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1:01:24

배리 골드워터

베리 골드워터에서 넘어옴
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애리조나 주 클래스 1)
제77~82대
어니스트 맥팔랜드
제83~88대
배리 골드워터
제89~94대
폴 패닌

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애리조나 주 클래스 3 )
제70~90대
칼 헤이든
제91~99대
배리 골드워터
제100~115대
존 매케인

1964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제 83-88·91-99대 미합중국 연방 상원의원
배리 모리스 골드워터
Barry Morris Goldwater
파일:Barry Morris Goldwater.jpg
<colbgcolor=#214388><colcolor=#fff> 출생 1909년 1월 2일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
사망 1998년 5월 29일 (향년 89세)
미국 애리조나 패러다이스 밸리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가족 배우자 마거릿 존슨 (1934년 결혼, 1985년 사별)
배우자 수잔 샤퍼 웨슬러 (1992년 결혼)
아들 배리 골드워터 주니어 포함 자녀 4명
학력 애리조나 대학교 (중퇴)
직업 정치인
소속

서명
파일:배리 골드워터 서명.svg

1. 개요2. 생애3. 활동 노선4. 기타5. 저서6. 어록7. 선거 이력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gettyimages-166716925-2048x2048.jpg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배리 골드워터. 이 당시에 몇 안 되는 컬러 사진이다.
"In your heart you know he's right."
"당신도 마음 속으로는 그가 옳은 쪽이라는 걸 알고 계시죠."[1]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배리 골드워터의 대선 캠페인 슬로건.
"Extremism in defense of liberty is no vice. Moderation in pursuit of justice is no virtue."
"자유를 지키기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 정의를 추구하는데 절제는 미덕이 아니다."
1964년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 中

미국의 정치가. 공화당 소속으로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였으며, 현대에는 공화당의 강경 우경화[2]의 시초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뉴딜시대 이후의 공화당 대선후보들 중 최초의 강경 우파 성향 정치인이었지만,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기준 매우 리버럴한 색채를 띤 것으로도 알려져있다.[3] 이런 사회적 이슈에 대한 성향 차로 만년에는 공화당 내 사회보수주의자들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별명은 AuH2O[4], Mr. Conservative[5].

2. 생애

1952년 애리조나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상원 원내 대표였던 어니스트 맥팔랜드를 이기는 이변을 일으키며 당선된다.[6]당대 공화당의 주류를 형성했던 온건 보수 계열과는 거리가 있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공화당 소속 현직 대통령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너무 민주당과 타협을 많이 한다고 비판했으며, 그가 대법관으로 지명한 얼 워런을 인준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강경한 보수 성향의 정치인답게 공화당과 민주당 내 남부보수파 의원들의 모임인 보수연합에 적극 참여했다. 다만 그가 소속된 보수연합은 민주당 주류들에 맞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법안들을 통과시키는데 기여했다.

그가 가장 주목받은 순간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였다. 그는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해 난전 끝에 넬슨 록펠러 등을 꺾고 대선 후보로 결정된다. 이때 지지 연설을 해서 유명세를 얻은 게 그 유명한 로널드 레이건. 그러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지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아 그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는 상황이었던데다가, 현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 민권법 추진과 위대한 사회 구상이 미국 국민들의 호응을 얻어 전반적으로 선거 판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골드워터는 아예 소형 핵무기를 남베트남 국경에서 사용하자고 주장하고, 크렘린의 남자(= 흐루쇼프) 방에 핵무기를 떨어뜨리자는 식[7]의 발언을 일삼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넘긴지 2년 밖에 안 지난 시점에서 이러한 발언은 그냥 선거에서 낙선하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당시 공화당 주류였던 온건파의 반발을 사 당의 적극적인 협조를 구하기 어려워진 데다가, 부통령 후보마자 강경보수파인 윌리엄 E. 밀러를 골라 당내 분열을 봉합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존슨 대통령이 골드워터가 당선되면 핵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암시한 " 데이지 걸" 광고를 내보내면서 결국 최총 득표율 38.5%, 득표율 차이는 22.6%, 확보 선거인단은 434명씩이나 차이나는 역사적인 참패를 당한다. 패배가 확정된 후에도 한동안 패배 승복을 하지 않아 존슨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불만을 표시했고, 골드워터는 그제서야 패배를 인정하고 승복 연설을 통해 축하의 말을 전했다. 다만 승복 연설에서도 공산권 국가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나서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 했다.

