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3:09:07

봉천 전투

러일전쟁
육전 해전
뤼순 공방전 203고지 전투 봉천 전투 쓰시마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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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투 이전
2.1. 러시아군 상황2.2. 일본군 상황
3. 러시아군 병력구성 및 작전계획4. 일본군 병력구성 및 작전계획5. 전투 과정
5.1. 전초전(2월 21일 ~ 2월 28일)5.2. 일본군의 전면 공격 시작(2월 27일~)5.3. 일본군의 러시아군 포위시도(2월 27일~3월 6일)
5.3.1. 노기 제3군의 북상(2월 27일~3월 2일)5.3.2. 제3군 북상의 저지와 우회 시작(3월 3일 ~ 3월 4일)5.3.3. 러시아군의 방어시도와 실패(3월 5일~3월 6일)
5.4. 러시아군에 의한 일본군의 포위기동 저지(3월 7일 ~ 3월 8일)5.5. 러시아군의 총퇴각(3월 9일 ~ 3월 10일)
6. 전투 결과7. 전후8. 평가9. 기타


Мукденское сражение
奉天会戦 (ほうてんかいせん)

1. 개요

봉천 전투의 1분 전개

러일전쟁 시기인 1905년 2월 20일 ~ 1905년 3월 10일 봉천 일대(현재 선양시)를 둘러싸고 러시아 제국군 일본군 간의 전투이다. 러시아군 31만 명, 일본군 25만 명이 동원된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당대까지 일어났던 모든 전투 중 가장 대규모의 전투였다.[1] 이 기록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깨진다.

2. 전투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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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까지의 전개 및 양군의 대치상황)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한 러일전쟁은 당시의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2]. 압록강 전투를 시작으로 전진을 거듭한 일본군은 철령 - 봉천 - 요양 - 뤼순으로 이어지는 남만주 철도선을 따라 이어진 전투에서 뤼순항을 포위함과 동시에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뚫어 봉천으로 물러나게 만들었고(요동 전투, 1904년 8월 24일 - 9월 4일), 뤼순항 구원을 위해 공세에 나선 러시아군의 사허강 진출을 저지했고(사허 전투, 1904년 10월 5일 - 10월 17일) 뤼순항을 함락시켰으며(뤼순항 포위, 1904년 7월 30일 ~ 1905년 1월 2일) 재차 반격에 나선 러시아군을 러시아군 스스로의 이해 불가능한 공격중지명령 등의 삽질에 힘입어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흑구대(산데뿌)전투, 1905년 1월 25일 - 1월 29일)

그러나 아직 러시아군은 강대했고, 제2태평양함대와 봉천의 러시아군이 있는 한 강화는 없다는 의지를 표방한 러시아를 강화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또한번의 회전이 필요하다 여긴 일본군은 충원병력을 받아 회전을 벌여 러시아군을 격파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최종적인 결전을 벌일 시기로는 2월 말~3월 사이가 적합할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그 이전시기엔 영하 30도의 날씨가 몰아치기 때문에 장거리 행군은 막대한 비전투손실을 초래할 것으로 여겨지고, 4월이 넘어가면 너무 장기전이 될 뿐만 아니라 땅이 진창이 돼서 제대로 된 작전전개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2월 말에서 3월 초라면 기병은 물론이고 야포까지도 어느정도 조심만 한다면 얼어붙은 요하를 건너 이동할 수 있었지만 4월이 넘어가면 이는 불가능했기에 작전에 제약이 많아지게 된다.

러시아군 또한 이를 짐작하고 있었고 먼저 선공을 걸어 일본군에 타격을 주려 시도했으나(2월 23일 일본군 좌익 공세 계획) 일본군의 공세가 한발 앞섰다(2월 21일 일본군 우익의 선제 공격, 봉천전투의 시작).

지형적으로 볼때 봉천역 동쪽 전선은 산악지대여서 제대로 된 작전 전개가 힘들었다. 대신 서쪽전선은 어느정도 평야가 펼처져 있었다. 따라서 주 전역은 서쪽이 될 것이라고 양군 모두 판단할 수 있었다.

2.1. 러시아군 상황

러시아군은 상황이 나빴다. 보급선의 문제로 상당히 골머리를 싸맸는데, 시베리아 철도가 단선인데다 여기저기 미개통구간이 많아 유럽에서의 병력 충원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특히 바이칼호 근방 노선 사정이 나빴다. 호수의 크기와 깊이, 그리고 주변 지형이 절벽 등으로 된 험난한 지역이라 정규 철도 건설은 난해했다. 결국 추운 겨울 결빙된 호수 위에 철도를 부설하는 꽁수까지 감행하였다. 이 방법은 2-3개월동안만 버틸 수 있으며, 얼음이 무거운 열차무게를 장시간 버틸 수 없으므로 수시로 철도 자체를 다른 곳으로 이설해야 했다. 날이 좀 풀리면 얼음 깨지는 소리까지 나서 몹시 불안정했다. 단선이라 수송력은 한계가 있었다. 화차도 못 돌려보내 유럽-러시아에서는 화차가 상당히 부족해지기까지 했다.

이러한 이유로 전쟁 수행 능력이 형편없었다. 즉, 이 기간동안 러시아군은 예비병력을 극동지역으로 축차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보내진 병력도 무능한 지휘관들의 지휘로 낭비되었다. 요동, 사허, 흑구대 전투 모두 러시아군이 일본군에 비해 숫적으로 훨씬 우세했다. 일본군의 2배에 달하기도 했으나 매번 패하기만 했다. 병력에 비해 물자도 부족했다.

또한 이 시베리아 철도 - 남만주 철도로 이어지는 선이 단 한가닥 뿐인데다 이곳저곳에서 많이 노출된 선이였기 때문에 병력의 상당수를 나누어 배치해야만 했고 언제나 보급선 유지에 노력해야만 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겨울기간중 8만여 병력을 증원병력으로 파견했으나 거의 2만에 가까운 병력이 보급로 수비에 투입되어야만 했다.
우리는 1,350마일의 만주철도를 경비하기 위해 경비대를 증강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야전군으로부터 14개 보병대대와 24개 소트니아(코사크 기병중대)를 차출했으며 이후에도 증원된 8만의 병력 가운데서도 많은 수의 예비대를 차출했다. - 쿠로파트킨 회고록

또한 쿠로파트킨은 '러시아는 군단마다 1개 공병대대가 있었지만 일본은 사단마다 공병대대가 있었다' 라는 기록도 남겼다. 일본은 일본군에 대한 한국인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복수의 보급선 확보에 매우 신경을 썼으며, 요동반도 서안의 영구(營口)에서 시작해 해성(海城) ~ 요양을 거쳐 봉천으로 이어지는 루트, 요동반도 끝의 대련(大連)에서 뤼순 ~ 요양으로 이어지는 남만주 철도(러시아 철도, 즉 광궤였으나 일본측은 다수의 공병대대를 동원해 순식간에 광궤를 협궤로 갈아치워버렸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의주(義州)에서 시작해 압록강 대안의 안동(安東) ~ 봉황성(鳳凰城)을 거처 요양, 봉천으로 이어지는 3개의 루트를 완비한다. 따라서 러시아측이 우세한 기병전력으로 게릴라전을 시도한다 해도 보급선이 위협받는 일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러시아군에는 또다른 문제가 있었다. 거듭된 패전과 1월 22일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 그리고 그 뒤를 이은 1차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병사들의 사기 저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차르 정부는 오히려 러시아 혁명으로 들끓는 민중들의 분노를 승전을 통해 가라앉히고자 전면공세를 종용해댔다. 실제로 이러한 차르 정부의 닥달로 인해 벌어졌던 흑구대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우세한 상황까지 끌고 갔으나 러시아 사령부 내의 의견불일치와 각군의 비협조로 인해 교착상태가 발생하자 작전 중지명령이 내려졌고, 러시아군의 사기는 더더욱 떨어졌다.

