿐 비용 회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오카와 이사오는 그에 대한 지적을 하면 나카야마 하야오는 게임업계에 대해 잘 모른다 같은 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오오카와는 게임은 잘 몰랐을 지라도 경영자인 그가 보기에 세가의 경영은 엉터리라고 생각했다. 오오카와는 세가는 손익계산서만 볼 뿐, 대차대조표나 현금흐름표는 살피지도 않는다며 비판했다. 결국 1997년 6월, 오오카와 이사오가 세가의 대표이사로 취임해 직접 세가의 경영을 챙기기 시작했다. # 그가 들어온 초기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가의 자회사나 손자 회사에 쌓여 있는 악성 재고 자산들의 상각 처리와 구조조정을 진행해 정상 회사로 만들었다. 1998년 회계 연도부터 약 4년간 이어진 대규모 손실은 저것과 새턴과 드림캐스트의 부진이 겹쳐져 벌어진 일이었다.

오오카와는 앞으로는 네트워크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생각에 더 이상 하드웨어 사업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차세대 게임기의 기획이 시작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모뎀을 반드시 추가하도록 했다. 당시엔 모뎀이 비쌌기 때문에(1996년에 나온 새턴 모뎀도 14,800엔이었다) 사내에선 반대가 많았지만 모뎀 추가 비용을 오오카와의 사재로 충당하면서 반대를 억눌렀다.

세가 새턴의 실패로 얻은 교훈으로, 게임기의 구조를 최대한 쉽게 만들고 개발 환경을 생각하여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을 잡아 Windows CE를 드림캐스트에 이식해[57] DirectX를 통한 개발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드림캐스트의 본체에는 Windows CE의 로고가 있다. DirectX 덕분에 세가가 지원 중단한지 오래된 지금도 드림캐스트를 통해 동인 게임을 제작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드림캐스트는 본체에 Windows CE를 내장하고 있지는 않다. Windows CE는 드림캐스트 게임 디스크, GD-ROM에 내장해 드림캐스트의 부트롬이 GD-ROM에 있는 Windows CE를 읽어들여 구동한다. 그리고 Windows CE를 사용하면 무거워서 대부분은 세가의 개발 도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NAOMI 기판으로 만든 모든 게임들은 Windows CE를 쓰지 않았다. 세가는 새턴 시절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라이브러리를 완성하여 배포했고 새턴 시절 처음 그림을 띄우는 데만 1주일이 걸렸던 것과 달리 드림캐스트는 3시간이면 가능했으며 CD를 구울 필요도 없이 하드디스크에서 직접 실행할 수 있을 정도로 편리해진다. 거기에 새턴의 호환 기판인 ST-V MODEL1 MODEL2의 힘에 밀려 아케이드와의 연동이 잘 되지 못했던 점을 반성, NAOMI를 적극 밀어주기 시작했다.

드림캐스트 계획이 대중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97년 4월 19일, 3dfx가 나스닥에 기업 공개를 위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올린 보고서에 세가의 차세대 게임기 개발에 3dfx의 부두 그래픽칩 기술이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을 공개하면서였다. 이로 인해 세가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러자 언론들은 빠르게 여러 소문들을 취재해 보도했는데, 세가가 NAOMI라는 이름의 아케이드 보드를 제작하고 있고 이를 기반으로 한 블랙 벨트와 듀랄이란 개발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새턴의 차세대 게임기 코드명이 DURAL이고, 세가 오브 아메리카는 3dfx 부두 밴시와 PowerPC CPU, E-MU 시스템즈[58]의 오디오 칩셋이 들어간 코드명 BLACK BELT, 일본 세가에서 히타치의 CPU와 NEC와 비디오로직의 PowerVR2 그리고 야마하 사운드 칩셋 기반의 코드명 GUPPY를 개발했다. 또한 1997년 5월 E3에서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버나드 스톨라 사장은 "세가 새턴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면서 세가의 차세대 게임기에 대한 기대가 높아져 갔다.
세가는 간부 회의를 개최해 일본 팀의 프로젝트를 채택하며 코드명도 좀 더 게임기 다운 이름인 'KATANA'로 결정했다. 사토 히데키는 차세대 게임기를 결정하는 회의에 대해 오오사카 이사오 당시 CSK 회장이 '사토는 8비트부터 새턴 때까지 실패해 많이 배웠으니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겠지'라며 결정했다고 말했다. 1997년 7월 22일 3dfx는 세가와의 차세대 게임기 개발 계약을 취소했다고 보도했는데, 사양이 결정된 것은 이 이전의 시기로 보인다.

참고로 그 결과로 3dfx는 부당한 계약 파기 및 불공정 경쟁, 기밀 횡령 등을 주장하면서, 1997년 9월 2일 세가와 NEC를 상대로 캘리포니아 고등 법원에 1억 5,500만 달러 규모의 소송을 걸었다. 1998년 8월, 법원에서는 3dfx의 손을 들어주면서 세가에게 블랙 벨트 관련 3dfx의 모든 지적 재산권과 영업 기밀 및 비밀 정보들을 3dfx에게 반환하고 1,050만 달러를 배상할 것을 명령했다. 세가는 이 명령을 받아들이면서 소송이 끝나게 된다. 3dfx에서는 세가와 차세대 게임기 개발 결렬의 이유를 '전통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가진 두 일본 대기업의 정치적 움직임 탓'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

1997년 10월 경, 세가는 비디오 게임 관계자들에게만 드림캐스트를 카타나라는 이름으로 시연했는데, 이 당시 시연했던 게임이 MODEL3 기판으로 제작했던 아케이드 레이싱 게임 스커드 레이스였다.[59] 이 때 기술 시연이 꽤 잘 됐었고, 쉬운 개발 환경이 꽤 먹혀들어 캡콤, 남코 등의 굵직한 회사들이 연달아 개발 의사를 밝히게 된다. 세가도 새턴 때부터 서드파티 영입에 공을 들였고, 이리지마리 사장도 인간 관계를 우선하여 열심히 뛴 덕분에 이 시기에는 '같이 하시죠' 같은 권유를 제법 받았다고 한다.