골드워터와 공화당에게 그나마 있던 희소식은 골드워터의 '남진' 정책이 영향을 미쳐 소위 'Solid South'라 불리며 민주당의 굳건한 정치적 기반이었던 남부 5개 주에서 골드워터가 승리하는 이변이 발생한 것이었다. 특히, 조지아 주에서는 역대 처음으로 공화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변화는 이변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게 되고 리처드 닉슨과 공화당의 남부전략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이 남부의 표를 얻을지언정 총선과 지방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계속 남부에서 우위를 점했다. 공화당이 남부를, 민주당이 북부를 지지 기반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90년대가 되어서야 이루어진 일이었다. 'Solid South'는 공화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을 버텼던 것이다.

64년 대선 후에도, 골드워터는 꾸준히 공화당의 원로로서 활동했고, 1968년 애리조나 연방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상원으로 복귀한다.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엔 닉슨 대통령에게 강력히 하야를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정계 활동 막바지인 1986년에는 민주당의 윌리엄 니콜스 하원의원과 미군 지휘체계의 3군 합동성을 강화하는 국방부 개편 법안을 발의, 통과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8] 이는 '골드워터-니콜스 법'으로 불리며, 오늘날 미국의 군 지휘체계 기초를 마련하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파일:gwater_012495ap.jpg
말년의 골드워터
현대 미국 공화당과 미국 보수주의의 원류로 평가받지만, 정작 만년의 그는 공화당을 장악하기 시작한 보수파에 대해 꽤 실망한 듯 하다. 이란-콘트라 사건 당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발뺌하는 레이건을 상대로 대통령은 무능력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했고, 극우로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키던 애리조나 주지사 에반 메참에게 사임을 권유하고 2년 뒤 공화당이 "부끄러운 사람들"에게 장악되었다고 발언하면서 특히 팻 로버트슨 등 보수 목회자들을 바탕으로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기독교 우파를 강하게 비판했다. 상원의원 은퇴 후에는 낙태와 동성애자의 군복무 허용과 입양 문제, 의료용 마리화나 합법화 등을 놓고 당 주류인 사회보수주의자들과 대립하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해 놀라움을 불러일으켰고, 1992년 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낙하산 후보를 상대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 당선시키기까지 했을 정도. 밥 돌이 1996년 선거 당시 보수파들에게 미온적인 지지를 받자, 골드워터는 "우리가 공화당의 새 리버럴들일세. 상상이 되나?[9]"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3. 활동 노선

대외적으로는 매우 강경론자였지만, 당시 미국의 사회 문제 분야에서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면모를 보였다. 예를 들어서 흑인 인종 차별은 매우 반대했고 NAACP와 National League on Urban Conditions Among Negroes 등 민권단체들의 애리조나 지부 창립회원이었다.[10] 게다가 애리조나 주방위군 창설에 참여했을 때는 연방군보다 2년 앞서 인종 통합을 시행했고, 피닉스 시의원으로서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 이전부터 인종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상원에서 흑인 인턴과 스태프를 고용한 최초의 의원 중 한 명이기도 했다.[11] 또한 낙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달린 것이라며 찬성했고, 동성애자의 군 입대에 찬성했다.[12]