이후 러시아 극동육해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크로파트킨(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уропа́ткин) 대장은 오히려 일본군의 러시아군 전선을 우회해 공격해올 것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방어전을 치를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군 공세의 시발점이 될 거라 여긴 좌익부대에 대해 제한적인 공격을 통해 부대에 타격을 주어 일본군의 공세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공세를 취하게 된다.

2.2. 일본군 상황

일본은 승전을 거듭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국력의 차이로 인해 전력고갈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요동, 사허, 흑구대 전투 등 대부분의 육전에서 승리했으나 매번 1만 이상의 피해를 입었고 여기에 뤼순 항에서의 삽질( 203고지 등)으로 인해 입은 손실까지 합치면 이미 전체 사상자가 10만에 육박했다.

거기다 물자 부족도 심각해서, 이미 이때에 일본국내에서 '냄비나 솥 등을 공출해 탄환 및 포탄을 만드는 상황에까지 치달았고, 전쟁을 위해 마련한 3억의 외채를 포함해서 애초에 계획했던 전비(19억 엔)의 대부분을 소비한 상태였다.[3] 심지어 참모본부 차장 나가오카 가이지 소장은 대본영에 포탄을 보충하기 위해 2, 3개월의 휴전도 어쩔 수 없다는 진언을 할 정도였다. 일본 제국은 장기전을 벌일 역량이 없었다.

이에 1904년~1905년 겨울 휴전기 동안 일본은 미국에 러시아와의 강화조약 중재 요청을 하는 등 외교전을 통해 조기 강화를 유도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 러시아측은 제2태평양함대와 봉천의 러시아군이 있는 한 강화는 없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고 있었기에, 외교만으로는 강화를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이에 일본은 조기 강화를 위한 외교에 노력하는 동시에 국내에서 3개 사단을 신설, 포탄 및 야포의 증강, 외국에서 새로운 전함 구입 및 미국을 통해 새로운 국채 획득을 통해 그동안의 전투로 인해 소모된 전력을 다시 증대시켰고, 뤼순 항을 함락시킨 노기의 제3군을 북상시켜 봉천의 일본군과 합류시키는 동시에 한국주차군( 경술국치 이후의 조선주차군)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압록강군을 편성해 봉천으로 보내는 등 국력을 총동원하여 봉천에 집중시켰다.

일본은 이 전력을 바탕으로 날씨가 풀리면 재차 공세를 취해 최단기간에 러시아 극동군을 완벽하게 섬멸하고 그 전과를 바탕으로 조기강화를 시도하는 것만이 승전할 수 있는 길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수뇌부측의 판단은 좀 더 절박하여, 봉천지역에서 러시아군을 완전히 섬멸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진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가 개시된 2월 20일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嚴) 원수의 훈시 내용은 "이 회전에서 승리한 쪽이 전후의 주인이 될, 러일전쟁의 세키가하라다"로써, 이러한 인식을 일본군 수뇌부가 공유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3. 러시아군 병력구성 및 작전계획

< 러시아 극동군 >
  • 극동육해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크로파트킨(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уропа́ткин, 1848 ~ 1925) 대장.
    • 참가 총병력 - 379.5개 보병대대 309,600명, 151.3개 기병중대와 소트니아(1개 중대 규모의 코사크 기병대), 20.5개 공병대대, 대포 1,219문(중포-60문/야포-1,039/산포-120문), 기관총 56정.

  • (좌익) 제1군 - 사령관 니콜라이 리네비치(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Лине́вич, 1839 ~ 1908) 대장 - 128개 대대, 43개 기병중대와 Sotnia, 3개 공병대대(총 106,500명), 포 412문(산포 포함), 박격포 24문, 진지포 4문 기관총 20정. 담당 전선 길이 50km,
    • 제2시베리아 군단 : 제1시베리아 저격사단, 제5동시베리아 저격사단
    • 제3시베리아 군단 : 제6시베리아 저격사단, 제3동시베리아 저격사단
    • 제4시베리아 군단 : 제2시베리아 저격사단, 제3시베리아 저격사단
    • 제71보병사단, 시베리아 독립예비여단, 트란스바이칼 보병대대,
  • (우익) 제2군 - 사령관 알렉산더 폰 카울바르스 남작(Каульбарс,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1844 ~ 1925) 대장[4] - 126개 대대, 18개 기병중대와 Sotnia, 3개 공병대대(총 91,700명), 포 294문(산포 포함), 박격포 54문, 진지포 56문, 기관총 12정. 담당 전선 길이 25km.
    • 제1시베리아 군단 : 제1동시베리아 저격사단, 제9동시베리아 저격사단
    • 제8군단 : 제14저격사단, 제15저격사단
    • 제10군단 : 제9저격사단, 제31저격사단
    • 혼성저격군단 : 제1저격여단, 제2저격여단, 제3저격여단
  • (중앙) 제3군 - 사령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폰 빌데들링 남작(Бильдерлинг,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46 ~ 1912) 대장[5] - 81개 대대, 92개 기병중대와 Sotnia, 5개 공병대대,(총 60,700명) 포 360문(산포 포함), 박격포 12문, 기관총 8문
    • 제5시베리아 군단 : 제54저격사단, 제71저격사단
    • 제6시베리아 군단 : 제55저격사단, 제72저격사단
    • 제17군단 : 제3저격사단, 제35저격사단
  • 기병집단 - 파벨 폰 렌넨캄프(Па́вел Ка́рлович фон Ренненка́мпф, 1854 ~ 1918) 소장
    • 제4돈 코사크 기병사단, 카프카스 코사크 기병사단, 올렌부르크 코사크 기병사단, 제2기병사단, 제1바이칼 기병사단, 우랄 바이칼 기병사단, 시베리아 기병사단, 제2용기병 여단, 코사크 산악 기병여단
  • 전략예비대 - 44.5개 보병대대, 야포 120문, 기관총 4문.
    • 제16군단 : 제25저격사단, 제41저격사단,
    • 제72보병사단, 보병 제146연대.

이시대의 러시아군은 장군과 영관의 숫자 차이가 거의 없을 만큼 상층부의 규모가 비대했으며, 이들은 나이가 너무나도 많았고, 대부분 무능했다. 러시아 극동군 총사령관인 57세의 크로파트킨 대장이 그나마 러시아 육군에서는 젊은 축에 속하는 장군일 정도였다. 이 문제는 스콤리노프에 의한 1908년 군제개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지속된다.

