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10:57:08

마이클 잭슨/아동성추행 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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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08.04.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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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93년 1차 혐의3. 2003년 2차 혐의4. 2016년 레이더 온라인 보도 (아동음란물 발견?)5. 2019년 다큐멘터리 리빙 네버랜드 (Leaving Neverland)6. 기타 사건들
6.1. 제이슨 프란시아6.2. 마이클 제이콥하겐6.3. 경계없는 허위 보도 - 법망을 빠져나가는 언론 6.4. 루머 거래와 조작 - 언론의 유죄 확증 유도6.5. 미국 영화 비평가들의 편향과 전문성 문제6.6. [기타] 루머 모음

1. 개요

마이클 잭슨은 생전에 2번의 아동성추행 소송에 휘말렸다.

첫번째 사건은 1993년에 당시 13살이었던 조단 챈들러라는 소년을 잭슨이 성추행했다는 혐의였다. 그해 8월 형사수사가 시작됐고 9월에는  민사소송이 제기됐다. 아직 검찰의 형사기소가 없었던 상황에서 민사소송은 1994년 1월 잭슨이 조단측에 합의금을 지급하고 취하됐다. 민사합의에 앞서 잭슨은 재판부에 형사과정이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민사재판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단측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민사재판 과정에서 조단측 변호인이 얻게 될 정보를 검찰과 수사관들이 제공받지 못하게 해줄 것을 재판부에 추가로 요청했으나 이 역시 인정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민사재판 과정에서 나올 잭슨측 반박증거와 변론들을 수사당국이 모두 확인하고 형사기소와 형사재판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민사 사전재판 진술은 1994년 1월 25일에 시작될 예정이었는데 바로 이날 민사합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잭슨은 합의문에서 본인의 혐의를 부인했고 조단의 변호인도 검찰이 이미 모든 증거를 가져간 상태라고 밝히면서 조단이 앞으로도 계속 어느 형사과정에서든 증언할 의지가 있다고 전했다. 검찰도 형사수사는 민사합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수사를 지속했고 수차례 대배심도 소집됐지만 대배심은 잭슨에게 불리한 증거나 증언은 없었다고 밝히면서 1994년 5월과 7월에 차례로 해산했다. 1994년 9월 검찰은 결국 조단이 최근 더 이상 일체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해 왔고 지난 13개월간의 형사수사 결과 유의미한 증거도 찾지 못했음을 인정해 잭슨에게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1994년 7월 6일까지 조단의 증언거부 의사가 어느 검찰기관에도 전달되지 않았고 그때까지 조단은 증언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조단의 변호인은 증언거부의 이유에 대해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조단이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내기가 어려워졌다고 주장하면서 검찰이 잭슨을 진작에 체포하고 기소하는 등 빠른 형사상 조치를 취했다면 기꺼이 조단이 증언대에 섰을 것이라면서 검찰에 책임을 돌렸다.

두번째 사건은 2003년에 당시 13살이었던 개빈 아르비조라는 소년을 잭슨이 성추행했다는 혐의였다. 그해 12월 잭슨은 기소됐고 이후 형사재판이 열렸으나 2005년 6월, 모든 혐의에 대해 배심원 전원 만장일치의 의견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 직후 배심원단 대표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개빈은 마치 사전에 주입받은 내용을 그저 읊는 것처럼 느껴졌고 잭슨의 혐의를 입증할 그 어떠한 증거도 없었다고 전했다.

잭슨의 사후인 2009년 12월에 FBI의 비밀 문건이 공개됐다. 1차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이 잭슨의 기소여부를 고민했지만 중요한 단서가 없었다고 기록돼 있고 2차 사건에는 FBI가 경찰과 공조하여 포렌식 분석, 행동 분석 등을 수행했으나 마찬가지로 단서나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한편 2013년 잭슨에게 어린 시절 수백 번의 성학대를 당했으나 그것을 성학대라고 인지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알게 됐다고 주장한 2명의 성인 남성인 웨이드 롭슨과 제임스 세이프척이 추가로 등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들은 잭슨의 생전에는 증인으로서 잭슨의 결백을 지지하기도 했지만 2019년 1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Leaving Neverland>에도 출연하여 잭슨의 성학대를 주장했다.

이들은 잭슨이 생전에 세운 회사들인 MJJ PRODUCTIONS와 MJJ VENTURES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아동을 유인하고 유혹하기 위한 은밀한 이중의 목적을 수행했다며 잭슨이 '세계가 알고 있는 가장 정교한 아동성학대 조달 및 촉진 단체'를 운영했다고 주장했고 그 피해자들이 바로 자신들이라면서 이들은 잭슨의 회사들을 상대로 2013년부터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소송기한을 넘기는 등의 이유로 2017년 모두 각하됐다가 2020년 초 아동성범죄 나이 제한에 대한  캘리포니아주 법이 개정되면서 법원의 본안판단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 중 세이프척의 소송은 2020년 10월  기각됐는데 법원은 세이프척이 자신의 주장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고 특히 잭슨의 회사들과 세이프척이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롭슨의 소송도 동일한 사유로 2021년 4월  기각됐다. 단 소송에서 재판부가 세이프척과 롭슨이 주장한 잭슨의 성학대가 사실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판단한 것은 아니며 잭슨의 회사들이 해당 사건에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확인해 준 것이다. 하지만 거액을 요구한 소송에서 이들이 제출한 문서와 답변 등은 후에 촬영한 다큐와 상당 부분 다르거나 모순되면서 이들 주장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2. 1993년 1차 혐의

파일:에반챈들러1.jpg
(좌) 93년 월드 뮤직 어워드에 참석한 마이클과 당시 13세의 조단 챈들러 (우) 소송을 제기한 조단의 아버지 에반 챈들러
1992년 5월에 마이클은 LA에서 운전 중 차가 고장나 인근 카센터 사장 데이비드 슈워츠의 도움을 받았다. 슈워츠에게는 마이클의 열렬한 팬인 '조단 챈들러'라는 의붓아들이 있었고 슈워츠는 마이클이 조단에게 연락해주면 차를 무료로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후 정말 전화가 왔고 1993년 2월에 슈워츠 가족이 네버랜드에 초대받으면서 마이클은 조단과 특히 조단의 친어머니인 '준'과 친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문제가 된 인물은 조단의 친아버지인 치과 의사이자 영화산업에 관심이 많았던 에반 챈들러[1]로, 1985년에 이혼한 후 어머니 준이 양육권을 가지고 조단을 키우고 있었고 재혼하여 다른 자식을 둔 에반은 조단에게 그리 관심을 쏟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던 사이였다. 그런데 아들이 마이클과 친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에반도 마이클을 만나길 원했으며 1993년에 마이클을 소개받았다.

얼마 후 에반은 돌연 변호사를 고용했고 마이클이 2차 Dangerous 투어를 앞두고 있던 1993년 8월 4일에 아들 조단에 대한 성추행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으면서 소송을 하지 않는 대가로 마이클에게 2,000만 달러의 합의금부터 요구했다. 마이클은 거절했고 8월 말에 에반을 공갈(extortion) 혐의로 고소했다.[2] 8월 17일에는 에반네 집에서 머물던 조단이 정신과 의사에게 처음으로 마이클의 성추행을 말하면서 의사가 이를 아동복지국에 신고했고 본격적으로 수사가 시작됐다. 정신과 의사의 보고 이후에 에반은 전부인 준으로 부터 양육권을 가져갔고, 에반은 양육권을 이용해 조단을 대신하여 고소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후 9월에 마이클을 상대로 3000만 달러를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걸었다. (참고 에반 챈들러 정보 및 상세 타임라인)
< 1차 혐의 사건의 주요 이슈들 시간순 정리 >
93년 8월 4일 <colbgcolor=#FFFFFF,#191919>에반 챈들러가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은 채 소송하지 않는 대가로 2,000만 달러의 합의금을 요구.
마이클은 거절하고 8월말에 에반을 공갈(extortion) 혐의로 고소.
93년 8월 17일 조단 챈들러가 정신과 의사에게 성추행을 처음 말하며 아동복지국에 신고되고 톰 스네던 검찰이 수사 시작.
93년 8월 검찰은 마이클이 투어 중일 때 네버랜드 및 기타 거주지를 불시 압수수색했으나 단서가 나오지 않음.
93년 9월 에반이 3,000만 달러를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
93년 11월 마이클은 민사 재판을 형사 심리 후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챈들러 측의 반대로 재판부가 거절.
(* 이후로 형사 보다 민사를 먼저 진행할 수 없도록 법 개정됨. 그래서 2차 혐의 땐 민사를 못 걸었던 것.)
93년 12월 20일 톰 스네던 검찰 측이 마이클 신체수색 집행함. 민사합의 후 94년 1월 28일에
조단의 성기 묘사와 일치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나옴.( 로이터 통신, USA Today 등)
93년 신체수색 후 챈들러 측 변호사가 신체수색 사진을 챈들러 측에 제공하거나 민사재판 증거로 사용 못하도록 요청.[3]
93년 9월~94년 1월 검찰은 4차례 압수수색과 30여 명의 아동과 200명을 탐문했으나 증거나 유의미한 진술을 찾지 못함.
94년 1월 24일 마이클이 에반에게 제기한 공갈혐의 고소에 대해 검찰 측이 불기소처분 내림.[4]
94년 1월 25일 마이클은 어떠한 잘못과 책임이 없다는 내용으로 조단 1530만, 부모 400만 달러에 민사합의 함.
챈들러 측 변호사가 조단은 형사재판에 증언할 수 있음 밝힘.
94년 1월~5월 검찰은 계속 수사했으나 단서를 찾지 못함. 조단은 형사수사에 계속 협조.
94년 5월 1차 대배심 해산 - 산타바바라 대배심이 소집되어 있었으나 검찰이 증거제출도 못해서 기소 무산.
94년 7월 6일 조단이 검찰에 더 이상의 증언을 거부함. 조단은 형사들에게 계속 진술해왔고 대배심 증언은 하지않음.
에반은 세간의 관심으로 조단이 힘들었고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고싶어 증언 중단했다고 말함.
94년 7월 7일 2차 대배심 해산 - LA 대배심에서도 검찰이 증거제시를 못하여 기소 무산.
94년 9월 21일 검찰이 최종 증거불충분 불기소처분을 내려 사건 종료.
95년 6월 마이클이 다이앤 소여와의 인터뷰에서 조단의 성기진술에 대한 질문에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고 답변함.
95년 9월 톰 스네던이 <Vanity Fair> 인터뷰에서 마이클의 말에 반발해 처음으로 "진술 일치설" 말했고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
96년 5월 에반이 다시 마이클한테 6000만 달러 소송 검. 조단 성학대 노래 앨범을 대중에 공표하게 해달라 요구.
(2000년에 소송 기각) 95년에 조단이 법적 독립해서 에반은 조단 합의금 1530만 달러에 관여 못하게 된 상태.
05년 2월~6월 톰 스네던이 다시 수사한 2차 혐의 재판에서 1차 혐의 때 검찰과 경찰이 강압수사, 유도심문, 금전을 댓가로 증인 회유 등을 한 것이 드러남. 2차 혐의는 배심원 전원 무죄판결을 받음.
09년 6월 사망 후 마이클 부검결과에서 조단의 성기진술이 결정적으로 모순됐고 ('신체진술 설명 더보기' 참고.) 단서가 하나도 없었다는 FBI 기록 공개로 톰 스네던의 말은 거짓이며 조단진술은 그 어떤 것도 단서가 못되었음이 밝혀짐.

아동 성범죄는 민사와 상관없이 형사수사의 대상이기에 검사 톰 스네던과 경찰은 Dangerous 투어로 마이클이 해외에 있을 때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마이클의 저택인 네버랜드와 마이클이 머물렀던 여러 거주지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했으나 성추행을 입증할 그 어떠한 의학적/물질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8월 27일자 LA타임즈는 보도했다. 또 경찰은 거주지 급습 도중 전화번호부를 압수하여 30명에 가까운 아이들과 200명의 목격자들을 심문하였으나 마이클과 성적인 접촉을 했다는 아이들은 없었고 모두 마이클의 결백을 진술했으며 혐의를 뒷받침할 그 어떠한 유의미한 진술도 듣지 못했다.

한편 에반이 합의금을 요구하기 전인 93년 7월 8일에 슈워츠가 에반과의 통화내용을 녹음했었고 이후 마이클의 사설탐정인 앤서니 펠리카노에게 넘겨주었는데 통화내용 중 에반의 음성 일부가 8월 30일에 언론에 유출됐다.[5] 테이프는 민사법원에도 제출됐다. [6] 그런데 이 통화는 조단이 성추행을 극구 부인하던 시점이었으니 에반은 아무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변호사부터 사서 마이클을 파괴할 전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조단의 삼촌인 레이 챈들러가 저서 <All That Glitters>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조단은 친부면접권으로 7월 11일부터 에반의 집에 머물고 있었고 7월 16일에 에반의 치과에서 진정제를 투여받은 후 깨어나면서 처음으로 '네'라고 한마디 대답했고 그 전까지는 수차례 에반의 질문에도 조단은 계속해서 부인해 왔었다.[7][8]

또한 에반의 표현에 따르면 변호사를 고용해 크게 이길 계획을 다 세워놨음에도, 마이클이 성추행했다고 생각하냐는 슈워츠의 질문에 에반 스스로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부분이 통화내용 풀버전 파일에 나온다. 또 마이클은 조단과 만나기 전인 92년 말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교제 중이었는데 (94년 5월에 리사와 결혼한다.) 에반도 리사를 언급하며 '사랑'이라고 말해 마이클이 이성애자이며 연애중인 것도 통화할 당시 알고 있었다. 즉 에반은, 아들은 성추행을 극구 부인하고 본인도 아들이 성추행을 당했는지 모르며 마이클이 성인여성과 교제하는 이성애자임을 아는 상황에서 이와 모순되게 남자아동을 성추행했다며 거액을 요구하는 고소부터 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통화내용 풀버전 PDF 파일 참고[9]''' 아울러 7월 11일 방문 이후로 에반은 조단을 친어머니 준에게 다시는 돌려보내지 않았고 양육권까지 가져가면서 이후 조단이 성인이 될 때 까지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93년 7월 8일 (합의금 요구 전), 조단이 성추행을 부인하던 때 에반의 통화내용
"I picked the nastiest son of a bitch I could find. [Evan Chandler's lawyer, Barry Rothman] All he wants to do is get this out in the public as fast as he can, as big as he can and humiliate as many people as he can. He's nasty, he's mean, he's smart and he's hungry for publicity. Everything's going to a certain plan that isn't just mine. Once I make that phone call, this guy is going to destroy everybody in sight in any devious, nasty, cruel way that he can do it. I've given him full authority to do that."

난 가장 비열한 놈을 골랐어. [에반의 변호인, 배리 로스맨] 이 사람은 이 모든 걸 최대한 빠르게 대중에게 퍼뜨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한테 굴욕을 주고 싶어하지. 그는 더럽고 비열하고 똑똑하고 또 유명해지고 싶어해. 모든 게 다 계획대로 가고 있어. 내가 전화를 하기만 하면 이 사람은 보는 족족 모든 걸 더럽히고 비열하고 잔혹하게 망가뜨릴거야. 난 그에게 지휘권을 주었지.
...
"It will be a massacre if I don't get what I want... This man [Jackson] is going to be humiliated beyond belief... He will not sell one more record... If I go through with this, I win big time... I will get everything I want... they will be destroyed forever."

내가 원하는 걸 안해주면 대학살이 있을거야... 마이클은 끔찍하게 망신을 당할거고 이건 최악의 악몽을 넘어 무슨 일이 일어난건 지 믿기지도 않을걸. 마이클은 단 한 장의 레코드도 못팔겠지.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난 정말 크게 이길거야. 내가 원하는 건 모두 다 얻을거고 그들은 영원히 끝장날거야.

이어 마이클의 병원 진료기록 까지 압수하는 등 4번째 수색영장이 집행되나 이번에도 아무런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고 마이클은 당시 받았던 두피재건술[10]의 수술과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Dangerous 투어를 중단한다. 한편 이 시기 마이클의 누나 라토야 잭슨이 조단의 편을 들며 마이클을 비난했으나, 후에 라토야는 폭로기사로 돈을 벌어오길 원했던 남편의 폭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고, 사실은 동생을 항상 지지해 왔다고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라토야의 남편은 가정폭력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93년 12월 21일 신체수색 다음 날 충격을 받은 마이클은 평소 하지 않던 언론 인터뷰를 이례적으로 발표하였다.
마이클은 신체수색 당시 필요한 확인이 끝났는데도 검찰 측이 계속해서 알몸 사진촬영을 하며 비인간적인 굴욕을 강제했다고 밝혔다.
또 매스미디어의 왜곡으로 진실을 알아볼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고 호소하였는데 당시 엄청난 양의 선정적인 언론보도가 쏟아졌고 특히 타블로이드가 주축이 된 가쉽성 허위 보도들은 이후 https://youtu.be/BWoX4gd4JW0 다큐로 만들어질 만큼 문제가 됐었다.
단서를 찾지 못한 톰 스네던 검찰 측은 조단이 9월 초와 12월 초 두 차례에 걸쳐 형사들에게 진술한 마이클의 성기와 엉덩이에 대한 묘사가 마이클의 신체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신체수색을 강제 집행하기로 결정하였고 마이클은 미국으로 귀국하여 93년 12월 20일에 알몸 수색을 받게 된다. 조단은 93년 10월에 리차드 가드너 박사와의 인터뷰에서 마이클의 성기를 10여 회 만져서 자위시켜 줬다고 진술했고 두 달이 지난 12월에서야 성기에 대해 묘사하는 진술을 추가했는데, 조단이 마이클의 신체적 특징을 잘 알 수 있는 혐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어떠한 목격자와 물증, 뒷받침할 정황 증언도 없이 조단의 진술만 유일한 상황에서 만일 마이클의 신체와 다수 일치한다면 유일한 단서가 되어 기소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신체수색 후 검찰은 대배심에 수사결과 제출을 미뤘고 어떠한 정보도 흘러나오지 않다가 94년 1월 초에 조단 측 변호인이 신체수색 사진을 민사 재판 증거에서 배제시켜줄 것을 요청했다는 간접 정보가 흘러나왔고[11] 민사 합의가 이뤄진 다음에 일치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94년 1월 28일 < 로이터 통신>( 기사)과 <USA Today>( 기사1, 기사2) 등 초기 언론들은 조단의 묘사가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도하였다.

그런데 사건이 종결되고 1년 여가 지난 시점인, 95년 6월에 마이클이 다이앤 소여와의 인터뷰에서 조단의 성기묘사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하나도 일치하는 게 없었다고 답변하자 인종차별 및 편파로 수사를 근거없이 지속했다는 논란이 일부에서 일었고, 이에 담당 검사였던 톰 스네던이 반발하여[12] 95년 9월에 <Vanity Fair>와의 인터뷰에서 근거가 있었다며 처음 "진술 일치설"을 말했고 일부 형사들도 따라서 일치했다고 말하면서 이후에 본격적으로 언론 보도가 나오고 여론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마이클 사후에 확연한 특징인 포경 여부에 대한 진술이 완전히 모순되었고 반점에 대한 것도 수사당국끼리 서로 말이 맞지 않았으며, 조단의 신체진술은 어느 것도 단서가 되지 못했음이 밝혀졌다.
【신체진술 관련 논란에 대한 설명 더보기】
【수사 기록과 법정 문서 등을 전문적으로 보도하는 <Smoking Gun>이 05년에 단독 입수한 조단 사건 당시 수사관이었던 데보라 린던(Deborah Linden)의 93년 보고서에 의하면 조단은 마이클이 포경을 했다고 진술했으나 이와 정반대로 마이클은 포경을 하지 않았던 것이 마이클 사후에 공개된 부검 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일각에선 발기 상태에서는 비포경자도 포경을 한 것처럼 얼핏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조단이 헷갈릴 수 있다고 주장하나, 93년 10월 리차드 가드너 박사와의 인터뷰에서 조단이 마이클의 성기를 단순히 눈으로 본 것을 넘어 10번 정도 손으로 만져서 자위시켜 줬다고 말했다는 점, 그리고 조단의 삼촌인 레이 챈들러도 04년에 출판한 저서 <All That Glitters>에서 조단이 마이클의 성기를 여러번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정밀하게 봤다고 주장하며 포경한 모습의 그림까지 책에 실었으나 완전히 틀렸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아울러 레이의 책에 실린 그림은 98년에 허위사실 중상모략으로 27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판결받은 루머작가 빅토르 구티에레즈의 책에 먼저 실린 그림에서 일부 글자만 지운 것이다. 구티에레즈가 조단이 그린 그림이라고 주장하며 실은 그림엔 마이클의 피부과 간호사로 일하다가 관둔 인물의 이름과 "마이클의 성기?"라고 적힌 글이 있어 조단이 아니라 에반이, 혹은 구티에레즈가 함께 마이클과 접촉했던 사람으로부터 모은 일부 정보를 조합해 추측해낸 것으로 의심받는 것이었다.

참고로 구티에레즈는 FBI가 수사하기도 했던 악명높은 북미 소년 소아성애 옹호단체인 NAMbLA(North America Man/Boy Love Association) 회의에 86년에 참석한 후 마이클을 소아성애로 각색할 아이디어를 처음 만든, 그 자신이 소아성애자로 추정되는 인물이고 마이클은 소아성애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희망이라며 해당 책 서문에 NAMbLA에 감사한다는 말까지 적은 사람이다. 해당 책은 법원의 증거제출 명령에 아무것도 제출하지 못하고 구티에레즈 주장의 거짓이 드러나면서 허위사실로 판정받고 시판 중인 미국 내 모든 책이 99년에 법원명령으로 압수됐었다. 구티에레즈는 조단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여러 마이클 주변 인물에게 접근했었고 경찰의 유도심문으로 진술을 바꾼 제이슨 프란시아의 어머니인 블랑카 프란시아, 허위소송을 걸었다 패소한 네버랜드 5 등과도 교류했으며 에반도 구티에레즈와의 접촉을 부인하지 못했다. ( #빅토르 구티에레즈 주석 참고)

마이클은 사타구니(음경 근처) 부위에 백반증이 번져서 위의 간호사로부터 탈색 크림을 처치받은 적이 있었는데, 레이의 그림에도 포경한 모습의 그림 아래에 탈색 크림이라고 적혀있고 핑크색 피부 바탕에 갈색 반점이란 글씨와 93년 10월 24일이란 날짜가 적혀있고 반점 위치는 나와있지 않다. 날짜상 이 그림은 형사 진술을 대비해 계획을 세우던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단은 또 마이클을 자위시켜 줬다고 진술했으면서도 성기 부근의 몸의 앞쪽에 대해서는 전혀 진술하지 못했고 그 이유로 마이클이 바지 허리를 잠근 채 지퍼 사이로 성기만 내놓았기 때문이며 그 와중에 지퍼 아래에 있는 음경은 또 보았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을 제시했는데 이 또한 에반이 얻은 정보가 사타구니 부위 피부색에 대한 힌트뿐이기에 이에 맞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단은 음경 부위 피부색에 대해서만 진술했고 다른 형태적 특징 같은 묘사는 없었으며 페니스에 대해서도 포경했다는 것 외에 다른 진술을 하지 못했다.

90년대 미국에선 비포경자 보다 포경자가 더 일반적이었고 백반증으로 마이클의 몸엔 어디든 반점이 있는 것이 기정사실인 상태에서 여러 개를 지적할수록 틀릴 확률이 더 높아지므로, 필수 질문이었을 포경여부에 대해선 포경으로 대답하고 음경 부위 반점을 하나만 어디든 진술하는 식으로 이렇게 확률상 유리한 쪽으로 진술을 맞춘 것으로 추정된다. 구티에레즈도 마이클은 백반증이라서 피부 상태가 변하므로 조단이 반점 위치를 어떻게 진술하든 유리하다며 작전을 계획한 듯한 언급을 책에서 했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원래 피부색인 갈색 피부 바탕에 백반증 흰색 반점이 번지는 상태는 반점의 변화가 많지만, 반대로 대체로 탈색된 핑크색 피부 바탕에 원래 피부색인 갈색 반점이 남아있는 상태는 경과를 예측할 수 있어서 백반증에 의한 변화로 진술과 불일치했는지 여부를 구분할 수 있다. (후술한 내용 참고) 참고로 포경수술은 50~60년대부터 미국에서 권장되며 대중화되었는데 의료비용이 들기에 에반과 조단과 같은 백인 가정에서는 일반적이었지만 마이클은 58년생에 가난한 9형제 흑인가정 출신이었다.

또한 뒤늦게 성기 묘사를 추가한 것은 마이클이 공갈로 에반을 고소하며 조단 측의 협상에 일체 응하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시간을 끌었는데도 민사 사전재판을 목전에 둘 때까지 마이클과의 협상이 안되자 93년 10월의 진술로부터 두 달이나 지난 12월 초에 성기에 대한 진술을 뒤늦게 추가했고, 피부색을 추측해낸 것으로 마이클을 압박하는 유리한 신체수색 결과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조단 측 기대와 달리 너무나 결정적 특징인 포경 여부에 대한 모순으로 명확한 불일치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반점에 대한 진술 또한 역시 틀렸다.

그러나 톰 스네던은 대배심에 (비공개 대배심이라 마이클 측은 형사 상황을 직접 알 수 없었다.) 수사결과 제출을 늦추며 형사 상황 및 결과가 민사 사전재판일 보다 먼저 나오지 않도록 지연시켰고, 민사 재판부도 마이클이 형사심리를 먼저 받고자 요청했음에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로 민사를 형사 보다 먼저 받게하는 법리적 타당성에 위배되는 판정을 하고 민사 사전재판에서 나올 마이클 측의 반론과 반박증거까지 검찰과 경찰이 공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검찰과 민사 재판부가 함께 압박하는 양상이 되어가자 형사 재판을 위해서는 민사 재판을 포기하는게 안전한 상황이 되었고, 여기에 마이클 측 대응 수단인 에반에 대한 공갈 고소마저 검찰이 기각할 것이 예측된 94년 1월 중순이 되어서야 합의를 반대하던 마이클을 주변에서 설득해 조단 측과의 민사 협상에 나오게 된다. 첫 민사 사전재판일이 예정된 94년 1월 25일 하루 전인 24일에 검찰이 에반에 대한 공갈고소를 최종 불기소 처분한 결과를 알린 것은 기소가 힘들단 것을 그들끼리는 알고있던 검찰 측이 민사 사전재판일에 합의할 것을 마이클 측에 종용하는 형국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첫 민사 사전재판일이 예정된 94년 1월 25일에 재판 대신 합의를 하게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며 조단 측이 먼저 협상을 제의해왔던 결과이다. 톰 스네던은 민사합의가 이뤄지자 그때서야 뒤늦게 대배심에 불일치했고 아무런 단서를 못찾았단 수사 결과를 제출했고 이후 타블로이드에 허위 제보를 판 사람들까지 대배심에 증인으로 세우고 거짓말을 동원한 유도심문까지 동원했으나 아무것도 단서로 인정못받고 최종 증거불충분 불기소로 종결되자 성과 없는 장기간의 수사를 민사합의를 핑계대며 면피했다. 즉 신체수색 불일치로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던 조단 측 합의금을, 신체수색마저 모순된 결과가 나왔을 때 기소 불가 혹은 무혐의를 이때 판정해야 했으나 이를 숨기고 혐의를 만들어 내려던 검찰과 이에 협조하는 재판부가 살린 것이다.

또 95년 9월의 톰 스네던의 "진술 일치설" 인터뷰 이후에 조단이 진술한 반점 위치만 다소 틀려서 단서가 못된 것처럼 루머가 퍼져있었는데, 96년에 집필하기 시작해 97년에 출판한 구티에레즈의 책에서도 반점 외에 나머지는 다 일치한 것으로 확신하며 기술되어 있고 04년에 출판된 레이의 책에서도 역시 확신하는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는 신체수색 당시 반점도 틀렸을 뿐만 아니라 특징으로 우선에 꼽았을 결정적 차이인 포경 여부까지 전체적으로 다 틀려서, 10번이나 만져서 자위시켜 줬다면 모를 리 없는 조단 진술의 허구성만 드러난 것이다.
또한 엉덩이 반점에 대해서도 93년 5월 28~30일에 마이클이 에반의 집에 머물렀을 때 극심한 두통 때문에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호소하자 에반이 마이클의 엉덩이에 토라돌 주사를 놔준 적이 있다고 레이가 책에서 밝혔기에 에반이 사전에 자신이 본 것을 조단에게 알려줬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조단은 마이클의 엉덩이에 여러 얼룩덜룩한 반점들이 있었다고 진술했었다. 하지만 마이클에게 불리한 증거들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대배심의 결과로 조단의 엉덩이에 대한 진술 또한 단서로 간주될 만큼의 구체성은 가지지 않았던 것이 드러났다. 조단은 엉덩이 한쪽 편에 대한 일부 특징을 말했지만 다른 쪽과 나머지에 대해선 진술을 구체화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조단과 마이클은 같이 수영한 적이 있어서 수영팬츠에 가려져 있던 부위 외의 피부 상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93년 2월에 마이클이 <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백반증을 공개적으로 밝혔기 때문에 성기든 엉덩이든 몸 전체에 반점이 있다는 것 자체는 쉽게 추측 가능한 것이었다. 92년에 공개된 마이클의 뮤직비디오에서도 반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조단은 마이클의 음경에 하나의 반점이 있다고 진술했고 그 구체적 위치까지 정확히 맞힌 것으로도 보도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론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말이며 의문스런 상황까지 있다. 신체 수색 자리에는 피부과 전문의인 아놀드 클레인 박사(마이클 측 대표)와 리차드 스트릭 박사(수사당국 대표), 사진 작가 루이스 스웨인, 게리 스피겔 형사 이렇게 4명이 있었는데, 반점의 위치에 대해 신체수색 현장에 있었던 스피겔 형사는 '음경 왼쪽 낮은 부분'이라고 했으나, 담당 검사였던 톰 스네던은 나중에 '음경 오른쪽'에 있다는 상반된 을 하여 수사당국끼리도 서로 말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톰 스네던은 '조단이 진술한 위치와 상대적으로 비슷한'이란 표현을 써서 조단이 진술한 위치와는 일단 달랐음을 인정했는데, 이때 조단이 진술한 위치를 밝히지 않았고 마이클의 반점 개수와 위치 또한 분명히 하지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비슷하다는 톰 스네던 표현의 적절함 여부를 판정할 수 없게 했다. 아울러 마이클의 반점이 하나였다는 언급은 나온 적이 없다. 또 초기에 스피겔 형사가 얼룩덜룩한 이란 표현을 썼었기에 마이클의 반점은 여러 개이나 조단이 언급한 위치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백반증으로 한번 멜라닌 색소를 잃은 피부는 원상회복이 안되기 때문에 탈색된 핑크색 피부 바탕에 남아있는 원래 피부색의 갈색 반점은 줄어들 수는 있어도 늘어나지는 않는다. 즉 조단이 음경에 한 개의 갈색 반점이 있었다고 진술했으면 시간이 흐른 후에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그 위치 그대로 한 개가 옅어졌거나 아예 음경 부위에 반점이 없어진 경우이지 다른 부위에 갈색 반점이 새로 생길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이클의 반점은 수사당국 조차 말이 상반되며 여러 군데를 지적하고 얼룩덜룩하다고 표현하여 위치도 다를 뿐더러 오히려 반점이 더 많은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시간 간격에 따라 백반증이 더 진행되어 조단의 진술과 달라졌다고 판단할 수 도 없다.

한편 사후 부검결과로 결정적으로 불일치했음이 드러나자 신체수색 당시 수사당국을 대표해서 면밀히 검증해야 할 위치에 있었던 스트릭 박사는 09년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일치하는지를 확인하진 않았고 나중에 누군가로부터 정확히 일치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만 말하며 출처를 밝히지 않아 "진술 일치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였다. 그런데 스트릭 박사가 보지 못했다는 말을 사실로 가정하면 스피겔 형사의 말에 의하면 그 자리에 있던 클레인 박사도 마이클의 성기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했으므로 결국 검증을 한 의료진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 되기에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이 외에도 진술일치설과 반대되는 당시의 보도들이 있다. 94년 1월 5일자 LA타임즈는 에반의 변호인이 성기사진 사본이 없다며 마이클 측이 사본을 보내주거나 아니면 신체 수색을 한 번 더 하거나 이것도 안되면 민사법원이 성기사진에 대한 증거채택을 금지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조단은 마이클의 신체사진 없이 진술이 일치해야만 사실여부가 증명되기에 사진을 보면 안되는 입장인데도 아이러니한 요청을 한 것이고 나아가 불리한 증거로 간주하고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막으려 한 것이다. 또 94년 3월 LA타임즈의 보도에 의하면 당시 수사관들은 대배심에 출석해 증언하는 마이클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에게 혹시 마이클이 조단이 묘사한 것과 다르게 보이도록 그동안 신체 모습을 바꾸지는 않았는지를 질문했었다. 만약 성기 묘사가 정말 정확했다면 단서를 계속 검수해왔던 대배심이 즉시 마이클을 기소하거나 최소 소환할 것을 수사당국에 요구했을 것인데 대배심은 그러지 않았고 수사관들은 반대되는 저런 질문을 캐서린에게 한 것이며, 오히려 대배심은 마이클에게 불리한 증거를 본 적이 없다 밝혔다.

게다가 일부 단서가 있었으나 기소하기엔 충분치 않아 기소못한 것처럼 수사 종료 후에 말하던 톰 스네던의 주장과 달리 사후에 공개된 FBI 문서에서 검찰은 유의미한 단서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 조단의 신체진술은 사건 당시에 단서로 인정 받은 것이 하나도 없음이 또 한번 밝혀졌다. 이렇게 앞서 기술한 사건 기록과 관련인 진술, 당시 보도, 대배심 결과, FBI 기록, 부검결과 등으로 톰 스네던과 형사들이 그간 실체없는 주장을 해온 것을 알 수 있으며, 진술일치설을 처음 말한 톰 스네던은 마이클 사후에 허위가 드러나자 언급을 회피하였고 이를 묵인한 관련자들도 자신이 확인한게 아니라며 책임 소재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밖에도 사건 당시 조단은 맥컬리 컬킨과 롭슨 등 여러 아이들과 함께 마이클과 어울렸다는 진술이 나왔고 이 아이들은 모두 조단에 대한 어떠한 의문스런 행동도 본 적이 없고 조단이 그러한 언급이나 내색을 한 적도 없으며 그저 여럿이서 노는 홈파티같은 상황이었다고 말하여 모두 마이클의 결백을 진술했다. 조단의 어머니 준도 05년 재판에서 조단과 늘 같이 동행했다고 밝히며 자신의 집이나 네버랜드, 준이 조단의 여동생과 조단과 함께 셋이서 시상식에 동행했던 상황 등 어디에서든 아들이 성추행 당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조단이 먼저 마이클의 방에서 놀게 해달라고 졸랐고 당시 마이클의 방엔 여러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었으며 자신도 마이클의 방에 언제고 드나들었고 심지어 자신도 마이클과 함께 침대에서 잠든 적도 있었다고 증언하여 격의없고 개방적이었던 당시 상황을 말했다.

또 사건 당시 일부 네버랜드 전직직원이 돈을 받고 타블로이드에 네버랜드에서 조단을 성추행하는 걸 봤다는 이야기를 팔았고 그중 일부는 대배심에 증언하기도 했으나, 정작 조단은 네버랜드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한 적이 없었고 05년 재판에서 그들 스스로 성추행을 보지 못했고 마이클의 결백을 진술했던 기록이 드러나면서 모순되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대배심에 증언하기 전에 톰 스네던 측 수사관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것까지 드러나는 등 모두 신빙성을 잃었다. (주석 #랄프 채콘 참고) 한편 여러 모순점이 드러난 다큐멘터리 <리빙 네버랜드>의 감독 댄 리드는 19년 <TheMuse>와의 인터뷰에서 조단의 성기묘사 불일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란 질문에 "기술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며 객관성을 부정하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한편 조단 측은 93년 12월 28일에 그동안의 진술을 상세히 정리한 선언문을 작성하여 민사 법원에 제출했다.[13]
민사 소송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과정들이 있었다.
  • 톰 스네던 검찰 측은 비공개 심사인 대배심을 형사기소 절차로 선택하였기에[14] 마이클 측은 형사진행 상황을 직접 알 수 없었고 위에 기술된 수사 결과에 대한 것들은 94년 5월 1차 대배심 해산 결과로 비로소 확실시 된 것들이다.
[참고] 유무죄를 확정하는 형사가 선행한 후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민사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법체계이고 법리적으로도 타당하지만, 당시 캘리포니아 주 법엔 형사 기소가 되기 전에 민사를 먼저 진행하는 것을 막는 법안이 없었고[15] 이 사건 이후로 민사소송을 먼저 걸지 못하도록 법개정이 이루어졌다.
1) 93년 11월에 마이클은 형사 결과를 먼저 받기 위해 형사 과정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민사 재판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단 측이 반대했고 재판부는 마이클 측 요청을 거절했다. 이는 조단 측이 만 14세 미만은 법적으로 아동의 범주 임을 들어 만 13세인 조단은 아동이므로 재판을 지연시키면 기억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반대한 것을 재판부가 받아들인 것이다.[16] 94년 3월로 재판 일정이 잡혔다. 당시 형사 심리는 민사재판 예정일 보다 오히려 시간상 더 뒤였고 조단은 7월까지 수사관들에게 진술했었다.
2) 93년 12월에 마이클은 추후 선정될 민사재판의 배심원들에게 선입견을 심어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본재판이 아닌 민사 사전재판 진술에선 양측 변호인들이 언론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도록 보도 금지령(gag order)을 허락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으나 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첫 사전재판 진술일부터 양측 변호인은 사건에 대한 언론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었다.[17] 당시 재판 관할지역은 백인 중산층 지역인 산타바바라였다.
3) 93년 12월에 마이클은 민사 사전재판 진술에서 조단측 변호인이 얻은 정보를 검찰과 수사관들이 제공받지 못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재판부가 거절하여, 민사 사전재판 과정에서 나올 마이클 측 반박증거와 변론들을 수사당국이 모두 확인하고 검찰이 형사기소와 형사재판에 이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클의 첫 사전재판 진술은 1월 25일에 시작될 예정이었다.[18] 미국 헌법에 따라 형사에서는 피고가 불이익 없이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민사에서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없다.[19] 4차 압수수색과 신체수색까지 끝내서 대부분의 수사가 이뤄졌지만 검찰은 대배심에 수사결과 제출을 늦추고 기소 판정을 의뢰하지 않으며 시간을 지연하고 있었고, 민사합의 후에 수사결과를 제출하였다.
4) 94년 1월 24일에 검찰은 마이클이 제기한 에반에 대한 공갈혐의 고소를 불기소 처분하여 조단 측의 대응이 보다 자유로워졌다. 다음 날인 1월 25일, 첫 사전재판 진술이 예정됐던 날에 민사 합의가 이루어졌다.

94년 1월 25일에 조단 측은, 마이클은 조단에게 어떠한 잘못된 행위도 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 합의문 합의하고 민사소송 청구액 보다 1000만 달러 가량이 적은, 조단에게 1530만, 조단의 부모에게 400만 달러를 지급받는 것에도 합의하여 마이클 측은 민사소송을 끝내고 형사 대비만 하게 된다. 이 민사 합의금을 보험사에서 지급했다는 관련자들의 진술이 있지만 아직 완전히 검증된 내용은 아니다.[20] 당시 <HIStory> 앨범 발매를 준비중이었던 마이클은 합의문에 마이클의 이름과 이미지 및 초상권의 상업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합의를 결정했다고 명시하였고, 따라서 조단 측은 미디어나 출판, 영상을 통해 해당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 것에만 합의했을 뿐 형사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조단의 변호인 레리 펠드만도 검찰이 이미 모든 증거를 가져간 상태라고 밝히며 조단이 형사 증언을 할 수 있음을 직접 전했다. 이렇게 민사합의 이후로도 조단은 형사수사에서 언제든지 마이클에 대해 증언할 수 있었다.[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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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문에서 마이클은 어떠한 책임도 본인은 지지 않으며 어떠한 잘못된 행동도 하지 않았음을 명시했다.
기타 마이클의 민사합의와 관련한 해설과 언급들
마이클은 합의 직전인 94년 1월 초까지도 합의를 반대했었고, 마이클 측 대응 수단이었던 에반에 대한 공갈 고소를 검찰이 기각할 것이 예측되고 마이클이 <History>앨범 작업을 시작한 1월 중순이 돼서야 조단 측의 협상에 응했다. 당시 마이클과의 비즈니스로 수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민사소송이 장기화되어 앨범 홍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마이클 주변엔 그러한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주변에서 합의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였던 것을 마이클이 후회하고 있다고[23] 2차 혐의 때 마이클의 변호사였던 톰 매제로우가 04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비즈니스적 상황과 별개로 합의와 관련한 입장엔 우선 25년 전의 법적, 제도적으로 열악했던 상황이 작용했다.
【민사합의 상황에 대한 설명 더보기】
【● 이 사건 이후에 형사사건에서 민사소송을 먼저 진행하지 못하도록 캘리포니아 주 법이 바뀌었고 마이클은 실제로 형사심리 결과를 먼저 받기위해 민사재판의 연기를 요청했으나 당시 재판부는 얼마 후에 이뤄진 법개정과 반대되는 거부의 판단을 했고, 거부하는 근거가 됐던 조단의 기억력 지속 문제는 형사심리와 수사가 민사재판 보다 시간상 더 뒤였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단 점,
● 민형사 별개의 원칙을 깨고 민사 과정을 형사에 이용하는 것마저 허용하여 재판부가 스스로 법리역전까지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마이클 측은 민사 사전재판을 할 경우 마이클 측의 반박 증거 및 변론이 노출되어 형사에 불리해지는, 형사를 위해서는 민사 재판을 포기하는게 안전해지는 양자 택일의 상황이 됐단 점,
● 재판부가 본 재판이 아닌 사전재판 부터 언론 인터뷰를 허용하여 25년 전엔 훨씬 심했을 인종차별 상황에서 민사재판 배심원단에 영향을 미치도록 방치했단 점,
● 마이클 측 대응 수단이었던 에반에 대한 공갈혐의 고소를 검찰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불기소하여 조단 측의 대응이 자유로진 다음 날에 합의가 이루어졌단 점,
● 민사합의가 이뤄진 첫 민사 사전재판 예정일 전에 대부분의 수사가 끝났고 신체수색마저 불일치하여 이미 기소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검찰이 대배심에 기소 판정을 요청하지 않아 형사 결과 및 명확한 정보가 민사 사전재판일 전에 나오지 않게 된 의도성이 추측되는 형사과정 지연 등에 미뤄

당시 법망의 미비와 차별적인 재판부와 검찰의 태도가 만든 불리한 민사재판의 상황이 합의를 권하는 원인 배경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중상류층 백인이 많은 보수적인 산타바바라에서 형사재판과 달리 증거의 소명 보다는 배심원들의 심리에 좌우되는 민사재판을 하는 것은 도박과도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말렸다는 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94년은 히스토리 앨범 발매를 준비하던 상황이었고 민사재판의 재판출석을 강제할 경우 출국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94년 8월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이루어진 히스토리 앨범의 티져 영상 촬영 같은 실제 활동에 지장이 갈 수 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조단사건으로 인해 타블로이드가 주축이 된 원색적인 보도들이 쏟아지면서 여론이 악화되고 있었던 점도 앨범 발매를 앞두고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매제로우는 마이클과의 비즈니스로 수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민사소송이 장기화되어 홍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마이클에게 그러한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는 언급을 했었다. 참고로 마이클로 인한 연관 산업의 규모는 조 단위이며 투어 중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는 손해보험액도 6000억 대였고, 이러한 비즈니스의 규모에 비하면 민사합의금이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이기는 하다. 하지만 비즈니스 이익을 위한 합의 조언들은 이를 악용하는 시도들이 계속될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이기에 마이클 개인의 위험에 대해서는 주변의 경각심이 부족했던 것도 알 수 있다.

그 외에 마이클이 후반부로 갈수록 불면증, 탈수 증상 등이 급격히 악화되어가던 상태라[24] 더군다나 재판부가 불리하게 판정한 민사재판과 고압적인 형사수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너무 부담이 컸을거란 말도 있으며, 위에서 언급했듯 당시의 여러 열악한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이다. 아울러 민사재판을 진행하게 되면 투어 일정에 차질이 생겨 각 나라의 프로모터들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에 직면하기 때문이란 설도 있었으나 합의 2개월 전에 건강악화로 멕시코 투어를 끝으로 남은 투어를 취소하여 막대한 피해가 이미 발생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건 시간 순서 상 맞지 않는 얘기이다.】

수사당국도 '형사수사는 계속 진행 중이고 민사합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며 조단과 계속 접촉했다. 조단은 민사합의 이후로 근 반년간 형사들에게 진술을 이어갔는데 합의 이후에 열린 대배심에 출석하는 것은 거부하여, 조단의 진술은 기록으로 대배심에 제출되었지만 제출된 진술의 진실성 여부를 두고 대배심의 질의응답을 받는 것은 피하여 교차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5] 조단 외에 검찰 측 혐의를 지지하는 다른 증인들이 대배심에 출석하여 심리를 진행했고 (본문 하단 참고) 조단을 포함한 모든 검찰 측 진술들은 신빙성 있는 증언 인정 여부를 놓고 4차례 압수수색과 신체수색 등의 수사기록과 다른 관련자 진술들과 대조되었다.

그러나 94년 9월 수사당국은 공식 성명을 발표하는데 조단이 증언 의사를 밝혀 그동안 수사를 진행해 왔지만 94년 7월 6일부로는 조단이 더 이상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해왔고, 결국 지난 13개월 간의 조사에서 조단 측이 주장한 마이클의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기에 혐의를 제기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최종적으로 증거불충분으로 인한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수사 종료 전, 94년 5월에 먼저 해산 산타바바라 대배심에 이어 LA 대배심도 94년 7월에 이미 해산했는데 대배심원들은 마이클에게 불리한 증거나 증언은 없었다고 밝혔다.[26] FBI도 수사당국에 도움을 제공했으며 09년 마이클 사후에 기록을 공식 사이트에 공개했는데, 일부 단서가 있었다는 톰 스네던의 사건 종결 이후 주장과 달리 당시 검찰은 사건 내내 아무런 단서가 없었음을 문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27]
The grand jury in the Michael Jackson investigation has been disbanded, and one jury member said no damaging evidence was heard... One juror told CNN he did not hear any damaging testimony during the hearings. CNN has previously reported the panel was never asked to render an indictment, and that no vote was taken to do so.

마이클 잭슨 사건의 (산타바바라) 대배심은 해산됐고 한 배심원은 (잭슨에게) 불리한 증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른 배심원은 심리 과정에서 (잭슨에게) 불리한 그 어떠한 증언도 듣지 못했다고 CNN에 밝혔다. 또한 이전에 대배심이 (검찰로부터) 기소 요청을 받은 적이 없고 그에 따라 투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CNN은 보도했다.
1994년 5월 2일 CNN 보도
파일:FBI 조단.png
FBI 문서. 94년 8월에 검찰이 여전히 기소 여부를 고민 중이었지만 중요한 단서가 없었다고 적혀 있다.
After approximately one year, the investigation is now concluded. During the course of the investigation, approximately four hundred witnesses were contacted and additional thirty witnesses were called before grand juries in Los Angeles and Santa Barbara. Hundreds of clues from the public were probed. Much time was spent pursing potentially exonerating evidence as well as inculpatory evidence. Several leads were explored which later turned out to be false.

약 1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수사는 종결됐다. 수사 과정에서 대략 400명의 증인들과 접촉했고 추가적으로 30명의 증인들이 LA 산타바바라의 대배심에서 증언했다. 수백개의 제보들이 검증을 받았다. 유/무죄를 밝혀줄 증거를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몇 가지 단서들이 발견되긴 했지만, 다 허위로 드러났다. Washington Post (1994.09.22 보도 참고)
.....
at the present time this alleged victim has chosen to assert his rights under Code of Civil Procedure section 1219 and has declined to testify. This decision was not communicated to either prosecutorial agency until July 6, 1994. Until that time, the alleged victim had indicated his possible willingness to testify and we continued with our investigation.

현재 조단은 민사소송법 제1219조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로 했으며 증언을 거부했다. 이 결정은 1994년 7월 6일까지 어느 검찰 기관에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조단은 증언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한 상태였고 우리는 수사를 계속했다. Deseret News (1994.09.22 보도 참고)
1994년 9월 21일 수사당국 공식성명문

그런데 조단 측이 민사 재판으로 갈 수 있음에도 합의를 먼저 제안하여 그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내용의 민사합의를 하고 이후 형사수사에서 증언을 중단한 것에 대해 당시 밝힌 이유가 실제 정황과는 맞지 않는 것이 이후에 드러났다.

94년에 조단 측은 수사 초반에 신속하게 마이클을 기소하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었다며 검찰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수사가 장기화되자 대중과 언론의 지나친 관심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조단이 힘들어했고 따라서 세간의 관심을 피해 조용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그 이유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96년에 에반은 마이클에게 6,000만 달러의 민사소송[28]을 다시 제기했는데 이때 과거의 주장과 반대로 아들 조단이 성추행 당한 내용으로 노래를 만들어 에반 자신의 이름을 딴 <EVANstory>라는 앨범을 발매하고 대중에게 공표하여 판매'할 수 있게끔 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한 것이다. ( 관련 기사) 소송은 2000년에 기각됐다. 참고로 이때는 미성년자였던 조단이 생물학적 부모인 에반과 준으로부터 95년에 법적 독립을 얻어낸 이후라 에반은 조단 앞으로 신탁된 민사합의금 1530만 달러에 더 이상 관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단의 삼촌인 레이 챈들러도 94년 합의가 있고 바로 며칠 후에 출판사를 찾아가 조단사건을 주제로 책을 내려고 했었다. 이것은 레이 본인도 재판 문서에서 인정한 사실이다. 당시 레이가 만났던 출판업자 주디스 레건(Judith Regan)은 09년 <SiriusXM radio>와의 인터뷰에서 레이와의 계약은 조단사건에 대한 출판을 제한한 민사합의 조항으로 인해 법적 문제가 생길 것으로 예상돼 끝내 성사되지 않았으며, 협상 과정에서 레이가 "에반이 나에게 책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줬고 나는 합의 당사자가 아닌 제 3자"라며 출판을 설득하려 했다고 밝혔다. 레이는 결국 04년에 실제로 책을 출판하는데 성공했는데 그 책이 바로 앞서 여러번 언급됐던 <All That Glitters>이다. 이때 레이는 과거 수사당국도 찾지 못했던 마이클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들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책 출판과 동시에 각종 언론 인터뷰를 병행하며 홍보했었다. 이에 개빈사건으로 형사재판을 앞두고 있었던 마이클은 레이에게 문서로 해당 증거들을 모두 제출하고 또 재판의 증인으로도 출석해 교차검증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레이는 본인이 말했던 증거들은 사실 이미 언론에 공개된 내용들이었고 또 조단사건은 개빈사건과는 관련이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모두 거부했다. 하지만 후에 개빈사건의 형사재판에서 실제로 조단사건도 재판 영역에 포함되어 조단의 어머니인 준 챈들러까지 증인으로 출석했음에도 레이는 끝까지 증언하지 않았다.

한편 검찰이 94년에 수사를 종결하면서 톰 스네던은 앞으로 5년간 공소시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조단이 다시 증언할 의지[29]를 보인다면 언제든 형사수사를 재개할 뜻이 있음을 밝혔지만 조단 측은 끝내 다시 수사를 요청하지 않았다. 다음은 레이 챈들러의 저서 <All That Glitters>에서 발췌한 조단의 변호인인 레리 펠드만과 에반의 대화록이다.[30]
Larry: ... The only thing we gotta do is keep the criminal behind us. I don’t want them going first.
우리가 해야할 건 형사를 합의 뒤로 미루는거 딱 하나야.

Larry had said it before, but it hadn't registered in Evan's brain till now.
레리가 전에도 에반에게 이 얘기를 해줬지만 에반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Evan: You mean if they indict, the criminal case automatically goes before us?
만일 기소하게 되면, 형사재판이 자동적으로 민사보다 먼저 열린다는 뜻이야?

Larry: Yeah. 그래.

Evan: Jesus Christ! 세상에!

Larry: Right! So we don’t want that. 맞아! 우린 그걸 원하지 않아.
레이 챈들러 저서 <All That Glitters> 中

민사합의를 했다는 이유로 의문을 가지는 시선이 있으나, 앞에서 기술했듯 처음부터 소송을 하지 않는 대가로 합의금을 요구했고 소송 이후에도 재판장으로 가기보다는 먼저 합의할 것을 요구한 건 조단 쪽이었고 조단 측 주장과 반대되는 마이클의 결백에 동의하는 합의를 했으며 그 이유로 제시한 것들이 이후에 모순되었던 점, 합의에 이르기 전에 이미 5개월 간 수차례의 압수수색과 마이클의 신체수색까지 대부분의 형사수사가 진행됐으나 그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아 검찰이 기소하지 못했고 조단의 진술 자체가 합의 전부터 신체수색과 스스로 모순되어 이미 유효하지 않았단 점[31], 합의 이후에 지속된 8개월 간의 형사수사 과정에서 조단이 6개월 간 수사에 응했으나 수사당국이 역시 아무런 단서도 못찾은 점, 그나마 수사 종결 후에 뒤늦게 수사당국이 유일한 성과라고 주장했고 조단의 삼촌인 레이도 자신의 책을 통해 조단이 가능한 모든 각도로 마이클의 성기를 관찰하여 진술했다고 말한 조단의 정확한 성기 묘사라는 것도, 마이클 사후에 공개된 수사당국이 단서를 찾지 못했음을 명시한 FBI 문서와 결정적으로 모순된 마이클의 부검 결과에 의해 신빙성이 부정된다는 점 등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민사가 당사자들 사이에서 끝나는 전과와 관련 없는 문제인데 반해 형사는 합의가 불가능하고 형벌을 다루는 위중한 것인데도 마이클이 먼저 형사과정이 다 끝날 때까지 민사가 연기되길 바랬다는 점과 조단 측은 이와는 정반대로 민사합의 이전에 금전보상의 근거인 혐의를 가리는 형사결과가 나오는 걸 바라지 않았단 점, 민사합의 이후에 계속 형사 증언을 할 수 있었음에도 자발적으로 형사수사에 소극적이었고 이를 애초에 의도한 정황도 생각해볼 부분이다.
94년 1월 5일 전미 흑인지위 향상 협회 이미지 어워즈 연설 (1:38) - 마이클은 끝까지 싸우겠단 의지를 강하게 시사했다.
"모든 사람은 죄상을 조사받기 전엔 무죄로 추정되어야 한다는 원칙 만큼 지금 이 순간 제 삶에서 의미있는 것은 없습니다.
진실을 들을 기회를 갖기도 전에 최악의 얘기를 기꺼이 믿고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실감하기 전까진 말입니다."

한편 수사과정에서 허위사실까지 동원한 유도심문과 강압수사를 아이들에게 했고, 검찰 측 증인에게 금품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진짜 소아성애 범죄를 제보 받았으나 경찰이 무시하고 마이클만 표적으로 하여 혐의를 만들어내려 한 것이 이후에 드러났다.

