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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퐁스 도데가 1873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자 대표작. 원문(프랑스어)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에 넘겨주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국의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어를 가르칠 수 없었던 슬픈 역사를 상기시켜 한국에서도 유명해서 1980~90년대에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을 정도였지만, 후술하듯 당시 알자스-로렌 지역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에 바로 대입하기는 어려운 복잡한 사정이 존재한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2. 줄거리
주인공 프란츠는 매일 학교를 지각하던 아이인데 어느 날에도 학교에 늦게 갔더니만 뜻밖에도 마을 어른들이 교실에 들어와 있어 의아해한다. 알고보니 그 지역이 독일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독일어 이외의 언어를 가르칠 수 없다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하달된 뒤였다.프란츠는 마을 사람들과 다른 학생들과 함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받게 된다. 수업이 끝남과 함께 아멜 선생님이 "VIVE LA FRANCE!!"( 프랑스 만세!!) 라는 구절을 칠판에 쓰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소설로, 민족의식과 모국어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는 소설이다.
명대사로는 " 프랑스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국민이 설혹 노예의 처지에 빠지더라도 국어만 잘 지키고 있다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와 마지막에 아멜 선생님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직하게 내뱉는 말인 "다 끝났다... 돌아들 가거라."[1]가 있다.
3. 평가 및 논쟁
3.1. 비판론
이 소설의 중요한 문제점은 실제 알자스-로렌 지역 주민들의 언어 및 민족 의식과 다르게 일방적으로 파리- 일드프랑스 중심의 프랑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사실을 왜곡하여 쓰였다는 점이다. 알퐁스 도데가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다는 것과 이 소설이 나올 때 프랑스 문인들에게 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반독일정서가 강했고 그로 인한 자문화 우월주의에 바탕해 쓰여졌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알자스와 로렌(로트링겐)은 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그런데 17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침공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대튀르크 전쟁으로 열심히 오스만 제국과 싸우던 틈을 타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의 뒤통수를 때리며 알자스[2]를 침공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와 루이 14세는 전유럽으로부터 유럽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루이 14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알자스에서 군사 활동을 지속하였으며 결국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알자스에 대한 점유권을 획득했다. 이후 알자스를 점령한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주민들의 독일어 사용을 억제하고 강제로 프랑스어로 교정 중에 있었다.[3] 로렌의 경우 로렌 공국이 프랑스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와 오랜 기간동안 통혼하고, 1552년 앙리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대항하기 위해 작센 선제후 모리츠를 후원하는 대가로 일부 주교구를 얻어내면서 일찍이 합병된 탓에 결국 프랑스화되었지만 알자스는 프랑스에 강제로 병합된 지 수십년이 지난 작중 시점(1871년)에서도 주민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독일어의 방언인 알자스어를 사용하고 있고 많은 주민들이 능통하다. 이 지역 출신인 1949년생 아르센 벵거 감독의 인터뷰의 따르면 자신이 자라던 시절 동네 모든 사람들이 알자스 독일어를 썼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모든 사람이 알자스 독일어를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새로운 언어(프랑스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며 학창 시절 내내 독일에 대한 증오를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독일을 가보니 마을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면서 프랑스의 정책과 교육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프랑스 역시 전근대시대 부터 알자스 지역의 독일계 주민들에게 인위적으로 프랑스화 교화를 실시했다. 프랑스는 알자스의 독일계 주민들에게 지속적으로, 때로는 강압적인 프랑스화 정책을 펼쳤다.
이 지역이 독일계 지역이었다는 사실은 소설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프랑스식인 프랑수아(François)가 아니고 독일식인 프란츠(Franz)인데 이는 당시 알자스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 독일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소설에 명확히 나오는 인명인 하우저(Hauser)[4]나 바히터(Wachter)[5]도 분명한 독일계이다.
사실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본토에서조차도 프랑스어를 쓰는 인구는 전체 프랑스 국민 중 1/4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 북부 지역뿐이었고 남부 프랑스에서는 고유한 언어인 오크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지역 언어의 상위로서 프랑스어를 표준화하고 국어로서 교육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다.