또한 이 시기의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공격이 방어보다 우세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정부로부터의 독촉도 있고 해서 공세로 나서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크로파트킨은 처음부터 전면공세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까지의 전투에서 확인된 극동군의 약점, 그리고 이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경험을 통해 방어선이 구축된 곳에 정면으로 들이받으면 피해만 커질 뿐 얻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병력 숫자는 러시아군이 더 많았지만 양군의 대치전선 길이는 비슷한 편이기도 했기 때문에 공세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겨울의 자연 휴전기간중 전력증강이 지지부진했던 러시아군에 비해 뤼순항 공략이 끝난 제3군을 합류시키고 지원병력을 충원한 일본군이 더 많은 전력을 증강했으며, 따라서 양군의 전력비는 거의 비슷한 상태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곧 일본군의 공세가 있을 것이며, 러시아측은 공세를 취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소모전의 형태로 끌고가 일본측의 피해를 가중시켜야 한다고 판단한다.

이때에 양군의 전선은 약 100km 정도였다. 러시아군 31만으로도 당연히 이 전선 전체를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러시아측은 일본군이 정면공격보다는 후방을 우회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고 지형적으로 평야가 많은 봉천역 서쪽지역에서 일어날 것이라 예측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군의 서쪽 끝인 청하성(淸河城)[6] 지금의 요동에서 요양(遼陽) 역까지의 거리는 65km. 러시아군의 보병교범에 따르면 3일 이동거리에 해당된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우회가 시작된 후 약 4~5일 안에 이를 저지할 수 있는가가 승패의 갈림길이라 여겼다. 이에 러시아군측은 일본군의 공세전력이 위치한 일본군 좌익쪽에 먼저 제한적 공격을 가해 공세를 저지해 볼 생각도 했으나 그 이전에 일본군이 공격해오게 된다.

이때에 총사령관인 크로파트킨은 전쟁 이전부터 이 전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전쟁기간중 지휘가 지나치게 소극적이였다고 비판받고 있다. 실제로 이전 전투에서도 여러차레 우세한 상황에서 작전을 멈추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방어전이 된 봉천전투에서만큼은 그는 일본군 총사령부의 지휘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할 수 있다.

4. 일본군 병력구성 및 작전계획

< 일본 만주군 >
  •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嚴, 1842 ~ 1916) 원수,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1852 ~ 1906) 대장
    • 참가 총병력 - 240개 보병대대 249,800명, 57.5개 기병중대, 43개 공병중대, 대포 978문(중포-146문/야포-574문/산포-258문), 기관총 256정.
  • 제1군(우익) - 사령관 구로키 다메모토(黑木爲楨, 1844 ~ 1923) 대장
    • 근위사단, 제2사단, 제12사단, 후비(後費) 근위 혼성여단, 후비보병 제5여단
  • 제2군(좌익) - 사령관 오쿠 야스가타(奧保鞏, 1847 ~ 1930) 대장
    • 제3사단, 제4사단, 제5사단, 제8사단, 후비보병 제8여단, 기병 제1여단
  • 제3군(유격군) -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
    • 제1사단, 제7사단, 제9사단, 후비보병 제15여단, 기병 제2여단, 포병 제2여단
  • 제4군(중앙) - 사령관 노즈 미치즈라(野津道貫, 1841 ~ 1908) 대장
    • 제6사단, 제10사단, 후비보병 제3,10,11여단, 포병 제1여단
  • 압록강군(양동군) - 사령관 가와무라 카게아키(川村景明, 1850 ~ 1926) 중장
    • 제11사단, 후비보병 제1사단, 후비보병 제16여단
  • 예비대 - 후비보병 제1여단, 후비보병 제13여단, 후비보병 제14여단, 중포여단

일본군이 이 전투에서 택한 작전은 편익기동을 통한 포위전술이였다. 즉, 전체적인 전력의 양적 측면에서 우위에 서 있는 러시아군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고 그들이 독일에게서 배운 것처럼 기동을 통한 포위를 통해 러시아군을 섬멸할 생각이였던 것. 일본군의 작전교리에는 이러한 기동을 착안(着眼) 또는 요회(繞回)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의 일본군 작전계획은 일본군이 전투의 승자인데도 불구하고 세부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불투명하다. 실 작전 계획을 맡았던 것은 마츠카와 토시타네(松川敏胤, 1859 ~ 1928)[7], 이구치 쇼고(井口省吾, 1855 ~ 1925)[8] 두 인물인데, 이 중 마츠카와 작전참모는 상당히 도량이 좁고 고집이 센 인물이였기 때문에 군 참모진으로부터의 작전계획을 죄다 씹어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기밀 일러전사'에 따르면 이 양반은 제 2군에서 작전 건의가 들어오자 그걸 "말도 안되는 작전계획이다. 만주군 전체의 작전 지도에 대해 제 2군이 뒤따를 세부 계획안을 제시하지도 않은, 결국 제 2군만의 연익 운동이 아닌가. 계획의 입안 이유 없음."이라고 씹어버렸다.

이 양반이 작전을 잘 수립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자신도 작전을 수립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인물이였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 그러다보니, 이 양반이 최종적으로 수립한 작전계획은 아래에 제시된 것 뿐이었다. 작전안의 나머지 부분은 작전 투입부대의 전투서열이 전부였다고 한다.
  • 우익의 제1군(구로키 다메모토 중장)이 러시아군 좌익을 위협한다.
  • (제1군이 러시아군을 견제할 동안) 압록강군은 러시아군 좌익 전선을 공격한다.
  • 중앙의 제4군(노즈 미치즈라 중장) 주력과 제2군(오쿠 야스가타 중장)의 우익은 러시아군의 중앙 공세에 대해 수세방어를 행한다.
  • 제3군(노기 마레스케 대장)과 2군의 좌익은 러시아군의 우익을 요회(繞回, 우회기동의 일본식 말)한다.

즉, 일본군의 최초 작전계획은 우익(제1군 + 압록강군)이 러시아군 좌익을 견제해 시선을 끈 사이에 제3군이 단독으로 우회기동하여 봉천 후방 70km 지점인 철령을 점거한다는 것이였다. 뤼순 항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제3군이 140여 km를 단독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점에서 뭔가 현실적이지 않은 계획이란 게 느껴진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제2군, 제3군에 의한 편익포위기동이며, 제3군이 익단, 제2군이 선회축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지게 된다. 사실상 러시아군을 물러나게 한 것도 이 양 군의 편익포위가 거의 성공할 뻔했기 때문이다. 우익의 제1군 또한 러시아군을 상대로 공세를 퍼부었으나 지형적으로 진격하기 너무나도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 효과적이진 못했고 예비병력을 이쪽으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한 것 말고는 그닥 한 게 없다. 거기다 제4군, 그리고 압록강군은 전투가 막바지에 다다른 3월 7, 8일까지 사실상 노는 병력이 돼 버리고 만다.

거기다 전직 일본군 장성이 서술한 '기밀 일러전사'에 따르면 위의 작전을 짠 근간에는 압록강군을 최대한 주전선에서 멀리 떨어뜨려 따돌리려고 하는 속내가 숨어있었다고 한다. 이는 이시기 일본군 내에서 발생한 압록강군에 대한 지휘권 분쟁 때문이였는데, 일본군 대본영은 압록강군을 만주로 증파함에도 불구하고 지휘권을 만주군에게 넘기는 것이 아닌 한국주차군에 그대로 남겨두었고 만주군 총사령부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천황의 명령이라는 형태로 이러한 이중적인 지휘권 구조를 유지시켰다. 이는 만주군 총사령관직을 오야마에게 빼았긴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동부(산지)방면의 연익기동에 반대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전해진다. 일본군의 파벌싸움으로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유명하지만, 같은 육군 내에서도 이런 문제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래서야 기껏 증파한 압록강군이 무의미해진다.