경찰은 마이클과 어울렸던 아이들을 심문하면서, 아이들이 결백을 진술했는데도 계속해서 부정하며 심문을 강제하고 마이클을 'Molester'라고 표현하며 당시 아역배우이자 마이클과 친했던 맥컬리 컬킨과 코리 펠드만이 마이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허위사실까지 동원하여 압박하는 유도심문과 강압수사를 했다. 검찰은 94년 9월 사건종결 공식성명에서 수사 중 두 명의 피해자들을 추가로 발견했으나 이들이 증언을 거부하여 마이클에게 혐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면피성 발표를 했는데, 이중에 한 명이 바로 9살 아이를 대상으로 유도심문과 강압수사를 하여 진술을 번복시킨 제이슨 프란시아 건이다. 제이슨의 진술은 당시에도 단서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05년 재판 때 제이슨이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하여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유도심문 녹취록[32]이 공개됐고 제이슨은 직접 "당시에 어떻게 하면 경찰과의 심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 게다가 다른 한 명은 전혀 실체도 없는 허구였다.(자세한 내용은 제이슨 프란시아 문서 참고.) 또 대배심에 검찰 측 주장을 지지하는 증인으로 출석했던 랄프 채콘이 당시 검찰 측 수사관이었던 러스 버침에게 돈을 받은 것이 05년 재판에서 밝혀지기도 했다.[33]

후에 코리 펠드만은 당시 수사에 응하면서 녹음한 경찰과의 심문 내용을 공개했는데, 코리는 경찰에게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아동 성학대를 당한 피해자임을 고백하며 그래서 자신은 소아성애자를 구분할 수 있으니 마이클의 결백을 알며, 자신을 진짜 학대한 백인 배우 존 그리삼을 포함한 헐리우드 내의 실제 소아성애자들 리스트를 경찰에 알려주고 이 사람들을 수사해보라고 말했으나 경찰은 무시했고 이미 결백하다고 진술한 마이클에게만 계속 혐의를 만들어내려 했다고 17년 <Today Show>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34] 존 그리삼은 코리의 피해자 직접 제보에도 불구하고 93년에 수사받지 않았고 이로부터 8년이 지난 2001년에 다른 아동성범죄들로 추가 피해자를 더 만든 뒤에야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실제로 93년 수사 당시에도 관련 의혹이 제기되어 마이클의 변호인이 경찰서장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내용은 수사관들이 마이클과 만났던 아이들을 심문하면서 "경찰이 너의 누드 사진들을 가지고 있다"는 허위사실로 겁을 주며 마이클의 혐의를 뒷받침할 진술을 억지로 받아내려 했고 또 아직 수사중이고 기소도 안 된 마이클을 '페도파일(pedophile)'이라고 칭하며 범죄자로 확정하여 말했다는 것으로 마이클의 변호인은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들로부터 직접 제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외부 클레임을 조정하는 경찰위원회 의장은 이에 대해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본인은 경찰의 조사방식이 매우 철저하고 조심스럽게 이뤄진 것으로 본다면서 수사관들을 옹호하였고, 경찰 대변인은 논평을 거부하면서 아무 입장도 밝히지 않았었다.

이 시기에 타블로이드 매체들의 마이클 지인들을 대상으로 거액을 제시하며 거짓 진술을 회유하는 시도도 있었다.

웨이드 롭슨의 어머니인 조이 롭슨은 16년 재판에서 93년 조단 사건 당시 <National Enquirer>으로부터 6자리 금액을 받는 대가로 마이클이 그녀의 자식들을 건드렸다는 얘기를 해달라고 제의 받았으나 거절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35] 05년에 론 뉴트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같은 일화를 밝혔다. 론도 조단 사건 당시 <National Enquirer>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는 대가로 그의 아들이 마이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밝혔는데 <National Enquirer>가 이 의혹을 인정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이 외에도 타블로이드의 허위보도와 다른 조작 시도도 계속 되었는데, 95년에 타블로이드 TV 방송 <Hard Copy>에서 15살의 캐나다 홈리스 소년이 캐나다의 아케이드에서 마이클을 만나 개인비행기로 네버랜드로 이동해 성추행을 당했다는 주장을 보도하였고, 소년이 경찰 조사에서 마이클의 집 구조를 그려내고 네버랜드 직원들의 얼굴과 이름까지도 구별해냈다며 곧 성추행 비디오가 공개될 것이라고 확언하여 보도했었다. 하지만 소년은 곧 구속됐는데, 캐나다 현지 경찰과의 심문 과정에서 모순이 드러나자 소년은 자신이 했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으며 마이클을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진술 내용은 북미 동성 소아성애 옹호단체인 NAMBLA의 멤버이자 소년들을 이용해 매춘업을 했던 로드니 알렌(Rodney Allen)이라는 남성에게서 코치받은 내용이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로드니 알렌은 방송에서 이 사실을 직접 인정하고 잠적했으나 99년에 5명의 소년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허위보도 문건 참고)
Police and prosecutors complained that they were thwarted by tabloid publications and television shows that paid money to potential witnesses. Such payments, widely made by such television shows as "Hard Copy" and "Inside Edition," compromised the integrity of several potential witnesses, authorities said.

경찰과 검찰은 (마이클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할) 가능성이 있는 증인들에게 타블로이드 언론들과 TV쇼들이 돈으로 대가를 지불하면서 좌절감을 느꼈다고 불만을 표했다. 이러한 거래는 특히나 "하드 카피"와 "인사이드 에디션"과 같은 TV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밝히며 이로 인해 몇몇 증인들의 진실성이 훼손됐다고 수사당국은 주장했다.
<1994년 9월 22일 LA타임즈 보도>

당시 검찰은 타블로이드에 이야기를 팔았던 사람들을 검찰 측 증인으로 대배심에 출석시켜 진술하게 했으나 단서로 인정받지 못했고, 05년 재판에 조단사건까지 포함되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또 한번 검증되었는데 초기에 그들 스스로 마이클의 결백을 진술했던 기록과 금전 대가를 받고 수차례 말을 바꾼 전력, 또 그들 이야기와 모순되는 당사자 진술과 상황 검증으로 모두 신빙성을 잃었다. - 하단 루머거래 참고
사건 이후 챈들러 가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05년 개빈사건 재판 때, 마이클의 변호사 토마스 매제로우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강압으로 거짓말을 했었다는 조단의 말을 들은 조단의 지인들을 증인으로 섭외했으나 조단이 해외로 도피하면서까지 증인 출석을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밝혔다.[36] 수사관들이 04년에 조단을 찾아가 증언을 권유했지만 조단이 "내 역할은 다 했다"고 밝히며 법정 검증을 완강히 거부했던 것도 FBI 문서에서 드러났다. 이후로도 조단은 언론을 피해다니며 행방을 숨기고 다녔는데, 한때 마이클 사후에 조단이 돈을 노린 아버지가 꾸민 일이었다고 양심고백을 했다는 말이 돌았으나 이는 에반의 자살을 보도하며 방송에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말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사실이 아니며 조단은 계속 숨어사는 중이다.[37]

05년 7월에 에반은 조단을 폭행하고 스프레이를 눈에 뿌리며 질식을 시도하는 사건을 일으켜 법원으로부터 조단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다. 이후 에반은 09년에 마이클이 사망하고[38] 5개월 뒤 FBI의 사건기록 공개 얼마 후에 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다. 한편 조단의 어머니 준은 05년 법정 증언에서, 조단이 마이클과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에반이 조단과 그다지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아들이 마이클에게 성추행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에반이 양육권을 가져가서 합의금을 받아낸 후 지난 11년 간 준은 단 한 번도 아들과 대화를 해보지 못했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3. 2003년 2차 혐의

파일:03개빈과개빈가족.jpg
2003년 당시 13세였던 사건 당사자 개빈 아르비조와 마이클.
2000년 암투병 중이던 10살 소년 개빈 아르비조(Gavin Arvizo)의 가족은 여러 연예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를 알게 된 마이클은 개빈 가족에게 병원비를 지원하며 병의 완치를 도왔고, 개빈이 자기와 만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02년에 개빈 가족을 네버랜드로 초대했다. 문제는 영국 언론인 마틴 바셔[39]가 02년에 "Living With Michael Jackson"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마침 네버랜드를 방문했던 개빈과 마이클 사이를 오해하도록 편집한 영상을 03년 2월 3일엔 영국의 TV 채널에서, 2월 6일엔 미국의 TV 채널에서 방영하면서 시작됐다.
[방송에 나온 문제가 된 마이클의 말]
Jackson: "Why can't you share your bed? The most loving thing to do, is to share your bed with someone."
왜 침대를 공유하면 안되는 거죠? 누군가와 침대를 나누는 건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방송에서 삭제한 그 다음 마이클의 말]
Jackson: "You're saying you can have my bed if you want, sleep in it. I'll sleep on the floor. It's yours. Always give the best to the company, you know. Like to him. Because he was going to sleep on the floor and I said 'No, you sleep in the bed and I'll sleep on the floor."
마틴 당신도 원한다면 내 침대를 가져도 돼요. 난 바닥에서 자면 되니깐. 난 항상 내 친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바닥에서 잘려고 하면 '아니, 니가 침대를 써, 내가 바닥에서 잘게'라고 말하게 되는 거죠.

< 마틴 바셔의 원본 인터뷰 中 >
즉, 마이클의 '공유'는 따로 침대를 내어준다는 의미였는데 마틴은 일부러 뒷 부분의 말을 삭제함으로써 마치 한 침대에서 자길 원하는 양 왜곡했다.[40] 대부분의 언론이 이런 식으로 '침대 without 마이클 → 침대 with 마이클' 로 왜곡했다.

게다가 마틴 바셔가 마이클에게 동성애자냐고 질문하자 마이클이 대답하지 않겠다[41]라고 말한 장면에 이어서 개빈과 손을 잡은 장면까지 붙여 넣음으로써 마치 마이클이 개빈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장면 또한 마틴 바셔가 손을 잡아보라며 유도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또한 마틴이 환자의 출연을 먼저 제안했고 이에 마이클은 80년대부터 인연을 맺었던 "데이브 데이브"란 성인 화상환자의 출연을 원했으나 마침 네버랜드를 방문 중이던 개빈을 마틴이 선택했던 것도 이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개빈이 나온 장면은 02년 단 하루 동안에만 촬영되었는데 이때 데이브도 함께 있었고 개빈 가족은 그날 다큐 촬영이 있는지도 몰랐으며 촬영이 끝난 직후에 네버랜드를 떠났다. 개빈은 재판 과정에서 데이브와 만났음을 증언하였고 네버랜드를 떠날 때 마이클의 연락처를 받은 적 없으며 개빈 조차도 마틴의 다큐는 사실이 아니라고 진술했다.(05년 3월 14일 개빈 아르비조 법정진술 참조) 데이브 데이브도 09년 CNN 래리 킹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밝혔었다. 심지어 98년에 마이클에 대한 허위유포 중상모략으로 27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판결받은 루머 작가 빅토르 구티에레즈를 다큐 제작에 고용했던 것이 구티에레즈의 06년 9월 영국 GQ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밝혀지기도 했다.[42]
파일:03마틴바셔.편집.사과.jpg
마틴 바셔는 마이클이 죽고 난 뒤에야 2009년 ABC 방송에서 왜곡 다큐를 공식 사과했다.
독일의 심리학자 Dieter Speck 박사가 분석한 마이클의 심리 (2004)
마틴 바셔는 성인의 성적인 의도의 행동과 성개념을 인식하기 전인 아이스러운 행동을 혼동하고 있다. 마이클은 아버지로부터 가혹하게 학대당했고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했던 갈망이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마이클이 아이들을 가까이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진정한 아버지가 되어주고 싶어서이다. 즉 그는 아이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받고 싶었던 사랑을 주는 아버지이기도 한 것이다.[43] 순진한 한 인간으로써, 완벽한 순수함으로, 댓가없는 완벽한 선의로, 기꺼이 주는 그런 사랑 말이다.

인터뷰를 본 후 마이클의 인생을 조사했고 그가 아동 성학대자의 프로파일과 맞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진짜 소아성애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아이들을 괴롭힌다. 그는 소아성애자가 아니다. 그는 사실 아이처럼 순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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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바셔는 마이클을 속였고 그의 진심을 이용했다. 이런 저널리즘 퍼포먼스로, 마틴 바셔가 갚아야 할 대가는 존엄에 대한 거짓이며 그것은 인격의 파괴로 이어진다.[44]
개빈 사단이 터진 후 뒤늦게 마틴이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원본 인터뷰를 보면, 개빈은 마이클의 침실에서 자게 해달라고 자신이 부탁했고 개빈의 어머니도 원했으며 이때 마이클은 바닥에서 따로 잤다고 말하고 있는데, 재판에서도 마이클의 자녀도 함께 침실에 머물러서 마이클은 개빈 형제를 자신의 자녀와 똑같이 대했음이 밝혀졌고 마이클은 개빈 형제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바닥에서 비서 프랭크와 따로 잤으며 개빈은 그날 단 하루 외에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물렀음을 개빈 또한 증언하였다.( 05년 3월 14일자 재판 증언 1/ 2 참고)

또한 인터뷰에서 마이클은 절대 자신이 아이들을 침실에 초대한 적이 없으며 게스트 하우스가 있더라도 아이들은 늘 자기와 함께 있고 싶어하곤 했고 간혹 침실에 머물길 부탁하는 때가 있었는데[45] 그럴땐 부모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게 했고,[46] 그런 경우도 아주 적었다고 밝히고 있다.[47] 즉, 마틴 바셔는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사실이 아닌 멘트를 넣고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편집을 한 것이다.
< 마이클의 침실에 대한 증언과 진술들 > 아래는 대부분 94년 이전의 일화들로써 이후엔 이렇게 어울린 상황도 거의 없었다.[48]
마이클은 개빈 사건으로부터 10여년 전에 아이과 침실에서 잠들었던 일이 있었는데 이를 "성적인 성향"으로 의심하려면, 그 상황이 성적의도가 가능한 은밀한 상황이자 신체적 접촉을 목적으로 의도한 것이며 성향으로 유추할 만큼 지속적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은밀함도 의도성도 없었으며 과거의 한시적 상황이자 일부의 경우였었다. 1.2차 혐의를 다 수사했던 톰 스네던 검찰은 이를 성적인 의도로 연결시키려 했으나 아래와 같은 진술들로 부정되었으며 1차 혐의때 대배심과 2차 혐의 재판의 배심원단도 모두 무고한 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파일:네버랜드.도면.jpg [참고] 마이클 침실 도면과 관련 사진들

맥컬리 컬킨은 04년 CNN 래리 킹과의 인터뷰에서 마이클의 침실은 2층 구조에 3개의 화장실이 있으며 웬만한 가정집보다도 큰 규모라고 밝혔다.

상단 도면의 파란색 박스가 마이클의 침실이며 저택의 이스트 윙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빨간 라인이 침실 내 2층이며 도면에서 보듯 2층은 문 없이 계단으로 연결된 구조이다.

(왼쪽 상단) 1층은 외부 정원으로 바로 연결된 문과 함께 바깥쪽 벽면이 다 유리창인 구조이며 스튜디오형 아파트 같은 형태이다. (왼쪽 하단) 욕실도 도면 상 외부에서 바로 진입하는 문이 있으며 벽면이 유리창으로 이루어져 있고 천창까지 설치된 개방적 구조이다. (오른쪽) 침실 앞 복도도 오고 가는 것이 바로 보이는 큰 창문들이 있다. 네버랜드는 따스한 기후의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네버랜드 내 건물들은 대부분 이런 식의 많은 창문들을 가지고 있다.
마이클의 침실은 누구나 언제든지 제한없이 드나들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었다.
1차 혐의 조단 챈들러의 어머니인 준 챈들러(June Chandler)증언도 언제고 드나들었다고 증언했으며 웨이드 롭슨의 어머니인 조이 롭슨증언, 웨이드의 누나인 찬탈 롭슨증언 등도 일관되게 법정에서 위와 같이 증언해왔다. 또 맥컬리 컬킨의 아버지인 킷 컬킨(Kit Culkin)도 05년 저서 <Lost Boy>에서 마이클의 침실은 누구나 와서 어울리는 개방적인 곳이라고 밝혔고 90년대에 네버랜드를 드나들었던 로슬린 위츠 코헨 가족도 마이클의 침실 문이 닫힌 걸 본 적이 없으며 마이클은 개방적이고 투명했다고 밝혀서 마이클의 침실은 일반적인 가정과는 다른 공개적인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27년간 마이클의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카렌 페예(Karen Faye)도 마이클은 물건을 못찾는 경우가 많아서 카렌에게 종종 대신 찾아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이때마다 자신은 마이클의 옷장, 서랍, 침대 커버까지 집과 호텔의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며 마이클에겐 어떠한 비밀 같은 것도 없었다고 밝혔다.
부모님과 지인 등의 성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함께 있던 파티 같은 상황이었고 일상적인 경우도 아니었다.
마이클의 세 자녀 및 비서와 함께 머물렀던 개빈처럼, 조이 롭슨도 아이들과 함께 그 방에 있곤 했으며 여럿이서 게임하고 놀다 지쳐 잠드는 파자마 파티 같은 상황이라고 93년 CNN 인터뷰에서 밝혔다. 조단 챈들러의 어머니인 준 챈들러는 심지어 본인도 마이클과 함께 침대에서 잠든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아무런 제약없던 격의없는 상황임을 밝혔으며 메이크업 아티스트 카렌도 밤에 마이클의 침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신도 머물렀었고 마이클의 침대에서 잠든 적도 있다며 비슷한 상황을 말했다. 또한 찬탈 롭슨과 웨이드 롭슨도 CNN 인터뷰에서 여러 사람과 같이 놀던 상황이며 만화책을 보다가 잠드는 것과 같은 의도치 않은 상황이라고 같은 의미의 진술을 했으며 이외 브렛 반스도 수차례 같은 진술을 한 바 있다. 또한 마이클의 조카 브랜디와 타지 잭슨은 네버랜드엔 늘 많은 방문객들이 북적였지만 정작 마이클은 자주 자리를 비웠으며 삼촌은 늘 일로 바빴다고 밝혀서 마이클이 이런 상황도 드물었다고 말한 것처럼 위와 같은 상황은 일상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조이 롭슨도 14년간 네버랜드에서 마이클과 만난 건 4번뿐이라고 증언했었다. 이는 당시 많은 활동을 하던 마이클의 스케쥴과 비교해 보아도 객관적으로 검증되는 사실이다.
마이클은 아이들을 침실로 초대한 적이 없으며 일부 아이들의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을 마이클의 방에서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마이클의 방에 머물길 먼저 부탁한 개빈처럼 조이 롭슨도 90년에 본인이 먼저 마이클에게 아들이 마이클과 있길 원한다고 부탁했고 이에 마이클이 "롭슨이 원한다면 괜찮다"라며 허락했다고 증언하여 마이클 본인이 아이들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는 법정 진술을 뒷받침했다.[49] 준 챈들러 또한 조단이 먼저 마이클의 방에서 놀게 해달라고 준에게 졸랐음을 증언하여 역시 마이클의 요청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로슬린 위츠 코헨 가족도 마이클이 아이들과 따로 있길 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자신들은 항상 온가족이 함께 어울렸고 다른 부모들이 한 요청을 자신들은 한 적 없으며 게스트 하우스만 이용했었다고 밝혔고 독일의 Schleiter 가족도 마이클은 어떠한 요청도 한 적이 없으며 온가족이 함께 어울렸다고 밝혀서 일부 자신의 아이들을 마이클의 방에서 놀게 해주도록 부탁한 가족 외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음을 추측케 했다. 이와 관련해 카렌은 마이클은 아이들에게 별도의 게스트 하우스 구역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곤 했지만 아이들의 부모님이 와서 마이클의 침실이 있는 메인 하우스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곤 했었고 그럴 때마다 마이클이 'No'라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 했다고 밝히며 이 상황을 설명했다.[50]
마이클은 지인들이나 아이들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따로 자거나 자리를 비우곤 했었다.
마이클은 바닥에서 따로 잔 개빈 때의 상황처럼 카렌도 마이클은 아이들과 따로 잤음을 밝혔는데,[51] 넓은 마이클의 침실에서 아이들은 바닥이든 큰 의자든 난로 앞이든 잠들곤 했고 간혹 마이클의 침대에서 잠드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마이클은 침실의 다른 곳에서 잠을 잤다고 밝혔다. 코리 펠드만도 93년 챈들러 건으로 조사받았을 때 마이클의 침대를 코리에게 내어줬고 마이클은 따로 간이침대를 가져와서 사용했다고 진술했었다. 카렌은 또한 마이클은 작곡이나 안무 연습 등 본인이 하고 싶은 일들은 대부분 밤에 했고 이를 위해 아이들이 잠들기까지 기다렸다가 극장으로 빠져나와 작업을 했다고 밝혔는데 카렌의 말처럼 깨어나보니 마이클이 방에 없어서 실망했었다는 아이들의 진술도 나왔었다. 아울러 잠들기 전이든 깨어난 후든 마이클과 아이들 모두 항상 정상적인 의복을 다 갖춘 상태였다고 진술되어 있다.

마이클은 다큐 촬영 당시 마이클 쪽에서도 동시에 촬영했던 영상과 함께 03년 2월 말에 FOX 채널을 통해 해명 방송을 했고 다큐 방영 직후인 2월부터 다시 네버랜드를 방문했던 개빈 가족도 2월 20일의 촬영에 참여하여 마이클을 옹호했으나 실제 방송에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심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산타바바라 보안관 부서와 아동복지국은 비밀리에 개빈과 그의 가족들을 탐문 수사하였는데 개빈 가족은 어떠한 부적절한 행동도 없었으며 오히려 마이클을 은인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당국은 성추행 혐의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파일:개빈.프랭크.진술.jpg
개빈의 법정 증언과 동일한 프랭크 카시오의 진술: 마이클은 개빈의 부탁이 난처하여 제 3자인 프랭크와 함께 있는 안전책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개빈 가족은 네버랜드를 떠나고 몇 달 후에 마이클이 네버랜드에 자신들을 감금하고 협박해서 거짓말을 했다며 말을 바꿨고, 02년 다큐 촬영 때가 아닌 03년 마틴의 왜곡 다큐가 방송에 나간 후 마이클에게 세간의 의심이 집중됐을 때 마이클이 개빈을 성추행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면서 93년 사건에서 조단 챈들러 측 변호사로 합의금을 받아내었던 레리 펠드만을 고용했다. 결국 11월에 마이클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경찰관들은 전혀 저항없던 마이클의 팔을 꺾어서 어깨를 탈골시켰고 더러운 화장실에 감금하고 조롱한 것이 이후에 드러나기도 했다.[52] 이례적인 대규모인 70명의 보안관들이 네버랜드를 수색했으며 마이클은 보석금을 내고 곧 풀려났으나 검찰은 12월에 혐의를 확정짓고 마이클을 기소했다.
파일:가혹행위.톰스네던.jpg
(좌) 어깨 탈골 외에도 수갑을 지나치게 윗쪽에 채워서 팔이 졸리고 뒤틀리면서 마이클이 부상을 입은 모습. 마이클잭슨이 경찰로부터 당한 폭력을 말하는 인터뷰 한글자막 우) 03년 12월에 마이클 사건 기자회견을 하는 톰 스네던 검사. 재판이 끝난 후에 배심원단 대표 폴 로드리게즈는 검사가 앙심을 품은 게 분명해 보였다는 발언(32:05)을 인터뷰에서 하기도 했다. 톰 스네던은 93년 사건으로 편파수사 논란(하단 참고)이 있었던 인물이며, 마이클은 95년에 발표한 히스토리 앨범의 D.S.란 곡에서 법집행 기관의 부조리를 다루며 톰 스네던을 암시하는 듯한 "Dom Sheldon is cold man"이란 가사를 넣었었다.

이때 담당 검사가 바로 93년 챈들러 사건과 같은 톰 스네던이다. 톰 스네던은 03년 12월에 마이클이 개빈에게 자위행위를 강요했고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으며 개빈의 1살 아래 남동생 스타에게도 성추행을 했고 형제들에게 술을 먹이고 포르노도 보여줬다는 검찰의 혐의 내용을 구체적인 자극적 묘사와 함께 담은 성명문을 대중에 공표하였다.[53] 05년 2월부터 6월까지 본격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선 검찰 측의 주장은 성명문과 상당한 차이가 났으며 마이클의 모든 것이 수색 대상이었음에도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개빈 가족의 진술은 계속 바뀌고 모순되면서 신뢰를 잃었다.
재판부는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비공개 재판을 결정했고 대중이 직접 알기 힘듦에 따라 왜곡된 언론보도가 여론을 좌우하게 되었다.
재판기록은 추후 법원을 통해 공개되었으나 대중이 직접 기록을 찾아보는 예는 드물기 때문에 언론 보도가 대중의 인식을 좌우하게 되었고 당시 언론의 선정성과 왜곡보도에 의해 잘못된 정보가 퍼졌으나 대중이 진위여부를 검증하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당시의 메이저 언론의 보도들 조차도 재판기록과 전혀 다른 언급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대다수의 보도들은 재판기록 보다는 가쉽과 흥미 위주의 보도였었고 따라서 대중은 무죄평결의 근거를 잘 알 수 없었다. 또 대부분의 혐의 주장의 모순이 드러남에 따라 무죄가 예상되는 상황임에도 판결 직전까지 수감되게 될 감옥 취재와 같은 유죄가 예상되는 듯한 자극적인 보도를 함으로써 무죄 선고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의구심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03년에 발표한 검찰 측의 노골적인 성명문과 유력 증거를 발견했다는 허위 발표들로 인해 03년부터 05년 재판까지 이에 근거한 편향된 보도가 이어졌기에 재판도 전에 여론재판으로 유죄를 낙인찍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당시 배심원단 조차 재판 전에 이미 유죄로 생각했었으나 재판과정에서 사실과 다름을 알았고 무죄평결을 내렸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개빈은 본인 스스로 마이클과 침대를 같이 쓴 적이 없다고 증언했는데도 당시 언론들은 마이클이 개빈과 같은 침대를 쓴 양 보도했고 각종 오락 채널에서도 이를 소재로 우스개꺼리를 만들었으며 타블로이드는 포토샵으로 조작하고 왜곡되게 나온 일부 사진만 집요하게 사용하면서 왜곡을 넘어 혐오를 퍼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개빈 외에 재판에서 거론되었던 과거의 아이들과의 상황들도 10여년도 전의 한정된 일부 상황이었고 마이클이 요청하지 않았으며 아이들과 부모들 모두 여러 사람이 함께 있었고 언제고 드나들던 공개된 공간과 상황이었음을 증언하였는데도 이러한 면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반대로 과거부터 03년까지 수십년간 밀폐된 공간에서 아이들과 365일 침대에서 잔 것처럼 CNN과 같은 메이져 언론의 방송인들마저 거짓된 멘트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침실" 프레임을 만들었으며 이렇게 객관적으로 증빙된 무죄 선고를 왜곡과 선입견 유도로 희석시키려는 태도를 미디어에서부터 보였다. 그 중 NBC는 마이클에 대한 허위루머로 고소까지 당한 타블로이드 출신 다이앤 디몬드를 고용하여 선정적인 왜곡에 가장 앞장섰고 그 결과 NBC는 수익이 증대하기까지 했다. ( 저널리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기록, 마이클 잭슨 재판 11년 허핑턴 포스터 기사 참고)

또한 미디어에 의해 유도된 편견인종 간의 이해의 차이로도 나타났는데, 당시 무죄평결 후 여론 조사에서 무죄를 믿지 않는 대다수는 백인이고 유색인종 대다수는 무죄를 믿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차별의 경험이 있는 유색인종은 미디어의 편파를 의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참고로 마이클은 음악작업 후반부로 갈수록 인종차별과 미디어의 왜곡, 제도권의 위선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하며 사회적인 발언을 늘려나갔는데 당시 미국은 히스토리 앨범 "They don't care about us" 곡의 감옥 버젼 뮤직비디오의 TV 상영을 금지할 만큼 거부적인 반응을 보였다.[54] 또한 2002년에 미국 정치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나아가던 때에 마이클은 이에 반하는 전쟁 반대와 평화를 위한 대중의 각성을 촉구[55]

[56] [57][58]하는 연설을 하여 TV에 중계되었고 또 같은 해에 미디어의 인종차별적 견제와 역사 왜곡, 헐리웃 산업의 아티스트 착취와 미디어와의 결탁을 비판하는 연설도 했었는데, 바로 그 다음 해에 터진 개빈 사건은 대부분 헐리웃 산업과 연계되고 미국 주류를 대표하는 미디어가 마이클을 공격하는 소재가 되었다.

마이클 사후에 마돈나 등의 뮤지션은 연예인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상당한 압력을 받는 일이며 우리는 마이클의 등 뒤에 숨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05년 재판 때 미디어의 왜곡은 정치적 표현을 적극 했었던 마이클에 대한 - 미디어의 소유자 혹은 편집자이며 제도권을 대변하는 - 백인중심 주류사회의 압력[59]의 연장선이기도 했으며 당시의 언론보도들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무죄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게끔 은폐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마이클 잭슨과 정치 14년 볼티모어선 기사 참조)
파일:FBI 문서(2005년).png
무죄 판결이 내려진 날 작성된 FBI 문서에 수사가 종결됐음을 알리며 중요한 단서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FBI는 수사기관의 요청에 따라 포렌식 분석, 행동 분석 등을 수행했고 수사 전략과 인터뷰 전략 등에 대한 조언도 제공했다. 문서 전체 보기.
We thought that she was -- from the get-go, that she was not telling the truth, that she was in it for whatever she could get out of it. You know, going back to the J.C. Penney case and so many other things that came along, she just wasn`t a credible witness.

우리는 처음부터 재닛(개빈의 어머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무엇이라도 얻어 보려고 이 사건에 개입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J.C. Penney[60]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 일련의 과거 사건들을 미루어봤을 때 그녀는 정말로 믿을 만한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
The boy accuser - he was also - sounded a lot like he had been programmed. he sounded a lot like his mother`s testimony, and it was really hard to be convinced by him. And that - that`s one of the things we were really hung up on. We had to listen to his testimony and discuss it, stop it, discuss it, stop it, you know, just - and going over and over and over it, just to see if we left anything out, if there was something there that we could have used. But again, the evidence was not there beyond a reasonable doubt. It just wasn`t there.

개빈도 마찬가지로, 소년은 사전에 주입받은 내용을 그저 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재닛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을 증언하는 개빈을 신뢰하기에는 정말 무리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힘들게 매달렸던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을 듣고 토론하고 다시 듣고 또 토론하고 다시 듣고... 혹시라도 유의미한 부분을 놓치진 않았을까 우리는 철저히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합리적 의심을 넘어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없었어요.
배심원 대표 폴 로드리게즈 / 2005년 6월 13일 CNN 인터뷰

개빈이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한 마이클의 침대에서 개빈의 DNA 검출되지 않았고[61]개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또 검찰은 다른 세탁물들과 함께 세탁물 바구니에 담겨있던 시트에서 코카인 반응이 나왔다며 증거로 제출하려고 했는데 마이클의 혈액과 속옷 어디에서도 코카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기에 역시 마이클과 관련 없고 개빈 사건과도 관련 없는 것이었다. 그 시트에서도 매트리스에서 나온 것과 또 다른 타인의 DNA가 나와서 세탁물 바구니에서 여러 물질들이 섞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또한 03년 9월에 연예인을 포함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네버랜드 파티가 있었기에 이때 누군가 가져왔다가 흔적이 남은 걸로 추측되는 것이었다.

또 검찰은 같은 세탁물 바구니에 담겨있던 아무런 특정 반응이 나오지 않은 마이클의 더러워진 속옷도 증거로 요청하였는데 마이클 측 변호인은 개빈사건과 관련 없으며 마이클은 백반증 환자로 피부연고를 발라왔고 그 흔적이 남은 것뿐인데 이는 사건과 관련 없는 증거물로 배심원단에게 혐오감을 심어주려는 의도라고 반박했다. 검찰은 이외에도 98년에 허위사실 중상모략으로 27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판결받아 99년에 법원명령으로 압수된 빅토르 구티에레즈의 책과 개빈사건과 아무런 관련 없는 마이클의 성형 기록이나 마이클 가족과의 문제, 검증되지 않은 마이클 루머 싸이트 등도 증거로 요청하였다. (05년 1월 28일 검찰측 증거요청에 대한 반박 문서 참고) ] 개빈 가족은 진술을 번복하였다.
개빈 측 변호사인 레리 펠드만은 1차 혐의 때 챈들러 측에 협력했던 심리학자 스탠리 캐츠(Stanley Katz)[62] 박사를 03년에 개빈 가족에게 소개했고, 개빈의 남동생 스타는 캐츠 박사에게 자신이 마이클의 침실에 몰래 들어가 마이클이 침대에서 개빈의 엉덩이에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었다. 그러나 05년 재판에서 침실에 몰래 들어갈 수 없는 경보장치가 있음이 알려지자 스타는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을 바꿨고 자신은 캐츠 박사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마이클이 개빈의 엉덩이를 만지는 모습을 봤다고 말한 적이 없다며 이전의 주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또 스타는 03년에 스티브 로벨 수사관에게 자신이 마이클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반쯤 잠들어 있었는데 마이클과 개빈이 침실에 들어와서 같이 침대에 눕더니 마이클이 개빈의 뒤쪽에서 엉덩이를 앞뒤로 왔다갔다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스타가 깨는 척을 하자 마이클이 행동을 멈추고 자는 척을 했다고 진술했었다. 그러나 이 일화 역시 05년 재판에서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다. 스타는 의자가 아니라 마이클의 침대에서 개빈과 같이 자고 있었는데 마이클이 침실로 들어와서 개빈 쪽으로 계속 다가왔고 스타가 인기척을 내자 마이클이 다가오는 것을 멈췄다는 것이다. 스타는 이 일화에서 마이클에게 별도의 이상행동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으며 마이클이 성추행 행동을 했다는 이전의 진술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03년에 스타가 진술한 마이클이 침대에서 개빈을 성추행했다는 주장들은 마이클 없이 형제들만 마이클의 침대에 있었고 침실에서 성추행은 없었다고 진술을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빈의 DNA는 마이클의 침대에서 검출되지 않았다.
검찰이 성명문으로 발표한 개빈의 동생 스타에 대한 성추행 주장은 정작 재판에선 검찰과 개빈 가족 모두 언급하지 않으며 사라졌다.
한편 스타는 03년에 캐츠 박사에게 골프 카트에서 마이클이 자기 성기와 엉덩이를 만진 적이 있다고 진술했으나 막상 05년 재판이 시작되자 이 부분에 대해서 개빈 가족과 검찰 모두 언급조차 하지 않아 이렇게 스타가 마이클에게 성추행 당했다는 주장은 재판 내내 다시는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형제는 또 03년에 로벨 수사관에게 마이클이 수면제를 먹이려 했다고도 진술했으나 이 주장도 마찬가지로 재판이 시작되자 사라졌다.
보안용 경보장치가 성추행을 숨기기 위한 용도라는 검찰 측의 주장도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마이클의 침실입구에 누군가 들어서면 자동으로 울리는 벨 장치가 소리가 울리면 성추행을 멈춰서 들키지 않기 위한 용도라고 주장했으나, 그렇다면 스타는 (말을 바꾸기 이전에) 어떻게 벨이 울리는 와중에 개빈이 계속 마이클에게 성추행 당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는 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에 스타는 마이클이 있는 침실 위층 사이에 있는 파우더룸의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위층에서는 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테스트 결과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크고 선명하게 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에 스타는 자신은 개빈의 성추행을 목격했단 진술을 한 적 없다며 통째로 말을 바꿨다. 또한 마이클이 살해 협박을 받았고 반복적으로 침입자들한테 시달렸던 사건 기록과 경호원의 진술로 신변안전상 필요한 보안장치였음이 확인되었다.[63] 첨부한 영상을 보면 소리 자체도 경보음 이라기 보다는 초인종 소리에 가까운 것이다. (경보장치 실험 영상 보기)
아르비조 형제에게 성인잡지를 보여줬고 책으로 그루밍 했다는 검찰 측의 주장도 인정받지 못했다.
마이클의 집과 16대의 개인용 컴퓨터에서 어떠한 아동음란물도 나오지 않았고 아동음란사이트 접속기록도 없었다.[64] 다만 마이클이 소유하고 있던 합법적인 성인잡지에서 형제의 지문이 검출됐는데 마이클과 형제의 지문이 검출된 페이지가 각각 다르고 형제 간의 진술 또한 서로 모순되어 신뢰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사춘기였던 형제가 호기심으로 몰래 봤을 수 있다는 마이클 측 주장이 스타가 성인잡지를 들고다니는 것을 본 네버랜드 직원들의 증언과 함께 설득력을 얻었다.[65] 개빈은 마이클이 집에 없는 동안은 마이클의 방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진술했으나 스타는 반대로 형과 함께 들어간 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놀다가 같이 잠들기도 했다고 진술하여 거짓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제가 마이클이 보여줬다고 주장하며 지목한 성인잡지 하나는 개빈 가족이 네버랜드를 떠나고 5개월 뒤인 03년 8월에 처음 출간된 것이었고 이 물품과 관련해 톰 스네던 검사의 증거조작 논란이 일기도 했다.[66]
개빈은 또 형제가 같이 마이클의 침실에 있을 때 마이클이 직접 노트북을 켜서 성인사이트에 접속해 포르노물을 보여줬고 마이클이 아무에게도 이것을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며 03년에 캐츠 박사에게 진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05년 재판에서 노트북에서 마이클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음이 드러나자 이 일화도 완전히 바뀌었는데, 형제는 마이클이 아니라 프랭크 카시오가 노트북을 켜서 직접 타이핑을 해 성인사이트에 접속했고 형제는 마이클과 함께 프랭크 옆에서 이를 지켜봤다고 말하여 03년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프랭크가 갑자기 추가되었다. ( 개빈 증언, 스타 증언) 마이클과 프랭크는 형제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고 검찰도 프랭크에게 혐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검찰은 또 마이클이 소장하고 있던 수천권의 책 중에서 아동을 주제로 한 합법적인 사진집 3권을 문제 삼으며 아동음란물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성적으로 길들이기 위한 그루밍의 의도라고 주장하였으나 마이클은 부인하였는데, 아이들에게 보여줬다는 근거도 없었으며 이 사진집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소장중일 정도로 인정받은 예술서적이고 해당 사진집을 본 배심원단들도 예술품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반응이어서 검찰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세 권 중 두 권은 마이클이 구입하지 않은 책이었으며 검찰은 해당 책에 대해선 아무런 지문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레이더 온라인 허위보도 문서 참조)
술을 먹였단 혐의도 설득력을 잃었다.
개빈은 와인저장고에서 마이클이 와인을 물이라고 속여 술을 먹어봤다고 주장했으나 네버랜드 보안 요원들은 아르비조 형제는 저장고든 마이클의 방이든 어디든 샅샅이 뒤져 난장판을 만드는 습관이 있었다고 증언했고, 스타는 비행기에서 마이클이 와인이 들어있는 다이어트 콜라캔을 자기에게 마시게 했다고 주장했으나 승무원 신시아 벨(Cynthia Bell)은 평소 마이클이 아이들 앞에서 술 먹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했기 때문에 콜라캔에 와인을 담아 마이클에게 주는 건 자기가 고안해 낸 아이디어였으며 마이클이 아이들에게 술을 먹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증언하여 형제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네버랜드에 감금됐다고 주장한 시기에 개빈의 엄마는 자유롭게 외출했고 여행계획까지 세웠다.
네버랜드에 감금됐다고 주장하는 03년 2~3월 동안, 개빈의 엄마 재닛은 시내로 쇼핑을 가 고급 식당에서 무단으로 한화 700만원 이상의 식사를 하고 마이클에게 이를 대신 내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으며 개빈과 스타의 치아 문제로 치과의사도 만났고 남자친구인 제이 잭슨(Jay Jackson)의 집에도 머물렀으며 전남편 데이빗 아르비조(David Arvizo)와의 양육권 문제로 변호인 마이클 매닝(Michael Manning)과 함께 법원에도 출두했고 카니발 축제를 보기 위해 브라질로의 여행 계획을 세웠던 것도 들통나면서 감금 주장도 설득력을 잃었다. 재닛은 마이클에게 병원비 지원을 요청하기 전에 코메디언 크리스 터커에게 먼저 접촉했었고 크리스의 여자친구였던 아자 프레이어(Azja Pryor)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아자는 법정 증언에서 재닛에게 카니발 축제에 같이 가자는 연락이 왔었다고 밝혔다. 재닛은 또 네버랜드에서 마이클이 자기 가족들을 전부 열기구에 태워 납치하려 했다는 주장까지 펼쳤으나 현실성이 없었다. 아울러 01년에 개빈의 화학치료가 끝났으나 계속해서 치료비 명목의 지원을 마이클에게 받아온 것도 드러났다. 마이클은 개빈 가족의 생활비까지 일부 지원했었다.
집착했다는 재닛의 주장과 반대로 마이클은 개빈 가족과 거리를 두었음이 밝혀졌다.
재닛은 또 마이클이 자기 가족에게 집착했다고 주장하며, 마이클과 개빈이 너무 오래 통화를 한다고 생각해 이를 불평하자 마이클이 화를 냈던 적이 한 번 있었다는 일화를 03년에 로벨 수사관에게 진술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정반대였다. 개빈의 증언에 의하면 마이클은 개빈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핸드폰 번호를 변경해 이들이 마이클의 비서에게 따로 연락해 마이클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던가, 마이클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고 느껴 가족 전체가 버림 받았다고 생각했다던가, 마이클이 더 이상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느껴 이들이 마이클에게 편지와 카드를 꾸준히 보냈던 것 등이 드러나서 그들이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네버랜드에서 마이클은 개빈 가족과 그다지 접촉하지 않으려 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67]
성추행이 없었음을 고백한 전력과 모순이 드러나자 성추행 시기를 변경하는 등의 계속된 진술 번복으로 개빈 가족은 신뢰를 잃었다.
개빈은 네버랜드를 완전히 떠난 후 03년 3월에 중학교 선생님에게 "정말로 마이클이 너에게 나쁜 짓을 했니"라는 질문을 받고, 마이클은 사실 자기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답했음을 마이클 측 변호인과의 심문 과정에서 스스로 인정했다.[68] 성추행이 있었던 시기도 마틴 바셔의 다큐로 한참 소아성애 논란이 있었던 03년 2월 7일 ~ 03년 3월 10일(검찰 성명문)이라고 했다가, 재판 과정에서 2월 20일에 개빈 가족이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촬영했으나 해명 방송에는 나가지 않았던 미공개 영상이 발견되자 03년 2월 20일 ~ 03년 3월 12일로 시기를 바꿔서 개빈 가족의 신뢰성에 큰 구멍을 남겼다.[69] 또 개빈은 재판 전에 이미 성추행 당한 횟수를 '최소 5번', '5번 미만', '총 5번', '약 7번' 이렇게 4번이나 바꿨다. 이외에도 검찰이 03년 12월에 발표한 성명문에선 재닛이 03년 2~3월에 아르비조 형제가 자신에게 고백해서 성추행을 알게 됐으며 아르비조 형제의 03년 진술들과 같은 구체적인 성추행 내용까지도 재닛이 03년 7월 로벨 수사관과의 인터뷰에서 진술한 것으로 나와있으나, 성추행을 경찰에 알리기 훨씬 전인 03년 5월에 이미 챈들러측 변호사와 접촉한게 드러나면서 의도를 의심받자 재닛은 03년 9월에 검찰로부터 개빈이 마이클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입장을 전달받기 전까지 자신은 성추행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을 바꿔서 모순을 보였다.
한편 CNN의 인기 앵커 래리 킹은 05년 5월 재판에 출석해, 개빈 측 변호인인 레리 펠드만을 재판 전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펠드만이 '개빈의 엄마는 단지 돈을 노리는 'Wacko(미친 사람)'라고 느꼈고 그들을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신에게 했다고 증언했으나 검찰 측 반대로 증언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알몸을 보여줬다는 주장도 마이클에게 백반증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모순된 진술로 신빙성을 잃었다.
개빈은 재판에서 마이클이 성인 남자는 자위를 하지 않으면 여자를 강간할 수 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자위를 해야 한다고 말해서 처음으로 자위를 시작하게 됐다고 주장했으나, 알고보니 재판 전 로벨 수사관과의 인터뷰에서 "자위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는 똑같은 얘기를 마이클이 아니라 자신의 할머니가 해준 것으로 먼저 진술했던 것이 드러났다.[70] 형제는 또 마이클의 침실 이층에 있을 때 아래층에 있던 마이클이 발기된 채 옷을 다 벗고 위층으로 올라온 적이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일화에 대해서도 서로 말이 맞지 않았다. 스타는 마이클이 위층으로 올라와서는 침대에 2분 정도 앉아있다가 형제에게 "이건 자연스러운 거야"라고 말한 뒤 다시 내려갔다고 진술했으나 개빈은 반대로 마이클이 위층으로 올라와서 뭔가를 집더니 아무 말도 없이 바로 내려갔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빈은 마이클의 알몸을 봤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마이클의 몸에 백반증으로 인한 반점들이 있는 줄도 몰랐고 몸 전체가 전부 하얀 것으로 알았다고 진술하여 결정적인 모순을 드러냈으며 신체에 대한 진술을 한 적도 없다.

검찰은 1차 혐의 때 성추행 이야기를 타블로이드에 판 사람들까지 소환하였으나 금전 댓가로 말을 바꾼 것이 드러나 신뢰를 잃었다.
1차 혐의 때 네버랜드를 관둔 일부 전직 직원이 마이클이 성추행했다는 이야기를 타블로이드에 팔았지만 당시 사건이 비공개 대배심을 거쳐 불기소로 끝났기에 그들 주장의 문제점이 공개되지는 않았는데 2차 혐의 때 그들이 검찰 측 증인으로 소환되면서 제대로 검증받게 되었다. 물건을 훔치다 해고된 아드리안 맥마누스 랄프 채콘 등의 전직 직원들이 타블로이드에 팔았던 성추행 목격담은 당사자들의 부인과 관련인들과의 진술 모순으로 신빙성을 잃었다. 게다가 그들이 금전 댓가를 받기 이전엔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하는 진술을 수사관들에게 했던 것이 드러났으며 그들 스스로 타블로이드에 팔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또한 1차 혐의 때 톰 스네던 검찰 측 증인으로 대배심에 출석하여 진술하기 전에 검찰 측 수사관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던 것도 드러났으며 당시 유도심문과 강압수사를 했던 것도 밝혀졌다. ( 제이슨 프란시아 문서 참조) 또 재판 전에 검찰이 발표한 1차 혐의 수사 때 사실 발견했었다는 유력한 사진 증거도 실제 재판에선 실체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여 허위 발표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파일:무죄판결.jpg

결국 2005년 6월 13일 마이클 잭슨은 14가지 혐의에 대해 배심원 전원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을 받는다. 당시 배심원은 백인 7명, 히스패닉 4명, 아시아인 1명으로 흑인은 단 1명도 없었다.
무죄평결 후 배심원중 일부가 유명 방송인인 다이앤 소이어와 ABC 방송에서 한 인터뷰 (2005)
당시 소이어는 마이클의 유명세에 눌리지 않았느냐, 성범죄가 옹호되는 영향을 낳지 않겠느냐 등의 부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4개월의 재판기간 동안에 그도 한 인간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마이클을 의식하기 보다는 증거와 진술로 판단했다고 대답했으며, 무죄 임에도 성범죄라고 보는 소이어의 질문에 대해 한 배심원은 자신의 18세 손자가 성추행을 당한 사건을 말하며 자신은 무엇이 성범죄인지 알고 분노하는 사람이며 마이클 건은 성범죄가 아니라고 대답했고[71] 배심원단들은 무죄평결은 명백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평결을 내릴 때 배심원단도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사건 당시 마이클 측 변호사 중의 한 명이였던 브라이언 옥스만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때 검찰 측의 수사는 해외까지 탐문하며 산타바바라 법정 역사상 최고액인 오백만 달러[72] 이상의 수사비를 지출하던 유례없는 대규모였다고 한다. 무죄 평결 후에 마이클은 개빈 가족을 무고로 고소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 I remember looking and I could see that there was a tear running down his face."

(무죄 평결이 내려진 순간)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던 것을 기억합니다.
...
" It painted a picture of him being this monster when he spent all his life trying to do good things for children, that had to have just crushed him. To rob him of the joy of what he worked so hard for in his life was just so, so wrong. I can only imagine for him, that was probably the reason why he had a hard time with finding that spark again."

마이클이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고 온 인생을 바칠 때 괴물이라는 그림이 그에게 칠해졌고 그게 그를 부서트렸습니다.
온 인생에 걸쳐 그렇게 열심히 헌신한 것에 대한 기쁨을 빼앗기는 것은 너무나도 잘못된 일입니다.
난 그가 왜 그 열정을 다시 찾기 힘들어 했는지 이것 말고는 이유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이다 " 中 - 05년 재판의 배심원이었던 Paulina Coccoz의 2017년 인터뷰 -

4. 2016년 레이더 온라인 보도 (아동음란물 발견?)

2016년 미국의 타블로이드 매체 레이더 온라인은 자신들이 새롭게 입수했다는 88페이지 분량의 경찰보고서를 토대로 1993년과 2003년 경찰이 마이클의 저택인 '네버랜드'를 수색했을 때 아동음란물을 발견했다는 보도를 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허위보도다.

산타바바라 보안관실의 대변인은 "레이더 온라인의 문서에는 우리가 촬영한 사진도 있으나 인터넷에서 가져온 것 같은 정체불명의 사진들이 뒤섞여 있다. 또 이미 필요한 자료들은 재판 당시 피고와 원고에게 전부 공개됐고 보안국에서 따로 미디어에게 문서나 사진을 제공하지 않는다."라고 빌보드 입장을 밝혔다. 즉 레이더 온라인의 경찰 보고서는 그들 말처럼 새로운 게 전혀 아니다. 경찰이 93년부터 압수한 모든 것들은 2005년 법정에 제출됐고 검찰과 변호인단 그리고 재판부와 배심원단의 면밀한 검토를 받았으나, 그중엔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 허위 리스트도 있었으며 아동음란물 및 범죄 혐의의 단서로 판정된 물품들이 전혀 없었다.

05년 재판 당시 부장 검사였던 존 로넨도 피플지에 이렇게 응답했다. "잭슨 씨의 집에서 아이들의 누드 사진이 발견되긴 했지만 성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성적 활동에 종사하는 아이들이 아니었으며 아동음란물도 없었고 어린이와 관련된 동영상도 없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동음란물 소지 자체가 불법이므로 적발되면 바로 기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런데 마이클은 아동음란물 소지 혐의로 기소된 적 자체가 아예 없다. 2004년 재판 성명서에도 마이클과 검찰 측 모두 이를 인정한 내용이 나온다.

파일:2004년 재판 문서.jpg
그렇다면 존 로넨 검사가 말한 아이들이 옷 벗고 있는 사진이 뭘까? 독서광으로 소문났던 마이클은 경찰추산 수천 권의 책을 소장하고[73] 있었는데 이중 26권의 미술 서적과 28권의 누드가 섞인 잡지 등이 수사과정에서 압수됐으나, 대부분 아트 서적이거나 플레이보이 잡지와 같은 일반적인 이성애자의 합법적 성인물이었다. 다만 이중 소년의 세미누드/누드를 각각 90%, 10%의 비율로 포함하고 있는 책 2권과 소년/소녀가 대부분 옷을 다 입고 있지만 일부 누드/세미누드를 담은 책 1권이 같이 발견됐는데 당시 검찰은 각종 성인잡지를 마이클이 그루밍 용도로 이용했다고 주장하며 혐의의 근거로 삼으면서 위 3권의 책들도 같이 증거로 포함시켰다. 수천 권의 책 중 발견된 그 3권의 목록은 05년 1월에 검찰이 제출한 재판 문서에서 발췌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데 모두 93년 압수수색 때 발견된 것이고 03년에는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다.

1. Boys Will Be Boys (Georges St. Martin, Ronald C. Nelson, 1966)[74]

2. The Boy: A Photographic Essay (Georges St. Martin, Ronald C. Nelson, 1964)[75]

3. In Search of Young Beauty: A Venture Into Photographic Art (Charles Du Bois Hodges, 1964)

1번과 2번 책은, 비평가들에게 걸작으로 평가받은 노벨문학상 작가 윌리암 골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63년의 흑백영화 'Lord of the files( 파리 대왕)'에 나온 소년들의 장면과 50-60년대에 강에서 벗고 수영하는 아이들의 스틸컷 등이 포함된 상당히 유명한 아트 서적으로 경찰과 검찰은 이러한 장면을 그저 '누드/세미누드'라고만 칭했다. 이 책들은 아동누드집으로 분류되지도 않을 뿐더러 위 책들은 전부 예술품으로 인정받으며 현재 미국 의회도서관에 등록돼 보관 중이다.[76] 구매와 소유가아마존닷컴아트 서적이라 문제될 것이 없으며 아마존닷컴에서도 쉽게 구매가 가능하다.[77] 이외의 압수품 중에서도 아동누드집이라 불릴 만한 책은 없었다.[78]

이 책들은 전혀 아동을 성적대상화하지 않기 때문에 검찰 또한 아동음란물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검찰이 이를 문제삼아 증거로 채택했던 것은 앞서 말했듯이 마이클이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성적으로 길들이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마이클은 부정했다. 검찰은 증인들에게 일일이 책을 보여주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지만 증인들도 음란물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고 배심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 포렌식 분석 결과 성인잡지에 마이클의 지문이 검출돼 검찰이 이를 증거로 제출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검찰은 위 3권의 책들에 대해서는 지문 증거를 하나도 제출하지 못했다. 이렇게 검찰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4년 경찰보고서 원문에도 당시 상황이 나온다. (보고서 원문 다운로드)

파일:경찰보고서.jpg

경찰보고서에는 발견된 책이 아동 포르노나 불법 행위를 묘사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을 성추행하기 위한 그루밍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05년 재판에서 설득력을 잃은 검찰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이다. 즉 이미 재판 때 배심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은 실패한 혐의와 주장에 대해 레이더 온라인은 마치 이전에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무언가가 드러난 것처럼 가짜 사진까지 섞어 허위보도를 한 것이다.

