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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레닌/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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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c0000>생애 <colbgcolor=#fff,#1f2023> 생애 및 정치 경력
가족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 배우자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사건 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 신경제정책
관련 정치인 니콜라이 2세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레프 트로츠키 · 이오시프 스탈린
기타 레닌주의 · 볼셰비키 · 레닌 영묘 · 레닌그라드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

1. 개요2. 어린 시절3. 젊은 혁명가4. 1905년 혁명과 2월 혁명에서의 역할5. 10월 혁명 소련의 건설6. 신경제정책과 최후
6.1. 당시 상황: 심각한 경제침체6.2. 신경제정책 도입(1921)6.3. 암살시도(1918)와 실패
6.3.1. 후유증과 사망(1924)
6.4. 사망 이후
6.4.1. 레닌의 포용력6.4.2. 스탈린의 대숙청6.4.3. 엠버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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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블라디미르 레닌의 생애에 대해 다룬 문서이다.

2. 어린 시절

1870년 러시아 제국 볼가 강변 심비르스크의 장학사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리야노프(Илья Николаевич Ульянов, 1831–1886)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울리야노바(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Ульянова, 1835–1916)[1] 부부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레닌의 부계는, 조부는 해방된 농노 집안 출신이고 조모는 기독교로 개종한 몽골계 칼미크인이다. 조모에 관해서는 마리에타 샤기냔(Мариэтта Шагинян, 1888–1982)이라는 작가가 레닌의 초년을 담은 전기 소설에서 밝혔다. 레닌 유족(아내 크룹스카야와 레닌의 남동생인 내과 의사이자 혁명가 드미트리)의 감수를 거친 책이며, 이 책에서 레닌의 몽골계 혈통을 드러낸 탓으로 책이 금서로 지정되고 작가 샤기냔과 크룹스카야는 견책을 받고 편집자는 파면되고 작가는 해당 장르(소설)의 활동을 정지당했다가 18년 후에 복권되었다. 레닌의 모계는 이름난 유대계 러시아인 가문이었고, 레닌의 어머니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유대교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한 아슈케나즈 유대인 아버지와 스웨덴-독일계 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개종한 지가 굉장히 오래되어서 레닌의 대에 들어가면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였다.[2] 이들에게 유대계가 섞였단 사실은 레닌의 누나 안나가 30대에 스위스 여행을 하던 중 외할아버지의 성을 대자 그거 유대인 성씨라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하지만 레닌은 자신이 유대계라는 사실을 모를 때부터 유대인들에 대해서 재능 있는 민족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알고 난 후에는 자신의 유대계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머니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언어에 재능이 있어 4개의 국어를 구사했고, 직업은 교사였다. 아버지 일리야 울리야노프는 농노 출신이었지만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이후 교육 공무원으로서 공적을 인정받아 세습귀족의 자격이 있는 4등관까지 오를 정도로 유능했다. 일반 농민이나 노동자와는 괴리된 중산층 계급 출신인 레닌은 이러한 뒷배경을 딱히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았고, 종종 사적인 경험과 연관지어 소 부르주아적인 정서에 이해심을 보였다.[3]

레닌과 형제자매들은 당시 기준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차르 충성 교육 또한 하였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레닌과 형제 자매들은 어학·역사·문학·음악 등 다양한 방면으로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 학습 효과는 반대로 나타나게 된다. 레닌의 아버지가 죽고,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 차르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하자 레닌과 그 형제들은 모두 혁명에 가담한다. 이후 레닌의 어머니도 혁명에 투신한 자식들을 돌봐주게 된다.