또한 차현(車懸り)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차현이란 일본군사학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단어 자체는 우에스기 겐신의 차현진(실제로 그 당시 이런 전술이 있었는지는 불분명)에서 가져왔다. 뜻은 예비대를 적절히 투입해 소모된 전선의 부대와 교체한다는 것. 일본이 독일군사학을 적극 도입하면서 중요하게 여긴 개념 중 하나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 총사령부 단위에서 예비대 투입을 통한 부대 교체 계획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5. 전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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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전체적인 진행과정. 위의 것은 러시아측 지도, 아래 것은 일본측 지도다.)

5.1. 전초전(2월 21일 ~ 2월 28일)

2월 21일, 양동군 역할을 맡은 압록강군은 일본군 우익의 끝 부분에서 공격에 들어간다. 1차 목표지점은 전면에 위치해 있던 청하성(淸河城-여기서「성」은 마을을 의미)이였다. 이러한 작전기동은 일본군 좌익에서 노기의 제3군이 러시아군을 우회해 북상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기동이였다. 이때의 압록강군에는 기존의 3군 소속 병력 또한 다수 존재했다.(11사단) 그러나 아무리 예년에 비해 해빙기가 일렀다고는 하나 아직 겨울이였던 시기에 수행한 공격이였고, 동만주 일대의 험준한 지형까지 어우러져 동상환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또한 11사단이 제3군 소속이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부대는 뤼순항 포위에서 기존의 현역병 다수를 상실했고, 그 결과 야습이 장기이던 일본군이 역으로 러시아군의 야습을 받는 등 제법 고생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일본군은 러시아군 8개 대대가 지키던 청하성을 25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통해 일시적으로 러시아군의 예비대를 끌어들이는 데에도 성공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다. 크로파트킨 대장은 11사단이 러시아군 좌익에서 나타난 것을 보고는 이 부대가 노기의 제3군이라 오판했고, 예비대의 일부였던 제146연대, 러시아 제2군 소속이던 제1시베리아 군단 병력과 3군에서 차출한 1개 여단을 청하성에서 철수한 병력 및 렌넨캄프의 기병집단과 합류시켜서 석회창(石灰倉) 방면으로 후퇴, 제2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에도 러시아군은 8개 연대를 투입해 총 54개 대대를 러시아군 좌익을 맡은 제1군에 증원하였으며, 이를 통해 일본군 우익의 전진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제1시베리아군단은 전락예비대로서 귀환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2월 28일에 좌익에서 대규모 일본군(노기 제3군)의 출현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해 중앙을 맡은 제3군을 작전축으로 삼아 요하 우편에 48개 대대, 러시아군 좌익을 맡은 제2군에서 마찬가지로 48개 대대를 배치하도록 명령했고, 예비대로서 제16군단 24개 대대 및 제1군과 제3군에서 차출한 32개 대대를 합처서 대기시켰다.

이때의 전초전에 대해 일본측 사료인 '기밀 일러전사'에서는 양동공격으로서의 일본군 우익의 초반 공세는 제3군의 기동을 은폐한다는 데는 성공적이었으나 예비대를 끌어낸다는 또다른 목적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으며, 이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고, 거기다 지나치게 먼 곳에서 양동공격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전사연구소에서 출판하고 국내에 번역 출간된 '러일전쟁사'에서는 이시기 크로파트킨 대장이 일본군의 주공 방향을 오판하고 일본군의 2배에 달하는 178개 대대 병력을 집중시켰다면서 '실수의 연속'이라 까고 있다. 일본측은 '이거 별로 성공 못함'이러고 러시아측은 '양동에 속았음' 하는 게 꽤나 재미있다.

5.2. 일본군의 전면 공격 시작(2월 27일~)

마츠카와 주임 작전참모는 우익에서의 양동공격의 진행을 보고 심사숙고한 후 기존의 3월 1일로 계획되었던 공세작전을 2일 앞당기기로 결정, 고다마 총참모장의 허가를 얻어 "노기 제3군은 2월 27일부터 요회를 실시한다. 또한 동일 아침부터 본 기동의 은닉 목적을 가지고 전군 포격을 실시한다."는 작전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2월 27일 일본군은 뤼순항 포위때 대활약한 280mm포까지 총동원하여 노기 제3군의 기동을 은폐하기 위한 대규모 포격 및 전면공격에 들어간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되었듯 이미 러시아군은 이를 2월 28일에 눈치채고 있었고, 좌익에 투입된 병력 및 남은 예비대를 편성해 방어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아직 겨울이였기 때문에 280mm 포 또한 지면에서 포탄이 튕겨나서 위력이 반감되었고, 일본의 열약한 공업기술력 때문에 불발탄도 꽤 많았다고 한다.

이후 노기 제3군과 함께 일본군 우회의 축이 되는 중앙의 오쿠 제2군 또한 2월 28일 전진, 러시아군과 교전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미 해당 전선은 사허 전투 이후 거의 5개월 가까이 고착된 상태로 잘 구축된 참호를 포함한 축성진지가 완비되어 있었고, 시작부터 지지부진한 상황에 빠진다. 3월 1일에는 야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해 그날에만 4,679명의 사상자를 내고 만다.(전사 1,089명) 마츠카와 만주군 주임 작전참모는 이를 두고 오오사코(大迫) 제2군 참모장을 '기략이 없다'고 비판했지만 '총사령부가 예정을 급하게 바꿔서 이렇게 된거고, 이런 작전이면 정면 공격이든 우회공격이든 마찬가지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오쿠 제2군은 제3군의 전진에 의해 러시아군이 물러나면서 그 빈 공간을 메꾸는 형식으로 진격해 나간다. 그외에 중앙을 맡았던 노즈 제4군, 우익을 맡은 구로키 제1군 및 압록강군 또한 지속적으로 공세를 수행했지만 이 지역은 주공도 아니었고, 러시아군도 잘 버텼기에 별 성과는 없었다.

5.3. 일본군의 러시아군 포위시도(2월 27일~3월 6일)

일본군의 작전계획에서 노기 제3군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할 수 있다. 즉, 여타 군이 러시아군의 시선을 최대한 앞으로 붙들어매는 사이 후방으로 돌아들어가 러시아군의 유일한 보급로이자 철수로를 끊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때에 일본군 총사령부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이 너무 소극적으로 군을 지휘했기 때문에 뤼순항 공략이 늦어졌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제3군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애초에 제3군의 작전목표는 봉천이 아니라 봉천 후방 70km 지점인 철령이였고, 이는 뤼순항 공략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제3군에게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작전이라 하겠다.

제3군은 결국 봉천 전투의 승리에 가장 큰 역할을 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는 총사령부의 작전지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이 봉천 전투의 기이한 점이 아닐까 싶다.

5.3.1. 노기 제3군의 북상(2월 27일~3월 2일)

2월 27일에 있었던 전면공격과 동시에 노기 제3군은 총사령부의 작전 명령에 따라 북진을 시작했다. 목표지점은 철령. 이때 노기 마레스케 중장은 총사령부의 비현실적인 목표 설정과 계속되는 독촉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까지는 아직 작전명령에 따라 혼하 우안을 통해 북상해 나갔다.

