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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독교/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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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구성4. 역사
4.1. 과거4.2. 기독교 세력의 확대4.3. 반기독교 심리의 형성4.4. 인터넷 시대4.5. 분열4.6. 쇠락4.7. 코로나 사태4.8. 일상회복 이후
5. 기독교의 입장6. 관련 논문7. 같이 보기

1. 개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반기독교 감정 및 운동을 서술한 문서.

2. 상세

대한민국의 반기독교 역사는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유입 등 현대 이전의 반기독교 풍조. 그리고 개발독재시기 기독교의 과열경쟁으로 인해 심한 민폐를 끼친 개신교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생긴 90~00년대의 현대 초기의 반기독교 운동, 그리고 00년대 말에 리처드 도킨스의 영향을 받아 생긴 무신론 운동이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주로 사회적인 물의를 심각하게 많이 일으키는 개신교[1]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국내의 가톨릭 정교회는 이미지가 좋은 편인데, 해당 두 종파는 개신교에 비해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교회는 한국 내에서는 워낙 교세와 인지도가 낮아 그 존재를 아는 인구조차 극소수이며, 가톨릭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나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 정일우 사도 요한 신부처럼 존경할 만한 성직자들이 많고, 개신교와 달리 공격적인 전도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라서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에 대한 반발을 사회적 현상으로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대상은 이들 중 가장 광범위하게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개신교와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한국 반기독교 세력이 반대하는 개신교는 정치적, 교파적 차원을 떠나서 모든 개신교를 뜻한다. 초창기 반기독교 세력에 운동권이 들어간 것도 사실이었고, 전광훈의 정치적 난동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시국에서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BTJ열방센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등으로 인해 보수-극우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전국적으로 심해진건 사실이었지만[2], 애초에 '개독 박멸'을 기치로 내세운 강경파나 타 종교 반기독파의 입장에서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혐오를 이유로 모든 개신교가 타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굳이 그쪽이 아니더라도 모든 개신교가 정도는 달라도[3] 교회가 벌이는 흔한 적폐(헌금 강요, 과도한 전도, 문화에 대한 규제 등등)에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마찬가지였다.

한국 내의 기독교의 비중과 영향력이 상당히 큰 데다가 개독교 예수쟁이 문서에서 보듯 병크들의 수도 장난 아닌 만큼 기독교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 심지어 이 틈에 이보다 더 해괴한 논리를 가진 사이비 이단들이 끼어들어 집단 자살이나 교단의 지도자에게 성 상납을 강요하는 일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 데에다, 개신교계 이단 중 하나인 구원파가 운영하는 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해운 회사가 세월호 참사까지[4] 연계된 적 있다. 분명 이들은 개신교 내에서 메이저한 교단들이 인정하지 않는 일부 집단에 불과하지만, 개신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5] 이들을 단순히 일개 개신교 집단으로 알고 있기[6]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반개신교 정서가 널리 퍼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나 한국 인터넷에선 반기독교 정서가 퍼진 만큼 기독교를 비난하는 자료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개신교 외에 기독교 전체에 대한 반기독교 정서는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저지른 만행에 원인이 있으며, 이에 대해 외국의 기독교 비판 자료+반기독교 정서에 의한 잘못된 지식이 섞여서 기독교 전체를 싸잡아 잘못된 오류로 비난하는 사례도 많다.

3. 구성

어쨌든 기독교만 싫어하면 되는 반기독교 특성상 반기독교는 별의 별 인종들이 다 섞여있는데 민족주의 계열 좌파, 인본주의자, 세속주의적 리버럴, 무신론자, 국수주의자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타 종교 비방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일부 불교 유교, 그리고 증산 계통의 종교, 심지어 교단 기득권층에 반감이 심한 냉담자들[7], 일본 서브컬쳐의 영향을 받고 권위주의적인 기성세대에 반감을 가진 오타쿠들 중 상당수[8][9][10]까지 한 진영에 결합되어 있다.

다만 여러 단체가 집결된 만큼, 분쟁이 그만큼 자주 발생한다. 애초에 하나로 묶였다 해도 무신론자, 세속주의자와 불교, 증산계 종교, 냉담자 등은 서로 상극일 수 밖에 없다. 후술하겠지만 이쪽도 기독교처럼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있다.