게다가 레이더 온라인이 마이클이 소장했던 아동음란물이라며 올린 사진 중 하나는 Jonathan Hobin 작가가 마이클이 사망한 이후인 2010년에 출판한 'American Idol' 이라는 사진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작가는 직접 자신의 SNS를 통해 자신의 작업물은 아동음란물이 아니라고 반발했고 "사람들이 불순한 의도로 예술의 의미를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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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 온라인은 또 잡지에 실려있던 이미지를 올리면서, 사진을 누드처럼 보이도록 흑백 처리하고 옷 입은 성기 부위를 모자이크 처리하여 마치 노출한 것처럼 오해하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혐오스러운 무한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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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19년 다큐멘터리 리빙 네버랜드 (Leaving Nev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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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사자 - (왼쪽) 펩시 모델이었던 제임스 세이프척이 펩시가 후원한 배드투어 출연한 모습 (오른쪽) 웨이드 롭슨의 L.A.Gear 광고 모습[79]
2019년 1월 25일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마이클에게 새로운 아동성추행 의혹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리빙 네버랜드(Leaving Neverland)>가 상영됐다. 댄 리드[80] 감독은 왜 마이클 측은 전혀 취재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 다큐는 피해자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 마이클 잭슨에 관한 다큐가 아니다(?)라고 답했지만[81], 감독의 말과 달리 누구나 예상한 대로 이 영화는 마이클에게 치명적인 마이클의 영화가 되었다.[82][83] 선댄스 상영 전까지 비밀에[84] 붙여졌던 다큐 속 주인공들은 마이클 재단 측의 조사로 수년 전부터 재단에 소송을 걸고있는 웨이드 롭슨과 제임스 세이프척 임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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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윈프리는 다큐를 지지하는 방송을 하며( 일부 영상)[85] 마이클이 한 일이든 안한 일이든 이런 일이 세상에 일어나선 안된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올렸었다. 하지만 현재는 해당 트윗을 삭제하고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리빙 네버랜드 관련 영상을 전부 내린 상태이다.
한편 오프라는 HBO의 다큐와 TV시리즈를 그녀의 회사가 제작하는 계약을 08년부터 맺어온 HBO의 비즈니스 파트너이다.[86][87][88]
선댄스에서 일반공개가 아닌 기자와 관계자 만을 대상으로 하여 다큐가 상영된 직후에 쏟아진 리뷰 기사들은, 롭슨과 세이프척이 성인이 된 이후 서로 만난 적이 없음에도 진술이 유사하고 구체적이라는 점을 주된 이유로 들어 극찬했으며 특히 미국 비평가들은 호평 일색의 비평을 내놓아서 유럽과 대비를 이뤘다.( 미국 비평의 문제 참조) 그러나 후술된 재판기록에 따르면 둘은 다큐를 찍기 전에 수차례 만났었다. 한편 미국은 사후 명예훼손법이 없기 때문에 마이클 재단 측은 제한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큐의 배급을 담당한 HBO 항의공문[89]을 보냈으나 HBO는 다큐의 방영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마이클 재단 측은 HBO가 93년에 부카레스트 콘서트 독점 중계를 계약할 때 "마이클 잭슨을 비방하거나 허위사실을 방송하지 않으며 HBO의 마이클 관련 방송은 가족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라는 합의조항을 어긴 것으로 보고 HBO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상태이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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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CNN 인터뷰: 25년 후의 롭슨은 가족이 했던 말도 부정하고 있다. <리빙 네버랜드>에서 브렛 반스도 성학대 당한 것처럼 암시했는데, 브렛은 이에 즉각 파일:브렛 반스1.png 하여 고소하며 HBO에 해당 장면의 삭제를 요구했다.
원래 롭슨과 세이프척은 마이클 생전에 아동성추행 의혹이 있을 때마다 열렬히 마이클의 결백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롭슨은 마이클 사후인 12년에 성학대를 뒤늦게 깨달았다며 13년에 마이클 재단을 상대로 15억 달러(1조7천억 가량)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세이프척도 롭슨의 소송 소식을 듣고 자기도 똑같이 마이클에게 당했던 것 같다며 뒤이어 소송을 제기했다. 즉 다큐는 이 소송 싸움의 연장선에 있으며 [91] 다큐 상영 후 두 사람은 항소 의사를 밝혔다. 참고로 웨이드 롭슨의 어머니인 조이 롭슨은 93년 조단사건 당시 수사기관에 마이클의 결백을 진술했던 바로 그 시기에 미국의 타블로이드지 <National Enquirer>로부터 6자리 금액을 받는 조건으로 마이클이 그녀의 자식들을 성추행했다고 말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한 적이 있다고 16년 재판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롭슨과 세이프척의 프로필과 주장은 아래 이미지를 참고.
파일:롭슨.세이프척.프로필2.jpg
롭슨과 세이프척은 구직 거절과 거액 피소 그리고 마이클 재단과 소송 중인 상황을 다큐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다큐가 어떤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성학대 피해자들이 증거를 마련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견도 많은 만큼 결국 다큐를 판단하기 위해선 이들이 지금까지 한 주장들의 신빙성을 검토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했고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 전반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일부만 편집하여 왜곡되게 짜집기한 의도성이 의심되는 작업까지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HBO 방영에 뒤이은 같은 계열사인 영국 채널4 방송에서 반박자료가 올라온 장면들에 집중된 45분 가량을 감독이 아무런 언급없이 삭제한데다[92] 다큐 속 주장의 모순이 확인되자 감독은 다큐 내용과 전혀 다른 주장으로 말바꾸기까지 하고있어 더욱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후술한 다큐의 문제점들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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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방영 후 현재, 미국과 유럽의 아마존에선 4월부터 DVD 판매가 중지됐다. 유럽과 캐나다, 호주 등의 언론에선 다큐의 문제점을 보도해 왔으며( 독일 롤링스톤 저평가)( 여론재판 비판)( 언론편견과 인종주의)[93] 프랑스의 TV채널 M6는 비판적인 대담을 방송했었고( 프랑스 리빙네버랜드 호응 저조 기사) 이탈리아의 가장 큰 TV채널인 Rai 1에선 Liam McEwan의 반박다큐 <Neverland Firsthand> 방영했다. 또 마이클의 보디가드 등 관련인물이 참여한 또 다른 반박 다큐인 <Chase the Truth>( 예고편)도 곧 공개될 예정이다. 반면에 다큐의 파급을 주도했던 미국의 주류 언론은 다큐의 문제점에 대해 침묵하거나 보도를 지연하고 있다. {{{#!folding 【펼치기 접기】
오프라 윈프리의 '마이클을 이제 지울 때'라는 메시지를 필두로 한 미국 언론의 다큐 비호와 마이클 유산 지우기 운동에 관해
다큐를 배급한 미국 측의 다수 언론은 검증없는 선정적인 기사와 다큐 이미지의 반복적 게시로 대중에게 마이클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각인함은 물론, 같은 시간 유럽 언론에선 다큐의 문제점이 보도되었지만 미국 언론은 외면하여 다큐의 영향력을 과장하고 지속시키려 유독 애를 썼다. 심지어 빌보드 지는 다큐 속 삼인방의 화보(?)까지 찍으며 그들을 영웅으로 포장하려 했고 같은 호에 마이클 유족의 기사를 실어 마이클 측의 입장이 궁색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또한 마이클 유산 지우기 운동 또한 언론에 의해 과장되며 유도되었다. 네덜란드 쇼핑몰에서 전시된 마이클 물품을 치우려 한다는 기사가 앞다퉈 나왔으나 이후 쇼핑몰 관계자의 부연으로 거짓 기사임이 확인되었고, BBC 라디오에서 마이클 음악이 나오고 있는데도 삭제했다는 오보를 역시 퍼트렸으며, 파업에 의해 뮤지컬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을 다큐 때문에 중지된 양 각색하기도 했다. 이러한 언론의 오보와 과장은 전세계적으로 마이클에 대한 거센 반발이 있는 듯한 착각을 줌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다큐에 대한 검증 이전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위기감에 덩달아 업적 지우기에 참여하게 만드는 일종의 의도적인 캠페인인 것이다. 그래서 마이클 관련 아이템들을 삭제한 곳도 주로 미국이다.

이후 다큐의 문제점이 드러남에 따라 마이클 유산 지우기는 초기 이후로 더 이상 확대되지 않는 상황이다.(관련 ABC 기사 참고) 영국 등 일부 아마존 싸이트에서 다큐의 판매가 중지되었고, 웨이드 롭슨 홈피에 게시된 다큐 영상도 며칠 전부터 재생이 되지않고 있다. 미국 외에 호주와 뉴질랜드의 라디오 방송 2곳에서 논란 초기에 마이클의 음악을 리스트에서 빼긴 했지만 그리스 라디오 방송에서는 다큐에 대한 항의로 마이클 음악을 고정적으로 내보냈으며 음원 소비에서 라디오의 영향력은 미미하고, 롤링스톤 기사에 따르면 오히려 마이클 음악의 스트리밍 양과 앨범 판매는 이 기간 동안 늘었고 마이클에 대한 공연과 전시도 계속 되고 있다. 언론의 지원을 받아 몇 달 간 핫이슈로 선전됐음에도 불구하고 다큐의 실제 상영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며 초기 판매된 영국, 호주, 프랑스, 독일 외에 더 이상의 해외 판매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다큐의 치명적인 모순이 드러나자 마이클 지우기에 앞장섰던 오프라는 문제의 트윗을 삭제하고 자신의 홈피에서 다큐 주인공을 인터뷰한 방송도 내리면서 흔적을 지우고 있지만 자신으로 인해 확대된 부정적 영향에 대해선 침묵하며 책임지지 않고 있다. 오프라는 89년부터 허위 아동학대 수기를 검증없이 방송하여 문제를 만들었었기에 센세이션 만을 위한 무검증 방송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또한 미국언론 중 흑인사회 언론을 필두로 뒤늦게 차츰 비판적인 기사가 나오고 있지만 EBONY 피플지 TMZ VanityFair 초기 일제히 다큐의 일방 주장이 퍼져나가던 때 만큼의 주목은 없고 지상파는 계속 보도를 외면하고 있어 반론 보도가 일부 언론에서 나오더라도 이미 대중한테 각인된 부정적 인식은 수습하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미국 언론의 마이클에 대한 적대는 마이클 생전부터 계속되던 것이었고 이런 식의 오보 이후 침묵 & 지연 방식 또한 이제껏 적대적 언론이 써온 방식이다. 그래서 자국인 미국 내에서 마이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고 오히려 미국 외의 국가에서 마이클에 대한 인식이 공정한 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과거 마이클 활동기 때에는 폭스 방송이 주로 마이클을 공격했으나 공화당 출신 트럼프의 취임 이후 현재는 반트럼프 전선에 있는 민주당 계열의 CNN 등과 연예산업 관련 언론이 마이클을 공격하고 공화당 계열 폭스는 그나마 중립적인 보도를 약간은 한다는 점이다. 트럼프 가족과 마이클은 친구 사이이다. 트럼프는 과거 마이클을 지지하는 연설도 했었다. [[https://newspunch.com/ivana-trump-no-way-michael-jackson-hurt-anyone/?utm_source=share&utm_medium=ios_app
이바나 트럼프 마이클 옹호 기사]]

반면에 마이클 공격에 앞장섰던 오프라는 민주당 차기 주자로 언론에 오르내릴 만큼 대표적인 민주당 인사이다.- 하지만 월등한 인지도의 오프라가 정계 데뷔하는 듯한 기사가 나올 때 마다 오프라의 문제점도 들춰지고 있어 오프라는 이제껏 확실히 정치를 하겠다 밝힌 적이 없다. - 또한 선댄스에서 동시에 상영됐으나 리빙 네버랜드의 화제성으로 인해 묻힌 <UNTOCHABLE: The Harvey Weinstin Story>의 주인공,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할리우드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도 <리빙 네버랜드> 배급을 결정한 HBO 전사장 리처드 플레퍼와 함께 민주당 선거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했었다. 하비 와인스타인과 리차드 플레퍼, 오프라는 모두 오래된 친분 관계이다. 언터쳐블은 와인스타인의 성범죄를 비호한 정계와 산업, 언론계의 공범자들을 고발하고 할리우드의 고질적인 병폐를 다루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리빙 네버랜드가 몇 달 간 화제가 되는 동안 사라지고 말았다. 오프라도 와인스타인의 공범자로 거론됐었던 인물이며 여성인권 신장을 내세웠던 오프라는 이것 때문에 미투 운동 때 궁색한 처지가 됐다. 결국 막강한 언론 영향력을 가진 오프라가 <리빙 네버랜드> 파급의 선봉에 서면서 <언터처블>의 공범자와 병폐라는 현재 할리우드 산업계 전반으로 향할 화살을 죽은 마이클로 돌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오프라가 <리빙 네버랜드>를 통해 미투 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홍보성 기사를 내보내며 이미지 세탁에 활용하는 지점도 나타났다. 이외에도 민주당 계열 언론이 이슈로 미는 PC운동과 미투 운동의 여파도 이들 언론의 다큐에 대한 보호적 태도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 점이 롭슨의 마이클 성학대 주장이 처음 제기된 2013년에는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2019년에 갑자기 주목받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2013년엔 이 이슈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2019년엔 여론 환기용으로 이 이슈가 필요해진 것이다. <리빙 네버랜드>는 2016년 말에 아이디어를 구상해 2017년부터 촬영에 들어갔는데 이 시기는 하비 와인스타인이 미투 폭로를 희석시키고 여론을 눈돌리기 위해 마이클 전문 루머 작가를 만나던 시기이며 코리 펠드만의 할리우드 권력자들의 소아성애 그룹을 고발하는 다큐가 공개된 시점이기도 하며, 위 언터처블 다큐가 촬영되고 있던 시점이기도 하다. 경력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댄리드 감독의 <리빙 네버랜드>가 언터처블 상영에 딱 맞춰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된 것은 물론 메이저 HBO의 배급망까지 탔으며 이후 언론의 집중 홍보를 받은 것도 조력 없이는 힘든 지점이다.

이외에 오프라의 유난스런 마이클 견제에 대한 연관을 좀 더 살펴보자면, 오프라가 가진 타이틀은 마이클에 의해 부정된다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오프라는 현재 미국내 흑인 슈퍼리치 1위로 입지전적인 흑인 성공 신화로 일컬어지나 마이클을 제외했을 때만 가능한 타이틀이다. 미국 최초의 입지전적으로 가장 성공한 흑인이자 전세계적으로 공인된 문화적 업적을 이루었으며 적극적인 사회 기여를 한 흑인도 마이클이기에 오프라에겐 마이클이 일종의 뛰어넘어야할 산과 같다는 측면이 있다. 또한 마이클은 주류사회의 위선을 비판하고 차별 철폐 및 흑인 인권 신장에 꾸준히 기여했지만 오프라는 제도권 권력을 비판하거나 흑인 인권 신장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어 더 비교되는 관계이기도 하다. 마이클의 주 활동기인 80-90년대에 오프라는 마이너한 위치였으며 마이클에 대한 언론의 공격이 심화된 2000년대 이후로 오프라는 비판적인 마이클을 대신할 우호적인 흑인 아이콘으로 부상되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오프라는 흑백 인종갈등을 피한 여성의 성공기를 자신의 브랜드로 내세워 백인사회의 거부감을 피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동시에 주류사회 제도권과 기존 남성권력과도 유대 관계를 맺었다. 즉, 마이클은 갈등에 저항하며 성공한 인물이지만 오프라는 갈등을 피하며 성공한 인물인 것이다. 이 차이가 미국 사회에서 오프라가 편하게 이해되고 제도권 언론의 우호적인 스포팅을 받는데 반해 마이클에 대해서는 언론이 적대적이며 대중의 이해 또한 보다 어렵고 좋고 싫음의 명암이 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이클은 Dangerous 투어 때부터 미국에서 공연하지 않았고 History 앨범에서는 미국 제도권과 언론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했었다.
마이클 공격에 대해 좀 더 알고싶다면 그것이 알고 싶다 마이클 편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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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장 ] 댄리드 감독: 롭슨과 세이프척은 성인 이후 다큐를 찍기 전까지 서로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들이 의견을 주고받을 여지도 없었고 이 점이 다큐의 신뢰성을 보장한다. ( 롤링 스톤 인터뷰)
[FACT] 롭슨은 이미 세이프척과 14년 초에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고 16년 재판에서 스스로 진술한 바 있다. 게다가 롭슨과 세이프척은 소송 과정에서 같은 변호사인 빈스 피날디(Vince Finaldi)를 선임한 상태였다. 롭슨이 증언한 16년 12월 12일자 재판 문서 참고.
감독은 이들의 만남 이후인 16년에 다큐를 구상해 17년 2월부터 이들을 인터뷰했는데 13년에 이미 롭슨의 소송 소식이 알려졌고 다큐 촬영 기간에도 롭슨과 세이프척은 소송 중이었지만 감독은 이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 또한 롭슨과 척은 재정적인 동기가 아니라 다른 학대 피해자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소송을 벌였다고 주장하나, 소송과정을 비공개로 요구했기에 그들의 주장은 상황과 모순된다. 롭슨은 어떤 외부 노출도 없이 마이클 재단과 합의를 끌어내려 했으나 합의에 실패하자 그들의 소송 내용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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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척과 14년 초에 대화했다고 답하는 롭슨.

[ 주장 ] 롭슨과 세이프척: 성학대를 뒤늦게 인식한 것은 사랑으로 여기도록 그루밍 당했기 때문이지 재정적인 동기는 없다.
[FACT] 롭슨은 마이클 재단의 안무감독 자리를 거절당하자마자, 세이프척은 본인 소유의 회사가 10억원에 가까운 거액의 손해배상 피소를 당하자마자, 성학대를 인식했다며 소송을 시작했고 마이클 재단을 상대로 각각 15억 달러와 16백만 달러라는 거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한 상태이다. 다큐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롭슨은 11년에 마이클 재단이 추진하던 서커스 공연 <Michael Jackson ONE>의 안무감독을 원했으나 거절당한 후 마이클의 성학대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마이클에게 성학대 당했단 내용의 회고록 초안을 쓴 뒤 거액을 바라며 출판을 시도했던 것이 16년 재판에서 이미 드러났다.( 법정기록) 롭슨의 형인 웨인은 롭슨이 당시 경제적 문제가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09년에 롭슨이 집을 판 것도 밝혀졌다. 또한 11년에 롭슨이 마이클에게 받았던 기념품들을 경매로 팔면서 판매자 명을 익명으로 요구했던 것도 드러났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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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재판에서 롭슨은 12~14년 사이에 집필한 <Tell-All> 회고록 초안에 재정적인 목적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변호인 외의 다른 사람에게 'Written Communication'의 형태로 성학대 주장을 논의한 적이 없고 출판사에 초안을 보내지도 않았다고 진술했지만, 롭슨이 출판사 직원 알랜 네빈스에게 출판 상황을 알아보는 내용의 이메일이 공개되면서 거짓말이 탄로났다.( 관련 기사) 알랜은 롭슨이 출판 대가로 큰 돈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법원은 회고록 초안의 증거 제시를 명령했고, 공개된 초안의 내용은 재판 중 롭슨의 진술과도 다른 부분이 많은 것이었다. 또한 롭슨은 다시 책을 출판할 계획은 없냐는 질문에 그건 아니라고 대답하여 소송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시 책을 출판할 가능성 또한 남겼다.

롭슨의 12년 마이클 성학대 주장 직전인 11년엔 롭슨이 경매 사이트 <Julien's Auction>을 통하여 마이클에게 받았던 페도라, 장갑, 셔츠 등을 팔았던 것도 드러났다.[95] 경매 담당자는 당시 롭슨이 돈이 필요했다고 밝히며 동시에 롭슨이 판매자 이름을 익명으로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옥션 정책상 받아들일 수 없어 이름을 공개했다고 말했다. 16년 재판에서 롭슨은 2~3가지 물품을 경매로 팔았음을 인정하며 이중 페도라와 셔츠 두 물품의 판매 수익이 5만 달러였다고 진술했지만 실제로 두 물품의 판매액 합은 약 11만 5천 달러이며 장갑까지 모두 포함하면 기념품들의 총 판매액은 14만 5천 달러이다. [96]

또한 롭슨은 13년 5월에 작성한 고소문에서 손해배상 청구 기한을 늘리기 위해[97] 13년 3월에 변호사를 만난 후 마이클 재단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11년에 <Michael Jackson ONE>에 참여하기 위해 재단 책임자인 존 블랑카와 만난 것이 이메일을 통해 밝혀지면서 거짓말이 탄로났다. 판사는 15년 판결문에서 롭슨이 이메일을 주고받은 11년 2월에 이미 재단의 운영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판단하여 재단에 대한 소송을 기각했다. 또한 존 블랑카는 롭슨을 고용한 적 자체가 없다고 밝혔다. [98] 당시 롭슨은 <Step Up Revolution>의 영화 감독 직에서 중도 하차하면서 신경쇠약을 겪고 있었고 마이클 서커스까지 연이은 구직 실패로 커리어의 공백 및 경제 문제가 심화되던 상황이었다. 롭슨은 이렇게 11년 이후로 커리어의 하락을 겪었고 현재 과거 활동들에 비해 마이너한 영역에서 일하고 있다.】
파일:롭슨.구직실패.jpg
① 롭슨은 <Step Up Revolution> 감독에서 중도하차 한 후 연이어 <Michael Jackson ONE> 안무감독 직도 구직 실패하면서 11년부터 커리어의 하락을 겪었다. ② 11년 3월 롭슨의 마이클 서커스 구직희망 메일 ③ 11년 2월 롭슨의 에이전트가 롭슨에게 마이클 재단의 대표인 존 블랑카를 알려주는 이메일 ④ 존 블랑카 법정진술: 11년에 롭슨을 만났으나 고용하지 않았다.
한편 세이프척도 성학대를 깨달았다 주장하기 전에 84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 피소를 당했던 것이 드러났다. 세이프척은 13년 5월 16일에 <Today Show>를 통해 롭슨의 마이클 재단 소송 소식을 알게 된 후 자신도 롭슨처럼 성학대 당했음을 인식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인식 바로 몇 주 전인 4월 26일에 세이프척이 공동 소유한 회사 SEA/SUE가 84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 피소를 당한 것이다. 피소당한 회사는 세이프척의 부인 또한 지분을 나눠갖고 있는 회사였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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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척은 성학대 주장하기 직전인, 13년 4월 26일에 84만 달러 손해배상 고소를 당했다.

[ 주장 ] 롭슨 & 세이프척: 마이클은 아동과의 성행위를 학대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클의 영향으로 우리도 성학대를 사랑으로 믿으며 그루밍 당했다. - (참고) 댄리드 롤링스톤 인터뷰
[FACT] 마이클은 시누이인 디 디 잭슨에게 아동 성추행에 관한 기사를 읽어보라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고 직접 아동 성학대를 비판하는 곡을 쓰기도 했었다.
이 주장은 롭슨은 97년까지 세이프척은 92년까지, 그들의 14살 무렵까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랑으로 여기도록 그루밍 당하여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30살이 넘어갈 때 까지도 기억하지만 아동 성학대인 줄은 몰랐다는 것을 설명하는 다큐의 맥락이다. 감독 댄 리드도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마이클은 "정말로" 아동과의 성행위를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마이클 의식의 영향으로 롭슨과 세이프척은 어릴 때 상처입지 않았고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며, 롭슨의 경우 7살 때 부터(90년) 이러한 인식이 형성되었기에 오랫동안 학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 마이클은 아동에게 하는 사소한 성적인 장난까지도 학대라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친척에게 경고할 정도로 이 문제에 오히려 엄격했으며 아동 성학대를 비판하는 "Do You Know Where Your Children Are" 이라는 곡을 80년대 후반부터 쓰기도 했었다.[100] 마이클은 91년에 "Heal the World"라는 자선재단을 설립하면서 아동복지 사업에 매진했고 옥스포드 연설과 같은 아동인권에 대한 발언들을 90년대부터 꾸준히 남겼었다. 또한 03년에 에드 브래들리와의 인터뷰에서 마이클은 "나는 아이에게 어떠한 성적인 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내 손목을 먼저 찢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마이클 잭슨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죠."라고 밝히기도 했다. 아래는 마이클이 90년대 초 이전에 [101] 시누이인 디 디 잭슨(Dee Dee Jackson)에게 남긴 메모와 마이클이 아동 성학대를 주제로 80년대 후반부터 쓴 곡이다.
파일:dee-dee-note.jpg
" Dee Dee는 아동 성추행에 관한 이 기사를 읽으신 후에 Taj, TJ 및 Taryll(마이클의 남자 조카들)에게도 읽어주십시오. 친척조차도 (당신의) 자녀를 괴롭히거나 (친척들도) 조카를 괴롭히는 삼촌이나 숙모가 될 수 있습니다. 읽어주세요. 사랑하는 MJ "
MICHAEL JACKSON | "Do You Know Where Your Children Are" (ORIGINAL, 80년대 후반 작곡, 사후 공개)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그녀는 12살밖에 되지 않았어요. 양아버지가 성적으로 학대하는 동안 ... 돈이 어딨는지 보여줄 게. 거리로 데려갔어요.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날 구해줘 (이 살아있는 지옥에서) 나를 구해줘 나를 구해줘"
【가사 더보기】
【Father comes home from work, and he's scared to death
Mother cries for the kid, and the note she read
Father runs to the table, he says "What's going on?"
Mother cries desperately, "Our little baby's gone!"
아버지가 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죽을 만큼 공포에 질렸어요.
어머니는 아이를 찾으며 울고 있었죠. 그녀는 노트를 읽었어요.
아버지는 테이블로 달려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지?" 물었어요.
어머니는 절규했죠. "우리 아이가 사라졌어요!"

Do you know where your children are?
Because it's now twelve o'clock
If they're somewhere out on the street
Just imagine how scared they are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왜냐하면 지금 12시가 되었기 때문이죠.
만일 아이들이 거리 어딘가에 있다면
그냥 상상해봐요. 그들이 얼마나 무서울지.

She wrote that she is tired of step daddy using her
Saying that he'll buy her things, while sexually abusing her
Just think that she's all alone somewhere out on the street
How will this girl survive?
She ain't got nothing to eat!
그녀는 양아버지가 그녀를 이용하는데 지쳤다고 썼어요.
그녀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동안 그는 그녀의 물건을 사줄거라 했죠.
그냥 생각해봐요. 그녀가 거리 어딘가에서 홀로 있는 것을.
어떻게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죠?
그녀는 먹을 것도 없었어요.

Save me (from this living hell)
Save me (cause I don't wanna know)
Save me
날 구해줘 (이 살아있는 지옥으로 부터)
날 구해줘 (난 알고싶지 않으니깐)
날 구해줘

Now she's on the move, she's off to Hollywood
She says she wanna be a star, she heard the money's good
She gets off from the train station, the man is waiting there
"I'll show you where the money is, girl just let down your hair"
지금 그녀가 할리우드 쪽으로 움직이고 있네요.
그녀는 스타가 될거야 말해요. 거긴 돈이 많다고 들었으니깐.
그녀가 기차역에서 내리자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어요.
"돈이 어딨는지 보여줄테니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해주렴"

He's taking her on the streets, of Sunset Boulevard
She's selling her body hard, girl that will take you far
The police come 'round the corner, somebody there they told
He's arresting this little girl, that's only twelve years old!
그는 선셋 볼리바드 거리로 그녀를 데려갔어요.
그녀는 힘겹게 몸을 팔았죠. 그건 너무한 일인데.
경찰이 길모퉁이를 돌 때 누군가 말했어요.
이 어린 소녀를 체포했죠. 그녀는 고작 12살일 뿐인데.

Do you know where your children are?
Because it's now twelve o'clock
If they're somewhere out on the street
Just imagine how scared they are
(반복)】

[ 주장 ] 롭슨: 마이클에 의해 여자를 멀리하도록 세뇌당하며 8살~15살, 90~97년에 성학대 당했다.
[ 반박 ] 브랜디: 마이클의 연결로 롭슨과 93~2001년까지 7년 이상 연애했으며 롭슨은 여러 여자들과 바람까지 피웠다.
논란이 되자 감독은 인터뷰에서 롭슨은 7살~9살 사이에 집중 학대 당했다고 말을 바꿨으나, 롭슨은 9살이 돼서야 미국으로 이민왔다.
롭슨과 세이프척은 마이클이 자신들을 질투해서 여자를 멀리하게끔 세뇌시켰다고 공통적으로 말했는데[102] 마이클의 조카인 브랜디 잭슨은 마이클이 직접 91년 L.A.Gear 광고촬영 때 롭슨을 자신에게 소개시켜 주어서 9살 무렵부터 알고 지냈으며 1993년 경부터 2001년 즈음까지 롭슨의 고백으로 7년 이상 사귀다가 롭슨이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워온 것을 알고 헤어졌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올려서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103]

브랜디는 인터뷰( 1 2)에서 롭슨의 다큐 속 주장과 반대로 롭슨이 광고촬영 후 마이클에게 자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이성관계에 적극적이었고 이에 마이클이 흔쾌히 네버랜드에 롭슨 가족과 브랜디를 함께 초대해 둘을 직접 이어줬으며, 9살 때부터 십여 년간 롭슨과 롭슨 가족과도 왕래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당시 롭슨은 마이클 옆에 있지도 않았고 마이클은 늘 일 때문에 바빴다고 밝혔다. 또 롭슨이 직접 93년 조단사건에 대해 그들은 뻔한 금전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며 마이클은 그런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대화를 하곤 했다고 밝혀서, 롭슨이 다큐에서 주장한 93년 조단사건 경찰수사 때 자신이 마이클에게 성학대를 당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나쁜 일인 줄 몰랐기 때문에 마이클의 결백을 증언했다고 한 말도 거짓 임을 드러냈다.
파일:브랜디롭슨트윗.LA기어광고.jpg
(좌) L.A.Gear 광고를 함께 찍은 브랜디와 롭슨 (우) 마이클의 직접 연결로 롭슨과 7년 이상 사귀었다 말하는 브랜디 잭슨의 트윗
롭슨은 이십대 초반에 프린스의 부인과 불륜관계 염문설이 있었으며 이후 프린스는 이혼했다. 브랜디의 폭로가 논란이 되자 감독은 브랜디와 사귀기 전인 7~9살때 롭슨이 집중적으로 성학대 당했다며 말을 바꿨지만, 롭슨은 9살때 미국으로 이민왔기에 이 시기에 어떻게 수백 번의 학대가 가능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롭슨 또한 브랜디의 폭로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 {{{#FFFFFF 정말 성학대를 당했다면 이미 성인이던 05년 재판 때 기회가 있었음에도 진작에 폭로하지 않고 왜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했냐는 의문에 대해
    [ 주장 ] 세이프척 : 마이클이 재판이 끝나갈 때까지도 계속 결백을 증언하도록 압박했다.
    [ 주장 ] 롭슨 : 증언하기 싫었지만 마이클 가족과 저녁식사를 한 후에 측은한 마음이 들어 증언했다.[104]}}}
[FACT] 세이프척은 05년 2월~6월에 열렸던 형사재판에서 초기인 3월 28일에 이미 재판부에 의해 검찰측 증인에서 제외되었고 마이클 측에서 증인요청을 한 적도 없었다.
05년 재판 당시 세이프척은 마이클이 아니라 반대로 검찰 측에서 재판 전에 증인으로 요청한 마이클 측 변호전략엔 이득이지 않은 인물이었으며, 05년 3월 28일에 판사는 검찰의 요청을 거절하고 증인 채택 절차에서 세이프척을 제외했다.( 재판 문서 참고) 판사는 어린시절에 마이클과 어울렸던 사람들 중에서 '제3자에 의해 성학대가 목격된 사람'으로 증인자격을 한정했는데 마이클과 세이프척 사이에는 그동안 성학대 혐의와 관련된 증언이나 진술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105] 따라서 재판부가 마이클과 검찰 각각 양측의 요청에 최종적으로 증인으로 채택한 이들은 브렛 반스, 맥컬리 컬킨, 웨이드 롭슨, 제이슨 프란시아, 조단 챈들러 이렇게 5명이었으며 증언 모순과 정황 불합리 등으로 이들에 대한 목격자 진술은 설득력을 잃었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세이프척과 관련된 성학대 증언이나 진술은 나오지 않아서 증인으로 부를 상황은 생기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세이프척 본인도 93년 챈들러 사건에서 마이클의 결백을 증언한 이래로 05년 재판까지도 그 입장을 계속 유지해 와서 새로울 것도 없었다.

재판 당시 마이클의 변호인이었던 톰 매세로우도 19년 존 지글러와의 인터뷰(14:48)에서 세이프척은 증인으로 요청하지도 않았다고 밝히며, 이미 재판부가 세이프척을 검찰 측 증인에서 제외했는데 굳이 마이클 변호팀이 세이프척을 마이클 측 증인으로 세우려고 하면 수사기관에 정식 진술하지 않고 타블로이드 등에서만 말해와서 신뢰성 면에서 제외되었던 증인들을 검찰이 다시 부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오히려 변호전략의 마이너스라며, 세이프척의 주장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당시 마이클 변호팀의 사설탐정이었던 스캇 로스도 19년 <Nicole's View>와의 인터뷰(16:09)에서 위와 같은 이유들로 세이프척을 증인으로 부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파일:세이프척 증언제외.png
판사는 어린시절 마이클과 어울렸던 사람들 중에서 '제3자에 의해 성학대가 목격된 사람'으로 증인 자격을 제한했다.
파일:세이프척 증언 제외2.png
세이프척은 해당사항이 없었기 때문에 형사재판 초기에 검찰의 증인요청을 재판부가 거절하여 이미 증인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FACT] 마이클의 조카 타지 잭슨은 롭슨이 제시한 마이클 가족과의 식사 자리는 증언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반박했다. 감독은 영국의 채널4 방송에서 이 식사 일화를 통째로 삭제했다.
롭슨은 증언하기 싫었지만 그때는 학대라 생각하지 않았고 마이클을 사랑했기 때문에 일부러 거짓 증언을 했다고 주장하며, 증언 전의 롭슨 가족과 마이클 가족의 네버랜드 저녁식사 자리에서 마이클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마이클에게 매달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움에 이들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 일화를 증언의 결정적 계기로 제시했다. 하지만 마이클의 조카인 타지 잭슨은 본인도 그때 그 식사 자리에 있었으며 그 식사 자리는 롭슨의 증언 전이 아니라 증언 후에 일어난 것이라고 반박했으며[106] 브렛 반스도 그 식사 자리에 본인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자기도 있었다고 밝히며 타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트위터 메시지를 올렸다. 롭슨은 타지와 브렛의 반박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지않고 있는 상태이다. 또 05년 재판 당시 마이클의 변호사였던 브라이언 옥스만도 사건이 터지자마자 롭슨이 호주에서 날아와 증인에 자원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며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기사에서 일축했다.
웨이드 롭슨의 93년 LA 경찰과의 인터뷰 中
롭슨은 93년에 성폭행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 행위가 성학대인줄 몰랐고 05년엔 과거의 일을 스스로 은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93년에 경찰은 성학대이냐의 개념을 물은게 아니라 만졌거나 알몸을 봤냐는 질문을 하였다. ( 영상에서 표정 참고)
롭슨: "난 마이클이 그런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거 알아요." "I know he wouldn't do anything like that."

Q: "그가 너한테 의문이 들만한 어떤 시도도 한 적 없니?" "Has he ever tried to do anything with you that would even be considered questionable?"

롭슨: "아뇨. 전혀 없어요." "No. Nothing."

Q: "전혀 없었니? 그가 널 한 번도 만진 적이 없니?" "Nothing at all? He never touched you?"

롭슨: "없어요." "Mm-mm"

Q: "마이클의 알몸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니?" "Have you ever seen Michael naked?"

롭슨: 아뇨." "No"
롭슨은 또 다큐에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이클의 변호팀으로부터 강제적으로 증인 소환장을 받았다고도 주장했으나 소환장 문서를 실제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스캇 로스는 19년 <Nicole's View>와의 인터뷰에서 롭슨의 이 주장에 대해 반박하며 당시 증인 관련 업무를 했던 사람이 바로 본인이고 자신은 롭슨에게 소환장을 발부한 적이 없으니 롭슨이 꼭 소환장을 직접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107] 게다가 17년에 기각된 롭슨의 소송 고소장엔 마이클이 전화로 역할극을 하여 05년에 증언하게 됐다고 적혀있을 뿐 식사 일화는 등장하지도 않아서 롭슨의 다른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증언에 대한 주장 또한 계속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Grace Rwaramba는 05년에 롭슨과 조이가 롭슨의 결혼식을 네버랜드에서 열길 원하며 여러 차례 요청했고 그때가 재판 판결 전에 조심해야 할 시기인지라 이기적인 무리한 요청에 마이클이 놀랬다는 일화를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파일:05증언.롭슨.브렛.맥컬리.jpg
(위) 05년 재판때 증인으로 출석한 롭슨의 모습. (아래) 역시 증인이었던 브렛 반스(왼쪽)와 맥컬리 컬킨(오른쪽)
[FACT] 또한 다큐에서 05년 증언과 관련해 마이클의 변호사가 강경한 기자회견을 했고 이들이 영향받은 것처럼 암시한 장면은 실제로는 이 증언과 관련없는 다른 사건이었으며, 다른 사건 임을 알 수 있는 멘트가 편집되어 있었던 것도 밝혀졌다. ( 기자회견 원본)
다큐에서 05년 증언과 관련된 상황을 묘사하면서 당시 마이클의 변호인 중에 한 명이었던 마크 게라고스(Mark Geragos)가 "위신을 해치려 한다면 이제껏 본 적 없는 강력한 법률적인 대응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기자회견 장면을 삽입하여 당시 변호인단이 강경한 태도였고 롭슨과 세이프척이 이에 영향받았던 것처럼 암시하였다. 그러나 이 장면은 이들의 증언 주장과 관련없는 마이클을 불법도청한 테이프를 언론사에 판매하려 한 사건에 대한 기자회견이였으며, 다른 사건 임을 알 수 있는 "사생활을 침해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란 멘트가 중간에 편집[108]되어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게라고스는 자신의 트위터 메세지를 통해, 불법도청을 저지른 이들은 감옥에 갔던 다른 사건이라며 다큐에 대한 고소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 주장 ] 롭슨 & 세이프척: 14살 즈음에 사춘기가 오자 마이클의 관심은 더 어린 브렛 반스와 맥컬리 컬킨에게로 옮겨가면서 버림받았고 우리와 같은 피해자들이 더 있을 것이다. (브렛과 맥컬리도 성적인 관계일거란 암시)
[ 반박 ] 감독은 2021년 10월 팟캐스트 <The Michael Anthony Show>에 출연해서는 다시 스스로 말을 정반대로 바꿨다. 감독은 "마이클이 18세 이상의 남성들과도 성관계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남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마이클과 성관계를 해온 사람들일 것이다. 즉 연장선에 있다'' 라고 주장했다.

한편 브렛과 맥컬리는 롭슨과 세이프척의 주장을 즉각 부정하였다. 또한 맥컬리는 오히려 이들보다 연상이며 롭슨에 의해 무단으로 추가 피해자로 기재된 조나단도 거부의사를 밝혔으나 롭슨은 협상을 제의했고 결국 사생활 침해로 법적 제제를 받았다. 또 마이클은 당시 남녀구분 없이 가족들과 함께 교류하였고 성인이 된 이후로도 친분을 이어간 인물도 다수이며, 감독 스스로도 롭슨은 7~9살로 세이프척은 16살 이후로 학대시기를 수정한 이력이 있고 롭슨은 이전부터 거리 있었음이 드러나서, "14살 사춘기소년 가설"은 그들 외부로는 물론 그들 스스로도 실체를 찾을 수 없다.(후술한 내용 참조)
브렛과 맥컬리는 줄곧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해왔는데도 롭슨과 세이프척은 무단으로 다큐에서 추가 피해자로 암시하여 즉각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롭슨은 13년 고소장에서 80년대에 마이클과 어울렸던 조나단 스펜서를 또 다른 피해자인 양 무단으로 기재하면서 조나단의 신체 및 개인 정보를 추적하여 사생활을 침해한 것이 조나단의 법적 제제 요구로 드러났다. 게다가 조나단이 분명한 거부의사를 밝혔는데도 롭슨과 롭슨의 변호인은 만나서 협상하자는 제의를 한 것이 조나단의 법정문서에서 밝혀져, 그들이 주장하는 추가 피해자란 6년간 나타난 적 없는 실체 없는 가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회유로 추가 피해자를 조작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까지 제기되고 있다.
파일:브렛 반스1.png 파일:조나단스펜서.고발.jpg
다큐 및 롭슨과 세이프척의 고소장에서 또 다른 피해자로 암시된 브렛 반스는 즉각 부정했고 이후 해당장면의 삭제를 요구하며 고소했다. 롭슨의 고소장에 무단으로 추가 피해자로 기재됐던 조나단은 17년에 롭슨을 고발했고 18년에 피해보상을 판결받았다.
마이클은 어린 소년에게만 흥미를 가지며 14살을 기점으로 흥미를 잃는다는 다큐의 주장도 실제 마이클의 교류 상황과 맞지 않다. 마이클의 "Moon Walker" 영화에 출연했던 소녀 켈리 파커는 성인이 된 이후로도 계속 교류하며 마이클의 사망 직전까지 친구 관계였다고 말하고 있고, 남자 아이들로 특정해봐도 80년대부터 마이클과 교류했던 엠마뉴엘 루이스와 90년대부터 교류한 맥컬리, 프랭크와 에디 카시오, 브렛 반스 등 시기 상관없이 어릴 때 부터 성인이 된 이후로도 계속 친분을 이어나간 케이스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마이클의 투어에 처음 동행한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평소 종교에 투철했던 마이클의 몰몬교도 친구인 24세의 지미 오스몬드였고[109] 가장 마이클의 투어에 자주 동행한 이는 그의 가족인 조카들과 마이클의 절친인 카시오의 가족들이었다. 하지만 어른이든 아이든 이들 중 아무도 마이클이 성적으로 관심을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110]
파일:마이클아이들.jpg
켈리 파커: 조건 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② 프랭크 & 에디 카시오: 스타인걸 과시한 적이 없어요. 우린 말 그대로 함께 자랐죠. ③ 엠마뉴엘 루이스: 저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에게도 항상 좋은 친구였어요. ④ 데이브 데이브[111]: 그는 내가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 같았어요. ( 출처) - 마이클은 성별, 연령, 인종, 장애 구분 없이 교류하였다.
또 롭슨이 나이가 들면서 관심이 옮겨갔다고 주장하는 맥컬리는 오히려 2살 연상이라 모순이다. 게다가 어머니 조이는 롭슨의 10살 즈음에 이미 밀려난 느낌을 받았었고 롭슨의 11살 때 Dangerous 투어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으나 마이클은 거절했다고 진술하였으며 롭슨이 이민 온 9살부터 14년 간 마이클과 네버랜드에서 만난 건 4번뿐이고 그 밖의 만남도 몇 차례만 꼽고 있어 롭슨은 14살 훨씬 이전부터 혹은 애초에 상대적으로 가깝지 않았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멀고 가까운 각각의 친분관계 자체의 차이가 있을 뿐 14살 소년을 기점으로 관계가 급변한다는 가설은 그들 스스로도 적용하기 힘들다. 심지어 감독 댄 리드는 다큐의 모순점이 드러나자 롭슨은 7~9살로, 세이프척은 16살 이후로 성학대 시기를 변경한 바가 있어 스스로 14살 소년 가설을 부정하고 있는 형국이다. (후술한 내용 참조)
[ 주장 ] 세이프척: 네버랜드는 나를 위해 지어진 곳이라 할 수 있으며 은밀한 장소가 곳곳에 숨겨져 있었고 기차역, 미니성, 자쿠지, 게임실, 영화관 방 등에서 88~92년 사이에 거의 매일 성폭행을 당했다.
[FACT] 위 장소들은 공개적인 구조이고 네버랜드가 운영되던 당시에 상주 직원과 방문객으로 북적이던 곳이어서 현실성이 없다. 게다가 대부분 91년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며 심지어 기차역은 94년이 돼서야 완공됐다. 댄 리드 감독은 다큐 내내 현장답사를 전혀 하지 않았고, 영국 채널4 방영분에서 세이프척의 네버랜드 진술 부분을 통째로 삭제했다. 또한 세이프척이 네버랜드를 방문했을 때 마이클은 한번도 네버랜드에 있은 적이 없다고, 09년까지 유모로 일했던 Grace Rwaramba가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세이프척은 실제로 네버랜드에서 마이클과 찍은 사진을 제시한 적이 없기도 하다.
파일:네버랜드.jpg
네버랜드는 단순한 사유지가 아니라 지어질 때부터 환자를 위한 무료 자선 놀이공원을 목적으로 한 곳이다. 네버랜드는 여의도 1.3배의 방대한 규모에 휠체어를 탄 채로 놀이기구를 이용할 수 있는 특수시설과 안전장치 등이 있었으며 직원들은 정기적으로 장애인을 돌보는 전문훈련을 받았고 (참고), 아이들의 안전을 언제고 확인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구조에 100 여명의 상주직원이 항시 케어하던 곳이었다. 마이클은 바쁜 일정상 네버랜드를 자주 비웠지만 마이클 없이도 방문객들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으며 환자와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단체 버스를 타고 네버랜드를 방문했었다. [설명더보기:]

세이프척이 성추행 당한 장소라고 주장하며 은밀한 곳인 양 암시했던 영화관 내부의 방은, 실제로는 안과 밖에서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전면 통창이 통로에 맞닿아 설치되어 있어 은밀하지 않은 장소이며 출입구를 통과하면 바로 옆에 위치한 세이프척이 말한 방이 보이기 때문에 성추행이 일어나기엔 현실성이 더욱 떨어진다. 이 방의 실제 용도는 환자들이 편히 병상에 누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목적이었으며, 마이클은 93년 오프라 인터뷰(37:32)에서 이 방을 소개하며 암환자를 위한 병원용 침상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또한 세이프척의 어머니는 마이클과 세이프척이 단 둘이서 영화관 내부의 방에 있을 때 문이 잠겨 있었고 여러번 크게 문을 두드리자 마이클이 문을 열어주며 "문을 잠글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다큐에서 제시하여 세이프척의 주장을 뒷받침 했는데, 실제 영화관에는 안쪽에서 잠그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 없어서 이 일화 또한 신빙성이 없다.

네버랜드 건물 유지보수 감독이었던 Allan Scanlan은 영화관의 출입문들은 <Panic Hardware>[113] 방식이 적용돼 안에서는 잠글 수 없고 밖에서만 열쇠로 잠글 수 있는 구조라고 확인해 주었는데, 즉 영화관 안에 사람이 있는 한 출입구는 항상 열려있다는 뜻이므로 세이프척 어머니의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또한 마이클과 가깝게 지냈던 라이오넬 리치 가족의 브랜다 리치(라이오넬의 부인)도 이곳에서 영화를 자주 봤었다고 밝히며 세이프척이 말한 영화관 내부의 방에도 잠금 장치 자체가 아예 설치되어 있지 않다 밝혀, 세이프척의 어머니가 내부의 방을 말했더라도 잠겨있었다는 일화는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아울러 영화관 내부의 방은 방문에 다다르기 전에 통창으로 내부가 훤히 보여서 굳이 문을 열어 확인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아래 사진 참조) 일각에선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는 원웨이(One-Way) 유리창일 것이란 주장을 했으나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밖에서도 잘 들여다 보이며 브랜다 리치도 원웨이 유리창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한 아래 사진의 2층에 보이는 영화관의 발코니 공간을 말했다고 가정하여도 93년 오프라 인터뷰 영상에서 그곳엔 세이프척이 말한 침대라곤 없으며 문도 없고 그저 계단과 연결된 비어있는 공간 임을 확인할 수 있기에 역시 세이프척의 영화관 성추행 주장과는 맞지 않다.[114]
파일:네버랜드영화관방.jpg
밖에서도 병원침상 및 방 내부가 잘 보이는 투명한 통창, 출입구 옆 통로에 바로 맞닿아 위치.

세이프척이 10~14살 동안( 88~92년) 매일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기차역은 그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다. 세이프척은 기차역 2층에 방이 있으며 그곳에서 매일같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네버랜드에서 유일하게 2층 건물로 된 기차역은 건축허가서에 따르면 93년 9월 2일에 건축허가가 났고 93년 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해 세이프척이 16살이 된 94년에서야 완공되었다. 게다가 기차역 내부 영상을 보면 2층은 문 없이 계단으로 이어진 공간이고 천장까지 포함하여 사방에 창문이 있으며 아래층을 향한 벽이 완전히 뚫려있어 직원과 방문객이 오고 가던 아래층에서 윗층 상황을 올려다 볼 수 있는 반쪽짜리 오픈 복층에 불과할 뿐이라 방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 자체도 없다. 네버랜드 건물 유지보수 감독이었던 Allan Scanlan도 건물로 된 기차역은 단 1개뿐이며 나머지 기차 정류장은 벤치가 놓여있는 간이 형태라고 확인해 주었다.[115] 세이프척은 존재하지도 않은 곳에서 5년간 매일같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셈이다.( 관련 기사)
파일:세이프척네버랜드기차역.jpg
메인 기차역은 93년에 짓기 시작해 94년 완공 후엔 주기적인 기차 운행으로 상주 직원과 많은 방문객이 있었던 곳.
결국 감독 댄 리드는 기차역의 94년 완공 사실을 인정했으나 세이프척이 잘못 기억했고 기차역이 지어진 이후에도 성폭행을 당했다는, 다큐 속 내용과 전면 달라지는 주장새로 내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94년에 세이프척은 16살이 되므로 14살이 돼서 사춘기가 오자마자 버림받고 마이클은 다른 소년으로 갈아탔다고 울면서 고백하던 다큐의 전체 맥락까지 전면적으로 뜯어고쳐야 된다.[116] 게다가 세이프척은 고소장에서 92년에 성학대가 끝났다고 분명히 명시했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과도 스스로 모순되는 것이며, 감독 댄 리드 또한 과거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마이클은 14~15살을 기점으로 소년에게 흥미를 잃는다"고 주장했었기 때문에 역시 또 스스로 모순된다. 댄 리드는 2019년 3월 라디오 <2days fm breakfast>와의 인터뷰에서 마이클의 결백을 주장하는 아론 카터를 향해 이 말을 하며 아론은 15살 때 마이클을 처음 만났기 때문에 성학대를 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심지어 마이클의 스케쥴과도 맞지 않게 되는데 마이클은 92년부터 1년 반 동안 Dangerous 투어를 했고, 93년 말부터 리사 마리와의 교제 및 결혼, 히스토리 앨범 제작 때문에 뉴욕 트럼프 타워에서 생활했으며 96년 8월부터 히스토리 투어로 해외에 있었기에 기차역이 지어진 이후엔 네버랜드에서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94년 이전엔 기차역이 없으므로 불가능하고 94년 이후엔 마이클이 네버랜드에 없으므로 역시 매일마다 네버랜드 기차역에서 성폭행 당했다는 세이프척의 주장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시점을 아무리 옮긴다 한들 모두 불가능한 것이 된다.

한편 06년부터 마이클의 경호원이었던 Bill Whitfield의 책에 해당 기차역 건물이 90년에도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어 논란이 있었으나 경호원이 직접 트위터에서 본인은 마이클을 06년에 처음 만났다고 밝히고 그전 상황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며 잘못된 정보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1, 2) 91년 10월에 네버랜드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결혼식을 올렸을 때 언론사들이 헬기를 띄워서 기차역 부지를 찍은 장면을 봐도 해당 기차역 건물은 이때 없었고 영상(4분 40초) HBO가 93년 1월에 찍은 영상( 스크린샷)을 봐도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사진작가 Steven D Starr가 93년 8월에 찍어 공개한 사진을 봐도 마찬가지다.

이후 댄 리드는 기차역의 건축허가는 93년도에 났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며 주장을 또 다시 바꿨다.[117] 하지만 기차역이 93년 말에 공사를 시작해서 94년에 완성되었고 그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언론사들의 항공샷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파일:세이프척기차역연도.마이클스케쥴.jpg
(좌) <리빙 네버랜드>속 기차역 사건 시간정리 화면: 88~90년 (우) 마이클 스케줄 법정진술: 93~96년 뉴욕 생활 / 96년 8월 이후 해외 생활

세이프척이 언급한 미니 성은 91년 이후에 들어섰고 1층에 무료 캔디샵이 있어 직원들이 상주했던 곳이다. 자쿠지가 있던 야외 수영장은 안전상 CCTV로 둘러쌓인 곳이고 두 곳 모두 오픈된 구조라 이곳에서 비밀리에 거의 매일 성학대를 당했단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마이클은 87~89년 배드투어, 뮤직비디오와 광고 촬영, 91년에 발표한 Dangerous 앨범 준비, 92년 댄저로스 투어 등으로 바쁠 때였으며 네버랜드를 자주 비웠다.
파일:네버랜드.성내부.수영장.기차역.jpg
① 미니 성 안의 모습: 1층에 무료캔디샵, 직원 상주, 윗층까지 문 없이 뚫린 구조 ②③ 야외 수영장에 딸린 야외 자쿠지와 지도: 동그라미가 야외 자쿠지 위치, 바로 앞에 레크레이션 빌딩, 인근에 직원오피스 ④ 기차 정류장 중 하나의 모습, 직원과 방문객들

세이프척은 또한 미니 성과 레크레이션 빌딩(게임실) 2층에 작은 침대가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네버랜드에서 근무했던 Brad Sunberg와 Allan Scanlan은 두 곳 모두 침대는 전혀 없었다 확인해 주었다. 91~94년 사이에 네버랜드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던 랄프 채콘의 05년 재판 증언을 봐도 게임실 1층엔 20여 대의 게임기기가 있었고 2층엔 또 다른 종류의 게임기기가 있었다는 진술만 있을 뿐 침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05년 4월 7일 랄프 채콘 법정기록 참고) 또한 네버랜드는 많은 직원에 의해 관리됐던 곳이라 건물 용도와 전혀 맞지 않아 의혹을 살만한 물품을 비밀리에 두기 힘들며 아동용 침대같은 의문스러운 물품이 있었다면 93년 조단 사건으로 네버랜드를 샅샅히 압수수색했을 때 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400여명에 이르는 방대한 탐문수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진술 조차 나오지 않았는지( 1, 2)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윗단락에서 보다시피 미니 성의 2층은 문 없이 뚫린 공간이고 게임실의 2층 또한 난간 너머로 아래층을 내려다보는 반쪽짜리 오픈 복층에 불과하므로 두 곳 모두 몰래 침대를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아래 영상에서 실제 게임실 모습과 방문객이 2층을 드나들며 찍은 화면을 확인할 수 있다.
네버랜드 레크레이션 빌딩(게임실) 내부 영상. 1분 48초 부터

세이프척이 성추행 장소로 말한 비밀의 방 또한 05년 개빈사건 때 이미 기사화된 것으로 세이프척 만의 특별한 정보일 수 없으며 수사를 통해 혐의점 없음은 물론 딱히 비밀도 아닌 것으로 드러난, Walk-In Closet (걸어들어갈 수 있는 벽장형 옷장) 크기의 각종 물품들로 가득 찬 창고같은 곳이였다. 또한 87년에 네버랜드 부지와 집을 인수하기 전에 전주인이 만들었던 방이라고 마이클의 보디가드 Matt Fiddes가 밝혔다. 감독은 영국 방송분에서 역시 이 장면을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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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척은 다큐에서 성추행 장소로 마이클의 침실 뒤쪽에 3단 잠금장치가 설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 소위 '비밀의 방'에 대해서도 언급했고, 일부 언론들은 이것이 이번에 처음 드러난 것처럼 보도했지만, 사실은 이미 03년 개빈사건으로 압수수색을 받았을 때 진작에 언론에 공개된 장소이다. 당시에도 경찰은 이 방에서 무언가 불법적인 일이 자행되지 않았을까 의심했지만 혐의점을 찾을 만한 증거도 없었으며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마이클이 네버랜드를 떠난 후 방 안의 물건을 다 치운 모습이 주로 언론에 공개되고 있는데 원래 이 방은 피규어, 장난감, 책, 공연소품, 옷 등 온갖 잡동사니들로 꽉 차서 발 디딜 틈 없던 개인창고 같은 곳이었다.