이후 사람 얼굴 모델링의 시연도 했는데, 이 얼굴 모델링의 모델이 된 인물은 당시 세가 부사장였던 이리마지리 쇼이치로(入交昭一郎).[60][61]



1998년 3월, 도쿄 게임쇼에서 이 후속 게임기의 이름을 드림캐스트라고 처음 발표했다. 이는 세가가 공식으로 차세대 게임기를 발표한 날이었으며, 동시에 첫 게임으로 D의 식탁의 후속작인 D2를 발표했다. 그 해 5월, 기자 회견을 통해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드림캐스트 모습을 드러냈다. 11,000명이 참가했고, 120곳의 서드파티가 개발 의사를 표현한 이 기자 회견은 드림캐스트의 미래를 아주 밝게 비추었다. 1998년 5월 21일, 세가는 아사히 신문에 사무라이들이 쓰러진 사진과 함께 '세가는 쓰러진 채인가?' 티저 광고를 실었고, 다음날인 22일에 사무라이들이 칼을 들고 서 있고 '11월 x일 역습, 드림캐스트' 라는 전면 광고를 싣기도 했다. #

1998년 11월 27일, 드림캐스트를 일본에서 최초로 출시했다. 드림캐스트는 발매 당시 준비해 놓은 15만대의 물량을 발매 당일 매진시켰다. 그러나 NEC의 PowerVR2 CLX 칩셋 수율 문제로 물량이 부족했으며, 동시 발매 게임들도 버추어 파이터 3TB를 빼고 형편 없었다. 그래도 이후 발매한 소닉 어드벤처로 드림캐스트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유카와 전무를 이용한 자학적은 캠페인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이번에는 세가가 정말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주었다. 투자 분석가들 사이에서도 드림캐스트는 소니에게 있어서 재앙이다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그러나 발매 직후 게임 가뭄으로 인해 연말 대목을 놓치고 만다.



1999년 3월 2일, 소니는 도쿄에서 플레이스테이션 미팅 1999를 통해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을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하며 반격에 나섰다. 실기를 공개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콘셉트만을 슬쩍 보여주는 이 행사에 비디오 게임 관계자가 1,500명 정도 모일 정도로 관심이 대단했다. 이때 드림캐스트는 한창 보급에 열을 올리는 시기였고 본격적으로 북미 출시도 준비하는 등 무척 잘 나가고 있었다.

드림캐스트의 맥을 죽일 필요가 있었던 소니는 이 때 DVD 비디오 재생 기능과 플레이스테이션과의 하위 호환 기능을 처음으로 공개하고[62] 이 밖에도 이모션 엔진, 200억 엔의 개발비, 테크 데모 영상[63], 천만 단위의 폴리곤 등의 과장된 스펙을 소개했다. 초조해진 세가는 결국 일본에선 발매된지 6개월만인 1999년 6월, 드림캐스트의 정가를 1만엔 인하해 19,800엔에 판매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생산 단가를 절감하지 않은 채로 그냥 가격을 인하한 것이기 때문에 대당 1만엔 가량 손해를 봤다. 메가 드라이브 시절처럼 어떻게 해서든 기계부터 깔고 보자는 계획이었을 것이지만, 새턴 때도 이러다가 크게 손해를 봤었다.

그리고 1999년 9월 9일 북미 시장에 드림캐스트를 $199의 가격으로 출시했다.[64] 북미 출시 또한 당시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로 많은 판매량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북미 동시 발매 게임 중 소울 칼리버 NBA 2K, NFL 2K, 그리고 북미 게이머들이 그렇게 기다렸고 세가 새턴에 출시될 예정이었던 소닉 게임인 소닉 엑스트림은 끝내 개발 취소되었다가 드디어 소닉 어드벤처가 출시되자 반응이 매우 좋아 백만장 이상 팔려 나갔다. 그렇게 1999년 12월 연말까지 북미에 150만대를 판매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NBA 2K 소울 칼리버의 화려한 그래픽에 북미게이머들은 감탄하며 찬사를 보냈다. 유럽에서도 반응이 좋아 1999년 12월 연말까지 50만대를 판매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드림캐스트는 세가를 부활시키고 그토록 염원하던 게임기 시장 1위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니 역시 이에 대항해 플레이스테이션 2라는 게임기 이름과 일본 출시일을 공개하고, 1999년 9월 가을 도쿄 게임쇼에 플레이 가능한 플레이스테이션 2 게임인 그란 투리스모 2000[65]과 철권 태그 토너먼트를 전시했다.

드림캐스트는 1999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어 양질의 게임을 많이 발매했다. 당대의 아케이드 최신작을 집에서도 그대로 즐길 수 있었고, 캡콤이나 SNK도 프레임 삭제나 로딩 문제가 없는 초월이식 수준의 작품을 다수 제공했다. 또한 여러 독점 게임들을 투입하여 어떻게든 연말 대목에서 이겨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더 많은 양의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64, 게임보이용 게임들이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드림캐스트가 돋보일 여지는 없었다.

1999년 12월에 등장한 D2와 쉔무는 기존 드림캐스트 사용자들만 샀고, 게임기 판매량 견인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특히 70억 엔의 개발비를 들였던 쉔무의 실패는 드림캐스트의 몰락에 일조를 하게 된다.

