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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팀 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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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2. 상세
2.1. 운영 방식
2.1.1. 2000년대 중후반까지, 돈성2.1.2. 2010년대 초중반까지, 육성의 힘2.1.3. 2010년대 중반~ 시스템의 붕괴
2.2. 선수 대우
2.2.1. 삼성 출신 FA 이적 선수 징크스?
2.3. 은퇴식2.4. 우수한 선수 육성 및 재활 체계2.5. 좌타 왕국2.6. 아마야구 지원과 리틀야구단2.7. 외국인 투수 잔혹사2.8. 83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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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크게 왕조시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왕조 시기 이전까지는 전체적으로 당시 최신 유행이었던 메이저리그식의 메타를 따르는 전형적인 현대야구식 구단이었다. 2000년대 초반 김응용 시절 이미 당대 메이저리그식 훈련법을 도입하여 김응용의 자율야구와 최대의 시너지를 내었고, 2010년대까지 육성 시스템으로 손에 꼽는 명문이었다. 또한 심정수처럼 웨이트를 중시해 과거부터 이마양, 최채박 등 파워히터들이 많았으며, 실제로 구장의 이점을 잘 이용하는 구단으로 호평받았다. 반대로 투수진들은 선발의 경우 과거부터 배영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피네스 피처였으며, 실제로 배영수도 커리어 중반기 이후에는 구속이 떨어져 피네스 피처가 되었다.

홍준학 체제(9968837) 이후로는 급격하게 팀 추구하는 방향이 역행, 현재는 80-90년대 당시 KBO 리그에서 유행하는 올드스쿨 스타일을 지향하는 구단이다. 현재 KBO 리그는 현대야구에 뒤처진 행보로 비판받는데, 그러한 KBO 리그에서도 가장 극심하게 올드스쿨한 정책을 고수하는 구단으로 악명이 높다.[1] 2020년대 KBO 리그의 문제점의 정점을 보여주는 구단이 암흑기 삼성 라이온즈라고 할 수 있겠다.

전통적인 팀 컬러는 백수의 왕 사자라는 팀 네임답게 공격적이고 힘이 넘치는 화려한 야수진을 앞세운 공격야구[2] 강건한 수비력 그리고 강속구를 던지는 에이스 투수, 이것이 삼성 라이온즈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사실 팀 창단 이후로 40년간의 역사상 선발진에는 파이어볼러보다는 피네스 피처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3] 왕조 시대부터는 빅볼과 파이어볼러보다는 스몰볼과 피네스 피처같은 즉전감 선수 위주로 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특히 윤성환-장원삼-배영수-백정현-최채흥-원태인으로 이어지는 토종 피네스 피처 선발진 계보가 있다.

파일:2022시즌 종료 기준 역대 우르크 순위 3000타석 이상.png
통산 wRC+ 순위(3000타석 이상)[4]

한창 삼성이 잘 나갈 때의 클린업트리오 사기타선은 두 형태였다. 1980년대 중반의 삼성 타선은 리드오프가 어떻게든 공격의 활로를 뚫고 어떤 교타자가 안타를 치든 볼넷을 골라나가든 어떻게든 누상에만 나가면 4번 타자가 나와서 홈런을 뻥 쳐버리고 그 뒤에 나오는 세 명의 타자 중 한 명은 연이어 반드시 장타를 쳐서 빅이닝을 아주 쉽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형태였다.[5] 그리고 2000년대 초반은 이마양이라는 이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된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강력한 투고타저와 이승엽의 해외진출, 배영수, 권오준, 오승환을 중심으로 투수중심 운용으로 인해 지키는 야구라는 게 팀컬러가 형성되었고 그에 반해 타선은 이 시기 전후와 비교해서 너무도 약해졌다. 그러나 2010년대 황금기를 열면서 클린업 트리오 최채박을 중심으로 리그 최고급 타선을 형성하면서 투타 양면에서 완벽한 최강팀을 형성하였다. 왕조가 접히고 암흑기에 들어와서는 왕조의 멤버였던 최형우가 홀로 분전하였으며, 이후 구자욱 다린 러프가 무너지는 타선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있었고 오랜 리빌딩을 거쳐 강민호, 이원석, 오재일의 영입으로 내부 육성보다 외부 FA를 통한 타선 강화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주루를 많이 신경쓰지 않았던 팀이기도 하다. 굳이 도루를 하면서 그라운드를 흔들지 않아도 엄청난 타선의 파괴력으로 대량 득점이 쉽게 가능했던 팀이기 때문이다.[6] 클린업 양준혁이 193도루로 팀 통산 도루 1위를 하고, 이전까지의 리드오프였던 류중일이나 박한이는 뭔가 하나씩은 부족한[7] 리드오프였다. 어쨌든 확실히 삼성은 달리는 소총부대와는 이미지가 멀었고 어마무시한 대포부대의 이미지가 강했다. 오죽하면 첫 도루왕이 창단 32년 만인 2014년에 나왔을까. 단 80년대 초중반까지는 이해창 등의 나름 빠른 리드오프는 갖추고 있었다. 그나마 류중일 감독 시기 들어 타선에 체질개선이 이루어지면서 뛴다는 이미지가 생기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선동열 감독 시절부터는 강속구 에이스 강력한 불펜, 그리고 마무리 투수를 통해 승리하는 팀이 되었다. 대신 타선은 전체적인 리빌딩이 가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타선으로 이기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지만. 몇몇 삼성 올드 팬들은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예전부터 고수해 왔던 뻥 야구 스타일에서 벗어나 뻥 야구도 철벽 투수진도 아닌 어정쩡한 팀이 되었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수진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KBO 최고 수준이고, 야수들 수비력도 수준급이다. 우선 배영수라는 리그 최고의 에이스와 KO 펀치라 불리던 권오준 오승환이 뒷문을 꽉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8] 이후 배영수 권오준이 차례대로 부상을 당하며 큰 손실이 생겼지만, 이후 정현욱의 복귀, 그리고 권혁 안지만의 등장으로 뒷문은 단속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윤성환의 각성과 장원삼의 영입으로 훌륭한 팀 1선발급 선수들도 있긴 했지만, 과거의 배영수 임창용처럼 리그를 씹어먹는 이미지는 아니었고, 둘 모두 큰 기복 없이 꾸준히 성적을 올리는 스타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타선도 생각보다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양준혁 심정수 등이 포진했던 타선은 투고타저가 극심했던 데다 대부분의 팀들이 투수진에만 집중하느라 타선이 뭔가 모자랐던 당시 리그에선 괜찮은 수준이었다.

이후 2011년 류중일 감독이 취임하면서 배영섭, 김상수같은 유망주가 발굴되고 최형우, 박석민 등 새로운 주포들의 각성으로 공격 야구가 다시 살아나며 2011년 정규 시즌, 한국시리즈, 아시아 시리즈를 모두 우승, 국내 최초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2012년에는 이승엽까지 일본에서 복귀하며 타선이 더욱 강화되었고, 2014년에는 비록 역대급의 타고투저의 흐름을 타긴 했으나 1987년에 삼성이 세운 팀타율 .300을 뛰어넘는 .301의 팀타율 신기록을 세웠다. 2015년에는 .302로 더 높였다. 팀 타율이 3할을 넘어간 것은 한국프로야구 개막 이래로 2016년까지는 삼성 라이온즈가 유일했다. 여담으로 2015년 넥센(현재 키움)이 팀타율 3할에 도전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만난 삼성이 9이닝 1안타로 넥센 타선을 잠재우며 몸소 2할대로 떨어트려줬다.

그런데 2017 시즌 KIA 타이거즈가 시즌 전 FA로 영입한 최형우와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안치홍, 김선빈 등 주축 타자들의 복귀 등 호재가 겹쳐 삼성 라이온즈에 이어서 두 번째 시즌 팀타율 3할 달성 구단이 되었는데 삼성의 2015년 팀 타율 .302와 동률을 이뤘다. 물론 팀타율 3할을 세 번이나 기록한 삼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2018 시즌 역대급 타고투저 흐름에 따라 두산 베어스가 .310으로 기록을 경신했다.