비밀의 방에 대해서는 웨이드 롭슨의 어머니인 조이 롭슨이 16년 9월 30일자 재판에서 증언한 것도 있다. 조이는 네버랜드에서 마이클과 함께 지냈을 때 비밀의 방을 본 적이 있는데 Walk-In Closet 만한 크기였다고 밝혔다. 또 마이클이 밖에 있을 때 전화로 조이에게 그 방 서랍에 있는 돈을 갖다달라고 부탁하며 비밀의 방이 있던 마이클의 침실이 잠겨 있어 열쇠 위치까지 알려준 적이 있었다고 증언하여 마이클도 숨기려 하지 않았고 주변사람도 알고있던 비밀이 아닌 방으로 보인다. 조이는 이 방에 대해 어떤 이상한 점을 느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또한 마이클의 보디가드 였던 Matt Fiddes는 이 방이 87년에 마이클이 네버랜드를 인수하기 전에 전주인에 의해 만들어졌던 방임을 밝히며, 당시 낙하산을 타고 침투하는 등 여러 루트의 침입자들이 종종 있었고 피신 공간이나 접근할 때 울리는 경비벨은 슈퍼스타들에겐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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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이 네버랜드를 떠나고 텅 빈 비밀 아닌 비밀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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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던 비밀 아닌 비밀의 방.

[ 주장 ] 세이프척: 13년 5월에 롭슨의 소송소식을 듣고 처음 성학대를 깨달았으며 그전까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진술
[모순 1] 14년의 세이프척 : 05년에 알았으며 어머니에게도 간접적으로 어필했다.
14년 고소장에서 세이프척은 13년에 처음 성학대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27살의 성인이었던 05년에도 어떻게 학대를 인식 못할 수 있냐는 의문에 대해 05년 일화를 고소장에 추가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됐다. 05년에 어머니에게 마이클을 'Bad man', 'He's not a good person'이라고 칭하며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난 듯한 말을 했으나 어머니가 알게 될까 두려워 구체적으로 알리지는 않았는데 당시 어머니가 티는 안냈지만 눈치챈 것 같았다라고 고소장에 적은 것이다.[118] .
→ 05년을 인식시점으로 판단하여 기한 만료로 소송 기각당함[119]
19년 <리빙 네버랜드> 버전
이후 다큐에서 세이프척은 13년에 처음 성학대를 깨달았고 그전까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초기 주장으로 전환했는데, 세이프척의 어머니가 마이클이 사망했을 때 마이클이 이젠 더 이상 다른 아이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기뻐서 춤을 췄다는 인터뷰를 하여 다시 시간 모순이 생기고 말았다. 마이클은 09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모순 2] 19년의 댄리드 감독: 세이프척은 사실 09년에 어머니한테 말했다. - 상영 후 <Today Show> 인터뷰
감독의 09년 6월 마이클 사망 당시에 세이프척과 어머니 모두 성학대를 알고있었단 발언은 다큐는 물론 세이프척의 고소장에도 없던 말이고 세이프척 자신도 어디서든 한 적 없는 말이며 13년이 돼서야 처음 깨달았다는 세이프척의 주장과도 또 다시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또한 세이프척과 세이프척 어머니 모두 09년은 물론 05년 재판때든 어떠한 과거 시기에도 마이클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한 적이 없으며, 감독의 주장과 다큐 속 세이프척 어머니의 인터뷰대로 마이클 사망 소식에 기뻐서 춤을 출 정도로 09년에 마이클을 증오하고 있었다면 왜 바로 고발하지 않고 아무런 언급 조차 없다가 13년에 롭슨의 소송 소식을 듣고 난 뒤에야 태도가 돌변했고 세이프척은 13년에 깨달았다고 6년간 줄곧 주장해왔는지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120]
파일:세이프척어머니웃음.jpg 파일:세이프척 재판.jpg
아들의 성학대 이야기 후 웃고있는 세이프척 어머니 <리빙 네버랜드> 中 13년에 학대를 인식했다고 주장하면서도 05년에 어머니가 알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적은 세이프척의 14년 고소장.

[ 주장 ] 세이프척: 87년 추수감사절때 마이클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고소장
[FACT] 87년 추수감사절은 11월 25일로 이때 마이클은 호주에서 11월 13일~28일까지 배드 투어 공연중이었다.
세이프척은 87년에 마이클의 캘리포니아 헤이번허스트에 있는 집에 세이프척 가족이 초대받아 시간을 보냈고,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수감사절에는 반대로 세이프척의 부모님이 마이클을 초대하기 위해 헤이번허스트에 있는 마이클을 직접 찾아가 차에 태운 후 자기들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으나 이때 마이클은 호주에서 11월 13일부터 공연 중이었으며 11월 27일과 28일에 브리즈번에서 공연했다.

[ 주장 ] 세이프척: 88년 2월에 마이클이 자신을 하와이 행사로 초청해서 휴가를 보냈고, 마이클은 자신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FACT] 마이클과 세이프척은 당시 펩시의 광고모델이었고 위 행사는 펩시의 하와이 광고를 홍보하기 위한 컨벤션 행사로 둘은 각각 초청되었고 따로 숙소를 썼으며 모든 행사비용은 펩시에서 지불한 비즈니스 목적의 활동이지 개인적 초청의 휴가가 아니다. 또한 하와이 현지에서 마이클과 가까이 있은 사람은 세이프척의 어머니였다.
85년 7살때 부터 아동모델 활동을 하던 세이프척은 87년에 펩시가 주최한 아동모델을 찾는 콘테스트에 뽑히면서 펩시 광고촬영을 했고 이후 화보 촬영, 펩시의 하와이 행사, 펩시가 후원한 배드 투어 등에 마케팅적 활동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또한 다큐에서 마이클이 하와이에서 가장 좋았던 일은 지미 세이프척뿐이라고 말한 것처럼 통화 녹음을 삽입했으나 이는 원본을 짤라내어 편집한 것임이 밝혀졌다. 원본에서 마이클은 당시 발표를 앞둔 "Smooth Criminal" 곡과 새로운 뮤직비디오, 펩시 광고에 대해서 말했고 지미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서 보낸 시간도 좋았고 또 그들(가족)과 보고 싶다라고 끝에 덧붙였는데 앞부분과 뒤의 가족에 대한 문장을 짤라내어 왜곡한 것이다.( 영상 7:3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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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광고촬영 이후에 마이클은 세이프척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고 편지를 먼저 보내어 연락을 시도한 건 세이프척 쪽이었다. 또한 하와이에서 마이클을 취재했던 현지 기자 Alan Light의 기사를 보면 마이클과 같은 복장을 한 아이가 행사를 함께 했고 어떤 여인이 마이클과 늘 붙어 있어서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그 아이의 어머니였다고 묘사하고 있어서, 하와이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마이클에게 맡기고 떨어져 있었다는 세이프척의 주장과는 반대로 마이클과 가까이 있은 사람은 오히려 세이프척의 어머니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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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 현지 기자 Alan Light와 기념사진, 세이프척이 출연한 펩시 광고 (왼쪽 아래) 당시 기사 (오른쪽) Alan Light는 마이클 곁에 늘 붙어있던 여인이 행사를 같이 하던 아이의 어머니였다고 기사에서 묘사했다. 마이클과 세이프척의 어머니가 가깝게 있고 세이프척은 떨어져 있다. Alan Light 사진 더보기

[ 주장 ] 세이프척: 89년 뉴욕 그래미 시상식 공연 때 마이클이 자신을 데려갔으며 이때 성추행 당했다.
[FACT] 마이클은 89년에 그래미에서 공연하지도 않았으며 그해 그래미 시상식은 LA에서 열렸다.
[참고] 펩시와의 아동 캠페인 진행으로 배드투어 중간부터 아동(펩시 광고모델 세이프척)이 투어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88년 3월 1일의 펩시의 배드 투어 후원 계약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마이클은 배드 투어 뉴욕 콘서트의 수익 60만 달러를 미국 흑인대학 재단에 기부했고 청소년이 직접 꿈과 희망을 말하고 약물에 빠지지 않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을 기자회견의 메인 이벤트로 진행했다. 펩시와 배드 투어의 만남은 처음부터 아동 캠페인이 프로모션의 일부였으며 그래서 배드 투어는 87년 9월부터 시작했지만 펩시가 후원하기 전에는 아동이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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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에 처음 펩시와 맺었던 10년 간의 광고 계약은 미국 한정이었으나 88년 3월 배드 투어 후원을 기점으로 세계 20개국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 계약으로 확장되었다. 펩시의 광고들은 마이클이 아이들을 응원하는 내용들로 시작했으며 펩시가 뽑은 광고모델인 세이프척이 출연한 광고도 스타가 되고픈 아이의 꿈을 응원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이 꿈을 이뤄주는 세이프척과 여러 아이들의 투어 무대 출연은, 펩시 광고의 테마였던 꿈과 희망에 대한 글로벌한 광고 효과 및 기업 이미지 그리고 마이클의 이미지에도 당시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아동을 테마로 한 펩시의 광고 중 단독모델인 광고는 세이프척이 출연한 광고뿐이었으며 세이프척은 어머니와 함께 88년 6월과 12월에만 투어에 참여했고 투어 현지 국가의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 섰었다. 마이클이 출연한 광고로 펩시는 처음으로 코카콜라의 매출을 뛰어 넘었고 이후 펩시의 광고 내용은 마이클의 Celebrity 적인 측면으로 바뀌어갔다.

마이클은 80년대부터 기부활동을 해오고 있었고 91년에 'Heal the World' 자선재단을 설립하면서 일시에 800억(19년 환산 4000억 이상)을 기부한 뒤 투어와 함께 현지의 고아원과 병원 등을 방문하는 자선활동을 본격적으로 병행하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아동의 등장도 배드 투어 때의 이벤트적인 면에서 벗어나 < Dangerous> 앨범부터는 'Heal the World' 나 'Black or White' 와 같은 폭력과 차별, 소외를 바꿔나가자는 곡의 의미 전달과 맞춰서 연출하기 시작했고 또 수혈 중 에이즈 감염으로 사망한 아동환자 리안 화이트(Ryan White)에 대한 추모곡 'Gone too soon'을 작곡하여 수록하기도 했다. 투어에서 공연할 때엔 현지 아동들을 섭외하여 연출하였고 이때부터 투어 중의 행사에서 현지 아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마이클의 시그니쳐가 되기 시작했다. 투어 중에 가장 많이 만난 아이들도 자선활동을 통한 장애인, 환자, 고아 등이었으며 이렇게 투어와 무대에서 아동의 등장은 자선과 사회 변화의 메시지, 현지 문화와의 교류라는 보다 사회적인 의미로 바뀌어 갔다.

93년 Dangerous 투어 때에도 펩시가 후원하였으나 이땐 광고내용이 마이클 위주로 바뀌어서 광고와 관련된 다른 동행은 없었다. Dangerous 투어엔 마이클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마이클의 조카들, 절친했던 카시오 가족과 댄서를 희망하던 브렛 반스가 부분적으로 동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마이클 패밀리로 불리던 사이들이다. 이들이 투어 중의 행사에 같이 이동한 적은 있으나 행사의 메인 게스트로 활동하지는 않았고 지인 동행 및 견학의 의미에 가깝다. 히스토리 투어 때에도 카시오 가족이 동행했었고 (참고로 카시오 가족의 아이들은 나중에 마이클의 비서가 되었다.) 투어에 동행한 헤어 아티스트 자넷 자이툰의 자녀인 탈룬 자이툰이 투어 현지 도착 때 마이클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려서 잠깐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아울러 히스토리 투어 중엔 마이클의 첫째 자녀가 태어났기에 마이클은 투어의 중간 지점인 파리에 아이와 유모를 두고 투어 중간마다 아이를 보러 왔었고 카시오 가족이 함께 돌보았었다. 마이클의 투어들은 년 단위의 장기간이었으며 수백명의 스텝들과 함께 호텔 전체를 렌트해가며 단체로 여러 대의 전용기로 이동하던 대규모였다.】
펩시가 88년 3월부터 배드 투어를 후원하면서 세이프척은 어머니와 함께 88년 6월과 12월에[121] 투어에 참여했는데, 고소장을 보면 88년 6월에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처음 성추행을 당했고 이후 배드 투어가 완전히 끝나고 89년 뉴욕에서 열리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마이클이 공연을 했는데 이때도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89년 그래미에서 마이클은 공연하지도 않았으며 뉴욕이 아니라 LA에서 열렸다. 그래미가 뉴욕에서 열리고 마이클이 공연한 때는 88년 2월 25일이며 배드 전미투어로 23일 24일 캔자스 시티에서 공연한 후 바로 25일 뉴욕으로 날아온 바쁜 일정이었고 펩시가 후원하기 전이다. 세이프척이 설사 헷갈렸다고 치고 그래미 일화를 88년 2월로 정정한다고 해도 이미 88년 6월이 첫 성추행의 시작이라며 호텔에서의 구체적인 상황까지 묘사했기 때문에 진술을 통째로 바꿔야 하고, 88년 3월까진 어머니가 마이클과 함께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때라고 고소장에 적었으니 진술을 변경하더라도 스스로의 말과 또 모순된다.[122]
파일:88년 6월.png
88년 6월에 파리에서 처음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
파일:89년 2월.png
89년 2월에 그래미 시상식이 뉴욕에서 열렸고 마이클이 공연했다는 허위사실을 진술.

[ 주장 ] 세이프척 어머니 : 93년 조단 챈들러 사건에 대한 증언의 대가로 마이클이 집을 사주었다.
[FACT] 조단 사건이 있기 1년도 전인 92년에 세이프척 가족의 부탁으로 집을 담보로 대출을 해줬을 뿐이며 조단 사건이 끝나고 3년 뒤인 97년까지도 대출조건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므로 조단 사건과 시기적으로 무관하고 세이프척의 어머니는 05년에 마이클이 집을 사준 것이 아니라고 인터뷰까지 하였다.
세이프척의 어머니는 다큐에서 자신들이 집을 살 때 은행에서 대출받기 힘들어서 마이클로부터 대출을 받았고 이후 마이클이 빚을 탕감해주었는데 이것이 93년 조단 챈들러 사건에 대한 증언 대가로 마이클이 집을 사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97년 6월에 세이프척 가족에게 발송한 대출관련 서류를 보면 전혀 사실과 맞지 않다. 먼저 대출은 93년 8월에 시작된 조단 사건으로부터 1년도 더 전인 92년 5월에 세이프척 가족의 요청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시작부터 조단 사건과 관련이 없다. 또 94년에 조단 사건 및 증언이 끝나고 무려 3년이 지난 97년 6월까지도 대출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문서를 보냈기에 역시 조단 사건과 무관하게 계속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05년 재판에서 조단 사건을 포함시켰을 때, 세이프척에 대한 성추행 혐의 진술이 이제껏 없어서 판사가 세이프척을 증인에서 제외했던 상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세이프척의 증언은 쟁점이 된 적이 없다.

또한 이 대출은 마이클의 회사가 승인하고 진행한 것이며 새로 구입하게 될 집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는 일반적인 부동산 담보대출의 형식이었고 이자는 계속 지불하되 원금은 나중에 일시로 상환하는 방식이었다.[123] 그러나 97년까지 세이프척 가족이 원금상환을 하지 못하자 담보대출 요건 상 담보물인 세이프척의 집을 마이클이 가져가는 방법 외엔 없었고 97년 6월의 마이클 회사의 채무 통보 이후 몇 달이 더 지나서도 세이프척 가족이 원금상환을 하지 못하자 97년 11월이 돼서야 세이프척 가족이 살고있던 집을 차마 가져가진 않겠다고 결정하며 담보해제를 해준 것이 실제 내막이다. 세이프척의 집이 마이클에게 필요할 리도 없었다. 또한 93년에 조단 사건이 진행중일 때 세이프척 가족이 원금상환 기간을 연장한 기록도 있어 그들 주장대로 증언 대가라면 이때 마이클이 왜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냥 연장만 해줬으며 97년에 다시 대출관계를 확인하는 서류까지 보냈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참고 영상)

이렇게 대출의 시작도 진행도 조단 사건과 시기적으로 무관하며 최후 통보 후 바로 해제해준 것도 아니기에 집을 사주려는 의도는 애초부터 진행과정까지 없었으며 세이프척 가족의 상환 불능 상황에 따른 원만한 사고 처리였을 뿐이다. 실제로 05년에 TMZ 매거진의 Harvey Levin과의 인터뷰에서 세이프척의 어머니는 마이클이 집을 사줬다는 루머에 대해 화를 내며 부정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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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5월에 세이프척 가족의 요청으로 대출계약을 했고 97년 6월에도 대출조건이 그대로 임을 확인하는 마이클 회사의 문서

[ 주장 ] 롭슨 : 롭슨 가족의 90년 첫 미국여행에서 네버랜드에 초대받아 처음 며칠을 네버랜드에서 보냈고 이후 가족들이 그랜드 캐니언 관광을 가려할 때, 롭슨은 가족과 함께 가려했지만 마이클이 자기랑 같이 네버랜드에 있어달라고 부탁해 가지 않았고 가족이 떠난 뒤 롭슨이 마이클과 단 둘이 남았을 때 첫 성추행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다큐에서 롭슨의 누나 찬탈과 할머니도 롭슨이 혼자 네버랜드에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조이는 그랜드 캐니언에 간 후 아들이 걱정돼서 마이클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으나 마이클이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FACT] 조이는[124] 롭슨을 포함한 온 가족이 그랜드 캐니언에 갔음을, 93년 챈들러건과 롭슨의 마이클 재단을 상대로 한 16년 재판에서 두 번이나 동일하게 증언했다. 또한 브랜다 리치도 당시 마이클과 함께 네버랜드에 있었다고 밝히며 롭슨 가족이 다 함께 그랜드 캐니언에 갔었다고 했다.( 관련 기사)
[롭슨 가족의 의도적인 거짓말 정황] 롭슨은 12년의 회고록 초안 <Tell-All>( 1, 2)에 그랜드 캐니언 일화 적음 [125] → 13년 고소장에서 그랜드 캐니언 일화 스스로 삭제함[126] → 롭슨은 16년 재판에서 어머니 조이 롭슨의 그랜드 캐니언 일화 부정하는 증언 직접 들음 → 이미 조이 롭슨의 증언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확인됐고 롭슨도 삭제했던 그랜드 캐니언 일화를 <리빙 네버랜드>에서 롭슨 가족이 다시 사용[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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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니언에 온가족이 갔음을 밝힌 조이 롭슨의 93년과 16년 증언, 롭슨의 회고록과 그랜드 캐니언 일화를 스스로 삭제한 13년 고소장.

[ 주장 ] 롭슨: 마이클이 한 짓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학대주장은 모두 내 기억이다) - 13년 5월 <Today Show>
[FACT] 롭슨은 성학대 인식 주장 이후에도 기억을 못해 어머니에게 물어보고 있었으며, 재판 중 말을 바꾸거나 자신이 한 말 조차 기억못하곤 했고 심지어 '기억이 진화한다'는 말까지 했었다.[128]
16년 재판부는 [129] 롭슨에게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의 증거제출을 명령했고 이에 롭슨이 응하지 않아 나중에 강제 공개됐을 땐 롭슨의 삭제에 의해 이미 유실됐거나 기술적으로 복구 불가능한 것들이 많아 일부만 공개됐다. 그런데 공개된 메일들은 롭슨이 어머니 조이 롭슨에게 네버랜드에서의 첫 날 밤과 첫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첫 미국여행에서 어떻게 마이클과 만났는지, 마이클이 자기들에게 준 물질적/경제적 지원과 선물이 뭐였는지 등을 물어보는 내용으로, 롭슨이 재판 내내 자신의 기억에서 나온 진술인 양 했던 것들이 사실은 외부 정보로 재구성[130]됐을 수 있으며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다던 롭슨이 실은 기억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파일:롭슨 이메일5.png
12년 5월 성학대 인식주장 이후 8월에, 마이클 관련 많은 세부사항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한다며 어머니에게 묻고 있는 롭슨.
실제로 롭슨의 12년 회고록엔 가족들의 그랜드 캐니언 관광 때 첫 성추행 당한 내용이 등장하다가 13년 고소장에선 없어진다.(윗단락 참조)
[FACT] 심지어 조이는 상황을 묻는 롭슨에게 여러 버전을 만들었단 답장을 보냈으며, 롭슨은 어머니에 의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 찰리의 주장도 자신의 학대 주장에 사용했고 마이클 루머 싸이트의 주소를 메모했다.
롭슨이 네버랜드 첫 방문에 대해 물어보자 조이가 "내가 그동안 만든 여러 버전이 있는데 그중에서 너에게 유리한 걸로 알려줄게"라고 답장한 메일도 발견되었다. 또한 14년 6월에 롭슨에 대한 상세한 성추행 의혹 시나리오가 있는 마이클 루머 싸이트 <mjfacts.com>의 주소를 자신의 이메일로 보내 메모한 것도 드러났다. 16년 12월 12일자 재판에서 이에 대해 추궁 당하자 롭슨은 링크를 보낸 것은 인정하지만 왜 그랬는지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으며 그 사이트에 들어가 본 적도 없고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며 자신까지 포함해 전면 부정했다.
또한 마이클 루머 싸이트에서 흔히 발견되는 롭슨에 대한 찰리 마이클스의 94년 증언을 16년 2월에 어머니 조이에게 메일로 보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고, 이에 조이가 "와우,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야"라고 답장했으나[131] 롭슨은 이를 무시하고 9월 수정된 고소문에 찰리의 주장을 그대로 담은 것도 밝혀졌다. 게다가 94년 찰리의 증언은 정작 어머니 조이의 05년 재판 증언에 의해 신빙성이 떨어진 것이다.[132] 조이가 증언한 05년 5월 6일자 재판 문서 참고.
파일:롭슨메일.여러버젼.사실아냐.jpg
(좌) 여러 버전이 있다며 그중 롭슨에게 유리한 것을 알려주겠다는 조이 (우) 찰리의 증언에 대해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답장한 조이.

[ 주장 ] 롭슨: 마이클 회사는 아동 성노리개 대상을 모집하기 위해 댄스대회를 주최했으며, 마이클은 87년 댄스대회를 통해 자신을 타겟으로 선택했고 자신을 성착취 하기 위해 롭슨 가족에게 이민을 유도했다. 이민 후 마이클은 자신을 곁에 두며 집착했고 마이클의 그루밍에 의해 마이클과 같은 복장을 입게 됐으며 원치않는 트레이닝을 하게 됐고 자신의 진로까지 조종 당했다. 또 마이클은 물질적 유혹으로 롭슨 가족까지 길들였고 자신의 성학대를 느낀 듯한 아버지가 자살에 이르는 등 우리 가족은 불행해졌다. ( 기사)
[FACT] 롭슨이 87년에 참가한 댄스대회는 펩시, Target, CBS 레코드사에서 주최한 것이므로 마이클의 회사와 관련이 없다.
【설명 더보기】
【롭슨은 마이클의 회사 <MJJ Productions>과 <MJJ Ventures>를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아동 성학대 조달 및 촉진 단체' 그리고 마이클의 개인비서였던 노르마 스타이코스(Norma Staikos)는 이러한 역할을 보조하는 마담이었다고 주장하며, 롭슨이 우승했던 87년 댄스대회 역시 이 회사들이 주관했고 마이클이 이런 식으로 아이들과 인연을 맺은 뒤 돈과 달콤한 꾀임으로 유인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87년 해당 댄스대회를 주관한 것은 펩시, Target 그리고 CBS 레코드사이며 <MJJ Ventures>는 91년에 세워진 회사라 87년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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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시, Target, CBS 레코드사가 87년 댄스경연 대회를 주관
[FACT] 16년 재판에서 어머니 조이 롭슨은, 미국 이민은 롭슨의 아버지 데니스가 처음 제안했고 이후 조이가 먼저 마이클에게 이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음을 증언했다. 또한 조이는 91년 9월에 LA로 이민온 뒤 첫 18개월간 마이클이 대부분 LA밖에서 시간을 보내 힘들었다고 95년 인터뷰에서 밝혀 이민 후 마이클이 집착했다는 롭슨의 주장 또한 사실이 아니다. - 16년 9월 30일자 재판 문서 참고.
【설명 더보기】
【롭슨은 90년 미국 방문 후에 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도 마이클이 본인을 곁에 두고 성추행하기 위해 마이클의 개인비서와 회사가 마이클이 롭슨을 몹시 보고 싶어한다는 구실로 롭슨 가족을 먼저 끌어들였기 때문이라 주장하며, 다큐에서 롭슨의 가족 또한 마이클의 이민 제안으로 자신의 가족이 망가졌다며 진술했었다. 그러나 16년 롭슨의 마이클 재단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조이는 이민을 제안한 건 마이클이 아니라 조이의 남편인 데니스가 아들의 미래 커리어를 위해 처음 아이디어를 냈다고 진술했으며 그 후 조이가 마이클에게 이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마이클은 마이클의 회사 <MJJ Ventures>를 통해 제 3자에게 도와주도록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래는 17년 12월 19일자 재판 판결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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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을 제안한 사람은 아버지 데니스이며 마이클에게 접촉하고 도와달라고 한 사람도 모두 롭슨의 어머니
[FACT] 롭슨은 87년 첫 만남부터 스스로 마이클 복장을 입고 있었고 이후 마이클 커버 댄스를 하며 호주에서 활동했었기에 그루밍에 의해 마이클 흉내를 내게 됐다는 롭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첫 만남 이후 마이클에게 3년간 편지와 비디오를 보내며 접촉을 시도한 쪽은 롭슨 가족이었으며 그들은 마이클에게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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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첫번째 만남 : 댄스대회 특전 단체미팅, 처음부터 마이클의 'Bad' 복장을 입고 나타난 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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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0년 미국방문 전 : 마이클에게 3년간 답장받은 적 없으며, 조이가 <MJJ Productions> 연락처를 알아내 녹음실 방문. 이 기간에 롭슨은 마이클 복장으로 호주에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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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두번째 만남 : 녹음실에서 한 시간 반 짧은 미팅, 이때도 롭슨은 마이클 복장을 스스로 입고 나타남.
[FACT] 심지어 조이는 91년에 LA로 이민 온 후 네버랜드에서 롭슨이 마이클을 만난 건 지난 14년간 4번뿐이었다고 05년 재판에서 증언했다. 또한 마이클의 직원이자 유모였던 Grace Rwaramba도 94년 말 롭슨의 앨범 발매 축하파티 이후로 97년까지 롭슨을 본 적이 없다고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133]
A: My memory is in the entire time we’ve lived here since 1991, we’ve only been at the ranch with Michael on four occasions in 14 years.
A: 우리가 여기 살게 된 91년 이후 내 기억은 네버랜드에서 마이클과 만난 건 14년 동안 4번이란 거에요.
Q: Four occasions?
Q: 네번요?
A: Every other time we’ve been here without him.
A: 그 외 모든 시간은 마이클 없이 우리끼리 여기서 지냈어요.
Q: Would that be the same for your son?
Q: 당신 아들도 같나요?
A: Yes.
05년 5월 6일자 조이 롭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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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다큐에선 같은 장면의 사진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다수가 롭슨이 91년에 이민오기 전에 한 번 투어 무대에 선 것과 스튜디오 방문 사진이며 이외에 브랜디와 함께 한 광고촬영과 무대방문 사진 등이 나오고 이렇게 몇 차례의 장면들 외엔 마이클과의 개인적인 사진이 거의 없다.
[FACT] 또한 마이클이 아니라 대부분 롭슨 쪽의 요청이었던 것도 드러났다. 조이의 부탁으로 롭슨이 마이클의 <Jam>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게 되었고 조이는 롭슨을 Dangerous 투어에 데려가달라고도 부탁했으나 마이클은 거절했다.
조이는 마이클이 롭슨보다 브렛 반스나 맥컬리 컬킨과 같은 다른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고 자기 아들이 이들에게 살짝 밀려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92년 마이클의 <Jam> 뮤직비디오에 아들을 출연시켜 달라고 한 사람도 본인이며 이것은 실제로 성사가 됐지만 이후 Dangerous 투어에도 마이클이 롭슨을 데려가주길 바랬는데 마이클은 그러지 않았고 대신 투어 중에 전화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이것도 끝내 지키지 않아 6개월 간 마이클과 연락이 완전히 끊긴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FACT] 조이는 롭슨이 5살 때 부터 연예계 활동을 원했다고 증언하여 롭슨의 진로는 그들 스스로 진행해오던 것이었음을 밝혔으며, 마이클은 조이에게 롭슨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너무 일을 시키지 말아달란 말을 했었다고 증언했다. - 조이 롭슨의 16년 9월 30일 법정기록 114, 245 페이지 참고.
95년 롭슨 가족의 미국 생활에 대한 Variety Today의 기사를 보면 당시 롭슨은 매일 오후 3시부터 7시 사이에 3~4회의 오디션을 하고 있었고 이 모든 활동은 어머니 조이가 관리한다고 나와있다. 또 조이의 11년 팟캐스트 방송과의 인터뷰를 봐도 조이는 "롭슨과 찬탈은 매 주 주말과 방학마다 일을 했고 생일 파티와 크리스마스 파티도 무대 뒤에서 했으며, 여기에 후회 없습니다."라고 밝히고 있어, 롭슨의 과한 트레이닝과 진로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 조이였고 마이클은 조이의 이러한 방식을 우려했었다.[134] 또한 위 인터뷰에서 롭슨은 마이클과 별로 일을 한 적이 없었다고도 밝히고 있어 14년 동안 네버랜드에서 4번만 만났다는 위 진술들과 더불어 당시 롭슨 가족의 생활은 마이클과 대다수 분리되어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FACT] 조이는 남편 데니스가 99년에 약을 복용하는 걸 알았지만 무슨 약인지 물어보지도 않았으며 데니스는 가족의 무관심에 분노했었고 조이 스스로도 데니스에 대한 무관심이 문제였다고 진술했었기에 아버지의 자살은 마이클과 관련없는 롭슨 가족 내부의 문제였다. - 조이 롭슨의 16년 9월 30일 법정기록 208 페이지 참고.
롭슨은 16년 9월 9일의 4차 수정 고소장에서 아버지의 자살은 자신의 성학대를 느낀 불안과 두려움 때문인 것처럼 암시하였다. 그런데 91년에 조이는 웨이드와 찬탈만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왔고 아버지 데니스와 형 웨인은 호주에 남아있었으며 데니스가 양극성장애(조울증)로 고통받다가 자살[135]한 년도는 롭슨의 첫 성학대 인식 주장으로부터 십년 전인 02년이다. 따라서 같이 살던 가족은 물론 롭슨 스스로도 인식 못하던 것을 떨어져 살던 아버지가 눈치챘을 거란 암시는 현실적으로 무리이다. 게다가 어머니 조이의 16년 재판 증언을 보면 마이클과 관련 없는 그들 가족 내부의 문제였음이 드러난다. 조이는 99년에 남편 데니스가 약을 복용하는 것을 알았지만 무슨 약인지 물어보지 않았고 이후 나아졌는지 확인하거나 다시 그 약에 대해 물어본 적도 없었으며, 데니스는 가족들의 무관심에 분노했었고 조이 스스로 데니스의 컨디션에 관심이 가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FACT] 조이는 13년 아들 롭슨의 성학대 고백 이후로도 꾸준히 마이클 관련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러왔음이 밝혀져 다큐에서 마이클 때문에 아들과 자신의 가족이 망가졌다며 원망하던 모습과 모순을 보인다.
롭슨은 13년 5월에 어머니 조이 롭슨에게 마이클에게 성학대 당했음을 고백했다고 다큐와 16년 재판에서 일관되게 말했고, 조이도 다큐와 증인으로 출석한 재판에서 동일한 말을 했었다. 그런데 13년 5월 이후로도 조이가 인스타그램 마이클 관련 게시물에 꾸준히 좋아요를 눌러온 것이 드러나 아들의 가해자를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라고 하기엔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조이는 좋아요를 취소하고 자신의 계정을 비공개로 돌렸으나 그전에 영상으로 기록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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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롭슨은 아들이 성학대를 고백한 13년 5월 이후로 꾸준히 마이클 관련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다. 출처영상

[ 주장 ] 롭슨: 마이클은 'Love'의 문구가 자주 들어간 팩스 메시지로 자신을 길들였고 은밀한 관계를 암시하는 듯한 내용도 있었다.
[ 반박 ] 팩스는 롭슨 가족 전체가 볼 수 있었던 은밀하지 않은 메시지 수단이며, 대부분의 메시지는 '넌 최고의 댄서야' 등의 응원 멘트이고 마이클은 어머니 조이와 누나 찬탈에게도 'Love'의 문구를 썼으며, 마이클이 롭슨한테 쓴 표현은 조카 타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한테도 쓰던 표현이므로 이는 감독이 마이클의 언어습관과 다른 이들과의 메시지를 전혀 교차검증하지 않음으로써 만든 왜곡이다. 감독은 영국 채널4 방영분에서 팩스 장면을 삭제했다.

팩스엔 어떠한 성적인 문구나 강압적인 내용이 없다. ( 팩스 보기) 하지만 다큐에선 마이클이 롭슨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에 주목하며 특히 "Make me happy little one and be the best. I love you"의 메시지가 은밀한 의도를 암시한 것처럼 문제 삼았다. 그런데 다른 팩스 메시지들을 보면 마이클은 롭슨을 역시 'little one'으로 칭하며 "넌 최고의 댄서야!", "넌 나에게 영감을 줘", "난 너가 그 어떤 아메리칸 아이들보다도 더 훌륭한 랩과 댄싱을 하면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세상을 충격에 빠트리는 걸 보고 싶어.", "난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알아", "항상 나의 친구가 돼 줘서 고마워" 등의 응원하는 말을 하고있는 걸 볼 수 있다. 또한 마이클은 롭슨의 어머니 조이에게도 "조이, 자전거 가격이 얼마인지 팩스로 보내줘. 넌 정말 좋은 엄마야", "조이, 무엇이든 도울 수 있다면 할게. 사랑하고 항상 행복해" 등의 메시지를 보냈었고 롭슨의 누나 찬탈에게도 'I love you'라고 적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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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이 성인 지인과 다른 남녀 아이들에게 남긴 메모들에도 "I love you so much" "make me so happy" 등의 롭슨이 받은 메시지와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이렇게 마이클은 남녀노소 구분없이 다정한 글을 곧잘 남겼을 뿐이고 은밀한 의미도 아니며 롭슨만 특별한 예도 아니다.
또한 다큐는 롭슨 가족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거실이 팩스 메시지들로 뒤덮여 있었다며 이것도 특별히 집착한 그루밍으로 연결지었다. 그러나 16년 9월 30일자 재판에서 조이는 팩스 양이 갑자기 많아진 것은 롭슨 때문이 아님을 증언했다. 마이클이 처음엔 팩스를 사용할 줄 몰라 그의 비서였던 노르마를 통해 대신 보내다가 나중에 직접 보내는 법을 알게됐고 그때부터 팩스를 혼자서도 보낼 수 있단 생각에 신나서 여러 사람들한테 마구 보냈다고 증언한 것이다. 게다가 보다시피 팩스는 거실에서 온가족이 볼 수 있었고 제 3자인 비서를 통해서 보내기도 했으니 이를 은밀한 의도로 연결짓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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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마이클이 조이에게 보낸 팩스: 'Love'의 단어,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면 언제든 주저말고 말하란 내용. ② 마이클이 롭슨에게 보낸 팩스: 넌 최고의 어린이 댄서야, 롭슨의 누나 찬탈에게도 'I love you, too' ③ 마이클이 조카 타지에게 보낸 편지: 'Love' 문구
마이클이 서로 다른 세 사람에게 보낸 메시지엔 모두 같은 'Doo Doo'란 표현이 등장한다.
마이클의 조카 타지는 반박다큐 <Neverland Firsthand>에서 <리빙 네버랜드>에선 마이클에 대한 정보를 전혀 다루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롭슨이 받은 것과 비슷한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수백은 되며 이는 마이클이 흔히 쓰던 응원하는 내용들이라고 말했다. 타지는 사랑한다는 말이 적힌 마이클에게서 받은 편지와 메모들을 공개했고 자신의 편지에 적힌 'Doo Doo'의 표현이 롭슨이 받은 메시지에도 등장하는 것을 지적했다. 타지의 설명에 의하면 마이클은 'Little one, Apple head' 등의 별명으로 부르길 좋아했고 마이클 자신이나 주변인을 'Doo Doo'[136]라는 별명으로 칭하곤 했다는 것이다. 'Doo Doo' 는 숯검뎅이와 Duty(의무, 책임)가 섞인 말로 책임지는 검은 사람, 돌보는 사람의 의미 쯤 된다고 한다. 즉, 롭슨한테만 특별한 문구들이 아니라 마이클의 언어습관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마이클은 'I love you'란 말을 즐겨했으며 절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위해 만든 노래 제목도 'Elizabeth I Love You'이다.

이 외에도 다큐에선 마이클이 롭슨에게 보낸 생일축하 메시지 영상도 그루밍의 단서이자 롭슨과의 특별한 관계를 증명하는 것인 양 암시했으나 마이클이 다른 아이들 및 지인들에게도 이러한 영상들을 보냈었고 그 내용도 롭슨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드러나서 역시 교차검증을 하지 않은 왜곡 임이 밝혀졌다. 또한 그 영상의 내용들엔 어떠한 성적인 문구도 없으며 일반적인 다정한 응원하는 내용 임에도 다큐에서는 근거없이 성적인 뉘앙스로 연결시키는 논리적 비약을 보였다.
[ 주장 ] 롭슨 : 마이클은 녹음실 옆에 자신의 방(own room)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방에서 자신을 수도 없이 성추행했다.
[ 반박 ] 마이클과 녹음실에서 함께 일했던 스튜디오 엔지니어 브래드 선버그는 녹음실 옆 방은 녹음실에서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 보이던 곳이고 늘 방문객들로 붐볐던 공용 공간이기에 그곳에서 몰래 성추행이 일어나기란 불가능하며 롭슨은 마이클과 단 둘이 있었던 적도 없었고 한 두 번 가족과 방문한 게 전부라고 밝혔다.
롭슨은 마이클이 녹음실 옆에 그의 방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을 그 방에 두고 녹음 중간에 성추행을 하러 왔었다고 고소장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18년 동안 마이클의 녹음실 엔지니어로 일했고 네버랜드의 음향설비를 설치하기도 했던 스튜디오 엔지니어 브래드 선버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늘 녹음실에서 마이클과 함께 있었다고 밝히며, 롭슨은 가족과 함께 한 두 번 방문한 게 다이고 마이클과 단 둘이 있었던 적도 없었으며 방문했을 때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도 이상한 점도 없었다며 롭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한 녹음실 옆 방은 녹음실에서 고개만 들면 바로 방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리창이 녹음실을 마주보며 설치되어 있던 밀폐되지 않은 곳이고 당시 녹음실엔 항상 많은 스텝들이 있었기에 그들 아무한테도 목격되지 않고 롭슨이 주장하는 수도 없이 많은 성추행이 일어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롭슨 가족의 방문 때 마이클은 작업 중이었고 롭슨은 모니터나 TV를 보다가 돌아간 게 전부였다고 밝혔다.

또한 브래드는 마이클은 녹음실에서 스텝들과 함께 밤낮없이 일하곤 했었고 스텝들의 가족이 언제고 녹음실을 방문하게끔 하고 정기적으로 패밀리 데이를 운영하며 특별히 준비한 요리를 동료들에게 대접하는 등 개방적이고 가족적인 분위기로 녹음실을 운영했으며, 녹음실 옆 방은 바로 그러한 가족들과 마이클의 방문객들이 수 없이 드나들고 스텝들이 쉬기도 하던 공용 공간이기에 롭슨이 그 방을 마이클의 개인적인 방인 양 "own room"으로 묘사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브래드는 롭슨 가족은 그런 방문객들 중 하나였을 뿐 다른 특이점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롭슨의 첫번째 스튜디오 방문은 위에 기술된 90년에 스튜디오 엔지니어와 사진사가 함께 있던 방에서 롭슨 가족이 가져온 롭슨의 댄스 비디오를 관람한 한 시간 반 짜리 미팅이고 나머지 한 번도 가족들 포함 여럿이 있던 방에서 TV를 보다가 돌아간 일이니 두 상황 모두 함께 있던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성추행이 일어나기란 현실적으로 무리이며, 이 두 번 외에 당시 녹음실에 있던 수 많은 사람들 중 롭슨을 목격했다는 이가 없으며 롭슨도 다른 녹음실 방문 일정을 제시하지 못했다.[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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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마이클의 녹음실 옆 방에서 성추행 당했다고 적혀있는 롭슨의 고소장
(우) 롭슨의 주장을 반박한 스튜디오 엔지니어 브래드 선버그 - <Neverland Firsthand>

[ 주장 ] 롭슨: 마이클이 자신과 곁에 있고 싶어해서 처음 방을 같이 쓰게 됐고 고소장에서 마이클의 방엔 누군가 접근하면 울리는 경보장치[138]가 있으며 마이클이 방에 있을 땐 아무도 못 들어가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 반박 ] 어머니 조이 롭슨은 마이클에게 자신이 먼저 '롭슨이 함께 자고 싶어하는데 괜찮겠냐'고 부탁했고,[139]초대한 적 없으며, 네버랜드에 게스트 하우스가 있지만 아이들은 늘 자기와 같이 있길 바라곤 했고 간혹 아이들이 같이 있고 싶다고 부탁하면 마이클은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으라 말했고 부모님이 괜찮다고 해야 아이들을 받아줬으며 그런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고 먼저 밝힌 바 있다. 또한 이런 경우들은 90년대 초의 과거에 주로 있었던 일이었고 05년 재판에서 당사자들의 증언으로 마이클의 말이 입증되었다.

마이클에게 암치유 병원비를 지원받았던 개빈 또한 05년 3월 14일자 재판에서 네버랜드를 방문한 첫 날에 자신이 먼저 침실에서 자게 해달라고 마이클에게 부탁해 단 하루 머물렀었고 당시 개빈의 어머니도 원한 것이었으며 마이클은 바닥에서 비서 프랭크와 따로 잤고 본인은 형제 스타와 함께 침대에서 잤다고 증언했다.( 1/ 2) 이와 관련해 개빈의 부탁에 당혹스러워하던 마이클이 프랭크도 같이 머물도록 제안했다는 프랭크의 진술도 있다. 또한 당시 침실엔 마이클의 자녀도 함께 있었으며 과거의 다른 아이들의 경우에도 여러 사람이 함께 있던 경우들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침실에 관한 증언 및 진술 모음 참고.] "마이클의 방에 언제 어느때든 제한없이 드나들었다" 조이와 누나 찬탈까지 동일하게 05년 재판에서 증언했다.
- 조이와 찬탈의 05년 5월 6일자 증언 문서 참고.
Q: Did you go into Mr. Jackson’s room at all hours of the day?
Q: 잭슨 씨의 침실에 온종일 드나들 수 있었습니까?
A: At any time I wanted to, yes.
A: 네. 언제든 드나들었어요.
Q: Did you ever get the feeling that somebody was trying to keep you out of Mr. Jackson’s room?
Q: 잭슨씨의 침실에 당신을 접근못하게 하려는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A: No.
A: 아니오
05년 5월 6일자 조이 롭슨 증언
웨이드의 누나 찬탈은 93년 CNN 인터뷰에서 당시 8살이던 웨이드와 당시 11살이던 자신이 함께 침대를 썼으며 그건 만화책 보다가 잠드는 그런 상황이지 의도적인 것이 아니며 동생에게 아무런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밝혔고, 05년 재판 때도 이와 동일한 증언을 했다. 또한 전기작가 마크 스몰콤은 롭슨은 이때 당시 누나와 함께 있거나 챈들러, 맥컬리 등과 함께 어울려서 마이클과 단둘이 있은 적이 없다고 기사에서 말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롭슨의 주장은 가족들의 증언과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 롭슨의 주장이 사실이 되려면 마이클이 롭슨뿐만 아니라 조이와 찬탈에게도 허위진술을 강요했고 이들이 이에 굴복해 억지로 증언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하는데, 마이클이 무죄 판결을 받은 날 조이는 분명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기뻐서 울고 소리 지르고, 또 울고 소리 질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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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에게 자신이 먼저 부탁했음을 밝히는 05년 조이 롭슨의 법정 증언

  • 16년 재판에서 학대사실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면서도 23살 성인이던 05년에 왜 증언했는지 심문 중에
    [ 주장 ] 롭슨: 12년 5월에 처음 성학대를 인식하기 주장 전까진 잘못된 건줄 몰랐었기에 05년 증언때 수치심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 모순 ] 조이 롭슨: 13년 이후에 롭슨에게 05년 증언에 대해 물어보니, 수치스러워서 마지못해 했다고 대답했다.
조이 롭슨의 위 진술은 13년 이후에 생성된 것으로 05년 당시를 포함 롭슨의 12년 성학대 인식 주장 이전에는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말이다. 조이 롭슨은 16년 재판에서, 롭슨이 자신에게 성학대 사실을 처음 알린 13년 이후에 롭슨에게 05년 재판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고, 이때 롭슨이 '증언하는걸 원하지 않았지만 진실을 알리기엔 너무 수치스러워 마지못해 했다' 이렇게 답했다며 증언했다. 05년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음이 소송 기각 사유를 피할 수 있는 답변이었으나 (69번 주석의 소송기한 만료 기각사유 설명 참조) 16년 재판에서 아들 롭슨 편에 섰던 어머니 조이의 증언에 의해 롭슨의 주장에 모순이 생긴 것이다. 한편 롭슨은 이 사유가 아닌 11년에 이미 마이클 재단을 알고있었음으로 인해 소송이 기각됐고 이후 <리빙 네버랜드>에서는 조이가 말한 05년에 수치스러워 했단 일화가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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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슨 증언: 05년에 잘못된 것인지 몰랐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롭슨과 모순되는 조이 증언: 롭슨이 수치스러웠다 말했다.

[ 주장 ] 롭슨: 12년에 성학대를 깨달은 후 17년까지 충격으로 어떠한 연예계 활동도 할 수 없었기에 손해보상(1조7천억)이 필요하다. 주장
[FACT] 12년 이후로도 롭슨은 안무가 활동, 댄스 강습, 단편 영화 제작 등 연예계 활동을 계속 했다.
롭슨은 학대를 인식한 후 자꾸만 그 기억이 떠올라 더 이상 춤을 출 수도, 음악을 만들 수도, 영화를 볼 수도 없었고 또 연출도 하지 못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손해보상 차원에서 소송을 제기했고 꾸준한 치료로 17년에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나서야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 시기에 롭슨은 <Blake McGrath> 팀의 뮤직비디오 안무를 짜고 다이렉팅했으며 댄스 단편 영화 < Life in Color>와 < Flight>도 만들었고 자신의 댄스 강습을 SNS에 홍보하기도 했으며 또 14년에는 하와이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회사까지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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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에 자신의 댄스 강습을 SNS에 홍보하고 있는 롭슨.

롭슨과 세이프척 증인의 신뢰성 문제 - 증언 모순과 금전 댓가로 문제가 됐던 인물들
심지어 세이프척의 사촌은 자신도 같이 있었다며 세이프척의 주장을 부정하는 트윗을 올렸었고, 롭슨의 다큐 촬영에 참여했던 사운드 엔지니어는 롭슨이 자신에게 마이클에 대한 칭찬만 말하다가 다큐 감독 댄 리드의 카메라가 돌기 시작되자 태도가 돌변했고 마치 연기자 같았으며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언론인 John Ziegler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현재 롭슨 측의 증인으로 알려진 인물들은 앞서 언급한 찰리 마이클스 외에 블랑카 프란시아( 제이슨 프란시아 문서 참고), 마크 퀸도이가 있는데 이들의 신뢰성에도 의문점이 있다.

마크(Mariano “Mark”) 퀸도이(Ofelia Faye "Quindoy")는 89~90년까지 네버랜드에서 일했던 필리핀 변호사 출신으로 관둔 후에 마이클에 대한 좋은 말만 인터뷰하다가 93년 조단사건이 터진 직후 갑자기 "90년 2월에 쇼핑을 끝낸 마이클과 롭슨을 뒷좌석에 태우고 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백미러를 보니 마이클이 롭슨의 성기 부위를 만지며 얼굴에 키스를 하고 있더라."란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그전엔 한번도 언급한 적 없던 것으로 마크 퀸도이 부부의 태도 전환이 너무 급작스러워서 심지어 영국의 타블로이드지 <The Sun>의 알랜 홀 기자는 92년에 마크 퀸도이가 우리와 인터뷰를 했을 땐 마이클은 아이들에게 친절한 사람이라는 오직 좋은 말만 했었다며, "마크 퀸도이는 믿을 수 없다. 난 그들이 마이클에게 거액을 받아냈을 거라고 생각한다"라는 까지 했을 정도였다. 마크 퀸도이는 이런 충격적인 주장을 수사당국에는 알리지 않고 오직 타블로이드 언론사와 인터뷰만 했는데 이들과 만났던 언론인인 다이앤 디몬드와 스튜어트 화이트는 94년 < Tabliod Truth>에서 이들이 인터뷰 대가로 25만 달러에서 최대 90만 달러까지 요구했었다고 밝혔다. 나중에 수사당국이 왜 자기들에게 알리지 않았냐 물었을 때 이들의 대답은 "우린 그냥 목격자지 피해자가 아니니까요"란 법조인 출신이라곤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한편 당시 퀸도이의 조카이자 법조계 학생이었던 글렌 베네라시온은 마크 퀸도이를 돈을 노리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며 만약 재판이 열린다면 이들의 반대증인으로 출석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140]
파일:토니 세이프척2.png
세이프척 학대인식 주장 5개월 뒤 올라온 사촌의 메시지: "나도 같이 있었어. 다 헛소리야."

한편 세이프척의 학대인식 주장 후 5개월 뒤인 13년 10월에 세이프척의 사촌인 토니 세이프척은 자신도 함께 있었다며 다 헛소리라는 트위터 메시지를 올려 세이프척의 주장을 전면 부정했다. 게다가 다큐 촬영에 함께 했던 인물의 반박 진술까지 나오고 있다. 18년에 다큐 감독 댄 리드가 촬영했던 롭슨의 댄스 클라스 강습을 위해 고용됐었던 사운드 엔지니어 Kevin Lipsey는 롭슨과 감독 댄 리드의 모습이 찍힌 다큐에서 편집된 미공개 장면의 영상을 공개하며 롭슨이 촬영 당시에 다큐에서 나온 내용과 다른 말을 했고 거짓이라고 밝히는 페이스북 을 올렸다.( 메시지) 이후 언론인 John Ziegler와의 19년 6월 9일자 인터뷰에서 케빈은 촬영 당시 롭슨에게 마이클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었고 롭슨은 아주 좋았다며 오직 마이클을 칭찬하는 말만 자신에게 했는데 댄 리드의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자 롭슨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비밀스럽다는 말을 했고 그러한 롭슨의 태도가 연기자 같아서 당시 의아하게 생각했었다고 밝혔다. 케빈은 나중에 다큐가 공개된 후에 비로소 카메라 앞에서만 롭슨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를 알게 됐고 롭슨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141]

또한 롭슨과 함께 살았던 가까운 친구이며 브리트니 스피어스, 카일리 미노그 등과 작업했던 댄서 댄 카라티(Dan Karaty)도 롭슨과 함께 네버랜드에서 마이클과 만났다고 밝히며, 자신이 롭슨과 같이 살던 집에 마이클이 전화하곤 했으나 댄서로서 영감을 주는 대화 외엔 없었으며 식사 자리에서도 마이클은 오직 우리의 꿈과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며, 롭슨의 주장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다. 또 롭슨의 11~12살 때 함께 "Quo"라는 이름의 듀오 활동을 하며 94년에 MJJ 프로덕션을 통해 "Kaos"[142] 앨범을 냈고 현재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중인 DeWayne 페이스북 을 통해, 함께 리허설을 하며 롭슨과 밀접하게 지냈었고 당시 롭슨과 롭슨 가족은 좋은 시간을 보냈으며 마이클이 자신에게 어떠한 행동을 한 적도 없고 롭슨과 자신 모두 마이클 덕분에 커리어를 만든 사람이라고 언급하며 마이클에 대한 기억은 그는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뿐이라고 밝혔다. 이 외에도 롭슨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비판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는 실정이며[* 05년 재판 증언 때 롭슨과 만났으며 이후 마이클과도 일했던 Jason Eisberg는 롭슨이 이전부터 마이클이 자신에게 일을 제의했다는 식의 마이클을 이용해 자신을 포장하는 거짓말을 해왔던 사람이고 마이클 재단에 구직을 거절당하자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비판글을 남겼고, 90년대에 롭슨과 함께 "Alley Cat Studios"에서 자주 춤을 추며 아동 댄서 활동을 했던 사람이 당시 롭슨은 마이클을 옹호하고 칭찬하기만 했다고 밝히며 롭슨은 마이클의 유명세를 이용해 성공했던 사람이고 마이클 사망 전까지 이득을 얻기위해 주변을 맴돌다가 사망 후 그의 커리어가 추락하자 필사적으로 돈을 얻기 위해 이러한 일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는 트위터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으며, 롭슨의 댄스강사 동료가 롭슨은 마이클에 대한 자랑만 수 없이 말했고 믿을 수 없다고 반박하는 #을 남기기도 했다.

또 롭슨에게 댄스지도를 받던 사람들이 강습 때 롭슨은 무례했으며 오디션을 이용해 아이들을 금전적으로 이용했고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을 남기기도 했으며, 롭슨이 댄스교습을 받던 어린 여학생들에게 불편한 신체적 접촉을 종종 했던 사람이기에 롭슨 자신이 성학대 피해자라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렇게 롭슨과 세이프척은 그들 주장을 반박하는 진술만 나오고 있고 그들 가족과 변호사, 금전 문제가 있는 증인 외에는 지지하는 주변인물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하는 사람들 -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 & 함께 생활했던 동료와 지인들
롭슨과 세이프척처럼 어린시절에 마이클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마이클의 결백을 주장하는 지지 메시지와 인터뷰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맥컬리 컬킨, 브렛 반스, 엠마뉴엘 루이스, 켈리 파커, 탈룬 자이툰, 브라이톤 제임스, 아론 카터, 존 레논의 아들인 션 레논, 가수 Nathan Cavaleri 등이 있으며 다른 이들의 지지 글도 올라오고 있다.

또한 롭슨이 마이클과의 인맥을 이용해서 브리트니 스피어스, 저스틴 팀버레이크, 프린스와 알게된 후 불륜관계로 그들을 배신한 걸 폭로하며 롭슨은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의 커리어는 스스로의 과실로 망친거라고 비판한 MJJ 음향감독 Clyde Jenkins #, 롭슨의 스튜디오 성추행 주장을 반박한 스튜디오 엔지니어 브래드 선버그, 마이클은 항상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다큐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인터뷰한 전 경호원 매트 피데스, 마이클이 딸 니콜 리치의 대부이며 네버랜드를 자주 방문했었던 브랜다 리치( 라이오넬 리치의 부인), 마이클은 이성애자였으므로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고 반박한 마이클과 70년대에 교제했었던 Stephanie Mills, 27년간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카렌 페예, 마이클의 직원이자 자녀들의 유모로써 네버랜드에서 지냈던 Grace Rwaramba, 댄서였던 LaVell Smith Jr., 음악작업을 함께 한 Thomas Bahler, 경호원 Bill Whitefield, 경호원 Kerry Anderson, 전속 의상 디자이너 마이클 부시, 헤어스타일리스트 Carol LaMere, 마이클의 드럼세션 조나단 모펫, 음악작업 동료 Jeff Wald, 안무가 Vincent Paterson, 프로듀서 Rodney Jerkins, 마이클의 친구 Mark Lester, 가수 셀린 디옹 #1 #2 , 다이애나 로스 등의 동료와 지인들도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다큐를 반박하고 있다.