결국 세가의 본래 계획대로라면 최소한 1999년 여름 무렵에는 게임들의 높은 판매량으로 시장 1위에 진입했어야 했지만 그저 그런 가속만 붙은 채로 플레이스테이션 2와의 정면 승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플레이스테이션 2의 가격인 $299와 비교하면 확실히 저렴한 $199라는 가격, 게임기로서의 성능[66], 게임 개발의 간편함 등 드림캐스트는 플레이스테이션 2에 비해 거의 압도적이다 싶을 정도였기 때문에 2000년 초까지만 해도 '플레이스테이션 2를 드림캐스트가 이길 수도 있다.'는 얘기가 코어 게이머들과 애널리스트들 사이에서 여전히 흘러나왔다.

하지만 2000년 3월 4일, SCE는 플레이스테이션 2를 발매했다. 그로 부터 6일 후인 2000년 3월 10일 GDC에서 전 세계 PC 운영 체제 시장을 쥐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게임기 출시를 선언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가는 플레이스테이션 2가 발매된 2000년 3월부터 드림캐스트 포기 발언을 한 2001년 3월까지, 약 1년 동안 드림캐스트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2000년 한 해 동안 161개의 게임을 발매하였으며, 상반기에는 크레이지 택시, 여름에는 씨맨이 발매되었는데 이 씨맨이 무려 50만 장이 팔렸을 정도로 사랑받았다. 캡콤은 바이오하자드 -코드: 베로니카-와 네트워크 플레이를 지원하는 대전 액션 게임을 계속 발매했고, 연말에는 본격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인 판타시 스타 온라인을 발매했다.

2000년 10월 26일, 플레이스테이션 2가 북미에서 발매됐다.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 2는 이미 일본에서 2000년 한해 동안 게임기 공급 및 게임 부족을 겪게 되었으며 이에 세가는 2000년 12월 연말 시즌이 세가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0년 12월 연말 시즌이 되자 북미 게임 유저들은 드림캐스트를 구입하는 것보다는 공급 부족을 겪고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2를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또 플레이스테이션 2 게임 부족 문제 역시 하위 호환 기능을 이용해 기존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돌리거나 DVD 비디오를 보는 선택을 했다.[67]

세가는 미국에서 온라인 서비스 세가넷[68] 가입시 드림캐스트 무료 증정 또는 이미 드림캐스트가 있으면 2년 약정 조건으로 200달러의 리베이트 제공 등, 필사적으로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히려 손해만 점점 커지고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 2는 이미 발매일에 100만 대를 출하하였고, 이전 세대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64, 게임보이 컬러의 기세도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세가는 열심히 노력했으나 드림캐스트 판매를 견인할만한 결정적인 게임이 없었다. 2000년은 공급 부족 문제로 플레이스테이션 2의 해가 되지 못했고 세가의 해 역시 아니었다. 심지어는 2000년 연말 시즌에 가장 많이 팔린 게임기는 드림캐스트도 아닌 플레이스테이션의 염가형 모델인 PS one이었다. 북미 지방에도 NBA 2K1과 NFL 2K1을 투입하였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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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휴대용 게임기

3.1. 게임 기어

세가에서 1990년 10월 6일(일본 기준)에 야심차게 내놓은 휴대용 게임기. 발매시 정가는 19,800엔. 국내에는 삼성이 1991년 후반 삼성 핸디겜보이란 이름으로 정발했었다.

세가 마크 3와 동일한 하드웨어 사양에 4096색 LCD를 장착한 카트리지 교환 방식에 옵션인 TV 튜너를 장착하면 휴대용 컬러 TV가 되는 제품이었다.

그러나, 컬러를 선택했기에 기기가 커졌고, AA 배터리를 6개나 먹고도 사용 시간이 3~5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전지 용량이 작았고 가격도 꽤나 비쌌기에 건전지로 게임기어를 플레이한다는 것은 즉 돈이 무진장 깨지는 일이었다. 닌텐도가 단색조 LCD를 고른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자기들도 문제를 인지했는지 시거잭 어댑터나 충전식 배터리팩을 발매하긴 했는데, 애초에 게임기어 본체도 무게가 꽤 되는데 거기에 배터리팩 장착을 하면... 이건 사람이 들고 하라고 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닌지라 금방 사장되었다. 배터리팩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휴대성, 전지, 가격, 게임 등이다. 닌텐도는 일부러 단색조 LCD를 선택했고 경쟁사가 컬러를 선택하면 우리는 반드시 성공한다는데에 걸었는데 보기좋게 맞아 떨어졌다.

일본에서는 발매 1개월만에 60만대나 보급했지만 게임보이의 그늘에 가려 1996년 3월까지 일본 178만대를 포함 전 세계 1,062만대를 보급하는데 그친다. 비록 게임보이와의 경쟁에서 패배했지만 완전한 실패라고 하기에도 뭐했는데, PSP 이전까지 닌텐도의 라이벌 휴대기기 중에선 가장 많은 판매량을 가졌다. 소프트웨어는 일본 190여종, 전세계 390여종 남짓. 세가는 1997년 4월 30일 거치형 게임기에 집중하고자 빠르게도 서포트를 종료했지만, 미국의 장난감 회사 마제스코에서 세가에 라이선스를 얻어 약 4년 후인 2001년 중반까지 생산하고 단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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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노매드

세가에서 내놓은 휴대용 게임기. 1995년 10월 1일에 $180의 가격으로 북미 지역에서만 발매했다. 유럽은 물론 일본에서도 발매하지 않았다.