또, 왕조 시절엔 선발투수진만큼은 막강했던 팀이다. 2013 시즌 윤성환, 배영수, 장원삼, 차우찬이라는 토종 10승 투수 4명을 배출하였고, 외국인 투수들이 부상에 시달리지 않고 좀 더 분발했다면 5명의 10승 투수를 배출하는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외국인 선발까지 포함해 2014 시즌은 준수한 선발자원인 차우찬이 본의 아니게 롱 릴리프로 전업을 하게 되었을 정도, 또한 2011~2013년까지의 불펜진은 가히 KBO 최강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 홀드왕 한현희와 구원왕 손승락이 있었던 넥센(현재 키움)도 볼 만하지만(넥센은 선발진이 안 좋다.) 2012년 5월 24일 대구 롯데전부터 7회까지 리드한 경기서 단 1패도 없이 무려 130연승을 내달렸다. 2012년 58경기, 2013년 62경기, 그리고 2014년 10경기를 더해 ‘130연승’을 채웠다. JOKKA 라인이라 불리는 전통의 불펜진에, 정현욱과 오승환이 떠나고 2014년 팀 투수진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와중에도 9개 구단 중 유일하게 5선발 전원이 100이닝을 소화했으며, 그 부진하다던 투수들의 호투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했다. 이 정도면 이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원조 투수왕국을 넘어선 新 투수왕국이라 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2015년 형체없는 도박 루머가 퍼지며 윤성환, 안지만, 임창용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제외되며서 급격히 하락세가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윤성환과 안지만은 무혐의, 임창용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안지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도박이 아니라 토토 사이트 개설에 돈을 빌려준 부분이다. 이 사건 이후 2016년, 2017년 용병과 투수진의 부진으로 2년 연속 9위라는 성적을 거두며 그 전의 화려한 왕조에 비해서 약해진 모습을 많이 보였다. 2018 시즌은 윤성환에게 부담이 쏠릴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삼성에 정말 오랜만에 혜성처럼 나타난 고졸 신인 투수 양창섭의 활약에 따라 투수왕국의 재건이냐 또는 재건의 실패냐가 갈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2018년 오치아이 에이지 코치가 투수진을 재건하고 백정현의 2년 연속 선발활약 + 최채흥의 등장 + 최충연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 + 불펜 WAR 1위, 100K라는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시즌 팀 성적 6위를 거두면서 5위 KIA 타이거즈와의 승차 없는 가을야구 경쟁에서 비록 밀려났으나 재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 2019년에는 기대했던 최충연의 선발 전향뿐만 아니라 구자욱, 박해민, 이원석, 김동엽의 부진으로 8등으로 시즌을 마쳤으며 4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는 고배를 마셨다. 결국 2017년부터 팀을 이끌어 오던 김한수 감독은 2019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020년 감독으로 다양한 적임자가 거론되는 가운데, 삼성이 파격적인 인사를 기용했다. 바로 데이터분석팀의 허삼영. 허삼영의 등장으로 삼성의 야구는 많이 변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시즌 초반에는 실망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세이버메트릭스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팀을 구성하고 있다.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모습들을 보여주었던 주장 박해민을 과감하게 2군으로 내리고 박찬도, 박승규를 기용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6월 이후에는 안정화된 투수진과 점차 살아나고 있는 타자들을 바탕으로 상위권에 위치해있는 NC와 LG를 상대로 위닝을 거두면서 팬들의 관심도 살아나게 되었다.

2. 상세

2.1. 운영 방식

크게 돈성 시절, 왕조 시절, 암흑기 시절로 나뉜다. 돈성 시절에는 돈은 많이 쓰고 육성 능력도 리그 최상위 수준으로 좋지만, 정작 먹튀가 상당히 많았던 구단으로 회자되며 왕조 시절에는 돈은 많이 쓰지 않아도 팀 전력을 잘 추스려 리그를 제패한 강팀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육성에 소홀해져 암흑기 시절부터는 과도하게 강해진 프런트의 힘으로 팀을 그릇되게 운영하는 구단으로 손꼽히고 있다.

시기 무관 모기업 삼성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9]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부유한 이미지의 팀이다. 또한 전력 자체는 좋지만 오래 전부터 구단 운영은 삼성그룹 고위층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는 팀이었다.[10] 현재는 팬들의 힘이 세진 데다 프런트 내부의 지속적인 반성을 통해 선수들에게 연봉 높고 대우 잘해 주는 대인배 이미지의 좋은 팀이 됐지만[11] 옛날엔 비싸게 사와서 쓰다 버리는 전형적인 삼성식 운영으로 그야 말로 악명높았다.[12] 대표적인 예로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 등 한국 야구의 전설이자 팀 프랜차이즈 선수들을 매몰차게 내친 것은 유명하며[13] 원년부터 활동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은퇴식을 치러준 선수가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 양준혁, 이승엽, 권오준 여덟 명밖에 없다는 것[14] 자체가 선수들을 어떻게 생각해 왔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2002년 V2 이후로부터는 팬덤과 팀 내에서 만연했던 우승제일주의가 충족되면서 저런 행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 우승 이후 프런트는 기존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대우를 개선하는 데 힘을 기울여서, 2003년에는 뒤늦게나마 이만수를 영구결번 시켜주기도 하고,[15] 최근에는 레전드들을 코치로 기용하는 등의 행보도 보이고 있다. 은퇴식도 신경써서 치러주는 건 덤. 그러다 2015년을 기점으로 다시 그 악명 높던 삼성식 운영이 스물스물 돌아오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기사 이런 글이 올라올 정도로 도박사건에 대한 부실한 대응, 팀 프랜차이즈 박해, 용병 계약과 관련해 악의적인 언플등 모든 팬들이 80-90년 악명높던 프런트가 돌아왔다며 분노하는중. 그리고 2016년 류중일 감독의 재계약건 등을 보면 아직까지는 팬들의 목소리보단 삼성그룹 고위층의 입김이 구단 운용에 더 강하게 작용한다고 보여지고 있다.

김응용 감독 시절까지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선수 영입으로 한국 야구계의 뉴욕 양키스 같은 올스타 팀 이미지였는데,[16]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선수 영입을 자제하여 그 이미지가 희석되었다. 가장 큰 계기는 2004년 우승팀 현대에서 FA로 풀린 심정수와 박진만을 각각 4년 최대 60억, 4년 최대 39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17]으로 영입하여 2005년 우승을 이룬 이후, '그렇게 돈 써서 우승 못하는 팀이 어디 있냐'는 말에 기분 상한 선동열 감독이 FA 영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이후 류중일 감독이 취임을 하고 6년을 팀을 이끌동안 FA 영입은 한 명도 없었다. FA 영입은 커녕 프런트는 '합리'를 외치며 집토끼 마저 잡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해외 진출을 한 오승환을 비롯하여 타 팀으로 이적한 차우찬, 박석민, 권혁, 최형우, 배영수 등 선수 유출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취임 후 2011~2014년 4연속 통합 우승, 2011~2015년 5연속 정규시즌 우승을 거뒀지만 2016년 구단 최악의 성적인 9위로 추락하고 만다.

구단 프런트는 성적 부진의 이유인지 합리의 기조인지 몰라도 6년동안 5번의 정규시즌 우승, 4번의 통합 우승을 달성한 류중일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초짜 김한수 감독을 선임한다. 그리고 저비용 고효율 정책 폐기를 선언하더니 폭풍같은 FA 영입을 시작했다. 2017년 시즌을 앞두고 우규민과 이원석을 데리고 왔으며, 2018시즌을 앞두고 강민호를 영입한다. 롯데와 한화에 가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삼성도 근래 FA에 돈을 안 쓴 건 아니다.

하지만 팬덤 사이에서는 삼성 라이온즈 단장 홍준학을 비판하는 여론이 강세다. 4년 연속 외인 용병의 실패, FA의 비효율적인 성적 등이 '홍준학 사퇴', '홍방안(홍준학 방출 안 하면 삼성팬 안 해)'와 같은 신조어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홍준학은 알다시피 7년동안 재임하며 팬들의 스케치북을 검열하고 유유히 삼성 관계자라는 이름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9968837이 일어나게 되었다.

2.1.1. 2000년대 중후반까지, 돈성

2002년 전까지 계속된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18]로 인해, 외환 위기 이후에는 타 구단들의 경영난을 틈타 무지막지한 자금력으로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현대 유니콘스와 함께 야구계를 돈으로 양분하기도 했었다. 야구팬들과 야구언론사는 앞다투어서 한국의 뉴욕 양키스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즉, 한마디로 야구판 공공의 적이라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다.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온 임창용 조계현(해태), 김기태 김현욱(쌍방울)을 비롯해 2000년 FA 제도가 도입되면서 이강철(해태)과 김동수(LG)를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양준혁(LG)를 재영입 2004년에는 박종호(현대)를, 2005년에는 가장 임팩트가 큰 박진만 심정수(현대)를 FA로 영입했다. 이외에 해태에서 방출된 이순철을 영입하거나 선수협 파동으로 소속 팀과 갈등을 빚은 마해영을 트레이드해 데려오는 등, 한동안은 우승만을 위해서 외부 자원들을 마구 영입하기도 했다.

이렇듯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팀임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전까지는 임팩트가 있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19] 분명 삼성의 공식 첫 우승은 1985년임에도, 삼성이 콩라인을 탈출한 건 김응용 감독이 온 후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알고 있는 야구 팬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삼성 구단과 선수, 팬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한국시리즈 우승 뒤에야 85년 우승 기록도 자신있게 우승 기록으로 얘기하게 된다.