레닌은 이런 유복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어머니로부터 유창한 프랑스어를 배웠다.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쓴 것은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보면 잘 나온다. 레닌과 같은 공산주의 혁명가가 정작 부르주아 출신에 가깝다는 것에 아이러니를 느낄 수도 있는데, 사실 전 세계 어디서든 좌파 운동가들 중엔 프롤레타리아 계층보다 오히려 부르주아 지식인 계층 출신이 많다. 고등 교육을 통해 좌파 사상을 습득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점을 감안하면 이상한 것은 아니다.[4]

레닌이 17살이 되던 해, 혁명 운동에 투신하고 있던 형 알렉산드르가 차르 암살에 가담하여 체포된 후 사형을 당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는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본격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한다. 1887년 카잔 제국 대학에 입학했으나 그해가 가기도 전에 학생 운동으로 퇴학당하고,[5] 이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효시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번역한 서적들을 탐독하며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1893년에는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그해 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3. 젊은 혁명가

레닌은 1895년 4월부터 9월 사이에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접촉하려고 프랑스· 독일· 스위스를 여행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노동자의 대의》라는 신문을 준비하는 도중에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1897년에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1898년에는 시베리아에서 함께 유배된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결혼했으며, 1899년에는 그의 주요 저서인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달》을 집필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레닌은 1900년 독일로 망명, 이 와중에 국가 고등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하기도 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인 《이스크라(불꽃)》를 같은 해 12월 말 창간하여 편집자로 활동한다.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 신문인 《이스크라》는 러시아 지식인을 혁명 운동으로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해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이스크라 편집진과 함게 마르크스 이론을 다루는 신문 《자랴(여명)》를 발간했다. 1902년에는 당 조직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정리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집필했다.

한편 1903년에 열린 제2차 당대회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당원 자격을 둘러싸고 레닌이 주도하는 파와 율리 마르토프가 주도하는 파로 분열되었다. 최초의 분열은 앞에서 말한 기관지 《이스크라》의 편집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후의 볼셰비키 멘셰비키의 전략적 대립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그저 편집진의 구성에 있어서 이견이 있는 정도였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구분 또한 명확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레닌의 편집진 구성을 지지하는 사람이 약간 더 많아서 레닌파가 '다수파(большинство)'라는 의미의 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и), 마르토프파는 '소수파(меньшинство)'라는 의미의 멘셰비키(меньшевики)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공식 용어로 굳어져버렸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선전용 용어였고 실제로는 1917년 4월까지 멘셰비키가 근소하게나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사회주의 건설 전략에서 견해 차이가 생기면서 레닌과 마르토프의 대립은 격화되었는데, 마르토프는 카를 카우츠키가 집대성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으로 봉건제가 타도된 이후 정치권력과 경제적 주도권을 부르주아에게 이양하여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후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레닌은 봉건제를 타도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 선결조건임에는 동의하나 정치권력과 경제적 주도권을 모두 부르주아에게 맡겨두면 노동자 계급에 대한 탄압이 격화되고 혁명의 원동력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다고 보고 경제적 주도권은 부르주아에게 넘기되, 정치권력은 프롤레타리아 당이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전략적 견해의 차이가 있다 보니 레닌파는 당원 자격을 소수의 직업 혁명가로 제한하길 원했지만, 마르토프파는 입당 자격 제한을 낮추는 등 대중 정당을 추구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은 처음에는 전혀 심각한 대립이 아니었으나 이후의 논쟁을 거치면서 당내 파벌 수준을 넘어 실질적으로 다른 당이라고 할 만큼 갈라서게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레닌의 파는 같은 당의 분파인 멘셰비키는 물론,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인민주의 정당 사회혁명당에 비해서도 세력이 약했다.[6]