그러나 이미 러시아군은 이러한 일본군의 전진과 계획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었다. 총사령관인 크로파트킨 대장이 일본군 좌익의 우회 및 포위기도를 눈치챈 것은 3월 1일이였으며, 이에 대응해 러시아군 좌익쪽(일본군 입장에선 우익)으로 충원했던 예비부대와 전략예비대를 합친 병력(61개 대대)을 러시아군 제2군인 카울바르스에게 지휘권을 넘겨 노기 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여기에 제3군과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오쿠의 제2군이 러시아군의 견고한 방어선에 가로막혀 전진이 지지부진하였다. 그 이유는 이때 일본군은 공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최전선에서는 오히려 1:2 ~ 1:3 정도의 병력 열세(한개 군단을 상대로 한개 사단이 공세를 취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연히 잘 될리가 없다. 게다가 일본군 제3군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군의 예비전력이 집중되면서 더더욱 전진이 힘들어진다.

이러한 양군의 작전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3월 2일, 총사령부의 과도한 독촉에 지친 제3군은 결국 유선통신망을 일부러 끊어버리고 독단적으로 전진 속도를 늦추기 시작한다.

5.3.2. 제3군 북상의 저지와 우회 시작(3월 3일 ~ 3월 4일)

3월 1일, 일본군 제3군의 우회기동을 파악한 크로파트킨은 3월 2일에서 3일동안 러시아군 제2군의 지휘를 맡은 카울바르스에게 제16군단, 제1시베리아 군단을 포함해 예비대 61개 대대의 지휘권을 넘겼다. 이 결과 러시아군 제2군은 혼하 동안에만 거진 119개 대대를 지휘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임무는 노기 제3군을 저지하는 것이였다.

이시기 러일전쟁을 다룬 여러 자료에서 크로파트킨 대장은 제3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 보이는데, 실제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는 제3군의 전력을 75개 대대에 달하는, 일본군 각 군 중 가장 크고 강력한 부대로 여기고 있었다.(러일전쟁사에서는 어느정도 다른 사료를 통해 조절했는지 5만 내외로 본다. 그러나 사실 이것도 과대평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3군은 뤼순항 포위전에서 40%에 육박하는 손실을 입고 다시 1개 사단(제11사단, 압록강군에 편입)이 빠져나간 상태로, 개전 전의 절반 이하(정원이 채 채워지지 않은 52개 대대. 일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약 38,000명)였다. 즉 러시아군은 제3군을 실제의 2배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전력을 집중시켜서 저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오쿠의 제2군의 공격에 의해 방해를 받았는데, 비록 3월 1일 야습에 실패하면서 그날 하루에만 5천에 달하는 손실을 입긴 했으나 이러한 공격은 러시아군의 전력집중을 방해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공격하면서 북상하는 일본군 제3군에 대한 저지작전은 계속 연기되었고, 그만큼 제3군은 북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러시아군은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3월 3일 화석강자까지 진출, 동쪽으로 선회하려던 노기 제3군은 북쪽으로 전개중이던 러시아 제25저격사단과 접촉, 전투가 시작된다. 이후 노기 제3군을 저지하기 위해 북상하던 러시아 제2군도 전투에 돌입, 봉천역 서쪽방면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일본군의 북상을 파악, 이에 대응한 전력을 배치했지만 러시아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크로파트킨은 국내에도 출간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개 장이나 들여서 봉천전투 당시 제2군 사령관 카울바르스 대장의 지휘를 격렬히 비판하고 있는데, 이날 카울바르스는 일본군 선두부대의 행군을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32개 대대를 선양으로 철수시켜버리고 16개 대대는 오쿠 제2군 방면으로 보내는 등의 삽질을 했다.

3월 4일 새벽, 일본군 총사령부로 노기 제3군은 철령으로의 행군을 포기하고 대신 대석교를 동쪽으로 돌아 봉천으로 나아가겠다는 연락을 보낸다. 기존의 우회계획에서 회전축을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판단이 봉천 전투에서 일본군이 내린 가장 결정적인 판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존의 계획대로라면 노기 제3군은 여타 군과 이격된 상태로 철령으로 혼자 나아간다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달성해야만 했지만 사령보에서 일본군 제3군과 러시아군 제2군 및 예비대가 교전을 벌이게 되면서 러시아군은 전선 축소를 위해 혼하보까지 물러났고 오쿠 제2군이 그만큼 전진해서 노기 제3군과 연계가 이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회전축을 줄이고 오쿠 제2군과 연계된 상태로 동쪽으로 우회하면 자연스럽게 편익포위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대해 일본군 참모진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는데, 최종적으로 마츠카와 만주군 주임 작전참모는 사령부의 위신이 떨어지기 때문에 명령(철령목표안) 철회는 안되지만 봉천으로의 우회를 용인은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또한 동시에 일본군 총사령부는 우익(제1군 및 압록강군)의 전진이 지지부진하다면서 깠고. 전후 제1군 사령관 구로키는 전의가 부족하다고 비판을 받지만 러시아 전사연구소에 따르면 봉천 동쪽(러시아 좌익 및 일본군 우익이 대치중이던 지역)은 애초에 지형이 좋지 않아서 이지역에서의 전진을 통한 양익포위는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까고 있다.

이사이 러시아군은 3월 3일 일본군의 중앙 지점인 혼하 우안의 막가보(莫家堡)를 확보해 오쿠 제2군과 노즈 제4군의 연결선을 절단, 포위를 위해 늘어진 일본군을 둘로 절단하려 계획했으나 오쿠 제2군이 빠르게 전진하면서 무산, 이후 3월 4일 밤에 카울바르스와 협의한 쿠로파트킨 대장은 일본군 최좌익이자 가장 위협적으로 기동하고 있던 일본군 제3군을 포위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5.3.3. 러시아군의 방어시도와 실패(3월 5일~3월 6일)

일본군 총사령부는 마지막 예비대였던 제3사단을 노기 제3군에 파견하나 직후 펼처진 러시아군 제2군의 공격에 의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다. 이외에도 오쿠 제2군은 러시아군의 반격에 의해 전선을 고수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이때의 러시아군의 반격은 오쿠 제2군을 그 자리에서 붙들어 놓음으로써 이후 예비대를 포함한 부대로 노기 제3군을 포위섬멸하는데 방해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게른그로스 휘하 제2군의 49개 대대를 주축으로 하며 우측방은 자폴스키의 부대로, 좌측은 제25사단의 16개 대대로 엄호하여 총 77개 대대로 시행되었다.(오쿠 제2군은 60개 대대로 판단되고 있었다.) 본래대로였다면 일본군 제2군을 뒤로 밀어붙여서 아예 일본군을 절단할 수도 있었던 공격이였으나 지휘관인 카울바르스의 지휘실수로 인해 별 성과를 거두진 못하게 되었다. 역시나 크로파트킨은 여기에 대해서도 '행군한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한 것 없는 하루'였다면서 카울바르스를 격렬하게 까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러시아군의 공세는 일본군으로 하여금 사령보와 대석교 인근의 제3군 지원 대신 그 정반대편인 막가보 일대로 예비병력을 투입하게 하여 병력을 분산시키는 성과를 가져왔다.

3월 6일, 노기 제3군은 러시아군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대석교(大石橋)까지 접근하나 이는 계획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늦은 상황이였다. 거기다 이후 유가와붕(劉家窩棚)지역으로 러시아군 33개 대대가 공격해 들어오면서 대규모 교전이 시작된다.