이 외에도 마이클과 친분을 나눈 일반인 가족들의 지지와 진술도 잇따르고 있다.
95년부터 마이클과 교류했던 독일의 Schleiter 가족의 공개 서한 中 (19년 3월 4일)
"Enough is Enough"

진실을 모색하기 보다는 충격적인 헤드라인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우리를 이야기 꺼리로 만들고 싶어하는 미디어와 함께 살고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지난 수 년 간 인터뷰 대가로 25만 유로 이상의 금전을 제의 받았지만 마이클과의 기억의 가치는 돈으로 실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거절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마이클을 다시 한 번 아동학대자로 묘사하는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충격적인 뉴스에서 우리는 고통을 느끼며 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마이클은 어떠한 부적절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도 본 적 없으며 우리는 그가 그럴 수 있다고 의심 조차 하지 않습니다.

또한 독일의 타블로이드가 Anton(Schleiter가족의 아들)이 마이클과 동성애 관계를 가진 것으로 허위 보도했을 때 우리는 화가 났으며 심지어 우리 아버지가 전화로 언론과 이야기 하기를 거부하자 언론은 "아버지는 마이클을 지키기를 거부합니다"라는 왜곡 기사를 냈습니다. 우리는 언론이 얼마나 추악한 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떻게 가장 끔찍한 거짓말을 하는 지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마이클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사람들의 양면성을 경험했습니다. 마이클과 방에 있을 때, 그들은 가장 좋은 의도를 가진 것 처럼 호감가게 행동했지만 그러나 마이클이 고개를 돌리면 그들은 무례해졌고 결국 그들의 의도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뒤에 물러서 있는 수줍음 많은 독일 가족이었기에 그들은 우리 앞에서 그들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찰하고 있었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이클이 살고있는 세상의 어려움을 한 눈에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믿기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마이클은 선의에 대한 믿음으로 그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순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계속 이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계속 주었다는 것은 그 이상의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격한 마이클의 성격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그의 명성이나 돈을 원했던 사람들은 마이클을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그의 친절한 마음과 고양된 정신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돈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세계가 목격할 수 있는 유일성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영광을 가졌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음악, 그의 메시지, 창조적이고 천재적인 마음의 진실로 친절한 분을 말입니다. 그는 또한 훌륭한 스승이었으며 우리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고 놀라운 지식을 전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에 관해 우리가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배울 수 있는 서적과 영화를 주었고 우리의 재능을 발전시키길 열망했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에게 최고의 영감을 불어넣고 더 많은 사랑과 존경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 대신에 사람들은 이 사람이 가져온 위대함을 모두 뒤덮을 위협적인 거짓말을 선택합니다.

Enough is Enough. 계속 이대로 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 들어 그의 가치를 더욱 느끼고 있으며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마이클을 대변합니다.
- Antonrhk Franziska와 우리 부모님 Marlies 와 Wolfgang
97년부터 마이클과 교류했던 로슬린 위츠 코헨의 中 (19년 3월 16일)
"거짓말을 믿지마라."

우리 가족은 1997년 Sun City 리조트에서 마이클 잭슨을 만났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 때까지 친구로 지냈습니다. 제 아들들은 당시 12살과 10살이었습니다. 마이클은 우리 집에서 여러 번 시간을 보냈고 우린 네버랜드에도 갔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과 함께 한 그 모든 해에 마이클이 두 아들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적이 결코 없습니다. Grace Rwaramba 가 말한 ( 인터뷰) 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네버랜드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이클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방에서 "유혹"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습니다. 메인 하우스의 모든 객실은 항상 손님에게 열려 있었고 우리는 마이클의 침실 문이 닫힌 것을 결코 보지 못했습니다. 마이클은 숨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개방적이고 투명했습니다.

남편과 나는 모든 일정을 함께 했으며 마이클이 내 아들들과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제안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잤으며 만일 어떤 불편함을 느끼는 제안을 했다면 책임있는 부모로써 우리는 즉시 가방을 싸서 집에 갔을 겁니다.[143]

마이클은 전 세계에 친구로 지내는 아이 및 가족들이 있었으며 감독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알고 있습니다! 왜 감독은 그들과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모두 마이클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이클이 웨이드 롭슨이나 제임스 세이프척과 더 이상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어떤 단계에서 돈을 요구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가 죽은 후에 복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144]

마이클이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아이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소아성애라고 단정하는 것은 믿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만난 가장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이클과 함께 삶의 최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아는 것 만큼 이 다큐멘터리의 역겨운 거짓에 모두 황폐해 합니다.

또한 다큐멘터리에서 정말로 혼란스러운 것은 마이클이 두 아들에게 한 일에 대해 화를 내고 있지 않은 두 어머니입니다. 만약 내 아들들이 성추행을 당했다면, 그가 얼마나 유명하고 부유하고 친절했건 간에 성추행범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었을 것이며 나는 증오와 분노만 가질 것이고 어떤 기념품도 간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들은 마이클에 대해 아주 좋았다고 말했고 화난 걸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6. 기타 사건들

6.1. 제이슨 프란시아

파일:제이슨 프란시아.jpg 파일:블랑카프란시아.구티에레즈.jpg
05년 개빈사건 형사재판 때 검찰측 증인으로 출석한 제이슨 프란시아 제이슨의 어머니 블랑카 프란시아와 루머작가 빅토르 구티에레즈
94년 9월에 검찰은 조단사건을 종결하면서 2명의 피해자가 수사 중 추가로 발견됐으나 이들이 증언을 거부하여 마이클에게 혐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 둘 중에 한 명은 브렛 반스로 알려져 있는데 일단 브렛 반스는 단 한 번도 마이클이 본인을 성추행한 적이 없다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꾸준하게 얘기해와서 실체가 전혀 없다.[145] 다른 한 명은 네버랜드에서 86년~91년에 가정부로 일했던 블랑카 프란시아의 당시 9살이었던 아들 제이슨 프란시아인데 제이슨이 93년에 번복한 진술은 당시에도 조단사건에 대한 단서(추가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해서 검찰의 발표는 사실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블랑카는 이후에 마이클에게 합의금을 요구하였고 일 년 가까이 지난 94년 12월에 마이클의 새 앨범 <History>의 티져 공개를 앞두고 240만 달러에 합의했다.( #합의배경 참고)

조단사건 때 이루어진 민사합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마이클은 본인의 결백을 명시하였고 제이슨은 형사 과정에서 언제든 마이클에 대해 증언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형사 수사를 요청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머니 블랑카와 변호사는 합의금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제이슨이 조단사건으로 심문받을 때 말한 적 없는 성추행 시나리오를 제시했으나 정작 그 시간 동안 형사수사를 요청한 적은 없었다.[146] 아울러 블랑카는 합의금을 요구하기 전에 <Hard Copy> 타블로이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블랑카의 변호사가 이 방송을 주선했으며 허위사실 중상모략으로 배상 판결을 받은 마이클 루머작가 #빅토르 구티에레즈와 교류하기도 했다.

이후에 제이슨은 2005년 개빈사건 형사재판 때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해 마이클이 87년, 88년, 90년에 자기의 성기를 총 3번 만졌다고 증언했었다. (제이슨이 증언한 05년 4월 4일/ 5일 재판 문서 참고) 그러나 배심원 전원은 제이슨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We had a hard time believing him... about his scenario or his testimony, it was hard to buy the whole story, when he acted like he knew nothing about it... you know, he just didn`t seem that credible. He didn`t seem to convince us, like we wanted to be convinced. And he just... he was leaving too many little loopholes in his statements.

우리는 제이슨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자신의 (성추행을 주장하는) 시나리오나 증언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처럼 행동했을 때, 모든 이야기를 믿기 어려웠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는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그는 우리가 납득되길 바라면서 우리를 설득하는 걸로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는 진술에 너무 많은 허점을 남기고 있었죠.
배심원 대표 폴 로드리게즈 / 2005년 6월 13일 CNN 인터뷰
진술 모순도 있었지만 더욱 심각한 건 경찰의 허위사실까지 동원한 유도심문과 강압수사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제이슨은 원래 93년 11월의 첫 경찰과의 인터뷰에서 마이클은 자기를 간지럽힌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진술했었다. 그런데 05년 재판 중 공개된 녹취록(4~5 페이지)을 보면 경찰은 제이슨의 부정하는 진술에 대해 기억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말하며 "잭슨이 너의 몸 어딘가 만지면 기분 나쁠 곳에 손을 올려뒀을 거야. 잘 기억해 봐"라고 유도심문으로 진술변경을 유도했다. 또 경찰은 아직 수사중인 마이클을 'Molester' 즉 학대자라고 유죄로 확정하여 표현하기도 했다. 94년 3월 2차 인터뷰에선 경찰은 당시 아역배우였던 맥컬리 컬킨과 코리 펠드만이 마이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허위사실까지 말하며 이들을 구하기 위해선 제이슨이 나서야 한다는 식으로 또 유도심문을 했다. 그러나 맥컬리와 코리는 이때 마이클의 결백을 진술했었고 이후로도 일관되게 결백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코리는 2017년 <Today Show>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LA경찰과의 심문 녹음을 공개하며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코리는 경찰에게 본인이 아동배우 생활을 하며 실제로 아동성학대를 당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진짜 소아성애자를 구분할 줄 안다고 밝히며 마이클은 절대 소아성애자가 아니며 결백하다고 진술했고, 자신을 성학대한 백인 배우 존 그리삼을 포함한 할리우드 영화계에 있는 실제 소아성애자들의 이름을 알려줬으나 경찰은 담당 지역이 아니라며 무시하고, 오히려 이미 결백하다고 진술한 마이클에게만 혐의를 짜내려 했다고 밝혔다.

존 그리삼은 93년에 조단사건이 터지기 전에 코리가 마이클과 가까워지자 자신의 범죄가 발각될까 우려해[147] 마이클이 수상하다며 경찰에 먼저 제보한 인물이기도 하다. LA 거주자 존 그리삼은 93년에 수사받지 않았고 8년이 지난 2001년에 계속 다른 아동 성범죄를 저질러오다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으니 경찰의 방관에 의해 추가 피해자가 발생한 셈이다. 이외에도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경찰이 방관한 백인 헐리우드 소아성애 범죄가 더 있음이 밝혀졌는데 93년에 LA 경찰이 헐리우드 유명 백인 프로듀서의 아동성범죄를 자백받고도 풀어줘서 무마한 사실이 2019년에 드러났다. 코리는 아동 연예인을 대상으로 아동성학대를 오랫동안 저질러온 할리우드 소아성애 그룹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도 포진해 있다고 2017년에 폭로하여, 백인 소아성애 범죄 스캔들을 덮기 위해 흑인 마이클을 93년에 표적수사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코리의 주장과 같은 내용을 유명 배우 브래드 피트와 아동배우 출신 엘리엇 우드가 인터뷰하기도 했다.[148][149][150]
파일:제이슨 프란시아3.png
제이슨에게 마이클이 맥컬리 컬킨을 성추행했다고 허위사실을 말하는 수사관들.
위의 유도심문 중인 수사관 Birchim은 당시 검찰측 증인이었던 랄프 채콘에서 금전을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05년 법정기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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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 펠드만도 마이클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이후 마약중독자가 돼 체포됐다는 허위사실을 말하는 수사관들.

결국 제이슨은 2차 인터뷰에서 초기 진술을 뒤집고 마이클이 본인을 성추행했다고 말을 바꿨고 이후 어머니 블랑카가 이를 근거로 마이클에게 합의금을 요구한 것이다. 제이슨은 변경한 입장을 05년 재판에서도 유지하며 진술 과정에 대해선 기억이 안 난다고 주장했지만 경찰과의 인터뷰 녹취록 때문에 그의 증언은 신뢰받지 못했다. 가령 제이슨이 경찰에게 "당신들은 나를 몰아세우는군요. 그래요. 마이클은 나를 간지럽혔어요."라고 진술한 것과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그들은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자꾸만 말하게 했다. 계속 나를 밀어붙였다. 나는 일어나서 그들(경찰)의 머리를 때리고 싶었다" 라던가, 또 "다른 소년이(조단) 돈을 노리고 마이클에게 소송을 건 것 같다"고 진술한 것 등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이슨은 마이클측 변호인과의 심문 과정에서 경찰 인터뷰에서 말이 바뀌었던 과정을 추궁 당하자 당시에 어떻게 하면 경찰과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했다며 스스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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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이 바뀌는 과정을 추궁당하자 경찰과의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하는 제이슨.

한편 블랑카는 <리빙 네버랜드>의 주인공인 웨이드 롭슨과 제임스 세이프척이 마이클 사후에 마이클 재단을 상대로 거액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이후 이들의 증인으로서 마이클이 89~90년에 다른 소년들과 같이 샤워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05년 개빈사건 때도 검찰측 증인으로 출석한 블랑카는 같은 증언을 했는데(05년 4월 5일 재판 문서 참고) 그러나 이것은 이미 과거에 몇 번이나 번복한 적이 있는 얘기라서 배심원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다.

먼저 아들 제이슨이 진술을 번복하자 블랑카는 변호사를 고용했고 변호사의 주선으로 93년 12월에 2만 달러를 받고 다이앤 디몬드의 <Hard Copy> 쇼에 출연해 마이클이 롭슨과 함께 샤워하며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인터뷰했다. 당시 방송에서 다이앤 디몬드는 합의금을 주는게 좋을거라는 뉘앙스의 멘트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달인 94년 1월에 조단사건으로 증인 요청을 받고 형사 증언을 했을 때에는 <Hard Copy>가 정직하지 않게 자기의 얘기를 왜곡, 과장해서 편집했다고 주장하며 자기는 마이클이 아이들과 같이 샤워하는 모습이나 마이클이 아이를 부적절하게 만지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05년엔 또 말을 바꿔 마이클이 롭슨과 같이 샤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인데 당시 롭슨은 블랑카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었다. 심문 과정에서 왜 94년과 말이 다른 것인지 추궁당하자 블랑카는 당시엔 너무 피곤하고 긴장했기 때문이라는 납득하기 힘든 해명을 했다. 또한 롭슨의 16년 재판에서 롭슨 측 증인으로 출석한 블랑카는 또 말이 바뀌는데, 94년에 블랑카가 결백하다고 진술한 자료를 제시하자 샤워실 유리창 너머로 마이클의 실루엣만 봤고 두세명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진술을 변경했다가 05년 존 로넨 검사와의 인터뷰에선 사람을 보거나 소리를 듣지 못했고 샤워실 밖에 있는 옷가지만 봤다는 05년 재판 진술과 또 다른 진술을 한 것이 드러나는 등 진술을 할 때 마다 내용이 바뀌는 양상을 보였다. (16년 블랑카 프란시아 법정문서 참고)

이 외에 블랑카의 세이프척에 대한 진술도 신뢰를 잃었는데, 16년 재판 기탁서를 보면 블랑카는 네버랜드 영화관에 들어가 마이클과 세이프척이 같이 영화관 안의 방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블랑카는 이미 05년 개빈사건 재판 때 마이클이 아이들과 영화관에 있을 때 자신은 영화관에 있은 적이 없다고 증언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05년 재판 때 블랑카는 마이클에게 혐의를 제기하는 검찰 측 증인이었다. (05년 4월 5일 블랑카 프란시아 법정진술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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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과 말이 달리진 이유에 대해 블랑카는 당시엔 너무 피곤하고 긴장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6.2. 마이클 제이콥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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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제이콥하겐. 들고 있는 사진은 제이콥하겐이 마이클을 처음 만났던 98년 3월에 찍은 것이다.
마이클의 팬이었으나 여러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른 바 있는, 마이클 제이콥하겐은 19년에 < 리빙 네버랜드>가 개봉된 직후 충격적인 주장을 했다. 자신은 95년에 마이클을 파리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97년 마이클의 유럽 투어 때 종종 자신을 초대하여 함께 여행도 다녔으며 호텔에서 마이클과 같이 잠을 자기도 했는데 그때 성행위는 아니지만 마이클이 자신을 꽉 껴안고 얼굴에 키스를 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며 제이콥하겐은 사실 자신이 14살일 때 마이클로부터 직접 친필 사인과 메시지가 적힌 아동누드집을 선물받았었다며 뒤늦게 책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제이콥하겐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인터뷰 때문에 스스로 부정된다. 98년 당시 13살의 제이콥하겐은 독일 RTL 채널과 인터뷰를 했었는데, 제이콥하겐은 98년 3월에 처음으로 뮌헨의 한 호텔에서 마이클을 마주쳤고 이후 <Krone> 서커스장에서 한 번 공연을 같이 관람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참고로 제이콥하겐이 앞서 말한 마이클과 같이 다녔다는 투어는 이미 97년 10월을 마지막으로 일정이 모두 끝난 상태였다.

또한 마이클에게 받았다고 주장하며 뒤늦게 공개한 책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해당 책은 <The Boy: A Photographic Essay (Georges St. Martin, Ronald C. Nelson, 1964)>라는 책으로 아동누드집으로 분류되는 서적도 아니며 현재 미국 의회도서관 등록돼 보관 중인 예술 서적으로써 1963년의 걸작 흑백영화 < 파리 대왕>에 나온 장면들이 포함된 사진집이다. ( #책설명 보기) 이 책은 마이클이 83년에 시카고에 사는 '론다'라는 팬에게 선물받았었고 뉴욕타임즈 보도에 의하면 93년 조단사건 압수수색 때 경찰이 압수하여 쭉 가지고 있다가 05년 개빈사건 재판 때 아동을 성적대상화 하지 않았지만 그루밍의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검찰의 주장에 쓰였던 책이다. 당시 배심원단은 예술품이기에 문제없다는 반응이었고 검찰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었다.

즉 해당 책은 제이콥하겐이 선물 받았다고 주장하는 14살 99년엔 마이클이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마이클이 굳이 압수당했던 책과 똑같은 걸 따로 사서 선물을 해줬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책은 아마존닷컴에서 누구나 쉽게 구매가 가능하고 언론 보도로 마이클이 소지했었던 것이 널리 알려진 책이다.

게다가 제이콥하겐은 마이클의 사인을 위조하여 팔아온 전적까지 있다. 17년 9월 13일에 독일의 TV 프로그램 <Akte>는 방송에서 범죄수사국(Land Office of Criminal Investigaion)과 함께 제이콥하겐이 그간 팬들에게 팔아왔던 마이클의 사인이 적힌 각종 기념품과 노트 등의 물품들을 필적학자 Petra Materna에게 검증을 의뢰하여 그 결과를 보도했는데 모두 위조로 밝혀졌다. 피해자 중에는 30만 유로를 사기당한 팬도 있었다. 또 제이콥하겐은 물품 수익의 일부가 빈곤 아동을 돕는 자선 단체로 간다고 홍보했으나 해당 단체에 알아본 결과 제이콥하겐과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오히려 탈세를 저지른 것이 취재결과 추가로 드러났다. 17년에 이 사실이 밝혀진 후 제이콥하겐의 수익사업은 중단되었다. 아울러 이 방송 당시만해도 제이콥하겐은 본인 스스로 98년 3월에 마이클을 처음 만나 이후 인연을 이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말 만남을 지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제이콥하겐은 이후의 만남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사진과 같은 증거 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이콥하겐은 이미 과거에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본인과 마이클 사이에 성적인 접촉은 일절 없었다고 스스로 밝혔었다. 또 13년에 제이콥하겐이 출판한 저서 <Will You Be My Friend>에서도 그는 그동안 마이클에게 성추행 소송을 걸었던 이들을 돈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자들이라며 비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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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에 본인의 홈페이지에서 마이클과의 성적인 행위는 일절 없었다고 밝힌 제이콥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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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에서 마이클에게 성추행 소송을 건 이들을 돈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자들이라고 비난.

6.3. 경계없는 허위 보도 - 법망을 빠져나가는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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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미국은 단 6개의 거대기업이 전체 미디어를 지배하는 구조이며 이들 기업 다수는 계열사 안에 영화사와 같은 제작사, 방송국, 언론사 등을 다 소유하고 있어 헐리우드는 미디어 기업이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타블로이드 업계도 AMI(American Media Inc) 내셔날 인콰이어, 레이더 온라인, 글로브 등 10여 개의 매체를 소유하며 지배하고 있는데 특히 AMI의 계열사들은 마이클 생전부터 사후까지 심각한 허위유포와 혐오 보도를 계속한 곳이다.
마이클에 대한 루머 보도가 심해지던 90년대부터 미국 미디어 업계의 비대화와 수익경쟁이 심화되었고 여러 미디어를 문어발 식으로 소유한 소수의 기업에 의해 여론이 좌우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미국 36개 주에서 시행되고 있는 언론인의 취재원 보호를 보장하는 방패법(shield law)은 한편으로 보도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무책임한 황색 언론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 덕에 아래에 기술된 타블로이드 언론인 다이앤 디몬드 파라마운트 픽쳐스가 운영하는 타블로이드 언론사 <Hard Copy>는 95년에 마이클이 미성년자인 조카와 성적인 행위를 하는 비디오 테이프 영상이 있다는 허위 TV 방송을 하고도 아무런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마이클은 방송의 정확성이나 희생자의 피해 보다 돈과 이목에 집착하는 무모한 미디어들이 내 평판을 파괴하고 있다며 95년 1월 12일에 빅토르 구티에레즈라는 루머 작가와 타블로이드 언론사를 상대로 중상 모략에 관한 소송 제기했다. 하지만 3년이 넘게 걸린 소송에서 재판부는 언론사의 책임을 면제해줬고 언론사 소속이 아닌 구티에레즈에게만 98년 4월 10일에 270만 달러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에 구티에레즈는 파산 신고를 하고 몰래 칠레로 도피하여 배상금을 한 푼도 물지 않았고 그의 변호사 로버트 골드만(Robert Goldman)은 이런 사실을 숨겼다.[151]

또한 이때 언론사를 돕기 위해 나선 제도권의 인물까지 있었으니 바로 93년 챈들러 사건과 05년 개빈 사건을 수사한 검사 톰 스네던(Thom Sneddon)이다. 당시 이 사건은 로스 앤젤레스 검찰과 LAPD 관할이었는데 산타바바라 지방 검찰인 톰 스네던은 자신의 관할권을 벗어나면서 까지 <Hard Copy> 다이앤 디몬드의 보도엔 악의가 없었다는 성명서[152]를 97년에 발표하여, 중립을 지켜야할 검찰 제도권마저도 허위 루머보도를 일삼는 언론과 유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 구티에레즈에 대한 처벌뿐만 아니라 유명인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타블로이드에 지쳤다는 메세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 98년 재판의 배심원단 (당시 변호사 Zia Modabber 인용)
하지만 배심원단의 메세지는 무력했다. 언론사의 편을 들어주는 판결로 방송사고급 허위보도를 해도 언론사는 책임을 피할 수 있다는 현실 예시가 되었다.
이것이 무수한 타블로이드 루머 추종자들의 맹신, 그들 주장의 증거없음에 대한 합리화 (마이클은 부유하므로 증거를 돈으로 은폐해왔을 것이다) 의 실체이다. 법은 언론사의 편이었고 버는 돈도 언론사의 것이었으며 검찰, 경찰, 사법의 제도권이 돕는 쪽도 언론사였지 마이클은 아니었다. 그는 차별적 처우를 받았으며 법적으로 대응해도 별 소용없을 정도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했다. 그리하여 90년대 말로 가면서 루머의 수위와 양은 극단으로 올라간다. 객관성 상관없이 루머를 보도하고 비싼 값에 허위 제보를 사모으는 타블로이드 시장이 있는 한 구티에레즈와 같은 사기꾼은 계속 생겨나는 것이었고 제도권은 비윤리적인 타블로이드 언론 산업을 보호해줬으며, 이들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 바로 마이클이었다.

90년대 미국 미디어 업계의 비대화와 영향력 증가
또한 위 <Hard Copy>와 파라마운트 픽쳐스 MTV[153] 등을 소유한 미디어계 대기업 바이어컴[154]의 소속이다. 90년대 들어서 주류 미디어 대기업도 타블로이드 시장에 뛰어들었고 타블로이드 업계도 자체 인수.합병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이들 산업의 영향력이 증가했다. 대기업이 먼저 방어한 법적 책임은 다른 타블로이드 매체의 운신도 함께 넓혀주는, 즉 그들 산업의 수익 안정성을 불러왔고, 게다가 오보를 일으킨 언론인과 방송을 징계하거나 자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내부에서 주고받는 상을 줌으로써 미디어 업계는 그들 산업의 극단적 수익추구와 도덕적 해이를 합리화하고 스스로 권위를 포장했다.

2000년대 이후 주류 언론까지 왜곡 보도의 선정주의에 가담
- "가장 수치스러운 저널리즘 역사 중 하나인 마이클 잭슨 재판" (11년 허핑턴 포스트 기사[155])
그리하여 2000년대가 넘어가면서 타블로이드뿐만 아니라 주류 언론들까지 객관적 검증 없는 허위 폭로 기사와 왜곡을 쏟아냈고 2003~2005년 마이클의 개빈 사건 재판과정에서 보인 미국 언론의 태도는 저널리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으로 일컬을 만큼 선정적인 왜곡 보도의 경쟁으로 나타났다. ( 마이클 잭슨에 대한 여론재판 현상 컬럼)( Vanity Fair의 리차드 마쓰우라 성학대 허위보도[156])
마이클 사건은 아동성추행 루머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저널리즘에 대한 이슈이며 저널리즘이 상업성에 심각하게 오염되었을 때, 대중의 부정확한 정보와 편견을 미디어가 어떻게 강화시키며 그들이 보도 명분으로 삼은 윤리적 이슈가 스스로의 윤리적 모순, 즉 객관성 실종과 선정성으로 얼마나 쉽게 인권의 파괴에 폭력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언론 학대의 역사이다.

아래는 다이앤 디몬드가 저지른 '대표적인' 허위 보도들이다. 그녀는 마이클 소아성애 루머에 관한 책을 출판하여 수익을 얻고 마이클 전문가를 자처하며 방송 출연과 기사를 통해 각종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루머를 퍼트렸다. 아래에서 그들의 보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지 확인할 수 있다.
(1) 다이앤 디몬드의 1차 존재하지 않는 비디오 테이프 - "빅토르 구티에레즈가 창작한 조카 성추행 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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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93년 챈들러건 때부터 마이클 루머로 인지도를 쌓아나간 타블로이드 출신 다이앤 디몬드, 03년 개빈건 NBC에 고용된다.
(우) 마이클의 조카 제레미 잭슨의 어머니인 마가렛 말도나도의 책: "모두 미친 거짓, 구티에레즈와 만난 적도 없다."
95년 1월 9일 파라마운트 픽쳐스가 운영하는 타블로이드 언론사 <Hard Copy>의 수석 리포터였던 다이앤 디몬드(Diane Dimond)는 KABC-AM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마이클이 미성년자와 성적 행위를 하는 모습이 찍힌 네버랜드 보안카메라(?) 영상을 복사한 27분 짜리 비디오 테이프가 존재한다는 충격적인 인터뷰를 했다. 이에 마이클 측은 허위사실 임을 알리는 항의서한을 파라마운트 픽쳐스에 보냈으나 이들은 무시했고 이 내용은 이틀 동안 <Hard Copy>의 TV 채널과 다른 채널의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여과없이 보도되었으며 영국의 타블로이드 <London Sun>과 <Today>도 이를 보도해서 악의적인 루머가 사실 보도인 것 처럼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 (참고-AP통신 기사)
디몬드의 보도 내용은 디몬드에게 마이클 루머를 제공하던 칠레 출신 캐나다 국적의 루머 작가 빅토르 구티에레즈[157][158][159][160]에게서 나온 것으로, 구티에레즈는 피해자가 마이클의 조카 제레미 잭슨[161]이며 문제의 비디오 테이프를 호텔 방에서 조카의 어머니로부터 직접 건내받아 자신이 보았다고 디몬드의 방송에서 말했다. 디몬드는 로스 앤젤레스 검찰 당국도 마이클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다며 확신에 찬 멘트를 아끼지 않았으나, 그녀의 확신 속에 등장하는 로스 앤젤레스 수사당국이나 조카의 어머니에게 어떠한 확인도 하지 않았다.
Q: "마이클 잭슨과 어린 소년. 이 테이프가 100% 확실한가요? "

디몬드: "정말로 노골적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확신합니다."
(디몬드는 언론인으로써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확인도 안했다.)

Q: "그 테이프를 보지 못한겁니까?"

디몬드: "내가 그걸 보진 못했지만, 마이클 잭슨에 관해 가장 좋은 소스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그걸 봤습니다."

Q: "....보안카메라를 통해 찍었다구요?"

디몬드: "소아성애자들은 기념품을 갖길 원하고 희생자들의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테이프에 나오는 행위는 1년 전에 마이클 잭슨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고 주장한 사람의 말과 같습니다. 내 말은 오랄섹스를 뜻하는 겁니다."
(94년 9월에 증거없음으로 기소기각된 챈들러건을 의미, 그런데 마이클은 93년부터 네버랜드에서 살지도 않았다. 간단한 사실 확인 조차도 안한 것이다. 개인 카메라도 아닌 보안요원이 보는 보안카메라로 범죄 기념품을 만든다는 황당한 논리를 내세우며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외설적인 묘사는 더 이어졌고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자신의 방송을 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95년 1월 9일 디몬드가 출연한 KABC-AM 라디오 방송 "The Ken and Barkley Company"의 대본에서 발췌
파일:다이앤디몬드.톰스네던.성명서.jpg
로스 앤젤레스 검찰의 대변인인 Sandi Gibbons는 테이프가 있다는 주장 (제보자=구티에레즈) 은 들었으나 보지도 못했으며 로스 앤젤레스 검찰 측은 수사를 재개하지 않았고 테이프의 조사와 관련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마이클은 95년 1월 12일에 다이앤 디몬드와 구티에레즈, 해당 방송사를 중상모략 혐의로 고소하였다. 재판에서 구티에레즈 측은 자신의 신용카드로 결제한 센츄리 호텔의 방에서 제레미의 어머니인 마가렛 말도나도를 만났다고 주장했으나 해당 호텔엔 그의 신용카드 기록 및 숙박기록도 없었고 증거요청에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모든 거짓말이 탄로나면서 결국 98년에 손해배상을 판결받는다. 그러나 디몬드의 허위 방송은 이 와중에도 계속됐다.

(2) 다이앤 디몬드의 2차 존재하지 않는 비디오 테이프 - "구티에레즈와 친분관계인 캐나다 소아성애 매춘업자의 조작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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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ell 형사는 디몬드가 소년에게 미국에선 연예인 허위고소로 쉽게 돈을 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나중에 밝혔다.[162] (우)로드니 알렌
95년 4월 27일에 디몬드는 캐나다로 가서 15세의 홈리스 소년을 인터뷰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소년은 캐나다의 비디오 아케이드(?)에서 마이클을 만나 그의 개인용 제트기로 네버랜드를 방문해 성추행을 당했다며 주장했고, 디몬드는 <Hard Copy>로 보내진 출처 불명의 편지들을 보여주며 소년이 네버랜드 지도를 그렸고 여러 제보가 있으니 믿지않을 수 없으며 곧 비디오 테이프가 공개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녀의 확신 속에 등장하는 그 시기에 마이클이 캐나다에 있을 수 있는 지의 간단한 스케쥴 확인같은 어떠한 교차 검증도 하지 않았다.
곧 캐나다 경찰의 수사에 의해, 소년들을 이용해 매춘을 시켜온 소아성애 포주 로드니 알렌[163]이라는 남자에게 지시받은 거짓말이며 그 편지들도 모두 조작이었음이 밝혀졌고 소년은 구속되었다. 잠적했던 로드니 알렌도 99년에 5명의 소년과의 소아성애 행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놀랍게도 로드니 알렌은 1차 허위 보도의 창작자인 빅토르 구티에레즈와 접촉했던 친분이 있는 관계 임이 밝혀졌다. 94년 2차 허위보도 시기는 구티에레즈가 소송을 취하하지 않으면 마이클 소아성애 루머책을 쓰겠다 압박[164] 하던 때이며 디몬드 측도 마이클에게 소송 취하를 압력넣고 있었다. 고의적인 악의를 가지고 방송했는 지에 대해 조사받던 디몬드와 <Hard Copy>는 악의없이 보도했는데도 오보는 벌어질 수 있는 것 처럼 보이는 면피성 방송이 필요했던 것이며 아울러 그들 미디어가 어떻게 되갚아 줄 수 있는 지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미디어의 이득을 위해 마이클에 대한 유죄 인식을 만드는 오보와 루머를 계속 이용하는 것에 그들은 서슴없었다.

6.4. 루머 거래와 조작 - 언론의 유죄 확증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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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93년 9월 26일, 주류 미디어와 타블로이드 대통합의 날: 조단 챈들러 사건이 공개적으로 터진 날 NBC, ABC, CBS 지상파들은 일제히 챈들러 측 주장의 외설스러운 표현까지 보도하였고 마이클 측 입장을 다루는 보도는 절대적으로 적었으며, 이후 새로운 뉴스 시장이 창출됐다고 일컬을 만큼 엄청난 양의 보도가 쏟아졌다. 당시 언론의 선정적인 태도는 사건의 본질을 가리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93년부터 시작된 객관성을 벗어난 마이클에 대한 유죄 확증 편향적 인식은 당시 미디어 일부와 제도권 일부의 태도[165]로 형성되기 시작해서 2000년대 이후론 다수의 미디어가 동조하면서 특히 '미국 내에서' 강화됐다. 이 형성의 한 축은 마이클을 지속적으로 수사했던 톰 스네던 검사를 위시한 수사당국의 불공정한 편파( 강압수사, 유도심문, 표적수사 의혹, 증거조작 의혹, 증인 금전제공 법정기록, 거짓된 언론 플레이[166])이고, 다른 한 축은 미디어의 마이클 사망 때까지 계속됐던 유죄 확증의 보도(사실검증 없는 오보, 루머 거래, 금전매수 제보 조작)와 증거없음이란 객관성을 피해 갈 심증적 유죄론 (마이클의 아동복지 사업 및 사회기여 활동에 대한 곡해와 보도 회피, 전문성이 결여된 심리해석으로 왜곡, 비일반적이므로 유죄라는 편견 자극)이다. 아래는 그 중 미디어의 조작과 루머 거래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1) 증거를 조작하는 언론 - 그를 유죄로 만들어라.
"그가 너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고 말하면 돼. 그가 널 붙잡고 어떤 식으로든 만졌다고 말이야.

우린 마이클을 무너뜨릴 거야. 처형,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야."

- 93년에 론 뉴트 가족에게 20만 달러를 댓가로 거짓 증언 제의<National Enquirer> 기자 짐 미테거
93년 말에 조단 챈들러 건을 조사하던 수사당국은 별 다른 증거와 추가 피해자를 찾지 못하자 과거까지 뒤지기 시작했고 80년대에 마이클과 접촉한 론 뉴트(Ron Newt) 가족을 찾아냈다. 영화제작자인 론 뉴트는 80년대에 자신의 세 아들로 구성한 '뉴트론' 이라는 그룹을 준비 중이었고 마이클의 아버지 조 잭슨이 운영하는 잭슨 레코드와 계약을 타진하면서 마이클이 부모님과 함께 형제 쟈넷과 라토야 잭슨과 살던 캘리포니아 엔치노의 집에서 87년에 아이들과 함께 2주간 머물렀었다. 먼저 수사관이 다녀갔으나 론 뉴트 가족은 부정했고 그 다음엔 이 정보를 들은 기자가 그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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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National Enquirer>의 마이클 관련 보도들, 조작, 혐오, 유죄 확증, 산소탱크 수면 루머 (우) 론 뉴트 가족과 마이클 (1987)
론 뉴트 자녀들의 05년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93년 12월에 론 뉴트와 그의 아들, 그들의 지인인 찰리 워커와 함께 <National Enquirer>의 기자 짐 미테거(Jim Mitteager)를 만났고, 미테거는 20만 달러를 제의(19년 시가로 환산하면 10억 이상의 거액)하며 편집장 David Perel이 서명한 계약서를 내밀었다고 한다. 계약서엔 마이클 잭슨의 성욕, 성적 접촉과 성관계 시도에 대한 지식을 독점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적혀있었고 미테거는 거액 앞에 당연히 싸인할 것으로 예상하는 태도였으나 론은 싸인 대신 "No good sucker"라고 갈겨쓰고 나왔다고 한다. 아울러 론 뉴트 가족이 머무는 동안 불미스러운 일은 커녕 실제 마이클과의 만남도 별로 없었다고 밝혔다.

이 폭로에 대해 내셔널 인콰이어 지도 인정하며 그들이 접촉한 소년은 더 이상 없었을 거라고 말했으나 이는 거짓이며 그들은 동시기에 웨이드 롭슨 가족에게도 접근하여 역시 금전매수의 거짓증언을 제의했었고 롭슨 가족은 거절했었다. 또한 짐 미테거는 론 뉴트와의 대화가 포함된 녹음기록을 타블로이드 브로커였던 폴 배레시에게 97년에 주었고 13년에 미국 <Glove>와 영국의 타블로이드가 이 녹음을 소재로 24명에게 합의금을 줬다는 허위보도를 하기도 했으나 곧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167] 아버지 론 뉴트도 인터넷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 매수시도 사건을 폭로했고, 19년에 <리빙 네버랜드> 다큐로 마이클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되자 론 뉴트는 이와 관련한 인터뷰를 하러가던 중 19년 3월에 사망했다.[168]
Q: " 내 얘기를 바꾸는 댓가로 여섯자리 숫자의 거액을 제안받았다. 이 부분 진술 기억하십니까? "

A: " 네. 난 그때 마이클을 지지하고 있었고 <National Enquirer>에서 내 진술을 바꾸는데 엄청난 거액을 제안했어요."
챈들러 사건때 <National Enquirer>로부터 금전 댓가 거짓 증언을 제의받았음을 진술한 조이 롭슨의 05년 재판 법정기록
조단 챈들러 건은 결국 수사결과와 모순되면서 증거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이 되었는데 당시 수사당국의 편파 강압적인 태도, 또 30여년 전엔 더욱 보수적이었을 산타바바라 관할지역이 특히 백인 중산층 동네인 것을 감안하면 증거가 없고 진술이 불일치 하더라도 추가 피해자만 나타난다면 기소하여 유죄평결이 가능한 상황이였다. 무고하게 감옥에 보내는 일인데도 론 뉴트의 말에 의하면 짐 미테거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이외 십대 때 마이클에게 보컬 렛슨을 받으며 가까워진 후 계속 마이클을 지지하고 있는 아론 카터도 여러번 돈 제의를 받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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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 아티스트인 카를로 라일리는 마이클 분장을 하고 아이를 학대하는 포즈의 사진 촬영을 거액과 함께 제의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마이클 모사 아티스트인 카를로 라일리는 출판을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마이클로 보이도록 분장을 하고 아이를 학대하는 포즈를 취하는 사진촬영 요구를 거액과 함께 제의 받았었다고 15년에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고백했는데, 라일리는 그 후로도 이런 제의가 계속된다고 밝혀 마이클 사후에도 조작 시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남겼다.

(2) 거짓 제보를 사들이는 언론 - 거짓 증인의 양산
"그들은 경찰에 가길 원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사줄 언론사부터 찾았어요."
"마이클 혐의에 대한 목격자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돈에 관심 있었습니다."
- <SPLASH NEWS> 케빈 스미스
파일:폴배네시.필립르마르크.인터뷰.jpg
"호주에서 20만 달러를 제안하자 너무 적다고 했죠.
그러자 그쪽은 다음에 독일에 팔고 그담에 이탈리아에 팔고 그러면 백만달러가 될거라고 말하더군요. "
"진실이 아닌 걸 알았어요. 하지만 내 관심은 수수료이지 마이클의 유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 타블로이드 브로커 폴 배레시 (Paul Barresi)
94년 PBS 다큐멘터리 "Frontline"

93년에 미국을 넘어 유럽과 호주의 타블로이드까지 마이클에 관한 온갖 제보를 진실성 상관없이 사들이기 시작하자 역시 진실성 상관없이 이야기를 팔길 원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이들이 마이클 혐의를 입증할 증인으로 요청된 사람들 대다수이니 추문을 마케팅 수단으로 삼는 타블로이드 산업의 극단적 선정주의가 형사 재판까지 왜곡시킨 셈이다. 이들은 법정에선 대부분 타블로이드에 팔았던 이야기에 대해 스스로 진술을 번복하거나 증거와 증언 모순에 부딪혀 신뢰성을 잃었다.
Q: " 브로커가 돈을 더 올리면 마이클의 손이 맥컬리 컬킨의 바지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 게 사실입니까?"

필립 르마르크: " 그건 브로커가 한 말입니다.."
르마르크는 저 대화가 있었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 05년 재판 심문
필립 르마르크(Phillip LeMarque)는 91년에 10개월간 네버랜드에서 일했던 프랑스인 요리사로, 사실 첫 성학대 피해자는 91년에 있었다며 마이클이 맥컬리 컬킨을 성추행하는 걸 자신이 봤다는 이야기를 검찰에 제보는 하지않고 오직 타블로이드에만 팔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당시 타블로이드 브로커였던 폴 배레시가 그들의 대화녹음을 검찰에 넘겼고 이를 다시 타블로이드에 팔아 수입을 챙기는 과정에서 밖으로 알려졌다. 그는 결국 05년에 증언대로 불려왔고 곧바로 그의 증언은 신뢰를 잃었다. ( 맥컬리 컬킨은 93년부터 일관되게 마이클의 결백을 증언해왔다.)
" 마크 퀸도이는 20만 달러부터 최대 95만 달러까지 부르더군요. "
타블로이드 언론인 스튜어트 화이트의 진술 - 94년 PBS 다큐멘터리 "Frontline"
파일:맥마누스.랄프채콘.05재판.jpg (좌) 아드리안 맥마누스[169]: 마이클 물품에 대한 절도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94년에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하면서 마이클이 조단 챈들러 및 다른 아이들을 성추행했다는 이야기를 타블로이드에 팔았으나, 05년 재판에서 마이클은 조단을 비롯한 어떤 아동에게도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들을 맡길 정도로 신뢰한다는 말을 93년 12월 7일에 수사관에게 진술한 것이 드러났다.

(우) 랄프 채콘[170]: 25,000 달러 상당의 네버랜드 물품을 훔쳐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05년 재판에서 마이클의 결백을 말하다가 94년 부당해고 소송을 준비하며 타블로이드에 이야기를 팔 때 진술을 변경했던 것이 드러났고 이때 톰 스네던 측 수사관 Russ Birchim에게 돈을 받은 것을 인정했다.
심지어 타블로이드를 이용한 허위 폭로를 합의금 압박 수단으로 삼는, 타블로이드가 사기의 공모자 격이 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94년 12월에 마이클에게 1600만 달러를 요구하는 부당해고 소송을 걸었던 아드리안 맥마누스랄프 채콘을 포함한 전직 네버랜드 직원 5명, 일명 "Neverland 5"[171]는 소송 전에 그들의 변호사 마이클 링(Michael Ring)과 함께 <SPLASH NEWS>의 타블로이드 브로커 게리 모건(Gary Morgan)과 만나서 마이클과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리사마리 프레슬리(94년 결혼후 뉴욕에서 생활함)와의 성생활과 같은 그들은 알지도 못할 허위 가쉽을 파는 것을 거래했고 모건은 <The Star>와 같은 여러 잡지들과 "Inside Edition"과 같은 TV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주선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95년에 허위 유포 중상모략으로 고소당한 루머 작가 빅토르 구티에레즈와도 접촉하여 공조한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랄프 채콘은 The Star에 인터뷰를 하러 가기 전에 구티에레즈와 만났었고 카심 압둘도 구티에레스와 만날때 마다 2~3 시간의 긴 대화가 있었다고 말했으며 맥마누스는 "구티에레즈가 우리의 소송을 도울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 05년 재판 법정기록 중 아드리안 맥마누스(4월 7-8일), 랄프 채콘(4월 7일 ), 카심 압둘(4월 25일)의 법정 진술 참조.
" 그때 32,000달러 정도 받은 거 같아요.

(소송패소 후) 돈이 모자르면 타블로이드에 이야기를 더 많이 팔아보라고 변호사가 말했어요. "
아드리안 맥마누스의 05년 4월 7-8일 법정증언
"Neverland 5"는 부당해고 재판 과정에서 계속된 거짓말과 증언 모순으로 66,000 달러의 벌금을 부과 받았고 그들의 변호사도 증거 은폐로 28,350 달러의 벌금과 사실 은폐로 10,000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으며, 결국 97년 3월 15일에 배심원단은 부당해고 소송을 기각하고 마이클에게 6만 달러의 손해배상과 140만 달러의 법률비용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마이클은 생전에 이런 허위 소송을 14번 당했으나 모두 승소하였다. 이후 이들 중 아드리안 맥마누스, 랄프 채콘, 카심 압둘의 3명이 05년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소환되었고 돈을 받고 타블로이드에 이야기를 판 것을 인정했는데 변호사가 제의한 거라며 변명했다. 또한 이들은 배상금 지불을 회피하여 05년 재판 때까지도 아무도 배상금을 낸 사람이 없었다.

6.5. 미국 영화 비평가들의 편향과 전문성 문제

  • 해당 서술은 미국에 한정된 서술이다.

2019년에 위에 언급한 <리빙 네버랜드>가 미국에서 방영됐을 때, 심지어 TOP을 기준으로 하면 비평가 32명 전원이 만장일치로 극찬할 정도로 유독 미국의 영화 평론가들이 호평하면서 다큐를 기정사실인 것처럼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극찬의 이유들은 대체로 소아성애의 메커니즘을 보여준다는 내용 등이다. 하지만 이 비평가들 중 어느 누구도 아동심리학이나 범죄심리학의 전문가가 아니며 실제 전문가의 견해를 자문하거나 참고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확신했고 또한 이 다큐가 사실검증을 거치지 않았기에 아직은 피해자로 확신할 수 없다는 객관적인 상황도 주목하지 않았다. 결국 이 다큐는 사실검증을 통해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현재 DVD의 판매가 중지되었다. 아래는 그 평론가들의 평이다. #
그렇게 고통스러운 세부 묘사가 있고, 그렇게나 영웅적인 긴 길이(러닝타임 4시간)를 가진 아동 성학대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지나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다큐에서 분명한 점은 그 안에 내포된 거의 모든 것 이상으로 강력한 고의적인 실명(마이클 잭슨)의 힘이기도 합니다.
An appalling story of predatory child sexual abuse, told in such painful detail and at such heroic length that it's impossible to dismiss. But what the series also makes clear, beyond almost everything else, is the power of willful blindness.
존 앤더슨(John Anderson) - 월 스트리트 저널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와 생존자 및 가족에 대한 파괴적인 영향에 관한 답답한 이야기.
A riveting story of childhood sexual abuse and its devastating effects on survivors and families.
레이퍼 구스만(Rafer Guzman) - 뉴스데이
때때로 리빙 네버랜드는 다큐멘터리보다는 퇴적물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한쪽에서만 듣고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면에서 설득력있는 사례를 제시한다.
At times Leaving Neverland feels more like a deposition than a documentary, given we're hearing from only one side, again and again. But Lord does that side present a convincing case.
리처드 로퍼(Richard Roeper) - 시카고 선타임스
여기에 페이싱 문제가 있고 영화 제작자가 이야기를 넓히기 위해 몇 가지 소스(대역배우로 연출한 연기 장면과 실제가 아닌 그래픽)를 사용하긴 했지만 어린 시절의 외상, 명성 및 소아 성애의 메커니즘에 대한 강력한 시각을 제공합니다.
Although there are pacing issues here and the filmmaker could have used a few more sources to widen the story, it's a compelling look at childhood trauma, fame and the mechanics of pedophilia.
러레인 알리(Lorraine Ali)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그리고 영화를 평가한 90명의 미국 평론가 중 본 영화를 혹평한 미국 평론가는 겨우 두명이다. (Jordan Ruimy World of Reel[172], Carla Renata The Curvy Film Critic[173]) #

그리고 이러한 일방적인 비평의 쏠림 현상은 이 다큐의 배급을 담당한, 같은 산업계에 속해있는 미국의 비평가들 외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참고로 다큐를 배급한 HBO는 미국 3대 미디어 대기업인 타임워너 소속으로 CNN TBS, TNT 등의 방송사와 언론사 타임스도 같은 계열사인데 타임스의 여러 지역지 소속 비평가들은 모두 다큐를 호평했고 CNN은 다큐를 지지하는 보도를 계속 하였다.

반면에 프랑스의 경우 지상파 TV채널 M6에서는 심리학자와 저널리스트,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하는 사람과 혐의를 주장하는 다큐 감독 댄 리드를 초청해 전문가의 견해와 함께 다큐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옹호적 입장을 같이 보여줌으로써 대중에게 일방적인 시각을 강요하지 않는 대담을 진행했으며 미국처럼 다큐 속 주장을 사실로 전제하는 평론을 내놓지도 않았다. 이는 서방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유독 미국 비평가들에게서만 확인되는 현상이다.