4. 역사

4.1. 과거

조선시대에 가톨릭이 처음 유입되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이익의 제자들은 이를 수용하는 측과 이에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었는데, 안정복은 '천학문답'을 지어 내세론을 통해 전도하는 모습이 불교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였다. 숭유억불이 강고한 시대였던 조선 후기 유학자들은 불교를 어떻게 여겼는지 생각하자. 이후 제례 거부 등의 문제에 따른 정부의 박해와 지속적인 서양 세력의 위협( 신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드러났으며, '야소꾼', '야소쟁이' 등의 비칭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개화기 이후 서양 세력과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기독교(가톨릭/개신교 모두)의 확산은 더 널리 이루어졌고, 정부에서건 민간에서건 기독교에 대한 반응은 온건해진 편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가 도입되면서 이러한 국면은 전환점을 맞는다. 그러나 이 때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에 따라 '주적' 일본에 맞서기 위해 종교계와 공산주의 계열이 연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대표적인 것이 6.10 만세 운동), 공산주의적인 비판의 중점은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식민지적 사회 체제 전반이었기에 따로 부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광복 이후에는 북쪽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에서는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대성하던 기독교 세력을 포함한 모든 종교 세력이 전멸하였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안도 지역은 개신교도의 중심지였고,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 선천은 ' 고개 숙인 선천'이라고 할 정도의 지역이었다. 반면 남한에는 종교 탄압을 피해 월남한 이북의 개신교도들, 미국의 원조와 더불어 정치계와 야합속에 개신교가 급속도로 세력을 불렸다.

가톨릭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양지로 나오면서 세력을 불리다가 6.25전쟁과 민주화 운동 시기에 개신교와 어께를 나란히한 주류 종교로 발돋움했다. 여기서 4명의 추기경을 배출하고 1984년,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는 등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4.2. 기독교 세력의 확대

군사독재 정권을 중심으로 이뤄진 급격한 산업화는 전쟁 이후에 그 최소한의 형태만이라도 유지해오던 공동체마저도 유지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올 수 있는 노동자들의 모임,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운동 등은 아예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는데, 이 시대에 이뤄지는 정서적인 교감이나 지적인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은 어떤 것이 되었건 간에 정부가 나서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계모임이나 반상회와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이것이 정서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이것이 가능한 공동체를 찾게 되는데, 이때 대안으로 나온 것이 교회를 통해 이뤄지는 개신교 공동체였다.

이 당시 한국의 기독교의 신학적 연구는 구한말에 외국인 선교사가 들여왔던 상당히 정통적인 신앙이 주류였고, 일제강점기부터 금주, 금연운동 같은 권면 운동을 전개했었다. 하지만 70년대부터 신사고 운동이라는 이단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한 번영복음을 미국에서 들여오면서 모든 개신교가 상당히 기복화되었고, 이는 한국 사회의 세속적인 풍습과, 자본주의적 논리와 결부하여 기독교 종파가 빠르게 세를 확장해왔다. [11] 여기서 모든 개신교 종파가 밴치마킹하는 것이 바로 번영복음의 시초인 수정교회였는데, 크고 화려한 교회, 다양한 찬송, 편안한 예배를 중시하였고, 교회는 이것을 이루기 위해 소속 신도들에게 이웃 주민들을 향한 강압적인 전도를 요구했고 지속적으로 비싼 헌금을 강요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했던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자본을 개인이 소유하는 것에서 받게 되는 중압감, 즉 자유라는 중압감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자유 자체를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게 이양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일부 기독교 교파들이 막대한 자본을 얻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비교적 단순하고 명료한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오래된 종교들과는 달리 종교 개혁을 겪으면서 새롭게 태어난 종교이기 때문에 유연한 해석을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한국의 경우에는 도시화를 통해 부동산을 이용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해온 이른바 '졸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독재 정권에서도 이들을 견제할 이유가 없었던 데에다 이들 자신이 그 수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독재 정권이 이용해오던 논리를 그들 또한 따라하게 되면서 이들이 막대한 자금을 기부하는 개신교 교단 자체에서 이를 공식적인 입장으로서 표명하는 것조차 가능해졌던 것이다.

