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4-16 05:12:16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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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
غازی مصطفى كمال[2] | Mustafa Kemal Atatürk
파일:Ataturk1930s.jpg
출생 1881년 5월 19일
오스만 제국 셀랴니크 빌라예트[3] 셀랴니크[4]
사망 1938년 11월 10일 (향년 57세)
터키 공화국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23년 10월 29일 ~ 1938년 11월 10일
서명 파일: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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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0a17><colcolor=#fff> 부모 <colcolor=#373a3c,#ddd>(부) 알리 르자 에펜디
(모) 쥐베이데 하늠
친척 3명
배우자 라티페 우샤키 (결혼:1923 이혼:1925)
자녀 친자녀 없음, 양녀 7명, 양자 1명
학력 마나스트르 군사 고등학교 (졸업) (1896-1899년)
오스만 제국 육군사관학교 (학사) (1899-1902년)
오스만 제국 군사참모대학 (석사) (1902-1904년)[5]
직업 정치인, 육군 장교, 혁명가, 작가
경력 오스만 제국 5군 사령부 상위
동부 루멜리아 오스만 제국 철도 감독관 (1908년)
오스만 제국군 지휘관 (1912년)
오스만 제국 육군 사령관 (1918년)
터키 대국민회의 국회의장 (1920년 – 1923년)
터키 대국민회의 총리 (1920년 – 1921년)
공화인민당 대표 (1923년 – 1938년)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 1923년 10월 29일 1938년 11월 10일, 15년 205일)
병역 오스만 제국 소장
터키군 원수
종교 이슬람교 ( 수니파, 세속주의)[6]
신체 174cm, 74kg ~ 76kg
최종 당적
[[공화인민당|]]
}}}}}}}}} ||
파일:Mustafa_Kemal_Atatürk.jp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장교 시절2.3. 터키 독립전쟁2.4. 엔베르와의 갈등2.5. 터키의 초대 대통령 / 서구화 개혁2.6. 터키어 문자 개혁2.7. 국제 정세 식견2.8. 가정사2.9. 죽음
3. 터키인들의 존경
3.1. 아타튀르크 모독죄
4. 비판
4.1. 강경 진압4.2. 탈아입구적 사상4.3. 급진적인 근대 민족국가 추진의 후유증
5. 이름에 관한 정보6. 서명7. 무덤8. 여담9. 매체에서10. 어록
10.1. 연설영상

[clearfix]

1. 개요

파일:무스타파 케말.jpg
حاكيمييت بيلآ كايدو شارت ميللتيندير
Hâkimiyet, bilâ kaydü şart Milletindir.
주권은 제한없이 조건없이 국민의 것이다.
[7][8]
오스만 제국 육군 장군이자 갈리폴리 전투 터키 독립전쟁의 참전영웅으로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9]이다. 그의 성씨인 아타튀르크는 '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지는 이름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현대 터키의 국부로 칭송되고 있다.

특히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오스만 제국 출신임에도 정교분리, 세속주의를 추구했으며,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구화를 단행하였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터키는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세속주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법체계 면에서도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아닌 대륙법을 따르는 공화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학자들이 철천지 원수로 인식하는 대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10] 외교에 있어서도 국제정세를 잘 이해하고 잘 행동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2. 생애

2.1. 유년기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인 셀랴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난 집은 당시 아타튀르크의 부모가 집주인은 아니고, 세관공무원인 알리 르자 에펜디가 이슬람 호자였던 집주인 압둘라 아아와 20년 임차계약으로 세를 내서 살고 있었는데 현재 주소는 아야 디미트리아 동 아포스톨로스 파블로스 거리 17번지에 위치해 있다. 오스만 제국 당시에는 튀르크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으며, 현재에도 이 거리 끝에 터키 영사관이 위치해 있다.

아타튀르크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1912년 발칸 전쟁 당시 셀랴니크가 그리스에 점령되는 와중에 당시의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아타튀르크의 호적 또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타튀르크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의 호적에는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로 "중간키, 푸른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이다."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 라고 되어있다.[11] 하지만 아타튀르크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 스스로는 아타튀르크를 낳을 당시 날씨가 무더웠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현재로썬 아타튀르크의 주장인 1881년 5월 19일이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당장 한국에서도 중장년층 이상의 경우엔 출생신고를 늦게해서 실제 생일과 호적상 생일이 불일치 하는 경우는 종종 찾아볼수 있다.

아타튀르크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종교적이고 가정적인 전근대적 여성이었지만,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당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여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아타튀르크는 어릴적부터 지도력있고 똑똑하고 고집센 성격이었다고 한다. 아타튀르크는 회고록에서 셀랴니크에 처음으로 가스등이 들어오던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밤나들이를 나가며 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다고 회고하고있다. 유럽으로 향하는 국제항구이자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서구적인 지역이었던 셀랴니크의 풍토 또한 아타튀르크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사실 그는 푸른눈[12], 하얀 피부, 그리스 지역 출생으로 정말 전통적인 동양계 튀르크족의 외모와는 거리가 있고 순혈 튀르크인이 아니라는 혼혈 논란도 있었다. 아타튀르크도 생전에 그 점을 인정했으나 워낙 다인종이 섞인 터키의 특성상 터키인을 "터키어를 쓰고 터키 문화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정의했고 평생 터키를 위해 살았다.[13]

2.2. 장교 시절

7살때 아버지인 알리 르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라그프 베이(Ragıp bey)라는 무역상과 재혼했다. 라그프는 무스타파와 누이동생인 마크불레에게 잘 대해줬지만 그는 자신이 일하는 무역업체에서 후계자처럼 따르길 바랐고 군인이 되려던 무스타파와 충돌을 빚었다. 결국 부모에게 아무 말없이 1893년 육군유년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자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3년 뒤에 육군군사고등학교로 들어가서 공부했고[14] 육군사관학교를 거쳤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이미 1826년에 구시대의 상징적 군대였던 예니체리가 해체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상태로,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유럽의 군사제도를 도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1880년대와 90년대에는 오스만과 친밀하던 독일 육군사령관 콜마어 폰데어골츠 남작(Wilhelm Leopold Colmar Freiherr von der Goltz, 1843–1916)에 의해 오스만의 군사제도가 재정비된 상태였고, 아타튀르크는 운 좋게 당대 최고의 군사강국인 독일식의 군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대 중 한 명이었다. 훗날 아타튀르크가 유럽식 근대화를 강하게 추진한 것은 이 시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타튀르크가 육군 소위로 임관된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꽤 늦게 장교로 임관했던 이유는 1902년에 소위로 임관될 것을 마다하고 다시 왕립육군사관학교에서 전문사관학교를 재학하면서 더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임관은 늦었지만 재학생 및 성적 우수 특혜로 곧 중위로 진급했다. 아타튀르크가 공부했던 왕립육군사관학교(Mekteb-i Harbiye-i Şahane)는 현재 무진장 화려하고 다채로운 컬랙션을 자랑하는 터키 군사박물관이 되어 있으며 아타튀르크가 수업했던 교실도 보존되어 있다.

파일:Harbiye-Askeri-Müzesi.jpg
왕립육군사관학교에서 아타튀르크가 수업했던 교실의 모습. 맨 앞에 앉은 아타튀르크의 상 옆에 앉아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파일:external/www.veataturk.com/mustafakemal_annesi_kizkardesi(makbule).jpg
아타튀르크의 소위 임관 당시 기념으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아타튀르크의 여동생 마크불레, 어머니 쥐베이데 하늠, 오른쪽이 청년기의 아타튀르크이다.

시리아 주둔 부대로 들어갔던 아타튀르크는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서 보수적인 상관들에게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조국과 자유(Vatan ve Hürriyet)'라는 비밀 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보수정책 (범이슬람주의 및 전제군주정)에 반대하는 젊은 군인들이 대거 가입했는데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도 여기 가입하여 알게 된다. 1908년에 대위로 진급하였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령인 리비아 주둔 부대로 전속되었고 1910년에 리비아로 쳐들어온 이탈리아 왕국군과 오스만 제국군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소령으로 진급한 아타튀르크는 1911년 리비아 투브루크 전투에서 2백 명의 오스만 군을 거느리고 2천 명이 넘는 이탈리아군을 물리치면서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리비아를 넘겨주고 전쟁을 끝내자 아타튀르크는 분노했다. 곧이어 터진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1913년 불가리아 왕국군을 물리쳤고 이 공로로 중령까지 진급했다. 아타튀르크는 1914년 불가리아 주둔 주재무관으로 임명되어 불가리아에서 지내게 되었다.

리비아 주둔 시절 당시의 일화가 있다. 아타튀르크가 셀랴니크 출신의 고향친구들과 함께 시장을 거닐던 중 한 집시 점쟁이가 아타튀르크의 관상을 보더니 "당신은 파디샤가 될 것이다. 그리고 15년 동안 통치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타튀르크는 이 말을 듣고, "그래 15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이군요." 하면서 웃어 넘기고 고향친구들은 "어디로 모실깝쇼 폐하?" 하면서 장난을 쳤다고. 대신 공화정의 대통령이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taturk4.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eni%C3%A7eri_Atat%C3%BCrk.jpg
리비아 주둔 시절에 현지인 차림을 한 모습 (1911년) 소피아 주재무관 시절에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파티에 나갔을 때 찍은 사진 (1914년)


아타튀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 참전하고 아타튀르크도 어쩔 수 없이 전선에 나선다. 대령으로 진급한 아타튀르크는 영국군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려고 하자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전공을 세우고 군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 공로로 장군이 되었다.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1차 세계 대전 최악의 작전 중 하나로 꼽히며, 영국군은 대규모의 함대와 병력을 투입하고도 피해가 막심했다.


1차 대전 당시 무스타파 케말의 칼라 복원 영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urkish_trenches_at_Gallipoli.jpg
갈리폴리 전투에서 전선을 시찰하는 모습 (1915년)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오늘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준장이 된 그는 에디르네 방어전에서 협상국을 막아내면서 소장으로 진급했고 캅카스 전역에서 러시아 제국군을 물리치면서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겨우 3년에 쾌속진급으로 36살 나이로 오스만 제국 육군 7 군단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다른 전선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계속 밀려났고 결국 1차 대전은 패배로 끝나게 된다.

2.3. 터키 독립전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터키 독립전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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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이 끝나고, 협상국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협상국은 세브르 조약을 맺어서 수도 코스탄티니예와 그 주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그리스가 소아시아로 진군해왔기 때문에 터키는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당시 야사로 영국 육군 장교들과의 에피소드가 있다. 코스탄티니예를 점령한 영국 육군 장교들이 한 호텔에서 술을 마시는데, 케말을 보고 자신들의 테이블로 와서 한 잔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케말은 "이곳(코스탄티니예)은 우리 땅이오. 그러니 당신들이 내 테이블로 와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에펜디 중장은 술탄의 명령으로 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삼순(Samsun)항으로 오게 된다. 아타튀르크가 맡은 임무는 술탄에게 거역하며 소규모적인 저항을 벌이던 군대 진압 및 민족주의 단체 해산이었다. 그러나 삼순에 도착한 아타튀르크는 되려 휘하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려던 군대와 합류했다. 이 와중에 아타튀르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는 이스메트 이뇌뉘 대령[15]을 만나게 되면서 이뇌뉘도 합류하게 된다. 이래서인지 삼순시는 아예 도시 상징물이 말을 탄 아타튀르크 모습이며 연고지 축구팀인 삼순스포르 상징도 이걸 따르고 있다. 삼순은 아타튀르크 지지자에겐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한편 술탄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은 경악했다. 궐석재판을 열어서 케말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제국군 상부의 힘은 그를 잡을 힘도 없었고 여론과 많은 군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퉈 그에게 합류하기에 바뻤다. 7월 8일 그는 이제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 아닌 터키 민주공화국의 군인임을 선언했고 에르주룸(Erzurum)에서 공화국 대표자 회의를 가졌으며 8월에는 시와스(Sivas)에서 항전결의를 한다.

1920년 4월 23일(이날은 터키 공화국 건국기념일이다.) 케말 장군은 군사 요충지인 앙카라[16]에서 국민회의를 주최하고, 자신의 명성과 국민 정부의 명분을 바탕으로 군의 지지를 확보했다. 케말 장군은 우선 산발적인 전투로 소아시아 해안의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이에 시달린 그리스군은 케말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공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군의 역량 한도를 벗어나는 무리한 작전이었다.

당시 그리스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승리만을 추구하고자 무리한 작전을 고집했고 13만에 달하는 그리스군이 파병됐으나 무리하게 전선을 넓히면서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터키인들은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그의 뜻에 맞춰 많은 군대와 민병대가 손을 잡고 아르메니아 프랑스 같은 다른 점령군들과 전투를 벌였다. 한편 터키 동남부의 도시인 아이은탑(Ayıntab)에선 프랑스 육군이 1년이나 압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샤힌 베이(Şahin bey, 1877–1920)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가 11개월에 걸친 항쟁 끝에 자신들보다 12배가 많은 프랑스 육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고 보급책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프랑스 육군이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육군은 다시 장비와 병력을 새로 보강하여 여길 재공격했고 결국 압도적으로 밀린 상황(병력 수도 그렇고 무기와 총알도 부족했다)에서 샤힌 베이와 부하들은 모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가 군인이 아닌(젊은 시절 징병되어 사병으로 복무하긴 했다) 민간인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 케말은 아이은탑(이 동네 사투리로는 안텝이라고 불렸다)을 찬양하면서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가지(Gazi)를 붙여서 지금의 가지안텝시가 된다.

아르메니아군도 유수프 베야즈오을루(Yusuf Beyazoğlu, 1880–1956)가 이끄는 민병. 군부대에게 숫적 우세임에도 크게 밀려서 되려 아르메니아군이 민병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고 차례로 점령지를 다시 빼앗기고 물러나야 했다. 옛 아르메니아 수도 아니를 탈환하려던 아르메니아군은 베야즈오을루가 이끄는 부대에게 역습당해 2천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군이 죽었는데 당시 아르메니아군 군이 1만 6천 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피해는 엄청났다. 결국 아르메니아와 프랑스는 연전연패 속에 물러나야 했고 서쪽 카르스 지방을 지배하던 러시아군도 무사 캬즘 카라베키르(Musa Kâzım Karabekir, 1882–1948)가 이끄는 민병대와 군인들에게 고전하면서 오스만에서 물러서고 있었다. 결국 홀로 남아서 끈질기게 싸우던 게 바로 그리스군이었다. 이렇게 다른 부대가 맹활약한 가운데 케말은 그리스군과 총력을 다한 전투를 벌인다.

1921년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무려 3주일 동안 밤낮없이 양군이 계속 전투를 벌인 사카리아 전투(Sakarya savaşı)에서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케말은 그리스군을 물리쳤으며 이 패배로 많은 전사자[17]를 내고 사기도 떨어진 그리스는 차례로 점령지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런 연전연패 속에 협상국은 케말에게 전령을 보내 세브르 조약을 재수정하여 코스탄티니예와 타우르스 산맥 사이의 아시아 터키를 보장할 테니 군대를 물러나게 하라고 했으나 당연히 케말은 씹었다. 그는 전령에게 세브르 조약의 전면 무효가 아니라면 제의 같은 건 집어치우라고 일갈한다.