골드워터의 이러한 면모는 정계에서 활동했던 20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매우 드문 사례이다. 이는 그의 보수주의 사상이 자연법을 근거로 개인의 자유는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자유지상주의를 토대로 성립된 것이고, 이것을 침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강경하게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골드워터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평가한 큰 정부, 독재 정권, 공산주의에 평생 동안 강경하게 반대했으며, 자유의 적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 강경한 매파적 입장은 이러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으로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인종 차별 문제는 연방 정부가 아닌 주 정부에서 해결할 일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남부와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던 사실을 생각해 보면, 과연 인종차별 문제에 있어서 해결 의사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의 주장은 인종차별 문제를 인권 문제가 아닌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문제로 치환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부에서 주의 권익을 논거로 인종차별적 법령과 정책을 옹호해온 건 남북전쟁 당시에도 보일 정도로 오래된 레토릭이다. 그렇기에 그의 주장은 겉보기에는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주장대로라면 남부의 인종차별은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았다. 민주당과 진보 세력은 그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 세우기가 어렵고 남부의 지지는 챙길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명확히 노예 문제로 일어났던 남북전쟁을 '연방 정부의 압제에 대항한 주 정부들의 정당한 봉기'로 수정하고, 미국 남부가 미국의 개척자 정신과 카우보이 문화를 계승했으며 주 정부의 권리와 작은 정부, 감세 등을 강조하며 노예제와 인종차별 문제는 가리려 했던 남부인들에게 있어 골드워터의 주장은 아주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골드워터의 주장이 표면적으로는 인종 차별로 보이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인종 문제를 남부의 주 정부들에게 맡기자는 것은 인종 문제를 해결하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판에는 무력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남북 전쟁에 대한 왜곡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2010년대까지도 남부 연합 육군기가 당당하게 휘날린 남부의 주 정부들이 과연 인종 문제를 진정성 있게 다루었을지는 의문이다.

컬러 텔레비전과 컬러방송이 점점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에[13] 대선 후보로 나선 정치인이지만, 골드워터는 컬러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배리 골드워터의 컬러 사진 숫자는 린든 B. 존슨의 컬러 사진에 비해 매우 적다. 컬러 사진을 싫어했던 이유는 "흑백 사진이야말로 인종에 관계 없이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평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치계에서는 배리 골드워터의 흑백 사진 선호 행보에 대해, 정치를 하면서 프레임의 중요성을 상당히 빨리 깨달았던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본인의 계속된 강경 발언은 린든 존슨이 그를 "전쟁광"으로 몰아붙이는 데 이용되었고, 1964년 대선의 패배 요인이 되었다.

대선에서 참패했지만, 골드워터는 레이건 부시 부자를 거치며 공화당 주류가 되는 신보수주의의 시작을 알린 상징적 인물이다. 그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현재 미국 보수주의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 티 파티, 자유지상주의의 측면들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저들 중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부분으로서, 그의 사상은 현대 미국 공화당, 미국 보수주의의 원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기타

대선 과정에서 배리 골드워터는 진짜 핵전쟁을 벌일 수도 있는 광인으로 비쳤기에, 여러 정신과 의사들이 골드워터의 심리를 분석한 책을 펴낼 정도였다. 나중에 골드워터는 이 책을 출판한 사람을 고소했고, 이 때문에 미국 정신의학회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본인이 직접 진찰하지 않은 공적 인물의 정신 상태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전문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이다"라고 규정한 '골드워터 규율(Goldwater Rule)'을 만들었다. *규칙의 정의 *규칙이 만들어진 배경 이후 52년간 이 규율이 유지되다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다시 한번 정신 분석을 시도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처럼 다혈질의 급한 성격으로 수많은 구설수에 오른 인물이었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고상하고 품위있는, 인간미 있는 인물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이었음에도 "배리는 진정한 미국인으로서 난 그와 같은 인물을 결코 본 적이 없다. 그는 위대한 애국자이자 인간적으로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고 평하며 추모했다. 말년의 골드워터는 의료 보험 개혁에는 반대했지만, 탄핵 시도를 반대하는 등 젊은 대통령 부부에는 호의적이었는데 와이프[14]가 대통령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란 평을 남기기도 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법조계에도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가 미국 상원의 승인 없이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는데 골드워터가 이에 반발해 카터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골드워터 대 카터라는 이름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의 주요 판례[15]로 기록되었다. 연방대법원은 미국 상원이 정해진 기간내에 정식으로[16] 반대 의명을 표명하지 않았으므로 해당 행위는 통치행위에 해당한다며 법적 심사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하 처리했다.

판결 이후 상호방위조약 파기는 그대로 이행되었고 미국 의회에서는 그를 대신하여 타이완 관계법을 입법해 대만 문제를 정리했다.