그나마 삼성이 돈성의 오명을 벗은 것은 김재박 당시 현대 유니콘스 감독이 '돈으로 누가 우승 못 해'라며 삼성을 향해 디스를 걸었고[20] 이 말을 듣고 빡친 선동열 감독이 FA 영입을 자제한 이후부터이다. 사실 박진만과 심정수 영입 후, 2009 시즌 개막 전 장원삼(히어로즈) 30억 현금 트레이드설 전이나 그 이후 타 팀에서 큰 돈을 들여가며 데려온 선수는 없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KIA의 손지환, 한화의 심광호 정도. 김재박 감독의 발언 후 2009년에도 처음으로 데려온 선수가 트레이드로 영입한 두산 베어스 채상병. 이 경우는 좌완 투수 지승민과의 1:1 트레이드였으니 돈과는 상관없다. 그리고 심광호 채상병의 트레이드 역시 진갑용 현재윤의 부상만 아니었으면 당연히 하지 않았을 트레이드였다.[21]

김재박 감독의 발언 후 자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투타 라인을 리빌딩하면서 돈성 오명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나 2008년 11월 14일, 히어로즈 장원삼을 30억에 지르며 돈성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후 다른 6개 구단의 반발로 인해 트레이드 승인 불가를 받아 장원삼을 돌려보냈지만, 1년 후에 결국 영입했다.

선동열 감독도 FA 영입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2010년 거포 FA 김태균도 영입하려 했으나 엔화에 밀려 실패했다.

하여간 이런 인터뷰가 개그 소재가 될 정도로 삼성의 머니 파워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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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KBS '미디어 포커스'에서의 전화 인터뷰 장면 캡쳐. 여담이지만 이 당시 프로그램에서는 케이블 스포츠 채널 3사에서 삼성 경기의 중복 중계가 심각함을 제시했고, 스포츠 방송사들은 삼성 구단과의 계약(= 몇 경기 이상 중계하는 조건으로 돈 얼마를 받는 조건) 때문이라 주장했다. 이 장면은 그에 대한 반박[22]. 이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중복 중계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지금처럼 한 경기당 하나의 채널이 확보되지도 않은 환경이었고 당시 신생 채널이었던 엑스포츠는 MLB만 중계하던 상황에서 삼성 경기 중계율은 100%를 초과했고 다른 팀들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상대적 비인기 구단인 현대, SK(당시 중계율 7, 8위)가 많이 중계되지 못했다.

2.1.2. 2010년대 초중반까지, 육성의 힘

그러나 선동열, 류중일 감독 시절에는 정말로 외부 FA 영입에 돈을 거의 쓰지 않아서 팬들이 이제 돈성 소리 들어도 좋으니 제발 돈 좀 쓰라고 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2016년 기준으로 외부 FA를 12년째 잡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13년 우승 이후엔 단장 송삼봉이 '50억이면 2군에 투자할 수 있는데 외부 FA를 왜 영입함?', '그 돈이면 특급 외국인 하나 데려오고 FA 하나 나가면 젊은 애들 1군에서 육성할 수 있음'이라는 개드립을 친 덕에[23] 팬들마저 '우리는 더 이상 돈성이 아니라 거지성이다'라고 자조할 지경.

뭐 사실 이렇게 엄살을 부려도 내부 FA는 잘 잡았었다. 장원삼을 4년 60억 원에 잡았고 박한이를 4년 28억 원에 잡았으니... 정현욱이 떠나긴 했지만, 이 경우에는 떠나기 전후의 성적으로 미뤄봤을 때 삼성이 놓쳤다기보다 오버페이하기 싫어 놔준 것에 가깝다. 반드시 잡아야 하는 집토끼는 모두 단속해냈다는 이야기. 또한 2014년 핵심 전력이였던 윤성환 안지만을 각각 4년 80억, 4년 60억으로 잡고 내야 유틸리티인 조동찬을 4년 28억에 붙잡았다. 그러나 배영수 권혁을 내보냈는데 권혁은 본인이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스스로 떠났으며 배영수는 정현욱 때와 같이 굳이 오버페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놔준 것이다.

사실, 프로야구단은 만년 적자 사업이기 때문에 윗선의 눈치를 봐야 하고, 편성된 예산을 넘겨서 쓰기가 어려운데 FA에다 돈을 쓰면 기존 선수들에게 돌아갈 자금이 줄어들어 연봉이 깎이거나 하기 십상이기에 삼성의 선택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내부 FA를 놓치면서 육성 드립을 쳤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잡을 FA는 다 잡았고, 외부 영입 없이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기에 겆성이라는 얘기는 좀 더 전력 보강을 원하는 팬들의 아쉬움이 섞인 한탄이다.[24] 류현진의 포스팅비로 지갑이 두둑했던 한화 이글스나 신생팀인 NC 다이노스는 그렇다 치고, 2013년 FA 대란 때 외부 FA를 영입한 구단은 연봉 협상이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굳이 외부 FA에 휘말리지 않고 내부 FA를 알뜰하게 잘 잡는 삼성이 진정한 승리자일지도 모른다.

2.1.3. 2010년대 중반~ 시스템의 붕괴

그러나 2015년 이후로 전반적인 투자 자체가 급락하고 그 악명높은 안현호-홍준학 체제가 시작되며 전형적인 올드스쿨 야구관으로 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로 치닫고 있다. 우선 2015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박석민[25]을 놓치고, 2014~2015년 최고의 활약을 펼쳐준 효자 용병 야마이코 나바로도 놓치고, 단장이 '외부 FA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고, 더욱이 2016년 리그 최고 타자이자 팀의 간판 타자인 최형우를 KIA에게, 거기다 좌완 에이스 차우찬까지 LG에게 뺏기자 팬들 사이에서도 '거지성'이라는 용어는 이미 일반화되버린지 오래이다. 게다가 삼성 라이온즈가 삼성 계열사의 지위가 아닌 제일기획 산하로 이동한다. 사실은, 예전부터 이미 줄어들고 있었다고 한다. 2018년에는 선수단 운영비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2015년 423억원이었던 선수단 운영비가 2018년 267억원까지 줄었다. 기사

아버지와 달리 이재용 부회장은 프로구단이 흑자를 내지 못해 수백 억씩 지원받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인 만큼 삼성이 이전만큼의 자금 동원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자주 야구장을 찾는 야구광이기에 아버지에 준하는 자금 지급을 통해 삼성 라이온즈가 거대 명문 구단의 지위를 이어갈 것이라 기대했던 많은 팬들은 이윤 추구로의 급격한 전환, 익숙하지 않은 긴축 운영에 격렬한 배신감을 느끼며 프런트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

결국, 공식적으로 2016년 1월 1일부로 삼성 라이온즈 제일기획 산하 계열사로 편입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후 제일기획 매각설이 돌면서 산하 스포츠단들도 같이 매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었지만, 제일기획의 프랑스 매각이 무산되면서 삼성 라이온즈 또한 삼성 소속 구단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최근 뉴스 기사들로 미루어 보건대 삼성 프런트에서도 SK나 넥센과 같은 광고 및 마케팅을 통한 수익 창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2016 시즌이 끝나고는 각각 27억, 65억에 이원석과 우규민을 FA로 데려왔고[26] 2017 시즌 후 FA 대어 강민호를 80억에 사오는 등 다시 돈성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한 행보를 걷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구단주로 있었던 이수빈 회장이 물러나고 신임 구단주 및 대표이사로 임대기 사장이 취임했다. 고무적인 점은 김동환 사장은 삼성내에서 부사장급 직급이였는데, 임대기 사장이 취임하면서 다시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직급이 사장급으로 올라갔다.

이후 삼성카드 대표를 지낸 원기찬 사장이[27] 2020년 구단주 겸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2021년 FA 시장의 A급 자원 중 한 명인 오재일을 50억에 사오면서 기대를 높였다. 그런데...

2021년 2월 28일 SSG 랜더스의 구단주이자 범 삼성가의 일원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클럽하우스 인터뷰를 통해 " 삼성그룹 일가는 더 이상 야구에 관심이 없다"고 발언한 이후 삼성 팬덤에서는 분노와 허탈함을 나타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야구단 매각 의사가 있다는 남부지방 연고 명문 팀이 결국 삼성이었냐는 얘기도[28] 적지 않다. 분노한 팬덤의 의견은 대부분 "그럴 줄 알았다", " 병상에서도 야구 중계 틀던 회장님[29] 죽었다고 이렇게 엿을 먹이냐" 등의 반응이 주류. 다만 평소 정용진의 SNS상 발언 중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종종 있는데다 "외가 식구들 일을 그렇게 함부로 말하겠느냐"는 의견도 있으며 "그룹에서 정말 관심이 없었다면 거물급 임원에게 구단을 직접 맡기고 FA 영입까지도 척척 해주겠느냐[30]"는 정용진 회장의 발언에 의한 반박도 있다. 물론 정용진이 저 소리를 한 것도 정용진이 극한의 야빠이기 때문이며,[31] 실제로 삼성그룹은 삼성 스포츠단중 삼성 라이온즈에 그나마 관심과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

2.2. 선수 대우

원년부터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그만큼 레전드 급의 선수들도 많이 나왔다. 이 부분은 아래 삼성 라이온즈/역대 선수와 같이 보면 좋다.