유기와붕 지역에서의 러시아군의 공세는 러시아군의 계획적인 반격의 일환이였다. 일본군의 최좌익인 유기와붕 지역을 공략, 이를 기점으로 일본군은 역포위하여 편익포위 기도를 저지하려 한 것이다. 이때 유가와붕 지역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일본군 제7사단 예하 14여단 뿐으로, 러시아군은 공격 초기엔 4배, 중반 이후 일본군이 증원(13여단)된 후에도 2배에 달하는 양적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이 지역에서의 전투에서 매번 밀집대형으로 돌격하다가 집중사격을 받고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결국 격퇴당한다.(어째 양쪽이 바뀐거 같다.)

병력의 압도적인 양적 우위를 확보하고도 일본군의 전진을 막는데 실패하자 낙심한 크로파트킨은 주력부대의 투입을 취소한다. 애초에 그의 입장에서 봉천 전투는 일본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해버리는 것이 아닌,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기 힘들 정도로 출혈을 강요하는 목적을 지녔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봉천역으로 이어지는 철도 수송로였다. 유가와붕 지역에서의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의 전진을 막는데 실패한 시점에서 결국 크로파트킨은 봉천지역에서 계속 싸우다 수송로가 끊겨 포위당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봉천지역에서 퇴각하여 러시아군 주력을 온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봉천지역의 물자와 병력을 후방으로 옮기고 제1군 및 제3군으로 하여금 혼하 서안으로 철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사실상 봉천 지역에서의 전면 철수나 다름없는 것이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믿고 예비대를 싹 몰아다 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저지에 실패한 카울바르스의 지휘능력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5.4. 러시아군에 의한 일본군의 포위기동 저지(3월 7일 ~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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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투상황)

3월 7일, 일본군 총사령부는 이제야 최종적으로 양익포위를 수행해 러시아군을 섬멸할 것을 결정하고 일본군 우익으로 하여금 혼하까지 북상하라는 명령을 내리나, 거의 50km를 돌파하라는 임무를 맡은 일본군 제1군 및 압록강군은 이에 반발했고, 실제로도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총사령부는 노기 제3군이 소극적으로 싸워 전진이 더디다고 여기고 한개 여단을 지원군으로 보내는 동시에 사령부를 전선에 밀착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제3군 사령부는 명령에 따랐고, 결국 사령부가 소총공격을 받아 군단 수의가 전사하고 시찰나온 총사령부 참모가 겁에 질려 도주해 버리는 상황을 겪게 된다. 이때 제3군 사령부는 총사령부의 명령에 상당한 분노를 느꼈는데, 이때까지 노기 제3군은 3배의 러시아군과 싸워 악전고투하면서도 계속 전진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총사령부는 더 빨리 전진하라며 닥달해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총사령부는 다시 질책성 훈령을 보내기까지 했는데, 그 내용은 '병사들을 독려해 신속하게 움직여라'는 것이였다고 한다.

이날 러시아군은 오쿠 제2군과 노기 제3군의 연결지점인 간홍둔(干洪屯)에서 재차 공격에 나섰다. 이지역을 절단하는 데 성공했다면 러시아군은 일본군 제3군을 분리시켜 각개격파하면서 전황 반전의 계기를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35개 대대를 동원해 4배의 병력으로 공세에 나선 러시아군은 일본군을 이관보(李官堡)까지 밀어냈으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선 돌파에는 실패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사상자 5,484명, 일본군 사상자 1,918명(전사 810명)의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 위키피디아는 이때의 전투를 '제국의 무덤'이라 칭하며 결정적인 패배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실상 이 전투는 러시아군이 봉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마지막 공세였으며, 이 공세의 실패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러시아 전사연구소에서 출간한 '러일전쟁사'에 따르면 이러한 간홍둔에 대한 공격은 해당 지역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한 삽질이였으며, 노기군을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끔 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식의 무리한 공격 대신 전선을 축소시키면서 좌익에서 공격을 감행했다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밤 크로파트킨은 일본군 제2군, 제3군이 여러 마을을 점거했으며, 특히 제3군이 봉천영 후방인 전의둔(田義屯)까지 점령했다는 것을 보고받게 된다. 이는 사실상 봉천역 후방의 철도 근처까지 일본군이 전진한 것으로, 러시아군의 보급로와 철수로가 절단될 위기에 처한 셈이다. 이에 크로파트킨 대장은 러시아군 제1군 및 제3군을 지연전을 벌이며 혼하 서안까지 철퇴시키고, 전략예비대를 직접 지휘해서 일본군 제3군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3월 8일, 일본군 총사령부는 중앙 및 우익에서 대치하던 러시아군의 철수를 뒤늦게 파악하고 추격을 명령, 상당수의 포로를 획득했으나 러시아군의 주력부대는 따라잡지 못했다. 반면에 좌익에서는 노기 제3군 및 오쿠 제2군은 지속적으로 러시아군의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3배의 적과 싸워가며 4일 이상을 전진한 제3군은 사실상 전력을 대부분 소진,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시점이였기에 철도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러시아군이 열차를 통해 철령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엔 없었다. 최종적으로 일본군은 포위기동에 최종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크로파트킨 대장은 이때에 예비대를 직접 지휘해서 일본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철령으로의 완전 철수 이전에 마지막으로 일본군 제3군을 재차 역포위섬멸해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빠져나갈 생각을 하게 된다.

5.5. 러시아군의 총퇴각(3월 9일 ~ 3월 10일)

3월 9일, 일본군 중앙 및 우익은 계속 전진했지만 혼하를 넘은 것은 제1군 소속 제1사단 뿐이였다. 또한 좌익이였던 노기 제3군, 오쿠 제2군은 여전히 강대한 러시아군의 후위에 막혀 전진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때에 크로파트킨 대장은 제3군의 최좌익에 배치되어 있던 후비보병 제1여단에 대해 후미에 남았던 29개 대대와 전략예비대를 동원해 전체 전투기간 중 마지막 공세를 가하는데, 여기에 성공해서 제1여단을 패주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군은 상호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처음에 계획했던 제3군 전체의 역포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크로파트킨 대장은 이에 만족하고 잔존 병력을 퇴각시켰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지자 상황이 급해진 건 오히려 일본군 총사령부였다. 실제로 봉천 전투는 일본이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치뤄낸 일전이였으며,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 주력을 포위섬멸하지 않으면 일본의 국력으로는 그 이상 전쟁을 끌어가기 힘든 상황이였다. 이에 일본군 총사령부에서는 제2군에게 전화를 통해 "아깝게 긴 뱀을 놓치지 말것"을 지시했으나 돌아온 반응은 "그 긴 뱀이 벗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이였다. 실제로 제2군 또한 심각한 수준의 전력 손실이 있었고(거의 7, 8일동안 일본군의 절반이 채 안되는 제3군, 제2군이 러시아군의 대다수를 상대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후미를 맡은 러시아군은 참호를 파고 여전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을듯. 또한 혼하를 넘는 데 성공한 제1사단을 닥달해 봉천역 쪽으로 전진시켰으나 이 또한 러시아군의 강력한 방어선에 저지당했다.