프랑스가 지금의 국경을 확정한 것이 상당히 오래전이고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프랑스는 그때까지 수백 년간 점진적으로 동, 서, 남, 북의 국경지방과 섬 지역을 외교와 전쟁으로 병합해 확장하면서 성장했다. 유럽 주요국이 근대 이후 국경을 결정하며 강탈하거나 교환한 영토는 알자스-로렌만이 아니며 그런 지역에서는 소속 국가의 대표 언어가 지역민의 단독 공용어가 아닌 곳이 아직도 여럿 있다. 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생각하면 안 된다.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 본국에선 애국주의+내셔널리즘 반프로이센 풍조의 영향으로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들에 대한 대우가 미묘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는 알자스 출신으로, 병합 이후 그의 형제들은 프랑스 국적을 택할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소속감이 깊었지만 당시 프랑스군 내에서 알자스-로렌 출신은 백안시당했다. 알자스 지역의 독일어 방언을 탄압하기도 했고[6] 드레퓌스 대위가 범인으로 지목된 데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 외에 알자스 출신에 그의 아버지는 독일 국적으로 알자스에 남아 있었다는 점도 꼽혔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계 시민들의 상점들이 약탈이나 방화 등의 린치를 당하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여기엔 알자스-로렌 출신 사람들이 운영하는 상점도 포함되었다.
알자스-로렌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가 유화적으로 바뀐 뒤에 프랑스 편입에 동의한 것이며 알자스-로렌 문서를 참고. 사실 왕가의 혈통을 따져 지배자를 다른 나라에서 모셔오고 깃발을 정하던 시대가 19세기 중반까지였기 때문에 일반 민중의 언어는 큰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실제로 알자스-로렌에서 초등교육이 시작된 것은 보불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 해였다고 한다. 즉, 초등교육 자체도 이런 반독일어(지방어) 국민국가 교육정책들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애당초 오래 이루어진 적도 없는 (그 전엔 수업 자체가 없었으니) 프랑스어 수업의 폐지에 그토록 격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도 어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알자스 지역과 로렌 지역의 차이도 감안해야 할 요소다. 근세 이래 가문 단위로 미분화된 유럽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프랑크 왕국 분열기의 역사를 거쳐 10세기 하인리히 1세의 정책에 따라 알자스가 로트링겐에서 분리되어 슈바벤으로 병합된 후 로렌과 알자스는 전혀 다른 역사를 거쳐 왔다. 면적이나 인구로 봤을 때 알자스는 규모가 작고 프랑스화된 로렌의 비중이 크다. 로렌은 나중에 남쪽으로 인접한 부르군트 지역과 역사를 공유하며 비교적 빨리 프랑스화 되었지만 라인강 유역권인 알자스 지역은 한자 동맹의 일원으로서 스위스에서 라인란트로 이어지는 라인강 경제권을 구성했다. 비교적 빨리 프랑스에 동화된 로렌과 오랫동안 독일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알자스의 상황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동로렌은 이미 근세 부터 프랑스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서로렌 일부 지역을 제외한 로렌의 다수의 지역에서는 프랑스어를 말하고 16세기 이후로는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알자스는 대다수의 지역에서 20세기 후반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일식 이름을 가지고 독일어를 쓰며 지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처럼 이 지역 출신의 사람들은 국적이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뀌었지만 본인을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알자스-로렌을 동일한 지역으로 묶어서 논의하기는 어렵다.
3.2. 옹호론
민족주의의 실체에 대한 주장은 결국은 그 시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며 동시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개인마다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쉽사리 일반화하기 어렵다.1871년 프로이센 왕국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 통일을 달성하여 독일 제국이 수립될 때 소독일주의를 지향하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알자스-로렌의 합병에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당시 프랑스 국민으로 남기 원했던 주민들은 프랑스로 떠나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당시 주민의 10%가 고향인 알자스-로렌을 떠났다.
이들이 독일인으로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는 증거는 독일에 병합되어 독일에 다시 동화될 시간이 어느 정도 있었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일부 알자스-로렌 주민들이 독일을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상당수의 알자스-로렌인이 징집을 피하기 위해 잠적하거나 스위스로 도피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군국주의가 대세였던 데다 보불전쟁에서 짧은 기간 동안 싸운 후 승리한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후와는 달리 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참전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자원해서 입대했지만 알자스-로렌에서는 많은 이들이 독일 제국군으로의 징집을 거부했으며 아예 프랑스로 넘어가서 프랑스군에 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주민들이 독일군에서 싸우기를 거부했다는 것은 당시 독일 관료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군에서는 알자스-로렌의 징집 대상자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징집통지서를 불과 몇 시간 전에 보내고 무장병력을 동원하는 방법을 써야 했고 알자스-로렌 출신 병사들은 프랑스와의 전투보다는 동부전선에 투입했다. 1917년 7월을 기준으로 알자스 출신 병사들의 탈영 비율은 그 외의 지역 출신에 비해 80배 가량 높았다. #
지방분권의 역사가 강했던 독일어권 국가들의 역사를 감안하면 당시 알자스-로렌 주민들은 독일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알자스인이나 로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경우가 많았을 것이며 독일인 정체성은 있지만 프로이센 왕국에 의해 통일된 독일의 지배는 원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일례로 20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바이에른 주민들은 국적은 독일이지만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바이에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지녔다.