삼성답게 선수들을 대하는 방식이 직원들과 유사하다.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높고[32] 신인 선수들에 대한 계약금과 연봉에도 후한 편이다. 매년 팀 성적이 상위권이다 보니 뛰어난 선수를 뽑기 어려워 상위 라운드 지명자의 계약금은 타 팀과 비슷하거나 적을 때도 있지만, 4라운드부터는 타 팀 지명자보다 계약금을 좀 더 주는 편이다. 2010년 선수들 최저 연봉이 2천만 원에서 2천 4백만 원으로 오르자, 신고선수들 연봉도 똑같이 2천 4백만 원으로 올렸다. 타 팀의 경우엔 신고 선수라고 그들의 연봉을 최저 연봉보다 더 적게 주는 경우가 제법 된다.

국내 구단 중 대우가 가장 좋은 곳이지만, 그 대신 필요가 없어지면 칼같이 정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 양준혁, 배영수.[33][34][35] 팬들의 목소리와 참여도가 커진 2000년 이후엔 많이 좋아졌지만 옛날 삼성은 그 어떤 프랜차이즈 스타라도 필요없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내치기로 유명했다. 또한 선수협 창단 때는 김기태를 앞세워 선수단 전원을 불참시켰고, 2009년 선수 노조 창단 때에도 삼성 그룹의 무노조 원칙 때문인지 선수들을 전원 불참시켰다. 이와 같은 현상은 LG 트윈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또한 일정 규격 이상의 FA 계약이나 연봉은 지급하지 않는다. FA 몸값이 폭증하던 시기에도 삼성은 초대형 FA 계약을 맺느니 FA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보다 조금 전 돈성 시기에도 리그에서 최고 부자 구단 중 하나였건만 연봉은 7억 이하로 억제되었다. 현재도 이대호의 25억이나 손아섭의 20억같은 연봉을 삼성에서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은 한 때 숙적이라 할 수 있던 해태에서 온 김응용 감독이 선수 대우를 개선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것이다.[36][37] 또한 일부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제외하고는 타 팀과 마찬가지로 은퇴한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위주로 코치로 전향시키면서도 높게 대우해 주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은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면서 은퇴식까지 치른 후 현재 삼성의 감독이나 코치직을 지냈다. 류중일이 감독으로 취임한 뒤 이승엽, 임창용 등 해외로 진출했던 레전드 스타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삼성의 레전드 잔혹사는 일단 끝이 났다.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그동안 삼성 구단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던 이만수가 시포를 맡은 것은 삼성의 레전드 대우 개선을 상징하는 사례로 꼽힌다.

2020 시즌 종료 후 윤성환을 방출시켜 비난 여론이 생기기도 했으나 구단 측에서 채무 및 승부조작과 관련된 정황을 포착하고 선제조치를 했으며, 혹시라도 사실이 아닐 경우 선수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구단 측이 언급을 자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재평가되기도 했다. 현재 기소 중인 내용이 사실일 경우 방출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면 윤성환의 다음 등판 경기에서 승부조작이 일어날 뻔 했다. 윤성환/논란 및 사건 사고 참고.

2.2.1. 삼성 출신 FA 이적 선수 징크스?

유난히 삼성 출신에 타팀으로 이적한 FA 선수가 먹튀로 변질되는 경우가 잦다. FA 특성 상 노쇠화의 위험이 있다지만, 첫 번째 FA인데 먹튀로 변질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선수들의 공통점은 FA 협상이 가능한 시즌부터 뭔가 조짐이 있었다.
  • 마해영 : 2004년 4년 28억 KIA행
    - 2003년에 개인 최다 홈런-타점 기록을 세우며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성적을 냈으나 이마양 트리오에 가려져 있을 뿐, 그 해 6월에는 안타도 거의 치지 못하고 시즌 막판에는 하위타선으로 떨어지는 등 조금씩 힘이 떨어지고 있었다.
    - 2004년에 잠시 숨 고르고, 2005년에는 난 아직 안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서정환 감독과의 갈등 때문에 벤치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2005 시즌 끝나고 LG로 가더니...
  • 정현욱 : 2013년 4년 28.6억 LG행
    - 2012년 구위 하락으로 필승조에서 밀려났다.
    - 2013 시즌 전반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활동했으나, 후반기부터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계속되는 성적 하락에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위암까지 얻어 전성기 때에 단련된 근육을 모두 잃고 몸이 야위어졌다. 이후 2016년 돌아왔으나 재기에 실패하고 은퇴 후 코치로 삼성에 복귀.
  • 배영수 : 2015년 3년 21억 한화행
    - 2014 시즌 후 선발 기회를 찾아서 한화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되는 퀵후크에 시달렸고, 그렇다고 성적도 좋은 건 아니라서 한화팬들에게서 환불 요청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2016 시즌에는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고, 5월 20일 재활 등판의 최고 구속은 겨우 131km/h. 그래도 다음 시즌 128이닝을 소화하며 그나마 선발진에서 제 역할을 해주었다. 타 팀이었다면 5선발 수준이었겠지만, 선발진이 망가진 한화라서 팀 내 최다이닝 소화 선수가 되었다. 18 시즌 종료 후 방출되어 두산에 들어갔고 정규 시즌엔 0구 보크 끝내기로 배영구 등 안 좋은 별명을 얻었으나 2019년 한국시리즈 4차전 헹가래 투수가 되어 명예롭게 은퇴했다.
  • 박석민 : 2016년 4년 96억 NC행
    - 2016년 3할-30홈런-100타점을 달성하며 커리어하이를 찍었으나 2017년부터 부진하고 있고 고질적인 부상까지 겹쳐 먹튀 소리를 듣고 있다. 삼성 시절에도 잔부상은 자주 안고 있었지만 STC가 있기에 빠른 회복과 재기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NC로 이적한 후에는 2016년 커리어하이를 뒤로하고 계속해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는 부상 때문에 수비도 자주 못 나가고 지명타자로 출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2020년 다시 한 번 부활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2021년에 대형사고를 치면서 2022년의 거취도 불투명해지게 되었다.
  • 차우찬 : 2017년 4년 95억 LG행
    - 2017년에는 매우 잘 던졌으나 2018년 홈 성적을 제외하면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2018년, 2020년은 차우찬 생애 최악의 성적이다.

최형우 박해민은 예외인데, 이 둘은 이적 후에도 구매한 팀이 만족할 만한 성적을 뽑아줬기 때문이다. 굳이 팀 플랜이 꼬이게 했다는 것까지 넣으면, (본인의 의도는 전혀 없지만) 박해민[38]이 해당은 될 수도 있다.

2.3. 은퇴식

원년부터 출발하여 샛별 같은 대 스타들을 보유했지만 은퇴식을 치러 준 선수는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 양준혁, 이승엽, 권오준 등 8명뿐이다.[39] 은퇴 경기는 2010년 9월 19일 양준혁이 최초로 은퇴 경기를 가졌다. 2017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끝내는 이승엽 양준혁 이후 7년 만에 삼성 소속으로 은퇴식을 치렀다. 양준혁도 걸출한 슈퍼스타였지만 이승엽 야구를 모르는 사람도 누구나 아는 국민스타인 만큼 역대 은퇴식 중 가장 화려하게 치러졌다.
삼성 라이온즈 역대 은퇴식
이름 활약 기간[40] 날짜 비고
류중일 1987년 ~ 1999년 2000년 4월 5일[41] 최초의 은퇴식
김현욱 1993년 ~ 1995년, 1999년 ~ 2005년 2005년 6월 2일
김한수 1994년 ~ 2007년 2008년 3월 30일
전병호 1996년 ~ 2008년 2009년 4월 5일
김재걸 1995년 ~ 2009년 2010년 4월 10일
양준혁 1993년 ~ 1998년, 2002년 ~ 2010년 2010년 9월 19일 영구결번
이승엽 1995년 ~ 2003년, 2012년 ~ 2017년 2017년 10월 3일 영구결번
권오준 1999년 ~ 2020년 2020년 10월 30일

2.4. 우수한 선수 육성 및 재활 체계

삼성 라이온즈는 오래 전부터 타 팀에서 가장 부러워할 만한 선수 육성 체계와 재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KBO 리그 최초의 단일구단 전용 훈련장인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 용인시에 있는 삼성 트레이닝 센터가 그것.[42] 현재는 타 구단들도 이런 체계들을 속속 도입하면서 삼성 라이온즈가 독보적이던 시절은 지났지만 말이다.

1984년 삼성 라이온즈는 신인 육성 및 원활한 선수 수급을 위해, OB 베어스에 이어 두 번째로 2군을 창설했다. 고졸 연습생들을 영입해 2군을 만든 OB와 달리, 삼성은 코칭 스태프까지 따로 영입하며 2군 체제를 확립시켰다. 1987년에는 현재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경산 볼파크)의 모태인 경산 훈련장이 완공되었고, 1990년대에는 2군 선수들을 일본 추계 훈련이나 미국 교육 리그에 보내는 등 선수 육성에 힘써 왔다. 특히 1995년 시즌 후에는 2군 선수단 전원이 미국 교육 리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투자로 2군 리그에서 남부 리그 5년 연속(1994~1998)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외환 위기 2군 투자가 줄었고 결정적으로 매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하면서, 성공 여부가 미지수인 신인 육성보다는 성적이 보장된 외부 선수 영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돈성'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외부 선수 영입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면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성이 오랜 기간 2군에 투자해 왔다는 사실은 묻혔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고, 선수 발굴과 육성 필요성을 느끼면서 다시 2군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이후 배영섭이나 최형우 등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이 우수한 활약을 펼쳐 주면서[43] 화수분 야구라 불리는 두산 베어스와 함께 우수한 선수 육성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김해에 상동 야구장을 짓는 등 2군 육성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사례로 꼽힌다.