1922년 8월 30일 퀴타햐(Kütahya) 근처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그리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다.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Νικόλαος Τρικούπης, 1869–1956) 중장이 이끄는 그리스군 19만 6천 명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18만 군 및 민병대가 맞붙은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2300여 명이 전사한 반면에 그리스군은 1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2천 명이 넘는 실종자를 내고 압도적으로 패한다. 이날은 터키에서 '승리의 날(Zafer bayramı)'이라 불리며 한국의 광복절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국경일[18]이다. 이후 국민회의군은 퇴각하는 그리스군을 추격한 끝에 그리스군의 본거지인 이즈미르 근처까지 진격한다. 9월 이즈미르에서 거주하던 튀르크인들이 대거 저항하면서 그리스계와 튀르크계의 충돌이 벌어졌고 그리스군의 학살로 많은 튀르크인들이 학살당하자 케말과 이뇌뉘는 이걸 세계에 알린다. 이 학살로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점령은 정당성을 잃게 되었고 역습으로 오스만 전역에서 그리스계들이 보복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22년 11월 21일 스위스 로잔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고 이젠 케말 장군과 국민회의 측은 정당한 정부로서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게되었다. 더불어 케말 장군은 술탄을 추방했으며 오스만 제국을 무혈로 멸망시켰다.

로잔 회의가 열리면서 전투는 일시 휴전되었다. 세브르 조약 완전 무효를 요구하는 케말과 국민회의 측 주장에 그리스는 반발했으나 프랑스와 아르메니아는 받아들이면서 물러서려고 했고 영국과 러시아을 비롯한 다른 협상국도 전쟁을 지겨워하면서 오스만 내에서 물러날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리스는 트라브존을 비롯한 일부 지역으로 점령지를 줄인다고 물러났으나 케말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923년 2월 다시 전투를 재개한다. 이미 그리스군은 사기를 잃고 점령지를 겨우 지키거나 아니면 물러서는 소극적 자세로 나섰고 반대로 사기가 충천한 국민회의군은 계속 그리스군의 점령지를 하나둘 탈환했다. 결국 아나톨리아의 그리스군 거점이던 이즈미르를 탈환하고 그리스가 세브르 조약으로 얻은 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1923년 7월 24일 마침내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고 로잔 조약을 새롭게 맺으며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의 승리로 터키의 본토인 아나톨리아는 대부분 사수해 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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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24일에 발간된 타임지에 화제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19]

2.4. 엔베르와의 갈등

터키 공화국 건국 직전, 케말은 동갑내기 장교학교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엔베르는 튀르크인의 제국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야심에 젖어 있었고, 케말은 이걸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지금은 너무 위험하고 이르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나톨리아에서 다시 힘을 찾으면서 여기서 시작하자고 되려 엔베르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이번에는 엔베르가 거부하고 떠난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케말에 의하여 멸망하자, 엔베르는 러시아 내전이 한창이던 중앙아시아로 건너가 반러시아 이슬람 운동인 바스마치 운동(Басмачество)에 가담했으나, 오래가지 않아 그곳에 살던 튀르크인들과 갈등 속에 중앙아시아의 적화를 위해 남하해온 붉은 군대에 의해 사살되어 죽는다.

비록 케말도 민족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케말과 엔베르는 방향성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케말의 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터키를 근대적인 민족국가로서 만드는 것에서 한 발짝도 어긋난 적이 없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을 포함하는 식의 다양한 문화의 집단을 아우르는 제국은 내재적 동질성을 지닌 근대적 민족국가와는 상충하는 것이었으므로 터키인들의 국가라는 케말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케말의 외교정책은 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하고 2차 세계 대전의 참전도 거부하는 등 터키가 전쟁이나 외부의 간섭으로 국가 형성에 방해받는 사태를 방지하는 것을 지향했으므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분쟁을 야기하고 러시아 등의 반발로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수 있는 정책에 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지야 괵알프(Ziya Gökalp)[20]가 제시하고 아타튀르크가 수용한 튀르크 민족주의는 "터키 땅에서 터키어를 사용하고, 터키 문화 속에서 생활하며, 본인을 터키인이라고 받아들이는 모든 남녀노소는 피부색, 인종,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튀르크인이다"이다. 독일식 배타적 민족주의사상을 수용한 엔베르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21]

2.5. 터키의 초대 대통령 / 서구화 개혁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 수립과 같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새로 성립된 터키 공화국에서 케말은 공화인민당을 창당하고[22], 강력한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1300여년간 지속된 칼리파 제도를 없앴고, 미국인 교육개혁자인 존 듀이를 초빙해 자문을 얻고 여성교육 및 근대교육 정착에 힘썼다.[23], 1925년에는 모자 및 복식법을 통과시켜 구시대의 상징인 페스 히잡의 착용을 금지시켰으며, 가족법을 통과시켜 스위스식 민법을 도용했고, 달력법을 통과시켜 그동안 사용되었던 달력 대신 그레고리력을 도입했고, 1926년에는 샤리아를 금지했고, 1928년 11월 3일에는 복잡한 아랍 문자 대신에 알파벳을 쓰는 라틴 문자를 채택하는 언어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서구식 정부 제도를 받아들였다.

히잡 금지를 두고, 아타튀르크가 "모든 매춘부 반드시 히잡을 써야 한다."라는 법령을 만들어서 일반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히잡을 쓰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썰이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참신한 발상은 없었고 단순히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지 못하도록 규정했을 뿐이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살던 B612 소행성을 발견한 터키인 천문학자 이야기는 아타튀르크 개혁 제도를 모델로 쓴 것이다. 터키 전통 복식으로 나와 소행성 발견을 국제 천문학자 회의에 나가 말하던 것을 무시당한 그 학자가 11년 뒤 양복을 강요하는 터키 독재자 때문에 서구풍 양복을 입고 같은 자리에 나와 이야기하자 다들 믿어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어린 왕자에서는 옷차림 따위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풍자하는 내용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케말이 서구화 개혁을 밀어붙인 이유 중 하나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그 결과 케말의 서구화 정책은 터키를 이슬람권에서 가장 세속주의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공화파와 이슬람 세력 간에 충돌이 있었고 그 와중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터키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저서 ''이 이 갈등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와 민족주의 정책에 반발한 이슬람 학자들도 뒤에서 아타튀르크를 흉보곤 했다. 이런 진영에서 아타튀르크는 그야말로 이슬람을 파괴하고 서구의 세속주의를 받아들이고, 터키의 이교도적 문화를 부흥시키려 한 악마 취급을 당한다.

러시아로부터 카르스, 아르다한, 베숨주를 돌려받았고 1930년에는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더불어 여군 사관학교를 인정하였고 미군이 선정한 20세기 세계의 명 조종사 100인에서 유일한 여군으로 들어간 사비하 괵첸(Sabiha Gökçen, 1913년 3월 22일 ~ 2001년 3월 22일) 공군대령이 바로 아타튀르크가 여군사관학교 공군부 수석으로 높게 인정하고 양녀로 받아들였던 인물이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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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딱 88년 살았다. 그녀의 이름을 딴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에 있다.

2.6. 터키어 문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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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터키어 문자를 시연하는 아타튀르크 (1928년)

터키어에 라틴 문자가 도입된 것은 아랍 문자라서 문제이고, 라틴 문자가 좋다는 문제가 아닌, 터키어를 표기하는 합리적인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의 이란이나 이라크, 리비아,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아랍문자를 썼음에도 문맹을 퇴치한 사례나 글자수가 많은 한자를 쓰고 있음에도 문맹률이 10% 이하인 중국, 대만, 일본, 홍콩의 사례를 볼때 터키어도 아랍문자를 계속써도 문맹퇴치는 되었을것이나, 이 당시에 초등교육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을 정도로 학교시설의 부족이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익히는데 시간이 걸리는 아랍문자 대신에 단기간에 빠르게 배울수 있는 라틴문자를 체택한것이다.

터키어는 고대에는 초기 돌궐 문자로, 중세에는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었는데, 13세기부터는 몽골어 어휘와 페르시아어 어휘가 터키어에 유입되었다. 여기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공용어인 오스만어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고 표기 문자 역시 아랍 문자로 갈아탔다. 하지만 아랍 문자는 자음 문자에 비해 모음 표기 문자가 적었기 때문에 터키어 표기에는 적절치 않았고 그 결과 불필요한 자음 표기는 너무 많고, 터키어에 필수적인 모음 표기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25]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1927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터키인 중에서 아랍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말 파샤는 아랍 문자 29자, 페르시아 문자 4자를 폐기하고 라틴 문자를 도입하는 언어개혁을 벌인 것이다. 여기에 만들고 땡이 아니라, 입말에서도 기존 오스만어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서 차용한 일상적인 단어를 기존 튀르크 계통의 고어와 방언에서 대체하여서 서구식 어휘를 차용해서 새로운 터키어의 기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랍, 페르시아 계통의 외래어를 없애고 터키 고어를 샅샅이 조사해서 복원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한자, 영어 외래어를 없애고 고전에 나오는 향찰, 이두 등의 순우리말을 복원해서 새 단어를 만들어낸 셈. 그리고 이 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성인에게도 4개월간 강습을 받게 하였으며, 학교가 없는 마을에는 순회학교까지 개설했다. 그리고 케말 자신이 순회학교에 나가서 순회학교 일일교사가 되어 문자 교육까지 하는 노력도 보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35년의 조사에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200만 명이 넘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케말은 알파벳 행진곡이란 노래까지 직접 작사, 작곡을 하고,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그대로 넣으려고 했지만, 불과 하루 만에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별로다"라는 평가를 내려 그대로 폐기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데 이 문자개혁 직전에 터키어 학자, 다른 국가 어학자들[26]이나 정부에서는 정착까지 약 2~3년 걸릴 것이라고 봤고 그때까지는 혼란방지와 터키 국민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터키 새 문자-아랍 문자 병행표기를 해야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케말은 "몇 개월 정도 해보고 아니면 말든지"란 태도로 혼용없이 바로 새 문자체제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고 아주 빠른 속도로 터키 사회에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국민들이 "존경하는 가지[27]께서 우리를 위해 문자를 만들고 개혁한다는데 당연히 따라야지"란 생각으로 이 문자를 배우려는 열의가 너무 커서 가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문맹률이 높아서 역설적이게도 새로 배워야 할 사람이 적었다. 그 과정에서 아타튀르크를 비롯한 터키 교육부, 공무원들의 엄청난 노력은 말할 것도 없다.

왜 하필 라틴 문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는데, 탄지마트 이후 오스만 제국의 상류사회에서는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하던 전통이 있었고, 이스탄불 같은 경우 어딜 가든 상점이든 호텔이든, 관공서든 오늘날 한글 밑에 영어표기를 병기하듯 프랑스어를 병기했다. 당시 상류층들은 터키어를 라틴 문자로 옮겨서 일종의 암호처럼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다. 때문에 라틴 문자는 선진적인 유럽 문명의 상징이기도 했고, 이미 라틴 문자 사용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라틴 문자를 개량해서 터키어를 표기하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여겨졌다. 당시에도 투라니즘 민족주의자들은 당시 해독되어 한창 연구 중이던 돌궐의 문자를 현대 터키어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돌궐 문자를 현대 생활에 맞게 사용하려면 타자기 자판도 새로 만들어야 하고, 이래저래 비용과 노력이 기존에 이미 널리 쓰이는 문자를 개량해서 사용하는 것에 비해서는 더 많이 들었기 때문에 기각되었다. 아랍 문자와 페르시아 문자 이외에 당시 터키인들에게 잘 알려진 문자라고 해봐야 그리스 문자, 키릴 문자, 라틴 문자 정도였는데 수백 년간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인해 터키인들 사이에 반러 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국민 감정상 러시아가 쓰고 있는 키릴 문자를 보급할 수는 없었고, 그리스야 뭐 더 말할 것도 없는데, 터키 독립 전쟁 이후로 그리스인과 터키인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인들이 쓰는 그리스 문자는 거들떠보지조차 않았다. 그리스-터키 관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심지어 지금도 그리스와 터키는 서로 한일관계 못지 않은 앙숙으로 유명하다. 그러니 어차피 남은 선택지는 라틴 문자밖에 없었고 라틴 문자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문자이기도 했으니 터키룰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케말은 당연히 새로 도입할 문자로 라틴 문자를 선택했다.

2.7. 국제 정세 식견

국제 정세를 바탕으로 한 식견도 대단해서 추축국 편에 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당시 국제적으로도 평이 나쁘지 않았던 아돌프 히틀러[28]에 대해서도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라고 평해서 그 본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자기 국민의 손에 목이 매달릴 놈이지."라고 평했다. 그리고 훗날 무솔리니는 처형당한 뒤에 분노한 국민들의 손에 의해 밀라노 시내의 주유소에 거꾸로 매달리게 됐는데, 아타튀르크는 아마 비유 삼아 한 말일 테지만 그 비유가 글자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목은 아니고 발목이란 차이가 있었을 뿐. 아타튀르크가 무솔리니를 별로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저 무솔리니의 대한 평은 패트릭 킨로스판 아타튀르크 전기에서 나오고, 또 앤드루 망고의 전기에서도 무솔리니를 "전장에서 한 번도 승리한 적 없는 주제에 군인인 척 거들먹거린다"고 경멸한 것을 보면 적극적으로 적대하지 않았을 뿐 상당히 싫어한 듯하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기 전에 머지않아 제1차 세계 대전급의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그 전쟁에 미국이 필연적으로 참전하게 되고 미국의 손에 전쟁이 종결될 것이라 예상했다. 터키는 애초부터 독일과 가까이 지냈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가 패전국으로 낙인찍혀 그것이 영토 상실 및 오스만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었다. 히틀러는 과거 동맹이던 터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했고, 프란츠 폰 파펜을 비롯한 나치 간부들이 계속 터키를 꼬드겼으나, 독일과 엮어서 좋은 꼴 못 본 경험도 있던 터키는 독일에게 립서비스나 날리며 중립국으로 남아 있다가 전쟁 막판에 미국에 줄을 서서 연합국 쪽에 붙었다. 아타튀르크 사후, 2차 대전 당시에는 터키는 소련을 좀 더 경계하고 있었고, 터키가 한국 전쟁에 파병한 것 역시 당시 터키가 공산주의 및 소련을 적대시했었던 게 이유이기도 했다.

2.8. 가정사

케말 아타튀르크는 카리스마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매력도 상당했던지라 목숨을 건 여자가 최소 알려진 것만 4명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 직계 자손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양자와 양녀를 합해 8명을 들이긴 했지만 친자식이 아니라서인지 그 후손들은 그렇게 심각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고 있다. 아타튀르크의 방계 후손들 또한 말 그대로 방계라서 그다지 영향력이 없는 편이다.

