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16:59

서용하

1. 포천시 출신 독립운동가, 서용하2.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용하

1. 포천시 출신 독립운동가, 서용하

성명 서용하(徐龍河)
이명 서범용(徐範龍), 서용하(徐容夏)
본관 이천 서씨
생몰 1911년 4월 11일 ~ 1933년 4월 15일
출생지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장탄리
(현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1]
사망지 공주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서용하는 1911년 4월 11일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현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면 예산리로 이주했다. 그러던 1932년 11월 26일, 서울의 극단 만경좌(萬鏡座)가 예산군 예산면 예산리에 와서 <동방의 빛>이라는 제목의 친일 연극을 상영했다. 이 연극은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동포들이 마적에게 극도의 핍박을 받고 있을 때 일본군이 와서 구원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서용하는 이 연극을 본 후 11월 27일 저녁 강오(李康午)의 집에 모인 강봉주(姜鳳柱), 김만복(金萬福), 이광섭(李光燮), 윤수덕(尹壽德), 이동순(李東順), 강찬희(姜瓚熙) 등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동방의 빛은 한국인의 친일사상을 조장하고 민족의식을 소멸시키는 것으로서 우리의 주의, 사상과는 상반되는 것이니 극단에 대해 엄중한 항의가 필요하다."

이들은 사람을 보내 김현상(金顯相)의 집에 투숙 중인 극단 간부를 호출했다. 그러나 그들이 응하지 않자, 11월 28일 오후 4시경 김현창, 강봉주 등 6명과 함께 김현상의 집으로 가서 극단 단원 이태홍(李泰洪) 등 4명을 면회해 다음과 같이 힐책했다.
"“무릇 한국인으로서 민족의식이 없는 자가 없는데, 이 연극에서는 일부러 우리 동포가 마적배(馬賊輩)에 박해당하고 살해당하게 되기까지 저항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일본 군대에 의해 구호(救護)되는 듯한 장면이 있다. 이러한 것을 상연하는 것은 우리 조선 민족의 치욕이다. 우리가 지금 일본 지배하에 어떠한 권력도 주어지지 않아 불만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헛되이 대중으로 하여금 그 은혜와 강권(强權)을 신뢰하고 영구한 복종을 감수하도록 하는 것이므로 매우 불쾌하니, 이러한 연극은 속히 상연을 폐지하는 것이 옳다."

만경좌는 일본 경찰에 이들을 고소했고, 12월 1일 예산경찰서는 이광섭, 윤수덕, 이강오의 자택을 수색한 뒤 서류를 압수했다. 이후 서용하를 비롯한 8~9명의 동지들은 홍성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가 12월 2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예산경찰서는 이들을 다시 체포해 홍성경찰서에 유치했고, 서용하와 강찬희는 예산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이들 중 이강오 등 4명은 1933년 2월에 풀려났지만, 서용하, 강봉주, 강찬희, 김현창은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서용하는 1933년 2월 17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3년 4월 15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서용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용하

성명 서용하(徐用河)
생몰 1886년 ~ ?
출생지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
사망지 미상
추서 대통령표창

서용하는 1886년경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 3월 31일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해 서홍균(徐洪均), 김예식(金禮植), 엄윤영(嚴允榮), 정학규(鄭學奎), 신만균(申萬均), 조봉성(趙鳳成) 등과 함께 시위대를 주도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1919년 9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의 경력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서용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이천 서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