원래는 세가 JAL과의 협업을 통해 기내 엔터테인먼트용으로 납품한 메가 드라이브의 기내엔터판인 '메가제트'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기기의 특징은 제네시스의 게임 카트리지를 그대로 사용해서 휴대용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노매드에도 지역 코드가 존재해 북미의 제네시스 게임 카트리지만 구동이 가능했다. 이런 개념의 물건은 그보다 5년 전인 1990년에도 자사의 마스터 시스템 게임이 가능한 게임 기어[69] 허드슨 NEC 홈 일렉트로닉스의 PC 엔진 GT도 있었다.

하드웨어 사양은 메가 드라이브 그 자체이다. 게임 기어 시절에도 가정용 게임기인 세가 마스터 시스템의 스펙을 휴대용 기기에 거의 그대로 박던 것에서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여전히 배터리도 조루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재발했다. AA 배터리 6개에 3시간 20분밖에 쓸 수 없다는 점은 매우 치명적인 단점으로 취급받았다. 아타리 링스, 게임 기어와 같이 배터리 먹는 하마들이었다. 게임보이가 AA 배터리 4개에 15시간인 것과 비교해 보자.[70]

또한, STN LCD 특유의 심한 잔상도 문제였다. 메가 드라이브에는 주로 빠른 액션 게임이 많았는데, 이런 게임들은 STN LCD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악평을 받았던 제품들이었지만 나름 많이 팔렸던 주변기기 세가 CD 32X와의 연결을 전혀 지원하지 않고, 출시한 시점이 세가 새턴 출시 5개월 이후였던 데다, 마케팅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71] 게다가 휴대용 게임기에서는 게임보이가 워낙 강세였으니 현실은 그저 상징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99년에 단종됐고, 그때 쯤에는 원래 가격에서 1/3 가격으로 덤핑했다. 애초에 이 게임기 자체가 메가 드라이브 슈퍼 패미컴과 대등하게 맞설 정도로 굉장히 큰 인기를 끌었던 북미 시장 한정 발매이긴 했으니 팬 서비스에 가까운 물건이라고 볼 수 있다. 판매량은 1백만 대 가량이었다. 휴대용 게임기로서 적합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완성도 면에서는 우수했기에 구매자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좋은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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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패배 선언과 그 이후

파일:닌텐도 세가 순이익.png

파일:세가 순이익2.png

결국 2000년 연말 시장의 패배로 세가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2001년 1월 23일 드림캐스트 생산 중지와 플레이스테이션 2로의 게임 발매라는 루머가 유출되자 세가의 주식은 급상승했고, 25일에[72] 보도를 일부 인정했으며, 31일에 기자 회견을 열어 가정용 게임기 사업 포기와 타사 게임기로의 게임 공급을 선언한다. 3월 29일에는 남코와 함께 버추어 파이터 4의 플레이스테이션 2 이식을 알리는 신문 광고를 게재했다. #

그러나 창고에 쌓인, 도 소매점에 풀린 드림캐스트는 순식간에 악성 재고가 됐는데 약 200만 대로 추산됐다고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1년 1월 31일부터 미국에서는 $99, 일본에서는 ¥9,900로 인하됐고, 2001년 11월 21일에는 다시 $49로 인하해 재고를 전부 소진시켰다. 이때 재고를 털며 같이 발매한 사쿠라 대전 3가 제법 쏠쏠하게(34만 장) 팔렸다. 재고뿐만 아니라 부품도 잔뜩 남아 있었는데 그건 사미의 파칭코 머신용으로 납품되어 최종적으로 150만개 정도 들어갔다고 한다.

