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8 04:02:59

변월룡

변월룡
邊月龍 | Пен Варлен 펜 바를렌
파일:변월룡.jpg
<colbgcolor=#3365b9> 출생 1916년 9월 29일
러시아 제국 연해주 시코토프스키구
사망 1990년 5월 25일 (향년 73세)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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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화가, 평양예술대학 학장, 레핀 미술대학 교수
학력 스베르들로프스크 미술학교
레핀 미술대학 (수석 졸업)
배우자 제르비조바

1. 개요2. 생애와 활동
2.1. 탄생과 첫 유학2.2. 레핀 아카데미 교수 재직과 각종 작품 활동2.3. 북한 미술계 재건 활동과 추방2.4. 말년과 사후 한국에서의 전시회
3. 작품4. 관련 항목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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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령 선진국에서 좋은 재료는 빌려 올지라도
그림에서 민족혼은 잃지 말아야 한다."
변월룡[1]
러시아 제국 연해주에서 태어난 소련 국적 고려인 화가이자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의 거장.

소나무에 자신과 조선 민족의 처지를 투영하여 다양한 풍경화를 그렸다. 그의 초상화도 유명한데, 인물을 그릴 때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사람의 내면을 잘 파악하여 그 사람의 분위기까지 잘 표현하였으므로, 그의 초상화를 '명작'이라 부른다. 또한 붓에 끼여져 나간 자국까지 선명할 정도로 유화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이 매우 인상적이다.

2. 생애와 활동

2.1. 탄생과 첫 유학

변월룡은 1916년 연해주 쉬코토프스키 구역의 유랑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없었다. 호랑이 사냥꾼인 할아버지는 어린 월룡에게 늘 "나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호랑이를 쫒아 연해주를 유랑했지만, 너만은 꼭 고국으로 돌아가 살아라!"라고 생전에 강조했다고 한다. 손자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병진년 용띠 해 달밤에 태어났다고 월룡(月龍)으로 지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어린 변월룡은 교과서의 삽화를 그려낼 정도로 미술에 소질이 있었으며, 한인학교를 다니던 도중 주변인과 가족의 도움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주의 미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하지만 그가 유학을 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고려인 강제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변월룡 자신은 유학을 떠난 덕에 강제 이주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족과 친척은 예외없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이주당하게 되었다.

2.2. 레핀 아카데미 교수 재직과 각종 작품 활동

스베르들롭스크의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운 변월룡은 실력을 인정받아 26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러시아 최고 미술대학인 국립 레핀 아카데미(레핀미술대학)에 들어가서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이후 그곳의 데생과 조교수직을 맡으며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 1953년엔 부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 변월룡은 많은 인물화와 풍경화를 남겼다. 그는 특히 소련 당국의 명령으로 다양한 노동자 영웅의 인물화를 그려내었는데, 이 영웅 인물화들은 변월룡 자신의 시선과 필체보다는, 소련 당국이 요구하는 이념을 반영한 작품이었다.

한편 변월룡은 다양한 풍경화를 남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풍경화는 소련에서 꺼려지는 장르였다. 소련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기에 인물화보다 모호하여 부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풍경화에서는 근대 공업국가로서의 진취성과 모국의 상징인 광활한 자연, 풍경을 그리도록 요구하였는데, 변월룡은 이러한 풍경화의 이데올로기적 모호함을 이용하여 인물화보다 좀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성과 시선을 드러내곤 하였다.

이러한 풍경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작가가 투영되는 소재는 다름아닌 소나무이다. 변월룡의 풍경화는 주로 러시아의 풍경을 소재로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풍경화에는 러시아에선 자생하지 않는 한반도의 소나무가 홀로 그려지곤 했다. 이러한 소나무는 바람에 휘날리거나 비바람을 맞는 등 풍파에 시달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데, 이는 소련 속의 고려인으로 존재해야 했던 변월룡이 느끼던 자신의 처지가 반영된것으로 여겨진다. 소련에 속해있지만, 동시에 소수민족으로서 변방에 위치한 자신의 입장을 러시아 풍토 위에서 고난을 겪으며 홀로 존재하는 한국의 소나무로 그려낸 것이다.

이러한 소나무는 특정 시기를 지난 후 부쩍 모습을 보이는데, 바로 소련 당국의 명령으로 북한에 파견된 이후이다.