원칙적인 부분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대중적인 정치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볼셰비키들도 동의했다. 허나 왜곡된 러시아의 현실에서 이미 민중이 혁명으로 달음박질하고 있는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언제까지고 대의제적·의회적 정당 타령이나 하고 앉을 수는 없으니, 하루 빨리 민중의 움직임에 동조할 수 있는 혁명의 선봉으로써 훈련된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혁명 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을 필두로 하는 볼셰비키들의 생각이었다. 이른바 '혁명 전위당' 이론이다. 그런데 이게 멘셰비키/볼셰비키의 입장 차이 전부는 아니고... 볼셰비키가 대중 정당이 아닌 전문적 혁명가 중심 정당을 요구한 이유 중에는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탄압의 대상인 불법 정당이었다는 점도 있었다. 언제 당원들이 체포당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규모가 큰 대중 정당을 만들면 유사시 당 간부들이 몸을 숨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당내의 비밀 유지도 힘들며, 가족과 생활이 있는 대중 당원들로서는 탄압에 저항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4. 1905년 혁명과 2월 혁명에서의 역할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고 가을에 시작된 파업이 전국으로 퍼지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의회(두마)를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와 투표권을 부여했으며 입헌군주제를 선언했다. 레닌은 11월에 러시아로 돌아와 총파업을 주장했다. 그러나 파업은 12월 말에 진압되었고 레닌은 탄압을 피해 다시 스위스로 망명했다. 그는 저술 활동에 힘쓰며 조금씩 동료들을 포섭한다. 이 시기에 보그다노프와 고리키를 비롯한 초좌익파를 출당하고 영원히 결별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적국인 러시아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독일 정부는 비밀리에 레닌과 교섭했고, 레닌은 1917년 3월 혁명(구력 2월) 직후 독일이 제공한 열차로 귀국하였다. 이 때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봉인된 특별 열차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나 사실은 좀 다르다. 실제로는 일반 전세 열차를 타고 독일에서 스웨덴, 러시아령 핀란드를 거쳐서 평범하게 귀국했다. 독일 측에서는 열차 배차에서 우선권을 주고, 독일 국내에서 감시 인원을 붙이는 정도의 조치만 취했다.

귀국 직후 니콜라이 2세를 폐위시킨 뒤 세워진 임시정부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4월 테제>를 발표했다. 볼셰비키는 4월 테제에서 '농민에게 토지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즉각적인 전쟁 종결'을 구호로 외치며 대중을 선동했다. 또한 7월에 임시정부를 대체하려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임시정부는 트루도비키(трудовики, 당시 두마 내 여러 사회민주주의 정당 중 하나로 трудовая группа의 준말.)였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총리로서 전권을 장악하는 체제를 성립하고 볼셰비키 지도부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레닌은 노동자로 위장한 뒤 핀란드로 망명했고, 망명 기간 중 유명한 저서 <국가와 혁명>을 저술했다.

5. 10월 혁명 소련의 건설

파일:external/gatsbysmonologue.files.wordpress.com/lenin1.jpg
Ленин — жил,
레닌은 살았으며,
Ленин — жив,
레닌은 살아있으며,
Ленин — будет жить!
레닌은 살아있으리라!

2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은 이른바 '이중권력체제'라고 부르는 모순 상태에 빠졌다고 해석된다. 차르를 중심으로 하는 구체제가 모든 힘을 상실했으나 새로운 정부 또한 확고한 힘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임시정부와 현지 소비에트가 서로가 용인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와 각 정치 세력은 자신들의 주도로 이루어지지 않은 황제 폐위 및 2월 혁명의 결과에 당황한 나머지 서로 눈치를 보며 주도적인 활동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임시정부의 힘은 거의 수도 페트로그라드 주변 일부밖에 미치지 않았다.

8월, 케렌스키와 갈등을 빚던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하게 된다. 이를 저지할 군사력을 모으던 케렌스키 정권은 페트로그라드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민중들의 자치적 평의회 즉, '소비에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각 소비에트의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 휘하의 병력을 소멸[7]시키는데 도와주게 된다.[8]

1917년 10월, 이러한 와중에 레닌은 마침내 케렌스키 정부가 모든 힘을 상실했음을 느끼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에 즉각적인 혁명의 개시를 촉구했다. 11월 7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 노동자 대중을 동원하기가 가장 유리했던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지도자 레프 트로츠키의 주도로 거의 무혈로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10월 혁명이다.

1917년 11월 8일에 제2차 전 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열리고 레닌은 즉시 자신을 지원해준 독일과 강화 회담을 시작했고, 1918년에 치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그 대가로 핀란드, 러시아령 폴란드, 베사라비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을 포기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마자 볼셰비키는 이 조약을 폐기한다.

한편으로 볼셰비키는 예고한 대로 1917년 11월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으나, 볼셰비키에 대한 노동자와 군대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사회혁명당 우파가 과반을 차지하자[9] 1918년 한 차례의 회의만에 제헌의회를 폐지해 버리고[10]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 KGB의 전신이 되는 체카를 설치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반을 놓게 된다.