201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계기로 3군을 신설하여 무한 경쟁 체제를 갖추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2012년 8월 포항 야구장의 완공 이후 향후 2군 선수단 이름 자체를 포항 삼성 라이온즈로 변경하며 모든 2군 경기를 포항에서 가질 계획을 세웠다. 이리하여 1군(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2군(포항 야구장) - 3군 및 잔류·재활군(경산 야구장)으로 이어지는 육성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으나 무산되었고 그 뒤 노후화된 경산 야구장 대신 청도군에 500억 원을 들여 2군 훈련장 및 클럽하우스를 신축하고 이후에 2군을 경산시에서 청도군으로 변경할 계획이였으나 잠정 중단 되었고 청도의 2군 신축구장 부지도 처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9개 구단이 2군에 투자를 점차 늘리고 새 2군 신구장을 건설하고 있으나 유독 삼성만 1군과 함께 2군의 투자를 대폭 줄이면서 한 때 가장 좋은 2군 구장을 보유하던 팀에서 가장 질 낮은 구장을 보유한 팀으로 바뀌었다. 많은 팬들은 자생을 하려면 좋은 2군 구장과 2군에 많은 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전혀 없어 답답해 하는 상황이다.

2.5. 좌타 왕국

LG 트윈스보다 훨씬 뛰어난 왼손잡이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특히 왼손잡이 타자의 경우 독보적이다. 이에 삼성 팬들은 이를 좌타대두라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장 1983년에 입단하여 삼성 초창기 최고의 교타자로 활약했던 장효조를 시작으로 1993년에 입단하여 은퇴까지 삼성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양준혁, 그리고 좌완 투수로 입단했다가 타자로 전향한 뒤 현역 최고의 슬러거가 된 이승엽이 있다. 또한 입단 후부터 19년간 지금까지 꾸준히 활약하여 양준혁에 이어 동률인 KBO 역대 두번째 16년 연속 100안타를 기록하며 외야 한 자리를 지켰던 박한이, 삼성 왕조시절 4번을 항상 책임졌던 최형우, 한 때는 채럼버스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으나 2013, 2014, 2015 정규시즌 3연패와 한국시리즈 2연패에 혁혁한 공을 세운 채태인 등이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에 등장하여 지금도 항상 라인업에서 빠지지 않는 구자욱도 있다. 반대로 초창기에는 이만수, 김성래, 강기웅으로 이어졌던 뛰어난 오른손잡이 타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박석민 아랫동네로 이적한 이후 삼성의 뛰어난 오른손 타자는 사실상 전멸한 상황이다.[44]

반대로 왼손잡이 투수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오히려 창단 초창기에 이선희와 프로 최초 100세이브를 달성한 권영호 등 뛰어난 좌완들이 많았던 편이지만 성준 이래로 삼성은 왼손투수 갈증에 늘 시달렸다. 성준이 삼성 역대 좌완투수 중 가장 많은 승수(97승)를 올렸지만 구위보다는 제구 위주의 기교파 투수였고, 그나마 성준 이후 장원삼이 삼성으로 트레이드로 오기 전까지는 김태한, 전병호 정도가 활약한 것이 유일했다. 그나마 1990년대 삼성 투수 트리오 중에 김태한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으며, 그나마도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마구 굴린 탓에 조로한 경향이 있으며, 롱런한 전병호도 흑마구로 대표되는 기교파 투수였다. 그러다가 2010년부터 당시 넥센에서 트레이드된 장원삼이 삼성의 전통인 좌완 기교파 선발투수로 2015년까지는 준수하게 활약했다.[45] 그러고보면 삼성의 경우 유독 좌완 스터프형 투수보다는 좌완 기교파 투수들로 계보가 이어져 왔는데, 2017년 시점에서 좌완 스터프형 투수로는 백정현 정도다. 그나마 백정현 역시 와일드씽 시절에는 만년 유망주로만 있다가 피네스 피쳐로 변신한 후에야 뒤늦게 각성한 케이스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는 차우찬도 스터프형 투수로 있었는데,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최채흥이 2020년 11승을 거두고 당초 문승원이 기록할거라 많은 사람들이 예측을 했던 토종 선발 평균자책점 1위[46]를 기록하면서 좌투 계보를 잇게 되었다.

2.6. 아마야구 지원과 리틀야구단

대체적으로 암울했던 2000년대 대구·경북 팜[47] 에 대해 삼성 구단이 아마야구 지원에 인색했던 것이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응용이 삼성 사장으로 있는 동안 모교 개성고 야구부 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침체에 빠진 모교 지원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사이 연고지의 경주고 야구부와 구미전자공고 야구부가 해체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연고지 야구부의 해체를 온전히 삼성 측의 잘못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구단의 지원 못지 않게 학교 차원에서의 야구부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지만 경주고는 타 학교에 비해 학교 차원의 지원이 부족했었고[48], 구미전자공고의 경우에는 마이스터고로 전환되면서 불가피하게 야구부를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연고지 고교야구부 해체에 후술할 삼성기 대회 폐지나 리틀야구단 해체 등이 연달아 벌어지면서 아마야구 지원에 대해 소홀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2010년대 중반에 글로벌선진학교, 도개고, 영문고가 새로 야구부를 창단했지만 글로벌선진학교는 학교 특성상 소수 인원으로만 운영 중이며 도개고와 영문고는 새로 창단한 학교의 다수가 그렇듯 학생 수가 적은 소규모 학교라는 한계에 스카웃의 열세로 상당수의 선수를 전학생으로 채우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삼성이 그 이전에도 아마야구 지원에 손을 놓고 있었던 아니고 실제로 1990년대에는 아마야구 지원을 했었다. 1992년부터 유소년 및 고교야구 활성화를 목적으로 대구·경북 지역 초중교를 대상으로 한 삼성기 대회를 열었다. 삼성기는 1993년에는 고교까지 참가하는 대회로 확장했다가 IMF 사태로 축소됐다. 그 여파로 2000년에는 대회를 열지 않았고, 2005년을 끝으로 폐지됐다가 2011년부터 초중교를 대상으로 다시 부활했다. 2014년부터는 삼성의 1차 지명 대상지로 확장된 강원 영동 지역 초중교도 참가한다. 2011년 별세한 장효조 2군 감독을 기리기 위해 2012년 대회부터 타격 1,2위 선수들에게 주는 상을 '장효조 타격상'으로 명명했다.

1990년에는 프로구단으로는 최초로 구단에서 운영하는 리틀야구단을 만들었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이전부터 진행해 온 어린이 여름야구교실이 큰 인기를 끌어 아예 리틀야구단을 만들어 야구에 소질이 있으나 소속 학교에 야구부가 없어 선수가 될 기회가 없는 유소년 유망주들을 조기에 발굴·육성해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보내든지, 중학교로 진학시켜 야구선수로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삼성이 리틀야구단을 만들기 전에는 대구 지역에는 리틀야구단이 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대구 지역에도 하나둘 리틀야구단이 생겨났다. 당시 스카우트를 맡으며 현장에서 멀어졌던 장효조가 명예 감독으로 있었고, 이밖에도 선수 출신 구단 직원들이 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선수들의 정신적인 성장을 목표로 두고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 전국 규모의 큰 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둔 적은 없지만 현재 나무위키에 등록된 전현직 프로선수 중 강영식, 김인태, 손형준, 용덕한, 우동균, 유선정, 이상민, 이상호, 이정호, 임현준, 정병곤, 최민구 등 12명이 삼성 리틀야구단 출신이다. 이밖에 과거 고양 원더스 소속으로 청각장애인 프로야구선수를 꿈꿨던 박병우도 삼성 리틀 출신.

이렇듯 리틀야구단을 통해 프로선수가 된 사례도 여럿 있었으나, 리틀야구단이 활성화되면서 다른 리틀야구단과의 지원에 대한 형평성을 두고 학부모들간 갈등이 조장되자 2008년을 끝으로 구단이 리틀야구단 운영을 포기했고, 2009년부터는 라이온즈 이름을 계승한 리틀야구단이 단독으로 운영하고 있다. #

2.7. 외국인 투수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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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ince2015.jpg
10개구단 체제 이후 전 구단별 최고의 용병진, 최악의 용병진의 WAR 총합 비교. 출처

용병 제도가 도입된 1998년 이후 2010년대까지는 독보적으로 최악의 외인투수 스카우팅으로 악명높았다. 특히 2016~2017 시즌간 뛴 선수들은 웹스터 4승, 벨레스터 0승, 레온 0승, 플란데 2승, 그리고 페트릭 3승, 레나도 2승으로 두 시즌동안의 모든 용병 투수들이 쌓은 승수가 겨우 11승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설명하는 선수들 외에도 톰 션, 카리대 등의 선수나, 온갖 말썽을 일으켰던 베이커 갈베스[49] 있었다.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쌓은 외국인 투수도 지금까지 제이미 브라운 데이비드 뷰캐넌이 유이하다.