6.6. [기타] 루머 모음

"Prejudice is the child of ignorance" [174] - Michael Jackson
개빈사건 때 불에 탄 하드웨어가 있어서 포렌식 검사를 못한 게 있고 개빈은 마이클의 성기묘사를 정확히 했다? - 전직 FBI 출신 짐 클레멘테(Jim Clemente)
실체 없는 엉터리 주장이다. 압수수색한 경찰보고서나 재판과정 어디에도 그런 물품을 발견했단 언급이 없다. FBI는 불발없이 포렌식 검사를 모두 완료하였으며 아무런 파일:FBI 문서(2005년).png 고 밝혔고 관련문서를 전체 공개했다. 또한 짐의 주장과 반대로 개빈은 로벨 수사관에게 마이클의 성기를 본 적이 없다고 진술했고 재판기록 어디에도 개빈이 성기묘사를 했다는 언급이 없으며 당시 수사관 스캇 로스도 개빈이 그러한 진술을 시도 조차 한 적이 없다고 밝혀서 전혀 근거가 없다. 게다가 개빈은 마이클의 몸에 백반증으로 인한 반점이 있는 것도 몰랐다는 진술을 하여 알몸을 봤단 주장은 다 설득력을 잃은 인물이다. 짐은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마이클 사건을 수사하지도 않았고 개빈사건 증언과 재판기록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또한 유명 사건인 존버넷 램지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별다른 근거 없이 형제를 살인범으로 모는 주관적인 주장을 방송에서 하여 비판받았고 클레멘트의 무고 주장 때문에 CBS는 손해배상을 해야 했다.(참고 버크램지에 대한 클레멘테의 주장 비판 기사 버크램지 무죄 기사)
【설명 더보기】
【전직 FBI 수사관이라는 짐 클레멘트가 개빈사건 때 불에 탄 하드웨어가 있어서 포렌식 검사를 하지 못했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포렌식 검사는 삭제하여도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검식 방법이며 검사가 불발된 것이 있으면 기록으로 남기고 훼손된 물품은 증거 인멸의 의도로 간주될 수 있으므로 역시 형사과정을 위한 기록에 남긴다. 그러나 FBI 문서엔 포렌식 검사를 다 완료하였고 불발됐단 기록이 없으며 모든 검사와 분석 결과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나와있다. 또 그러한 물품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경찰보고서 어디에도 없으며 재판과정에서 등장한 적도 없다. 짐은 자신이 전직 FBI 수사관 출신이라는 것 외에 자신의 주장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짐은 개빈사건때 검찰 측에 유리한 자문을 해줄 사람으로 섭외되었으나 개인 사정으로 서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 외엔 마이클 사건과 어떠한 접점도 없는 인물이며 검찰이 그를 자문으로 요청한 것 자체도 그가 범죄심리학이나 아동심리 전문가가 아니기에 신뢰하기엔 문제가 있단 지적이다.( 클레멘테 주장의 문제 참고)

또한 짐은 자신이 전문가라며 마틴 바셔의 다큐를 보니 개빈이 다큐를 촬영하기 전에 성추행을 당한 걸로 보인다는 주장도 했는데, 개빈 가족은 처음부터 마틴의 다큐가 방송된 이후에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었고 개빈 조차 마틴의 다큐는 거짓이라고 증언했으니, 이는 개빈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 조차 모르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엉터리 주장이다. 또 짐은 개빈이 마이클의 성기 묘사를 정확히 했고 이것이 93년 조단 챈들러의 성기 묘사와 같았다고 주장했는데, 이와 반대로 개빈은 로벨 수사관에게 자신은 마이클을 성기를 본 적이 없다고 진술했고 재판 관련 기록 어디에도 개빈이 성기묘사를 했다는 언급이 없다. 당시 수사관 스캇 로스 또한 개빈이 성기 묘사를 했거나 그러한 진술을 하려고 시도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게다가 개빈은 마이클의 온몸에 백반증으로 인한 반점들이 있는 것도 몰랐다고 진술하여 개빈의 마이클 알몸 관련 진술은 다 설득력을 잃은 인물이며 개빈 가족의 진술 및 검찰 측의 모든 단서를 법정에서 면밀히 검토한 결과 명백한 근거 없음 무죄가 선고되었고 이후 배심원단 조차 개빈 가족은 의도가 의심되며 믿을 수 없다고 인터뷰했던 건이다.( 개빈사건 참고)

05년 개빈사건 재판 당시 검찰 측의 단서와 주장이 다 설득력을 잃자 톰 스네던 검사가 재판 종료 일주일을 앞두고 조단의 성기묘사 진술을 배심원에게 보여주려고 요청한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검찰이 제시한 진술이 실제 조단의 진술과 일치하는지 수정은 없었는지 등의 확인을 조단을 통해 직접 교차검증 받아야 하는데 조단은 해외로 도피하여 출석을 거부하였으므로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사유로 재판부가 거절했었다. 또 톰 스네던이 수사했던 조단사건에서 이미 신체수색과 불일치하여 단서로 인정받지도 못한 조단의 진술을 05년 재판에서 사용한들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 입증과 관련이 없다. (본문 조단 신체진술 관련 설명 더보기 접힌 문서 참조)

또한 조단의 진술은 개빈사건 재판이 열린 05년에 <Smoking Guns>에 유출되어 이미 공개된 것이다. 게다가 톰 스네던은 05년 재판 과정에서 조단사건 때 유도심문과 강압수사를 했던 것이 드러났고 ( 제이슨 프란시아 문건 참고) 개빈사건에 대해서도 증거조작 논란이 일었으며( 재판참관인 진술) 09년 마이클 사망 후 부검결과로 그간 톰 스네던이 말해온 성기묘사 일치설의 거짓이 드러나자 언급을 피하며 책임을 회피한 인물이다. 즉 짐은 불공정 행위를 수 차례 했던 톰 스네던의 실패한 증거 제출 시도에서 근거 없는 상상을 만들어내어 금전 대가를 받고 방송에서 선정적인 주장을 한 것이며, 2009년에 이미 허구가 증명된 주장을 2019년에 다시 사용하는 무지까지 보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수사관 출신, 의사 출신 등의 프로필로 현혹하며 충격적인 주장의 근거없음을 가리고 기사의 클릭수를 올리게 만드는 보도는 황색 저널리즘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며 그런 인터뷰어도 흔하다. 짐은 과거에도 존버넷 램지 사건에 대해 근거가 빈약하며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선정적인 주장을 하여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다.】
마이클과 어울렸던 소년의 누드 사진이 나왔다?
그런 사진은 나온 적이 없다. 05년 개빈사건 재판 전에 검찰은 93년 압수수색 때 소년의 누드사진 및 신원불명인 아이의 비키니 사진을 압수했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 재판에선 전혀 제시하지 못했고 검찰 스스로도 언급을 피하여 허위 발표를 한 것이 드러났다. (05년 재판 문서 참고) 또한 93년 조단사건은 압수수색에서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고 증거없음으로 기소가 2번이나 무산되어 종결된 사건이다.
【설명 더보기】
【05년 재판 문서를 보면, 개빈사건의 형사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검찰이 조단사건때 사실은 결정적인 증거를 압수했었다고 밝혔으나 실제 재판 과정에선 존재를 증명 조차 못한 허위 목록이 끼어있는데 이것이 바로 문제의 누드 사진이다. 톰 스네던은 03~05년 개빈사건과 93~94년 조단사건도 담당했던 검사로 재판 전에, 93년에 마이클의 저택을 압수수색 했을 때 80년대에 마이클과 어울렸던 조나단 스펜서(Jonathan Spence)로 추정되는 소년의 누드 사진을 발견했다고 밝혀서 유죄를 의심하는 여론을 일으켰었다. 그런데 이 언급은 정작 93년 수사 당시에는 없었던 말이며 조나단도 마이클이 어떠한 부적절한 접촉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이미 밝혔었고 현재까지도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막상 05년 2월에 형사재판이 시작되자 검찰은 조나단의 사진을 제시하지 못했고 마이클이 조나단에게 선물을 사줬던 점 만을 언급하며 이를 그루밍의 증거라고 주장했지 해당 사진에 대한 언급은 검찰 스스로 일절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마저도 05년 3월 28일자 재판에서 판사가 제 3자에 의해 수사기관에 공식적으로 혐의와 관련한 진술이 접수된 사람으로 증인을 한정함에 따라 조나단에 대해선 어떠한 성추행 관련 제보가 없었고 본인도 부정하고 있기에 조나단에 대한 검찰의 증거 채택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검찰은 한 소년이 부분적으로 아래로 내려진 비키니 하의를 입고 있는 사진도 93년에 경찰이 압수했다고 문서에 기록했으나 이 역시 마찬가지로 재판 과정에서 전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93년 당시 조단사건에 대한 상황을 보도한 LA 타임즈의 기사 내용을 봐도 압수수색에서 혐의를 입증할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명확히 나와 있다. 또 당시 검찰은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해서 2군데의 대배심에서 모두 기소가 무산됐었고 당시 대배심은 불리한 증거를 본 적 없다고 직접 CNN을 통해 인터뷰했었다.】
검찰이 그루밍 증거로 주장했던 책 3권은 마이클의 침실 캐비넷에 특별히 보관되어 있던 것이다?
→ 마이클의 침실엔 캐비넷이 없다. 이 루머는 네버랜드를 다녀갔던 Henry Vaccaro 란 사업가의 소유품인 캐비넷과 책을 결합해 만들어낸 허구이며 ( 재판전 문서 참고) 해당 책들은 예술품으로 인정받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아트서적으로 검찰과 경찰도 아동을 성적대상화 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검찰의 그루밍 주장은 배심원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 레이더 온라인 문건의 책 설명 참고)
【설명 더보기】
【개빈사건의 형사재판에 앞서 톰 스네던 검찰은, 헨리 바카로라는 사업가의 소유품으로 네버랜드에 들고 왔었다가 도로 가져가서 현재 미주리 주에서 소유하고 있는 캐비넷에 마이클의 속옷 및 물품들이 들어있다는 설이 있다며 증거로 요청했으나, 바카로가 그러한 물품을 캐비넷에 소지하고 있다는 진술이나 증거가 아무것도 없는 '루머일 뿐이고 개빈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유로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건이다. 바카로는 마이클 가족과 잠시 비즈니스적인 왕래를 했던 인물로, 바카로의 캐비넷에서 뭔가 허연 빨래감 같은 것을 봤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이 나돌면서 부풀려진 것인데 바카로의 개인 물품을 착각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당시 마이클의 물품은 타블로이드에 팔면 돈이 되던 시절인데도 바카로가 물품을 팔려했거나 소유를 말한 적도 없으며 경찰에 신고하거나 진술한 적도 없다. 그저 네버랜드를 스쳐간 사람이 캐비넷을 가져왔다가 도로 가져갔다는 이유만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든 루머를 검찰이 사용하려다 근거 부족으로 실패한 것이다.(05년 1월 28일 재판전 문서 참고)

또 마이클의 침실엔 일반적인 가구들만 있을 뿐이고 경찰보고서에 캐비넷이 있단 말도 문제의 책이 마이클의 침실에서 발견됐다는 언급도 없다.[175] 경찰이 압수한 아트 서적들은 도서관, 2층 영상실, 지하에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있던 것들 등이고 수천권의 책들 속에서 그루밍의 의도라며 최종 문제삼은 게 고작 3권인데 그마저도 재판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즉 검찰의 실패한 증거 요청과 실패한 그루밍 주장의 책을 결합해서, 엄연히 예술서적으로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에 성애적 망상을 씌우기 위해 문제없는 책을 구태여 숨겨놓고 본 양 꾸며낸 루머인 것이다. 심지어 책 3권 중 1권은 팬이 보낸 책, 다른 1권은 출판업자가 보낸 책이었다. 참고로 마이클은 독서광에 전문가급 영화매니아 이기도 했고 사진에 관심이 많아 사진관련 아트 서적이 많았으며 출판 비즈니스를 고려하기도 했었다.】
마이클한테서 코카인이 나왔다?
마이클의 혈액과 속옷 어디에서도 코카인이 검출된 적이 없다. (05년 1월 28일 재판전 문서 참고)
오히려 마이클은 마약 퇴치 운동을 했었다. 93년에 마이클은 지진 피해를 겪은 LA에 "Heal the World" 지부 개소식을 지미 카터 전직 대통령과 안티 갱 운동가 William Upton과 함께 열면서 마약 문제 해결과 의료 및 교육 서비스 지원을 협약하였다. 마이클은 평생 마약은 커녕 담배와 커피도 일절 안했고 술도 마시는 걸 본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절제했으며 마이클의 친구였던 Debra Willis 타이레놀 두 알 외에는 약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176]
【설명 더보기】
【톰 스네던 검찰은 개빈사건 재판 전에 다른 세탁물들과 함께 세탁물 바구니에 담겨있던 시트에서 코카인 반응이 나왔다며 증거로 제출하려고 했는데 마이클의 신체, 혈액과 속옷 어디에서도 코카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기에 마이클과 관련 없고 개빈 사건과도 관련이 없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매트리스에서 신원불명의 남성 성별 DNA가 2개 나왔는데 검찰은 이것도 증거요청을 했으나 해당 DNA가 시트에서는 나오지 않아서 침대에서 잔 사람의 흔적이 아님이 밝혀졌고, 세탁물 바구니에 담겨있던 시트에서는 매트리스에서 나온 것과 또 다른 타인의 DNA가 나와서 세탁물 바구니에서 여러 물질들이 섞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03년 9월에 연예인을 포함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네버랜드 파티가 있었기에 이때 누군가 가져왔다가 흔적이 남은 걸로 추측되는 것이었다. DNA는 손의 땀과 침, 머리카락 등 만으로도 반응이 나오는 것이고 마이클의 침실은 직원에 의해 관리됐었고 여러 사람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또 검찰은 같은 세탁물 바구니에 담겨있던 아무런 특정 반응이 나오지 않은 마이클의 속옷도 증거로 요청하였는데 마이클 측 변호인은 개빈사건과 관련 없으며 마이클은 백반증 환자로 피부연고를 발라왔고 그 흔적이 남은 것뿐인데, 검찰의 이러한 증거요청들은 사건과 관련 없는 증거물들로 배심원단에게 편견과 혐오감을 심어주려는 의도라고 반박했다. 검찰은 이외에도 98년에 허위사실 중상모략으로 27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판결받아 99년에 법원명령으로 압수된 빅토르 구티에레즈의 책과 개빈사건과 아무런 관련 없는 마이클의 성형 기록이나 마이클 가족의 문제, 검증되지 않은 마이클 루머 싸이트 등도 당시에 증거로 요청했었다. 검찰의 이러한 증거요청은 개빈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05년 1월 28일 문서 참고) 】
마이클이 키우던 침팬지 버블스가 자살을 시도했다??? (The Times of India) / 버블스를 총으로 쐈다???
버블스는 마이클의 사진을 보면 발작을 일으켜서 보여주지 않는다? ( 타블로이드 레이더 온라인, 19년 3월 10일)
버블스에게 2백만 달러의 유산을 남겼다? (FOX 뉴스 앵커 Bill O'Reilly, 2010 / GARAGE 웹사이트, 19년 3월)
모두 황당한 100% 거짓이다. 버블스가 지내고 있는 영장류센터 CFGA의 설립자 패티 라간이 직접 밝힌 기사에 따르면, 05년에 버블스는 완벽히 건강한 상태로 위탁되었고[177] 마이클의 버블스를 위한 지원 및 기부로 영장류센터의 시설도 더 좋아졌다고 한다. 유언장에 그러한 내용은 없으며 사후에는 마이클의 뜻에 따라 재단이 계속해서 지원하고 있고, 버블스는 건강히 잘 있으며 마이클의 사진과 비디오들을 보면 기뻐해서 종종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패티 라간은 무단으로 센터가 인용된 루머 기사에 대해 그런 인터뷰 요청을 받은 적도 없다고 밝혔다.
네버랜드 마이클의 침실엔 동물 박제가 있어서 아이들을 현혹했다? (가쉽 컬럼니스트들의 수다를 그대로 실은 NBC 기사에 등장)
실체 없는 거짓이며 마이클은 동물애호가이다. 압수수색 때 어떠한 동물박제도 나온 적이 없으며 ( 경찰보고서) 100여명의 네버랜드 직원 중 동물박제를 본 사람도 없고 그러한 사진도 없으며 오직 동물 조각상이 동물원과 함께 네버랜드에 있었을 뿐이다. ( #침실 설명 참고) NBC는 마이클 루머를 퍼트리다 허위방송으로 소송을 당했던 타블로이드 출신 다이앤 디몬드를 03년부터 법정기자로 고용하여 왜곡보도를 한 언론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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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의 동물 애호에 대한 일화담은 많다. 마이클의 어머니 캐서린도 이런 일화를 말한 적이 있는데, 식당에서 마이클이 셔츠 주머니에 음식을 넣길래 살펴봤더니 주머니 안에 쥐가 있었고 마이클이 몰래 키우고 있었다고 한다. 애환용 쥐가 아니라 그냥 쥐였는데 캐서린이 질색하여 결국 마이클이 계속 키우진 못했다고 한다. 마이클은 침팬지 버블스 외에도 개와 서커스 단에서 구출한 라마, 뱀 등 여러 동물을 키웠었고 마이클 자체가 폭력을 극도로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히스토리 투어 공연 중에 무대 위로 벌레가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아무도 이 벌레를 밟지 않길 바란다며 경호원에게 절대 죽이지 말고 옮겨달라고 말하는 영상도 있다.

루머를 퍼트리며 영문 링크를 걸어놓는 것으로 근거가 있는 양 하는 글들이 있는데, 링크를 클릭해서 읽어보면 문제의 NBC 기사는 동물박제 외에도 성형 루머나 마이클의 집 크기, 부유함 이런 것들에 집착하며 몇몇 사람들이 악의적인 가쉽 수다를 나누는 것을 그저 인용한 기사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 동물박제에 현혹된다는 말은 무슨 근거인지 알 수도 없는 (무서워하는 반응도 상당한데 말이다.) 전체적으로 한심한 루머이다. 언론사의 취재원을 보호하는 방패법에 의해 취재원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기사를 내면 근거가 없더라도 언론사는 법적 제제를 피할 수 있는데, 이 점을 악용하는 보도방식이 황색 저널리즘에서 흔하게 쓰인다. 현재에도 미국언론은 상업성과 편향성으로 논란이 되곤 한다.】
네버랜드에서 발견된 소년 마네킹은 핀업걸 포즈이다? 마이클은 소년 마네킹만 수집했다?
선택적 취사로 만든 왜곡이다. 03년 네버랜드 압수수색에서 발견된 실물사이즈 마네킹들은 배트맨, 슈퍼맨, 플래쉬맨, 스타워즈, 알라딘, 피터팬, 마릴린 먼로, 요리사, 웨이터 (영상 8:53 참조), 툼 레이더, 집사, 운동선수, 가정부, 마술사, 경찰관 등의 여러 캐릭터와 직업의 성인 군상들, 소년 소녀 동물 등 다양했으며 영화 < 가위손>에 사용된 실제 가위손, 각종 예술 조각상 등 마이클의 소장품은 방대했는데 이 중 극히 일부만 취사선택하여 왜곡시킨 것이다. 심지어 모든 아동은 가난과 질병, 학대로부터 구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동복지 사업을 하던 마이클이 아꼈던 누더기 옷을 걸친 아이가 곰인형을 들고있는 입상, 즉 아이에 대한 동정과 보호를 상기시키는 조각상을 더럽고 이상한 것인 양 보도했던 게 당시 미디어의 수준이다.
파일:마네킹.동화.마술사.경찰관.셜리템플.jpg
네버랜드는 여느 테마파크들처럼 동화와 영화 캐릭터, 여러 직업과 연령의 실물사이즈 상들이 많았고 밝고 익살스러운 분위기의 것들이었다.
경찰은 압수수색 광경이 타블로이드에 영상으로 보도되도록 방치했으며 검찰은 재판을 하기도 전에 성명문을 통해 아직 혐의의 단계인 것을 구체적인 외설적인 묘사까지 하며 대중에게 발표하였고 다른 다양한 마네킹들이 있는데도 압수수색 과정에서 위치가 이동되고 가발이 유실되어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사진만 선택적으로 언론보도에 활용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이 전부인 양 선입견을 유도하는 등, 마이클에겐 어떠한 인권적 배려나 중립적인 태도 없이 미디어를 이용한 사전 여론재판이 되도록 늘상 유도하면서도 1993년부터 2005년까지 대배심과 재판장에서 막상 경찰과 검찰이 주장하는 외설적인 행위의 실체가 밝혀진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대중에게 공개한 이 물품 중 어느 것도 아동음란물이나 범죄 혐의의 단서로 판정받은 게 없다. ( #표적수사 참조)

마이클은 02년에 진행한 마틴 마셔와의 인터뷰에서 마네킹에 대해 먼저 공개하고 밝힌 바 있어 숨기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마이클은 마네킹에 대해, 어릴 때부터 연예계 생활을 하느라 친구가 없어서 방안에 인형과 마네킹을 두기 시작했고 이후 너무나 외로웠으나 유명세 때문에 사람을 가까이 하기가 힘들었기에 여러 사람과 같이 있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 대신에 마네킹을 두었다고 말했었다. 실제로 마틴 바셔의 다큐엔 전 층을 다 빌려서 외부인의 접근이 통제된 마이클의 호텔 방에 유머러스한 모습의 집사, 요리사, 가정부 등의 마네킹을 둔 장면이 나온다. 80년대부터 시작해서 93년 조단사건 이후로 극심해졌던 마이클의 일거수 일투족은 물론 개인의 사생활의 영역마저 추적해서 일상적으로 왜곡을 하던 미디어의 집요한 관음증과 천박한 선정주의 그리고 마이클에게 잠시 접근했던 것 만으로도 타블로이드에 돈을 받고 가쉽을 팔아넘기던 사람들의 이기적인 속물성이 마이클로 하여금 이러한 고독에 처하도록 만든 것이다.
파일:마네킹.jpg
(왼쪽) 빨간 박스 안이 문제의 소년 마네킹. 옆에 소녀 마네킹도 보이는데 압수수색 박스 위에 올려진 것으로 보아서 위치가 이동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압수수색 과정에서 가발이 유실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마네킹들은 당시 아동복 등의 매장에서 실제 사용되던 평범한 모델로 소년 마네킹도 옷을 다 착용한 상태의 장난치는 모습이었는데 이를 외설스러운 것인 양 곡해했다. (오른쪽) 실물사이즈 영화 주인공 마네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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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과 성별이 다양한 마네킹들이 있었기에 경향을 특정할 수 없는데도 경찰은 서너개의 소년 마네킹만 부각시키며, 그것도 일부는 설정되어 있던 위치에서 이동시켜 원래 분위기를 모르게 하고 가발이 유실된 채 압수수색으로 엉망이 된 곳을 배경으로 어둡게 촬영하여 부정적인 느낌이 들게끔 한 사진으로 기록하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왜곡된 프레임을 전파시켰다. 네버랜드 곳곳엔 장식품과 예술품이 많았는데 정상적인 상태로 원위치에 있던 마네킹들은 경찰보고서에 등장하는 마네킹 사진과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경찰보고서를 보면 당시 경찰의 극단적인 편견을 실감할 수 있는데 "어린 소년이 써클 안에 앉아있는 이미지들이 인쇄된 종이들을 발견했고 문 고리에도 이와 비슷한 이상한 느낌을 주는 조각을 발견했다."라고 적어놓았는데 알고보니 이 문구는 피터팬에서 유래한 네버랜드 곳곳에 있는 상징물인 초승달 위에 앉아있는 아이의 모습을 칭한 것이었다. 누가 봐도 해석되는 이미지를 곡해한 것이다. 경찰은 이런 식으로 주관적인 편견 외에는 범죄의 증거로 간주할 만한 객관적인 것이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실체없는 편파수사를 정당화했다.

심지어 일부 타블로이드 들은 가발이 유실된 마네킹을 두고 마이클이 돈을 아끼려 가발 없이 마네킹만 구매했다는 루머를 퍼트리기도 했다. 방대한 소장품만 보아도 고작 가발 값을 아낄려고 어색해 보이는 상태로 둘 인물이 아니건만 놀랍게도 이런 천박하고 졸렬하기까지 한 루머를 기꺼이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외에 사진만 봐도 매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하드타입의 마네킹인 걸 알 수 있지만 물렁한 감촉 운운하며 섹스돌인 것처럼 왜곡하기도 했다. 이러한 편파적인 제도권과 경악할 수준의 미디어가 마이클로 하여금 너무나 외롭지만 타인을 가까이 두기 힘들게 만든 원인 제공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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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이 세이프척과 결혼반지를 맞추러 갔다가 기자들에게 들켜서 뉴스에 방송된 적이 있다. 이는 마이클이 어린 소년들과 비밀 결혼식을 했다는 리빙 네버랜드의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 당시 마이클 잭슨의 스캔들에 혈안이 돼있던 기자들이 마이클이 쥬얼리 매장에 들리자 결혼반지를 샀다고 낚시성 보도를 한 것이며 LA 타임즈의 취재 결과 이 날 구매한 것은 장남감 몇개와 선글라스가 끝이었다고 한다.


[1] 에반은 실제로 몇 번 공동으로 영화 각본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에반은 마이클에게 자신의 영화제작 아이디어를 말하며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고 마이클의 영화관련 지인이 에반의 시나리오를 읽어 보았으나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울러 에반은 과거 의료과실로 의사 면허 정지 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었고 마이클에게 혐의를 제기할 당시 빚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합의금을 요구했던 8월에 Suzanne Ager라는 환자에게 성추행 혐의로 고발 당한 상태였다. [2] 6월에서 7월 사이에 준과 슈워츠는 마이클에게 에반에 대해 알렸으나 마이클은 돈을 노리는 시도는 늘 있었다며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7월에 마이클은 사설탐정 앤서니 펠리카노에게 사건을 맡겼고 8월 4일에 마이클과 펠리카노, 조단과 에반, 에반의 변호인이 만나게 되었는데, 펠리카노의 말에 의하면 당시 에반은 마이클을 보자 인사하며 지인대하듯 행동했고 성추행에 대한 말이 나오자 조단이 마이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에반 측이 펠리카노에게 전화로 2000만 달러를 요구한 것이다. 8월 4일 이후에도 에반의 변호인인 배리 로스맨과 팰리카노가 양측을 대표하여 3차례의 협상을 시도했는데 팰리카노는 협상 과정을 테이프에 녹음하여 후에 증거로 제출했다.

에반의 남동생인 레이 챈들러의 04년 저서 <All That Glitters>에도 이 과정이 나와 있다.( 1, 2) 9일에 마이클은 에반에게 100만 달러를 제안했으나 에반은 액수가 적다며 거절했는데 이후 13일에 마이클은 오히려 그보다 더 적은 액수인 35만 달러를 제안했다. 역시 에반은 거절했는데 17일에는 갑자기 에반이 100만 달러를 다시 제안해준다면 받아들이겠다고 마이클에게 역제안 했으나 이때는 또 마이클이 거절했다. 레이는 팰리카노의 테이프에는 마이클에겐 푼돈이나 마찬가지인 금액에도 마이클이 타협하는 것을 거절하는 사례들이 가득 차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 형사수사가 시작된 것인데 실제로 조단은 아버지와 본인이 법정 심리를 피하고 합의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다며 사회복지사에게 진술했었다.

아울러 레이는 만약 마이클이 처음에 2,000만 달러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이후 10년 간은 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아동성추행범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로서 명성을 이어갔을 거라고 주장하며, 소송시작 후 수익성 높은 물밑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면적인 미디어 압박을 벌였다고 책에서 밝혀서(페이지 168) 그들의 목적이 줄곧 금전 합의였음을 드러냈다.
[3] 94년 1월 5일자 LA타임즈는 챈들러 측 변호인이 성기사진 사본이 없으니 마이클 측이 사본을 보내주거나 아니면 신체수색을 한 번 더 하거나 이것도 안되면 민사법원이 성기사진에 대한 증거채택을 금지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챈들러 측은 사진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조단의 진술이 사진과 일치해야 마이클의 은밀한 부위를 만졌다는 조단의 진술에 신빙성이 생기는 입장이다. 그런데 신체수색 사진을 보여달라고 하다가, 안되니 사진의 제출을 금지하거나 재수색을 요구하는 것은 조단의 진술과 신체수색 결과가 달랐음을 반증하는 것이자, 신체수색 후 일치하지 않았다는 정보가 조단측에 새어나간, 즉 검찰이 수사중립을 위반하고 조단 쪽을 돕고 있었다는 의혹이 생기는 부분이다. [4] 당시 검찰은 민사소송을 걸지않는 대가로 합의금을 제안하는 것은 민사법을 벗어난 것인데도, 이것을 민사변호사의 재량권으로 간주하면서 변호사가 법정 밖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는 구실로 불기소했다. 또한 마이클 측이 제시한 소송전 협상 녹음과 에반이 조단이 성추행을 극구 부인하는데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마이클을 잔혹하게 파괴하겠다고 말하는 내용 등이 담긴 많은 녹음 및 증거들도 검찰 측은 공갈협박의 실질 범죄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5] 에반과 슈워츠는 유출문제를 두고 서로를 고소했다. 레이 챈들러의 책에 의하면 슈워츠는 초기에 에반과 함께 변호사 선임 논의를 같이 하는 등 합의금을 받아내는 것에 협력하다가 준과 사이가 안좋아지면서 에반과도 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준과 슈워츠는 마이클에게 에반에 대한 경고를 한다. 아울러 조단의 부모에게 지급된 400만 달러의 합의금 중 200만 달러는 준이 받았다. 후술한 내용 참고. [6] 마이클 측은 형사 재판을 대비해 에반 측과 관련한 반박증거들을 수집해오던 중이었다. [7] 레이 챈들러의 책에 나와있는 내용들이 100% 사실은 아니지만 레이는 기본적으로 에반과 조단이 성추행을 주장해 합의금을 받아낸 것을 지지하는 입장이기에 교차분석용으로는 유효할 것이다. 레이에 의하면 에반은 93년 5월에 조단에게 지나가는 말로 마이클과 성적인 접촉이 있었는지 물었고 이에 조단이 역겹다고 말하며 아니라고 답하자 에반이 조단에게 농담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준의 말에 의하면 에반이 의심하는 말을 처음 한 시기는 6월이고 이에 조단이 화를 내며 6월 3째주 일요일의 아버지의 날에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하니 본격적으로 에반이 조단에게 의심하는 질문을 한 시기는 6월부터로 보이며 에반은 6월에 이미 변호사를 알아보고 있었다. 레이의 책에 의하면 이후 조단의 첫 고백은 7월 16일에 에반이 조단의 치아를 뽑기 위해 진정제를 투여했다가 조단이 깨어난 후에 일어났다.

조단이 계속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자 에반은 조단에게 "마이클을 걱정하니?", "마이클을 해치고 싶지 않지?", "마이클을 구할 마지막 기회를 줄게", "너가 거짓말을 하면 나는 마이클을 무너뜨릴 것이고 그건 다 너의 잘못이다" 등의 말을 했고, 에반은 마이클과 조단이 단 둘이 방에 있을 때 도청을 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며 둘이 껴안고 키스하는 장면도 봤다는 말까지 조단에게 했지만 역시 조단은 부인했으며 레이 조차 이 말은 에반의 거짓말이었다고 적었다. 이러한 말들 후에 결국 에반의 "마이클이 너의 성기를 만졌니?"라는 질문에 조단이 망설이다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네"라고 한마디 처음 답하게 되었다고 레이는 밝혔다. 또한 레이는 에반에게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라는 대답을 얻어낸 후 에반은 조단에게 더 이상의 자세한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고 이후 에반 스스로도 검사에게 "이 일에 대해 다시는 조단과 얘기하지 않았다"며 실제 진술했다고 밝혔다.
[8] 한편 에반이 조단에게 처음 고백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논란이 많은 진정제인 소디움 아미탈을 투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에반은 이 약물이 포함된 진정제 사용 면허를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94년 5월 <LA KCBS-TV>는 93년 7월 16일에 에반이 조단의 치아를 뽑는 과정에서 소디움 아미탈을 투여했고 에반이 그것을 인정했지만 다만 치료 목적이었다며 해명했다고 보도했다. 소디움 아미탈은 잊고 있었던 진짜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지만 역으로 거짓기억을 심어줄 수도 있어서 증언이 이 약물의 영향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발각되면 재판에서 증거능력을 상실한다. <GQ 매거진>의 메리 피셔는 해당 의혹에 대해 당시 에반과 같이 있었던 마취과 의사 마크 토비너에게 사실여부를 물었으나 토비너는 "내가 소디움 아미탈을 사용했다면, 치과 치료 목적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사용하지 않았다는 확답을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디움 아미탈은 일반적으로 치과 마취용으로는 사용되지는 않는 약물이다.

그런데 보도에는 에반이 투여사실을 인정했다고 나오지만 레이 챈들러는 에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또 마크 토비너에 대해서도 환자의 서면동의가 없이는 개인 의료정보를 함부로 밝힐 수 없기 때문에 메리 피셔의 질문에도 답변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은 약물 1종류는 환자의 정보가 아니며 정보에 대한 힌트도 아니기에 밝힐 수 있다. 그러나 에반이 조단의 진료기록 자체를 아예 작성하지 않아서 투여사실을 입증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레이는 어떤 약물을 투여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에반이 진정제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9] 통화내용에는 에반의 태도 돌변 계기에 대해 힌트가 되는 대화도 나온다. 에반은 마이클이 자신과의 연락을 끊은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며 분노하고 있었고 자신을 제외한 준과 조단이 계속 마이클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불쾌해 했으며 또 조단은 에반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준은 에반에게 화를 내는 등의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들이 나온다. 대부분의 대화는 자신의 뜻을 안따르면 준도 마이클도 모두 크게 당할거라는 협박성 말들이고 성추행에 대한 걱정이나 분노는 없다. 또 에반의 동생인 레이의 책에서 두통에 시달리던 마이클을 자신의 집에 보다 잘 머무르게 하기 위해 에반이 집에 사우나 시설을 설치하는 것을 계획하기도 하는 등 에반이 마이클과의 관계에 기대하고 집착한 상황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화 제작 아이디어를 말하는 에반을 얼마간 겪은 후에 마이클은 에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또 마이클 측 사설탐정 펠리카노가 형사재판을 대비해 모았던 반박 자료에 따르면 에반은 4월에 에반의 치과 환자인 캐롤 피셔(Carol Fischer)에게 자기 아들과 마이클과의 관계를 자랑했으며 당시 마이클과 자기 아들이 한 방을 쓰는 것에 개의치 않았고 "자기 아들이 마이클에게 매우 잘 보였다."고 말하며 흡족해 했다고 한다. 레이의 책엔 5월부터 에반이 마이클을 의심했다고 나오나 준에 의하면 6월부터 시작됐다고 하며 이 시기는 당시 할리우드 아동배우였던 코리 펠드만을 아동성학대한 존 그리삼이 코리가 마이클과 가깝게 지내자 자신의 범죄가 드러날까 우려해 경찰에 마이클이 의심스럽다며 제보한 시기이며 이에 탐문에 나섰던 경찰에게 조단이 자신의 아버지가 돈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말한 시기이기도 하다.(본문 하단 및 제이슨 프란시아 문건 참조) 이후 7월 11일 방문 이후로 에반이 조단을 준에게 돌려보내지 않아 조단은 에반과 살게되면서 에반에게 협조하게 된다.
[10] 마이클은 과거 펩시광고 촬영 중에 머리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었는데, 이때 손상된 두피를 재건하기 위해 다른 정상적인 두피 밑에 에어백을 넣어서 두피를 점차 늘이는 처치를 받다가 투어 전에 늘린 두피를 이어붙이는 두피재건 수술을 받았고 이로 인해 심각한 두통에 시달렸다. 또 통증 때문에 투여받던 진통제에 대한 부작용까지 나타나면서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었고 이에 대한 치료도 받던 중이었다. [11] 재판부가 이 요청을 받아들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이로써 당시 검찰 및 경찰의 수사당국이 대배심에 수사결과를 제출하기도 전에 조단 측에 먼저 어느정도 정보를 공유하여 돕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마이클 측은 전혀 몰랐으나 조단 측 변호사는 덕분에 그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피할 조치를 미리 요청할 수 있었다. [12] 사건 종결 이후에도 톰 스네던은 마이클에 대한 허위제보를 쫓아 캐나다까지 자비로 출장을 다니는 등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고, 톰 스네던이 또 지휘한 05년 개빈사건 재판 때에도 증인으로 출석한 흑인 코메디언 크리스 터커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고 증거조작 의혹이 이는 등 여러 논란을 낳았다. 아울러 이 시기에, 마이클은 원래 94년 6월에 발표할 예정이었던 <History> 앨범에 조단 사건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담아 보완하여 95년 5월에 제도권의 탐욕과 부조리, 미디어의 왜곡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곡들로 다수 채워서 발표하였는데, 그 중 ' D.S.'란 곡에서 수사 기관의 불공정을 비판하며 톰 스네던을 암시하는 듯한 "Dom Sheldon is cold man'이란 가사를 넣었었다. [13] 선언문은 03년 <Smoking Gun>에 유출됐다. [14] 형사기소 절차엔 피의자(마이클) 측 변호사가 참석하여 공개로 진행되는 예비심사도 있으나 톰 스네던은 피의자 측이 참석할 수 없는 비공개 대배심을 선택하였다. 살인이나 아동성범죄와 같은 중범죄의 경우 대배심을 요청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15] 형사 기소와 동시에 민사가 제기되어 있는 상황일 때 형사 재판보다 민사 재판을 먼저 진행할 수 없다는 법안은 있었지만 조단 사건과 같이 형사 기소가 되기도 전에 민사소송을 진행하는 것을 막는 법안이 없었다. [16] 아동의 신체적 정신적 취약성을 감안하여 재판 과정에서 보호적 조치를 받는 예를 조단 측이 인용한 것. 그런데 05년 2차 혐의의 당사자인 개빈도 조단과 같은 13세였으나 수사 시작으로부터 근 이년이 지나서 재판이 열렸다. [17] 실제로 조단측은 신속하고 수익성 높은 합의를 위하여 마이클에게 압력을 가하는 전면적인 미디어 캠페인을 벌였었다고 조단의 삼촌인 레이 챈들러가 그의 저서 <All That Glitters>에서 밝힌 바 있다. (페이지 168) [18] 민사 연기가 거부된 후 양측 동의 하에 94년 1월 18일을 첫 사전재판 진술(deposition) 일정으로 잡았는데 이때 마이클은 만약 형사기소가 그동안에 이뤄진다면 민사 사전재판 진술 일정을 연기할 뜻이 있음을 밝혔었다. 이후 형사기소가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94년 1월 14일에 판사는 18일로 예정됐던 마이클의 진술 일정을 25일 ~ 2월 1일로 연기했고, 이에 따라 조단의 변호인인 레리 펠드만의 요청으로 조단의 법정 심리(hearing)도 25일로 연기했다. [19] 즉 민사 사전재판 임에도 형사에 기여하도록 재판부가 판정함으로써 형사와 직접 연관되나 형사일 때 적용받을 수 있는 피의자의 권리는 제한되게 되는 법리적 모순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법리오류는 일차적으로 형사기소가 되지 않았는데도 민사 진행을 선행하게 만든 재판부의 결정에 원인이 있다. 이후 형사 기소가 되기 전에 민사를 선행하게 할 경우 법리왜곡이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고 법개정을 하게 된다. 이 말은 조단사건 이전엔 이러한 케이스가 없었다는 말이다. 조단 측의 예외적 태도와 재판부의 예외적 판정이 함께 만든 모순된 상황이다. [20] 94년 1월 30일자 <New Sunday Times>는 1월 13일에 보험사 <Transamerica Insurance Group>이 마이클에게 보험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으나 마이클이 일단은 수령을 거부했고 보험사와 계속 협의가 진행중이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최종적으로 합의금을 보험사가 지급한 것인지 여부는 언급되지 않았다. 13년 CNN 기사에는 합의 당시 보험사가 합의금을 지불했다는 보도들이 있었다고 적혀 있기는 하다. 한편 에반측 변호인인 배리 로스맨의 수석비서였던 Geraldine Hughes는 19년 <Truth Be Told Radio>와의 인터뷰( 32분 20초)에서 합의금은 보험사가 지급한 것이며 마이클은 동전 한 닙 지불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개빈사건 당시 마이클 변호팀의 사설탐정이었던 스캇 로스도 마찬가지로 19년 <Nicole's View>와의 인터뷰( 51분 42초)에서 합의금 전액을 보험사에서 지급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05년 재판때 제출한 보험사에서 합의를 진행하고 합의금을 지급했단 내용의 마이클측 파일:합의보험사.jpg 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스캇 로스와 같이 일했던 개빈사건 당시 마이클의 변호인 토마스 매제로우는 14년 킹 조단과의 인터뷰에서 합의금을 보험사가 지급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서 주장들이 엇갈린다. [21] 원천적으로 민사의 범주는 형사를 넘지 못한다는 엄격한 법적 구분이 있기에 민사는 형사를 침해할 수 없다. (만일 민사조항이 형사를 침해할 경우 상위법에 의해 해당 민사 조항은 무효화된다.) 게다가 미국에서 아동성범죄는 상당한 중범죄이기 때문에 형사에 더욱 엄격하며, 합의로 인해 진행 중인 형사수사가 종료되지도 않을 뿐더러 실제로 종료된 적도 없다. 또한 합의가 형사상 유무죄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며 수사 결과 유죄로 드러났을 시 범죄 피해를 인정하고 보상한다는 민사합의가 있으면 양형참작 정도의 기능만 일부 가능한 것인데 마이클은 피해와 혐의를 아예 부정하는 합의문을 썼기 때문에 애초에 양형참작(반성) 건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또한 이후로 형사 사건에서 기소되기 전에 민사소송을 먼저 걸지 못하도록 캘리포니아 주 법이 바뀌었단 점과 마이클은 형사를 먼저 받길 원했으나 오히려 재판부가 법개정과 반대로 형사 선행을 거절하고 민사 재판을 할 경우 형사에 불리해지도록 허용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법망의 미비와 재판부의 판정, 합의 전에 이미 기소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도 형사 결과가 먼저 드러나지 않도록 당시 소집되어 있던 산타바바라 대배심에 수사 결과 제출을 늦추고 기소판정 요청을 하지 않으며 지연시켰던 검찰 측 태도가 재판 보다 합의를 하게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 상황이었다.
[22] 톰 스네던 검사는 사건이 끝난 뒤에 편파수사 논란에 대해, 민사 합의로 조단이 더이상 증언하지 않아서 기소를 못한 거라며 면피하는 발언을 지속적으로 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합의금으로 재판장을 빠져나간 것처럼 인식하게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실제 기록은 톰 스네던 말의 반대였다. 마이클은 오히려 형사를 먼저 받길 원했고, 조단 측이 이를 반대했으며 합의 이전에 사건 시작부터 애초에 조단 측은 형사를 피하려 한 정황까지 나왔기 때문이다.(후술한 내용 참조)

또한 대배심과 사후에 공개된 FBI 기록을 보면 94년 1월의 합의 전에 조단의 신체 진술 및 마이클에 대한 신체 수색, 4차례 압수수색의 대부분의 수사가 이미 93년 12월에 끝났고 이때 신체수색 결과마저도 상반되어 조단의 진술은 스스로 모순된, 즉 조단의 진술 자체가 신뢰성이 대부분 훼손된 상황이었으므로 계속 말로 진술한다고 한들 기소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합의 이후에 근 반년간 조단은 형사진술을 했지만 단서가 된 것이 없으며 조단의 진술은 수사 내내 단서가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수사 결과 어떠한 증거나 뒷받침할 정황 증언도 없고 오히려 조단측 주장과 모순되는 정황 증언만 나오는데다 93년 12월 신체수색으로 당사자의 진술까지 모순됐음이 확인됐을 때 무혐의 처분을 해야했으나 무시하고 유도심문 및 강압수사의 불공정 행위까지 동원하여(후술한 내용 참조) 수사를 강행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단서도 못얻어내고 종결되자 톰 스네던 검찰 측은 이러한 상황을 숨기며 "진술일치설" 등 면피성 허위발언을 했고 마이클 사후에 부검결과와 수사기록 공개로 실체없음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23] 마이클은 04년 재판 재판 성명서에서 94년 합의에 대해 "I have always maintained my innocence, and vehemently denied that these events ever took place. I reluctantly chose to settle the false claims only to end the terrible publicity and to continue with my life and career"라고 언급했었다. [24] 특히 마이클의 절친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마이클과 연애 중이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마이클의 건강을 걱정하며 합의를 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클은 94년 5월에 리사와 결혼한다. [25] 대배심은 교차 질문을 통해 진술의 의문점을 검토하는데, 당시 수사관이었던 빌 드워린(Bill Dworin)에 의하면 조단은 형사 진술 외에도 검사 사무실과 아동가정복지국(Department of Children and Family Services)에서도 진술하여, 이렇게 검증없이 진술만 하는 것은 해왔지만 질의응답의 돌발변수가 있는 대배심 출석 증언은 피했다. 이에 따라 진술의 진실성 및 진술과정에서 번복이나 인위적인 수정, 혹은 압박은 없었는지 등의 교차검증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26] 대배심은 보통 16명 ~ 23명으로 구성된 대배심의 배심원단이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과 검찰이 제시한 수사기록을 토대로 기소여부를 결정하며, 단서를 검수하는 과정에서 기소에 상당하다고 판단되면 대배심이 기소를 할 수 있고 또 검수과정에서 필요하면 소환을 요구할 수 도 있으며, 대배심이 먼저 기소를 하지 않더라도 검찰이 기소판정을 의뢰하면 표결로 기소여부를 결정한다. 마이클은 산타바바라 LA 각각 별개의 두 군데에서 검증을 받았다.

톰 스네던 검찰 측은 유효한 단서제출을 하나도 하지 못했고 따라서 대배심에 부정적으로 판정결과가 나올 기소판정을 아예 요청하지 않았고 검찰이 증거없음에 따라 기소를 포기하는 불기소로 종결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상황에서 대배심에 판정을 의뢰했다면 기소불가의 명확한 결과가 나온다. 아울러 민사재판에서도 원고(조단)가 피고(마이클)에게 금전 보상을 요구하는 경우 배심원 재판을 받을 권리가 주어지는데 조단사건 민사재판도 배심원 재판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27] FBI는 93~94년 외에 04~05년에도 아동성추행 혐의와 관련하여 수사기관의 요청에 따라 도움을 줬다. 또한 FBI가 마이클을 상대로 한 협박사건을 장기간에 걸쳐 조사했던 적도 있다. 한편 13년에는 영국의 <선데이 미러>에서 자신들이 입수한 09년 공개된 FBI 문건이라며 마이클이 80년대 중반부터 24명의 아동을 성추행하고 2,300만 달러로 입막음을 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명백한 허위보도다.( #24명 아동합의금 허위보도 주석 참고) FBI가 공개한 문건은 300페이지에 달하며 직접 확인할 수 있고 그러한 내용은 없다. 문건 보기. 이들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FBI가 경찰과 긴밀하게 공조 수사해서 입막음 증거를 찾았는데도 재판에 증거 제출도 하지않고 은폐했단 말인데, 이는 청문회를 열어야 할 만큼 심각한 범죄행위인데 FBI측도 정부도 문제삼지 않으니 마이클이 경찰부터 FBI, 정부까지 다 매수했다는 말이며, 그런 힘을 가지고도 2번이나 수사에 시달렸다고 주장하니, 그야말로 근거없는 황당한 루머이다. [28] 마이클은 95년에 다이앤 소여와의 인터뷰에서 조단 사건에 대해 질문을 받고는 본인의 결백을 말했는데 에반은 이것이 민사합의 조항 위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에반은 피고로 마이클뿐만 아니라 인터뷰 자리에 같이 있었던 당시 마이클의 부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다이앤 소여 그리고 인터뷰를 방송한 ABC 채널과 마이클의 소속사 소니까지 포함시켰다. 에반은 또 95년에 발매된 마이클의 HIStory 앨범에서도 사건을 암시하는 곡들이 있다며 이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29] 그러나 사후 공개된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 FBI 문서를 통해 조단의 계속된 증언은 실제적으로 형사수사에 기여한 바가 없었음이 드러났다. 조단측은 증언 중단한 이유를 검찰의 지연에 전가하고 검찰은 성과없이 수사종료된 것에 조단의 증언 중단을 강조하는, 이러한 양상을 당시에 보였었다. [30] 레리 펠드만 이전에 글로리아 앨러드라는 변호인이 있었는데 조단이 법정에서 증언할 것이라고 93년 9월에 언론에 입장을 밝힌 후 며칠이 지나서 에반이 글로리아를 갑자기 해임시켰고 레리 펠드만이 맡게 된 것이다. [31] 민사합의가 이루어진 94년 1월 25일 전에 조단이 신체진술까지 이미 다 끝냈고 신체수색을 비롯한 4차례 압수수색 등 대부분의 수사도 끝났지만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고 신체수색과도 모순되면서 조단의 진술은 이미 신빙성이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또 조단의 진술이 대배심에 기록으로 제출됐지만 조단이 대배심의 질의응답 심리를 피했기 때문에 진술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교차 검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배심에서 수사결과 및 다른 관련자 진술과 대조된 결과 조단의 진술은 민사 합의 전에 했던 진술부터 이후에 했던 것들까지 어느 것도 단서로 인정받지 못했다. [32] 즉 초기 제이슨이 결백하다고 진술한 것이 유도심문을 거치며 번복하게 된 것이 기록으로 남았기 때문에 진술기록 전체를 검토하는 대배심에서 단서로 인정받을 수 없는 건이었고 실제 조단사건의 혐의를 뒷받침할 단서(추가 피해자)로도 인정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어차피 기소할 수 없는 건이었다. [33] (05년 4월 7일 랄프 채콘 법정기록 참조) 아울러 러스 버침 수사관은 9살 제이슨 프란시아에게 유도심문을 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랄프 채콘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주석 #랄프 채콘, #네버랜드 5 참고. [34] 존 그리삼은 코리가 마이클과 친해지자 자신의 범죄가 들통날까 우려해 93년에 조단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경찰에 마이클이 수상하다며 먼저 제보한 인물이기도 하다. 존 그리삼은 출소 후 성범죄자 주소 등록을 거부하여 현재는 행방을 모르는 상태이고 언론보도도 되지 않아 출연작에서 조용히 이름만 삭제됐다. 코리는 마이클은 절대 소아성애자가 아니며 오히려 범죄를 극복하도록 도와준 인물이고 마이클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성학대로 인한 정신적 피폐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었다. 한편 코리는 2017년에 미투운동이 시작될 때 존 그리삼 외의 할리우드 실력자들이 포진한 소아성애 집단을 더 폭로하려 했고 유명배우 브래드 피트와 아동배우 출신 엘리웃 우드도 동참하는 인터뷰를 했으나 미디어의 냉대로 결국 묻히는 사건이 있었다. 코리의 폭로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다음의 헐리우드 소아성애 논란 1, 2, 3, 4 참고. [35] 그로부터 정확히 20년 후 웨이드 롭슨은 마이클에게 성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리빙 네버랜드 문서 참고. [36] 개빈사건 때도 담당 검사가 되어 마이클을 기소했던 톰 스네던은 05년 5월 형사재판 마무리를 한 주 앞두고 모순된 신체수색 결과는 제외한 조단의 성기묘사 자료만 증거로 채택하여 배심원들에게 보여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증거로 채택될려면 기본적으로 조단이 재판에 출석하여 진술에 대한 교차검증을 받아야 하는데 조단이 이미 증인 출석을 거부하여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이클의 변호팀은 반대했었고 판사는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또 조단의 성기묘사는 모순되어서 당시 대배심에서도 단서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고 개빈은 성기묘사를 한 적이 없었고 백반증으로 마이클의 몸에 반점이 있는 것도 몰랐다고 진술하여 조단의 진술과 대조할 꺼리 조차 없었기 때문에, 톰 스네던의 증거 채택 시도는 배심원단으로 하여금 선입견이나 감정적 거부감을 받도록 하는 거 외에는 혐의 입증과 관련이 없었다. 개빈사건은 배심원 전원 무죄평결을 받았다. [37] 마이클 사후에 조단의 여동생이라고 밝히며 에반이 시켜서 한 거짓말이었고 이로 인해 자신의 가족이 파괴되었다고 말하는 페이스북 글이 올라와서 화제가 된 적이 있으나 실제 조단의 동생이 쓴 글인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이후 해당 계정은 삭제되었다. 아울러 에반이 자살할 당시 에반 몫으로 받은 합의금은 사업실패 등으로 오래 전에 탕진한 것이 맞으나 조단 몫의 거액의 합의금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고 - 05년 에반의 폭행 사건 후에 조단이 뉴욕의 아파트를 사서 이사했다는 언급이 있는 걸 보면 조단 몫은 탕진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 조단은 별다른 직업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8] 09년 6월 25일 "This is It" 공연을 2주 앞두고, 대리의사로 와있던 콘래드 머레이가 마이클이 이미 정신을 잃었는데도 심장마비의 부작용이 있는 수면마취제 졸피뎀을 치사량으로 혈관주입하여 심장마비를 일으킨 후 제대로 된 응급처치를 하지 않는 의문의 행동으로 마이클은 사망하고 말았다. 콘래드 머레이는 이후 과실치사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마이클은 조단사건 때문에 불면증을 앓기 시작했다. [39] 몇 년간 마이클의 다큐를 찍겠다고 요청했던 인물로 마이클이 2001년 이후로 활동을 중지한 뒤 모습을 잘 볼 수 없게 되자 타블로이드 루머가 마이클의 이미지를 더욱 좌우하게 됐고, 마이클은 네버랜드에서 지내는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면 여론이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마침내 다큐 촬영을 허락한 건이었다. 마틴은 마이클이 좋아했던 영국의 다이애나비를 인터뷰한 경력이 있어 이를 믿고 허락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참고로 영국은 마이클에게 와코잭코(원숭이로 비하하는 인종차별 단어)의 멸칭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국가이며 인종차별 정서가 심각한 수준이다. 마틴이 의도적으로 왜곡했음이 드러나자 마틴은 방송사에서 요구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40] 또한 마이클은 아이들과의 '잠'을 성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항변도 했는데, 여기서 마이클이 말한 '잠'도 방송에서 삭제된 뒷 대화와 연결된 내용인 아이들이 부탁하고 부모님이 허락하면 침실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고 따로 잘 수 있도록 침대를 내어준다는 의미였으나 이 말 또한 마틴의 편집으로 왜곡됐다. 마이클은 당시 세 자녀의 아버지였고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마이클은 육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직접 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틴의 다큐 촬영 때에도 3째 비기의 아기용 침대를 마이클의 침실에 두고 직접 육아하며 생활하던 중이었다. [41] 마이클은 카메라를 끄면 대답해주겠다고 했고, 카메라를 끄자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나 자신에게는 수많은 동성애자 팬이 있고 자신이 어떻게 생각되든 상관없지만 그 팬들의 마음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에 밝히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42] 06년 9월 GQ Magazine의 Robert Sandall의 기사 'Michael Jackson Was My Lover' [43] 따라서 아이들에게 하는 행동은 그 자신에게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고 심리학자는 분석했다. 아이들에 대한 보살핌과 자선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는 뜻 [44] 마이클은 마틴 바셔와 02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함께 생활하면서 다큐를 촬영했고 마틴을 친구처럼 신뢰했다고 한다. 그래서 촬영 때의 상황과 완전 반대로 왜곡된 편집 영상이 방영되었을 때 마이클이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45] 아래에서 인용한 심리학자 Dieter Speck의 박사는 이에 대해, 마이클은 아이들과 함께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아이들 옆에 있는 것이고 이것은 분명한 차이점이며, 마이클의 어린 시절에 아무도 그의 옆에서 다정하고 친근하게 있으려 하지 않았고 그게 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즉 박사의 이 분석에 따르면 마이클은 자신이 겪었던 상처 때문에 함께 있으려는 아이들의 바램을 거절하기 힘든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46] 마틴이 자기라면 허락하지 않겠다며 의심하는 말을 계속하자, 마이클은 '서로 잘 알고 친하지 않은 관계라면 거절할 것이다. 난 내 아이들을 내가 잘 알고 좋아하며 믿는 사람과 함께 어울리게 한다', 즉 자신처럼 아이들의 부모도 이유있는 판단을 했을 것이란 의미의 말을 한다. 이후 마틴이 개빈에게 엄마의 반응이 어떠했냐고 물어보자 개빈은 엄마도 좋아했으며 우리 가족은 행복했다고 말한다. [47]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이 계속해서 파고드는 질문을 하자, 마이클은 '당신의 의도는 틀렸다. 나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한다. 나의 음악들은 모두 같은 레벨의 innocence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건 순수한 의식이다.' 라며 자신의 관점을 말한다. 마틴 바셔 인터뷰 당시 마이클은 3자녀를 키우던 아버지였다. [48] 마이클은 93년에 제기된 1차 혐의가 증거없음 기소불가로 종료된 후, 94년에 리사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하면서 네버랜드를 떠나 뉴욕에서 96년까지 거주했고 이후론 히스토리 투어로 해외에 있었으며 98년 경부터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네버랜드에서 다시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93년 사건 이후로 기존 지인들 외의 외부인의 개별적인 방문은 어려웠으며 주로 장애인이나 환자 혹은 단체 방문의 자선행사를 위해서만 네버랜드를 개방했었고 잘 아는 지인이 아닌 외부인이 침실에 머물도록 허락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90년대 초까지 마이클과 어울리던 아이들 중 친했던 일부는 성인이 되면서 계속 우정을 이어나가 맥컬리는 마이클 자녀의 대부가 되고 아래의 프랭크는 마이클의 비서 일을 하는 등 03년엔 성인 친구로써 마이클 패밀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05년 개빈 사건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들은 94년 까지의 일들에 대해 진술하는 사람들일 뿐 검찰은 개빈건 외에 이 시점 이후에 발생한 의심할 수 있는 다른 상황이나 목격자를 찾을 수 없었다. 아래 본문에 기술된 증언과 진술들은 대부분 마틴이 인터뷰 하던 03년으로부터 10년 전인 90년대 초 까지의 일화들이며 그 이후론 이런 상황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개빈 가족은 개빈이 암환자였기 때문에 자선의 의미로 방문이 허락된 것이고 네버랜드에 온 첫날에 개빈이 메인하우스 침실에 머물기를 부탁하여 처음부터 거절하기 어려웠던 마이클은 아래에 후술된 성인인 비서 프랭크와 함께 머뭄으로써 불미스러운 오해를 막으려 했었다. 마이클은 2000년 부터 개빈의 병치유를 도왔지만 금전적인 지원 외에 개인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다.
[49] 재판에서 마이클은 자신이 아이들을 초대한 적 없으며 과거 10여년 전에 몇몇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잠든 적이 있다고만 진술하였다. 또한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네버랜드를 다녀간 수백명의 아이들이 마이클의 침실에 출입한 것이 아니라 일부 소수였으며 그들의 부모와 아이가 부탁했고 가족 전체와 격의없는 사이가 된 예였다. 그러나 재판 당시 다수의 미디어들은 이 진술을 왜곡해 마이클이 아이들을 초대한 것을 인정했다고 보도하여 마이클을 아이들과 같이 자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곡해하였다.

심지어 사후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종차별 문제가 있어온 미국과 영국 등의 서구 언론들이 이 왜곡을 인용하며 침실 프레임을 지속시켜서 무죄 입증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가쉽성 해외기사를 번역한 한국의 기사에서도 발견될 때가 있다. 하지만 재판기록엔 그러한 진술이 없다.
[50] 아울러 카렌은 마이클이 아이들에게 관대한 점을 이용하는 부모들도 있었다고 밝혔다. 아이들을 마이클에게 보내어 쇼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거나 마이클의 카드를 빌려오게끔 시키는 부모들이 있었으며 이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자꾸 메인하우스에 보내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의도적으로 아이를 접근시켜 협박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필립 몽타구라는 사기 전과가 있던 사업가가 자신의 아이를 네버랜드에 데려와 추억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고 이에 마이클이 얼마간 아이와 숨바꼭질을 하며 놀아주자 이것을 영상으로 찍었는데 이후 마이클이 사업 계약을 거절하자 05년 재판 즈음에 이 영상을 빌미로 자신의 아이와 은밀한 시간을 보냈다고 거짓말을 하며 마이클에게 압력을 넣으려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톰 스네던 검찰은 몽타구를 05년 재판의 검찰 측 증인으로 부르려 했으나 아이와 아이의 친모가 몽타구의 거짓말을 부인하며 내막을 폭로하였고 몽타구는 결국 증인 출석을 취소하며 이 사건은 미수에 그쳤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던 마이클의 집을 돌아다니며 순수하게 아이와 놀아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친절한 모습마저 의아하게 각색하던 당시 언론의 왜곡과 마이클에게 무리하게 혐의를 적용하려던 검찰에 의해 이런 것마저 협박에 이용되던 시절이었다.
[51] 마틴 바셔 인터뷰에서 개빈이 마이클은 바닥에서 따로 잤음을 밝히자 마틴은 그럼 예전에는 같은 침대를 쓴 적은 없었냐며 마이클에게 물었고, 마이클은 맥컬리 컬킨이 애기일때 (03년때 맥컬리는 23살이었음) 맥컬리의 동생과 함께 침대를 썼었고 그건 아이들과 물풍선 놀이를 하다가 지쳐 잠드는 그런 상황이었으며 과거에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웨이드 롭슨의 누나인 찬탈 롭슨도 이와 비슷한 진술을 한 적이 있는데, 93년 CNN 인터뷰에서 자신이 11살이고 롭슨이 8살일 때 동생과 함께 마이클의 침대에서 잠든 적이 있었으나 그건 만화책 보다가 잠드는 그런 상황이지 의도된 상황이 아니며 여러 사람이 있었다고 밝혔다.