이날 일본군 제1사단은 사상자 2,358명(전사 747명), 후비 제1여단은 사상자 1,939명(전사 761명)의 손실을 입었는데, 이러한 손실은 일본군이 하루 전투에서 당한 인명 손실 중 가장 크고 심각한 것이였다. 그러한 손실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잡지 못했으며, 기병을 활용해 철도 절단을 노려보기도 했지만 여기에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3월 10일, 일본군은 주력이 거의 다 빠져나가 약해진 러시아군 후미의 방어선을 뚫고 봉천역에 진입해 잔존 러시아군을 포로로 잡았다.(약 1개 여단 내외) 그러나 러시아군의 주력부대는 이미 철령으로 철수를 완료한 상태대.

이날의 작전에 대해 일본군 총사령부의 작전 일지는 다음과 같다.
  • 압록강군 및 제1군주력은 포하(蒲河) 우안(右岸)에서 정지했고 멀리 북방으로 철퇴하는 적군을 추격하지 않음. 근위사단도 포하 부근에 이르렀지만 가도를 따라 퇴각하는 적을 지켜만 봤을 뿐이었다. 또한 포병의 진출도 아깝게 늦었다.
  • 제4군, 제2군은 봉천 주변부를 포위하고 성내에 진입해 패잔병 1개 여단 내외를 포로로 잡았다.
  • 제3군은 우세한 적병의 역습을 받고 일찍 반격을 시작했으나 야전군사령관은 전날 밤의 명령으로 제7사단을 제외한 각 군단에게 현 위치에서 점령/대기하란 명령만 내렸을 뿐 하등 공격을 명령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날 일본군은 공식적으로 봉천 지역에서의 작전을 마무리짓게 된다. 이후에도 아쉬웠던 모양인지 추격전은 계속 벌였고, 러시아군 또한 철령에서 다시 사평가로 철수해 그곳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6. 전투 결과

  • 러시아군
    • 8,705명 전사
    • 51,438명 부상
    • 7,539명 실종
    • 28,209명 포로
  • 일본군
    • 15,892명 전사
    • 59,612명 부상

7.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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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후의 전선)

봉천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전투 후의 상황은 결코 일본에게 좋게만 흘러간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봉천전투는 일본군이 집중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집중해 러시아 극동군을 한번의 전투로 섬멸하고자 하는 전투였으며, 일본의 국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단순한 승리가 아닌, 러시아 극동군을 완전히 섬멸하는 수준의 대승리가 필요로 했다. 즉, 이 한번의 전투는 러시아 극동군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수준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러시아를 강화협상으로 끌어내야만 했다. 이미 바닥나고 있는 일본의 국력을 생각하면 이 봉천전투는 일본 입장에선 전쟁을 끝내는 최종결전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에 실패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주력을 포위하기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러시아군은 주력부대를 빼내 이탈한 것이다. 이는 일본 입장에선 결코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결과다.

이미 크로파트킨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야기했고, 그외 여러 러일전쟁 관련 서적에서 이야기되었듯 일본군은 봉천전투 이후 러일전쟁 기간중 내내 러시아군에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병력의 질 측면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이 징집된 병력들은 훈련도나 의욕 면에서 이전의 일본군 병사들에 비해 확연히 낮은 수준이였다. 더더욱 문제는 일본의 국력 그 자체. 일본은 이미 전비로서 마련한 19억엔을 거의 다 소모한 상태로(강화협상 당시 남은게 2억엔 남짓) 봉천전투 이전에 이미 포탄 부족으로 작전이 지연되고, 간신히 생산한 포탄도 불량탄이 많이 발생하는 등 한계에 다다른 모습을 보였다. 일본은 전쟁을 길게 끌기 어려운 상황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투는 전술적으로 러시아가 패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승리인가?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무엇보다도, 여러차례의 연속된 패전으로 인해 전체적인 사기가 떨어져 있다는 문제가 러시아에겐 존재했다. 실제로 봉천전투만 하더라도 그 직전의 흑구대 전투에서의 철수로 인해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이는 러시아 국민들 또한 마찬가지인데, 피의 일요일 사건의 한 계기가 극동지역에서 날라오는 연속된 패전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체적인 러시아의 사기 저하는 결코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이때문에 차르 정부는 극동군에게 공세로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봉천에서의 퇴각은 이러한 사기 저하를 더더욱 확대시켰다. 병사들은 후방에서 날라온 편지를 받아보면서 혁명 분위기에 휩싸였고 연속된 패전은 군 구조를 일시적으로나마 와해시켰다. 봉천 전투는 전략적으로 본다면 일본군의 포위 기동에 대해 러시아군이 역포위전술로 여러차례 타격을 가하고 주력을 온존한 상태로 빠져나간 것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패전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만 러시아 차르 정부는 극동군 총사령관 크로파트킨을 해임(1군 사령관으로서 계속 참전한다.)시키는 조치를 취해 전세계적으로 패배를 자인하는 꼴이 되기도 했다. 이는 미국으로 하여금 강화협상을 중재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8. 평가

봉천 전투는 결과적으로 병력상 열세인 일본군이 병력상 우세였던 러시아군을 상대로 대담한 우회기동을 통해 편익포위를 실현, 러시아군의 배후를 위협해 대승리를 거둔 형태이나 마지막 순간에 포위망을 닫지 못해 러시아군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 전투가 되었다. 이는 일본군 총사령부의 계획 미비와 지휘의 부족, 병사와 야포, 탄약의 전체적인 부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일본군 총사령부의 지휘는 전투의 승자답지 않게 그리 좋지 못한 수준으로, 총사령관인 오야마 이와오, 총참모장인 고다마 겐타로는 둘 다 근대 군사학에 대한 경험은 거의 없는, 정치가에 가까운 인물들이였다. 물론 이들 둘 다 메이지 유신 때부터 군부에서 활약했던 인물들, 유신의 원로이자 원훈인 인물들로서, 근대적인 군인이라기보단 차라리 정치가에 가까웠기에 전쟁 전체의 전략, 외교, 대본영과의 교섭 등에는 순수한 군인보다 오히려 우수했지만 전투의 지휘는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물론 이들도 군 지휘경험은 존재한다. 무진전쟁 내지는 서남전쟁에서 이들은 군을 지휘하며 여러모로 활약했다. 그러나 잘해야 수 천 ~ 수 만 단위였던 이때의 전쟁과 러일전쟁, 개중에서도 양군 도합 60만에 육박하는 규모의 군대가 충돌한 이 봉천전투에서는 여러모로 뒤떨어졌다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을 보좌해야 할, 근대 군사학 교육을 받은 참모진이 딱히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 있다. 뤼순 항에서 소모될대로 소모된 제3군의 전력을 충분히 충원하지도 않고 철령까지 단독으로 전진하는 계획을 짠 것은 오야마 이와오나 고다마 겐타로가 아닌(물론 이들은 전투 기간중 계속 이 무모한 계획을 강요하려 들었다.) 나름 근대 군사학 교육을 받은 일본육군대학 출신인 마츠카와 토시타네였다. 거기다 이들 참모진은 제3군 독단에 의한 편익포위기동이 실현되었을때도 이쪽으로 병력을 집중시킨다거나 아니면 우익을 움직여 제3군의 기동에 맞추는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노기 제3군은 남만주철도 코앞에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해 기동을 멈춰버렸고 러시아군은 유유히 빠져나갔다. 거기다 총사령부 자신은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연태(烟台)지역에서 머물면서도 제3군 사령부를 전선에 밀착시키라는 상식밖의 명령을 내려 군사령부가 총격을 받기도 했다.