이 과정에서 레닌은 마흐노의 아나키스트 세력과 나탄손, 스피리도노바의 사회혁명당 좌파와 연대했다. 테러 전문가였던 사회혁명당 좌파는 체카의 핵심을 이뤘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좌파는 브레스트 리토프츠크조약에 반대해 레닌을 암살하려 시도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진압되었으며, 아나키스트들은 레닌이 토사구팽하며 1919년에는 야당이 전부 금지된다. 야당도 여당도 아닌 동지 멘셰비키들은 꽤나 오래 버텼지만, 야당에 우호적인 원로 레프 카메네프의 반대와 노동계급의 전체연대(동행인 중심의 통일전선)를 주장하는 트로츠키의 소소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1920년대 내내 지역 소비에트에서 당선되는 멘셰비키들을 모조리 축출한다. 레닌이 작성한 코민테른 21개조 요구에서도 개량주의(사회민주주의)와 중도주의(독일 독립사민당의 혁명-개량 중간위치)를 전부 배격하라는 주장이 들어갔으며, 좌파공산주의세력은 얼마간 버텼으나 크론시타트 수병반란 이후 대부분이 축출되고 일부는 트로츠키, 일부는 부하린을 지지하다 소멸한다.

비록 혁명은 성공했지만 단순히 페트로그라드와 대도시 중심의 쿠데타에 불과했고, 좌파 사회혁명당과 일부 아나키스트를 제외한 정치세력은 그들이 얼마 못 갈 것이라 여겼다. 게다가 레닌이 독일과의 불평등 휴전 조약을 맺자 볼셰비키의 적군과 반 볼셰비키의 백군이 서로 싸우는 러시아 내전이 터진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 등 당대 모든 주요 열강 세력과 독일 제국, 체코슬로바키아 등 군사 강국들이 직접 원정군을 파견한 것은 물론, 각지에서 백군 세력이 봉기하여 신생 소련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 상태였다. 이를 계기로 트로츠키가 수장이 된 소련의 붉은 군대(赤軍. Красная Армия. Red Army)가 최초로 결성되었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하지만 결국 주요 공업지대와 인구 밀집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볼셰비키가 끝끝내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21년 내전은 종료되었다. 이 내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고 볼셰비키의 권력은 확고부동하게 되었으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9천만명의 인구중 1천5백만명이 죽어야했던 것이다.

6. 신경제정책과 최후

6.1. 당시 상황: 심각한 경제침체

신생 소련은 내전에서 승리했으나 경제가 심하게 침체된 상황이었다. 내전 직후 소련의 경제 상황은 '침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심각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중공업의 꽃이자 중공업 발달 수준의 척도인 철강 생산량이 내전 이전에 비해 1/5 이하로 격감했었고, 또한 기록적인 가뭄으로 농업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기근까지 일어났던 참담한 상황이었다.

6.2. 신경제정책 도입(1921)

레닌은 경제를 복구하려고 1921년에 신경제정책(НЭП, NEP)을 도입했다. 레닌에 의하면 NEP는 혁명 성공의 최초기단계가 지나면 실행되기로 원래부터 계획된 정책이었다. 레닌 스스로부터가 당시 단계에서 소련은 성공적인 사회주의의 구축을 위한 자본주의적 물적 토대가 부족하다는 것을 냉철히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회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전 단계로써 과도기적인 형태로 도입된 자본주의적 체제에 대해 레닌은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소규모 사업 및 자유 소매업을 허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선진 기업들을 초청하며 자본의 투자를 장려하고자 했다.

다만, 레닌이 공산주의 국가의 고립을 바란 게 아니었다는 주장에는 반론도 있으니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는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 없고, 상대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은 마르크스가 제기하여 레닌주의의 공식 입장이 된 것에 가깝다. 레닌 이후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벌인 권력투쟁의 이론적 기반이었던 일국사회주의론 VS 연속혁명론의 논쟁에서도 양측 모두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공존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레프 트로츠키 문서를 참고할 것.

이 면에서 보면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공존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과도적 정책으로서 시행된 것에 가깝다. 또한, 레닌 시대의 소련이 이후 스탈린 시대보다 훨씬 더 심각한 외교적 고립 상태였다는 점 역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 냉전 이후 시기에 자본주의 진영과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기는 했지만, 세계를 양분했다고 평할 정도로 상당한 수의 우방국, 또는 위성국가군을 거느리고 있던 데 비해 레닌 시대의 소련은 위성국인 몽골 이외에는 거의 교류 상대가 없었다.