4.3. 반기독교 심리의 형성

민주화 이후 개발독재 시절에 개신교의 적폐가 여러가지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반기독교 심리가 점차 형성되기 시작했다.

각 마을 서낭당이나 무속 계열 문화재가 암묵적 동의에 의해 근대화 과정에서 훼손되었으며, 각 교회들이 앞장서 불상이나 단군상 등 기물 파손을 저지르기도 하였다.[12][13]

또한 표현의 자유가 확산되다보니 목회자가 가르치는 교리 자체의 모순에 대한 지적이 늘어났으며 주로 교리 특성 상 민족 문화나 타 종교에 대한 편협하고 배타적인 태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무분별한 전도, 기복적으로 변질된 신앙, 부모의 교회 출석 강요[14], 게임 및 만화 혐오[15] 등이 매스컴에 밝혀지고 대중들의 담화에 오르게 되면서 서서히 기독교와 서구 문화에 대한 반감이 사회에 조금씩 퍼져갔다. 이러한 반감은 개신교를 넘어 천주교와 정교회까지 확산되었다. 이것은 인터넷 문화가 확산되어 가면서 논쟁의 궤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일부 기독교도들과 목사들이 벌이는 추태와 범죄가 매스컴에 밝혀진 것도 반기독교 심리 형성에 결정타를 남기게 되었다.

4.4. 인터넷 시대

1990년대 말 PC통신의 토론 게시판,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게시판(ex. 하이텔 큰마을) 등에서 현대적 반기독교 여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여튼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들어 인터넷 문화가 급속도로 확장되고 홈페이지를 개인적으로 만들던 시절[16], 라이코스에서 '이안티'라는 HN을 쓰는 불교 신자 대학생이 만든 반기독교 사이트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서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지닌 인물들과 타 종교인들이 이 사이트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오프라인에 반기독교 행사도 벌어졌었다.

그리고 '서프알바'라는 네티즌이 서프라이즈 등 진보단체 사이트에서 낚시글 도배 방식으로 교회 비리 폭로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 다음'의 카페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위의 인물이 만들어낸 카페인 ' 클럽 안티 기독교'(이하 클안기)가 2000년 6월 19일 설립되고, 이후 인원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이후 '십자 불꺼', '검은 십자가', '안티 예수', '기독교 비평' 등의 클안기에서 분가한 반기독교 사이트가 생겨났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유명한 곳은 클안기였고, 자체적으로 개설된 반기독교 카페도 클안기의 영향에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이들도 나름대로 오프라인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각 카페에서 교류도 나름 활발하였다. 결국 클안기에서 『우리는 왜 기독교를 반대하는가(2003)』라는 책까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클안기 등 몇몇 카페는 아무리 흥해도 카페라는 구조상 제약이 있는 고로, 좀 더 활발한 반기독교 운동을 위하여 독립적인 사이트 개설이 필요했다. 그래서 원래 클안기에서 벗어난 반기독교 사이트인 '개독교 박멸을 위한 시민연대'와 클안기가 협력해서 하나의 대형 사이트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반기독교시민연합(이하 반기련)이다.

초창기 안티 단체들은 단순한 논쟁과 기독교에 대한 비난만을 하는 단체였고, 또한 이안티가 이후 클럽 안티 기독교에서 탈퇴하고 안티 기독교 활동을 접은 이후로 어느 정도 표류를 하는가 했으나, 2003년 9월 러셀, 옹기쟁이, 꽹과리 등 네임드 안티들이 클안기의 한계를 벗어나고 안티 기독교 운동이 시민운동으로서 나아가겠다는 목적으로 반기련을 창설한다.

마침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오강남 교수의 저서 『예수는 없다(2001)』를 통하여 출판에 대한 영감을 받은 이들은 반기독교 서적의 번역 작업 및 프로메테우스가 시도하고 있던 성서무오설 비판까지 더하여 학술적인 반기독교로 발전하게 되고 '바이블 19금 제정 서명운동' 등의 활동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한국 개신교 비판 일부를 인용한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은, 오 교수는 캐나다에서 비교종교학 교수로 불교를 서양인에게 가르치는 교수이지만, 정작 독실한 개신교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에게서 나온 기독교 비판에 대해서 문구 몇개를 짜집기해서 기독교(개신교)는 자정 능력이 없다고 선동하는 셈이다. 더군다나 오 교수의 이 책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내부의 개혁과 성찰을 촉구하는 거지, 반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기독교 박멸'과 같은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과 새로 유입된 반기독교 성향의 사람들의 시민운동주의 성향이 맞닿아 결국 반기독교 사진전과 출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가 직접적으로 반기독교에 대해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 뉴스앤조이를 제외한) 국민일보와 같은 기독교 계열 신문에서 반기독교가 위험하다고 성토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4.5. 분열