3.3. 기타 의견
본작을 비판하는 쪽이든, 그를 반박하는 쪽이든 결국은 양측 모두 범게르만주의와 대 프랑스 국수주의 쇼비니즘에 이용당하는 감이 없지 않다.물론 창작된 시대적 정황을 살펴봤을 때 알퐁스 도데 본인이 대 프랑스 국수주의 쇼비니즘적 의도가 전혀 없었다거나 최소한 그런 식의 프로파간다를 위해 이용당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 드레퓌스 사건을 겪고도 프랑스 공화국 정부의 노골적인 지방어 탄압과 프랑스 국수주의 쇼비니즘 찬반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심지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켈트어 지역인 브르타뉴에서는 신생아의 이름까지 프랑스어로 쓰지 않으면 출생신고를 못하게 하는 매우 강압적인 정책을 펼쳤던 게 프랑스 정부고 오늘날 프랑스 헌법도 프랑스어만이 국어임을 못 박고 있어서 온갖 반발을 사고 있다. 프랑스의 지방 언어 문제 문서 참고.
하지만 알자스와 로렌의 주민이 독일계라는 이유로 독일어만을 강제하는 것 역시 옳다고 볼 수 없다. 민족이란 단지 혈통과 언어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질감에 기반하기 때문이다.[7] 그런 면에서 알자스와 로렌 주민이 독일 제국 권역과 같은 동질감을 지녔으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문화적 독일어권은 962년부터 1806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으로 묶였지만 중앙집권제 구축에 실패하여 오랜 기간 동안 황제가 직할령보다 제후들이 자치권을 가지고 통치하는 영토가 더 컸고 이들 제후국 중 일부는 나중에 네덜란드와 스위스라는 명칭으로 실질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지만 외교와 국방에서 자주권을 행사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별개의 국가들이 이합집산하는 체제로 변질되었다. 프랑스어권이 절대군주제 등장 이래 적어도 북프랑스 한정으로는 수백년간 파리 중심의 중앙집권적 언어 통일을 이룩해 왔던 것에 비하면 하나의 독일민족이라는 개념은 마르틴 루터의 근대독일어 창시와 전국적 보급 후 수백년만에 겨우 등장한 일종의 신흥사조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르만족 계통 국가라고 해서 무조건 그 사조에 포함되는 것도 아니었다.[8]
예를 들어 네덜란드 동부 4주는 역사적으로는 독일 왕국의 핵심 구성원인 작센족을 주축으로 하는 저지 독일어권이지만 그 중 누구도 자기가 독일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네덜란드는 신성 로마 제국이 아직 기세를 유지하던 16세기에 이미 전성기를 맞이하여 독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9] 눈부신 국가 발전에 힘입어 네덜란드어 역시 확립되었으므로[10] 굳이 더 생소한 성서 독일어를 쓸 이유도 없었고, 독일의 작센족과는 언어적으로도 단절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국호의 유래가 된 프로이센 지역은 원래 독일도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원래 프로이센족을 비롯한 발트계 종족들이 땅이었는데 튜튼 기사단이 십자군 성전이라는 미명하에 침공해서 개척한 식민지였고 그 홀대받던 독일 문화권에서조차도 미개한 깡촌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오늘날에는 독일 땅도 아니다. 물론 프로이센 왕국의 실질적인 전신은 황제선거에 참여하는 7 선제후 중 하나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은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의 노력으로 중앙집권제 국가의 기틀이 닦이면서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출범했고, 이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 제국이 출범한 것이다.[11] 하지만 북독일의 강력한 절대 왕정 국가였던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계 지역 중에서도 최서단에다가 시민들이 주축이 된 여러 자유도시가 즐비하고 및 일부 지역은 성직자 주교후가 통치했던 알자스-로렌 주민 입장에서는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이 소설의 요점은 프로이센이 강제로 프랑스어를 금지한 게 나쁘다는 것이다. 알자스-로렌에서 무슨 언어를 쓰고 무슨 언어를 배우고 어떤 정체성을 갖든 그건 알자스-로렌인들이 자유롭게 결정할 일이고 그 자유를 탄압한다면 프랑스 정부든 프로이센 정부든 똑같이 잘못되었다.