사실 여자와의 관계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닌 게, 공화국 수립 이후 라티페 우샤키(Latife Uşşaki, 1898–1975)라는 여성과 1923년에 결혼한 적이 있다. 허나 자신이 자손을 남기게 될 경우, 이미 터키 국내에서 영웅시되고 있는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자손들이 대대로 대통령을 해먹고 독재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끝에 2년 만에 이혼하였다. 이혼했어도 우샤키는 아타튀르크를 사랑했다면서 27살의 젊은 나이임에도 다시는 재혼하지 않고 50년 동안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늘그막에 찾아온 기자가 "당신이 숨어서 사는 이유가 아타튀르크에 대한 가정사를 털어놓을까봐 협박당해서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자 격노하며 "냉큼 나가라! 그분께서는 그런 적도 없었고, 나 스스로가 괜히 나 때문에 그분이 곤란해할까봐 알아서 조용한 곳에서 산 것뿐이다!"라며 쫓아냈다고 한다.

이 외에 케말 아타튀르크를 짝사랑했던 피크리예 하늠(Fikriye hanım)은 의붓아버지의 친척이었는데, 아타튀르크의 일기를 보면 피크리예 하늠은 아타튀르크를 사랑했는지 몰라도, 아타튀르크는 피크리예를 그냥 친한 동생 정도로만 여겼던 것 같다. 주로 격무에 지친 아타튀르크와 어울려서 라크 와인을 마시며 말벗이 된 정도. 상기했듯 아타튀르크만 그렇게 생각한 거지 피크리예 쪽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케말에게 버림받자 정신이상을 일으켜 그의 집에서 자해해서 피 흘리는 것을 경호원들이 발견해서 옮겼을 정도다. 그리고 치료 중 독일에서 사망했다.

애초에 아타튀르크는 '결혼이란 건 하면 하는 것이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인데, 상관할 게 뭐 있나'며 결혼에 관심이 없었기에 아직 '결혼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결혼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변인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우샤키와의 결혼도 공화국 수립 이후 주위에서 하도 닦달하니까 어쩔 수 없이 주위에서 맺어준 여인과 결혼한 것이다.[29] 아타튀르크와 달리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나라를 세운 '창립자'들의 상당수는 괜찮은 업적을 남기고도 세습 독재와 철권 통치를 일삼는 경우가 보통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짐바브웨의 '독립 투사 겸 독재 전문가' 로버트 무가베다. 후술하듯 아타튀르크 사후 엄청나게 신성화된 것을 보면 아타튀르크의 이러한 판단은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자기가 죽은 후까지 내다보는 어마무시한 통찰력인 셈이다.

결혼은 안 하려고 한 것 때문에 사실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냐는 악의적인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다.

앤드루 망고의 전기에 의하면 아타튀르크가 개인적으로는 자식을 두고 싶어했다는 말도 있으나[30], 이 또한 어디까지나 설이다. 아타튀르크 개인의 능력이나 권력 정도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고 자식을 두는 것 정도는 본인이 불임이 아닌 이상 얼마든지 가능했을 테니 아타튀르크가 불임이라는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이러한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2.9.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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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의 말년 모습.[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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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가 사망한 돌마바흐체 궁전의 방에서 열리는 추도식.

아타튀르크는 전통술인 라크 담배를 좋아해 대통령 시절 내내 둘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고, 때문에 1937년 경부터 몸에 이상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휴가를 다녀온 후에는 상태가 조금 나아졌으나 휴가를 마치자마자 지방 시찰을 다녀온 이후 다시 건강이 나빠졌다. 병세를 알아볼 겸 이스탄불로 가서 검진을 받아보니 간경변 판정을 받았다. 그 후 아타튀르크는 간경변 치료 및 요양을 위해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집무를 봤는데, 몸을 추스려야 할 시기에 정상적으로 집무를 보면서 격무에 시달리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결국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운명했다. 때문에 터키에서는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가 되면 5분간 묵념을 한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든지 여러 문화유적지에서도 시계는 항상 이 시간에 멈춰져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를 열렬히 사랑하는 가정에서는 시계를 이 시간에 맞추어 놓기도 한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재산의 극히 일부를 여동생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에 기부했다.

3. 터키인들의 존경

터키에서 아타튀르크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그야말로 '종교'에 가까울만큼 열성적이다. 상술한 업적들을 한국으로 치면 세종대왕(어려운 기존 문자 대신 쉬운 새 문자를 도입)+ 김구, 이승만(독립운동/건국)+ 이순신(외세의 침략 방어)+ 박정희(근대화/산업화)를 합쳐 놓은 꼴이니. 길거리 노점상도 아타튀르크 초상화를 자기 노점에 걸어두는가 하면 대부분의 터키 회사들은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어록을 벽에 걸어두고 있다.[32] 터키의 모든 관공서 건물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아타튀르크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아타튀르크의 어록 중 하나인 "Hâkimiyet kayıtsız şartsız milletindir."(주권은 조건없이, 제한없이 인민의 것이다)라는 어록은 아타튀르크의 무덤에서부터 시작해 터키 어디에서다 볼 수 있다. 도시에서 가장 큰 대로에는 아타튀르크 대로(Atatürk Caddesi)라는 이름이 붙고[33], 도시의 중심가에는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심지어 동상을 뜻하는 터키어인 헤이켈(Heykel)은 몇몇 도시에서는 '시내 중심가'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현재는 화물취급만 하는 공항이지만 터키에서는 터키의 관문이었고, 이스탄불 제1공항이었던 공항의 이름을 아타튀르크의 이름을 따서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Istanbul 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명명했다.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곳이었다. 이런 아타튀르크 사랑은 해외에도 유별나서 터키인이 운영하는 케밥 식당에서 대부분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터키 국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도 단순히 그냥 찍은 사진이나 초상화가 아닌 장소에 따라 다양한 사진들이 있다. 관공서나 군부대, 경찰서를 가면 군복입은 아타튀르크 사진, 학교에 가면 책상에 앉아있거나 강의를 하는 아타튀르크 사진, 식당에 가면 식사하는 아타튀르크 사진, 카페에 가면 커피를 마시는 아타튀르크 사진, 놀이공원에 가면 그네를 타는 아타튀르크 사진(...) 등등. 아타튀르크가 살아있을 때 하도 사진을 많이 찍어서 가능한 거.
더불어 고향인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남은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집은 1933년 그리스 테살로니키시에서 터키 공화국 10주년을 기념해 그 집에다 '아타튀르크 생가'라는 팻말을 세운 것을 계기로 1937년에 테살로니키시가 집을 구입해 아타튀르크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아타튀르크는 일이 바빠서 살아 생전에 이 집을 찾지 못했고, 이후 터키 정부가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관리하고 있다. 터키인들이 그리스에 오면 이곳을 반드시 들른다고 한다. 그리고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 농장(Atatürk Çiftlik Ormanı)에 가면 테살로니키의 생가를 완벽하게 복제한 집이 있다. 아타튀르크가 말년에 농사를 지으면서 쉬던 곳으로 지금도 이곳에서는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2014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가 방이 1000개가 넘는 거대한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이곳 부지 일부를 침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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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모든 터키 화폐에는 앞면에 아타튀르크를 도안으로 하고 있을 정도다. 위의 사진의 화폐는 0자리 6개를 잘라내는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이후 탄생한 신 터키 리라(Yeni türk lirası)로 2009년 발행된 신권도 앞면은 모두 아타튀르크를 도안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신 터키 리라화의 아타튀르크가 지나치게 통통하게 혹은 뚱뚱하게 묘사되었다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리고 돈의 크기가 클수록 점점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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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새로 발행된 지폐 시리즈 중 최고액권인 200리라짜리 지폐의 모습. 이번 시리즈에는 뒷면 도안을 터키의 위인들로 채택했는데, 200리라 지폐 뒷면의 인물은 13~14세기에 살았던 시인 유누스 엠레(Yunus Emre)로 그가 남긴 유명한 시구인 "사랑합시다. 사랑받읍시다.(Sevelim Sevilelim)"가 함께 인쇄되어있다.

다만 아타튀르크에 대하여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있어왔고[34] 터키에서도 2010년에 아타튀르크가 동성애자라고 주장한 사이트들을 폐쇄하면서 논란이 거세졌다. 그 사이트를 운영하는 이들은 아타튀르크를 욕한 것도 아니고 단지 성별적인 취향이라고 여기면 그만이라면서 이렇게 폐쇄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터키에서 동성애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하면, 아타튀르크를 동성애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욕 이상의 모욕으로 여겨지는 게 보통이다. 터키에서 동성애자의 취급을 떠나서도 아타튀르크가 자손을 남기지 않은 것 때문에 동성애자 루머가 퍼지긴 했지만 그의 언행이나 인생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게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아타튀르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지라 한때 에르도안 대통령이 아타튀르크 사진을 대통령궁에서 치우자 시위가 일어났을 정도이다.

3.1. 아타튀르크 모독죄

터키 형법에는 아타튀르크 모독에 대한 특별한 조항이 있다. 형법 301조가 그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Madde 301 (제301조)
(1) Türk Milletini, Türkiye Cumhuriyeti Devletini, 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ni, Türkiye Cumhuriyeti Hükümetini ve Devletin yargı organlarını alenen aşağılayan kişi, altı aydan iki yıla kadar hapis cezası ile cezalandırılır.
터키 민족을, 터키 공화국 국가를, 터키 대국민의회(=국회)를, 터키공화국 정부와 국가 사법조직을 공공장소에서 모욕하는 자는 징역 6개월에서 2년에 처한다.

(2) Devletin askeri veya emniyet teşkilatını alenen aşağılayan kişi 1. fıkra hükmüne göre cezalandırılır.
국가의 병사들 혹은 안보기관을 공공장소에서 모욕하는 이는 1항에 의거한 형벌에 처한다.

(3) Eleştiri amacıyla yapılan düşünce açıklamaları suç oluşturmaz.
비판의 목적으로 하는 사상적 행동은 처벌될 수 없다.

(4) Bu suçtan dolayı soruşturma yapılması, Adalet Bakanının iznine bağlıdır.
이 혐의에 의한 입증판단은, 법무부의 결정에 따른다.

이러한 터키의 국가모독죄 조항은 초기 헌법에서부터 존재했지만, 아타튀르크 사후인 1951년 일단의 극단적 이슬람 복고주의자들이 아타튀르크 동상을 파괴하면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터키 민주당의 주도로 터키 법무부는 아타튀르크 모욕에 대한 특별법을 입건해 1951년 7월 25일에 형법 5816조라는 이름으로 승인했다. 이 법으로 아타튀르크를 게이로 묘사한 동영상이 있다는 이유로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 터키에서 유튜브를 접속하려 하면 이러한 경고문을 볼 수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outube_censored_TR2008.png
해당 사이트의 접속이 금지되었습니다.
앙카라 제5회 형집행 위원회2008년 4월 30일2008/599번 결정으로 이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을 정보통신부령으로 금지합니다.

그리스의 극우파나 터키 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아타튀르크를 모욕하기 위해 아타튀르크의 출생신분이나 성적지향들을 왜곡해 인터넷 등에 가짜뉴스나 카더라 등의 선동 날조 영상 및 글들을 비일비재하게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학계에서 아타튀르크가 양성애자였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주장이 있지만, 일단 아타튀르크를 공격하는 극우주의자들이 이 부분을 핵심으로 모욕을 주고 있는 데다, 인터넷 검열 및 통제를 하기 위해 명분이 필요했던 에르도안의 목적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터키가 아무리 이슬람 다수인 국가들 중 가장 세속적인 국가라고 하더라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유럽과 비교해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다.

아타튀르크 모독죄에 대한 해당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Atatürk'ün hatırasına alenen hakaret eden veya söven kimse bir yıldan üç yıla kadar hapis cezası ile cezalandırılır.
아타튀르크의 업적에 공공연히 모욕하는 자, 또는 저주하는 자는 누구든 1년에서 3년 사이의 징역으로 처벌한다.

Atatürk'ü temsil eden heykel, büst ve abideleri veyahut Atatürk'ün kabrini tahrip eden, kıran, bozan veya kirleten kimseye bir yıldan beş yıla kadar ağır hapis cezası verilir.
아타튀르크를 대표하는 동상, 흉상 그리고 기념물들을 혹은 아타튀르크의 무덤을 파괴하는 자, 부수는 자, 훼손하는 자, 또는 더럽히는 자는 누구든 징역 1년에서 5년 사이의 중형으로 처벌한다.

Yukarıdaki fıkralarda yazılı suçları işlemeye başkalarını teşvik eden kimse asıl fail gibi cezalandırılır.
상기 열거된 죄목들을 이행하도록 타인을 선동하는 자는 누구든 실제 범죄한 자와 마찬가지로 처벌한다.

(2)Birinci maddede yazılı suçlar; iki veya daha fazla kimseler tarafından toplu olarak veya umumî veya umuma açık mahallerde yahut basın vasıtasiyle işlenirse hükmolunulacak ceza yarı nispetinde artırılır.
1조에 기술된 죄들에 대해 2인 이상의 다수에 의한 집단으로써 혹은 공공으로써 혹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공장소에서 인쇄전단 등을 들고 선동할 경우, 판결될 형량에 절반을 추가해 적용된다.

Birinci maddenin ikinci fikrasında yazılı suçlar zor kullanılarak işlenir veya bu suretle işlenmesine teşebbüs olunursa verilecek ceza bir misli artırılır
1조 제2항에 기술된 죄목을 적용하기 어려운 사건, 혹은 이러한 형태의 일을 계획한 자의 경우, 판결될 형량에 다소 추가해 적용된다.

(3)Bu Kanunda yazılı suçlardan dolayı Cumhuriyet savcılıklarınca re'sen takibat yapılır.
이 법에서 글로 인한 혐의로 인한 공화국 검사에 의한 공무원 규정이행의무위반혐의에 따른 기소가 가능하다.

(4)Bu Kanun yayımı tarihinde yürürlüğe girer.
본 법은 제정일로부터 유효하다.

(5)Bu Kanunu Adalet Bakanı yürütür.
이 법은 법무부가 집행한다.