그래도 왕조 시절의 밴덴헐크, 피가로는 에이스의 몫을 다해줬고, 탈보트, 고든, J.D. 마틴, 클로이드 정도도 무난한 수준이었다. 고든은 SK에서 1년 뛴 선수 재활용이어서 삼성 외국인 스카우트 능력이라고 보기는 좀 그렇다. 마틴은 넥센한테 호구 잡히긴 했지만 무난했고, 탈보트는 1시즌 뿐이었지만 잘해줬으며 한화에서도 그 실력을 입증했다. 클로이드는 나름 이닝 먹어주긴 했는데 외국인 용병이 4~5선발급 수준이었다는게 함정.

무엇보다 팀 역사적으로도 벤 라이블리 이전까지 22년 동안이나 3년 이상 활약해준 용병 투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50] 1999년 외국인 용병제가 실시된 이후 약 20년 동안 특급 에이스급이 아니어도 선발 로테이션 자리를 꾸준히 지켜오며 여러 해 활약해준 외국인 투수가 삼성을 제외한 각 팀마다 한 명씩은 있어왔다. 한화 바티스타나 kt 피어밴드같이 시즌 도중에 영입되어 꾸준히 활약해준 경우도 삼성에는 단 한번도 없었다.

다음은 각 팀별 역대 한 팀에서 3년 이상 활약한 투수들이다.
[목록 보기]
* NC

외국인 타자들의 경우엔 투수의 경우와는 달리, 찰스 스미스, 훌리오 프랑코, 매니 마르티네스, 틸슨 브리또, 야마이코 나바로, 다린 러프, 호세 피렐라 등 준수하게 뽑아오는 편이다. 하지만 외국인 타자에서도 역시 다년간 활약한 선수가 다린 러프를 빼면 아무도 없었다. 구단 역사상 최초로 3년 이상을 뛴 용병이 2019년에야 처음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삼성 구단 자체가 외국인 프렌차이즈와는 거리가 멀었던 팀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셈.

정확하게 외국인 투수들을 잘 뽑지 못 했던 것은 외국인 스카우트를 맡았던 이문한이 2008년 즈음에 그만둔 이후 롯데 자이언츠로 가면서 외국인 선수 통역을 맡았던 이충무가 대신 외국인 스카우트를 맡게 된 후부터다. 이충무는 미국의 한 에이전트 사에서 한국과 일본 프로구단의 외국인 선수 계약 및 스카우트 업무를 맡아왔고, 추신수의 에이전트로도 일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충무의 경력 탓에 삼성이 그에게 외국인 스카우트를 맡였으나 이충무는 원래 스포츠 마케팅이 전공이라 현장과는 거리가 있어 스카우트로서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다. 결국 삼성에 외국인 잔혹사만 선사한 이충무는 2013년 중반 kt 위즈로 옮겨가면서 외국인 잔혹사는 막을 내리나 싶었으나, 전병호 카리대를 데려오면서 제대로 폭망했지만 이후 한동안 잠잠했다.

2016년을 기점으로 왕조시대가 저물고 팀이 암흑기로 접어들면서 외국인 잔혹사는 다시 그 명맥을 이어가고야 만다. 그리고 2018년에는 드디어 조금이나마 사람 구실을 하는 용병 투수를 데려왔다. 아니, 이전 두 시즌에 비하면 완전히 환골탈태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2018년 삼성의 외국인 투수 조합인 아델만 - 보니야 조합은 역대 삼성 단일 시즌 용병 투수 이닝 소화 1위를 기록했으며, 아델만 보니야 각각 한 명의 승수가 2016년 2017년 각 해의 외국인 투수 총 승수보다 더 많다. 한 마디로 저 조합이 삼성 최근 외국인 투수의 2년치 승수를 뽑아준 셈. 그만큼 삼성의 외국인 투수 성적이 처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이만큼 활약해준 외인 듀오를 포기하고 삼성은 또다시 모험을 선택하였고, 결과는 어김없이 처참했다.

삼성이 외인투수 영입을 실패하는 패턴은 매번 일정하다. 시즌이 끝나고 "외인 투수는 신중히 고른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오곤 해를 넘기도록 소식 하나 없다 결국 외인구성은 해를 넘기고 만다. 그러고 1~2월이 되어서야 겨우 저가형 용병을 데리고 오면서 "라팍에 최적화된 땅볼형 투수. 다양한 구종으로 땅볼을 유도해내는 데 능숙하다."며 언플을 한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고 뚜껑을 열어보면 땅볼 유도형 투수라고 데리고 온 투수는 땅볼 유도는 커녕 그냥 배팅볼형 투수나 다름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렇게 시즌이 끝나고 그 투수를 방출하고 또다시 형편없는 투수를 데리고 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드물게 속전속결로 데려오는 외인도 부상 등으로 제대로 뛰지 못 하고 흑역사가 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타 구단에서 뛰다가 트레이드 대상에 올라 있다거나 결별 수순을 밟고 있는 검증된 선수들의 기사나 KBO 리그 진출을 희망한다는 외국리그 소속 투수들의 기사가 올라오면 여지없이 "삼런트 뭐하냐. 빨리 모셔와라", "니들이 그동안 데려온 걔네보다는 잘할 거다" 등의 댓글이 올라오곤 한다.

2019년 한화한테만 극강이던 맥과이어를 방출한 뒤, 대체선수로 들어온 라이블리가 준수한 활약을 펼쳐서 오랜만에 재계약에 성공한 외국인 투수가 되었다. 2020년 라이블리는 7월까지 부상으로 결장하고 복귀해서 한 달간 흔들렸지만, 리그 후반기 완벽한 피칭을 보이며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러나 라이블리는 유리몸이라는 심각한 단점이 있었고 결국 2021년에 부상을 당하며 퇴출되었고 대체외인인 몽고메리도 결국 실패작이 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 NPB에서 활약하던 데이비드 뷰캐넌을 영입했다. 삼성팬들은 영입당시에는 회의적이었으나 뷰캐넌은 데뷔년도에 174이닝을 던져 15승 ERA 3점대라는 훌륭한 성적을 내며 에이스가 되었고 다음년도인 21년에는 16승을 거두며 삼성 라이온즈 최초 다승왕이 되며 삼성라이온즈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타자의 경우 맥 윌리엄슨을 시작으로, 살라디노는 6월 한달 반짝하고 허리부상으로 시즌아웃, 팔카를 영입했지만 선풍기급 활약을 펼치며 외국인 타자 잔혹사가 시작될 위기에 놓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2022 시즌 드디어 외국인 투수 잔혹사가 끊겼다. 뷰캐넌과 같은 테크를 타고 있는 알버트 수아레즈를 영입했는데 리그 정상급 활약을 보이면서, 리그에서 외국인 3명이 모두 최정상급 활약을 보인 팀은 삼성이 유일하다. 같은 팀에 야쿠르트 시절 동료였던 뷰캐넌과 어릴적부터 야구를 같이 했던 피렐라로 외인이 구성되어 있어, 시너지 효과도 크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잔혹사가 이어졌는데 수아레즈가 나오는 날이면 타자들의 득점지원이 떨어지고 불펜들도 실점을 반복해, BW 11개를 기록하며 불운의 끝판왕을 달렸다.

그러나 2020년대 대략 홍준학 체제 중후반부터 외국인 선수 잔혹사가 사실상 끝난 것과 달리 대체 외국인 선수 잔혹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외국인 선수 잔혹사 시대의 플란데, 레온 등은 말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며 살라디노 대체로 들여온 팔카, 라이블리 대체로 들여온 몽고메리는 모두 메이저에서 출전 기록이 많은 이름값 높은 선수들이나 삼성에서는 KBO 역대 유의미한 메이저 기록을 낸 외국인 선수들 중 루크 스캇 다음으로 망했고,[59] 하다못해 NC에서 전반기를 뛴 와이드너는 수아레즈의 대체로 들어왔으나 역시 홈구장에서 얻어터지며[60] 실패했다. 그나마 쓸만했던 대체 외국인 선수가 라이블리 정도.

뷰캐넌이 떠나자마자 귀신같이 외인투수 잔혹사가 되살아났는데 제2의 에릭 페디라며 호언장담하며 데려온 코너 부터 기본적인 기량부터 의심되는 레예스까지 모조리 형편 없는 성적을 보여주며 팀의 부진에 부채질하고 있다.

2.8. 83 라인

파일:삼성_83라인.jpg
2013 시즌 스프링캠프 중[61]
왼쪽부터 이우선 - 안지만 - 신용운 - 최형우[62] - 장원삼 - 권혁[63] - 조동찬 - 이동걸[64]

83 라인은 1983년 태생의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을 뜻하는 말로, 삼성 왕조의 주축이었던 세대를 뜻한다. 삼성 왕조 시절 언론에서도 자주 언급될 정도로 삼성 라이온즈의 최대 동기라인이었다. 멤버로는 대표적으로 삼성 왕조의 4번타자였던 최형우가 있다.[65] 또한 내야 유틸리티맨으로 활약했던 조동찬도 있다. 투수진에서는 삼성 왕조의 좌완 에이스이자 큰경기에서 더더욱 강했던 장원삼과 필승조의 주축이었던 안지만이 있고 좌완 불펜투수였던 권혁이 있다.