이 여파로 세가의 재무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2001년 2월 1일 오오카와 이사오 CSK 회장은 사재 850억 엔을 세가에 출연할 계획을 밝혔다. 인터뷰 다음 달인 3월 16일 심부전증으로 별세하면서 고인의 유지대로 전액 증여했다. 모기업 CSK에서도 제3자 배정 방식의 유상 증자로 1천억 엔 이상 세가에 자본을 수혈해야 했다. 또한 이 때문에 2001년에만 세가 종업원의 약 1/3 정도가 정리해고로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렇게 드림캐스트는 2001년을 1월 31일을 기해 스스로 사망진단서를 제출했지만 만들던 게임은 계속 나와서 2001년에 118개의 게임이 발매된다. 2002년까지도 세가는 사쿠라 대전 4를 비롯해 여러 게임들을 발매했다. 2001년 3월 31일에 생산 중단 선언 이후 세가는 2002년 6월 이후 CERO 18[73] 게임 발매를 허용했는데[74], 그 덕분에 이후 드림캐스트는 NEC 인터채널과 KID 놀이터가 되어서 2004년까지 미소녀 게임[75]들이 꾸준히 발매된다. 2005년부터는 매년 게임이 두 개씩만 나와 사실상 단종 상태가 되었고, 2007년 카라스가 마지막 게임이 됐다. 보급 대수 약 913만 대, 일본 내 발매 게임은 499개였다.
[1] 실제로 콜레코비전과 SG-1000이 동시에 호환되는 대만산 호환 기종이 나오기도 했다. [2] AVGN 록키 편에서 게임은 깠지만, 그래픽은 대단하다며 놀라기도 했다. [3] 일부 타사에서 만든 게임 이식도 세가에서 했는데, 이 게임기용으로 나온 타사 게임 이식판은 게임 첫 화면에 'Reprogrammed Game (년도) SEGA'라고 적힌 것들이 많다. 다만, 실제로는 이식 작업을 하청한 회사가 따로 있는 경우도 제법 있다. [4] 한참 아케이드 사업이 활황이던 시절엔 아케이드 사업부에서 가정용 게임기 사업부로 옮겨가면 좌천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5] 대신 북미에서는 후속기인 메가 드라이브가 크게 성공. [6] 예를 들어서, 브라질에서 플레이스테이션 4를 구매하려면 관세 때문에 미국 값의 5배에 육박하는 가격을 자랑한다. [7] 1997년에는 90% 정도가 브라질에 출시한 물량이었다. [8] 세가 SG-1000 마크 II용 키보드인 SK-1100이다. 하지만 세가 마크 III도 하위 호환이 되다 보니 이 점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9]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된 게임팩 중 삼성 마크가 아닌 세가 마크가 붙은 게 오크스판 팩이다. [10] 이 작명 때문에 게임기 이야기를 할 때 게임보이와 무지하게 헷갈린다. 여담으로 게임보이도 같은 달에 일본에서 출시했다. [11] 이 현상은 훗날 닌텐도 DS가 유행하자 사람들이 휴대용 게임기를 닌텐도라고 부르는 것으로 재현되었다. [12] 하지만 분명 정식 발매 광고에서는 FM 음원을 내장했다고 써 있었다. 판타시 스타 등 일부 이식판에서 FM 기능을 빼버렸지만, 검성전(화랑의 검) 등에서는 FM 기능이 지원되는 걸 보면 어느 쪽의 문제인지... FM음원이 빠쟜만 게임은 일본판을 수입하기에 생기는 차이이다. [13] 그 당시는 오늘날과 다르게 매체가 롬팩이었기 때문에 용량의 제약이 커서 한글화가 훨씬 어렵다. 게임기 자체로 한글을 표기하기가 만만치 않은 것도 있어서 상당히 지난한 작업이었다고 한다. [14] 브라질은 FIFA 94도 품질을 떨어뜨려 이식한 듯. [15] 이 때문에 1991년까지는 국내에서 겜보이용 게임이라고 내놓았던 것들이 재믹스를 위한 MSX1판도 같이 발매하기 위해서 그래픽은 MSX1이나 SG-1000 수준이었다. 그래서 겜보이(세가 마스터 시스템)의 315-5124 VDP가 가진 강력한 하드웨어 스크롤 기능조차도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재믹스가 완전히 죽어버린 1992년 이후에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MS9918A 하위 호환 모드 대신에 315-5124 VDP를 제대로 활용하는 게임들이 나왔었다. [16] 그래서 알렉스 키드 한글판을 에뮬레이터로 구동하는 경우에 게임이 바이오스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바이오스 형식으로 읽어들여야 한다. [17] 그런데 광고에서는 알라딘이 아니라 램프의 지니가 나온다. 이렇게. [18] 마스터 시스템과 메가 드라이브는 공통적으로 아타리 9핀 규격을 사용했기 때문에 패드가 호환되었다. 원래는 아타리 2600에서 사용한 규격인데 북미, 일본 가리지 않고 꽤 널리 사용된 규격이라 이들 외에도 MSX 코모도어 64, 아미가, X68000, FM TOWNS 등 다양한 기종에서 채용한 1980년대의 사실상 표준 규격이다. [19] 메가 드라이브가 주인공인 책이지만 토머스 칼린스키가 사장이 되고부터 그만두는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오는 시점까지의 세가, 닌텐도, 소니까지 당시 미국 게임 시장의 전반을 훑어볼 수 있다. 미국인과 미국 문화 그리고 게임 개발자가 아닌 사업가, 마케터 중심의 시각과 경험으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인 게임 마니아로서는 생소하지만 흥미롭거나 다소 엉뚱한 시각에 당황할 수도 있다. [20] 다만 FM 음원은 1980년대 초부터 상용화되어 여기저기서 쓰이고 있었으며 가정용으로도 PC-9801이나 FM TOWNS, MSX 같은 PC에 탑재되고 있었다. 세가에서도 비록 내수용이지만 먼저 나온 세가 마스터 시스템에 탑재되기도 했고 칩의 유출이 걱정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때 당시에도 사운드 블라스터는 커녕 애드리브 사운드 카드를 일반인이 자작해서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보니 일반인이 들어도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21] 대부분 유럽과 특히 남미. 