자세히 보면, 선동혐의가 실제 범죄보다 가중처벌되고 구두선동보다 글로써 선동하는 혐의가 더욱 더 가중처벌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글로써 유인물을 돌리거나 행동원을 모집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법은 공화인민당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없었고, 나중에 1960년 군사쿠데타에서 이슬람주의자로 몰려서 처벌된 아드난 멘데레스가 이끄는 민주당 정부 시절에 만들어졌다. 후술할 아타튀르크의 영묘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아타튀르크 모독죄에 대한 특이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1955년, 키프로스에서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충돌하던 가운데 터키에서도 키프로스의 그리스계도 결국은 키프로스랑 그리스를 합병하자고 주장하니 똑같은 그리스놈이라고 생각해 반 그리스 여론이 일고 있었고 이 와중에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터키 영사관 근처에서 시한폭탄이 터졌다. 위력은 그리 대단치 않아서 창문 몇 개 깬 걸로 끝났지만 영사관과 같은 곳에 위치한 아타튀르크의 생가에도 피해가 갔고, 당시 터키언론 및 심지어 일부 그리스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그리스의 극우민족주의자의 테러로 보도하는 바람에 이스탄불에서 현지 그리스계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보복폭동이 발생했다. 정작 사건의 진실은 1960년 쿠데타 이후에 밝혀지는데, 아드난 멘데레스 내각의 행적을 수사하던 도중에 이 폭탄테러가 사실 반 멘데레스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당시 정부의 자작극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멘데레스 본인도 이 사건이 밝혀지고나서 사죄했지만,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법은 아직 사문화되지 않았다. 2015년 11월 10일 아타튀르크 사망일에 한 이슬람 성향의 민영방송사가 아타튀르크에 대해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폭정의 끝!"이라고 달았다가 검찰에게 이 법으로 고소를 당해 유죄가 확정되어 사장이 구속되었으며 방송사도 폐쇄되었다.

4. 비판

자국에서 우대받는 윈스턴 처칠이나 샤를 드골이 과거 식민지 나라들에서 저지른 짓을 보면 학살자, 억압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듯이 아르메니아인이나 쿠르드인 민족주의자들 눈으로 봤을 때 아타튀르크는 너희 나라에서만 영웅인 학살자이다.

또한 터키 내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나 터키 민주주의자들은 군부 일당체제를 확립한 세속주의자 아타튀르크를 영 좋아하지 않으며 또한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같은 튀르크인(터키인 및 투르크멘인)들이 분포하고 있는 북키프로스, 트라키아, 모술 및 이라크-시리아 쿠르디스탄을 탈환치 않아 포기하고 내버렸다고 비판하며 북키프로스의 튀르크인들 역시 아타튀르크가 영웅으로는 인정하지만 터키 독립전쟁에서 키프로스 해방을 포기한 이유로 본토에 버려졌다고 여겨 터키인들만큼 아타튀르크를 절대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역시 터키계 북키프로스인들은 자신들이 튀르크인이라는 것까지는 동의하지만, 본토 터키인과 동일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어떻게든 본토와 연관지으려 애쓰려 하지만, 튀르크계 주민들은 다르다. 다만 터키 독립전쟁 막판 그리스가 대책없이 밀리는 것을 본 영국이 '동트라키아 및 코스탄티니예와 에게 해 섬들 및 키프로스 중 택일할 것'을 요구하였던 관계로 키프로스를 방치한 것이고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의 튀르크멘인과 쿠르드인이 튀르크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리라 판단해 영유권을 포기한 것이라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아타튀르크에 대한 비판은 터키에서는 민감한 문제라, 종종 배낭여행자들이 이 항목의 비판점들을 근거로 터키에서 아타튀르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비췄다가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니 주의하자. 당장 폭력을 당하거나 경찰이 출동해 체포해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욕을 먹거나 멱살 잡혀 쫓겨나는 봉변을 겪을 수는 있다. 재수없으면 위의 형벌 조항을 근거로 경찰서에 끌려 갈 수도 있다.

4.1. 강경 진압

대표적인 아타튀르크의 강경 진압으로 지목되는 사건은 1937년 데르심 반란의 수습과정이다. 데르심 반란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1차는 1937년 3월 20일부터 11월 말까지. 2차는 1938년 1월 2일부터 12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반란의 원인은 터키 공화국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한 데르심(Dersim, 현 지명은 툰젤리 Tunceli) 도의 토착 부족장들이 부족민들을 모아 저항한데에서 비롯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기까지 지방행정은 도시에는 행정관이 파견되었지만, 향촌은 대체로 현지 부족장 혹은 공동체들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좋게 말하자면 지방자치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정부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소리다. 오스만 제국이 18세기 이후 지방정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데르심 지역의 경우 알레비파 자자족과 순니파 쿠르드족, 1915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때 생존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는데, 반란이 일어나자 터키정부는 공개처형과 공중폭격까지 동원해가며 이를 진압했다.[35] 당시 터키 공화국은 지방토착세력을 공화국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실제로 1925년 남동부 터키에서 오스만 복고운동이 터져 곤란에 처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반발세력을 무력으로 누르려 했다. 이때 희생된 숫자는 반란군 6,000여 명을 포함해 민간인 13,806명(터키국회 공식추산)에서 40,000여 명(데이비드 맥도웰 추산)에 달한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 부족에 속한 민간인 11,818명은 이후 터키 전국에 분산이주 조치되었고, 도 이름도 툰젤리(Tunceli)로 바꾸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근대 이후 5번째로 규모가 큰 학살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도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이 운동은 아르메니아인 300만 중 100만 ~ 200만을 학살(아르메니아 주장)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주축이라는 내용의 주장이다.[36] 가령 1921년, 터키 독립군은 마라시(Maraş)에 주둔해있던 프랑스군 5000명을 3만으로 공격한 다음 아르메니아인이 대부분이었던 마라시 시민 1만 명을 학살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돈과 프랑스에 협조한 병사 200명을 넘겨줬는데도 반란 위험이 있단 이유만으로 학살을 한 것이다. 하지만 1919년에 마라시가 프랑스군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무슬림 주민들을 학살했던 것도 있다.

그리고 독가스를 이용한 학살을 승인하기도 했고 장티푸스나 스페인 독감으로 죽어가는 것을 방치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타튀르크의 치세 중에 활성중지되지 않은 티푸스 백신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뿌렸다고 고백한 의사도 있다. 생물학을 좀 배웠으면 알겠지만, 이건 그냥 티푸스를 뿌린 학살이다. 그 밖에도 발칸과 아나톨리아 내의 아르메니아인 및 그리스인 명사들을 암살사주한 의혹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변호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관한 것 중 상당수가 아르메니아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것과 마라시 학살 역시 그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측에 붙어 자신들의 옛날에 영토였던 역사적 영토를 되찾고 그곳의 튀르크인을 몰아내려고 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에 붙을 경우 당장 국가 존재 자체가 위협이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는지는 터키 독립전쟁 문서를 볼 것. 당연히 그렇다고 해서 한 종족을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정확히는 아르메니아인 학살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타튀르크가 그 사건에 얼마나 책임이 있느냐의 문제인데, 터키 측에서 반론으로 나오는 의견에는 1910년대에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 세력에 있어서도 끗발조차도 날리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청년 튀르크당과 엔베르 파샤가 집권하고 있었고, 아타튀르크가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한 것은 1920년 4월 23일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 등을 만나고 술탄 정부에 반란을 선언한 이후의 일이다. 아타튀르크가 반란을 시작하기 전에, 오스만 제국의 감독관 자격으로 1919년 11월 9일에 카이세리를 방문하고 한 연설을 참고해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아타튀르크의 성향은 민족주의보다는 이슬람을 바탕으로 외세를 배격하려는 생각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이러한 생각들을 완전히 부순 것은 1920년 초 이스탄불을 방문한 이후부터라는 반론도 있기에 아르메니아에서 책임을 아타튀르크에게 더 크게 강조하려고 죄다 덮어씌웠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결정적으로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 학살 당시, 시리아-이라크에서 종군하고 있었으며 그가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20년 이후의 일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항목에 아타튀르크의 일기를 볼 수 있는데, 당시에 아타튀르크는 '관찰자'일 뿐이었다. 즉,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사항이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아타튀르크가 아르메니아 학살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터키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왜곡으로 증거도 없이 그렇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주장이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세브르 조약에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가해자들을 전범 재판에 회부해 처벌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가해자들을 단 한 명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엔베르같이 해외로 망명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살자들을 중용했다. 하지만 그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부정했다고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것을 동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타튀르크는 임기내내 공석에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언급을 내건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소련과의 회담 때 언급하기는 했는데, "과거의 전쟁과 상처를 뒤로 하고,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공화국과 터키는 다시 형제가 되었다."라고 발언한 적은 있다. 즉, 총론적으로 따져보자면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 학살 자체에 대한 본인의 개인적인 책임은 없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가해자들을 아무런 처벌이나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간 것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 학살 자체를 덮으려고 한 역사적 기억에 대한 책임은 있다고 볼 수 있다.

쿠르드족[37]에게는 증오를 받고 있는 게 당연하다. 쿠르드인들이 세운 아라라트 공화국을 뭉개버린 것도 아타튀르크 정권 때 벌어졌던 일이다.

데르심 학살에 대해서는 2011년 11월 23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당시 터키 총리[38]가 데르심에서 사망한 13,806명의 민간인에게 "만약 국가의 이름으로 사과를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이라면 나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Eğer devlet adına özür dilenecekse, böyle bir literatür varsa ben özür dilerim, diliyorum)라고 사과를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2011년 터키 대법원에서는 데르심 학살을 인종을 구별하여 학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경 진압의 기소에 대한 판결은 무죄라고 판결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서는 아르메니아 측 주장이 과장된 면이 있고 튀르크인이 아닌 다른 세력이 한 것도 포함하고 있으며 또는 반대되는 사료나 아르메니아 측에서 한 학살에 대한 증거를 들어가며 반론하고 있고 그 당시 상황으로는 불가피했다(어디까지나 터키 측 입장이다.)라고 정당방어로 생각할 명분마저 있으니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정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4.2. 탈아입구적 사상

약간 애매하지만 탈아입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서구를 굉장히 동경했다. 이는 공화국 성립전에 아타튀르크가 이야기할 때 "터키인들은 항상 서쪽으로 이주해왔다", "모든 문명국가를 친구로 여기며 독립을 부러워 할 뿐"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덧붙이자면 아타튀르크의 이러한 사상은 당대 오스만 제국 지식인층, 특히 개혁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보편적인 의견이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미 16세기부터 유럽외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고 영토의 중심부가 아예 유럽에 치우쳐있었다. [39]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본격적인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던 시기에는 오스만 제국 내 유럽 영토가 점차 줄어들고 있기는 했으나 1870년대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의 상당부분을 영유하고 있었고 당시에만해도 중동권은 오스만 제국의 직간접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외교, 교역상대가 유럽과 미국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구화 자체는 터키 공화국 이전에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타튀르크가 극단적인 서구화 운동과 세속화를 하지 않았더라도 터키는 서구화와 전통을 모두 이루면서 서서히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비판자들의 견해이다.

탈아입구 사상이 과연 비판받아야 할 요소인지에 대한 반론 역시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비서구지역은 정치, 철학, 사회, 군사, 경제, 사상, 교육 등 사실상 모든 영역에서 서구에 비해 현저히 낙후된 상태였으며 후발주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발전한 상태인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롤 모델로 상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동도서기, 양무운동과 같이 오직 서양의 물질문명만을 수용하자는 동아시아의 개혁 운동이 전부 다 실패로 돌아가고,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철저히 탈아입구적 노선에 따라 서구화를 추진했던 일본만이 살아남았으며.[40] 대한민국 역시 박정희 정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제의 미국, 일본에 대한 벤치마킹, 1987년 개헌으로 완성된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의 완전한 도입, IMF 사태를 계기로 가속화 된 경제 시스템의 서구화가 급격한 도약의 발판이 되어주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장 43년도에 나온 프랑스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도 천문학자가 터키전통복장을 입고 발표할때는 무시당하다가 똑같은 발표를 복식만 양복으로 바꿔입고 하니까 인정받는다고 풍자했다.

4.3. 급진적인 근대 민족국가 추진의 후유증

위 이야기의 연장선상인데 케말은 터키인의 통합이란 명목하에 터키 내에 아르메니아인들이나 쿠르드족들 같은 소수민족들의 문화탄압 및 그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파괴시키는 데 열과 성의를 다 기울였다. 심지어 쿠르드족의 경우 아타튀르크는 쿠르드족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앞서 아타튀르크의 민족주의에 관한 시각에 대해 서술했지만, 아타튀르크가 도입한 튀르크 민족주의의 대상은 인종, 민족, 종교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냥 터키 땅에 살면 터키인인 것이고, 터키어로 하면 튀르크(Türk)이다. 때문에 소수민족에 대한 법령을 만들자고 공화국 초대 총리 이스메트 이뇌뉘가 제안했을 때, 아타튀르크는 이를 거절하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터키인이고 우리 민족이고 우리 국민인데 왜 민족으로 구분해서 법을 집행하느냐?"고 되물었다. 터키 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훗날 아타튀르크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이 되는 이뇌뉘는 쿠르드계 출신이다. 즉, 아타튀르크를 무슨 근대적 인종차별주의자로 모든 건 그냥 역사왜곡이고, 아타튀르크는 오히려 붕괴한 '오스만인'으로서 정체성과 여전히 형성 작업 중인 '터키인' 정체성이란 아직 다가오지 않았던 미래 사이 수천년간 엄청나게 많은 문화들이 왔다간 아나톨리아 같은 환경에선 도저히 일반적으로 언어, 풍습, 공유하는 역사 등으로 규정되는 민족적 정체성을 적용할수 없다는 걸 인식했다.

따라서 오히려 저런 민족지학적(ethnographic)한 요소를 아예 배제하고 "그냥 현행 터키 땅 안에 살면 무조건 터키 민족임"이란 아나톨리아의 역사적 환경을 상당히 직접으로 의식한 듯한 국가주의적 민족 관념을 추구한 것이다. 이를 아타튀르크를 호의적으로 보는, 말 그대로 이런 일련의 민족의식 형성 작업의 성공적인 결과물들인 현대 터키인들은 이런 저런 민족주의적 광풍에 사방으로 찢겨저 나갈 뻔한 조국을 근대적인 방법으로 묶어놓은 말 그대로 '터키인의 아버지'소리 들을 법한 신의 한 수로 보며 칭송할 법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일방적인 국가주의적 민족 형성 과정에 분리주의 사상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가진 소수민족에게는 아예 본인들의 독자적인 민족 의식을 가질 자유마저도 박살내려고 했던 억압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총론적으로 보면 이런 아타튀르크가 추구한 민족국가 형성 작업에 대한 극적으로 상반되는 평가는 아타튀르크 본인의 근대적 터키 민족국가 만들기 프로젝트가 큰 부분은 성공했어도, 결국 타우루스와 캅카스 산맥이란 험준한 자연환경이 이 작업을 더디게 한 현대 쿠르드인 다수 지방에선 미완의 작업으로 남아 생기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케말은 근대 튀르크족의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그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정체성을 부정했다. 오스만어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이른바 '언어정화 운동'을 통해 현대 터키어에서 아랍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같은 외래 언어의 잔재를 없애버린 것도 이 시절의 일. 위에서 나온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것도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크를 중심으로 한 다민족 제국' 오스만 제국이 외세, 서구한테 밀렸으니 이슬람에 경도된 오스만 제국의 역사는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부정적인 요소이며 새로운 터키 공화국에선 배제되어야 할 적폐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대신 케말이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과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흉노, 돌궐 같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역사를 모조리 터키의 것으로 치는 태양어론 같은 유사역사학이었던 것이고 아타튀르크는 터키 민족주의를 과도하게 추구하여 태양어론 같은 유사역사학에 어느 정도 경도되었다.