이렇듯 무섭게 성장하던 반기련이었으나 사람 모이는 곳에 갈등과 분열이 있는 건 반기독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5년 10월에 벌어진 일명 '영자의 난'이 대표적이다.

2005년 5월 28일 반기련은 중앙사무실을 경기도 연천군에 개소했다. 보다 확실한 반기독교 운동을 위한다는 목적이었다. 고사의식을 통한 거창한 사무실 개소식도 하였고, 당시 반기련의 서버 운영자였던 '옹기쟁이'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제출하고 유급 사역자로 연천 사무실에 상주했다. 이른바 '직업 안티'를 만들겠다는 심산이었다.[17] 하지만 반 년도 못 되어 각종 돈 문제와 관계자들 간의 오해와 비난이 얽혀 갈등이 엄청나게 커졌고, 결국 반기련의 네임드인 문학비평, 러셀, 옹기쟁이, 이드, 광복군, 인즉신 등이 탈퇴하여 2005년 10월 종비련(종교비판자유실현시민연대)을 창설하였다. 종비련은 반기련의 교조주의적인 안티 활동을 비판하며 자신들은 합리적인 종교 개혁 운동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첫 번째 활동으로 종교인 납세 운동(주로 개신교회를 겨냥한)을 전개하였다.

당연히 반기련에 남은 사람들은 이들을 배신자, 변절자라 부르며 욕했고, 탈퇴한 종비련 소속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정당성을 변호하며 한동안 추잡한 싸움이 이어졌다. 반기련 측에서 특히 문제삼은 것은 종비련이 '기독교 박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타협을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종비련 측은 여전히 자신들의 목적은 기독교의 박멸이라 주장하며 반기련 회원들의 저열함을 탓했다. 중도에 선 사람들이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한 끝에 그럭저럭 갈등은 봉합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또 종비련 내부에서 운영과 금전상의 문제가 얽혀 핵심인물이었던 '이드'가 후원 그룹을 데리고 이탈하여 2007년 종추련(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을 창립하였다. 창립자가 빠져나간 종비련은 속 빈 강정이 되어 추동력을 잃고 명맥만 유지하다가 얼마 안 가 사라져버렸고, 종추련 또한 2011년 종감련(종교권력감시 시민연대)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몇 번의 활동 끝에 수명이 다 되어 사라져버렸다.

반기련도 내부적으로 평온하지 못했다. 2005년의 혼란을 간신히 수습하고 그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2007년에는 서버 관리자인 '유령'이 자신이 운영하던 반기련 서버를 해킹하고 반기련을 떠나는 대형 사건이 터졌다. 영문을 모르는 회원들은 반기련 사이트가 접속이 되지 않자 '기독교인의 소행이다, 정부의 짓이다' 등등 음모론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임시 사이트를 만들고 비상대책위원회가 조직되어 간신히 복구에 성공한 뒤 알아본 결과, 사건의 원인은 유령과 반기련 집행부의 일부 회원과의 갈등 과정에서 잡음이 심해진 것이었다. 반기련은 또 내부에서는 유령을 두둔하는 쪽과, 비난하는 쪽의 논쟁으로 패가 갈려 몸살을 앓아야 했다.

4.6. 쇠락

여러 번의 분열과 네임드 회원 다수의 탈퇴로 인해 반기련은 2010년대부터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물론 국내의 반기독교 세력 중에는 가장 크고 강성한 단체였지만, 분열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리처드 도킨스로 인해 촉발된 무신론 운동이 국내에서 반기독교의 자리를 대신하며 기존 반기독교 단체들의 지분을 빼앗아버렸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반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보다 논할 것도 많고, 반기독교 성향은 아니었던 사람들 역시 상당수가 뭔가 '그럴 듯해' 보이는 무신론 쪽으로 거처를 옮겼고,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 또한 무신론 쪽에 많은 실정이다.