즉 마틴 바셔가 인터뷰하던 03년으로 부터 10여년도 훨 전에 단 둘이 아니라 일부 친한 여러 아이들과 놀다 지쳐 의도치 않게 잠들곤 했던 일이 있었으나 이때도 본문에서 기술했다시피 누구나 언제고 드나들던 공개된 상황이며 대부분 부모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던 상황이었다고 맥컬리를 비롯한 90년대 초에 어울렸던 다른 아이들과 가족들이 진술했었다. 네버랜드 방문객은 가족 단위였으며 마이클은 가족들 전체와 교류했었다.
[52] 03년 CBS 인터뷰에서 경찰관들이 마이클을 배설물이 곳곳에 묻어있는 더러운 화장실에 50여분간 감금하고 갇혀있는 마이클을 향해 조롱하는 말들을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마이클 측은 마이클이 입은 여러 부상과 함께 경찰관들의 가혹행위에 대해 항의했으나 경찰 측은 부인하였다. [53]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에 대해 수사당국이 성명문을 발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기 전에 상세한 정황과 구체적인 행위를 날짜와 함께 묘사하는 성명문은 이후 형사재판에서 상대측 대응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기에 일반적으론 잘 쓰지 않는 방식이다. 톰 스네던의 행위는 수사당국의 일반적인 성명문의 성질을 넘어선 언론 플레이에 가까우며 따라서 05년 재판까지 검찰의 성명문에 근거한 각종 선정적인 루머와 편파적인 보도가 계속되었다. 그래서 당시 재판 전 여론은 대부분 유죄로 생각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었고 배심원단 중 일부도 재판에 임하기 전에 유죄로 생각했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은 스스로 주장을 변경하며 아무것도 입증해내지 못했고 유죄의 선입견을 가졌던 배심원도 모두 무죄 평결을 내렸다. [54] 표면적으론 초기에 이 곡에 등장했던 jew라는 단어가 유대인을 비하하는 단어라고 금지의 이유를 대었으나 마이클은 이 단어가 논란이 되자 인종차별적 의도가 아니라 제도권의 탐욕을 지칭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사과한 뒤 가사를 수정하고 발표하였기에 뮤직비디오와는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92년 LA 폭동의 계기가 된 흑인 인종차별 로드니 킹 사건을 직접 담고 네오콘식(미국의 네오콘은 실제 유대계 자본과 연관이 있다.) 무력주의 를 비판하는 당시로선 충격적인 뮤직비디오의 정치적인 내용이 민감한 부분이었다. 이 외에도 제 3세계 군부독재의 만행과 아프리카 내전, 한국의 서울의 봄 민주화 운동 장면도 삽입되어 있다. 당시 미국의 평론가들은 히스토리 앨범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그 결과 미국에서의 히스토리 앨범의 순위는 유럽에 비해 낮은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나 동유럽과 남미 등의 제 3세계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이 따랐고 동유럽의 해방자라는 별칭이 생긴 앨범이 되었다. [55] 2002년 영국의 Exeter Football Club에서 한 이 연설은 마이클 잭슨을 죽인 연설로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이클은 연예인 중 유일하게 종교와 정치를 불문하고 세계 각국의 대표자가 응대하던 세계적인 인사였고 그 자신이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개입하던 운동가였다. 마이클이 받은 혐의와 루머들은 미디어에 의해 증폭되고 견인되었는데 이는 흑인 프론티어이자 사회운동가로써 마이클이 가지는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56] 예를 들어 92년에 LA 폭동이 일어났던 흑인 빈민지역은 대규모 지진까지 겹쳐 열악함이 심각했고 마이클은 흑인사회 회생을 위해 "Heal the World" LA지부를 설립하면서 교육과 의료 서비스, 마약퇴치를 위해 125만 달러를 지원하고 2000억 달러 규모의 지원금을 조달하는 계획을 92년에 발표했었다. 이는 당시 주정부의 예산 보다 큰 규모였다. 이후 93년에 조단 챈들러 사건이 터지자 워싱턴 포스트지와 같은 보수 매체들은 부정적인 보도를 하며 마이클의 흑인사회 지원사업을 비하하는 사설을 함께 내곤 했었다.

즉 마이클로 인해 제도권의 정책에 대한 흑인사회의 비판과 요구치가 높아져 흑인사회가 각성하게 되는 것을 막기위해 조단사건을 빌미삼아 편파적인 부정적 보도를 하며 마이클의 사회적 영향력을 희석시키려 한 것이다. 미국의 정책은 마이클의 사회사업과 달리 흑인사회의 빈곤과 마약 등의 고질적인 악순환을 개선하기 위한 교육 및 환경 지원 보다는 복지 수당에 머무르는 임시방편적인 것이었다.
[57] 마이클의 백반증을 백인이 되려는 걸로, 또 흑인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백인을 선호한다는 루머를 미디어가 퍼트린 것 또한 마이클이 흑인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줄이고 마이클의 사회운동을 불신하게 만드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 마이클이 직접 백반증을 밝혔고 백반증 반점이 그대로 노출된 뮤직비디오까지 공개했지만 당시 언론은 뻔히 보이는 진실을 외면하고 마이클이 사망할 때 까지 루머만 확대 재생산했으며 마이클 사후에 부검결과로 다시 한 번 백반증이 밝혀졌음에도 미디어가 계속 편견을 지속하며 그간의 거짓보도를 면피하려 하자 백반증을 앓던 흑인 아나운서가 방송에서 분장을 지우고 백반증을 공개한 사건도 있었다. [58] 91년 < Dangerous> 앨범이 발표되던 때에 미국은 걸프전 직후로 20년 이상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인종갈등을 방치하는 차별정책을 고수하던 상황이었고 이때 흑인 마이클의 "Black or White", "Jam", "Heal the World" 등의 인종차별 반대와 화합과 평화로의 사회변화를 요구하는 곡들의 대히트는 문화적 충격이자 92년 흑인폭동과 93년 리버럴 민주당으로 교체되는 등의 사회 변화의 자극제가 되었다. 게다가 마이클이 본격 사회사업에 앞장서며 사회 변화의 아이콘까지 되어가자 당시 미국의 기성세대와 백인 중심 제도권은 급격한 문화적 변화가 정치적 영향으로, 즉 그들 질서에 대한 부담으로까지 돌아오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고 그 단적인 예가 톰 스네던 검사이다. 그리고 93년은 마이클이 공식적으로 모든 백인 신화를 뛰어넘었단 기네스 기록까지 인증받은 해였고 이때 터진 조단 챈들러 사건은 이전부터 비틀즈엔 못미쳤다는 멘트를 덧붙이고 빌보드 집계 방식마저 바꾸며 견제하던 백인 중심 언론이 마이클을 본격 비하할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이후 언론은 마이클의 사회공헌에 대한 보도는 거의 안하면서 루머 보도는 늘여서 마이클의 사회적 영향력을 지우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마이클은 다음 앨범을 통해 정치.사회적 비판의 수위를 더 높였고 히스토리 투어로 미국을 제외한 유럽과 제 3세계를 방문하고 자선사업을 병행하며 영향력을 이어갔는데 이를 평가절하 하려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미권 백인 미디어의 루머 보도도 더 많아지는 양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이클이 백악관 초청을 거절한 공화당 부시정권 이후 2002년은 9.11테러 이후 냉각된 세계 정세를 향해 전쟁은 악순환이며 폭력적이고 탐욕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촉구하는 정치적인 연설을 마이클이 앞서서 한 해였고 또 할리우드 산업이 그들 헤게모니를 보호하고 아티스트를 통제하기 위해 미디어로 프레임을 만들고 역사를 왜곡한다는 연설까지 했던 해였다. 이후 헐리우드 기득권의 영향 하에 있는 미디어는 마이클을 가장 광폭하게 매장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 발발한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발언을 했던 마돈나도 상당한 공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제도권과 산업 모두의 비판자였던 마이클에게 집중된 미디어의 공격은 전무후무한 수준이었으며 이라크 전쟁은 마이클의 예견처럼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59] 흑인으로써 백인을 압도하는 성공을 한 마이클에 대한 미디어의 적대적인 태도는 초기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평론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은 마이클 잭슨이 뒤바꾼 판이 너무나 많기에 그 성공 만큼이나 영원히 대가를 지불 할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언론편견과 인종주의 참고) 실제로 마이클에 대한 서구 미디어의 태도는 이 사건 이전부터 사후인 현재까지도 차별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마이클과 동시기에 데이빗 보위 프린스, 다른 여러 남성 뮤지션들도 짙은 색조 화장을 하고 힐을 신는 등 파격적인 모습을 하곤했지만 미디어는 그들에게 마이클처럼 동성애자 루머나 와코잭코(원숭이로 비하하는 인종차별 단어)의 모욕적인 멸칭을 붙이지 않았다.

또한 아동강간범 로만 폴란스키 등 명백한 소아성애 백인 셀럽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정작 마이클 만큼 이슈화되지도 보이콧 당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12~14세의 여자 아이들과 연애관계를 가졌던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서는 당시 여자 아이가 나이에 비해서 성숙했다고 두둔하며 소아성애 행위를 보호하는 태도까지 보였고 이 외에도 백인 할리우드 셀럽들의 많은 성범죄 및 성추문이 드러났지만 서구 미디어는 이를 크게 이슈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의 대대적인 수사 끝에 아무런 성범죄의 증거가 없었고 무죄로 판결난 마이클에 대해서는 반대로 유죄로 몰아가는 미디어의 이슈화와 확대 왜곡이 심각하게 집중되는, 사안의 객관성을 벗어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60] 개빈의 어머니 재닛은 마이클에게 성추행 혐의를 제기하기 전에 J.C. Penny 백화점을 상대로 허위 공갈 고소를 제기했었고 이 과정에서 개빈이 직접 재닛이 백화점 경비원에게 성추행 당했다는 허위사실을 주장한 것까지 드러나서 개빈 증언의 신뢰성에 의문을 남겼다.( 참고) 개빈 가족은 이 외에도 수십여 건의 공갈 고소를 상습적으로 해왔던 이력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으며 그 공갈 고소들은 아이들까지 동원한 것들이었고 고소 상대는 백화점 및 여러 업장뿐만 아니라 친척까지 망라된 것이었다. 그 밖에 복지수당을 허위로 과대 청구해온 것도 드러났으며 또 아이들을 마트에 내버려두고 재닛이 주차장에서 남자친구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다 적발된 건들이 증언되기도 했고 다른 연예인을 협박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이후 재닛은 백화점을 상대로 한 공갈 고소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61] 톰 스네던은 개빈의 DNA가 아닌 신원불명의 다른 남성 2명의 DNA 반응이 나온 매트리스 검사 결과를 재판 증거로 요청하기도 했었다. DNA는 손의 땀과 머리카락 등 만으로도 반응이 나오는 것이고 마이클의 침실은 직원에 의해 관리됐으며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었고 무엇보다 이는 [62] CII (Children's Institute International)에서 교육 담당 이사를 지냈으며 아동 성학대를 전문으로 하고 있으나 그의 경력은 전문가로써 비판받는 지점이 많다. CII는 84년에 한 정신병력이 있는 유치원 학부모의 아동 성학대 의심으로 시작되어 CII의 인터뷰를 거치면서 무려 371명의 아동들을 학대한 혐의로 발전하였으나 5년 간의 무고한 옥살이 끝에 결국 90년에 불기소 방면된 "맥 마틴(McMartin) 유치원 사건"에서, 아동들에게 강압적이고 조작적인 인터뷰를 하여 거짓 진술을 만들어낸 것으로 널리 비판받은 곳이다. 당시 CII의 인터뷰를 거친 아동들은 할리우드 배우인 척 노리삼에게 성학대를 당했다고 진술하는 등 혼란스러워 했다. 캐츠 박사는 맥 마틴 사건 때 아이들에 대한 평가를 자신이 했다고 증언했다. ( 05년 재판 법정기록의 3월 30일 스탠리 캐츠 증언 참조.) [63] FBI는 1992년부터 2005년 사이에 마이클을 상대로 한 협박 사건을 조사했었다. 1992년에 Frank Paul Jones라는 이름의 30대 남성이 본인이 마이클의 여동생인 자넷 잭슨의 남편이자 마피아 두목의 아들이라고 허위 주장하며 마이클을 살해하겠다는 협박 편지를 보냈고 실제로 캘리포니아 엔시노에 있는 잭슨가 집에 침입하려다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외에도 마이클은 89년부터 반복적인 침입자들에게 시달렸었다. 마이클을 스토킹하던 사람이 네버랜드에 침입해 가정부를 폭행한 사건도 있었으며, 마이클의 경호원 Gosh는 재판에서 외부인이 침입해서 직원을 폭행하고 침실에 몰래 숨고 무기를 숨기고 들어와서 마이클의 개인 침실까지 쳐들어가는 등의 여러 사건이 있었다는 증언을 하였다. 또한 유명인의 집에 이러한 경보장치가 있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말도 이후 인터뷰에서 덧붙였다. 아울러 침실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 마이클의 침실은 이층에 가정집 만한 규모고 늘상 문이 열려 있었기에 방문을 알리는 소리가 없으면 침실 내부에 있어도 누군가의 접근을 알기 힘든 구조이기 때문이다.

또한 검찰은 2층 침실 뒷편에 있던 방을 몰래 성추행을 하기 위한 곳으로 의심하기도 했으나 그 방은 마이클이 만든 것이 아니라 네버랜드 목장의 전 주인이 만든 패닉룸(위기상황시 대피 장소)이었고 그 방에서 어떠한 불법적이거나 의심스러운 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저 온갖 물건들로 발디딜 틈 없이 꽉찬 창고같은 공간에 비밀로 숨겼던 곳도 아니어서 검찰의 의심은 현실성이 없었다.
[64] 성인사이트 접속기록은 확인됐다. 그러나 접속기록 일부는 마이클이 라스베가스로 한달여간 떠나서 네버랜드를 비웠을 때 나온 것들도 있어서 마이클이 없는 동안 타인이 마이클의 침실을 사용하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마이클의 비서이자 지인이었던 프랭크 카시오는 마이클이 없을 때 네버랜드에서 파티를 열었으며 종종 여자친구들과 함께 비어있던 마이클의 침실을 이용하곤 했었다고 증언했다. [65] 직원이었던 줄리오 아빌라(Julio Avila)는 스타가 성인잡지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물었는데 알고보니 스타가 자기 집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는 증언을 하였다. 또 다른 직원인 마리아 고메즈(Maria Gomez)는 개빈 가족들이 머물고 있었던 네버랜드 게스트 구역을 청소하다가 스타의 가방에서 성인잡지를 발견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66] 재판 참관인이었던 윌리엄 바그너(William Wagener)에 의하면 톰 스네던이 재판 당시 배심원들 앞에서 개빈에게 마이클의 집에서 발견된 성인잡지 하나를 건내주며 마이클이 보여준 것이 맞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때 개빈이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잡지를 훑어보게 만들어 지문이 찍히게 한 뒤 이를 증거로 제출했다는 것이다. 바그너는 배심원들도 이것을 알아차렸지만 재판부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톰 스네던은 증거 조작으로 감옥에 갔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재판 참관인 인터뷰 영상 보기) [67] 마이클은 2000년에 개빈 가족에게 노트북과 차를 선물한 적이 있는데 이후 이들은 두 물품이 고장났다며 마이클에게 수리를 부탁했다가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마이클은 03년 개빈 가족의 네버랜드 재방문 때 개빈 가족이 점점 다른 의도가 있는 듯 행동하자 네버랜드에 머물게는 했지만 개빈 가족과의 접촉은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재판에서 개빈 가족이 네버랜드에 머물며 소란을 피우는 등 여러 곤란한 행동을 했었기에 직원들의 불만이 높았단 말도 나왔으며 이러한 문제들로 결국 개빈 가족을 내보내게 됐음이 밝혀졌다. 투병 중인 자녀 때문에 마이클과 친구가 되었던 Debra Willis도 마이클이 개빈 때문에 곤혹스러워했던 일화를 영상을 통해 말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개빈이 마이클에게 찾아와 남자와 여자 중 어느 성별을 좋아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질문하자 마이클은 그런 질문은 부모님에게 하는 거라고 말하며 대답을 거절했으나 개빈이 재차 물었고 결국 개빈을 돌려보냈다는 일화를 마이클이 이야기 했었다고 밝혔다. [68] 그렇게 말한 이유를 추궁당하자 개빈은 "모든 아이들이 이미 학교에서 나를 놀리고 있었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고 해명했다. [69] 마틴의 다큐멘터리가 방송에 나간 날은 2월 3일과 6일. 그리고 마이클이 폭스 채널과 함께 반박 다큐를 찍은 날은 2월 20일인데 바로 이날 촬영에서 개빈 가족이 마이클을 옹호했기 때문에 2월 7일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면 20일날 옹호한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20일은 또 LA 아동가정복지국(Department of Children and Family Services)이 개빈 가족을 방문해 별도의 조사까지 벌였으나 이때도 개빈 가족은 마이클을 옹호하여 혐의 없음으로 조사가 종료된 시기이기도 하다. [70]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우연이 가능한지 추궁당하자 개빈은 할머니가 그런 얘기를 해줬는지 지금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먼저 했던 할머니와 관련된 진술이 사실이라 해도 마이클이 자기에게 똑같은 얘기를 해줬다는 것엔 변함이 없다고만 주장했다. [71] 참고로 손자 이야기를 한 배심원은 재판 전에 언론보도들로 마이클 사건을 접하고 유죄를 선고할 각오로 재판장에 왔으나 재판 과정에서 사실과 다름을 알게 되었고 무죄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다른 인터뷰에서 밝힌 인물이다. 이외에 배심원단 파울라 코코즈도 17년 인터뷰에서 재판 전에 처음부터 유죄 평결을 내릴 것이며 이 경험을 책으로 써서 팔겠다고 말하는 배심원까지 있었다고 밝혔는데 그러나 그들도 모두 전원 무죄평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명료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재판 전의 미디어의 편파적이고 선정적인 보도가 배심원단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72] 2019년 시가로 환산하면 천오백만 달러 이상의 막대한 금액이다. 따라서 마이클 측의 변호비용도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이때 마이클은 법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소장품들까지 팔았다. [73] 05년 3월 15일자 Steve Robel 수사관 증언. [74] 이 책의 비문에 마이클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 소년들의 얼굴에 나타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보라. 이것은 내가 결코 가져 본 적 없고 앞으로도 항상 꿈꿀 소년 시절의 정신이다. 이것이 내 아이들에게 원하는 삶이다. MJ." [75] 이 책은 1983년 시카고에 사는 '론다'라는 이름의 마이클 팬이 보낸 선물이었다. (“To Michael: From your fan, “Rhonda” ♥ 1983, Chicago”) [76] 1번책, 2번책, 3번책 [77] 1번책, 2번책, 3번책 [78] 압수된 책 중, <Pere Formiguera – Cronos (2000)>는 2세에서 75세 사이의 연령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노화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10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누드 사진을 촬영한 것을 쭉 나열한 리얼리즘 사진집인데 역시나 아동이 주제가 아니며 성도 주제가 아닌 합법적인 프로젝트이다. 아니면 <Simen Johan - Room to Play (2003)> 책도 있는데 아동의 다중 이미지 조각들을 디지털 방식으로 조합하고 결합한 것으로 아이의 누드 모습을 일부 이미지 조각으로 담고 있으나 성적으로 다루지 않은 역시 합법적인 디지털 아트 서적이다. 참고로 이 책은 경찰이 지하 층에서 종이팩에 포장되어 뜯지도 않은 채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들은 모두 아마존닷컴에서 판매 중인 책들이다.( Cronos, Room To Play) [79] 당시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던 마이클이 아이들과 함께 광고에 연출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취향을 사로잡길 원하는 기업의 자연스러운 연출이었고, 마이클의 투어에 아이가 처음 등장하게 된 계기도 펩시가 배드 월드 투어를 후원하면서 아동 프로모션을 진행했고 이에 따라 당시 펩시 광고모델이었던 아이가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처음엔 투어에 아이가 등장하는 것이 마케팅적 의미였지만 이후 마이클이 투어 때 아동복지 자선활동을 함께 진행하고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한 곡들을 발표하면서 사회기여 활동과 곡의 의미 전달로 변해갔다. 93년 챈들러 사건 이전까지는 마이클의 이러한 스타일을 이상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없었다. [80] 댄 리드(Dan Reed)감독은 영국 출신으로 클래식만 듣기에 마이클에 대해 모른다고 밝혔으며 이전에 성범죄를 주제로 한 다큐를 찍은 경험이 있다. 다큐는 HBO와 HBO의 같은 계열사인 영국의 Channel 4가 공동으로 배급을 담당했다. [81] 이는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궤변이다. '마이클 잭슨의 피해자'가 있으려면 마이클 잭슨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다, 즉 그가 죄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잭슨의 혐의는 혐의 단계를 벗어난 적이 없고 오히려 무죄선고를 받은 적도 있다. 즉 '잭슨의 피해자'에 대한 다큐를 만들려면 기존의 법적 결론을 뒤집을 만한 증거를 통해 잭슨의 죄를 입증하는 것이 먼저이며, 이는 당연히 양측에 대한 충분한 취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잭슨을 배제한채 '피해자'에 대해서만 포커스를 두는 것은 일단 죄가 있다고 치고(=피해자가 발생했다고 치고) 다큐를 만드는 셈이다. [82] HBO의 3월 1~2일 다큐 방영과 오프라 윈프리의 4일 지지 방송 직후인 19년 3월 5~6일에 여론조사기관 <Yougov>가 미국의 성인 1,2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보면 응답자들의 48%가 유죄로 생각한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기각된 롭슨과 세이프척의 소송이 다시 열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엔 30%만 찬성하고 오히려 49%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와서 인식과 실행 사이에 모순이 일어나는 감정적인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드러난 다큐의 문제점들을 미국의 주류 언론이 거의 보도하지 않았음에도 미국 내 여론이 변하는 현상을 보였는데, <Yougov>가 19년 6월 18~19일에 미국의 성인 1,224명을 대상으로 다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유죄 응답은 39%로 3개월 전보다 9%가 줄었다.(무죄 21%, 중립 41%) 또 백인과 흑인 응답자들 사이에 편차가 심한 특이점도 나타났는데, 백인 응답자들은 유죄 45%, 무죄 15%, 중립 40%인데 반해 흑인은 유죄 17%, 무죄 43%, 중립 40%로 조사되어 백인과 흑인의 응답이 정확히 반대되며 전체 유죄 응답의 대부분을 백인이 차지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는 05년 재판 때 실시한 미국 내 여론조사와도 유사한 현상이기에 애초에 마이클에 대해 부정적이던 백인들이 이 다큐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지속하고 부정적인 액션을 주도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05년 재판 때 언론보도가 심각히 왜곡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형성된 편견이 주로 백인에게 유효했고 그 편견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21년 9월에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Morning Consult>에서 미국인 2,200명을 대상으로 마이클에 대한 선호도 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결과는 '호감 58%, 비호감 30%, 호감도 비호감도 아님 11%, 마이클을 모름 1%'였다. 같은 조사에서 2019년 3월에는 '호감 46%, 비호감 43%'였다.
[83] 한편 19년 4월 말에는 마이클과 롭슨의 모교인 LA의 초등학교 가드너 스쿨(Gardner School)에서 일부 학부모의 항의로 마이클의 이름을 딴 강당에서 이름을 내리는 것에 대해 학부모와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투표가 실시되기도 했다. 이 학교는 백인 학생의 비율이 높은 사립학교로 롭슨이 직접 학교 측에 교직원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도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서 투표 결과에 큰 이목이 집중됐는데, 마이클의 이름을 내리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가장 다수인 것으로 결과가 나와서 현상유지로 결정됐다.

이는 당시 마이클 유산을 삭제하는 뮤트(Mute) 운동이 큰 흐름인 것처럼 보도하던 미국 언론과 실제 대중의 반응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다큐 이후에 마이클 앨범의 판매량은 증가했고 스트리밍도 41% 더 늘어난 것으로 닐슨 조사 결과 드러났다. 하지만 논란 초기에 심슨 가족과 일부 라디오 방송에서 마이클의 음악을 내리는 일이 일어났으며, 19년 6월 마이클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유럽에서는 각종 기념 방송이 방영된 것과 달리 달리 미국에서는 다큐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사설 등에도 불구하고 방송사가 추모 방송을 거의 편성하지 않아, 미국에서의 다큐로 인한 영향은 대중 자발 이라기 보다는 미국의 미디어가 부양하는 현상을 보였다.
[84] 마이클 재단은 다큐의 사실검증을 위해 주인공이 누구인지 선댄스 측에 문의했으나 선댄스 측이 답변을 하지 않아 마이클 측은 재판기록 등으로 다큐 속 내용을 사전에 반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편 상영 직전에 선댄스 영화제의 제창자인 반 와그넨(Van Wagenen)의 소아성애 범죄 전력이 폭로됐으나 리빙 네버랜드의 화제성으로 묻히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아동성범죄로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언론보도가 거의 되지 않아, 비슷한 시기에 소아성애 혐의가 거론된 흑인 유명인 빌 코스비, 알 켈리에게 미디어의 보도가 집중되며 사회적으로 매장됐던 것에 반해 와그넨은 지금도 자신의 프로필에 교수 및 프로듀서만 적혀있을 뿐 범죄 부각은 되지 않고 있다.

또 와그넨이 소아성애 범죄로 처음 신고된 것이 93년 7월이고 이때 범죄혐의를 자백했으나 경찰이 풀어주어서 무마한 것도 드러났는데, 공교롭게도 이 시점은 헐리웃 아동배우 코리 펠드만이 93년에 마이클에게 성추행 혐의를 제기한 조단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마이클은 결백하며 백인 배우 존 그리삼 등 헐리웃 내 다른 그룹에게 성학대를 당했다고 제보했으나 경찰이 진짜 소아성애자들은 무시하고 마이클에게만 혐의를 씌우려 했다고 당시 수사 녹음을 공개하며 폭로한 사건과 시기적으로 유사하다. 존 그리삼도 와그넨처럼 93년에 수사받지 않았다. 코리는 이후 헐리웃 내 실력자들이 포진한 소아성애 그룹이 있다고 주장하며 2017년에 자신의 경험을 다룬 다큐를 발표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헐리웃 소아성애 그룹 의혹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제이슨 프란시아 문서의 강압수사 부분 참고.
[85] 오프라가 다큐에 나온 세이프척이 마이클과 결혼했었다는 내용을 언급하자 세이프척의 표정이 의문스럽게 변하는 부분. [86] HBO의 3월 1일 다큐 방영 이틀 뒤에 문제제기가 시작될 때, 오프라는 자신이 만든 <After Neverland Interview> 방송에서 주로 아동성범죄 피해자들로 구성된 백여명의 패널을 초대해 실제 피해자들의 고백을 섞음으로써 다큐 주인공과 검증된 피해자들을 동일시하도록 만들었고, 이로써 검증도 전에 다큐를 기정사실로 인식하며 부정적 파급을 만드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마이클이 한 일이든 안한 일이든 이런 일에 분노부터 해야한다는 메세지로 다큐에 대한 사실검증의 필요성을 축소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오프라는 이 방송에 앞서, 다큐의 선댄스 개봉 5일 뒤인 1월 30일에 드림웍스의 공동 회장인 데이비드 게펜의 요트에서 열린 오프라의 생일파티에서 일반공개가 안된 다큐를 미리 구하여 시청하는 이례적인 이벤트를 연 뒤, 다큐를 보면 모두 마이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트위터 메세지를 띄워 1월 선댄스 상영 직후부터 3월 HBO 방영까지 다큐가 화제가 되도록 앞장서왔으며, 다큐를 지지하는 자신의 방송 후엔 마이클을 이제 떠날 때라는 인스타그램 게시물까지 올려서 마이클 유산 삭제하기 운동을 본격 유도하기도 했다. 오프라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오프라가 리빙 네버랜드 다큐를 펀딩했다는 기사까지 나오고 있다.

아울러 위 생일파티의 데이비드 게펜은 마이클이 소니로 이적하게끔 관여했고 앨범 발매에 수익계약을 맺은 인물로써 소니의 사장 토미 모톨라의 지인이며 이후 마이클이 소니와 갈등을 빚자 소니와 함께 마이클과 척을 지게 된 인물이다. 또한 위 생일파티는 방송인 위주로 열명 남짓 소수만 참석했는데 참석 멤버인 방송인 게일 킹도 이후 자신의 방송을 통해 다큐를 적극 지지한 인물이며 기타 참석인물도 다큐의 언론 홍보에 영향을 미쳤다.
[87] 또 오프라의 회사 OWN은 방송 이후에 유튜브에 올려진 오프라의 93년 마이클 인터뷰 영상의 삭제를 요구하여 유튜버의 반발을 사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이 영상의 저작권은 마이클이 가지고 있어 오프라가 상관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해당 영상은 93년 당시의 네버랜드 모습이 잘 나와있어 네버랜드에 대한 세이프척 주장들의 모순을 드러나게 한 자료이자 직접 네버랜드를 방문하여 곳곳을 둘러봤던 오프라가 세이프척 주장의 모순을 알 수 있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영상이기도 하다.

이후 다큐의 모순점들이 알려지자 오프라는 아무 언급없이 문제의 트윗 메세지와 방송을 삭제했지만 방송인으로써 자신이 만든 오도의 책임은 지지않고 있다. 이런 오프라의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작가이자 경제학자, 정치분석가인 보이스 왓킨슨은 오프라와 HBO가 비겁하게 도망가고 있다며 비판했다.

한편 학대문제를 방송 차별화 전략으로 삼던 오프라가 검증없는 이슈 만들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며, 가짜 아동학대 수기를 아무런 의심없이 홍보하는 허위 방송을 89년에도 했었다. 또 "John of God"로 불리는 영적 치유사를 홍보하는 방송을 오프라가 제작했었는데 알고보니 존은 삼백여명의 여성을 성학대한 성범죄자였던 사건도 있었다. 그외에 오프라가 07년에 남아공에 설립한 여성 리더쉽 학교에서 08년에 여성 기숙사 사감에 의한 집단 아동성범죄가 발생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오프라는 당시 기숙사 관리자를 신중히 뽑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으나 나머지에 대해선 자신의 책임이 아님을 밝혔다. 그러나 09년에도 또 학교에서 집단 성희롱이 발생했고 오프라는 이에 대한 언론보도를 막았었다.
[88] <리빙 네버랜드>의 배급과 방영을 결정한 HBO의 직전에 퇴임한 전사장 리차드 플레플러(Richard Plepler)와 오프라 윈프리,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서로 비즈니스 파트너들이자 친분 관계에 있어서 HBO의 강경한 상영과 오프라의 홍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플레플러가 퇴임 직전에 오프라와 식사를 한 기사도 발견된다.)

왜냐하면 리빙 네버랜드가 갑자기 상영된 선댄스 영화제에선 와인스타인의 30년간의 성범죄를 은폐나 묵인으로 도운 방송과 언론, 연예산업, 정계의 은닉자들과 할리우드의 고질적인 병폐를 폭로하는 <UNTOCHABLE: The Harvey Weinstein Story>도 상영됐는데, 원래 이 다큐가 화제작이었으나 미디어가 리빙 네버랜드만 주목하는 사이에 사라진데다 이 다큐에 출연했던 여배우들도 더이상 헐리우드 문제를 거론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와인스타인은 가쉽작가에게 금전을 제공하며 마이클 루머유포를 의뢰했고 마이클 악성루머를 오랫동안 퍼트려온 미국 내 최대 타블로이드 기업 AMI와의 유착관계도 드러난, 자신의 추문을 덮기위해 오랫동안 마이클 루머를 이용해온 인물이다. 또 와인스타인과 플레플러는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원자들인데, 와인스타인은 선거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며 정계활동을 영향력 보호에 이용해왔고 힐러리 캠프는 성범죄 제보를 받았으나 무시했던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와인스타인의 공모자들" 17년 뉴욕타임즈 기사 참조)

게다가 오프라는 와인스타인의 성범죄를 묵인한 공범으로 직접 거론된 인물이다. 오프라는 몰랐다고 부인하는 페이스북 글을 남겼으나, 가수 씰(Seal)은 오프라에게 알고있지 않았냐며 인스타그램 메세지 반박하기도 했다. 특히 오프라는 CBS(미국 방송) 방송과의 인터뷰(39:40)에서 "와인스타인으로 이야기들이 모이게 되면 우리끼리 성범죄에 대해 토로하는 장을 잃게 될 것"이란 말로 범죄가 증명된 와인스타인이 성범죄 공론화에서 제외되길 주장한 것과 달리, 마이클에 대한 검증없는 일방주장인 <리빙 네버랜드>에 대해선 아동성범죄를 토로하여 공론화하기 위해 방송에 나섰다고 밝혀서 대조를 이뤘다.
[89] 다큐는 사실 검증 및 마이클 측에 어떠한 취재도 하지않은 일방적인 것이며 다큐 주인공들의 소송을 위한 홍보전에 불과하다는 내용 [90] 마이클 재단은 HBO와 체결한 "1993년 부카레스트 콘서트 중계 계약서"를 공개하였다. 계약서엔 "마이클 잭슨을 비방하거나 허위사실을 방송하지 않는다. HBO의 마이클 잭슨 관련 방송의 모든 권리와 저작권은 영구히 마이클 잭슨과 가족의 소유이며 방송을 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HBO가 이 합의조항을 어긴 것으로 보고 1억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마이클 재단 측은 투명한 공개재판을 요청했으나 HBO측은 거부했는데 막판 재판부의 공개 결정으로 5월 23일에 첫 심리가 열렸고 추가 심리는 7월로 연기되었다. (HBO 주장에 대한 마이클 재단측 응답서 참고) 또 HBO는 다큐 설명에 ' 성학대를 받은'이라고 확정해서 적었다가 이후 성학대 혐의로 바꾸더니 지금은 성학대 문구는 아예 빼버리고 마이클과 보낸 이야기로 바꿔놔서, 그런 문구를 쓰지 않았던 양 하는 태도로 의문을 사고 있다. 또한 다큐에서 무단으로 마이클의 세 자녀들을 삽입하였기에 마이클 자녀들에 대한 명예훼손 및 사생활 침해 문제도 논란이 되었는데, 19년 4월 17일 기사를 보면 마이클의 자녀들은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방식의 소송을 고려 중이며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 사과를 바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91] 롭슨은 2013년 5월 마이클 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후 마이클의 회사인 <MJJ Productions>와 <MJJ Ventures>에도 추가로 소송을 걸었다. 2015년 5월 재단을 상대로 한 소송은 기각됐고 나머지 회사들에 대한 소송은 2017년 12월에 기각됐으며 세이프척은 2014년 5월에 소송을 제기했고 2017년 6월에 기각됐다. 현재 롭슨에게는 2019년 말에 재판이 예정된 한 건의 소송이 남아있다. 재판은 성추행 사실 여부를 가린 것은 아니었고 소송 기간이 지났거나 피고 지정을 잘못해서 기각됐지만 재판 과정에서 성추행 혐의의 진실성에 관한 유의미한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기에 이 재판기록은 두 사람의 주장에 대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92] 영국 방송분 삭제에 대해 감독은 HBO 방영 전에 편집한 것이며 영국 방송 분량의 제약 때문이라는 트윗을 올렸으나 HBO와 채널4의 감독의 말에 대한 진위여부를 확인해주는 별다른 언급은 없다. 이외 롭슨의 할머니가 롭슨의 어머니인 조이가 마이클과 통화를 너무 길게 하는 게 수상했다고 말하는 장면과 네버랜드 방문 때 마이클이 조이 옆에 앉아 이야기를 했는데 조이가 마이클이 그때 침대를 문질렀다며 '어머나 마이클이 내 옆에 있다니!'라고 생각했단 장면 등 조이가 마이클에게 이끌린 듯 했고 롭슨 가족이 단체로 그루밍 당한 인상을 줘서 이상하단 비판이 일었던 장면도 삭제했다. [93] 기타 참고 기사들 : ( 윤리와 법을 상실한 심판, 리빙네버랜드 허위진술)( 생전이라면 만들지 않았을 허구, 사후명예훼손법의 부재-UCLA법학신문)( 저널리즘의 몰락과 비판적 사고의 붕괴)( 편견에 의해 왜곡되는 판단-하버드 심리학자 : 흑인일수록 부정적인 판단을 하는 경향이 보고된 인종차별 편견, 독창적인 예술가는 고독, 고뇌, 구토와 같은 부정적인 독성이 있을거라 믿는 편견, 성공한 사람이 추락하길 바라는 심리, 기억이 정확하다고 믿지만 실제론 왜곡된다.)( 리빙네버랜드 이후 마이클잭슨 앨범 순위 상승)( 추모 10주년, 다큐로 인한 타격 없었다-ABC기사)( 다큐 후 스트리밍 41% 상승-닐슨 조사) [94] 롭슨은 15년부터 삼년째 자신이 운영하는 개인사업체 "WAJERO entertainment"의 세금을 체납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롭슨은 다큐 방영과 동시에 "Robson Child Abuse Healing and Prevention Fund"라는 기부 페이지를 개설하여 기부금을 받아왔는데, 기부금 법에 따라서 기부금은 반드시 비영리 단체에 배부되어야 하나 롭슨이 기부금을 배부한 것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서 기부금 유용에 대한 조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95] 마이클이 Smooth Criminal 뮤직비디오에서 썼던 페도라, Bad 뮤직비디오에서 꼈던 장갑, 모타운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입었던 셔츠 등이다. [96] 롭슨의 누나 찬탈도 12년에 그녀의 마이클 관련 소장품들을 판매하였다. [97] 재단을 상대로 손해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법적 기간은, 피해를 인지했고 재단의 존재를 안 시점에서 60일 이내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롭슨은 고소문에서 12년 5월에 성학대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때부터 60일 이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했으나 1년 가까이 늦은 것인데, 그때는 재단을 몰랐다고 주장하며 소송기한 만료를 피하려고 했으나 재단과 주고받은 이메일 공개로 거짓말이 탄로났다. [98] 롭슨은 11년 7월에 해당 서커스에 고용됐으나 자신이 거절했다는 명백히 마이클 재단을 알고있는 내용의 인터뷰를 <Vanity Fair>와 한 것까지도 밝혀졌는데 이에 존 블랑카는 고용한 적 자체가 없다고 반박했고, 롭슨은 자신의 말을 증명할 재단으로부터 받은 자료가 있다며 공개하겠다고 말했으나 지금까지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마이클의 서커스엔 제이미 킹이라는 서커스 연출 경력자가 안무감독으로 뽑혔는데 존 블랑카는 롭슨과 11년에 만났을 때 댄서 정도로 고용을 생각할 순 있어도 안무감독으로는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롭슨은 서커스 안무 경험이 없으며 기타 안무연출 경력도 당시 하락하고 있었고 <스텝업 레볼루션>의 감독에서 중도하차 한 후 자신의 역량 부족을 토로하는 글들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었다. 또 11년 이때에 롭슨은 처음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성학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99] SEA/SUE는 세이프척의 아버지가 동업자와 함께 운영하던 쓰레기 처리 업체로 세이프척은 이 회사의 지분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러나 회사 운영과정에서 다른 지분 소유자에게 제대로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고 세금 등의 지출은 그들에게 과다 부과하여 장기간에 걸쳐 부당하게 편취를 한 것이 드러나서 편취한 금액 84만 달러에 대한 손해배상 고소를 당하게 된 것이다. [100] 아동 성학대에 관한 기사를 읽고 80년대 후반에 쓰기 시작한 곡이라고 하며 마이클 사후인 11년에 공개되었다. 99년에 쓰여졌으나 사후에 발표된 "Hollywood Tonight" 이란 곡도 이 곡과 연관된 내용인, 할리우드에 대한 환상을 미끼로 성적으로 이용당하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이 외에도 아동 성학대를 비롯한 여러 아동학대 문제를 다루는 마이클의 미공개 곡들이 더 있다고 한다. [101] 디 디 잭슨은 94년에 도날드 보하나(Donald Bohana)라는 사업가에게 살해당했다. 이 메모는 디 디 잭슨이 살아있을 때 어머니 곁에서 타지에게 다른 삼촌이 성적인 장난을 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본 마이클이 제제하며 시누이인 디 디에게 남긴 메모라고 한다. 디 디 잭슨의 죽음 이후로 마이클은 어머니를 잃은 조카들을 투어에도 데리고 다니며 곁에서 챙기고 떨어져 있을 때도 연락과 편지를 전하며 보살폈다고 한다. [102] 참고로 롭슨은 05년에, 세이프척은 08년에 결혼했다. [103] 브랜디의 친구인 라리아 로페즈도 자기가 직접 곁에서 이들이 사귀는 것을 봤다며 이를 설명하는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104] 롭슨의 누나 찬탈이 05년 재판에서 증언 며칠 전에 가족들이 다 같이 네버랜드에서 마이클을 만났다고 진술했기에 롭슨이 증언 전에 마이클을 만났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다큐에서 롭슨과 찬탈이 묘사한 것과 같은 마이클 자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저녁식사 자리는 찬탈의 05년 증언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찬탈은 롭슨이 05년 5월 5일에 증언하고 바로 다음날에 증언했다. [105] 검찰은 네버랜드 직원이었던 마크 퀸도이 등이 마이클이 세이프척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본 목격자들이라며 재판 전 증인 채택 요구 문서에서 밝혔으나 실제 이들이 수사기관에 관련 진술이나 증언을 한 기록은 없고 타블로이드에 이러한 이야기를 팔아온 이력만 있다. 재판이 시작되자 검찰도 마이클이 세이프척에게 선물을 사줬던 점 만을 언급하며 이를 그루밍으로 연결지었지 성학대 증언이나 진술은 언급하지 않았다. [106] 아울러 타지는 현재 리빙 네버랜드에 대한 전체적인 반박 다큐를 준비 중이다. [107] 증인에게 소환장 발부는 의무가 아니다. 증인이 필요없다고 밝히면 소환장 없이도 증언할 수 있다. 소환장이 필요한 경우는 예를 들어 증언 일정으로 인해 잠시 직장에 결근해야해서 회사에 제출할 증빙 문서가 필요한 경우 등이다. 참고로 롭슨은 소속된 회사가 없으며 일반적인 출퇴근 형태의 일을 하는 직종도 아니다. [108] 굵은 글씨 부분이 다큐에서 나오지 않은 멘트이다. "We will land on you like a ton of bricks, we will land on you like a hammer if you do anything to besmirch this man’s reputation, anything to intrude on his privacy, in any way that’s actionable, we will unleash a legal torrent like you have never seen." [109] 마이클이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적부터 다녔던 여호와의 증인 교파와 몰몬교 모두 쾌락적인 행위에 대해 매우 엄격하며 커피, 담배, 술, 마약을 금지한다. 마이클은 이후 여호와의 증인에서 나와 유대교, 이슬람, 불교 등의 경전까지 섭렵하였는데 종교의 영향으로 담배와 마약은 물론 커피까지 안마셨고 비행 불안증 때문에 비행 중엔 가끔 와인을 마셨다고 나오나 대부분의 주변인들이 마이클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알 정도로 엄격하게 절제했었다. 자신의 호텔 앞에서 기다리던 천여명의 팬들에게 마이클이 피자를 전부 배달시켜준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이때도 건강을 위해 야채가 듬뿍 들어간 피자에 콜라 대신 오렌지 쥬스나 물을 서빙해줘서 단체 건강식을 시킨 일화가 있다.

몰몬교도 친구인 지미 오스몬드와 투어에 동행하게 된 것은 장기간의 투어 중에 호텔에만 갇혀 책을 읽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며 고립된 시간을 보내야했던 상황과 환락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마이클의 라이프 스타일과 맞았기 때문이며 오스몬드는 투어에 동행했을 때 마이클과 종교에 관한 대화를 많이 했었다고 밝혔다.
[110] 혹자는 부유한 아이들과 부유하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성학대 차이가 있지 않냐는 의혹을 제기하는데, 마이클과 어린 시절을 같이 했으며 결백을 계속 지지하는 브렛 반스, 탈룬 자이툰, 브라이톤 제임스 등도 모두 롭슨과 세이프척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가정 출신들이다.

또한 카시오 형제의 경우 투어에도 동행하고 마이클과 가장 빈번히 접촉했던 아이들이지만 이들한테 성학대 의혹을 제기하는 타블로이드는 없으며 특정 외모의 인물들만 겨냥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작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본문에서 언급한 조나단 스펜스는 80년대 이후로 마이클과 교류가 끊어졌지만 마이클의 결백을 계속 지지하고 있는 인물인데 타블로이드 루머의 프레임에 맞는 외모의 소유자라서 계속 거론되며 피해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배드 투어에 처음 동행한 마이클의 독실한 몰몬교도 친구인 24세의 지미 오스몬드에 대해 언론은 그의 나이를 십대라고 속여서 기사화하는 등 그들 프레임에 맞춰 조작하는 작태를 보였다.
[111] 7살때 아버지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심각한 전신 화상을 입게 된 범죄의 피해자이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데이비드 로덴버그 였으나 이름을 바꿨다. 마이클은 87년에 이 소년이 아버지의 범행 이후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듣고 병원을 방문했으며 당시 데이브가 아무도 나중에 자신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절망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데이브에게 자신을 위해 일해달라고 제의했다. 이것은 실제 일이 아니라 데이브에게 삶의 목적을 주기위한 것이었다. 마이클의 제의에 데이브가 기뻐하며 수락했고 마이클의 나를 위해 뭘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데이브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대답하자 마이클은 데이브의 그림 도구를 마련했고 언제든 네버랜드를 방문할 수 있도록 챠량도 선물했다. 이후 데이브는 마이클의 네버랜드에서 종종 머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실제로 성장해서 화가가 되었다.

데이브와의 일화는 주변인들을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마이클과 교류하던 한 가족은 어느 날 마이클이 소개하고픈 사람이 있다며 식사초대를 했고 혹시 그 가족의 아이들이 외모가 다른 사람에 대해 놀라지 않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가족은 아이들에게 차별없이 대하도록 교육시켰으니 문제없다고 말했고 이 식사자리에서 마이클이 소개하고픈 사람이 바로 데이브였다. 이 일화들은 이후 출판된 마이클에 대한 책에 나온다. 마이클과 데이브의 우정은 성인이 된 이후로도 이어졌는데 03년 개빈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마틴 바셔의 왜곡 다큐도 원래 데이브가 출연할려던 것이었으나 마틴이 13세의 개빈을 고집하여 편집한 영상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마이클 사후에 데이브는 CNN 방송에 출연하여 마이클은 미디어에 의해 왜곡되었고 자신에겐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고 밝혔다.
[설명더보기:] 네버랜드의 팜플렛을 보면 각종 놀이기구와 동물원, 서커스장, 범퍼카 시설, 짚라인, 게임기기장, 스포츠 경기장, 마이클 잭슨 박물관, 미술관, 영화관, 까페, 식당, 게스트 유닛, 안내센터와 테라피 센터까지 갖춘 40여개가 넘는 시설이 있던 방대한 규모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주거용으로 썼던 메인 하우스 바로 앞의 수영장까지 모든 공간을 방문객에게 자유롭게 오픈했었다. 이 모든 게 다 무료이다.

환자나 장애 아동의 경우 특별한 배려가 없으면 놀이공원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특수 시설을 짓게 되었다고 마이클이 밝힌 바 있다. 메인 하우스와 수영장 등은 네버랜드의 전신인 시카밸리 목장의 전 주인이 지어놓은 원래 있던 건물이고 놀이공원을 만들며 새로 지은 건물들은 설계에서 부터 안전과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감안하였다. 따라서 직원들이 어디서든 아이들을 보고 도울 수 있도록 2층은 벽이 뚫린 개방된 복층으로 지어졌고 모두 막히지 않은 공간으로 설계하였으며 경호원 조차 총기 휴대를 금지하여 우발적인 사고를 예방하였다. 마이클이 말년에 "This is it" 공연 수익금으로 지으려 했던 아동 자선병원도 일반 병원이 아니라 놀이공원 시설을 갖춘 치유와 힐링이 동시에 가능한 세계 최초의 자선병원이 목표였다.
[113] 화재 등의 비상상황에서 탈출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건물 내 출입구 안전장치를 일컫는 것으로 공항과 학교 등의 공공시설에서 쓰이고 있다. 기본적으로 문이 안에서 잠길 수 없도록 하고 있으며 비상상황 시 출입구 앞의 정체를 막고 빨리 탈출할 수 있도록 문고리를 돌릴 필요 없이 문에 설치된 바에 몸이 닿기만 하면 즉시 열리는 방식이 쓰이고 있다. [114] 세이프척의 마이클 재단을 상대로 한 16년 재판에서 세이프척 측 증인으로 출석한 블랑카 프란시아가 세이프척이 마이클과 함께 영화관 안의 방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으나 05년 재판 때 마이클이 아이들과 영화관에 있을 때 자신은 한번도 영화관 안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증언한 것이 드러나서 신빙성을 잃었다. 블랑카는 수사관에게 마이클이 결백하다고 진술했다가 타블로이드에 이야기를 팔면서 말이 바뀌는 등 수차례 진술 번복과 모순으로 신뢰를 잃은 증인이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제이슨 프란시아 문서 하단 참고 [115] 브랜다 리치도 본인이 네버랜드에 자주 갔었지만 92년까지 해당 기차역 건물은 없었다고 밝혔다. [116] 심지어 세이프척의 고소장엔 다큐에서 보다 더 어린 나이인 세이프척이 12살이던 90년 무렵에 사춘기가 오면서 마이클의 관심이 자신보다 더 어린 브렛 반스에게로 옮겨갔고 마이클과 멀어졌다고 적혀있다. 즉 세이프척은 사춘기를 기점으로 멀어졌단 주장을 6년째 계속 했건만 기차역이 94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음이 밝혀지자 갑자기 사춘기가 한참 지났고 마이클 보다 키도 커진 16살 이후로 시기를 변경하며 이제껏 자신의 기억이라고 주장했던 모든 맥락을 뒤집은 것이다. [117] 댄 리드는 마이클의 전속 사진작가였던 해리슨 펑크(Harrison Funk)가 기차역을 촬영한 영상에서 기차역이 93년 이전에 있었다는 언급이 나온다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주장했으나, 해리슨은 다음 날에 즉시 해당 영상은 94년에 촬영한 것이며 댄 리드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고 또한 자신의 영상 어디에도 기차역의 년도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댄 리드가 말을 꾸며냈다고 비판했다. ( 기사 참조) [118] 05년 재판때 마이클과 마이클의 법률팀이 세이프척과 세이프척 어머니에게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하는 증언을 하도록 압박했으나 둘 다 거절했고 이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이와 같은 말을 했다는 주장인데, 세이프척은 05년 재판 초기에 증인에서 아예 제외됐음이 밝혀져서 이 일화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지며 그전엔 한번도 언급된 적 없다가 14년 고소장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119] 미첼 베클로프 판사는 세이프척이 05년에 이미 본인이 성학대를 당했다는 것을 인지했고 어머니에게도 알렸다면 그때부터 60일 이내에 소송을 제기했어야 했는데 14년에야 소송을 제기한 것은 기간이 한참 지났다고 판단하여 소송을 기각했다. [120] 또한 마이클 사망 후 2009년 9월에 세이프척이 근무하는 그래픽 디자인 업체 Avatar Labs에서 마이클의 추모 다큐인 "This is it" 을 홍보하는 트위터 메시지 페이스북 메시지를 올린 것도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이 회사는 직원 4명 남짓의 소규모 업체로 이 홍보는 이 업체의 업무도 아니며 세이프척만 그 업체에서 마이클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다큐에 나온데로 09년 6월 마이클의 사망에 세이프척의 어머니가 기뻐서 춤을 출 정도로 세이프척과 어머니 모두 성학대를 알고 마이클을 증오하고 있었다면, 09년 9월에 세이프척의 회사가 갑작스럽게 그들 업무도 아닌 마이클의 추모 다큐를 홍보하는 것을 세이프척이 그대로 둔 것이 이상하기 때문이며 정황상 이 홍보를 주도한 사람은 오히려 세이프척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다큐에서 세이프척이 05년 재판때 증언하기 싫었다고 주장하며 이미 그때부터 마이클에게 반감을 가진 듯이 말한 것과도 배치된다. [121] 이는 당시 10살로 학교를 다니고 있을 세이프척의 방학 기간과 일치한다. 이 외의 기간에는 투어에 등장하지 않았으며 89년 1월로 배드 투어가 끝난 후엔 세이프척의 펩시 광고모델 활동도 종료되었다. 이후로 세이프척은 보이지 않다가 91년의 L.A.Gear 광고에 출연하였는데 이 광고는 마이클의 조카 브랜디를 포함한 10여 명의 아동들과 함께 등장하는 광고여서 세이프척 단독 섭외가 아니다. 그 외 92년에 마이클의 jam 뮤직비디오에 다른 아이들 무리에 섞여 한 장면 등장한 적이 있다. 세이프척은 아동모델 활동을 하며 펩시모델 기간과 몇 차례 커머셜 활동의 상업적 현장에서 마이클과 접촉했었고 행사장이 아닌 사적인 만남은 거의 목격된 바가 없으며 세이프척의 아동모델 적령기가 지난 이후에는 연예계 활동 자체를 찾기 힘들다.

또 세이프척은 다큐에서 자신이 14살이던 92년을 기점으로 사춘기가 오자 마이클에게 버림받았고 만남이 끊겼다고 주장하지만, 94년 8월에 마이클이 아내 리사와 함께 한 히스토리 앨범 티져영상 촬영 현장에 세이프척과 세이프척의 어머니가 찾아와 세이프척이 우산을 들고 따라다니는 모습 포착된 바가 있으며 마이클 보다 키가 커진 16살의 세이프척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96년에 세이프척 가족이 마이클의 고스트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 방문한 사진, 97년 히스토리 투어 때 어머니와 함께 길거리에서 군중에 둘러쌓인 마이클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발견된 적이 있는데 역시 외부의 public한 행사 와중이며 개인적인 접촉이 아니다. 이후로는 이런 장면도 포착되지 않고 사라졌다.
[122] 88년 2월의 그래미 시상식과 비교적 비슷한 시기인 88년 3월 11일에 세이프척이 어머니와 함께 마이클과 라이자 미넬리 동행하여 뉴욕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백스테이지 행사 관람한 적이 있지만, 세이프척은 스스로 이 뉴욕여행에 대해 마이클과 숙소를 공유한 적 없으며 자신은 어머니와 함께 방을 썼다고 진술했기 때문에 이와 헷갈렸다고 보기도 힘들다. 또한 이 행사도 펩시가 3월 1일에 배드 투어 후원을 계약한 이후이며 배드 투어가 끝난 뒤엔 세이프척의 펩시 광고모델 활동도 종료되었다.