비교하자면, 나중에 중국 덩샤오핑 같은 경우 '모두가 가난한 것이 사회주의는 아니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공존과 공산주의를 위한 물적토대 마련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갖는다.

6.3. 암살시도(1918)와 실패

그러던 1918년, 볼셰비키의 숙청에 반발한 좌파 사회혁명당원 파니 카플란이 레닌을 암살하려 하였다가 결과적으로 미수로 끝났다. 이들은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를 지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로 분열한 사회혁명당원 중 볼셰비키와 행보를 같이 하기로 한 계파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 중 볼셰비키의 독단적이고 폭압적인 행동에 반발하여 결국 볼셰비키를 적대하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에 대한 혁명전쟁을 주장하던 이들은 강화를 볼셰비키의 반역으로 규정, 2차 혁명을 일으킬 것을 선동한다. 그러나 이들의 쿠데타는 하루만에 진압되었다. 이를 계기로 볼셰비키는 적색테러에 진입한다.

6.3.1. 후유증과 사망(1924)

하지만 중상을 입은 레닌은 총상의 후유증과 그동안 누적된 과로 때문에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1922년 독일 의료진을 불러 총알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그 직후 뇌일혈을 일으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점점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결국 마지막 1년은 실어증[11]까지 겪으면서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1월 21일 사망하였다.

죽기 직전까지도 레닌은 소련의 상황에 대한 냉정한 시각을 잃지 않았으며,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세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결국 스탈린의 지나치게 흉포한 성격을 경계해야 하며, 당 중앙 위원회에서 스탈린을 제명시켜야 한다는 유명(遺命)을 남겼으나 세상에 공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탈린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최고위원들을 다 까는 바람에 인기가 떨어질 것을 걱정한 최고위원들이 알아서 쉬쉬하며 묻었기 때문이다.[12] 덕분에 스탈린은 위기에서 벗어났고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13]

말년에 스탈린을 경계하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보안을 염려하여 5중의 자물쇠가 달린 금고에 보관하는 치밀함까지 유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말년에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데다가 손짓으로 겨우 대화하던 중환자로, 때문에 자신의 모든 서류작업은 대필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일을 한 비서[14]의 밀고로 이내 스탈린이 알아챌 수 있었다.
  • 다만, 흔히 말하는 <레닌의 유언장>은 단순히 모든 최고위원들을 까고 스탈린을 당 중앙위원회에서 내보내라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죽음을 앞 둔 상황에서 자신의 사후 소련 공산당의 후계구도를 정리하려는 정치적 의사표명에 가까운 내용이다. 이를 단순히 <모든 최고위원들을 다 깠다>고 해석하기는 어려운 것이, 이 유언장에서 거론된 트로츠키,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의 다섯 인물에 대한 평가에는 명확한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경우 "오만하고 독단적이다" 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는 하였으나 동시에 "중앙위원회에 가장 적합한 인물" 로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은 트로츠키가 자신의 문제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도와줘야 한다" 라고 주문하고 있고,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세 명의 경우 그 인물들이 가진 장점을 열거하여 칭찬한 후 "하지만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어 최고지도자로써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계를 지적하고[15] 있는 것이다. 즉 레닌은 이 유언장을 통해 <자신의 사후 소련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로는 트로츠키를 추천한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너무 오만하고 독단적이라는 문제점이 있으니 (위 3인을 중심으로 한)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그 오만함이나 독단성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보좌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를 주문한 것. 다른 최고위원들이 이 유언장의 공개를 반대한 것 자체가 당시 정치국 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존재인 동시에 많은 정적을 가진 것이 트로츠키였는데, 이 유언장이 공개되면 그 트로츠키가 정권을 잡게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16] 마침내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레닌의 유언을 숨기고 서기장이 되어 정적인 트로츠키를 숙청한다. 그리고 레닌을 신격화해서 그 후계자인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레닌의 사망 원인이 매독 때문이라는 설이 그럴듯하게 돌았다. 레닌이 건장했으며, 비교적 젊은 나이(54세)에 사망한 것이 이 설의 배경이 되었다. 당시 항생제가 나오기 전이라서 매독은 불치병이었으며, 현재의 에이즈와 비슷한[17] 공포였다. 이 설은 그를 디스하는 측에서 상당히 널리 퍼진 설이다. 유력 정치인이 에이즈로 사망했다고 해보자. 그 정치인이 어떻게 보여질까? 그것과 비슷한 효과다.