기독교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한 기독교 비판층과 기독교 박멸을 주장하는 극렬 반기독교주의가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인 건 지금도 마찬가지며, 기독교 박멸을 기치로 내세운 비이성적 극렬 안티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온건한 기독교 비판층까지 기독교와 동일시한다. 단지 현재에 와서 이런 내적 갈등이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극렬 안티가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득세하고, 온건 비판층은 그런 극렬 안티의 등쌀을 못 이겨 반기독교 활동을 접거나 조용히 활동하기 때문이다. 국내에 개념 있는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조용히 신앙 생활을 하기 때문에 티가 안 나는 반면, 극성맞은 신자들이 항상 문제를 일으켜서 튀는 것과 비슷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국내의 무신론 활동들도 반기독교적 성향이 강하다. 역시 2000년대 후반 들어 시작된 한국의 본격적인 무신론 운동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서구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도킨스로 대표되는 무신론자들은 일명 '신무신론(新無神論)'이라 불리며 <종교는 쉽게 용인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가 그 영향을 끼치는 곳에서는 반드시 반박되고, 비판되고, 합리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내세운다. 그리고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 의해 그들이 주로 타겟으로 삼는 종교는 당연히 기독교다. 즉, 기독교 자체도 외국에서 들어왔지만, 그에 대한 반론들도 외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국내의 무신론 활동은 태생적으로 기독교를 주 대상으로 하며, 무신론 그 자체보다는 반기독교 성향이 강하다.

그 때문에 국내의 초기 무신론 활동들이 반기독교 운동에서 받은 영향들도 상당하다. 반기독교 운동에서 활용해온 자료들이나 논거들도 대부분 외국에서 받아들여온 것인데 무신론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반기독교 운동 측에서 쌓아놓은 자료들을 많이 가져다가 활용하기 좋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무신론 활동 초기에는 서로 주고받은 영향이 상당히 크다.[18]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서로 다투기도 하는 등, 분열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이는 딱히 우열의 문제나 한쪽의 병크라기 보다는 위에서 언급할 '분열' 항목처럼 의견의 차이 때문이다. 애초에 반기독교 vs 무신론이 아니라, 무신론 내부에서도 항상 이와 유사한 분열들은 있었다. 게다가 한국 내 반기독교 운동 구도 자체가 서구식 강경 세속주의 및 무신론 vs 불교, 증산도 등 동양계 종교에 기반을 둔 반기독교주의로 애시당초 서로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반기련은 몇 년 동안 지속된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2021년 2월 문을 닫았고, 클안기는 아직 남아있지만 회원수 6천에 활동회원은 20여명에 불과하여 1만에 달했던 회원수와 수백명의 활동회원을 거느렸던 전성기에 비해 크게 쇠퇴했다.