5. 저서

6. 어록

흔히 사람들은 정부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많은 일을 할수록 좋다고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권력은 커질수록 스스로 점점 더 증식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는 금언이 나왔다. 건국의 아버지들도 이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헌법에 반영했다. 헌법은 한마디로 절대주의의 방향으로 팽창하려는 정부의 자연스러운 경향성에 대한 억제제도이다.
"보수주의자의 양심" 中
사람이 정치적으로 노예가 된다면 그는 결코 경제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거나 심지어 그는 경제적으로 효율적일 수도 없다. 반대로 사람이 그의 경제적 욕구를 위해 국가에 의존한다면 그의 정치적 자유는 환상일 따름이다.
"보수주의자의 양심" 中
I think we ought to have an honest, open discussion about the use of tactical nuclear weapons in Vietnam. I don't think we ought to rule anything out. (...) I would be perfectly willing, if necessary, to have a nuclear war if that's what it takes to preserve liberty in the United States.
저는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전술 핵무기 사용에 대해 정직하고 열린 토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배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 만약 필요하다면, 저는 미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핵전쟁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른바 베트남 핵폭격 발언.[17] 현재까지도 골드워터를 "전쟁광"으로 기억되게 만든 발언으로 평가받는다.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49 미국 피닉스 시의회 선거 피닉스 시의회 광역구

[[무소속(정치)|
무당파
]]
16,405 (17.34%) 당선 (1위) 초선
1951 - 재선
195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애리조나

132,063 (51.31%) 초선
1958 164,593 (56.06%) 재선
1964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27,175,754 (38.47%, 52명) 낙선 (2위)
196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애리조나 274,607 (57.22%) 당선 (1위) 3선
1974 320,396 (58.26%) 4선
1980 432,371 (49.46%) 5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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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파(오른쪽), 옳은 쪽이라는 뜻을 가진 영단어 right를 가지고 이중적인 의미의 슬로건을 만든 것이다. [2] 국내정치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외교적으로도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 [3]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긴 하지만, 골드워터가 론 폴과 더불어 공화당 내에서 자유지상주의의 원로로 대접받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 다만 아예 당적까지 자유당으로 옮겨 탄 론 폴에 비해 골드워터는 보다 정통 우파에 가까운 성향이긴 하다. [4] Au (금= Gold)+ H2O (물=Water) 캠페인 홍보용 문구로도 사용되었다. [5] 골드워터의 손녀가 할아버지에 대해 다룬 동명의 HBO 다큐도 존재한다. [6] 이후 58년에 주지사 재선을 한 맥팔랜드와 리매치를 해서 더 큰 차이로 승리한다. [7] 다만 진지한 발언이 아니라 농담조였다고. [8] 그리고 골드워터가 은퇴하고 그의 지역구에서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존 매케인. 아이러니하게도 매케인은 골드워터와 달리 온건 보수파였다. [9] 둘 다 초기에는 보수파로 분류되었다. [10] 평생 이런 민권단체에 대한 재정적 후원을 지속해 1991년 Urban League는 "피닉스 지부에 대한 50년 동안의 충실한 봉사"(for 50 years of loyal service to the Phoenix Urban League)를 이유로 인도주의상을 수여했을 정도. [11] 그러나 손님에 대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 반헌법적이라는 이유로 1964년 민권법에는 반대표를 던졌다. 나중에 골드워터는 이를 회고하며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한 바가 있다. 막상 본인의 가족이 운영하는 백화점의 백인 전용 코너를 폐지하고 흑인 점원들을 고용한 행보를 고려했을 때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12] 그의 손자가 게이이다. [13] 미국에서 TV 컬러방송은 1950년에 시작되었지만, 낮은 수신률과 적은 컬러방송 비중으로 인해서 컬러TV가 부자들의 사치품이나 얼리어답터들이 사서 보는 물건 취급받았다. 컬러TV가 대중화된것은 1960년대 중후반기의 일이다. [14] 마침 힐러리 클린턴은 젊은 시절 '보수주의자의 양심'을 애독한 열혈 골드워터 지지자이기도 했다. [15] 해당 소송을 통해 조약의 파기가 의회의 권한인지 행정부의 권한인지를 결정했다. 참고로 미국은 조약의 채결은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16] 반대 의견과 입장문은 발표되었으나 공식적으로 반대 서한을 송부하지도 해당 행위가 무효라며 투표에 부치지도 않았다. [17] 곧바로 린든 B. 존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데이지 걸 광고를 보내버려 골드워터를 "핵전쟁 광"으로 묘사하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결정타를 입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