게다가 당시 마이클의 일정은 백스테이지 행사 하루 전인 3월 10일엔 미국 흑인대학 재단(UNCF) 특별상 수상을 위해 라이자 미넬리, 휘트니 휴스턴 , 엘리자베스 테일러 함께 쉐라톤 호텔을 방문했고( 수상 영상) 행사 다음날인 3월 12일엔 미주리 주에서 배드 전미투어 공연을 했던, 뉴욕에서 지체없이 이동한 일정이었으며 이때 아동의 동행은 없었다. 아울러 마이클은 외부에 노출될 때 마다 일거수 일투족이 포착되었는데 세이프척은 88년 3월 11일 행사날 단 하루 외에는 88년 그래미 시상식 공연 때를 포함하여 이후로도 뉴욕에서 포착된 적이 없다.
[123] 92년에 세이프척 가족이 집을 사며 대출을 부탁할 당시 세이프척의 아버지가 이미 은행에 다른 대출이 있어서 여신 한도가 부족했고 또 마이클의 높은 신용도를 이용하면 낮은 금리가 되어 집 값을 절약할 수 있었기에 마이클의 회사를 통해서 우회 거래를 하고 마이클의 회사가 집을 담보물로 설정한 뒤 세이프척 네가 은행대출을 갚듯이 갚는 방식이 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 5000달러를 더 절약하여 집을 구매할 수 있었다. 미국은 house loan의 형태로 집을 구매하는 방식이 흔하며 이때 신용도에 따른 이자율의 차이로 가격의 차이도 발생한다. 즉 집을 사주는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담보설정을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애초의 계약 상으로도 집을 사주는 의도란 존재하지 않으며 좀 더 경제적인 방식으로 구매하기 위해 세이프척 가족의 부탁에 따라 편의를 제공해줬을 뿐이다. 또 92년에 담보대출 설정을 한 후 93년에 세이프척 가족이 원금상환 기간의 연장을 요청한 것을 보면 1년 남짓 단기간에 상환할 것을 그들이 약정하여 대출이 이루어 진 것이나 이후 세이프척 네가 이 계약을 지키지 못했던 것도 알 수 있다. [124] 롭슨의 주장은 의도치 않게 어머니 조이의 증언으로 부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의도치 않았다고 쓴 이유는 조이 또한 과거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하다가 롭슨의 마이클 재단을 상대로 한 16년 재판에선 아들 롭슨 편에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정에서의 증거 제시와 과거 자신의 증언과의 모순에 부닥쳐 조이는 결국 롭슨에게 불리해질 수 있는 증언들을 하고 말았다. [125] 회고록 초안에서 롭슨은, 롭슨 가족의 90년 첫 네버랜드 방문때 첫날 둘째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셋째날 다른 가족들이 그랜드 캐니언 관광갔을 때 처음 성학대가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126] 고소장에서 롭슨은 그랜드 캐니언 가기 전인 네버랜드에서의 첫째날에 당시 11살이던 누나 찬탈과 함께 침실 아랫층에서 마이클과 함께 잤고, 둘쨋날 밤에 누나 찬탈이 침실 윗층에서 잘 때 침실 아랫층에서 처음 성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주장도 누나 찬탈의 05년 증언과 또 모순된다. 찬탈은 오히려 첫째날에 윗층에서 잤고 둘째날에 롭슨과 함께 아랫층 침대를 썼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롭슨의 주장들은 자신의 가족들의 증언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127] 또한 롭슨은 심지어 18년 <Inside Edition>과의 인터뷰에서 마이클과 함께 한 모든 밤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추행이 일어났다고 말을 바꾼 적도 있어 롭슨의 성학대 주장은 계속 변화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진술과도 상충되는 것들이다. [128] 재판 기록 외에도 롭슨은 자신의 블로그에 과거 자신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글을 남겼다가 이것이 나중에 발각되자 글을 수정한 기록이 포착되기도 했다. [129] 12년부터 롭슨이 마이클 관련 내용으로 수 백 통의 이메일과 문자를 지인들과 가족들 특히 어머니와 많이 주고받은 것을 재판부가 알게되어 공개 명령을 내린 것이다. [130] 가령 롭슨은 네버랜드에서의 자기 가족과 마이클과의 첫 드라이빙 일화를 말하다가 그것이 스스로의 기억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것인지 묻는 질문에 본인의 기억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러나 롭슨이 조이에게 보낸 이메일 질문 리스트 중에는 당시 드라이빙 상황에 대해 물어본 것도 있었다. [131] 롭슨이 그 뒤의 내용은 짤린 채로 공개했다. [132] 찰리 마이클스(Charli Michaels)는 90~92년에 네버랜드의 여성 보안요원으로 일했던 사람으로 롭슨이 90년에 성희롱 당했다는 이야기를 94년에 진술했었다. 왜 그때 경찰에 알리지 않았냐는 질문에 찰리는 해고될까봐 두려웠다고 답했으나 92년 3월에 해고된 후 93년 말에 타블로이드 채널 <Hard Copy>의 다이앤 디몬드 방송에 이 이야기를 팔기 전까지 찰리는 이를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성희롱 장면을 봤다면서도 어머니 조이에게 알린 적도 없다. 찰리는 90년 'Mother's Day'에 조이가 네버랜드에서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유를 물었더니 조이가 마이클의 비서인 노르마 스타이코스가 마이클과 롭슨이 네버랜드 극장에서 댄스 리허설을 하고 있으니 방해되지 않도록 조이는 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다며 진술했었고, 또 같은 날에 웨이드와 마이클의 점심식사를 갖다주러 극장에 갔더니 마이클이 웨이드의 가랭이를 쥔 자세로 댄스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찰리는 메인하우스에 있는 마이클의 방에서 롭슨이 마이클과 있을 때 마이클이 조이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아 조이는 메인하우스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도 당시 주장했었다.

그러나 05년 재판에서 조이의 증언으로 찰리의 진술들은 모두 부정되었다. 조이는 'Mother's Day' 날에 롭슨이 보이지 않아 울었던 건 맞지만 롭슨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하루종일 네버랜드를 돌아다녔고 나중에 롭슨이 메인 하우스 2층에 있는 'Rose Bedroom'에서 혼자 늦잠을 자고 있었단걸 알았다고 증언하여 찰리의 극장 관련 진술 자체가 신빙성이 모두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이는 또 네버랜드에선 머물 곳을 자신이 어디든 선택할 수 있었고 메인하우스의 'Rose Bedroom'를 답한 적도 있다고 진술했으며 마이클의 침실에도 언제 어느 때든 들어갈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찰리는 현재 롭슨 측 증인으로 알려져 있다. - 조이가 증언한 05년 5월 6일자 재판 문서 참고
[133] 이외 조이는 16년 증언에서 90년대 초에 LA 센트리 시티와 웨스트우드에 있는 마이클의 아파트에 두 차례 방문했을 때 롭슨이 마이클과 잠이 들곤 했지만 그 자리에는 엠마누엘 루이스(당시 약 20세)와 마이클의 사촌인 앤서니 잭슨 등의 여러 사람들도 종종 같이 있곤 했다고 증언했다. 또 라스베이거스 Mirage 호텔에서 롭슨이 이틀간 마이클의 슈이트 룸에서 같이 잔 적이 있으나 조이와 찬탈도 동시에 슈이트 룸 내의 다른 방에서 묵었었고, 그 밖에 마이클이 아내 리사와 다툰 후 롭슨의 할리우드 콘도에서 이틀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때 롭슨이 거실에서 마이클과 같이 잤으나 바로 위층 침실에 조이가 있어서 언제든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고 진술했다. 이 일화들은 모두 94년까지 있었던 일로 이후엔 마이클과 이러한 일화가 없다. 또한 95년 마이클이 히스토리 앨범을 발매했을 때 롭슨은 앨범을 사기 위해 길거리에서 줄을 서고 있었던 것이 영상으로 포착되기도 해서 당시 롭슨은 마이클에게 앨범을 받지 못할 만큼 가깝지 않았던 사이였음을 추측하게 했다. [134] 마이클과 네버랜드에서 함께 지낸 Grace Rwaramba도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된 일화를 말했었다. 네버랜드에서 다른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조이가 롭슨에게 춤 연습을 계속 시키자 마이클이 조이는 마치 자신의 아버지 "조 잭슨" 같다는 말을 그레이스에게 했다는 것이다. 마이클은 자신이 아버지 조 잭슨에게 학대에 가까운 트레이닝을 받으며 5살 때 부터 연예계 활동을 하느라 유년기를 잃었기 때문에 아동의 인권과 유년기를 특히 중요시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롭슨은 19년 최근에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이와 반대로, 마이클이 자신에게 어린 시절에 비즈니스를 강조하였고 자신의 아버지 데니스가 쉬게 하고 화해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내용의 18년에 쓴 을 재업로드 하여 위의 조이의 증언들과 어긋나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 데니스가 롭슨의 장래를 위해 이민 아이디어를 냈다고 조이는 증언하였으며 91년 이후로 데니스는 호주에서 떨어져 살았기에 롭슨의 미국 활동에 현실적인 영향을 끼치기 어려웠다. [135] 아버지 데니스의 여자 형제인 우드와 롭슨의 부계쪽 사촌도 우울증으로 각각 20살과 30살에 자살한 이력이 있다. [136] Duty의 의미를 영문 doodoo라는 단어의 발음에 연상시키도록 조합하여 마이클이 장난스럽게 만들어낸 단어이다. 마이클의 Doo Doo는 띄어쓰기 있음 주의. doodoo는 검은 얼룩, 거칠게 뛰어놀다 얼룩진 이런 것들을 귀엽게 칭하는, 아이들이 사용하거나 어른이 아이한테 쓰는 표현이다. 네이버 사전에선 간단하게 똥으로 나오는데 이는 원 의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통 아기들의 응가를 관용적으로 doodoo라 칭한다. [137] 브래드의 반박 후 롭슨은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녹음실에 있던 여러 사람의 시선이 우연히 동시에 다른 곳을 보는 몇 초 간의 찰라의 순간에 순식간에 성추행을 해서 아무도 몰랐다며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브래드의 말에 의하면 마이클은 녹음실을 들락날락 할 때 몇 번 롭슨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정도로 접촉한 시간 자체가 짧았고 대부분의 시간에 마이클은 작업중이었고 그들은 견학하듯 얼마간 보다가 간 상황이라고 하니 이러한 상황에서 롭슨이 주장한 찰라의 순간을 어떻게 맞출 수 있다는건 지 전혀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롭슨의 고소장과 다큐 모두 방이라고만 언급할 뿐 어떠한 상황 묘사가 없는데 다큐에서 롭슨과 세이프척 모두 이런 식으로 성행위에 대해서만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room"이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을 이용하면서 구체적인 정황과 장소 묘사는 생략하거나 사실과 맞지 않게 말하는 공통점이 있다. [138] 세이프척도 경보장치를 언급했는데 경보장치는 05년 개빈사건 재판 때 이미 법정에서 다뤄졌던 것으로 당시 검찰은 경보장치가 범행을 들키지 않을 용도로 쓰인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현실과 맞지 않음이 드러났고 지속적인 침입자와 사건 사고가 있었기에 다른 의미 없는 보안상 편의장치 임이 확인되었다. 검찰의 주장이 어떻게 모순되었는지 더 알고 싶다면 상단의 ' 2003년 2차 혐의' 문서를 참고. [139] 마이클은 03년 마틴 바셔와의 인터뷰에서 절대 본인이 아이들을 침실로 [140] 94년 Lisa D. Campbell 저서 <Michael Jackson: The King of Pop's DARKEST HOUR> [141] 아울러 다큐에는 감독 댄 리드가 롭슨을 지도하는 듯한 장면도 있다. 롭슨이 "I came back Michael Jacksons best friend.(난 마이클 잭슨의 절친이 되어 돌아왔어.)"라고 말하자 감독 댄 리드가 "and his lover(그리고 그의 연인)"라고 말하며 친구를 연인으로 정정했고 이에 롭슨이 감독의 말을 따라하며 ""Ya and his lover(그래, 그리고 그의 연인)"라고 말을 고치는 장면이 나온다. [142] 이 앨범 CD의 크레딧에서 롭슨이 마이클을 향해 "nigga"라고 칭한 글이 발견되어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nigga"란 표현은 깜둥이 정도로 해석되는 흑인 인종차별 단어로 방송에서 금기어로 여겨질 정도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앨범은 발매 준비를 하던 중 조단사건이 터지면서 마이클의 회사가 마비되어 경황없이 발매된 것이다. 이 이중성이 알려지자 한때 롭슨의 연예계 활동을 도와주기도 했던 마이클의 조카 타지 잭슨은 롭슨은 어떠한 연기도 할 수 있을 거라며 경악하는 트위터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 외에도 다큐에서 마이클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주장하던 롭슨이 마이클의 머리를 향해선 "brillo pad(때 수건)"같았다는 흑인 외모를 비하하는 표현을 동시에 사용하여 인종차별 논란이 인 적도 있다. [143] 실제로 마이클은 자신이 먼저 아이들을 방으로 초대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밝혔고, 05년 재판에서 개빈 아르비조와 조이 롭슨도 자신들이 먼저 마이클의 방에 아이들을 머물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마이클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카렌 페예도 마이클은 아이들을 게스트 하우스로 보내려고 했지만 종종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메인하우스에 머물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었고 마이클은 이를 거절하기 힘들어 했다고 밝혔다. 또한 마이클이 아이들에게 관대한 점을 부모들이 이용하곤 했으며 그들은 아이들을 마이클에게 보내 쇼핑에 데려가 달라거나 마이클의 카드를 갖고오게 하는 등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시키기도 했었다고 밝혔다. 1차 혐의의 조단 챈들러도 조단이 먼저 마이클의 방에 머물고 싶어 어머니를 졸랐다고 조단의 어머니가 진술했다. 그리고 카렌의 말처럼 마이클에게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먼저 자신의 아이들을 마이클과 머물도록 부탁했던 사람들이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마이클을 그들 경력이나 금전 목적에 이용한 전력이 있다. [144] 실제로 롭슨과의 연애관계를 폭로한 마이클의 조카 브랜디 잭슨은 마이클이 죽은 후에 조이 롭슨에게서 연락이 와서 만났었고, 당시 조이는 마이클의 어머니인 캐서린 보다 자신을 마이클이 더 신뢰했다고 주장하면서 캐서린이 아니라 자신이 마이클의 유산을 상속받은 자녀들의 대모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었다는 일화를 인터뷰에서 밝혔다. [145] 후에 알려진 이야기로는, 브렛이 경찰 심문에서 마이클의 결백을 진술한 이후에 일부 네버랜드 전직직원이 돈을 받고 타블로이드에 브렛이 성추행 당했다는 이야기를 팔았고, 이후에 경찰이 브렛 반스의 집에 방문하였는데 브렛의 부모님에게 브렛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이미 결백을 진술했던 브렛이 거부의사를 밝히자 부모님이 브렛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전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브렛 반스가 피해자이면서 진술을 피한 걸로 검찰 측이 자의적으로 각색하여 발표했다는 추정이다. 그런데 당시 경찰 방문 보고서에서도 브렛은 피해자로 보고된 적이 없으며 브렛 반스는 단 한번도 성추행을 진술하거나 주장한 적도 없어서 검찰 측의 피해자 추정은 전혀 근거가 없다. 브렛은 05년 재판 때도 마이클의 결백을 증언했고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결백을 지지하는 인물이다. [146] 이 시나리오는 합의금을 받아내는 동안 내용이 바뀌어갔고 이때 블랑카는 마이클 루머작가 구티에레즈와 교류하고 있었다. [147] 참고로 마이클의 생전 미공개 곡들 중엔 실제로 할리우드 내의 아동성학대를 고발하는 듯한 곡들이 있다. 마이클이 80년대 후반부터 쓰기 시작해서 사후에 공개된 "Do You Know Where Your Children Are" 곡은 아동성학대를 고발하는 곡인데, 가사 중에 가출한 어린 소녀가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장소를 헐리우드로 지목하고 있다. 또 99년에 작곡했으나 사후에 공개된 "Hollywood Tonight" 곡에서도 역시 헐리우드에 대한 환상을 미끼로 어린 소녀가 성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암시하는 가사가 들어가 있다. 이 외에도 아동성학대 및 아동학대를 고발하는 마이클의 미공개 곡들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8] 93년 마이클이 수사받던 시기에 같은 LA 경찰에게 선댄스 영화제의 제창자이기도 한 헐리우드의 유명 백인 프로듀서 밴 와그넨(Van Wagenen)이 처음 아동성범죄로 조사받고 자백까지 했으나 경찰이 풀어줘서 무마한 사실이 2019년에 드러났다. 와그넨은 12년과 15년에도 아동포르노 소지가 적발되었으나 외부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아동성범죄를 저질러오다 결국 19년에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존 그리삼과 마찬가지로 초기에 경찰이 방관함으로써 추가 범행이 계속되도록 방치한 것이다.

그러나 19년에 선댄스 제창자 와그넨의 범죄가 알려졌을 때 선댄스에서 상영이 결정된 <리빙 네버랜드> 다큐의 마이클에 대한 미디어의 집중 보도 덕에 와그넨 사건은 부각되지 않았다. 또한 직전 2018년에 헐리우드 내부로 미투운동이 본격 번졌을 때 헐리우드 아동성학대 의혹도 다시 제기되었고, 이때 터진 흑인 연기자 빌 코스비와 흑인 작곡가 알 켈리의 소아성애 및 성범죄 의혹은 다른 헐리우드 이슈를 덮을 정도로 미디어가 집중 보도하고 다큐까지 제작되면서 사회적으로 매장된 것과 달리 백인이자 오랜 제작자인 와그넨은 언론보도가 거의 되지 않아 범죄 언급이 전혀 없는 프로필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2017년에 미투운동이 처음 시작될 때 코리는 소아성애자 그룹엔 할리우드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 따라서 백인일 수 밖에 없는 -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코리의 폭로 이후에 브래드 피트도 아동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아동성학대를 저질러온 헐리우드 소아성애 집단이 있음을 밝히며 그들이 방송.연예 산업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으로 미국을 콘트롤하며 망치고 있다고 인터뷰했고, 아동배우 출신 엘리엇 우드도 헐리우드 실력자 소아성애 그룹이 미디어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 폭로되기 힘들며 한 명이 드러나면 도미노처럼 이어지기에 극구 부각되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었다. 참고로 미국의 대부분의 미디어들은 헐리우드 산업에서 출발했거나 합병됐고 자본과 산업이 긴밀하게 얽혀있다.
[149] 아울러 17년엔 백인 배우 케빈 스페이시의 아동성범죄 의혹도 터졌지만 그 다음에 터진 흑인 배우 빌 코스비 사건을 미디어가 이슈화 하면서 보이콧으로 비화되는 일 없이 불거지지 않았다. 그러나 19년 7월에 억만장자 헐리우드 투자자이자 케빈 스페이시와 친분관계에 있던 제프리 앱스타인(Jeffrey Epstein)의 아동성범죄가 다시 터졌고 피해자가 수십 명에 달하고 미성년자 누드사진이 쏟아지는 등 범죄의 증거가 명백하고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흑인 작곡가 알 켈리의 성범죄 폭로 다큐를 제작했던 할리우드는 백인 헐리우드 자본가이자 영향력이 막대한 앱스타인에 대해서는 헐리우드에서 받아들이기엔 힘들다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관련 다큐를 제작하지 않겠다고 밝혀서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방송.미디어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성범죄를 많이 이슈화 해왔던 오프라 윈프리도 19년에 어떠한 검증도 증거도 없는 마이클에 대한 일방 루머 다큐인 <리빙 네버랜드>에 대해서는 앞장서서 지지하는 방송을 하여 이슈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면서도, 자신의 인맥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명백히 증거와 피해자가 증명된 성범죄에 대해서는 이슈화를 극구 반대하였고 제프리 앱스타인 건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키는 등 태도의 대조를 보였다.

17년에 코리의 헐리우드 소아성애 집단에 대한 폭로에 대해 (엘리엇의 주장에 의하면 헐리우드 소아성애 실력자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당시의 미디어의 반응은 냉담했으며 유명 방송인 바바라 월터스는 코리를 향해 전체 산업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폭로를 멈추길 주장했었다. 또한 코리는 자신의 절친이자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했던 아동배우 출신 코리 헤임(2010년 사망)도 82년 11살때 배우 찰리 신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였음을 폭로하기도 했다.( 참고) 또 사망한 파라마운트 전 회장이 아동연예인 소년을 조달하는 소아성애 클럽을 운영한 것과 이미 유죄선고를 받은 소아성애 매니저 몇 명 등을 폭로했으나 미디어에선 이슈화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사망했거나 이미 유죄선고를 받아서 실제 폭로의 영향이 가지 않는 일부 외엔 드러나지 않은 헐리우드 내 유력인물에 대한 폭로는 17년에 미디어의 반발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으나 19년에 드러난 백인 헐리우드 실력자 밴 와그넨과 제프리 앱스타인의 아동성범죄 사건처럼 의혹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150] 한편 FBI가 과거에 집단적으로 아동성학대 범죄를 은폐한 것이 드러나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또 검찰과 경찰로부터 보호를 받았던 인물들은 백인이었기에 백인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불편한 흑인 유명인, 즉 인종차별을 비판하던 마이클을 무고하게 표적수사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당시 경찰이 무시한 진짜 소아성애자 존 그리삼은 출소 후에 성범죄자 주소등록도 거부하여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이며 출연한 영화에서 이름만 삭제됐을 뿐 언론보도도 없어서, 이렇게 미국 헐리우드 내 백인 소아성애 범죄는 미디어가 거의 이슈화하지 않는 현상을 보였다.

아동강간을 저질러서 유죄판결을 받은 로만 폴란스키와 같은 백인 중범죄자는 헐리우드에서 보이콧 없이 작품활동을 해왔으나, 무죄판결을 받은 흑인 마이클에 대해서는 객관적 취재가 결여된 미디어의 과도한 이슈화와 왜곡으로 헐리우드의 도덕적 위선을 마이클에 대한 허구적인 이슈화로 세탁하거나 은폐하는 형국을 특히 헐리우드 산업과 연관된 미국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다.

실제로 30년간 헐리우드 내에서 성범죄를 저질러오다 미투운동으로 폭로된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자신의 추문을 덮기 위해 루머작가에게 금전으로 마이클에 대한 루머유포를 의뢰하고 마이클 악성루머를 지속적으로 퍼트려온 미국 내 최대 타블로이드 기업 AMI와 유착관계를 가졌던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와인스타인의 공모자들" 17년 뉴욕타임즈 기사 참조)
[151] 구티에레즈는 비행기 티켓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출석하지 못한다는 문서를 나중에 보냈고, 그전에 그의 변호사는 구티에레즈의 불출석에 대해 그의 얼굴을 보면 배심원단이 편견을 가질 수 있다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를 댔으나 재판부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구티에레즈는 칠레로 도피한 후에도 이미 허위로 판명 난 마이클 소아성애 루머책 <Jordan Chandler’s diary(부제: 마이클은 나의 연인)>을 칠레에서 스페인어로 출판했고 영문 사본을 LA의 서점으로 보냈는데, 마이클은 자신의 책에 대해 고소하지 않고 오히려 책 사본을 몽땅 사들이고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책이 진실인 양 홍보했으나 이 또한 거짓말이다. 구티에레즈의 미국 내 책 사본은 99년 5월 법원명령으로 경찰에 다 압수됐기 때문이다. [152] 다이앤 디몬드(Diane Dimond)는 95년 1월에 타블로이드 언론사 <Hard Copy>의 TV 채널을 통해 마이클이 조카와 성적 행위를 하는 비디오 테이프를 조카의 어머니가 구티에레즈에게 보여줬고 로스 앤젤레스 수사당국도 마이클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다고 확언함으로써 자신의 보도가 사실인 양 방송했으나, 이후 로스앤젤레스 검찰 측이 수사 재개는 없으며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성명 발표하여 그녀가 확인도 안한 채 허위 방송을 한 것이 드러났다. 소송에서 디몬드는 로스 앤젤레스 수사당국이 아니라 산타 바바라 검찰 톰 스네던에게 확인했다고 변명했고, 톰 스네던에게 수사를 재개했느냐 물었더니 부정이 아니라 '언급할 수 없다'라고만 답했기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고(?) 구티에레즈가 로스 앤젤레스 수사당국과 인터뷰 했다는 말을 듣고 수사 중일 것으로 판단(?)했기에 고의적인 악의는 없었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로스 앤젤레스 검찰 측의 성명과 모순된다. 그래서 톰 스네던은 디몬드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94년 12월 경에 구티에레즈로 부터 비디오 테이프에 대한 제보를 들었고 디몬드의 전화를 받았으며 자신의 관할권을 벗어나 로스 앤젤레스 검찰청의 대리 검사인 로렌 위이스(Lauren Weis)에게 조사 의뢰를 했고 자신의 기억에 의하면 디몬드가 방송한 이후에 수사하지 않는단 판단이 내려진 걸로 알기에 디몬드는 몰랐을 것이며 따라서 악의는 없었을 거라는, 디몬드를 비호하는 성명서를 낸 것이다. (톰 스네던은 성명서에서 디몬드와 삼년간 많은 대화를 나눴다며 친분을 과시하고, 마이클을 제대로 인터뷰해본 적도 없는 음해가 구티에레즈를 마이클 잭슨을 이해하는 작가로 높이 평하며, 자신의 마이클에 대한 편파적인 심리를 숨기지 않았다.) 로렌 위이스도 뒤이어 성명서를 발표하여 톰 스네던이 자신에게 조사의뢰를 했었다 주장했고, LA 카운티 DA 사무소의 수사관 Jack Gonterman도 95년 1월 5일 로렌 위이스의 지시로 구티에레즈와 인터뷰를 했지만 더 이상 관심두지 않았고 다른 데에 알리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 타블로이드 황색언론인 1명을 돕기 위해 3명의 제도권 검찰과 수사관이 나서는 형국을 보라.) 외부에 알리지 않아 사실확인도 안되는 이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5일 단 한 번 제보 청취한 것 외에 테이프를 찾기 위한 어떤 실질적인 조사도 없었고 이미 종료 되었는데도 디몬드는 로스 앤젤레스 검찰 측은 물론 해당 조카의 어머니에게도 어떠한 확인도 안한 채 9일 방송에서 테이프는 존재하며 수사 중이란 허위 방송을 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제보자도 인터뷰 한 사람도 모두 구티에레즈인 이 1인 자작극을 실질적인 조사로 간주하고 디몬드의 방송이 완전한 악의는 아니라며 관대하게 판단했고 디몬드와 해당 방송사에 아무런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시정 명령 조차도 내리지 않았다. [153] 세계적인 음악전문 방송 채널로 80년대까진 백인 뮤지션의 뮤직 비디오만 방영하여 인종차별 논란이 있었으나 83년 마이클의 스릴러 뮤직비디오에 대한 대중들의 강한 방영 요구에 부딪혀 마이클을 필두로 흑인 뮤지션에게도 문을 열었다. [154] 파라마운트 픽쳐스는 80년대에 케이블 TV사업(USA Network)에 뛰어들었고, 94년에 음악 전문방송 MTV 등 많은 케이블 채널과 방송국,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바이어컴(Viacom)에 인수됐다. 이후 바이어컴은 95년에 위성방송 UPN network 개국, 99년에 CBS 인수, 2005년엔 드림웍스 영화사까지 인수하며 확장했고 CBS는 2006년에 분화됐지만 바이어컴의 모기업인 내셔날 어뮤즈먼트가 CBS의 지배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미국의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언론 및 방송사와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거대기업의 영향력이 크다. [155] 이 기사는 극소수의 흐름이기에 이걸로 미국 언론이 마이클에 대해 공평한 시각을 가졌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아울러 마이클 사후에 비로소 돌아본 일부 비판적 흐름 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미디어 산업의 매출 하락과 생존 경쟁 앞에서 희미해지고 말았다. [156] 베네티 페어의 Maureen Orth는 03년에 개빈 사건이 터지자 마이클에 대한 루머를 집중 기고하며 판매부수를 올렸고 03년엔 마이클이 소의 피를 사용하는 부두 의식을 한다는 황당한 루머 기사를 내다가 -그러나 이걸 진지하게 읽는 대중은 언제나 있었다- 04년엔 "리차드 마쓰우라"라는 아이를 마이클이 성학대 했다는 허위기사까지 냈다. 이후 마쓰우라가 직접 부인하는 인터뷰를 하자 베네티 페어는 일말의 정정이나 사과도 없이 마쓰우라의 이름만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고 이렇게 왜곡보도에 앞장서던 언론은 거짓 기사 유포 후 외면하는 방식으로 이미 대중에게 퍼진 오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방식을 집단적으로 보였다. [157] 빅토르 구티에레즈 (Victor Gutierrez): 80년대부터 마이클에 대한 각종 허위 루머를 TV와 인쇄 매체에 팔며 돈을 벌었던 칠레 출신 캐나다 국적의 마이클 집착 루머 작가. 마이클 전문가를 자처하면서도 마이클과 한 번도 인터뷰도 하지 않은 사람이며, 95년 마이클에 대한 중상모략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마이클은 투어 중이라 변호인만 참석했고 구티에레즈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아 마이클은 구티에레즈의 얼굴도 모른다. (소송 과정에서 구티에레즈는 마이클을 한 번 마주쳤다고 주장했는데 95년에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하는 마이클 뒤를 쫓아가 사진을 찍으려 했고 이때 마이클이 경호원에게 자신의 카메라를 뺏으라 말했다고 주장한 게 다이다. 그러나 그의 카메라는 뺏긴 적이 없고 경호원의 어떤 물리적 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한 적도 없으며 구티에레즈의 말에 의하면 그저 경호원의 손이 닿은 게 전부이다.) 구티에레즈는 마이클에 대한 허위루머 책을 출간한 후 독일신문 <Dagezeititung>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소아성애자의 장기간 보증으로 소아성애자 임을 검증받아야 참석할 수 있는 "NAMBLA" 회의에 86년에 참석했음을 밝혀서 그 자신이 소아성애자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 NAMBLA 회의에서 구티에레즈는 마이클을 소아성애자로 조작하는 루머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94년에 성추행 비디오 루머를 <SPLASH NEWS> 등의 타블로이드에 팔려고 했으나 거래되지 못하다가(이땐 95년에 다이앤 디몬드가 방송한 것과 또 내용이 다르다. 잘 안팔리자 각본을 수정했던 셈) 다이앤 디몬드와 만나면서 판로를 얻고 이후 본격적으로 마이클 관련 소아성애 루머 창작사업에 뛰어들었다. [158] 게다가 구티에레즈는 아래에 후술 된 2번째 사건의 캐나다인 소아성애 매춘업자 로드니 알렌과 놀랍게도 친분이 있다. 로드니 알렌은 소아성애로 구속되기 전인 95년에 구티에레즈가 쓴 마이클 소아성애 허위 루머책 <Jordan Chandler’s diary>의 출판 모색을 위한 도서 전시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구티에레즈는 자신의 책에서 챈들러 측이 준 조단 챈들러의 일기를 기초로 했다고 적었는데 이는 거짓이다. 93년 사건 때 조단의 노트북이 압수되긴 했으나 영화 학교를 다니던 조단의 영화 시나리오 습작 글만 발견됐을 뿐 일기는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소송 재판부가 일기 임을 입증 할 증거제출을 명령했으나 구티에레즈는 아무 것도 제시하지 못했다. 한편 책 내용엔 챈들러 가족의 사진 등 챈들러 측에서 제공하지 않으면 알기 힘든 정보들이 있어서 마이클 변호사 측은 챈들러 측이 94년 민사합의 조항을 어긴 것으로 보고 이의 제기 (1) (2)신청을 하기도 했는데, 마이클 측의 이의제기가 틀렸다면 이의 제기에 대한 법률비용을 배상해야 할 것인데 마이클 측이 이를 배상했단 기록은 없다. 또 챈들러 측도 책 속에 등장하는 압둘 카심, 바그넬 등은 모른다고 했으나 구티에레즈를 모른다고는 하지 않아 구티에레즈와의 관계를 간접 인정했다. 구티에레즈는 마이클이 소송을 멈추지 않으면 책으로 마이클을 망신 줄 것이라 예고했었고, 마이클에게 허위 소송을 걸었다가 위증죄 벌금과 막대한 배상금을 판결받은 전직 네버랜드 직원들 - 압둘 카심과 바그넬, 맥마누스 등으로 절도 등의 문제로 해고됨 - 의 엉터리 주장인 마이클의 경호원이 총으로 위협해(네버랜드는 총기 소유 자체가 금지된 곳이다.) 직원들이 강제로 성관계를 갖도록 시켰고 마이클은 직원들 앞에서 설사를 했다는 둥의 황당한 거짓말 악담까지 자신의 책에 실었으며, 네버랜드 5의 소송과 그들의 타블로이드 판매용 루머창작에 관여하기도 했다. [159] 심지어 구티에레즈 책의 전체 줄거리는 어이없게도 소아성애를 로맨스로 미화하고 사회가 소아성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며 직접 책의 크레딧에 악명높은 북미 소아성애 옹호자 단체인 "NAMBLA(North American Man-Boy Love Association)"에 감사한다고 적었다. 그는 98년에 중상모략으로 27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판결받으며 그의 허위 책도 99년에 법원명령으로 압수되었다. 구티에레즈는 판결 전에 칠레로 도피했으나 이후 다시 미국으로 들어와 03년에 마틴 바셔가 마이클을 속이고 소아성애자처럼 편집한 왜곡 다큐의 컨설던트를 하기도 했다. (참고 - 06년 9월 영국 GQ Magazine, Robert Sandall의 기사 'Michael Jackson Was My Lover') 또한 칠레에서도 03년에 우익정당 연합인 칠레동맹 소속 상원의원 클라우디오 스피니악(Claudio Spiniak)이 오르지(orgies)의 유명한 매춘 거리에서 아동과 접촉하는 걸 보았다는 소아성애자로 몰아가는 허위기사를 냈다가 구티에레즈가 목격자 소년에게 만에서 이만 칠레 페소를 지불한 것이 밝혀지기도 했고, 08년에 허위 음해로 61일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아르헨티나 전직 대통령인 카를로스 메넴(Carlos Menem)의 전 부인인 Cadilia Bolocco의 사생활에 대한 중상 모략으로 칠레에서 해당 범죄 관련 가장 많은 벌금인 3천만 칠레 페소(약 6만 달러) 부과받기도 하는 등, 소아성애 이슈와 유명인에 대한 허위 음해로 계속해서 생계를 연명하는 모습를 보였다. 참고 [160] 05년 재판 때 마이클이 아동들을 학대했다는 어떠한 증거와 실효있는 진술도 찾지 못하여 혐의 입증의 어려움에 부딪힌 톰 스네던 검사는, 소아성애를 학대가 아니라 아동이 적극적으로 원하는 관계로 각색한 구티에레즈의 소아성애를 로맨스로 미화하는 반사회적인 플롯을 증거요청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다이앤 디몬드를 비롯한 여러 루머 컬럼니스트들에게도 이 플롯이 차용되었고 19년엔 <리빙 네버랜드> 다큐에서도 유사한 플롯이 등장하는 등, 실제 아동 성학대자의 심리학적 프로파일과 맞지 않고 어떠한 입증할 증거도 나오지 않은 마이클을 소아성애자로 억지로 몰기위한 각종 객관성과 전문성이 결여된 주장들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아동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진단하는 소아성애자의 특징은 아동에 대한 비정상적인 무관심과 공감 능력의 결여라는 아동 인권에 대한 자각 없음이지, 마이클과 같은 아동인권 증진을 위한 노력과 정서적 공감이 아니다.) 구티에레즈는 이렇게 마이클에게 소아성애 이미지를 씌우는데 가장 큰 허구 작업을 했던 인물로써 "마이클은 소아성애에 대한 사회수용의 희망이며 백년이 지나면 그러한 관계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라고 인터뷰 하기도 했던, 마이클을 음해하는 것으로 돈벌이 하는 것을 넘어서 마이클을 이용하여 소아성애에 대한 인정까지도 쟁취하고자 했던 병적인 인물이다. [161] 마이클과 잭슨즈 그룹 활동을 했던 셋째 형 저메인 잭슨(Jermain Jackson)과 전부인 마가렛 말도나도(Margaret Maldonado) 사이의 아들 [162] 디몬드가 소년에게 미국에서 수사받는 것을 권하며 한 말. 소년은 결국 캐나다에서 수사받았고 거짓말 임을 자백했다. [163] 로드니 알렌 (Rodney Allen): 95년 4월에 다이앤 디몬드가 방송한 캐나다 홈리스 소년의 마이클 성추행 허위 자작극을 사주한 캐나다인 소아성애 매춘업자. 99년에 소아성애 행위로 캐나다에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로드니 알렌은 95년에 구티에레즈의 마이클 소아성애 루머책 출판을 위한 LA 도서 전시회에 참석했었고, 구티에레즈는 과거 자신이 참석했었던 국제 NAMBLA(소아성애 옹호자 모임) 회의가 자신의 책을 마이클 관련 서적 목록에 넣으라는 메시지를 마이클에게 보내야 한다는 내용을 로드니 알렌에게 팩스로 보내기도 했다. 또한 로드니 알렌은 네버랜드 및 마이클 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웹에 올리기도 해서 앞서 로드니가 시킨 거짓말로 구속된 홈리스 소년의 정보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케 했다. [164] 이 외에도 구티에레즈의 변호사 로버트 골드만은 다음과 같은 협박성 내용을 마이클에게 보내기도 했다. "84년 1월 1일 이후로 마이클과 접촉했던 모든 미성년자들을 확인하십시오. 구티에레즈는 그 미성년자와 접촉하지 않고도 비디오 속에서 본 미성년자를 지목할 수 있으며, 그 미성년자와 마이클이 알몸으로 있었으며 성적행위를 했다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즉 소송을 멈추지 않으면 더한 루머를 만들겠다는 협박인 것이다. [165] 이들 중 일부가 실제로 현실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윗 단락의 타블로이드 언론인 다이앤 디몬드는 마이클에게 2차 혐의를 제기했으나 무죄로 밝혀진 개빈 아르비조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톰 스네던의 14년 장례식에서 연설한 인물이다. [166] 93년 1차 혐의 수사 때, 톰 스네던과 수사당국이 조단의 성기묘사가 일치한다는 인터뷰를 한 것이 지금까지도 대중이 마이클을 의심하는 결정적 이유가 됐는데 사후 부검결과 톰 스네던의 말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당시 먼저 기사화됐던 조단의 신체묘사에 대한 기사가 톰 스네던의 일치한단 인터뷰 이후에 삭제되기도 하여 수사당국의 허위 언론플레이가 당시 언론과도 공조하는 현상을 보였다. 또한 톰 스네던은 추가 피해자가 있었다며 그들이 수사에 응하지 않아 기소를 할 수 없었다고 인터뷰 했었는데 톰 스네든이 언급한 피해자 중 한 명으로 추정되는 브렛 반스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마이클의 결백을 지지하고 증언하는 사람이며 나머지 제이슨 프란시아는 유도심문으로 초기 결백하다는 진술을 번복시킨 것이 기록으로 남아 당시 조단사건 단서로도 인정받지 못했기에 이 말 또한 근거가 없는 면피성 허위 발언이다. 93년 사건 이후로 톰 스네던은 십여년 넘게 증거없음으로 기소 기각된 그의 사건을 민사합의에 의해 좌절된 것으로 포장하는 여러 인터뷰와 발언을 지속적으로 했고 언론도 이와 같은 멘트를 계속 사용하였다. 예를 들자면 이후 마이클에 대한 여러 스캔들을 보도하면서 93년 사건에 대해 짧게 덧붙이곤 했는때 '거액의 민사합의를 했고 마이클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라고만 기술하는 방식이다. 이 멘트 대신 챈들러 측은 형사 증언에 제약을 받지 않았고 증거없음으로 기소 기각되었다고 사실 그대로 십여년간 적었다면 민형사 별개이건만 민사합의가 문제의 핵심인 양 대중에게 이만큼 오인되었을 지 의문이다. (챈들러 측의 합의금 압박엔 그들 주장을 곧이곧대로 실어서 판매 부수 올리기에만 급급한 선정적인 언론의 태도도 기여했다. 또한 챈들러 건 이후로 형사사건에서 민사합의를 먼저 할 수 없도록 법이 개정되기도 했으니 당시 법망의 허술함도 문제였다.) 그리고 무죄 판결 난 05년 2차 혐의 재판 때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비공개 재판으로 결정되어 검사 측 증거와 주장의 문제점이 외부로 바로 알려지지 않아 톰 스네던 검찰 측의 언론플레이와 언론의 왜곡 보도를 용이하게끔 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톰 스네던은 당시 조나단 스펜서의 누드 사진을 확보했다고 말했으나 재판장에서 아무것도 제시못했던, 이 말 역시 허위였으며 중상모략 허위 유포로 이미 98년에 27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은 구티에레즈의 책을 증거 요청하는 등 비논리적이고 편파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보도되지 않고 마이클을 유죄로 의심하는 타이틀을 단 기사들이 쏟아져 당시 대중은 다수가 마이클을 유죄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실과 언론 보도 사이의 왜곡을 메이져 언론으로써 주도한 방송사가 NBC였고 NBC는 마이클 루머를 퍼트리던 타블로이드 출신 다이앤 디몬드를 법정 기자로 고용했었다. - 1.2차 혐의 본문과 주석들 참고 [167] 24명 아동합의금 허위보도 사건: 13년에 미국의 <Glove>와 영국의 <Sunday Mirror>의 타블로이드에서 마이클이 24명의 아동들에게 약 2300만 달러의 합의금을 줬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내면서, 챈들러 사건 때 마이클에게 고용됐었고 이후 다른 인물에 대해 의뢰받은 사건에서 불법도청과 폭력으로 유죄평결을 받은 할리우드의 유명 사설탐정인 안소니 펠리카노(Anthony Pellicano)가 02년에 조사 받았을 때 합의금 관련 문서를 FBI에 압수 당했고 그 문서는 FBI의 마이클 관련 사건파일 중 CADCE MJ-02463과 CR 01046의 파일에 들어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검증을 생략한 전형적인 타블로이드 식 허위보도로, 마이클 관련 FBI 기록은 공개되어 있고 (FBI 문건 보기) 300여 페이지의 기록 중 어디에도 그런 문서는 없으며 그러한 사건 번호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보도는 90년대에 타블로이드 <내셔날 인콰이어>와 <글로브>의 기자였던 짐 미테거가 97년에 타블로이드 브로커 폴 베레시에게 준 녹음 테이프를 바탕으로 만든 루머로 테이프엔 마이클 및 안소니 펠리카노, 데이비드 게펜, 키아누 리브스 등 할리우드 여러 인물에 대한 미테거의 녹음기록이 담겨있었다. 그 중 마이클 관련 내용엔 주로 "Taylea Shea"라는 루머 수집가의 보고를 기초로 해서 미테거가 의견을 남겼는데 이 Shea의 보고들이 대부분 허위 제보이거나 조잡한 억측인 것으로 드러났다. Shea는 할리우드의 유명 변호사인 버트 필즈(Bert Fields)가 마이클의 합의문서를 작성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미테거에게 보고했으나 버트 필즈는 마이클 측 변호사로 일한 적이 없는 인물이며 버트 필즈도 Shea라는 인물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Shea는 Eva Richmond라는 여성이 자신의 12살 아들인 Brandon P. Richmond가 마이클과 함께 연예계 일을 했고 네버랜드를 방문하곤 했었으며 마이클에게 60만 달러를 받았단 말을 했다고 보고했으나 마이클은 그러한 이름의 아이와 일을 한 적이 없다. 비슷한 이름으로 "Moonwalker"비디오에 출연한 Brandon Adams라는 아이가 있으나 아담스의 어머니 이름은 리치몬드가 아니라 Marquita Woods이며 아담스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Shea라는 인물과 만난 적도 없고 마이클과도 아무런 일이 없었으며 마이클의 엔치노 집이나 네버랜드를 방문한 적도 없고 60만 달러가 있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미테거가 93~94년에 마이클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 것으로 지목하며 녹음을 남긴 아이는 마이클이 'Make-A-Wish Foundation' 이라는 자선 활동에서 잠시 만난 9세의 아동으로 이 만남 얼마 후인 93년에 이미 백혈병으로 사망한 아이였다. Shea라는 인물에 대해선 타블로이드 업계도 누군지 잘 모르며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고 그녀의 과거 친구이자 이웃인 인물은 그녀는 사기꾼이며 여기 없다면 감옥에 있을거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미테거의 녹음기록엔 <내셔널 인콰이어> 지가 거액을 제시하여 거짓 진술을 회유하려 한 #론 뉴트 가족과의 대화 외에 이와 같이 사실확인이 안된 추측성 가쉽들이 쓰지못한 기사소재로 들어있었다. (참고 기사1) (참고 기사2)
[168] 론 뉴트의 동생은 론이 최근에도 거짓 증언과 관련된 돈 제의를 오프라 윈프리 쪽과 연결된 사람으로부터 받았다는 말을 사망 전에 자신에게 했다는 영상을 남겼으나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론 뉴트의 갑작스런 사망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169] 아드리안 맥마누스(Adrian McManus)는 네버랜드에서 90년대 초에 가정부로 일했던 사람으로 물건을 훔쳐오다 해고된 후 94년 12월에 #네버랜드 5의 1600만 달러를 요구하는 허위 부당해고 소송에 합류하면서 이후 타블로이드에 여러 허위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팔아온 사람이다. 재판에서 직원 Francine Orosco는 맥마누스의 집에 방문했을 때 시계, 포스터, 선글라스, T 셔츠 등 네버랜드에서 훔친 마이클의 옷과 여러 물건들로 가득찬 방을 맥마누스가 보여주었다고 증언했다. 마이클은 부당해고 소송을 건 네버랜드 전직직원 중 최소 2명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훔쳐갔다며 상징적인 1달러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고발을 하였는데, 실제로 맥마누스가 마이클이 그린 엘비스 프레슬리 그림을 훔쳐서 <SPLASH NEWS>의 Gary Morgan에게 1000 달러에 판 것이 드러났고 이 외에 마이클의 모자, 개인 메모, 장난감 등을 훔쳐서 타블로이드에 팔아온 것도 드러나 절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게다가 맥마누스의 다른 사기 전적도 드러났는데, 맥마누스와 그의 남편은 친척들의 자산을 횡령하여 17,000달러를 보상하라는 명령을 받았었고, 조카들에게 신탁된 돈을 유용한 혐의로 로잘리 힐(Rosalie Hill)의 아동보호국으로부터 고발을 당했으며 재판관인 리차드 A. 세인트 존(Richard A. St. John)은 맥마누스 부부가 조카인 쉐인과 메건 맥마누스를 위해 신탁된 기금을 부당하게 낭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맥마누스는 94년 부터 마이클이 조단 챈들러와 브렛 반스, 맥컬리 컬킨을 성추행 하는 것을 자신이 봤다는 이야기를 타블로이드에 팔아왔는데, 05년 재판에서 맥마누스가 과거 조단 챈들러 건으로 조사받을 때 조단을 비롯한 다른 어떤 아동들에게도 마이클이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마이클과 자신의 아들을 혼자 남겨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고 마이클을 신뢰한다고 93년 12월 7일에 진술했던 것이 드러나서 그녀의 타블로이드 이야기들은 신뢰를 잃었다. 또한 05년 재판 심문 중에 타블로이드에 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을 인정하면서, 부당해고 소송 패소 후 배상금을 판결받자 변호사가 "돈이 모자르면 타블로이드에 이야기를 더 많이 팔아보는게 어때요"라고 제의했다고 변명하기도 했다. 아울러 #네버랜드 5는 97년에 146만 달러를 마이클에게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05년 재판 때 까지도 배상금을 단 일 원도 내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출처 : 05년 4월 7-8일 맥마누스 법정기록) 한편 19년에 < 리빙 네버랜드> 다큐로 다시 논란이 시작되자 맥마누스는 마이클 사인을 위조하여 수익을 챙겼던 마이클 제이콥하겐과 함께 호주의 방송에 출연했는데 소송 배상금에 대해 회피하며 중언부언하여 당시 방송 사회자도 그들의 말은 믿기 어렵다고 언급했었다.
[170] 랄프 채콘(Ralph Chacon)은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다 91~94년에 네버랜드 경비원으로 고용되었던 사람으로 94년 12월에 #네버랜드 5의 허위 부당해고 소송에 참여하면서 재판 중에 25,000 달러에 달하는 네버랜드 영화관 내에 비치된 물품을 훔친 것이 밝혀져서 절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채콘은 네버랜드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중 전직 경찰관 등으로 구성된 전문 경호인력인 OSS 경호원들이 생기고 그들이 자신들 보다 높은 임금을 받자 불만을 품었고, 이후 네버랜드를 관둔 후 OSS 경호원들을 상대로 부당 대우에 대한 소송을 먼저 걸었으나 패소하여 빚이 생겼으며 이 외에도 양육비를 체납하고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이 이후에 마이클에게 1600만 달러를 요구하는 허위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한 것인데 당시 채콘은 마이클이 자신을 빤히 쳐다봐서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니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05년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서는 법정기록이 남아있는데도 채콘은 마이클이 쳐다봐서 고통을 겪었단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며 과거 소송에서 1600만 달러를 요구했던 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등 이해하기 힘든 태도를 보였다. 또 부당해고 소송에 앞서 마이클이 아이들을 성학대 했다는 이야기를 타블로이드에 판 것은 소송에서 마이클을 압박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냐는 질문에 부인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전략을 쓴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여 간접 시인하기도 했다. 또한 조단사건 초기엔 마이클의 결백을 말하다가 부당해고 소송을 준비하며 타블로이드와 거래를 하기 시작할 때 진술을 변경했던 것도 드러났으며, 이때 검찰 측 증인으로 대배심에 출석하여 검찰 측 주장을 지지하는 증언을 하기 전에 톰 스네던 검찰 측의 수사관 Russ Birchim에게 돈을 받았던 것도 인정했다.

채콘은 네버랜드 샤워실과 수영장에서 마이클이 조단을 성추행하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를 타블로이드에 팔았는데, 재판에 출석해서 진술하는 중에 샤워실 창에 김이 서려서 마이클의 실루엣만 봤다고 말을 바꿨고 채콘이 경비를 서던 곳은 수영장이 보이지 않는 위치였던 것이 드러나자 직접 보지 못하고 목소리만 들었다고 또 말을 바꾸는 등 계속해서 진술을 번복하여 신빙성을 잃었다. 또 정작 조단은 네버랜드에서 성추행을 진술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사자 진술과 모순되었고 타블로이드 거래까지 드러나 조단사건 당시에도 단서로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아울러 97년에 146만 달러를 마이클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05년 재판 때 까지도 단 일 원도 내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으며, 채콘은 마이클이 자신의 생계를 평생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출처 : 05년 4월 7일 랄프 채콘 법정기록)
[171] 네버랜드 5(Neverland 5)는 아드리안 맥마누스와 랄프 채콘 외에 카심 압둘(Kassim Abdool), 샌디 돔즈(Sandy Domz), 멜라니 바그널(Melanie Bagnall)의 5명을 말하며, 그들은 91~94년 사이에 네버랜드에 근무하다 관둔 사람들로써 보안요원에게 협박과 괴롭힘을 당한 후 정서 불능으로 일을 못하게 된 것이니 부당한 해고라고 주장하며 94년 12월에 마이클에게 1600만 달러의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었다. 멜라니 바그널은 앤드류 메리트(Andrew Merritt)라는 경비원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나 경찰에 신고는 안하고 타블로이드에 이야기를 팔았으며 계속된 증언 모순으로 그녀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또한 그들은 경비원이 총으로 위협했다고도 주장했는데, 재판과정에서 랄프 채콘이 네버랜드에 무단침입한 사람을 제압하면서 총기가 없어서 힘들었다며 불평한 것이 드러나서, 네버랜드 내의 총기 소유를 금지한 마이클의 뜻에 따라 네버랜드 경비원은 총기를 소지하지 않았던 것이 밝혀져 이 역시 허위로 드러났다. 또한 네버랜드 5는 소송을 시작하기 전에 타블로이드에 여러 허위 가쉽들을 팔았는데 이때 마이클 루머작가 #빅토르 구티레에즈와 공모한 정황도 발견되었으며, 이들 중 05년 개빈사건 재판 때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한 #아드리안 맥마누스는 타블로이드용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을 인정했고 #랄프 채콘은 소송압박 전략으로 타블로이드를 활용한 것을 간접 시인하기도 했다.

또한 소송 중간에 제롬 존슨(Jerome Johnson)이라는 사람이 네버랜드 5의 주장을 반박하는 증인으로 설려다가 갑자기 마이클에 대한 결정적인 유죄 사실을 발견했다며 변심한 사건이 있었는데, 존슨이 증언하기 전에 마이클 측에 700만 달러를 요구하는 편지가 전해져 마이클의 변호인단은 판사에게 신고하였고 관련자 모두의 타액을 면봉에 채취하여 DNA 검사를 한 결과 제롬 존슨의 아내가 편지 봉투를 핥은 것이 드러나자 제롬 존슨은 증언을 회피했다. 이들의 계속된 위증에 판사 젤 캔터(Zel Canter)는 혐오스럽다고 말하며 재판 중 벤치를 떠나기도 했으며, 네버랜드 5와 변호사 모두 재판과정 중에 위증과 불법행위로 네버랜드 5는 66,000 달러, 변호사는 38,350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은 뒤 그들의 허위 소송은 기각되었고 97년 3월 15일에 마이클에게 6만 달러의 손해배상과 140만 달러의 법률비용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이들 중 일부가 파산신고를 통해 배상금 지불을 회피하며 05년 개빈사건 재판 때 까지도 모두 단 일원도 배상금을 내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한편 95년 1월에 마이클에 대한 허위 방송으로 중상모략 고소를 당한 타블로이드 언론인 다이앤 디몬드는 그녀가 쓴 마이클 소아성애 루머책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조심하라>에서 명백한 위증죄의 거짓이 밝혀진 네버랜드 5가 마이클을 압박하기 위해 지어낸 음담패설급 이야기들을 그대로 실으며 디몬드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네버랜드에 대해 맥마누스가 자유롭게 물건을 훔치던 곳을 엄격한 통제가 이뤄지는 곳인양 음산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마이클 전문가를 자처하는 음해가들은 실제 현장 답사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172] "Feels more like a hit piece rather than any kind of artistic statement." [173] "Witnessing yet another character assassination of someone who is no longer here to fight for himself. It's sad and disappointing either way you look at it. I remain conflicted and confused by it all." [174] 편견은 무지가 낳은 자식이다. [175] 영화관에서 금고는 발견되었지만 금고 안에 문제의 책은 물론 혐의와 관련된 것들은 전혀 없었으며 경찰의 압수품 목록에도 없다. [176] 마이클은 치료를 위한 합법적인 처방약만 사용하였다. 무리한 투어와 안무로 인한 통증 치료를 위해 합법적으로 처방받은 진통제를 사용한 적이 있고 실제로 척추에 관절염을 앓고 있었던 것이 사후 부검결과로 드러났다. 이 외에 피부병인 백반증과 머리 화상사고 때문에 처치한 두피확장술로 생긴 두통과 불면증으로 역시 합법적으로 처방받은 약만 의사의 지시 아래 사용하였다. 사후에 타블로이드에서 마이클의 위 속에서 많은 알약들이 발견되었고 온몸에 상처가 있었다는 보도를 했는데 역시 허위보도이다. 부검을 담당했던 의료진은 마이클은 주요 장기의 손상이 없었으며 이러한 알약도 상처도 전혀 부검결과에 나와있지 않으며 일부 타블로이드에서 공개된 사진에도 그러한 상처는 전혀 없다. 마이클의 사인은 대리의사로 와 있던 콘래드 머레이가 마이클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치사량의 약물을 주입하여 사망케 한 법적으로 "타살" 즉, 살해임이 명확히 나와 있다. [177] 마이클은 압수수색으로 엉망이 된 네버랜드를 떠나면서 이후 호텔과 렌트 아파트에서 생활하였고 또 05년엔 유럽으로 떠났기에 버블스를 계속 키우기엔 환경이 여의치 않아 위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탁 후에도 버블스를 보러오곤 했다고 하며 마이클 사후에 열린 영장류들의 그림 전시회 "Apes That Paint"에 버블스의 그림도 전시되어 5작품이 750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여전히 작품활동에 전념 중이라고 하며 영장류센터는 버블스를 잘 돌보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