4.7. 코로나 사태

2020년 벽두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반기독교 특히나 반개신교 정서가 국민적으로 보편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태 초기에 개신교 계통의 이단교회가 대규모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에 대한 국민적 비난 여론이 매우 높아졌다. 하지만 개신교 교회들이 정부에서 권장한 비대면 예배보다 직접 대면예배방식을 고집하여 2, 3차 유행에서는 기성 교회, 기도원, 신학교 등 한국 기성교회 전체가 대규모 집단감염의 진원지로 드러나는 사례가 매우 빈번하게 나왔다. 또한 현 민주당 정부에 적대적인 극우 성향의 기독교 교단이나 반정부적 목사나 극우 신도들이 정부의 코로나 방역에 극도로 비협조적이어서 방역을 무시하거나 방해하기도 했다. 급기야 2020년 8월 대한민국 전체를 코로나로 마비시킨 전광훈과 관련된 기사에는 네이버를 중심으로 그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추정되는 네티즌들이 전광훈을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자이자 하나님의 선지자라며 추켜올리는 댓글을 올려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 결과 한국 전체의 특히 수도권의 코로나 확산의 절반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개신교 교회와 관련된 사례로 드러났다. 특히 교회발 확산은 한 번에 수십 수백 명의 집단적 감염이 많아 크게 보도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천주교나 불교 등 타 종교 집단에서는 그러한 집단 확산의 사례가 거의 나오지 않아 일반 서민들에게 개신교회가 곧 코로나 확산의 진원지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러자 일반 서민들이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한탄이나 짜증을 넘어 적개심을 표시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한국 개신교 교회가 코로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는 도중에도 대면예배를 계속 고집하고 대면 예배제한 등 방역조치를 종교 탄압, 교회 탄압이라고 정부를 비난하며, 헌법도 제대로 모르고 무조건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는 등 미숙하다 못해 이기적인 대처로 인해, 개신교 교회는 한국의 사회의 집단공동체 윤리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반사회적 집단이라는 부정적 인상을 강하게 심었다. 그로 인해 개신교 신앙 일반과 교회 및 신자들에 대한 서민들의 여론이나 평판이 한국 사회에서 크게 악화되었고 반기독교 정서가 서민들에게 보편화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자영업자나 서민들의 경제적 금전적 피해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개신교회가 대면 집단예배를 강경하게 고수하는 이유가 헌금 등 금전상의 이유로 인식되었다. 물론 개신 교회가 커뮤니티적 기능도 굉장히 커서 이를 핑계로 여는 경우도 있지만[19] 애초에 비상시국에 사람끼리 몰려다니는게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결국 사태를 유도리있게 판단한 개신교회나, 시국을 안일하게 바라보고 현 상태를 유지하던 목사들은 매우 이기적이고 주님이 아닌 돈을 숭배하는 사악한 반사회적 비협조적 비도덕적 집단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일어난 독실한 개신교인이자 목회자 자녀인[20] 부부에 의한 비인간적인 양천구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으로 개신교인들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해 개신교에 대한 공격이 잦아지고,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의 교회에 대한 처신을 질타하는 의견이 점점 늘어나는 등 기존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1년 들어서는 교회의 집단 감염 사례 보도 기사에 순식간에 수백 개의 개신교/교인에 대한 혐오나 강한 욕설의 댓글이 넘치고 수천개의 추천이 달리는 등 일반 악플러들도 이러한 증오의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 질타의 대상도 넓어졌는데, 안 그래도 안 좋던 인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빠져 초기에는 일부 이단 교단에 대한 질타에서 시작해 그게 기성 개신교 교회나 보수와 NCCK를 가리지 않고, 개신교 신자 전체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개신교 신자인 정치인과 유명인, 아이돌과 걸그룹의 홈페이지까지 무자비한 테러를 가하고 있고, 최근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나타났다. 더구나 코로나 백신접종이 시작되자 극우성향 개신교회가 백신유해론 벽보 부착 등 조직적으로 음모론을 유포하는 # 작태를 보이면서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적대감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강해졌다. 이런 적대감은 대상이 거의 한국 개신교의 교회, 목사, 개신교 신자들에게, 특히 대면 집단예배 행위에 집중되어 있지 딱히 기독교 일반이나 신앙행위에 대한 혐오는 아니었다. 중앙 집권적으로 명령에 통제되어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는 느낌을 주는 가톨릭에 대한 공격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래서 기존의 기독교 증오는 타종교인과 무신론자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한 기독교 증오를 이용한 반기독교 악플러들의 선동으로 인해 이제는 기독교 일반이나 신앙행위 자체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이런 사상과 무관한 시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윤은혜 간증 영상에 대해 논란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

2021년 이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32% 가량이던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21%로 급감하며, 20% 가량인 개신교인을 제외하면 한국교회를 신뢰하는 일반국민은 사실상 없다고 할 정도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 기사 댓글에서 악플러들이 얼마나 개신교의 이기심과 만행에 치를 떨고 개신교를 혐오하는지 여론을 가감없이 읽을 수 있다.

2021년 연말에 오미크론 변이 최초 확진자가 인천 숭의교회 목사 부부인데[21], 코로나19 시국에 선교하려 나이지리아 다녀왔던 것에서 비판이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방역당국을 무시하고, 동선을 속이고 80여명을 만났다는 점에서 한동안 잠잠했던 서민들의 반개신교 감정이 다시 부활하였다.

4.8. 일상회복 이후

2022~2023년부터 거리두기가 해제되어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고 기독교 관련 사고도 줄어들자 반기독교 여론도 코로나 때보다는 줄어들었다.