세가에서는 세가 마스터 시스템 시절부터 메르코수르 남미 공동 시장 지역 판매를 Tectoy에 맡겼는데, Tectoy는 한때 마스터 시스템과 메가 드라이브로 브라질 시장의 80%를 장악한 적이 있다. [22] 단종 이후 Tectoy의 판매량까지 모두 합하면 약 3,375만 대 정도가 된다. [23] 왜냐하면, 브라질에서 생산하지 않는 현역 게임기들은 무역 장벽으로 인해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반면(일례로, PS4의 브라질 정가는 북미 정가의 5배에 육박한다.), 테크토이의 세가 게임기들은 세가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 브라질에서 생산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테크토이는 이 시장을 노려 퀄컴과 힙작하여 지보라는 자체 제작 게임기를 출시했지만, 이쪽은 실패로 끝났다. [24] 그래서 당시 메가 롤플레잉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RPG 장르 같은 경우에는 이후의 후속 기종들도 타 회사의 경쟁 기종들에 비해 라인업이 상대적으로 부실해보이는 등 결국 세가 게임기들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잡고 만다. [25] 그래도 당시 SFC의 RPG가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를 비롯한 거의 모든 RPG 게임이 닌텐도 게임기 진영으로 발매되었기 때문에 MD가 상당히 죽쑨 거에 한몫했다. 거기에 당시의 스퀘어와 에닉스는 닌텐도에 충성했기 때문에 더욱 세가 진영 게임기로 낼 필요가 없었다. [26] 삼성에서 유통하던 세가 게임기의 한국명은 모두 '겜보이'였지만, 1992년 즈음부터 삼성에서 PC 브랜드를 '알라딘'으로 개명하면서 덩달아 개명했다. [27] 1944년 생. 당시 마일즈 연구소에 있었던 칼린스키가 비타민 영양제 상원 청문회에서 당돌하게 발언하던 모습을 지켜본 마텔의 창업자 핸들러 부부는 1972년에 그를 영입했다. 핸들러 부부는 당시 지지부진하던 바비인형 사업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 그를 영입했지만, 그는 오히려 현대 바비인형 특유의 넓은 스펙트럼과 그를 위한 연구 개발 투자를 제시해 바비인형 사업에 활기를 불어넣는데 성공했다. 1981년에는 마스터즈 오브 더 유니버스와 액션 피겨 히맨 개발을 감독했다. 히맨의 초기 디자인은 코난 더 바바리안과 비슷했지만, 칼린스키와 여러 마텔 중역들의 지시에 의해 밝은 피부톤과 단발의 금발 캐릭터로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마텔은 히맨의 코난과의 유사성 때문에 코난 지적재산권 회사(Conan Properties International)에게 저작권 침해 소송을 당했는데, 이 법정 분쟁에서 이기기도 했다. 마텔에서는 인텔리비전을 내놓았지만, 칼린스키는 비디오 게임은 상상력을 해친다는 이유로 싫어했다. 인텔리비전이 실패한 이후, 인텔리비전에 대한 선구안과 바비 인형, 히맨에 대한 공로로 1985년 마텔의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파벌 싸움에 밀려 결국 2년만에 마텔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의 장난감에 대한 공로로 장난감 산업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참고로 장난감 산업 명예의 전당 멤버로 월트 디즈니와 마텔의 창업자들인 핸들러 부부, 해즈브로의 창업자들인 하센펠트 형제가 있다. [28] 실제로 세가 오브 아메리카에서는 유명 미식 축구 선수인 조 몬태나와 계약해 미식 축구 게임을 만들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미식 축구 게임을 만들어본 적이 없던 세가 오브 아메리카 측은 여러 게임 회사들을 전전하다 마침 존 매든 풋볼을 위탁 개발한 EA를 만나 미식 축구 게임을 만들었는데, 조 몬태나 풋볼이다. 곧, EA에서는 존 매든 풋볼과 조 몬태나 풋볼 2개를 비슷한 시기에 연이어서 내놓은 셈인데, 그 가운데에 존 매든 풋볼이 대박을 터뜨려 소닉 더 헤지혹과 함께 제네시스(메가 드라이브) 북미 판매의 공신이 되었다. 토머스 칼린스키의 주장이 맞아 들어간 셈. [29] 일본에 21,000엔으로 출시됐음에도 미국에서는 $189라는 공격적인 가격에 책정됐으며, SNES가 $199로 미국 출시하기에 두 달 앞서 $149로 내렸다. 이듬해 닌텐도에서 SNES를 $149로 내리자, 세가 오브 아메리카에서는 소닉 번들 제네시스를 $129, 번들 없는 제네시스를 $99로 내리는 둥 가격 경쟁을 펼쳐 1991년 한 해에만 제네시스와 SNES를 2:1의 비율로 판매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이 기세는 1993년까지 이어졌다. [30] 메가 드라이브의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의 말에 따르면, 그 정체는 야마하 YM7101 VDP의 DMA(Direct Memory Access) 컨트롤러라고 한다. CRT 방식 디스플레이는 한 프레임의 마지막 스캔라인(줄)을 출력한 후 다음 프레임의 첫번째 스캔라인을 출력하기 전까지 휴지기( Vertical Blanking Interval)가 있는데, 메가드라이브는 개인 사용자 용도로 초월적인 성능을 자랑했던 MC68000 CPU의 작동 속도를 이용해서 휴지기 동안에 DMA 컨트롤러를 통해 VRAM에 저장된 프레임 데이터를 화면 출력을 담당하는 DAC에 고속으로 쏴주는(Blast) 기술적인 트릭이 가능했다. 실제로 메가 드라이브의 고속 연산을 가장 잘 활용한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를 보면 캐릭터의 스프라이트가 적어서 모션은 딱딱하지만 스크롤이나 이동은 60프레임이 나오는 대단한 성능을 자랑한다. [31] 칼린스키 본인 스스로도 32X를 시간끌기용 버림패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다. [32] FM TOWNS의 그것과 동일한 계열의 PCM 칩을 썼고 메모리 용량도 동일했다. [33] 게임이 데이터를 엉뚱한 곳에서 찾아서(seeking) 계속 읽기를 시도하느라 픽업을 움직이려고 모터를 돌리다가 과열되는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34] 재생시간과 저작권 표기 - 메가 CD (일본): © SEGA 1991 Ver 1.00
메가 CD 2 (일본): © 1993 SEGA Ver 2.00
세가 CD: © 1992 SEGA Ver. 1.00
세가 CD 2: © 1993 SEGA Ver. 2.00
메가 CD (유럽): © 1993 SEGA Ver. 1.00