케말 정신의 반대자라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괜히 '터키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영광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라고 선전하고 케말이 저지른 인종청소를 사과하고 다니는 게 아니다. 케말의 후예들인 터키의 군부 세력은 이런 케말의 입장을 계승하고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오스만적인 것, 이슬람적인 것을 배격하고 세속주의를 명분으로 터키에 들어선 민주정부가 조금이라도 이슬람적인 모습을 보일 때마다 민주정부를 박살내 왔고 한국의 군사독재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지금 에르도안의 인기는 터키 경제의 회생과 더불어 이런 군부 체제에 대한 터키 시민들의 염증도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터키 시민들 자체가 원체 과격한 이슬람을 배제하는 입장인데도. 이것이 바로 2016년 터키 쿠데타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던 사건인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 터키 시민들의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경은 여전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인 케말주의, 터키 군부독재의 요소가 터키 현대사에 무조건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5. 이름에 관한 정보

아타튀르크는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던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세무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이었다.[41] 조상에 대하여 여러 말이 많은데 뉴스위크 지는 아타튀르크의 아버지가 알바니아계로 추정된다고 보도한 적도 있다. 아타튀르크의 어머니는 조상이 튀르크계 출신이다. 또한 그리스 일부에서는 그리스계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별다른 근거는 없다. 어쨌든 아타튀르크의 부모 모두 터키어를 쓰는 무슬림이었다.

따라서 아타튀르크의 이름은 아랍어· 오스만어식 이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린 시절의 이름은 아랍어 ' 무스타파(مصطفى / muṣṭafā)'가 어원인 무스타파(Mustafa)이다. 케말(Kemal)은 본래 별명으로 '완전무결'을 뜻하는 아랍어 '카말(كمال / kamāl)'에서 유래한다. 학생 시절 수학 선생님이 아타튀르크의 뛰어난 수학실력에 감탄하여 이런 별명을 붙여줬다는 일화가 전한다. 터키 공화국 수립 후 모든 사람에게 성을 쓰게 하면서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 터키에서 고위 관료에게 쓰는 경칭인 파샤를 붙여서 케말 파샤(Kemal paşa)라고도 부른다. 1990년대 이전의 한국 세계사 교과서나 언론 매체에서 이 이름으로 표기되곤 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케말 파샤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가지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는데, 터키 독립전쟁 당시 대국민의회가 준 칭호로 이는 아랍어 '가지(غازي‎ / ḡāzī)'가 어원이며 '신앙의 수호자'를 의미한다.[42] 때문에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쓰기 전에는 '가지 무스타파 케말 파샤(Gazi Mustafa Kemal Paşa)'라고 불렀었다.

'아타튀르크(Atatürk)'는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원래는 터키 국민 의회에서 받은 성씨이지만 끝내 이 성씨를 물려받을 사람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을 뜻하는 고유어로 정착된 것.[43] 자칭이 아니다. 뒤에 투르크메니스탄 독재자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도 튀르크멘바시으(Türkmenbaşy, '튀르크멘인의 지도자')라는 명칭을 스스로 붙였는데 바로 아타튀르크와 비슷한 의미이기에 이를 두고 터키에서는 엄청 비웃었다. 소문으로는 원래는 아타튀르크라고 붙이려고 하다가 터키에서 협박하니까 튀르크멘바시으로 붙였다는 말도 있다. 현재는 이 성씨를 쓰지 못하게 법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

6. 서명

파일:external/i34.tinypic.com/5pel9t.jpg 파일:Kemal_signs.jpg
아타튀르크 서명의 변천사. 초기에는 직함과 그의 이름인 '무스타파'의 m(밈)과 '케말'의 k(카프)를 따온 아랍문자를 서명으로 쓰다가 문자개혁 이후 변형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정착한 서명은 K. Atatürk라고 쓰여있다.

7. 무덤

아타튀르크의 무덤은 앙카라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기념물에 마련되어 있다. 터키어로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라고 부르는데 히타이트와 고대 아나톨리아 양식을 바탕으로 건립된 건물로, 사자의 길이라고 부르는 대로를 지나면 남자 셋과 여자 셋이 있는 동상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무덤이 위치한 중앙의 거대한 구조물과 회랑이 있다. 회랑에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과 업적, 독립전쟁 이후의 터키 공화국 역사를 다룬 굉장히 스케일이 큰 박물관이 있으니 한 번쯤 가볼만 하다. 앙카라 지하철로는 아나돌루역(Anadolu)[44]에서 내리는 게 가장 가까운데 걸어서 5분쯤 걸리며, 길을 잘 모르거나 귀찮으면 울루스(Ulus)나 스히예(Sıhhiye)에서 바흐첼리에블레르(Bahçelievler) 방향으로 가는 돌무쉬를 타면 된다. 웬만해선 다 간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된다. 이 동네에서는 아느트카비르 모르면 간첩이나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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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느트카비르 입구에 세워진 남자 셋, 여자 셋 석상의 모습. 남자들은 터키 공화국의 기반인 선생님, 농민, 군인들이며 아나톨리아의 전통복장을 하고 풍요를 상징하는 밀이삭과 그릇을 들고 있는 여자들은 아타튀르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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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의 기일인 11월 10일이 되면 대통령과 총리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느트카비르를 찾는다. 평소엔 집안이든 식당이든 담배를 피우는 터키 사람들도 이곳에서만큼은 담배를 피우는 게 금기시되어 있으며, 시끄럽게 떠들지도 않는다. 헌데 아타튀르크는 생전에 자신이 우상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인물이었고 자신이 죽을 때에도 무덤은 평범한 시민들처럼 공동묘지에 쓰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타튀르크의 전우이자 후임자인 이뇌뉘가 이를 무시했고 1953년에 현재의 아느트카비르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안에 들어가면 터키 사람이 아타튀르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45]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주선 국회부의장 시절 이곳에 헌화를 한 적이 있다.

8. 여담

의외로 소탈한 구석이 있어서, 이런저런 일화들이 있다. 특히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애용하던 식당이나 단골가게에는 반드시 "아타튀르크가 좋아하던 가게" 식으로 간판을 꾸미고 아타튀르크가 주로 시켰던 메뉴를 특별메뉴로 구성해서 팔고 있다.

아타튀르크가 이스탄불에 머물 때는 주로 돌마바흐체 궁전의 집무실에 머물렀지만 때때로 근처의 어부들이 입는 옷으로 변장을 하고 가까운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고등어 구이를 뜯으며 주변의 민심을 살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통신기술이 발전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타튀르크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아타튀르크가 국정운영에 참고했다고 한다.

또한 페네르바흐체 SK 팬이자 서포터였다. 페네르바흐체 홈페이지에 아주 자랑스러운 문체로 쓰여있는데, 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0 Ağustos 1928 günü, 3-3 berabere biten Gazi Kupası maçından sonra üçü Galatasaraylı ve ikisi Fenerbahçeli olan beş kişinin önünde aynen şunları söyledi: "Burada üçe üçüz... Çünkü ben de Fenerbahçeliyim!"
1928년 8월 10일, 3:3 동점으로 끝난 가지컵 경기후 3명의 갈라타사라이 팬과 2명의 페네르바흐체 팬이 포함된 다섯 명 앞에서 아타튀르크가 말했다. "여기도 3대 3이군. 나도 페네르바흐체 팬이니까!"

그 외에 터키 독립전쟁 시절의 일기에서도 페네르바흐체에 대한 빠심을 여지없이 보여주기도 했으며,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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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사진만 잘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이 하나 있는데 아타튀르크는 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지니고 있었다. 컬러 사진, 마담 투소에서 생전 모습을 재현해 만든 밀랍 인형. 이 때문에 조상이 알바니아계라는둥 그리스[46] 라는둥, 심지어 테살로니키에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많았던 점을 들어 유대계라는 둥 여러 주장이 나오는 편. 본인은 일단 셋 다 아니라고 부정했었지만, 확신하지는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터키 땅에 살고, 터키어를 사용하고, 터키를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는 곧 터키인이다."[47] 라는 말이다.

골초 국가로 유명한 터키인 아니랄까봐 담배를 엄청나게 많이 피웠다. 아타튀르크가 일찍 사망한 원인도 지나친 격무로 인한 과로 외에 지나친 흡연도 원인 제공을 한 걸로 알려져 있다. 아타튀르크의 주치의가 지금 피우는 양에서 절반만 줄이라고 했는데 거기서 100개비를 피운다고 해서 50개비로 줄이도록 조치했지만 원래 아타튀르크는 50개비를 피우고 있었고 담배 양을 말하면 주치의가 줄이라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두 배 부풀려서 얘기한 것이다. 결국 줄이는 것 없이 평소 피우던 대로 피웠다고 한다.

쿠르스크 전투 문서 끝에도 적혀있듯이, 아타튀르크는 생전에 히틀러를 위험한 미치광이라고 판단해 매우 경계했고, 터키 정부 관료들에게 늘 히틀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였다. 또한, (만약 제1차 세계 대전마냥 전세계적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전제하에서) 앞으로의 전쟁에서는 미국이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는 쿠르스크 전투 직전에 벌어졌던 독일 국방군의 엄청난 기갑군 훈련에 불려간 터키군 장성들이 미온적 태도를 보이며 제2차 세계 대전 터키가 휘말리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집권 시기가 1930년대 초반에 시작된 것과 아타튀르크가 1938년, 즉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바로 1년 전에 사망한 것이 얼추 맞아 떨어지므로 아타튀르크는 주변 정세를 분석하여 잘 예측해낸 것이다.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선 “제나라 국민들 손에 죽을 놈”이라는 예언에 가까운 평도 남겼다. 아무래도 파시즘 이념 자체가 내포한 주변국에 대한 야만스러운 공격성과 그에 따르는 리스크를 내다본 듯하다.

의외로 그리스인들의 아타튀르크에 대한 평가는 콘스탄티노플과 구 동로마 영토의 수복을 가로막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긍정적이다. 특히 메탁사스 군사독재시절 이후, 아타튀르크는 근대화와 민주화의 지도자로 여겨져 그에게서 모티프를 따온 노래가 만들어지고, 아타튀르크에 대한 전기도 꽤 많이 팔렸다. 애초에 1932년 터키-그리스 관계정상화 이후 독립전쟁 당시에도 총리였고, 그때에도 그리스 총리였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과거의 적이었던 아타튀르크와 악수를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아타튀르크를 1934년에 노벨평화상에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리스 입장에서도 어찌보면 아타튀르크의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게, 1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스러울 정도로 극단적이었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인 메갈리 이데아[48]를 무너뜨리고 여타 이슬람 국가 못지않게 종교적이었던 당시의 그리스 사회에도 세속주의의 물결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상당한 세속주의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를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자주성을 지켜낸 것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서도 꽤 존경받는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는 비난당하며 동상이 훼손된 적도 있다.[49]

아타튀르크의 일상생활을 지켜본 아타튀르크의 지인들이나 경호원들의 회고에 따르면 아타튀르크의 일상은 방탕하면서도 굉장히 절제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타튀르크의 실제 육성에서도 들어볼 수 있지만, 이후 출세하고 나서도 테살로니키 사투리와 억양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Gece sofraları nedeniyle geç kalkan Atatürk, uyanır uyanmaz odasındaki divanın üzerine geçer, orada bağdaş kurarak kahve-sigara içerdi. Sonra traşını, masajını yaptırır, ardından çalışma odasına geçerdi. Hem kahvaltı hem öyle yemeği olarak bir dilim ekmek ve bir kase ayran ya da yoğurt yerdi. İkindi vaktinde de bir bardak ayran içerdi. Akşam sofrasında 10 kişiden aşağı düşmeyen bir davetli topluluğu her zaman hazır bulunurdu. Sofrada imtihan etmek istediği kişileri karşısına, iltifat etmek istediği kişileri yanına oturturdu. Etrafındakilere ve mahiyetinde bulunanlara genellikle “Çucuk” diye hitap ederdi. “Beri bak çucuk”, söze başlarken maiyetine kullandığı hitap şekliydi. En ağır kelimesi ise “ebleh” anlamında kullandığı “hebenneka” idi. Atatürk’le ilgili hiç bilinmeyen özellikleri dile getiren bu sözler, “Cumhurbaşkanlığı Makamı Olarak Dolmabahçe Sarayı ve Atatürk” adlı kitapta yer alıyor.
밤늦은 식사 때문에 늦게 일어난 아타튀르크는 일어나자마자 그의 방에 있는 소파에 앉고, 거기서 다리를 꼬며 앉아서 커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그 후 면도와 마사지를 받았다. 그 후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아침 겸 점심 식사로 한 조각의 빵과 한 잔의 아이란(물에 타고 소금을 넣은 터키의 전통 요구르트 음료) 혹은 요구르트를 먹곤 했다.[50] 오후에는 아이란 한 잔을 마셨다. 저녁식사 때는 늘 10명 이상의 초청객들을 불러 식사를 했다. 식탁에서 빵을 달라고 하는 손님이 있으면 그 빵을 달라고 하는 손님 옆에 가 앉곤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평상시에 사람들에게 보통, "을라야"[51]라고 부르곤 했다. "을라야 그 있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 했다. 그가 한 가장 심한 욕은 "얼간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빙씨"였다. 아타튀르크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 사실들은 "공화국 대통령 집무실로서의 돌마바흐체 궁전, 그리고 아타튀르크"라는 책에 실려있다.