5. 기독교의 입장

개신교 교세가 위풍당당하기만 하던 과거에는 반개신교 세력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세대가 바뀌면서 종교 자체가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고, 코로나로 반개신교 분위기가 전국민적 규모로 번지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단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만큼 대책과 자정의 목소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그냥 피식 비웃으며 넘기는 듯. 반기련 대부분은 타 종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신앙 생활을 하다 교회로부터 상처 받고 교회를 등진 사람들이니[22] 이해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 하지만 반기독교 운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오직 종교적 믿음으로 인한 도덕성 회복만 유일한 답이라고 내놓는가 하면, #, #, # 오히려 반기독교계가 극단성으로 치달은 점만 지적하고 있다. #, # 아예 자신의 교리와 사상에 맞지 않는 것을 반기독교라 모는 등 해당 단어에 대한 오용과 왜곡이 심하다. #, #, #
물론 기독교 박멸 외쳐대는 반기독교와는 타협이 불가능하지만, 기독교 개선에 뜻을 내세운 정상적인 비판층과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반기독교 여론이 증폭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인 무분별한 전도와 시스템적 문제, 기독교 근본주의(특히 복음주의) 노선에 대한 해결책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6. 관련 논문


7. 같이 보기



[1] 한국의 근본주의 개신교의 기원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남부의 극보수주의 및 복음주의 성향 개신교가 한반도로 유입된 것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6.25전쟁,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기복신앙 및 변질된 유교적 전통, 일제강점기 당시에 유입된 일본의 악폐습과 습합된 다음 부정적인 방향으로 토착화 된 것이 기원이다. [2] 애초에 IM선교회 진주국제기도원은 기독교 우파와 상관이 없는 단체다. [3] 그 정도래봤자 땅밟기나 사원 훼손, 폭행 따위 중범죄를 저지르냐 안 저지르냐 차이다. [4] 구원파는 일개 사이비 종교로, 기독교계에서도 무척 경계한다. [5] 대부분의 국민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인까지 기독교의 계파 구분을 대강적으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6] 문제는 주요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규정을 해도 개신교에 대해 악의를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저 공격하려고만 든다. 이들 사이에선 개신교에 대한 불신이 이미 팽배한 상황이라 '또 일부 이단 드립이냐?' 내지는 '사이비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개신교의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같은 반응 외엔 보여줄 수 있는 게 없다. [7] 흔히 반기독교 커뮤니티에서 성서비평학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성경무오설을 까는 유저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과 성향에 맞게 성서비평학을 허용하는 진보성향 교회를 찾아서 가면 될 것을 굳이 냉담자가 된 이유는 그런 교회도 헌금 강요나 강압적인 전도 등 개신교 사회의 적폐행위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뿐더러, 혹은 이런 냉담자들도 일부는 정치적으로 극좌성향이나 음모론에 물들어 있는 등 개인적으로 문제가 많다. [8] 일본 대중문화의 경우 신토와 일부 불교를 제외한 타 종교(사실상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 대한 묘사는 매우 타자화되어있다. 일본 서브컬쳐에서 신토의 경우 실제 신토에 비해 왜곡되는 경향이 있더라도 친근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불교도 일본 역사상에 나타난 신토와 불교간 애증관계(?)와 전국시대 때 군벌화된 승려가 난립하거나 그중 일부가 집권층에 반항한 역사 등으로 인해 타자화 및 부정적 묘사가 간혹 있긴 하나 그래도 일본의 대중적 종교니만큼 타자화는 많이 되지 않는다. 