이걸 보면 일본군이 이긴게 신기해 보인다. 그러나 일본군은 어쨌든 군 단위 이하의 현장 지휘 측면에서 러시아군보다 확실히 나은 편이었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계속된 승전으로 높은 사기를 지녔고 병사들의 질도 우세했다. 무기체계면에서도 러시아군보다 적합했다는 장점까지 있었기에 이러한 문제를 뛰어넘어 승전할 수 있었다.

특히 무기체계와 병사들의 질적 수준 및 사기 차이는 전황에 상당한 영향을 끼첬다. 러일전쟁은 보병이 장비한 볼트액션식 소총이 전장의 주역이 된 마지막 전쟁으로써, 과반수의 사상자가 개인화기에 의한 총상으로 발생했다. 이때 양군이 장비한 주력 소총은 일본군이 구경 6.5mm 30년식 보병총, 러시아군은 7.62mm 모신나강 소총이었는데, 단순 위력 면에서는 모신나강이 더 낫지만 명중률 측면에서 30년식 소총이 모신나강에 비해 우세했으며, 특히 2~300m 부근의 명중률에서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거기다가 러일전쟁때 투입된 러시아군 부대중 모신나강을 장비한 부대는 소수였으며,여전히 다수는 베르단 소총을 이용하고 있었다.이러한 차이로 인해 일본군은 기동전 및 조우전에서 좀 더 유리하게 싸울 수 있었다. 또한 일본군은 256문의 공랭식 호치키스 기관총을 소유했는데 이는 56문의 기관총을 장비한 러시아군보다 5배나 많은 수량이였으며, 러시아군의 기관총은 수랭식 면피 벨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송탄 불량이 일어나기 쉬웠다. 또한 일본군은 야포의 수량에서는 러시아군의 절반밖에는 안되었지만 중포 및 산포에서는 러시아군보다 더 많은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군은 이때 막 징집한 신병 위주였기에 훈련도도 낮았고 전투 경험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밀집대형을 이루어 돌격하는 것을 주전술로 삼았고, 이에 대해 일본군은 기관총과 대포, 더 나은 개인화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이런 돌격을 막아내거나 더 많은 적을 역으로 밀어내면서 밀어내면서 전진할 수 있었다. 또한 사기와 정신력 부분도 마찬가지로 일본군이 상당히 우세했다. 이 점에 대해서 크로파트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새로 징집된 병사들은 훈련도 사기도 별로였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일본군은 훈련도 잘 되어 있었고 특히 사기가 높았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 러시아군은 특히 현장지휘관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군은 더 많은 병력을 지니고 있었고, 대포의 수량 측면에서도 앞섰으나 이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일본군의 기동을 저지하고 반격을 가하지 못했다. 또한 엉뚱한 곳을 공격하면서 병력을 낭비해 정작 밀려오는 일본군을 저지해야 할 곳에는 필요한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 반복해서 전개되었다. 러시아군이 일본군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었던 부분인 기병전력이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일본군 기병집단에게 봉쇄당한 것 역시 아쉬움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러시아군 총사령관인 크로파트킨 대장은 현장지휘관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보면서 상호 협조에 성의를 기울이거나 예비대를 직속으로 두어 마지막 철퇴전을 직접 진두지휘해 성공하는등 현장지휘관이나 일본측 총사령부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또한 적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해 일본군 제3군의 기동에 대해 신속한 대처에 실패하거나 일본군의 양동에 낚여 엉뚱한 곳에 예비대를 투입하는 등의 삽질을 했으며, 현장지휘관들이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엉뚱한 짓을 할때에 이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등 비판받을 부분이 적지 않다.

여기에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주력, 정예부대는 유럽쪽에 계속 온존하고 극동지방으로는 신규 징집병 내지는 2선의 부대와 같은 질이 낮은 부대를 파견하고 있어 병사들의 전투력이 일본군보다 낮았고 사기 또한 낮은 편이였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최고지휘부의 지휘 측면에서는 러시아에게 밀렸으나 현장지휘부 및 병사들 개개인의 질과 사기, 장비의 우위를 통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9. 기타

  • 이 전투는 러일전쟁 기간 중 최대 규모의 지상 교전이였으나 일본이 바랐던 것처럼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 전쟁이 끝난 것은 쓰시마 해전으로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가 괴멸한 이후의 강화조약에 의한 것이다. 일본은 봉천 전투에서 시도했던 러시아군 괴멸과 강화협상으로의 유도를 쓰시마 해전에서 결국 해냄으로써 전쟁을 승리하게 된다.
  • 이날을 기념해 일본은 태평양 전쟁 패망 이전까지 3월 10일을 일본 육군 기념일로 제정, 기념하게 된다.
  • 오다마는 평소 이 작전을 동양의 스당(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의 결정적 전투로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함으로서 사실상 프랑스 제정은 몰락했다)으로 만든다고 했다. 결정적인 세당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전쟁은 끝이 났으니 소원은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해군에 의해서 해전으로 결판났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안된것만 못하게 되었다.
  • 마지막으로 이 전투는 남북전쟁과 함께 시작된 참호전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흔히 엄폐된 기관총의 집중사격 효과가 뤼순 공방전에서 더 심했으므로 이걸 참호전의 시작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뤼순 요새가 미완성 상태긴 하지만 요새였으므로 그 당시의 세계 각국의 군사지도자들은 단순한 요새전중 하나로 치부하여 우습게 보았다. 한마디로 말해 요새에 닥돌하면 사상자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는 것. 하지만 봉천 전투는 수십만의 군대가 야지에서 참호를 구축한 다음 전투를 벌인 것이라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나타난 참호전의 상황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역시 세계 각국의 군사지도자들은 이 전투에 대해서 일본군 좌익의 우회기동에만 주목했고, 때문에 보병은 아무리 강력한 방어진지라 해도 돌파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에서 엄청난 피를 흘리는 결과를 창출해냈다.
  • 임종국 선생은 러일전쟁 당시 봉천 전투에서 한번만 더 러시아가 공격을 지속했다면 일제강점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늘 이야기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연결되는지는 논쟁의 여지는 있다. 어차피 러일전쟁은 일본에게 있어 경제적 이득이 당장 생기는 전쟁은 아니였기에 설령 일본이 졌다 한들 조선이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적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규모로만 따지면 프랑스군 19만, 연합군 43만이 동원된 라이프치히 전투가 더 크다. [2]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전비와 사상자 때문에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급속히 고갈되어 최대한 빨리 러시아와 강화해야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극동지역의 러시아군을 섬멸할 필요가 있었다. [3] 총체적으로 일본은 1905년부터 1912년까지의 전체 예산을 전비로 지출하였다. [4] 그리펜베르크 대장은 흑구대 전투 이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한국어 위키에는 그리펜베르크가 맡고 있다고 하나 이는 명백한 오류다. [5] 한국어 위키에는 카울바르스 대장이 맡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 [6] 중국 삼국시대에 기주군에 있는 한자와 동일한 곳이 존재하므로 주의하자. 전자는 지금의 랴오청시 린칭시에 있고 후자는 요동반도 다롄시 부근에 있다. [7] 당시 봉천 전투 당시 군소장, 육군대학 1기, 만주군 주임 작전참모으로 센다이 번사 출신 [8] 봉천전투 당시 포병소좌, 육군대학 2기, 작전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