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1 12:44:11

말플라케 전투



파일:The_Battle_of_Malplaquet,_1709.pn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9년 9월 11일 프랑스 왕국 스페인령 네덜란드[1]의 국경 근처 말플라케에서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연합군이 이 전투에서 명목상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프랑스군에 비해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고, 프랑스는 이 전투를 통해 불리했던 전황을 만회하는 데 성공한다.

2. 배경

1709년 봄, 루이 14세는 프랑스군이 최근 몇년간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블레넘 전투, 라미예 전투, 오우데나르데 전투, 릴 공방전에서 연이어 참패하고 설상가상으로 1708~09년 겨울의 대한파로 인해 프랑스 전역에 대기근까지 돌면서 60만 명 넘게 사망하는 등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이에 루이 14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말버러 공작 존 처칠에게 밀사를 보내 휴전을 제의했다. 말버러 공작 역시 전쟁을 하루속히 끝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앤 여왕은 존 처칠의 부인이자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라 재닝스 처칠의 지나친 정치 간섭에 질려 그녀에게 "우리의 우정은 끝났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정적들은 여왕이 존 처칠에게 등을 돌렸다고 판단해 정치적 공세를 가했고, 국민들 역시 오래 지속된 전쟁에 지쳐 그들 사이에서 존 처칠이 전쟁을 일부러 질질 끌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읽은 존 처칠은 당시 영국 내각을 장악하고 있는 휘그당에게 프랑스와 강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연이은 승리로 기고만장해진 휘그당은 루이 14세에게 평화 협상을 해주는 대가로 40개의 조건 수용을 요구했는데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전부 토해내라는 등 프랑스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나 그 중에 손자 펠리페 5세를 물러나게 하거나 어떠한 도움도 주지 말라는 요구를 본 루이 14세는 "내가 전쟁을 해야 한다면 나는 적들과 할 것이다. 상대는 나의 손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뒤 수용을 거부했다. 그리고는 백성들에게 대자보를 발표했다.
"나는 개인적인 희생을 치르고 명예가 훼손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 백성들에게 필요한 평화를 곧바로 얻기 위해서는 내 성품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기꺼이 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스스로 지킬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대안도 더이상 찾을 수 없다. 나는 우리 프랑스를 누르기 위해 무력과 책략으로 모인 모든 힘보다도 통일된 프랑스가 더 강력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분의 도움을 청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대결에는 여러분의 안전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힘을 모은다면 적은 우리가 결코 부당하게 대우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국왕이 직접 대자보를 발표하며 지원을 호소하자, 프랑스 각지에서 백성들이 호응해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지원병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막대한 기부금 역시 모였다. 루이 14세는 이를 통해 대군을 편성하고 당시 프랑스의 유일한 희망으로 간주되고 있던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원수를 사령관으로 삼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파리를 향해 진군하는 적을 격퇴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빌라르 원수는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전투를 회피하기로 하고 1709년 6월 연합군이 릴에서 출발해 투르네 요새를 공략하는 걸 방관했다. 그러면서 영국 해협의 연안부터 아르덴 지역까지 이르는 국경 지역을 요새화해 연합군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했다.

1709년 8월, 연합군은 2달에 걸친 공방전 끝에 투르네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연합군은 몽스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몽스가 공략당하면 파리로 향하는 진로가 생기기 때문에, 빌라르 원수는 이곳만큼은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말프라케 마을과 라 폴레 마을 사이의 협곡에 자리를 잡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8월 29일, 말프라케 협곡 인근에 도착한 연합군 총사령관 존 처칠은 당장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연합군 고위 장성들과 네덜란드 관료들은 이를 반대했다. 그들은 거듭된 행군으로 많은 병사들이 도망치고 있으니 여기서 쉬면서 병력을 규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처칠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랐고, 그 사이 부플레르 공작 루이 프랑수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빌라르 원수의 군대와 합세했다. 부플레르 공작은 빌라르보다 계급이 높았지만 기꺼이 그의 지휘를 받겠다고 나섰고, 그 덕분에 프랑스군은 지휘부가 서로 분열되었던 오우데나르데 전투와 달리 이번에는 일치단결한 자세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연합군은 9월 11일에 비로소 공세를 개시한다. 이로서 파리로 진군하려는 연합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군 간의 대결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프랑스군은 우익을 라그니에르 숲에 배치했다. 그들의 대열은 전면에 통나무 방벽을 배치한 채 타이즈니예르 숲으로 3마일 정도 뻗어 있었다. 또한 좌익 끝에는 요새가 앞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프랑스 보병대는 중앙의 긴 대열을 따라 말프라케 협곡에 쭉 배치되었다. 빌라르는 그의 기병대를 전선 후방에 집결시켰고, 포병대를 여러 고지대에 분산 배치시켰다. 이 기병대는 지형이 매우 험준하고 비좁기 때문에 적의 측면을 향한 기동전을 벌이지 못하고 전선이 돌파될 때 투입되어 밀려드는 적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존 처칠과 외젠은 지형을 살펴본 후 프랑스 좌익 끝에 불쑥 튀어나온 요새를 공략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프랑스 우익에 대한 위장 공세를 가하고 중앙도 견제해 그들을 묶어놓은 뒤 좌익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위더스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 우익부대에 가장 많은 병력이 할당되었고 프랑스군 좌측면을 빙 돌아가서 라폴레 마을을 점거하는 역할을 맡겼다. 9월 11일 오전, 영국군 5개 대대,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덴마크군 14개 대대, 기병대 몇 개 대대를 거느린 위더스 장군은 짙은 안개가 낀 틈을 타 라 폴레 마을을 향해 진격했다. 이와 함께 오라녜 공이 지휘하는 31개 대대는 프랑스 우익에 대한 위장 공세 임무를 맡았다.