아타튀르크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대식은 건강에 해롭다는 생각에 간단한 식습관을 고수했다. 그러는 양반이 그대신 담배는 엄청 피웠다 국가행사중에 의례적으로 행해지는 만찬에서도 본인은 간단하게 먹고 귀빈들에게는 푸짐하게 대접할 정도였고 평소에도 음식에 있어 절약하는 것이 거나하게 차려먹는 것보다 여러면에서 더 낫다고 주장하곤 했다. 대신 터키 커피를 엄청 좋아해서 하루에도 10-15잔씩 꼬박꼬박 챙겨마셨다. 그가 좋아하던 음식들도 소박한 음식들이라 현재도 트럭기사들의 음식정도로 치부되는 쿠루 파술예(Kuru fasulye,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콩조림)를 가장 좋아했으며 고향 테살로니키 스타일의 시금치파이[52]도 어린시절부터 좋아했다고 전한다. 간식으로도 멜론, 레블레비(구운 병아리콩), 땅콩, 삶은계란 같이 소박하게 먹었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그가 죽기 며칠 전에 경호원에게 "얘야, 나는 단 한번도 아티초크를 먹어본 적이 없단다. 알고 있느냐?" (Çocuk, ben hiç enginar yemedim biliyor musun?)라고 말했고, 경호원은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를 각하를 위해 불렀습니다. 카흐라만마라시에서 기차를 타고 오고 있습니다. 오고 있습니다. 각하."(Türkiye'nin en ünlü aşçısı sizin için hazırladı. Kahramanmaraş'tan trenle yola çıktı. Geliyor Paşam)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기차는 1938년 11월 10일까지 도착하지 못했고, 결국 아타튀르크는 아티초크를 먹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출처:아타튀르크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베르튀르크 신문 기사)

그의 이름을 딴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이 존재하며, 현재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 구장이다, 하지만 많은 축구팬들에게는 터키 대표팀의 홈구장이라는 것 보다 UEFA 챔피언스리그를 상징하는 경기장으로 유명하다. 왜냐하면, 어느 날 이 경기장에서 축구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9. 매체에서

  • Hearts of Iron IV에서 터키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대중적인 평가대로 초반 터키 플레이 전방위에 걸쳐 긍정적 효과를 뿌려준다. 고증대로 1938년에 병으로 사망하고 국가원수는 역사적 루트를 타면 이스메트 이뇌뉘가 된다. 1.6.2 패치가 나온 이후 터키군 야전원수로도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에게 침공을 당할 경우 우리나라의 생존을 위한 전투라는 버프가 달린다.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지 않아 터키 공화국이 될 일도 없었고, 당연히 아타튀르크라고 불릴 일도 없어졌다. 그래도 전쟁 당시의 업적 덕분에 오스만 제국의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다가 1936~1937년 즈음에 사망한다. HOI4 버전에서는 대재상으로 등장하며 오스만 제국을 중앙집권적 국가로 만들려 한다.
  • 영화 오스만르 줌후리예티 에서는 케말이 어린시절에 사고로 죽었다는 가정하에 터키 역사가 어떻게 변했는지 대체역사물로 나온다. 케말이 사라진 2000년대는 파디샤체제 그대로며 1차대전 당시 협상국 구성 국가들의 신탁통치를 받는 수준으로 전락한채 100년가까이 흘렀다는 안습의 상황. 수도는 이스탄불이며 앙카라는 시골로 나온다. 터키인들의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경심과 가벼운 반미 코드가 결합한 코미디 영화이다.[스포일러]

10. 어록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과학 문화, 교육을 중시하는 발언이 많이 있다. 종교에 대한 어록들에서도 합리적인 성향이 묻어나오며, 초창기의 이슬람적인 발언들 중에서도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기에 이르면 불가지론 혹은 무신론에 가까운 성향들도 보이고 있다.
Memleketin efendisi hakiki müstahsil olan köylüdür.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농민들이다.
Doğruyu söylemekten korkmayınız.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Beni görmek demek mutlaka yüzümü görmek demek değildir Benim fikirlerimi, benim duygularımı anlıyorsanız ve hissediyorsanız bu yeterlidir.
나를 본다는 것은 진실로 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나의 생각을 여러분들이 이해한다면, 그리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Türkiye Cumhuriyeti mutlu, zengin ve muzaffer olacaktır.
터키 공화국은 행복, 풍요, 그리고 승리를 얻을 것이다.
Sağlam kafa sağlam vücutta bulunur.
건강한 생각은 건강한 신체에 깃든다.[54]
Ordular, ilk hedefiniz Akdenizdir. İleri!
군대여, 제군의 첫 번째 목표는 지중해다. 앞으로! ( 터키 독립전쟁 당시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내린 첫 번째 명령)
Türkiye Cumhuriyetinin temeli kültürdür.
터키 공화국의 기초는 문화다.
Büyük hedefimiz, milletimizi en yüksek medeniyet seviyesine ve refaha ulaştırmaktır.
우리의 위대한 목표는, 우리들의 조국을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과 번영을 이룩하는데에 있다.
Öğretmenler: Yeni nesiller sizlerin eseri olacaktır.
선생님들이여, 새로운 세대는 여러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Ne mutlu "Türküm" diyene.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터키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Yurtta barış, cihanda barış.
가정에서 평화, 세계에서 평화.
Geldikleri gibi giderler.
그들이 왔던 것처럼, 그들은 떠날 것이다.[55]
Benim naciz vücudum elbet bir gün toprak olacaktır, ancak Türkiye Cumhuriyeti ilelebet payidar kalacaktır.
나의 미천한 몸은 언젠가는 먼지가 될 것이나, 터키 공화국은 영원히 우뚝 서 있을 것이다.[56]
Bu millete çok şey öğretebildim ama onlara uşak olmayı bir türlü öğretemedim.
이 나라에서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머슴이 되는 법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Süngülerle, silahlarla ve kanla kazandığımız askeri zaferlerden sonra, kültür, bilim, fen ve ekonomi alanlarında da zaferler kazanmaya devam edeceğiz.
총검으로, 무기로, 그리고 피로써 승리한 우리 군대는 승전 이후에는,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경제의 전장에서도 또한 승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Zafer, "Zafer benimdir" diyebilenindir Başarı ise, "Başaracağım" diye başlayarak sonunda "Başardım" diyebilenindir.
승리는, "승리는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것이며 성공의 경우, "나는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끝에는 "나는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것이다.
Egemenlik verilmez, alınır.
권력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획득하는 것이다.
Milleti kurtaranlar yalnız ve ancak öğretmenlerdir.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홀로, 그리고 오로지 선생님들이다.
Hayatta en hakiki mürşit ilimdir.
인생의 가장 진실된 조언자는 과학이다.
Türk Milleti bağımsız yaşamış ve bağımsızlığı varolmalarının yegane koşulu olarak kabul etmiş cesur insanların torunlarıdır. Bu millet hiçbir zaman hür olmadan yaşamamıştır, yaşayamaz ve yaşamayacaktır.
터키 민족은 자유롭게 살아왔으며, 그리고 자유로운 상태의 고유한 존재를 인식하며 지켜온 용감한 이들의 손자들이다. 이 민족은 결코 자유 없이 살아가지 않았으며, 살아갈 수 없으며, 또 살아가지 않을것이다.
Biz Türkler tarih boyunca hürriyet ve istiklale timsal olmuş bir milletiz.
우리 터키인들은 역사를 통틀어 자유와 독립을 실천해온 민족이다.
Milletimiz davranışlarında ve gayretlerinde sarsılmaz bir bütünlük gösterdiği için başarılı olmuştur.
우리 민족은 행동과 노력에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연대로 인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İki Mustafa Kemal vardır: Biri ben, et ve kemik, geçici Mustafa Kemal İkinci Mustafa Kemal, onu "ben" kelimesiyle ifade edemem; o, ben değil, bizdir! O, memleketin her köşesinde yeni fikir, yeni hayat ve büyük ülkü için uğraşan aydın ve savaşçı bir topluluktur. Ben, onların rüyasını temsil ediyorum Benim teşebbüslerim, onların özlemini çektikleri şeyleri tatmin içindir. O Mustafa Kemal sizsiniz, hepinizsiniz. Geçici olmayan, yaşaması ve başarılı olması gereken Mustafa Kemal odur!
두 명의 무스타파 케말이 있다. 하나는 나이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평범한 무스타파 케말 말이다. 두 번째 무스타파 케말은 '나'라는 단어로 말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아니라 우리들이다! 그는, 나라의 온 구석구석까지 새로운 신념을, 새로운 인생을, 그리고 위대한 이상을 위하여 노력하는 개화된 그리고 투쟁하는 하나의 군단이다. 나는 그들의 꿈을 대표하고 있다. 나의 계획은, 그들의 갈망하는, 소망하는 것들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그 무스타파 케말은 여러분이요, 우리 모두이다. 평범하지 않고, 생기넘치고, 성공을 이루는 무스타파 케말 말이다!
Saban kılıçtan üstündür.
쟁기는 칼보다 강하다.
Vatanını en çok seven, işini en iyi yapandır.
조국을 가장 사랑하는 이는, 자기 일을 가장 열심히 하는 자이다.
Vatanın bütünlüğü, Milletin istiklali tehlikededir. Milletin istiklalini yine milletin azim ve kararı kurtaracaktır.
온 조국이, 민족의 독립이 위험에 처해있다. 민족의 독립은 다시금 민족의 단합과 결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 아마시아 회의에서)
Siz orada yalnız düşmanı değil, Milletin ters talihini de yendiniz.
그대는 적뿐만이 아니라, 민족의 운명도 극복했소. (2차 이뇌뉘 전투 이후 이스멧 이뇌뉘에게 보내는 축하전보에서)
Hattı müdafaa yoktur, sathı müdafaa vardır. O satıh bütün vatandır. Vatanın her karış toprağı vatandaşın kanıyla sulanmadıkça terk edilemez.
전선 사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 사수가 있을 뿐이다. 그 지역은 온 조국이다. 조국의 다양한 지역이, 인민들의 피로 물들수록 우리는 물러나서는 아니 된다. (사카리야 전투 당시)
Peygamberimiz tilmizlerine dünya milletlerine İslamiyeti kabul ettirmelerini emretti, bu milletlerin hükümeti başına geçmelerini emretmedi. Peygamberin zihninden asla böyle bir fikir geçmemiştir.
우리의 예언자들은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하라고 명령했지, 이 민족들의 정권을 장악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의 지혜속에는 결코 이러한 생각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칼리파 제도를 폐지하면서)
Arkadaşlar, efendiler ve ey millet, iyi biliniz ki, Türkiye Cumhuriyeti şeyhler, dervişler, müritler, meczuplar memleketi olamaz. En doğru, en hakiki tarikat, medeniyet tarikatıdır.
동지들이여, 신사들이여, 오 국민들이여, 잘 아시다시피 터키 공화국은 성직자, 데르비쉬, 율법학자, 광신도들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가장 올바르고, 가장 진정한 교단은 문명입니다.
Sarık ve cüppeyle artık dünyada muvaffak olmanın imkanı yoktur. Yaptığımız muazzam inkılaplarla medeni bir millet olduğumuzu cihana ispat ettik.
터번을 쓰고 쥡베[57]를 입고 세상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우리가 행한 위대한 혁명을 통해 문명적인 국민이 되었음을 우리는 전 세계에 선포했다. (모자법 선포당시)
Herhalde alemde bir hak vardır ve hak kuvvetin üstündedir.
아마도 세상에 진리라는게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진리는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까.
Âhiren Kur'ân'ın tercüme edilmesini emrettim. Bu da ilk defa olarak Türkçeye tercüme ediliyor. Muhammed'in hayatına âit bir kitabın tercüme edilmesi için de emir verdim. Halk, tekerrür etmekte olan bir şeyin mevcut olduğuna ve din ricâlinin derdinin ancak kendi karınlarını doyurup başka bir işleri olmadığını bilsinler.
처음으로 쿠란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하였소. 이것은 최초로 터키어로 번역되는 것이오. 무함마드의 삶에 대한 전기도 번역하도록 명령하였소. 인민들이 상습적으로 읽게 하여,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배만 채울 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도 깨닫길 바라오.
Arabistan'ın muhtelif yerlerinde insan heykellerinden ve nebat resim ve suretlerinden ibaret ağaçtan ve taştan putların muhafazasına mahsup yerler vardı. Muhammed'in neş'et etmiş olduğu Mekke'deki Kabe denilen mabet bu yerlerin en büyüklerinden idi. İbrahim oğlu İsmail ile birlikte Kabe'yi bina etmişlerdi. Cebrail kendilerine o zaman beyaz ve mücella olan Haceriesved'i getirmişti, bu taş sonradan günahkarların ellerini sürmelerinden dolayı kararmıştı. Bunların hepsi, bittabi sonradan uydurulmuş masallardır.
아라비아 반도 각지에서 사람의 형상에서, 식물의 모습과 형태를 따와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들을 보관하는 곳들이 있었다. 무함마드가 출생한 메카의 ' 카바'라 불리는 집은 이러한 곳중 가장 큰 곳이었다. 아브라함(İbrahim)은 아들 이스마엘(İsmail)과 더불어 카바를 지었다고 한다. 가브리엘(Cebrail)이 그 당시 새하얗고 밝은 운석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 돌은 훗날 죄인들의 손을 타면서 검게 변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훗날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다. (고등학생들을 위한 역사교과서, 1931)
Bizim devlet idaresinde takip ettiğimiz prensipleri, gökten indiği sanılan kitapların dogmalarıyla asla bir tutmamalıdır. Biz, ilhamlarımızı, gökten ve gaipten değil, doğrudan doğruya hayattan almış bulunuyoruz.
우리는 국가 업무에 따른 원칙들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경전의 도그마처럼 여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지식을 하늘에서부터, 신비로운 계시에서부터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찾고있지요.
Türkiye Cumhuriyetinde herkes Allah’a istediği gibi ibadet eder. Türk Cumhuriyetinin resmi dini yoktur. Türkiye’de bir kimsenin fikirlerini, zorla başkalarına kabul ettirmeye kalkışacak kimse yoktur ve buna müsaade edilemez.
터키 공화국에서는 누구든 원하는 대로 유일신에게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터키 공화국의 국교는 없어요. 터키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신념을 강제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짓을 할 자는 없으며 또한 이러한 행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Bizim dinimiz, milletimize hakir, miskin ve zelil olmayı tavsiye etmez. Tam tersine Allah da, Peygamber de insanların ve milletlerin izzet ve şerefini korumalarını emrediyor.
우리의 종교는 국민들에게 천한, 나태한, 기생충같은 삶을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하느님과 예언자들은 인간의 국민의 숭고함과 명예를 지킬것을 명령합니다.
Din bir vicdan meselesidir. Herkes vicdanının emrine uymakta serbesttir. Biz dine saygı gösteririz. Düşünüşe ve düşünceye muhalif değiliz. Biz sadece din işlerini, millet ve devlet işleriyle karıştırmamaya çalışıyor, kasde ve fiile dayanan taassupkar hareketlerden sakınıyoruz. Gericilere fırsat vermeyeceğiz.
종교는 양심의 문제이다. 모든 사람들은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데 있어 자유롭다. 우리는 종교를 존중하며, 생각과 사고에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종교 업무를 민족과 국가의 사업에 간섭하지 않게 하는데 노력할 따름이며, 계급과 지위에 기반한 광신주의적 행동을 억제할 뿐이다. 우리는 결코 반동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반세속주의, 반공화국 봉기 당시)
Ben diktatör değilim. Benim kuvvetim olduğunu söylüyorlar, evet, bu doğrudur. Benim arzu edip de yapamayacağım bir şey yoktur. Çünkü ben zorâki ve insafsızca hareket etmesini bilmem. Bence diktatörlük, diğerlerini râm edendir. Ben kalpleri kırarak değil, kazanarak hükmetmek isterim.
저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제게 힘이 있다고들 말하는데, 네, 옳습니다. 제가 바란다면 못하는 일이 없지요. 왜냐하면 저는 강제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독재란,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얻어가며 통치하고 싶습니다.[58]
Ben istese idim derhâl askerî bir diktatörlük kurardım ve memleketi öyle idâreye kalkışırdım. Fakat ben istedim ki, milletim için modern bir devlet kurayım.
내가 바랐더라면 당장 군대를 불러 독재정권을 세워 우리 나라를 군사독재로 통치할 수도 있었네. 하지만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한 현대적인 국가를 세우고 싶었다네.
Çocukken fakirdim. İki kuruş elime geçince bunun bir kuruşunu kitaba verirdim. Eğer böyle olmasaydı, bu yaptıklarımın hiç birini yapamazdım.
어렸을때 난 가난했었지. 내 손에 2쿠루쉬가 들어왔다 하면 1쿠루쉬로 책을 사곤 했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이루어낸 것들 중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을거야.
Orduya ilk katıldığım günlerde, bir Arap binbaşısının 'Kavm-i Necip evladına sen nasıl kötü muamele yaparsın' diye tokatladığı bir Anadolu çocuğunun iki damla gözyaşında Türklük şuuruna erdim. Onda gördüm ve kuvvetle duydum. Ondan sonra Türklük benim derin kaynağım, en derin övünç membaım oldu. Benim hayatta yegane fahrim, servetim, Türklükten başka bir şey değildir.
군대에서 보낸 첫 날, 한 아랍인 소위한테 "네놈이 감히 '우위의 민족'[59]한테 어찌 그리 무례할 수 있느냐" 라고 뺨을 맞은 아나돌루의 한 소년의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나는 터키인의 감정을 느꼈네. 거기서 보고, 들었지. 그 다음 터키인이란 개념은 나의 깊은 뿌리가 되어, 가장 명예로운 샘이 되었네. 나의 삶의 유일한 명예요, 복인 터키인으로서의 긍지 외에 다른 것은 없다네.
Cumhuriyetin, şahısların hayatlarına bağlı kalmayarak kökleşmesi ve ölmeden önce milletin hürriyete alışması için muhalif parti kurmak istiyorum.
나는 공화국이 특정 인물들의 삶에 속박되지 않은 채 뿌리내리게하고, 내가 죽기 전에 국민들이 자유에 적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야당을 세우고 싶다네. (아타튀르크가 1930년 8월 12일, 당시 주 프랑스 터키 대사였던 페트히 베이에게 한 말)
Yaz Müfit, zaferden sonra hükümet biçimi cumhuriyet olacaktır.
쓰게나 뮈피트, 승리 이후 정부의 형태는 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1919년 아타튀르크가 마즈하르 뮈피트 칸수에게 기사를 서술하면서 한 말.)
Bir millet ki resim yapmaz, bir millet ki heykel yapmaz, bir millet ki tekniğin gerektirdiği şeyleri yapmaz, itiraf etmeli ki o milletin ilerleme yolunda yeri yoktur.
그림도 안 그리고, 동상도 안 만들고, 기술이 필요한 일들을 안하는 민족이 있다면, 단언컨대 그 민족의 발전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10.1. 연설영상