부차적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소는 당시 유럽문명권에서 프랑스어의 입지란 오늘날 전세계에서 영어가 지니는 이미지에 비견될 정도로 대우가 좋았다는 점이다.[12] 때문에 프랑스어가 모어가 아닌 주민들로서도 프랑스어를 배울 만한 동인이 충분했으므로 프랑스어를 배울 기회를 강제로 박탈하는 것은 특혜를 잃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질 수도 있었다. 사적으로는 독일어를 쓰면서도 공적으로는 프랑스어를 사용해서 출세한다는 것은 선천적 게르만 문화권이면서도 후천적으로 로망스 문화권에도 한 다리 걸치고 있는 알자스-로렌 특유의 미묘한 이중언어적 정체성이었다.
4. 기타
-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와 연결시켜 이해하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와 알자스-로렌의 상황은 직접 대응하기가 어렵다. 일제강점기와 연결시킨다고 하면 오히려 프랑스의 정책이 민족말살통치를 연상시킬 수 있다.
-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는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이 작품이 그리 유명하지 않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다만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도 단편으로 꽤 유명한 작품이다. 구글로 la derniere만 쓰면 바로 classe가 자동완성되어 이 소설이 검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문학사에서만 보더라도 도데는 19세기 말 자연주의 성향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마지막 수업은
별과 함께 도데의 대표 단편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사실 임지현의 해당 발언은 본작이 한국에서 흔히 받고 있는 오해, 즉 작중 상황을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과 비슷한 것으로 오해하고 그에 이입하여 본작을 해석하는 것에 대한 지적으로 보는 쪽이 더 적절하다. 임지현은 본 문서에서 후술된 바, 그리고 그의 여러 저서들에서 확인 가능한 바와 같이 국수주의와 그 모태인 민족주의적 정서에 비판적이고 특히 그러한 정서가 한국 사회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경계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적 담론으로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함부로 대입한 독해때문에 한국에서 《마지막 수업》이 과장되고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 아니냐?"는 점을 지적하다가 표현이 좀 이상하게 나온 것이 아니냐는 것.
- 간결한 문체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대학 중급 프랑스어 교재에는 대부분 실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 임지현이나 일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역사학자들( 조한욱 등등)이 이 소설의 강한 쇼비니즘(국수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민족주의는 19세기 말 서양 대부분의 국가에서 유행사조였다.[13]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 작가인 데 아미치스가 쓴 아동소설인 사랑의 학교만 봐도 민족주의, 국수주의로 가득하다. 당시 프랑스인 대부분은 보불전쟁 패전과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긴 것을 국가적 수치로 생각하고 독일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는데 루이 파스퇴르와 같은 과학자조차 보불전쟁 패배 후 자기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준 베를린 대학에 학위증을 우편으로 반환하면서 "폭력적인 독일 황제 이름으로 된 학위증을 가지고 박사노릇 할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덧붙였을 정도였다.[14]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비판하는 경우는 많지만 민족주의가 만들어진 인조물이라고 한들 프랑스에서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엄연히 있기 때문에 프랑스인 다수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알퐁스 도데의 장남 레옹 도데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앞잡이로 활동했다고 한다.
4.1. 패러디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는 흔히 일제강점기와 연결시켜 이해하곤 했지만 최근에는 실상이 복잡하며 오히려 프랑스의 정책이 민족말살통치(강제동화)를 연상시킬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유명해지고 있다.마지막 수업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진실-도데의 추악한 내셔널리즘과 그 한국적 변용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패러디가 존재한다.
가타카나 쓰기가 끝나자
메이지 유신을 배웠다. 다음에는 꼬마 패들이 모두 '카, 키, 쿠, 케, 코'를 합창했다. 저기 교실 뒷전에서는 카네다 유이치로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영감님이 안경을 끼고 두 손으로
황국신민서사를 든 채 꼬마 패들과 함께 한 자, 한 자 읽고 있었다. 그도 몹시 열중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감동으로 떨고 있었다.
쇼와 덴노의 무조건 항복 선언 풍문을 접한 일본인 요시다 센세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조선인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 일본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충량한 황국 신민이라면 설혹 귀축영미의 노예가 될 처지에 빠지더라도, 황국어만 잘 지키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문득 신사의 종이 정오를 알렸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침통한 음성. 바로 이 시각에 창 밖에서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왔다.