오전 7시 30분, 안개가 걷혔고 양측 포병대는 서로에게 포격을 가했다. 오라녜 공은 작전에 따라 프랑스군 우익에 위장 공세를 가해 적의 시선을 잡아 끌었고, 위더스 장군은 타이즈니예르 숲을 통해 라 폴레 마을을 향해 진군했다. 이후 위더스 장군의 군단은 프랑스 좌익과 충돌했지만, 많은 부대가 습지를 뚫고 가느라 지체되어서 제때에 전투에 임하지 못했다. 한편 빌라르는 적의 주공이 아군 좌익이라고 판단하고 우익을 맡고 있던 부플레르 공작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부플레르 공작은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오라녜 공이 존 처칠과 외젠의 명령을 무시하고 전면 공세를 개시했기 때문이다. 오라녜 공의 지시를 받은 31개 대대는 라그니에르 숲으로 밀려들었지만 부플레르 공작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 병사들의 맹렬한 반격으로 순식간에 6천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오라녜 공의 공세는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지리멸렬해졌다.

반면 프랑스 좌익을 향한 공세는 성과를 거두어 프랑스군을 요새 부근에서 밀어내기 시작했고, 위더스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라 플레 마을을 향한 공세를 잘 수행했다. 이에 빌라르 원수는 적의 압박을 완화시키기 위해 중앙에 배치된 아일랜드 여단을 동원해 적의 중앙을 공격하게 했다. 아일랜드 여단은 처음에는 프로이센 보병대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지만 곧 역습을 받자 숲 속으로 흩어졌고, 연합군은 진격을 재개했다. 그 과정에서 외젠은 머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지휘를 계속했고 빌라르는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전장을 이탈했다.

이윽고 연합군 포병대가 앞으로 나아가 프랑스군 우익에 포격을 개시했다. 이에 적군이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자, 오라녜 공은 다시 공세를 개시해 프랑스군이 최전방에 설치한 목책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군 전열이 흐트러지자, 연합군 기병대가 즉시 적의 공백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 기병대가 출격해 이들을 향해 사납게 몰아쳤고, 후방에 배치된 프랑스 예비대 역시 즉시 투입되어 적에게 역공을 가했다. 이로 인해 연합군은 적의 반격에 밀려 패퇴했다가 다시 공격하는 걸 6번이나 반복했고, 이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윽고 측면을 찔린 프랑스 좌익 부대가 철수를 개시하자, 부플레르 공작의 프랑스 우익 역시 철수했고 중앙 부대도 뒤이어 철수를 개시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아군의 후미에 서서 적의 추격을 철저히 대비했고, 연합군은 오랫동안 격전을 벌여 막대한 손실을 입은 터라 적을 추격할 기력이 없었다. 이후 연합군은 말플라케 협곡을 장악했지만 프랑스군을 섬멸시키지 못했다.

5. 결과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1,000명이었고 연합군의 사상자는 21,000명이었다. 또한 프랑스군은 대포 16문과 많은 깃발들을 상실했다. 이후 연합군은 몽스 요새로 진군해 다음달에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말플라케 전투에서 전체 전력의 20%가 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공세를 펼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연합군의 파리 진군을 허용할 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발판을 마련한다.
[1] 현재의 벨기에 룩셈부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