소련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설은 서방에서는 반공적인 분위기에서 유력한 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012년 6월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메릴랜드 의대의 연구진은 레닌의 부검소견서를 연구한 결과, 스트레스로 인한 뇌졸중이 사망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 레닌의 아버지도 이 병으로 사망했으므로 가족력이 있었는데 여기에 더해 스트레스와 과도한 흡연으로 그도 같은 질환으로 최후를 맞았다. 어쨌든 레닌의 사생활은 담백했다는데에 대부분의 전기 작가들의 견해는 일치한다. 여자보다는 혁명이나 철학적 논쟁에 더 흥미가 있었던 듯하다. 사실 매독 사망설은 레닌 말고도 많은 정치가들이 사망했을 때마다 돌았던 전형적 비하용 레퍼토리이며[18], 레닌이 매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게 확실한 과학적 검증을 통해 밝혀졌다. 애초에 시신이 그대로 앰버밍 되어 있기에 검증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6.4. 사망 이후

6.4.1. 레닌의 포용력

레닌은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독단적이고 과감하게 폭력을 휘둘렀지만, 일단 상황이 안정되었을 때는 이념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을 끌어 안을 줄 알아 적지 않은 수의 멘셰비키[19], 사회혁명당원, 아나키스트 등의 볼셰비키와 대립했던 좌익들은 이 내전 중에 그를 적대했더라도 용서받고 새로운 소련 체제에 정착할 수 있었다. 마르토프, 사회혁명당 당수 빅토프 체르노프 같은 지도부들도 레닌 시절에는 직접 죽이기보단 망명이 더 일반적인 경우였고, 그 아래 평당원, 조직원들의 경우 이때 옛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 아나키스트였던 사람들이 대거 공산당에 입당했다. 레닌이 이전에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절도 혁명의 완성을 위한 견해 차이라고 생각했고, 혁명이 이루어지고 혁명역량이 싸그리 날아가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러 수단을 썼던 것뿐이었다. 혁명 이후 안정화 시기에 여러 계파를 받아주고 다양한 견해를 수용해 주었다.

6.4.2. 스탈린의 대숙청

그러나 레닌이 죽자, 레닌이 인식한 자유에 대한 의식과 거리가 있었던 스탈린이 집권하고 대숙청 때에는 스탈린 계파를 제외하고 전직 비 볼셰비키를 포함한 계파들이 스탈린에게 전부 숙청당했다. 대숙청의 피해자 숫자로 제시 되는 수십만 단위의 처형인들 중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부하린 같은 유명한 볼셰비키 원로가 아닌 다수는 이렇게 레닌 시절 포용되었다가 스탈린 시절 마치 현대 민주국가의 법적 논리의 면전에 노리고 뻑큐를 날리는 듯한 소급입법된 판결에 따라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6.4.3. 엠버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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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시체는 보존처리[20]가 되어 정확히 100주년을 달성한 현재까지도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 영묘에 전시되어 있다.[21][22] 크룹스카야도 영묘 전시에 반대했으나, 레닌이 죽자 시체를 영구보존하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과학자들을 닦달했다고 한다. 다만 아무래도 엠버밍이 처음이다보니 기술이 완벽하지는 않았어서 코와 귀에 문제가 생겨서 밀랍으로 그 부분을 대체했다고 전해진다. 사진의 귀를 자세히 보면 귀의 밑부분은 검은색이 도는 반면 윗쪽은 매우 깨끗한 걸 알 수 있다. 일부 반공적인 러시아인들이 레닌이 어머니 옆에 묻히길 바랐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그게 정설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것은 러시아어 위키피디아에서도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나오며 레닌은 유언장에서 정치적인 내용만을 남겼다.

