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22:35:02

배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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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www.antichrist.or.kr/bsm.gif
1906년 ~ 1986년 2월 17일

파일:external/museum.smu.ac.kr/IMG_36.jpg

1. 소개2. 교육 활동3. 친일 행적4. 기타

1. 소개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의 교육자. 여성교육과 국토녹화에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1964년 문화훈장 국민장, 1968년 경희대학교 명예법학박사, 1971년 산림사업발전 유공표창, 198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유공자이기도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교육/학술부문에 이름을 올린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호는 계당(桂堂)과 민정(敏廷). 창씨는 蒲田(카마타), 芳村(요시무라). 어렸을 때는 '배순덕'이라는 이름을 쓰고, 한동안 '배순명'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던 모양이다.

2. 교육 활동

파일:external/www.smuc.ac.kr/653135_1.jpg
열일곱 살 때인 1923년 경성(서울) 동덕여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 4월, 경성 삼선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중일전쟁 2개월 전인 1937년 5월 도쿄고등기예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이때부터 교육 행정가의 면모를 띠게 된다. 귀국 후 1937년 11월에 종로구 중학동[1]에서 상명여자고등기예학교를 건립한다.[2] 1940년에는 이 학교를 상명실천여학교로 변경하고 교장을 맡았다. 1945년에 재단법인 상명학원을 설립, 이후 1965년에 서울 세검정에 상명여자사범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으로 취임한다.

이외에도 한국사학재단연합회 이사, 대한민국문학예술상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상명학원 이사장, 영훈학원 이사장, 민정학원 이사장, 동덕학원 이사등 다양한 직을 맡으며 교육분야에서 활동했다.

3. 친일 행적

여기까지만 보면 훌륭한 교육자지만... 이화여대의 김활란, 성신여대의 이숙종, 서울여대의 고황경, 경성대의 김길창 못지 않은 빼박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것이다. 네임밸류는 다른 친일교육인들에게 밀리지만, 그저 설립자 혹은 총장 수준에 지나지 않은 다른 친일교육인들과 달리 자신의 이름을 대학에 박아놓았다는 점 덕분에 이름 자체는 가장 유명할 수도 있다.

배상명은 친일단체인 '전위여성격려대'가 만들어졌을 때 가담해서 북한의 여러 지역에 파견되어 강연을 일삼았으며, 태평양전쟁시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어 황국신민과 징병 독려를 주창했다. 조선인들을 일본군에 징집한다는 명령이 떨어지자, "반도민중의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며 "반도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적으면서 일본정신에 입각한 군국의 여성이 되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언행을 일삼기도 했다. 다음은 1942년 5월 매일신보에 기고한 ‘역사에 남을 여성이 되자’라는 글 중 한 대목.
1944년부터 징병령이 조선에도 실시되게 된 것은 반도민중의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아직까지 지원병에 부치던 반도인에게 이제는 떳떳한 제국의군인으로서 국방의 중책을 지게 된 것은 크나큰 광영이며, 더구나 반도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우선 교육자인 입장에서 반도의 여성을 어떻게 교육하며 더구나 군인의 아내요 어머니인 중책을 담당하여 나갈 군국 여성을 연성하는 데 종래보다 더 한층 결의를 새로이 하며 교양과 지식을 길러나갈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흔히 말하는 총후부인(銃後婦人)론을 연상시키는데, 총후부인론이란 아들과 남편을 전쟁에 보낸 여성은 자랑스럽게 국가를 지키기 위해 떠난 남자들을 대신해 씩씩하게 가계를 돌보고 후방을 책임지는 여성상을 말한다.

4. 기타

파일:external/museum.smu.ac.kr/%EC%98%81%EB%AC%B8%EA%B0%95%EC%97%B0%EC%B4%88%EA%B3%A0%EC%99%80%20%EC%9E%AC%EB%AF%B8%ED%99%9C%EB%8F%99%EC%82%AC%EC%A7%84.jpg

자타공인 한복 매니아로서, 외국에 나갈 때에도 꼭 한복을 입었다고 한다.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상명대학교에는 그녀의 호를 딴 건물(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의 계당홀, 천안캠퍼스의 계당관), 장학금(계당장학금)이 있다. 또한, 상명중학교와 상명고등학교의 재단인 민정학원은 그녀의 호 '민정'에서 따온 것이다.

배상명의 묘지가 경기도 남양주시 천마산에 있다. 배상명은 천마산 일대에서 육림사업을 펼치기도 했고, 상명여자사범대학 학생들의 생활관(수련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상명학원이 이 일대의 땅을 소유하고 있어, 꾸준히 상명대 남양주 캠퍼스 설립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다.

참고로 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에는 배상명의 호를 딴 계당홀과 천안캠퍼스에는 계당관이 있다. 계당홀은 평소에는 봉인(...)되어 있다가 외부에 방송전파를 탈 일이 있거나, 외부 손님돈을 꼬박꼬박 갖다바칠 신입생들이 몰려올 일이 생기면 봉인을 해제한다.
선생은 소녀 시절에 겪은 3•1 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비운을 통감하였다

신분의 차별이 없는 국민 교육만이 민족의 자주와
번영을 이루는 지름길이라 깨달은 선생은
새로운 학교 새로운 교육 풍토를
조성하기로 결심하셨다

1937년 상명고등기예학원은 그렇게 설립되었고
그것이 진리 정의 사랑을 이념으로 하는
상명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역사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과감한 헌신에 의하여 발전한다면
계당선생은 분명 근대 교육사를 이끈
선구자 중의 한 분으로 자리하리라
계당홀 내 배상명 동상 아래 글
서울과 천안 양 캠퍼스 모두에 배상명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과거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자주 끌어내려지는 등 수모를 겪었고, 현재에도 재학생들에 의해 각종 오물이 투척되고 있는 상황. 2011년 1월 전국노래자랑 종로구 편을 상명대학교 계당홀에서 녹화했다(...) #

또 배상명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자, 상명대 측에서 배상명을 제외하려고 직접 항의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겠어? 이사장이 배상명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몇몇 재학생들은 스스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세운 학교에 다닌다는 식으로 자조적으로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다.[3] 물론 옹호하는 재학생들은 사실상 아무도 없다. 또한 서울에 있는 상명고등학교[4]에도 배상명 동상이 있다.

2013년 후반에 과거 배상명이 집무실로 사용하던 서울캠퍼스 건물에 계당 배상명 기념관을 새롭게 오픈하였는데, 배상명이 사용하던 집무실의 내부 인테리어를 리모델링하였고 배상명의 일대기와 생전 육성, 각종 훈장 및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상기한 친일부역에 관한 내용은 전혀 전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어린 시절 3.1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을 강조하거나,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했다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1] 한국일보 사옥 자리였다가 이 일대가 재개발이 되면서 현재는 트윈 트리 타워가 들어섰다. [2] 오늘날 상명학원 민정학원의 뿌리. [3] 이건 상명고등학교 재학생들 또한 비슷한 반응이다. [4] 고등학교와 거의 모든 시설을 같이 쓰는 상명중학교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