메가 CD 2 (유럽): © 1993 SEGA Ver. 2.00
세가 CDX: © 1993 SEGA Ver. 2.21
멀티메가 (유럽): © 1993 SEGA Ver. 2.21
빅터 원더메가: © SEGA 1991 Ver 1.00
빅터 원더메가 M2: © VICTOR Co./SEGA 1993 Ver 2.00
[35] "© JVC / SEGA 1993 Ver 2.00"으로, 빅터가 JVC로 바뀌고 / 사이에 띄어쓰기가 생겼다. [36] 삼성 CD 알라딘 보이II는 위에 MEGA·CD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유럽판 MEGA CD 2에도 동일하게 새겨져 있다. (일본판은 CD·ROM이라고 새겨져 있음) 열기 버튼의 색상은 또 일본판 메가 CD 2와 동일한 건 또 아이러니하다. 이것은 마치 유럽판 SNES를 기반으로 한 것 같지만 일본판 롬팩이 지원되는 현대 슈퍼컴보이와 비슷해보인다. [37] 메가 드라이브 본체 정가의 2배가 넘는다. 참고로 당시 가정용 소형 세탁기 한대가 25,000엔이었다! [38] 울프 팀의 솔피스와 마이크로넷의 헤비 노바. [39] 세가가 하드웨어 사업을 지속하던 시절 '새 기종이 나오면 구 기종은 거들떠도 보지않는다'는 식으로 세가를 비난하는 게이머들이 많았는데, 실상 세가는 이처럼 구 기종을 너무 거들떠보다 새 기종을 말아먹은 전력이 있는 회사였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40] 주간 패미통 1996년 6월 21일호. 패미통 익스프레스. [41] B급 슬래셔 무비를 표방하고 만든 게임이었는데, 나이트가운만 입은 청소년 여성 등장 인물을 뱀파이어 괴한들(작중에서는 '오거(Auger)'라는 이름으로 불린다)이 기습해서 드릴 같은 기계 장치를 목에 박아넣고 피를 빨아들이는 장면이 문제가 되었다. 나름 제작사는 '모방범죄가 불가능한' 범죄 묘사를 위해 이런 장치를 굳이 만들어가며 촬영했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잔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는 점이 화근이었다. 당연히 이로 인해 1993년 미국 하원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렸고, 결국 이듬해인 1994년 배포사인 세가와 개발사인 디지털 픽쳐스에서는 논란이 많은 폭력씬을 삭제해 리콜을 결정했다. [42]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서 만든 DSP인 SSP1601이다. [43] 90년대 초반에는 500원짜리 과자가 꽤 비싼 축에 속했다. 프라모델도 3,000원이면 고가 소리를 듣던 시절. 당장 말단 공무원의 월급이 100만원 미만이던 시절인 데다가, 여성같은 경우는 3~40만원 정도의 돈을 받으며 경리일을 보던 시절이다. 그야말로 미친 가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44] 당시 소니는 "하드웨어 수익은 세가와 공동으로 가져가고 소프트웨어 수익은 개발사가 가져간다"는 파격적인 라이센스를 제안했는데, 소니가 이런 계약안을 제시한 이유는 당시 게임 시장 점유율을 장악하던 닌텐도가 라이센스권을 독점하여 갑질을 행사하고 있다보니 서드 파티들의 불만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니보다 기술력에서 앞서 있던 세가 입장에서는 개발 난이도에서 발생하는 서드 파티들의 이탈을 막으면서 차세대 게임기의 최적화도 이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45] 이는 당시에 세가 새턴이 플레이스테이션 발매 1개월 전에 제일 먼저 선방해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46] 당시 소니는 CD를 기반으로 한 게임 시스템을 닌텐도와 함께 만드려고 하다가 일이 틀어져서 직접 플레이스테이션을 만든 상황이었다. 당연히 업계 초짜가 그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방식으로 게임을 만든다고 하니 망할 것이란 예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업계 최강인 닌텐도 쪽에서도 그나마 위협이 되는 것은 메가 드라이브(제네시스)에 한해서 해외 시장에서는 닌텐도와 양강 구도를 이뤘던 세가였다. 현재 시점에서는 '새턴이 초반에 그나마 선전하다가 밀렸다'이지만, 당시로선 닌텐도 64가 발매되기 전까지 새턴이 시장을 재패할 줄 알았는데 생소한 플레이스테이션이 말도 안 되게 잘 나간 것. [47] 그러나 아케이드 기판과 새턴의 성능차로 인한 그래픽 열화 이식이 대부분이라서 오래 가지는 못했다. 특히, 데이토나 USA의 발이식은 당시에도 아주 유명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48] 메가 드라이브, 슈퍼 패미컴, PC 엔진 시절의 SNK 게임들은 타카라, 세가를 비롯한 여러 회사에 라이선스 계약해 준 것으로서 SNK에서 직접 만든 것이 아니다. [49] 사토 히데키는 여기에 덧붙여 메가 드라이브나 새턴을 만들 때는 유독 메모리가 비쌌고, 닌텐도가 슈퍼 패미컴이나 닌텐도 64를 만들 때는 가격이 내려가거나 상황이 안정되었다며 한탄했다. 더욱이 빠르다는 이유로 메인 메모리의 절반인 1MB를 할당한 SDRAM은 1993년에서야 JEDEC에서 표준화한 최신의 고성능 DRAM으로, 당시에는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50] 여기에는 1995년의 엔고로 인해 하드 추가 생산을 하지 않았다고도 밝혀졌다. # 번역 [51] 특히 1995년 2월 4일부터 3월 23일까지 약 46일 동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그 어떠한 게임도 발매하지 못한 적도 있다. [52] 바이오하자드는 이후 새턴으로 이식하긴 했지만, 무려 1년 6개월 후인 1997년 9월에 발매한 것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스테이션판에 비해 그래픽 품질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보였다. [53]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새턴 쪽이 초반에 100만 200만 대를 먼저 달성하는 것을 보고 새턴에 참가하기로 했었으나 이후 경쟁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고 선회했다고 한다. [54] 광고 제작은 새턴의 게임광고를 담당하던 하쿠호도가 만들었다. [55] せがた三四郎 真剣遊戯. 