2.3. 북한 미술계 재건 활동과 추방

파일:변월룡1.jpg
휴전 직후 평양미술대학 교수진과의 기념 사진
가운데 줄 왼쪽 세 번째가 변월룡.
1953년 7월부터 1년간, 변월룡은 소련 문화부의 지시에 따라 북한 교육성 고문관으로 파견되어 북한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북한 미술계를 기초부터 재건하는 과제를 시작했다. 레핀 아카데미로부터 물려져온 다양한 미술 수업을 도입하고, 일본 미술계의 잔재를 하나하나씩 없앴다. 말그대로 북한 미술의 토대를 새로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작업들을 인정받아, 변월룡은 한 때 북한 핵심 인물들과 가깝게 지냈다. 최승희 등 다양한 북한 유명인의 인물화를 그렸었고, 또한 북한 각지를 다니면서 다양한 풍경화와 기록화를 그리기도 했었다. 심지어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포로 송환을 기록화로 남기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이른바 작가의 투영인 소나무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변월룡이 북한방문과 거주로 인하여 소수민족 고려인으로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정체성의 고뇌를 어느정도 해결하였다고 볼 수 있다.[2]

그러나 머지않아, 변월룡은 북한으로부터 영구 추방된다. 이전부터 북한은 계속해서 귀화를 제의해왔는데, 북한 내의 친소련파 축출 과정에서 귀화 제의를 연거푸 거부한 변월룡은 친소련파로 분류되었던 것. 이러한 추방 이후 변월룡이 남긴 북한 미술계에의 족적은 완전히 제거되었으며, 그나마 나누던 북한 제자, 교수들과의 서편교류도 얼마못가 금지되어 끝나버리고 만다.

2.4. 말년과 사후 한국에서의 전시회

이후 변월룡은 소련에서의 미술활동을 이어갔으며, 60년대엔 소수에게만 허용되던 해외 여행을 다니며 여러 극동지방과 유럽국가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는 그가 정치적으로 신뢰받았던 덕이 크다. 77년엔 레핀 아카데미의 데생과 정교수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그가 태어난 곳이자 북한과 가장 가까운 연해주에서 풍경화를 자주 그렸다. 이후 1985년 레핀 아카데미를 퇴직한 변월룡은 1990년 5월 25일, 레닌그라드에서 뇌졸중으로 생애를 마감한다.

사후, 변월룡의 전시회는 한국에서 몇차례 추진되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무산되곤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변월룡의 아내 제르비조바는 살아 생전 남한에서의 전시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후 제르비조바도 사망하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들과 딸의 도움을 받아 변월룡의 전시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되었다. 변월룡의 전시회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016년 3월 처음으로 열렸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라는 이름으로, 냉전시대에 살아가야 했던 변월룡의 정체성이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 프라스코비야 제르비조바(1920-2005)나 그의 자식들(차남 펜 세르게이, 장녀 펜 올가) 또한 화가로 활동했다.

3. 작품

4. 관련 항목

  • 소련
  • 미술
  • 유화
  • 고려인
  • 사회주의 리얼리즘
  • 러시아 국립 예술 아카데미 : 흔히 말하는 레핀대학교. 일리야 레핀이라는 거장을 배출한 뒤로는 레핀 아카데미로 통칭되고 있다. 사족으로, 한때는 입학절차가 까다롭지 않아서 한국인, 특히 중국인들이 많이 유학을 갔었으나 이후 그로 인해 입학절차가 까다롭게 변경되었다는 역사가 있다.

5. 여담

  • 그의 작품을 보면 한글로 쓰여진 그의 이름, '변월룡'이 적혀진 서명을 종종 볼 수 있다. 자신의 한국 이름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
  • 변월룡은 블라디미르 레닌을 자주 그렸다. 레닌은 당시 고려인들에게는 굉장히 특별한 존재였다. 레닌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의한 혁명. 즉 모든 인종과 민족을 평등하게 인정해 주었기에, 조선인들에게는 민족해방의 가능성을 제시했던 지도자로서 당시 고려인들에게 영웅처럼 느껴지는 존재였다.
  •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를 특히 존경해 동판화에 몰입했다. 덕분에 일부에서는 '동판화에서만큼은 변월룡이 렘브란트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 전시장의 작품들, 특히 데생과 동판화 유화 속 인물과 풍경 표현이 생생해 마치 작품 속 인물과 풍경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일 것처럼 걸출하다.


[1]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 (문영대/컬처그라퍼) p.247 [2] 변월룡이 소련에 완전히 충성하기 힘들어하며 정체성의 고뇌를 느꼈음을 알 수 있는건 변월룡의 이름이다. 펜 바를렌은 한국명인 변월룡을 그대로 러시아어로 읽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