레닌의 시신은 스탈린 격하 이후에도 여전히 붉은 광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제난으로 지지율이 떨어진 옐친 대통령이 자신이 불리할 때마다 정국 전환용으로 레닌 시신 이장 얘기를 꺼낸 데다가, 꼭 우상숭배가 아니라도 20세기 세계사를 새로 쓴 역사적 인물을 보고 싶어하는 전세계의 관광객에서 창출될 쏠쏠한 관광수입을 생각하면 그냥 이장시키기엔 좀 아깝기도 하고 제1야당 러시아 공산당에서도 강하게 반대한 데다가 당시 경제난이 레닌 시신 이장 문제로 덮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지라 딱히 화제전환도 잘 되지 않아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예산 나가는 문제야 옐친이 집권한 1991년 진작 끊어서 문제가 없어졌고, 그 이후 엠버밍 회사가 자사 기술력 홍보를 위해 비용을 알아서 부담해왔다. 지금도 레닌의 시신 보존에 들어가는 비용보다 이를 통한 광고효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훨씬 크다고 한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은 집권 초기부터 레닌 매장 반대를 분명히 밝혔으며, 2015년 레닌 영묘에 대한 예산 지원을 재개했다.


[1] 혼전성은 '블란크(Бланк)'. [2] 최초 개종은 레닌의 외증조할아버지대였다. [3] 이는 레닌 사후 우상화 작업을 하던 스탈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묻혔다. [4] 19세기말~20세기 초의 프롤레타리아 계층은 문맹이나 겨우 면하면 다행이었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고급 사상을 익히긴 힘들었다. 노동자 출신 운동가들도 존재하긴 하는데, 주로 부르주아 출신 운동가들이 혁명을 할때 무력집단의 행동대장으로 동참했다가 타고난 능력이 뛰어나 빠르게 사상을 습득한 경우에 해당했다. [5] 이 때문에 카잔에는 청년 시절 레닌의 모습을 딴 동상이 있다. [6] 이 당시에는 레프 트로츠키도 멘셰비키에 있어 레닌의 각종 논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7] 전신 철도 체계를 장악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거짓된 통신을 보내어 병력을 분산시킨다든가, 병사들이 타고 있던 열차의 운행을 고의로 멈추거나 전혀 엉뚱한 지역으로 열차를 보내버림으로써 말 그대로 병력의 응집 자체를 '소멸'시켜버린 것! [8] 다만 여기에 볼셰비키가 무슨 주도적인 영향을 한 것처럼 서술하는데 소비에트는 정당은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단칼에 거부했다. [9] 당시 러시아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볼셰비키는 대도시의 노동자, 전선의 군대에서 과반의 지지를 받았으나 토지개혁을 기반으로 농민의 지지를 받는 사회혁명당을 수적으로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연대하여, 사회혁명당의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볼셰비키의 계획은 집단농장화. [10] 이때의 논리가 '선거 결과가 소비에트를 통해 나타난 민중의 실제 의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소비에트는 사업장별로 대표자를 뽑는데, 여기에서는 볼셰비키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의회에 비해 인민의 의사를 보다 정확히,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통로'라 여겼기에 제헌의회를 해산한 것인데, 이 시점에야 소비에트에는 다른 좌파인 사회혁명당 좌파와 멘셰비키가 참여했다지만 정작 볼셰비키가 이들을 전부 불법화해버리면서 이후 볼셰비키 혼자 참여하는 소비에트 선거는 실질적으로 상부에 영향을 끼칠 수단을 상실하게 된다. [11] 언어 기능에 장애가 발생하는 질병 [12] 트로츠키는 '지나치게 자신감을 지녔다고 깠으며, 심지어 레닌이 가장 신뢰했던 위원인 부하린마저 '마르크스주의자라기엔 상당히 현학적인 자'라고, 스탈린을 성실하지만 위험하다며 승계자가 무능해도 상관 없으니 갈아치울 수 있는 한 갈아치우라고 깠다. 다만 "승계자가 무능해도 상관없으니 스탈린은 갈아치우라" 는 의미라고 해석한 부분은 지나치게 결과론에 기반한 일종의 오독이다. 애초에 레닌 생전 스탈린이 받았던 평가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은 아니지만 성실하고 사람좋다>는 것이었고, 당시 스탈린과 경쟁하던 다른 최고위원들에 비하면 전혀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 못했다. 스탈린의 최대 정적이던 트로츠키의 경우 "나는 레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차르 정부를 박살냈고, 그 뒤에는 레닌이 해외로 탈출한 상황에서 임시정부를 한 방에 박살내고 다시 레닌을 맞아들이기까지 했는데 스탈린 너는 대체 혁명 과정에서 한 일이 뭐냐?" 