세가의 캐릭터가 나온 게임인 만큼 세가에서 이 게임을 만들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게임을 실제로 만든 회사는 에콜이다. 참고로, 이 회사에서 제작한 게임의 하나가 게임기 게임 역사의 전설, 데스크림존이다. [56] 소니 닌텐도라는 말이 있다. [57] 이때 드캐에 Windows CE를 탑재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가교 혹은 픽서격인 인물이 세가를 거쳐 당시 일본 MS에 재직 중이었던 제임스 스팬(James M. Spahn)이었다. 주일미군 집안의 영향으로 미국-일본간 TCK였던 제임스 스팬은 DWANGO의 일본 지사인 ドワンゴ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으며, ドワンゴ(사실상 KADOKAWA)로 이적한 뒤에는 니코니코 동화의 영어판 서비스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58] E-MU 시스템즈는 이미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가 1993년에 완전 인수한 자회사가 되어 있었다. 1998년에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가 엔소닉(Ensoniq)을 인수한 후 E-MU 시스템즈와 함께 합병해 상표로만 남았으며, 2002년에 부서까지 해산했다. [59] 하지만 쉔무 개발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드림캐스트용은 개발을 취소했다. [60] 드림캐스트 말기에 세가팬을 울린 걸작이자 센스가 빛난 세가가가에서는 인명 한자중 入을 人으로 바꿔서 히토마지리라고 나온다. [61] 이 사람은 사실 게임 업계가 아닌 자동차 업계에서 전설적인데 혼다의 전성기를 이끌어갔던 인물이다. 혼다에서 20년간 근속하면서 주로 모터사이클 및 F-1 엔진 개발에 참여했고 혼다 = 스포츠 등식이라는 이미지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혼다의 타 브랜드 대비 월등하게 우월했던 스포츠 성향은 그가 혼다를 떠난 이후 거의 없어지다시피 소멸되었다. 이리마지리가 혼다를 떠난 것도 1990년대부터 스포츠 성향 대신 승용차 기반 RV시장 개척과 선점을 포커스로 바꾸고 F1에서도 철수한다는 혼다 내부의 결정에 반대해서라는 후문이 있었을 정도. [62] 이는 그 당시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능으로 인식했으나, 나중에는 드림캐스트의 몰락에 큰 일조를 하게 된다. [63] 이 날 공개된 테크 데모 중 파이널 판타지 8의 무도회 영상은 세간에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발매한지 한 달도 안된 대히트친 게임의 CG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돌릴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것은 트릭으로 덜렁 둘이서만 춤추는 장면 뿐인지라 별 거 아닌 거였지만... [64] 그 당시 드림캐스트의 광고 모토가 '9/9/99 for $199'이었다. [65] 그러나 정작 폴리포니 디지털의 개발자, 야마우치 카즈노리의 반대로 플레이스테이션 2와 동시 발매 하려던 계획은 실패했고, 그 이듬해 2001년 4월에 그란 투리스모 3: A-spec으로 발매된다. [66] 성능 자체는 늦게 나온만큼 플레이스테이션2가 확실히 드림캐스트보다 우위였지만 특유의 구조로 인한 개발 난이도 때문에 초창기에는 이 하드웨어 성능 우위를 크게 살리지 못했다. [67] 플레이스테이션 2 발매 초기인 2000년에는 본체와 함께 가장 많이 팔린 타이틀은 게임이 아니라 영화 매트릭스 DVD 비디오였을 정도. [68] 보통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 Xbox network, 닌텐도 네트워크에 가까운 형태이자, 이들의 시초. [69] 다만 이건 휴대용 제네시스 그 자체에 가까운 노매드와는 달리 카트리지 어댑터가 필요하다. [70] 다만 게임보이는 4그레이만 표현 가능한 녹황색 STN LCD를 사용했던 데다가 어두웠고, 기기 내부 사양뿐만 아니라 다른 요인들까지 휴대용 기기에 걸맞게 저전력으로 설계됐다. CPU 인텔 8080이 개량된 미세 공정으로 이전해 저전력화했고. 다른 것은 그대로에 백라이트만 탑재된 게임보이 라이트가 짧아진 배터리 타임으로 악평을 들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당시의 기술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71] 세가 CD는 제네시스 3처럼 결합 자체가 불가능하며, 32X는 작동하지 않는다. [72] 2001년 1월 25일은 플레이스테이션 2 최초의 밀리언셀러인 귀무자가 일본에서 처음 발매된 날로 드림캐스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73] CERO 18 중 대부분의 게임들은 재발매한 경우 CERO D로 재분류 되었고 폭력성이 강한 게임은 신설 등급인 CERO Z를 부여받았다. 당시 CERO Z로 재분류된 게임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CERO 18이 CERO D로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74] 당시 드림캐스트판이 CERO 18(현 CERO D)로 내는 경우에는 같은 이름의 플레이스테이션 2판이 CERO 15(현 CERO C)이하로 발매되는 경향이 있었다.(드림캐스트도 많은 경우 CERO 전연령으로 냈다.) CERO는 2002년 설립되었는데 그 전까지 세가에서 드림캐스트 게임에 부여하는 등급이 없었고 CERO가 등장한 이후 플레이스테이션 2판보다 높은 등급의 미소녀 게임이 발매되는 정도였다. 당시 플레이스테이션 2판은 SCE 자체 심의에서 전연령으로 통과되었어도, 염가판을 재발매하는 경우 CERO에서 심의해야 했는데 CERO 15 등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75] 에로게 전연령(예외도 존재) 이식작들. 다시 말해서 갸루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