그 외에도 이우선, 신용운과 같이 불펜에서 쏠쏠하게 활약해주던 선수들이 있었다.

이들의 등장과 성장으로 인해 삼성의 왕조 다지기는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이후 최형우는 2016 시즌이 끝난뒤 FA로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고, 조동찬은 2018 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하고 난 이후 코치가 되었고, 장원삼 또한 조동찬과 마찬가지로 2018 시즌이 끝난 뒤 은퇴 기로에 서있다가 부활을 위해서 자진 방출을 요청해서 방출 당한 뒤 LG에 입단하게 된다. 권혁은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고자 2014 시즌이 끝난뒤 FA를 통해 한화로 이적하였다. 이우선은 은퇴 후 야구아카데미 감독으로 활동중이다. 안지만은 알다시피...

이렇게 되면서 83 라인은 결국 2018년을 끝으로 완전 해체된다.

2023년 기준으로 83라인 중 리그에서 현역으로 뛰는 선수는 최형우가 끝이다.

[1] 삼성 팬들은 '꼰대야구의 대명사'로 현 삼성을 꼽으며, 타 팀 팬들도 현 삼성 상태를 간간히 비판하는 편이다. 마침 홍준학 단장은 팬들에게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꼰대로 불리는데, 이는 그의 권위주의적 행보가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팀 자체를 완전히 1990년대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처박아놓았기 때문이다. [2] # 스탯티즈 기준 역대 팀 wRC+ 1위는 1987년 삼성이고, 상위 10팀 중 7팀이 삼성 라이온즈이다. [3] 흑마구의 대명사 성준과 전병호 역시 삼성 선수였다. 오히려 삼성에 파이어볼러는 대부분 불펜에 분포해있었다. 이마저도 99688 시기 이후로는 불펜에도 피네스 피처만 도배해서 팬들이 뒷목을 잡는 중. [4] 2022시즌 종료 기준 [5] 198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비운의 천재타자 강기웅도 무시 못할 타력을 과시했다. 다만 그 놈의 체력이 항상 문제였을 뿐... [6] 이 컬러와 대척점에 선 팀이 LG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다. LG는 MBC 시절부터 김인식, 김재박, 이해창, 유지현, 이대형 등 발이 빠르고 주루 센스가 훌륭한 선수들이 대대로 있었고 1990년대에는 대포보다는 미친듯이 쏴대는 연속 안타로 상대팀을 흔드는 신바람 야구로 명성을 얻었다. 롯데도 김용희, 김용철, 김민호, 마해영, 임수혁, 이대호 등 일발장타를 갖춘 타자들이 대대로 나왔지만 삼성보다 양적인 측면에서 부족했다. 무엇보다 소총부대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팀이 롯데였는데 대표적 사례가 1992년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던 남두오성 타선이다. [7] 사실 류중일은 타격보다 수비가 더 일품인 선수였다. 더구나 프로 현역 통산 기록에서 시즌 3할 타율(규정타석 이상)과 2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해는 1990년 딱 1시즌 뿐이었다. 다만 팀내 다른 타자들은 주루 툴보다는 장타 툴에 특화된 선수가 많았고 류중일의 출루율과 준수한 주루 센스가 돋보였기에 리드오프로서 기용된 것이다. 박한이는 컨택 면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급 타자였지만 준족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발은 결코 느리지 않았지만 주루 센스가 꽤나 나빴다. 이 분께서 농반진반으로 정신병자라는 드립을 했던 것도 주루 플레이 상의 본헤드 플레이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8] 권오준은 선발로도 충분히 상위권 기량에 속한다는걸 증명하긴 했지만, 임창용의 심각한 부진으로 마무리 보직을 맡아 훌륭한 성적을 냈고, 이후 오승환과 보직을 바꿔 8회와 9회를 확실하게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15년동안 권오준은 단 한번도 선발로 복귀하지 못했기에 삼성팬들한텐 여러모로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있다. [9] 엄밀히 말해서 삼성전자가 전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인 것이다. [10] 현재는 홍준학 단장 혼자서 거의 팀을 운영하다시피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 이전에는 삼성그룹 오너가가 야구에 엄청난 관심을 갖는 등, 전국 굴지의 기업 회장가치고 상당히 자 팀 구단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11] 오히려 홍준학 단장 시기에는 홍준학 단장의 마음에 드는 선수들 성적 대비 연봉을 지나치게 퍼주고 특정 선수들에게는 대우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내쫓기를 일삼는 막장 구단이 되었기에 현재는 좋은 팀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12] 이와 같은 철혈식 운영으로 인해 김태한, 박충식, 김상엽 등의 에이스들이 쉴 새 없이 구르다 내쳐졌다. 타자도 예외는 없어서 강기웅, 양준혁 등의 스타 플레이어를 내쳐버렸다. 다만 양준혁은 김응용 감독 덕분인지 다시 돌아왔다. [13]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만수는 은퇴식도 없이 방출됐고 김시진은 큰 경기에 약하다는 이유로 최동원과 트레이드됐으며 장효조 역시 석연찮은 이유로 롯데로 트레이드됐다. [14] 그마저도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전에 은퇴식을 경험한 선수는 류중일 딱 한 명에 불과했다. 김현욱의 은퇴식부터는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갈증을 해결한 이후의 일이다. [15] 그러나 이 시절 화이트삭스 코치로 활동하고 있던 이만수에게 코치직 및 차기 감독 자리를 제시하였다가 갑자기 없던 일로 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자세한 건 이만수 항목 참조. [16] 대표적으로 조계현, 임창용, 김현욱, 김기태 등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고, 김동수, 이강철을 FA로 데리고 왔다. [17] 심지어 심정수의 4년 60억 FA 기록은 무려 9년동안이나 최고액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가 2013년에 와서야 깨졌다. [18] 김응용이 삼성 감독 부임 이후 첫 해인 2001년에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지만, 두산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해태 시절 9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면서 모두 우승했던 김응용 감독은 이때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하지만 2002년에는...... [19] 물론 1985년 통합 우승이 있고, 1987년 통합 1위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정하는 우승 팀은 한국시리즈 우승 팀이었다. 1985년 한국시리즈는 열리지 않았고, 1986년부터 바뀐 룰에 의해 전후반기를 휩쓴 팀도 2위 팀과 한국시리즈를 치르게 되었는데 1987년 한국시리즈가 그러했다. 전후반기 1위 팀이라는 위치에 맞지 않게 2위였던 해태 타이거즈한테 0-4 셧아웃을 당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은 무산되었다. 다만 1987년 한국시리즈는 해태에게 휴식일로 8일이나 주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경기감각면에서 삼성이 불이익을 본 시리즈였다. [20] 물론 디스 건 그 감독 돈으로 우승한 적이 있었다. [21] 당시 부상으로 재활 중이었지만 두산에 부족한 좌완 계투를 내주면서 두산 포수 중 서열이 떨어지는 채상병을 데려온 것에 분노하는 삼성 팬들도 많았지만, 두산 이적 후 지승민의 행보를 생각하면 어딜 봐도 삼성이 남는 장사를 했다. [22] 화면에 나온 '구단이 돈이 없다'는 말은 '프로야구단 법인이 적자를 기록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 [23]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삼성은 2010년대 들어 외국인 영입은 폭망했다. [24] 사실 냉정하게 보면 2013년 FA에서 삼성에게 필요한 것은 삼성 취약 포지션인 2루수 정근우 정도밖에 없었고, 이마저도 충분히 대체 선수가 있는만큼 딱히 필요없다는 얘기가 중론이었다. 당장 정근우의 나이를 봐도 현 삼성 2루를 맡고 있는 조동찬 김태완과 별 차이도 없고, 도리어 내줘야 하는 보상선수로 인한 출혈을 더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실제로 정근우가 70억이라는 거금을 받자 정근우에 대한 토론은 모조리 종료되었다. 심지어 이후 2014 시즌이 시작되자 2루수 자리에 일찍이 인터뷰를 했던 대로 특급 외국인을 데려오며 종지부를 찍었다. [25] 이때 상당히 많은 팬들이 분노했다. 대구 연고지 출신 선수였던 점도 있고, 본인이 "삼성 감독까지 하고싶다"라고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팀을 떠났다는건 팀 분위기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상당한 지적을 받고 있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박석민은 리그 레전드급 성적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음주 사태로 인하여 명성을 잃어버렸다. [26] 팬들은 이원석이 65억, 우규민이 27억이라고. 