일본인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초라해 보였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미나상, 미나상. 와따시와…! "하고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선생님은 끝내 말 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칠판을 향하여 돌아서시더니 분필 한 조각을 집어 온 힘을 다하여 되도록 크게 쓰는 것이었다.
"大日本帝國萬歲! ( 다이닛폰테이코쿠 반자이!/대일본제국 만세!)"
그러고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참 있다가 말없이 학생들에게 손짓으로 알렸다."다 끝났다... 돌아들 가거라."
쇼와 덴노의 무조건 항복 선언 풍문을 접한 일본인 요시다 센세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조선인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 일본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충량한 황국 신민이라면 설혹 귀축영미의 노예가 될 처지에 빠지더라도, 황국어만 잘 지키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문득 신사의 종이 정오를 알렸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침통한 음성. 바로 이 시각에 창 밖에서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왔다.
일본인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초라해 보였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미나상, 미나상. 와따시와…! "하고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선생님은 끝내 말 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칠판을 향하여 돌아서시더니 분필 한 조각을 집어 온 힘을 다하여 되도록 크게 쓰는 것이었다.
"大日本帝國萬歲! ( 다이닛폰테이코쿠 반자이!/대일본제국 만세!)"
그러고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참 있다가 말없이 학생들에게 손짓으로 알렸다."다 끝났다... 돌아들 가거라."
북한 버전도 있다. 제목은 마지막 혁명력사 수업.
다만 이런 패러디들은 소설 원작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게 아니고 다른 블로거가 1970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의 한글 전용 정책을 비판하며 한자 교육 폐지가 우리 민족성의 단절을 불러왔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것이다.
[1]
상술한 프랑스어로 '프랑스 만세!!'라고 칠판에 쓴 직후.
[2]
알자스는 여러
자유도시들이 있어 군사력이 약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월경지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가 있었다.
[3]
이 지방 태생의 유명한 인사인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보불전쟁 후에 여기서 태어난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4]
삼각 모자를 쓰고 있던 영감님. 한국에서는 주로 '오제'라는 프랑스식 발음으로 번역된다.
[5]
프란츠에게 지각하지 않았으니 굳이 뛰어갈 필요 없다고 말해준 마을 대장장이. 한국에서는 프랑스식 발음인 '와슈떼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다.
[6]
이러한 탄압은 브르타뉴나 프랑스령
바스크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7]
혈통과 언어가 비슷함에도 민족이 분리된 예로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공유하면서도
사이가 매우 안 좋은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있다.
[8]
그나마
신성 로마 제국과 마르틴 루터의
개신교 성경이라는 문자언어 문화가 존재하는
독일인은 이웃
슬라브인에 비하면 민족성의 형성이 좀 더 확고했던 편이다. 독자적인 국가를 오랜 기간 유지해온
러시아 정도를 제외하면
중부 유럽의 슬라브인들은 이웃 제국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언어적으로도 해당 민족의
귀족 집단이 타 민족의 언어를 쓰는
양층언어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다. 더욱이 슬라브인의 권역을 지리적으로 단절하는
헝가리 왕국의 존재도 슬라브 민족주의의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남슬라브인의 민족 국가를 표방한
유고슬라비아가 결국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붕괴하고 만 것은 이러한 영향이 크다.
[9]
그리고 더 늦게 독립한
벨기에가 네덜란드와는 별개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 것 역시 정체성이 혈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10]
이 시기에는
영어에도 네덜란드 외래어가 많이 유입되었다. 오늘날 미국인을 가리키는 말인
양키도 네덜란드의 흔한 이름인 얀(Jan)에서 온 말이다.
[11]
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과 얽힌 사정으로 인해 택한 국명일 뿐이고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은 언제나 수도
베를린이 위치한
브란덴부르크였다.
[12]
유사한 시기에 쓰여진
러시아 소설인
전쟁과 평화에서는 러시아의
귀족들이 모두 프랑스어를 쓰는 것을 소설에 반영하여 소설 지문으로도 프랑스어가 그대로 쓰이고 있을 정도다. 프랑스와 매우 멀리 떨어진 러시아도 이런 상황이니 프랑스와 매우 가까운 알자스-로렌은 말할 것도 없다.
[13]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시기도 이때였다.
[14]
황우석이 자기 말처럼 써먹은 "과학에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말은 이 때 파스퇴르가 한 말(If science has no country, the scientist should have one, and ascribe to it the influence which his works may have in this world)에서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