공화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한 연설로 그의 생전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Bugün cumhuriyetimizin onuncu yılını doldurduğu en büyük bayramdır.
오늘은 우리 공화국의 10년째 되는 가장 큰 국경일입니다.

Kutlu olsun!
축하합니다!

Bu anda büyük Türk milletinin bir ferdi olarak bu kutlu güne kavuşmanın en derin sevinci ve heyecanı içindeyim.
또한 저는 위대한 터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경축일을 맞이하며 가장 깊은 기쁨과 흥분 속에 있습니다.

Yurttaşlarım!
나의 국민들이여!
Az zamanda çok ve büyük işler yaptık.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많고, 거대한 일들을 해냈습니다.
Bu işlerin en büyüğü, Temeli, Türk kahramanlığı ve yüksek Türk kültürü olan Türkiye Cumhuriyetidir.
이 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근본적인 것은, 터키인의 영웅심과, 고도의 터키인의 문화를 갖춘 터키 공화국을 세운 것입니다.
Bundaki muvaffakiyeti Türk milletinin ve onun değerli ordusunun bir ve beraber olarak azimkarane yürümesine borçluyuz.
이것의 성공에는 터키 국민들의, 그리고 귀중한 우리 군대의 하나되고 협동된 위대한 발걸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Fakat yaptıklarımızı asla kafi göremeyiz.
하지만 우리가 해낸 것들은 결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Çünkü daha çok ve daha büyük işler yapmak mecburiyetinde ve azmindeyiz.
왜냐하면 더욱 많은, 그리고 더욱 위대한 일들을 해야하며 이는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Yurdumuzu dünyanın en mamur ve en medeni memleketleri seviyesine çıkaracağız.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세계에서 가장 발전하고, 가장 문명화된 조국의 단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Milletimizi en geniş refah, vasıta ve kaynaklarına sahip kılacağız.
우리 국민들은 가장 풍부한 복지, 자가용, 그리고 부를 소유할 것입니다.
Milli kültürümüzü muasır medeniyet seviyesinin üstüne çıkaracağız.
우리의 민족문화를 현대화되고 문명화된 단계를 넘도록 나아갈 것입니다.

Bunun için, bizce zaman ölçüsü geçmiş asırların gevşetici zihniyetine göre değil, asrımızın sürat ve hareket mefhumuna göre düşünülmelidir.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시간관념은 지난 세기같이 느긋함에 빠져서는 안되고, 현대의 빠르고 활동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야합니다.
Geçen zamana nispetle, daha çok çalışacağız.
지난 세월에 비해, 우리는 더욱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Daha az zamanda, daha büyük işler başaracağız.
더욱 짧은 시간에, 우리는 더욱 큰 일들을 성취해낼 것입니다.
Bunda da muvaffak olacağımıza şüphem yoktur.
여기에서 또한 성공할 것이라는 의심은 없습니다.
Çünkü, Türk milletinin karakteri yüksektir.
왜냐하면, 터키 민족성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Türk milleti çalışkandır.
터키 민족은 근면합니다.
Türk milleti zekidir.
터키 민족은 영리합니다.
Çünkü Türk milleti milli birlik ve beraberlikle güçlükleri yenmesini bilmiştir.
왜냐하면, 터키 국민은 민족이 통합하고 협동하여 강하고 패배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Ve çünkü, Türk milletinin yürümekte olduğu terakki ve medeniyet yolunda, elinde ve kafasında tuttuğu meşale, müspet ilimdir.
그리고 또한, 터키 민족이 발걸음을 걸어가는 진보와 문명의 길에서 손으로, 머리로 지식의 불꽃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Şunu da ehemmiyetle tebarüz ettirmeliyim ki, yüksek bir insan cemiyeti olan Türk milletinin tarihi bir vasfı da, güzel sanatları sevmek ve onda yükselmektir.
또한 중요하게 강조 해야 할 것은, 위대한 하나의 인간집단으로서 터키 국가의 역사적인 하나의 성질에서도 아름다운 예술을 사랑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Bunun içindir ki, milletimizin yüksek karakterini, yorulmaz çalışkanlığını, fıtri zekasını, ilme bağlılığını, güzel sanatlara sevgisini, milli birlik duygusunu mütemadiyen ve her türlü vasıta ve tedbirlerle besleyerek inkişaf ettirmek milli ülkümüzdür.
이는 즉, 우리 국민의 위대한 성질을, 피곤해않는 근면성을, 창조적인 두뇌를, 과학에 대한 관심을, 아름다운 예술을 사랑하는 것을, 민족의 단결된 마음을 쉴새없이 나아가며, 모든 종류의 방법과 행동으로 육성하며 발전하는 민족국가입니다.
Türk milletine çok yaraşan bu ülkü, onu, bütün beşeriyete hakiki huzurun temini yolunda, kendine düşen medeni vazifeyi yapmakta, muvaffak kılacaktır.
터키 민족에 매우 어울리는 이 이상은, 온 인류에 진실로 평화롭고 확신찬 길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시민적 의무를 다 하는데에서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Büyük Türk Milleti,
위대한 터키 국민이여,

On beş yıldan beri giriştiğimiz işlerde muvaffakiyet vaat eden çok sözlerimi işittin.
여러분들은 15년 전부터 함께 해온 일들에서 성공을 약속하는 많은 저의 말들을 들었습니다.
Bahtiyarım ki, bu sözlerimin hiçbirinde, milletimin hakkımdaki itimadını sarsacak bir isabetsizliğe uğramadım.
행복하게도, 이러한 약속들이 아무데에서도,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실패가 되지 않았습니다.
Bugün, aynı iman ve katiyetle söylüyorum ki, milli ülküye, tam bir bütünlükle yürümekte olan Türk milletinin büyük millet olduğunu, bütün medeni alem, az zamanda bir kere daha tanıyacaktır.
오늘, 저는 똑같은 믿음과 확신속에서 말하건대 민족국가에, 완전한 하나의 공동된 발걸음에 임한 터키 국민들이 위대한 민족이 된 데에, 온 문명세계는, 짧은 시간에 한번 더 알게될 것입니다.
Asla şüphem yoktur ki, Türklüğün unutulmuş büyük medeni vasfı ve büyük medeni kabiliyeti, bundan sonraki inkişafıyla, atinin yüksek medeniyet ufkunda yeni bir güneş gibi doğacaktır.
결코 의심할 나위 없이, 터키민족의 잊혀지지 않는 거대한 문명의 성질과 위대한 문명의 능력은 이 이후에도 발전함과 더불어 미래에는 고도 문명의 지평선에서 새로운 태양과 같이 떠오를 것입니다.

Türk Milleti!
터키 민족이여!

Ebediyete akıp giden her on senede, bu büyük millet bayramını daha büyük şereflerle, saadetlerle huzur ve refah içinde kutlamanı gönülden dilerim.
영원히 흘러가는 매 10년마다, 이 위대한 국경일을 더욱 큰 자긍심과 행복으로 평화와 번영으로 축하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Ne mutlu Türküm diyene!
나는 터키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Ankara, 29 Ekim 1933
앙카라, 1933년 10월 29일