그만큼 이원석이 가격에 비해 말도 안되는 엄청난 활약으로 혜자 FA가 되었고, 반면 우규민은 허리 부상으로 삼성이 데려온 목적인 선발투수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사실상 추격조/패전조로 출장해 욕을 먹고있기에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27] 삼성그룹에서는 영향력이 꽤 막강한 사장급 임원이라고 한다. 라이온즈 구단 내에서도 신뢰도가 꽤 높다는 이야기가 있다. [28] 이전까지는 기아자동차 KIA 타이거즈를 매각하려고 신세계그룹 측에 의견을 타진했으나 수도권 연고팀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KIA 구단은 이를 부인했다. [29] 이건희 회장은 라이온즈의 초대 구단주였고 경산 볼파크의 건립도 직접 지시할 정도로 라이온즈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다. 특히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도 삼성서울병원의 VIP 병실에도 라이온즈 경기 중계를 줄곧 틀어놨고 이승엽의 극적인 홈런 순간에는 잠깐이지만 눈까지 번쩍 떴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30] 오재일의 영입 이전에도 강민호 우규민의 영입 때 상당한 금액의 돈을 썼다. [31] 정용진 회장은 기업계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야구광이다. 당연히 정용진이 보기에 삼성 임원진이 야구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맹점은 삼성 임원진이 야구에 관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일단 13연패를 하자 총수인 이재용이 화를 냈으며, 오히려 사망한 이건희 전 회장의 야구사랑때문에 야구단을 함부로 처분할 수도 없고, 실제로 삼성은 삼성 라이온즈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다. 물론 그 돈을 운용하는 사람이 홍준학이라 문제지. 결국 홍준학이 2023시즌 끝나고 퇴진한다고 한다. [32] 한 예로 2012년 시즌 후 심창민은 연봉 협상 전 전년도에는 재활 때문에 최저연봉 2,400만 원을 받았다가 올해는 1군에 올라왔으니 5,000 만원을 받자고 생각했었는데, 협상 과정에서 프런트가 처음부터 "내년 연봉은 5,500만 원으로 하자."라 말해 당황한 나머지 "6,000만 원 주세요."라고 말실수를 했다가 프런트가 "그래."라고 답해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밖에 롯데 시절 매년 연봉 협상에 프런트와 대립각을 세웠던 신명철은 삼성 이적 후 늘 그랬듯이 연봉 협상 때 연봉 고과와 관련된 자료를 잔뜩 준비해 갔으나, 본인이 예상한 금액보다 구단 제시 금액이 더 높아 군말 없이 바로 계약을 체결했다는 일화도 있다. [33] 이만수는 은퇴식도 없이 방출당했고, 김시진과 장효조는 선수협 파동으로 롯데로 트레이드가 됐다. 양준혁은 야구를 잘해도 불펜이 필요함에 따라 가차없이 트레이드를 당했고, 배영수는 기량이 쇠퇴하자 FA때 좋은 대우를 받지 못 했다. [34] 물론 배영수의 경우엔 부상 이후 기량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구단 역사상 이례적으로 대우를 잘해주긴 했다. 다만 배영수의 이적은 단순히 금전적인 대우가 아닌 점은 존재하고, 구단 전통의 레전드 홀대와 배영수의 자존심이 빚어낸 갈등이었기 때문이다. [35] 윤성환은 비슷한 경우인 줄 알았으나, 이후 승부조작으로 구속되며 재평가받았다. [36] 김응룡 감독은 구단 측에서 별로 불러오고 싶지 않아 했던 양준혁을 다시 삼성으로 불러들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37] 예외야 있겠지만 대부분의 삼성 팬들은 김응룡 감독이 처음 삼성에 부임했을 때는 크게 반발했지만 첫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에는 그러한 여론은 수그러들었고 선동열 감독과는 다르게 싫어하지 않는다. 일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던 2002년 한국시리즈의 이미지가 워낙 좋고 이후에도 부임하고 있는 동안 포스트시즌은 꾸준히 진출한 데다 팀 정체성을 딱히 바꾼 것도 아니라 삼성 팬들의 김응룡 감독에 대한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 또한 그가 공들이거나 그의 임기 중에 데려온 많은 유망주들이 2010년대 우승에 일조했고, 감독 퇴임 후에도 6년 간이나 삼성 라이온즈 사장을 맡는 등 삼성에 대한 애정을 쏟아줬기 때문에 오히려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 [38] FA 보상선수로 김재성이 삼성행, 선수단 운영 문제로 이형종이 퓨처스 FA 자격을 얻고 타 팀으로 이적, LG의 샐러리캡이 빡빡해져서 구단의 FA 플랜이 꼬임 등. [39] 특히 타격의 달인 장효조, 헐크 이만수, 특급 에이스 김시진 등 삼성 구단 초창기 역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세 명은 모두 삼성 소속으로 은퇴식을 치르지 못했다. 장효조 김시진은 선수 말년에 쫓겨나듯 아랫 동네 팀으로 트레이드됐고 이만수는 구단 내에서 가장 큰 팬덤을 보유한 슈퍼스타였음에도 노쇠했다는 이유로 구단으로부터 방출당해 삼성 구단과 좋지 않게 결별했다. 2002년 이전까지 우승에만 목을 맸던 삼성 구단이 레전드 스타들을 얼마나 홀대했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 [40] 현역으로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연도만 기록. [41] 2000시즌 개막전이자 SK 와이번스의 창단 첫 경기 [42] 삼성 트레이닝 센터의 경우에는 삼성스포츠단 뿐 아니라 삼성에서 후원하는 기타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도 이 곳에서 훈련과 재활을 한다. 국내에서는 가장 체계적인 최첨단 훈련 시설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43] 엄밀히 말하면 배영섭은 지명 후 부상으로 한 시즌을 날렸고 최형우는 경찰청 입대 후 방출당하고 제대 후 재영입한 케이스라 삼성 2군에서 성장한 경우라고 보기는 힘들다. [44] 사실 KBO에서도 현재 뛰어난 우타거포는 많이 희귀한 편이다. 리그 정상급 우타거포는 박병호 최정정도다. [45] 이후 2016~2018년은 선발보다는 불펜으로 더 많이 등판했고 계속 부진했다. [46] 3.58, 리그 전체 8위 [47] '05 백준영, '06 김효남, '07 김동명 등 1차 지명자들이 모두 성장에 실패했다. 많은 기대를 모았던 '08 우동균은 기대에 못미쳤고 '09 김상수가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서 제 몫을 해주고 있다. '10~'13 드래프트에는 1차지명이 폐지됐다가 '14년 드래프트부터 부활했다. '14 이수민도 크지 못했고, '15 김영한은 대구-경북팜이 아닌 속초시의 설악고 선수였다. [48] 비단 경주고 뿐만 아니라 대구·경북 고교야구부에 대한 학교 차원의 지원이 점점 줄어 가면서, 이에 대구·경북 중학야구 유망주들 중 몇몇 선수는 지원이 후한 타 지역 고교로 진학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삼성 리틀야구단 출신임에도 천안북일고로 진학한 김인태가 있다. [49] 이 둘은 성적만 놓고보면 성공작이긴 하다. 특히 베이커는 2021년 데이비드 뷰캐넌 이 16승을 거두기 전까지 역대 삼성 외국인 투수 중 최다 승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50] 사실 벤 라이블리도 2019년 대체용병으로 들어온 이후 2020년, 2021년 모두 부상으로 인해 리그를 풀타임으로 소화하지 못하였다. 2021년 초반에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타선과 불펜이 도와주지 못하면서 승을 쌓지 못하였고 결국 부상으로 인해서 방출되었다 [51] 시즌 중 KIA에서 영입 [52] 시즌 중 넥센에서 방출 후 kt로 영입 [53] 시즌 중 재영입 [54] 시즌 중 대체선수로 영입 [55] 시즌 중 두산으로 이적 [56] 시즌 중 재영입 [57] 시즌 중 재영입 [58] 시즌 중 대체선수로 영입 [59] KBO에서 악명높은 에디슨 러셀보다도 더 심각하며, 성적상으로만 보자면 스캇을 넘어서 가장 실망스러운 외국인 두 명으로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망했다. 마침 러셀도 첫 시즌은 대체 외국인 선수로 들어왔는데 망했으나, 있느니만 못했던 팔카, 몽고메리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루크 스캇은 성적 자체는 OPS 9할로 준수하나 해당 시즌이 KBO 역대 타고투저 최강으로 꼽히는 2014시즌이었고, 결정적으로 이만수 감독에게 항명하며 팀케미를 크게 해쳤기에 순수 성적은 팔카와 몽고메리가 더 처참한데도 저 둘보다 훨씬 낮은 평가를 받는다. [60] 사실 전반기에도 그 약한 삼성 타선에게 라팍에서 털릴 정도로 라팍에서 약했다. [61] 위 사진에서 김효남이 빠졌다. 83년생인 김효남은 2012년 12월에 LG트윈스에서 손주인과 트레이드 되었으며, 손주인 또한 삼성의 83년생 라인이었다. [62] 당시 팀 주장, 야수조 조장 [63] 당시 투수조 조장 [64] 이동걸은 당시에는 1군에서 존재감은 없었지만 1983년생 선수들만 모인 것이라 같이 찍었다. 묘하게도 혼자만 다른 선수들을 보면서 동갑내기를 부러워하는 듯한 구도가 됐다. [65] 양력생일은 1984년 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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