고 조롱할 수 있는 입장이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외국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를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부> 라고 간주할 정도였다.) 이런 트로츠키에 맞서기 위해 스탈린과 손잡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만 해도 각각 두 수도의 소비에트 의장과 코민테른 의장,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등을 역임했다는 화려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13] 이 부분 역시 레닌의 유언장이 비공개되고 다른 정치국원들이 오판하면서 스탈린이 어부지리로 권력을 장악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과정은 전혀 손쉽지 않았다. 당시 후보군 5명 중 스탈린은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 상태에서 자신보다 강력한 정적을 꺾기 위해 먼저 카메네프 및 지노비예프와 손을 잡고(트로이카)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뒤 다시 부하린과 손을 잡고 카메네프 및 지노비예프를 실각시키고 나서 마지막으로 부하린까지 실각시킨다는 복잡한 정치공학적 계략을 사용해야 했다. 이 과정이 단기간에 끝난 것도 아니고, 스탈린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은 1925~1927년 사이지만 1920년대 후반이 되면 해도 한때 스탈린과 손잡았던 지노비예프 및 카메네프가 이번에는 트로츠키와 손을 잡고 스탈린에게 맞서려고 시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런 경쟁자들을 모두 숙청하는 데 성공한 것이 1937~1940년의 일이었다. [14] 이 부분에 있어서는 레닌의 정치적 감각이 아니라 최소한의 상식에도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비서가 누구냐면 바로 스탈린의 두 번째 아내 나댜 알릴루예바였다! [15] 예를 들어 부하린의 경우 당 내의 주요 인사 중 가장 널리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는 인물이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로써는 충실하지 못하다(변증법적 유물론자가 아닌 기계론자이다)는 평가를 받았다. [16] 그리고 이 유언장을 공개하지 않고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결과 스탈린이 집권했고, 집권한 스탈린은 레닌이 예상한 그대로의 잔혹성을 드러내며 당시 동료였던 정치국원들을 대부분(90% 이상) 숙청했다. 한때 스탈린과 손잡고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지노비예프 같은 경우 결국 스탈린에게 숙청당하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는 트로츠키와 손잡지 않은 것이다" 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다. [17] 사실 전염성을 보면 에이즈보다 더 무서웠다. [18] 즉, 냉전 당시 서방에서도 레닌이 정말 매독으로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조롱의 의미로 저 설을 써먹었다는 것이다. [19] 멘셰비키의 수장 율리 마르토프 또한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했는데, 그를 쫓아낸 레닌의 지원을 받아가며 영위하였다. 어찌됐건 레닌과 마르토프는 오랜 옛 친구... [20] 레닌이 죽자 많은 참배객 인파를 본 스탈린은 그를 기리자는 의미에서 이것을 제안하였다. [2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독소전쟁을 일으켜 독일 국방군 모스크바로 진격하자 임시로 레닌의 시체를 일시적으로 소련 동방 지역인 튜멘에 위치한 국립과학연구소로 보낸 적이 있다. [22] 실제로 레닌, 호찌민, 김일성 뿐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마오쩌둥과 스탈린과 김정일까지 여러 공산국가의 지도자들이 사후 시체가 엠버밍 처리 되었다. 그 중 스탈린의 경우는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탈린 격하 운동 당시 따로 매장되었다. 또한 북한 금수산 시체보관소나 베트남 호치민 영묘의 엠버밍 역시 러시아 회사에서 맡고 있다. 김일성과 호찌민은 평범하게 무덤에 묻히길 원했지만 후대가 가볍게 씹고 엠버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