[1] 성씨사용법이 통과되고 나서 터키 국회가 그에게 헌정한 성인 아타튀르크는 '터키인의 아버지'를 의미한다. [2] 문자개혁 이전의 오스만 문자 표기. 터키 독립전쟁 시기 이후 아타튀르크는 가지 무스타파 케말(Gazi Mustafa Kemâl)이라고 서명했다. [3] Vilayet-i Selânik, 빌라예트는 현대 대한민국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최상위 지방행정단위이며 셀랴니크는 도시 이름인데, 빌라예트 중에서는 각 지역의 중심 도시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로 나뉘어 편입되었다. [4] 現 그리스 테살로니키 [5] 공식 수료는 1905년 1월 11일. [6] 불가지론자였다는 설도 있다. 확실한건 1923년 이전까지 아타튀르크는 종교에 대해서도 꽤 자주 발언하던 편이었으며, 본격적으로 "튀르크인"의 민족주의 이론을 받아들이기 이전까지는 이슬람에 기반해 서구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지켜야한다고 발언하곤 했다. 하지만 칼리파제 폐지 이후 1925년부터 아타튀르크의 종교에 대한 시각은 '미개와 야만'의 이미지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종교에 대한 공식발언도 오스만 제국시기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데르비시 종단 해체 당시 "현대 문명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도가 전부이다. [7] 1921년 제정된 기초조직법(Teşkîlât-ı Esâsîye Kanunu) 제1조에서 오스만어로 쓰인 어구이다. 이후 언어순화 운동으로 개정된 표현은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 터키공화국 헌법 제6조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8] 현대어로는 "Hâkimiyet, kayıtsız şartsız milletindir" 혹은 "Egemenlik, kayıtsız şartsız ulusundur"이다. 혹은 이 두 단어가 섞인 표현들도 볼 수 있다. 아타튀르크 시절에 millet을 고대 튀르크어와 몽골어에서 비롯한 ulus로 바꾸었지만 현대에는 쓰임새가 많이 줄었다. [9] 쉽게 말해서 그는 현대 터키의 대통령이다. [10]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학자들(그중에서 한발리파 계열과 그 학파에서 파생된 와하브파와 살라프파)이 부정적으로 보는 대상은 이슬람이 아닌 것과 이슬람에 맞지 않다고 인식되는 것들이며 특히 서구, 기독교, 유대인, 세속주의, 민주주의가 그 대상이 된다. [11] 오스만 제국 당시에는 일부 기독교 가문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공서에서 임의로 성 비슷한 분류코드를 부여했었다. [12] 현재 터키인 혈통엔 슬라브인, 튀르크인, 토착 아나톨리아인, 그리스인 등 다양한 인종이 섞였지만 유전적으로 열성인 푸른눈을 가졌다는 건 그가 전통적인 터키보다는 서양인에 더 가까운 유전을 가졌다는 뜻이다. [13] 사실 '터키인'의 정의는 아타튀르크의 정의처럼 언어와 문화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현대 터키 공화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는 지중해 연안에서도 손꼽히는 풍요로운 지방이고 게다가 일찍부터 문명의 기틀을 쌓아올린 그리스 및 서아시아 지역과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고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인구 밀집 지역으로 손꼽혀왔으며, 이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예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이자 심장부 역할을 담당했던 것. 즉, 현재 터키 공화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는 튀르크인의 정복 이전부터 이미 세계적인 인구밀집 지역이었으며, 터키인이라는 정체성은 아나톨리아에 선주하던 다수의 그리스인, 아나톨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족과 비교적 소수였던 튀르크인이 융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더구나, 튀르크인들의 아나톨리아 정복이 있기 전에 먼저 페르시아와 중동의 이슬람 제국 정복이 있었음까지 생각한다면 페르시아계 및 아랍계 혈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일단 아나톨리아 정복 시점에서부터 '중앙아시아계 유목민으로서' 튀르크인의 혈통적 정체성은... 그런 거 없다. 애초에 중앙아시아계 유목민들의 경우 혼혈이나 외부 문화의 도입에 대단히 개방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하는 것. 따라서 터키 공화국 성립 당시 '터키인'의 정체성을 중앙아시아계 유목민의 혈통적 순혈성을 기준으로 정의했다면? 21세기 기준으로 해당 조건을 제대로 충족하는 튀르크계 국가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이다. 이들 국가의 주류 민족인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들이 원시 튀르크인의 형질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우 각국의 주류 민족이 튀르크계와 페르시아계의 혼혈인 유라시안 민족이며 문화적으로도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주류 민족인 아제리인들은 터키인들처럼 언어적으로만 튀르크어족이며 혈통적으로는 이란인들과 큰 차이가 없다. 터키 공화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성립할 수 없거나, 성립하더라도 순식간에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3대 요소 중 하나인 국민이 없어질 것이고, 국민이 없으면 주권과 영토를 영유할 실체도 없기 때문이다. 즉, '순혈 튀르크인'을 논하는 것은 해당 지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도 없는 상태에서나 할 법한 일이라는 것이다. [14] 이 곳에서 수학 교사가 무스타파의 가운데 이름이 될 케말(Kemal)이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케말'이란 '완벽' 또는 '뛰어남'을 뜻하는 아랍어 '카말(كمال)'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스타파가 동년배 학생들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보였기에 이런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15] 이뇌뉘는 터키 독립전쟁당시 그가 분전했던 전장을 흐르는 이뇌뉘강에서 딴 성씨이다. [16] 앙카라는 오스만 제국 역사 초기에 티무르 제국과 결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덧붙여 이전 항목에서는 앙카라가 오스만 제국의 첫 번째 수도라고 되어 있었지만, 첫 번째 수도는 앙카라가 아니라 쇠위트(Söğüt)였다. 또한 앙카라는 오스만 제국 창건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도 아니었고, 오스만 제국이 앙카라를 점령한 것은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56년이다. [17] 사실 전사자 수로는 오스만군이 5713명으로 3677명이 죽은 그리스군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전병력이 9만 6천여 명인데 그리스군은 13만에 달했고 대포와 기관총 수도 그리스군이 오스만군 2배에 달했으며 심지어 그리스군은 18대 전투기를 이끌고 대응 사격까지 하여 고작 2대 정찰기를 보유한 오스만군보다 장비와 병력면으로 압도적이었다. 이랬음에도 그리스군은 전선에서 밀려났고 전사자는 오스만군보다 적어도 반대로 부상병은 오스만군의 2배가 넘었으며(부상병이 많아도 문제가 되는 게, 놔두면 죄다 죽을 게 뻔하고 의료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들을 돌보기 위하여 전투병 일부를 차출해야 하기 때문) 나중에는 탈영병까지 속출하면서 더이상 길게 전투해봐야 그리스군 전사자가 계속 늘 게 뻔했다. [18] 당연하지만 그리스에선 굴욕적인 날이다. 이 대패로 이 전투를 지휘한 트리쿠피스 중장과 부사령관 키몬 디예니스(Κίμων Διγενής) 소장, 참모장 페트로스 수밀라스(Πέτρος Σουμίλας) 소장 등의 그리스군 장군들은 죄다 군대에서 불명예 퇴역당했다. [19]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을 뽑기 시작한 건 1927년부터로 그 이전에는 매회마다 화제의 인물을 선정했었다. [20] 오스만 제국 후기, 터키 공화국 초기의 사회학자로 본인은 소수민족 자자족 출신이다. [21] 본인이 하얀 피부에 파란 눈을 가졌다는 점도 외모보다는 정체성을 강조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파란 눈은 유전적으로 열성이기에 순수 코카시안들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특성이고 아타튀르크는 심지어 그리스 태생이었기 때문에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에게 공격받기도 했다. 정작 아타튀르크는 평생을 터키 민족주의자로 살았다. [22] 재미있는 것은 현재 이 정당은 케말리즘(아타튀르크주의: 공화주의(Cumhuriyetçilik), 민족주의(Milliyetçilik), 인민주의(Halkçılık), 국가주의(Devletçilik), 세속주의(Laiklik), 혁명주의(İnkılapçılık))과 사회민주주의를 정강으로 추구하고 있는 정당이라는 점이다. [23] 터키의 여성 투표권, 참정권은 1930년에 허용되는데 이는 당연히 이슬람권에서는 최초고 다른 서방권 국가들과 비교해봐도 비슷하거나 조금 더 앞서있다. [24] 여사는 훗날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10130002091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1-01-30&officeId=00020&pageNo=2&printNo=8421&publishType=00010 [25] 보충설명을 하자면, 아랍어로는 모두 별개의 음가를 가지고 있지만 터키어로는 모두 s의 음을 가지는 ث, س, ص 와 터키어로는 모두 z의 음을 가지는 ذ, ز, ض, ظ 가 있으며 모음표기는 더 열악해서 터키어에 존재하는 8개의 모음 가운데 ا (엘리프)로는 a, e를, ي (예)로는 ı, i 를, 심지어 و (바브)는 자음인 v를 포함해 o, ö, u, ü 다섯 개의 음가를 모두 담당하는 구조다. 터키어의 모음조화 규칙을 알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지만 모음부호를 붙이지 않는 단어들, 이를테면 لاله (튤립, lâle), پادشاه ( 파디샤, padişah), دکيز (바다, deniz), صحته (가짜, sahte) 같은 건 익숙해지지 않으면 어찌 읽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위 글자들을 현대 터키문자로 1:1로 전사하면 lalh, padşah, dniz, shth가 된다. [26] 문자개혁에서 자문위원으로 초대된 학자들이다. 아타튀르크는 서구의 학자들을 초청해서 개혁을 자문받았는데 대표적으로 교육 철학으로 유명한 존 듀이가 있다. [27] 신앙의 수호자라는 터키식 칭호. 케말은 터키 독립전쟁과 1차 대전, 특히 갈리폴리 전투의 활약으로 이 칭호를 얻었다. 아타튀르크는 세속주의 개혁으로 이슬람 세력의 비판을 종종 듣지만 그들도 아타튀르크의 독립전쟁은 까지 않는다. 또, 터키의 도시 명인 가지안테프 시의 어원이 된 단어이기도 하다. [28] 당시에는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고, 노벨평화상(?) 후보기도 했다! [29] 이는 다르게 본다면 아타튀르크가 단순히 남들에게만 서구적인 마인드를 강요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그 자신부터 진짜로 서구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0] 아타튀르크가 상술한 것처럼 무려 8명의 아이를 입양한 것도 이러한 설을 진지하게 믿도록 부채질하는 감이 있다. [31] 터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타튀르크의 사진 중 하나이자 터키 리라의 7차 도안 중 10만, 25만, 50만, 100만리라, 500만리라, 1000만리라, 2000만리라권과 새 터키 리라권에서 1,5,10,20리라권에 들어가있다. [32] 터키 학교 교실에 들어가보면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 사진이 걸려있다. [33] 그리고 아타튀르크대로를 교차하는 그 다음 큰 대로는 거의 언제나 이뇌뉘 대로(İnönü Caddesi)가 된다. [34] 아타튀르크가 일부러 자손을 남기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됐다. [35] 툰젤리 도의 행정자료를 보면 이 반란이 일어나기 전인 1935년에 시행된 인구조사에서 툰젤리 도 전체 인구수가 101,099명, 1940년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전체 인구수는 94,639명으로 집계되어있다. 아타튀르크 시절의 인구조사는 매우 철저해서 인구조사 기간 동안에는 지방의 경우 외출조차도 철저하게 통제해서 조사했다. [36] 튀르크인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오스만 제국이 있던 189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져왔기 때문에 온전히 아타튀르크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애매하다. [37] 정확하게 말하면 PKK와 의견을 같이하는 쿠르드 분리주의자들. 다수의 쿠르드인들은 터키에 속하며 PKK에 동조하지 않고 살고 있다. 오히려 PKK 때문에 자신들까지 잠재적인 반란자로 몰린다며 불쾌해하는 쿠르드들도 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이나 지금의 북한을 떠올려보자. 1930년의 한반도 내부 다수나 지금 북한의 주민들은 부자유와 부조리를 인지하면서도 그냥 살고 있었다. [38] 2014년 터키 대통령이 되었다. 이슬람주의 정당인 정의개발당 소속이며, 아니나다를까 집권하고 반세속(케말)주의 정책으로 시끌벅적하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39] 당시 아랍권 지역 인구가 적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무함마드 알리파샤의 통치기 당시 오늘날 인구 1억을 자랑하는 이집트의 인구가 고작 200만이었다. [40] 게다가 그마저도 일본 특유의 이상한 정신이니 뭐니 하는건 전혀 바꾸지 않아서 장기적으로는 실패했다. 애초 일본이 완벽하게 개혁에 성공했다면 태평양 전쟁같은것은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고 중일전쟁에서 태평양 전쟁까지의 각종 엽기적인 모습들도 덜 보여줬을 것이다. [41] 오스만 제국 시절 터키인들은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 시절 사람들의 이름은 오늘날 아랍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본명과 부계명을 사용해 호칭하거나, 출신지나 별칭, 관직이 있을 경우 관직이나 호칭을 붙여서 썼다. 이를테면 아타튀르크의 이름은 '알리 르자 오을루 무스타파(Ali Rıza oğlu Mustafa)', 좀 더 옛날식으로 표기하면 '무스타파 빈 알리 르자(Mustafa bin Ali Rıza)'라고 불렀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인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Köprülü Mehmet Paşa)의 경우, 앞에 붙은 쾨프륄뤼는 가문의 이름이나 성이 아니라, 출신지를 의미하며(오늘날 마케도니아의 벨레사), 뒤에 붙은 파샤는 고관에 대한 칭호이다. [42] 이교도인 그리스군을 상대로 분전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으로,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인 오스만과 그 아들인 오르한도 가지 호칭을 사용했었다. [43] 그리고 의회는 아타튀르크 본인에게만 저 성씨를 허가했기 때문에 아래에 나오는 양녀들과 여동생을 포함한 가족들과 아타튀르크는 성이 다르다. 원래는 저 성을 쓸 당시 만약 아타튀르크에게서 자손이 태어나면 '아타단(Atadan)'이라는 성을 붙일 예정이었지만, 아타튀르크가 자손없이 죽는 바람에 그럴 일도 없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타튀르크의 여동생인 마크불레가 아타단 성을 받았지만 마크불레에게도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는 아무도 쓰지 않는 성이 되었다. [44] 원래 역 이름은 탄도안(Tandoğan)이었지만 2016년에 바뀌었다. [45] 사실 현대 국가들의 국부들은 소박한 장례를 원하는 본인 의사와는 반대로 신성시 되는 경우가 많다. 후임주자가 이들을 신성화 해서 자신의 정권의 입지를 강하게 할 때 주로 쓰는 방법인데 대표적으로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도 자기 생가는 그냥 대중에게 공개된 쉼터로 만들고 유해는 화장해서 강에 뿌려달라 했지만 사후 생가는 박물관이 되고 유해는 보존중이다. 북한 김일성도 빨치산 활동 당시 동료들이 매장된 대성산혁명렬사릉에 함께 묻히기를 원했지만 김정일이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의 집무실은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이란 이름으로 박물관화 하고 시체는 박제해서 보존중이다. 가장 기구한 사례가 블라디미르 레닌인데 자신은 어머니 묘 근처에 조촐하게 장례를 치뤄달라고 했으나 후임인 스탈린이 레닌 영묘를 만들어 시체를 박제하고 공산주의 성지로 만들어 버린다.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탈스탈린 운동을 펼치면서 스탈린의 시체는 무덤으로 갔으나 레닌의 시체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는 이유로 소련이 해체된 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다.(좀더 정치적으로 보자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레닌을 신성시 하고 있어서 이장을 반대하는면도 크다. 현재 집권당인 통합 러시아당은 공산주의와 척을 지고 있어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국민 여론도 이장에 찬성하는 의견이 더 많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레닌의 시신을 보존하다보니 소련-러시아의 엠버밍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위의 북한의 사례처럼 독재자들의 시신이 보존될 때 거액을 받고 완벽하게 관리해준다고 한다. [46] 하지만 알바니아나 그리스인들 역시 터키인과 마찬가지로 금발이 별로 없는 편이다. [47] 이는 현대 터키인의 정의로 굳어진다. [48]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 민족의 국가이며(이는 현재 그리스 내 역사학계의 입장 그대로다) 그리스 민족의 국가인 그리스가 부활하였으니 그리스가 동로마 제국의 진정한 계승국이며 그리스인이 살고 있던 땅을 수복하여 제국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논리의 사상. 이미 제국의 옛 영토인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를 차지하고 있는 튀르크족이나 슬라브족은 알 바 아니다라는 식의 논리이다. [49] 사실 이슬람권 국가의 지도자들 중 개방적인 성향인 이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똑같이 욕을 먹는다. 파키스탄의 국부인 모하마드 진나 힌두교도 등 이교도들에게 관대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까이며,(이는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인도의 국부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도 실제 본인은 이슬람에 유화적이지도 않은 독실한 힌두교인이었지만 이슬람교에 너무 무르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힌두교 원리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알제리의 전 대통령이었던 후아리 부메디엔과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하비브 부르기바는 대통령 재임 중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술 판매를 보장, 허용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한다. 특히 부메디엔은 알제리 대통령 재직 중이던 1978년에 갑자기 돌연사했는데 이러한 그의 죽음을 두고 부메디엔의 세속주의 노선에 반발하던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부메디엔을 독살했을거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50] 터키에서는 전통적으로 아침을 푸짐하게 먹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빵과 초르바를 한 그릇 비우고, 그 다음에 수죽이라고 불리는 소시지, 오이, 토마토, 올리브, 치즈 몇종류, 삶은 달걀, 잼을 빵과 홍차와 함께 먹는 것이 기본적인 아침식사이다. 현대에는 일상이 빡빡하다보니 제대로 아침 챙겨먹는 사람들이 줄고있지만 시골에서는 여전히 저렇게 푸짐하게 챙겨먹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시절 기준으로 아타튀르크는 엄청 간단하게 먹은 것이다. 아타튀르크는 기본적으로 과식이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해서 삶의 내내 소탈한 식습관을 고수했다. [51] 터키어로 아이를 뜻하는 çocuk(초죽)의 테살로니키 사투리가 çucuk(추죽)인데 적당한 동남방언으로 옮겼다. [52] 그리스에서 스파나코피타(Σπανακόπιτα / Spanakópita)라고 불리는것으로 페타치즈와 시금치로 만든 소를 채운것이다. [스포일러] :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떨어져 죽은줄 알았던 어린 시절 케말이 죽지 않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서 밀밭을 달리며 노는장면으로 끝난다. 그 노는 장면에서 아타튀르크의 터키 공화국 건국 10주년 행사 육성 연설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54] 이건 원래 로마속담이다 [55] 이 말에 대해선 터키 독립전쟁 당시 그리스군을 지칭한다는 설과, 제1차 세계 대전 종결후 이스탄불로 귀환한 아타튀르크가 보스포루스 해에 떠있는 협상국 군함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아타튀르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Veda와 그 시기를 배경으로한 액션영화 Son Osmanlı는 두 번째 설을 따랐다. [56] 아타튀르크의 영묘가 건설되기 이전까지 임시로 보관되던 현 앙카라 민족학 박물관에서 아타튀르크의 관이 놓여있던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57] 로브 형태의 아랍 전통의상으로 터키에서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착용하는 옷. [58] 이 말은 자기변명이다. [59] 압뒬하미트 2세의 반동개혁과 관련된 표현이다. 당시에는 민족들을 별칭으로 불렀는데, 압뒬하미트 2세는 범이슬람주의로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공용어를 아랍어로 바꾸려 했다. 그동안 천시했던 아랍인들에 대해 "우위의 민족(Kavm-i Necip)이란 호칭을 붙여주면서 우대했던 것도 그와 관련된 정책이다. 한편 아르메니아인은 '충성스러운 민족'(Millet-i Sadıka)라고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