반면, 기독교의 경우 중립적 이상으로 묘사한다해도 판타지스럽거나 비교적 세속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나쁘게는 에도시대 기독교 탄압 및 악마화된 당시 사회분위기의 영향으로 인해 (이에 대해서는 시마바라의 난,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 마계전생 문서를 참조) 악당이나 안티 히로익 팩션처럼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9] 반기독교 인구가 늘어난 것에서 오덕을 좋지 않게 보는 일각에서는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개념(정확히는 유대교 밀교에 관련된 것들)들이 많이 차용된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 일본 서브컬쳐의 영향도 한몫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고 실제로 2000년대 중반 종교 갤러리에서도 어느 몽골스러운 닉네임 혹은 그 이명으로 알려진 한 갤러가, '반기독교 중에 일본문화 영향받은 씹덕들이 많다'는 식의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갤러는 정작 환빠 내지 증산도인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10] 한국쪽 얘기는 아니지만, 이런 현상(?)과 관련해 신이교주의(정확히는 북유럽 신화쪽), 반기독교를 포함한 반아브라함계 종교 성향, 네오 나치 바르그 비케르네스는 혐일 (정황상 Weeb까지 까는) 발언을 하면서 '일본의 경우 (토착종교 신토는) 반기독교- 신이교주의 대안이 될 수 없다'라는 주장을 한 바가 있다. [11] 흔히 한국 사회의 민속 신앙과 결부하였다는 말은 조용기 목사의 방언을 중시하는 교풍 때문이다. 원래 순복음교회가 속한 오순절교회가 방언을 중요시한다. [12] 대표적으로 불교계에서는 개신교인에 의한 사찰 방화가 이어지자 이를 중단하라고 성명을 내기도 했다. # [13] 단군상 파괴를 문화재 파괴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으나, 일선 학교에 놓인 단군상은 현대에 만든 것이라서 문화재로의 가치가 없다. 하지만 법적으로 무단침입죄와 손괴죄에 해당한다. [14] 모태신앙인 아이들이 이러한 성향이 심하다. 친구에 의해 전도된 아이들, 어릴 때부터 구원의 확신이 있어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과는 달리 모태신앙인 아이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부모의 손에 의해 교회에 강제로 끌려가다시피해 왔기 때문이다. [15] 90년대부터 기독교 집안에서는 디즈니 만화동산 등의 만화류를 혐오했는데, 이로 인해 자녀들은 만화를 못보게 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품고 적대적 성향이 된 경우가 많다. 이는 일제시대때 금주, 금연으로 대표되는 권면 사상에서 비롯되었지만, '물욕을 아끼고 선행에 보태라'라는 원래 권면 사상과 거리가 멀고 단순히 '놀 시간에 공부하라', '놀 시간에 성경 읽으라'는 목적이기 때문에 상당히 왜곡된 행위다. [16]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기에 서울 지하철 7호선 강남구간 개통을 계기로 이수역 역명을 둘러싼 총신대학교의 발악이 이슈화되었는데, 가정에도 인터넷이 널리 깔리고 인터넷 카페 문화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이 시기에 한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일으킨 이 논란은 대한민국에서 반개신교 정서에 불씨를 지폈다. [17] 그런데 의식 행사에 돼지머리를 제수로 놓고 고사를 지낸 게 당시 기독교 측에서 뿐만 아니라 안티 측에서도 논란이 되었었다. 기독교 측에서는 "무신론자인 척 하면서 우상숭배냐"고 비웃었고, 안티 측에서는 "돈 벌려고 안티하냐"고 비아냥거렸다. [18] 그 때문에 본 항목에 나와있는 반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이름만 살짝 바꾸면 대부분 무신론 진영에도 적용된다.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래도 무신론자들이라 기독교 빼고 다른 종교는 괜찮다는 이중잣대는 부리지 않으며, 애초에 무신론 운동으로 넘어온 안티 기독교 진영이었던 사람은 죄다 과격파(타 종교인)의 등쌀에 못 이겨서 나온 온건파들이었다. [19] 특히 고령층들이 사람 만나는 데 종교집단만큼 쉽고 간편한 곳이 없다. 산업화세대부터 586 민주화 세대까지 교인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인맥을 쉽게 이루었다. 더욱이 고령층들은 청장년층에 비해 전자기기 사용이 서투르고 소외감이 강해, 대면 관계를 더욱 고집하는 성향이 강하다. [20] 남편 안성은은 침례교 목사의 아들, 아내 장하영 장로교 목사의 딸 [21] 외국인 신자들을 담당하는 부목사 [22] 특히 반기독교인이 되면서 무신론자나 반신론자가 되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어쩌면 특히 반신론에 가까워진 경우. [23]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시키고 기성 교회를 비난하기 위해 한국의 반기독교 여론을 체리피킹한다. 예를들면 전광훈 목사 관련이라거나 주요 개신교단의 친일 문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