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01:43:28

마이클 에시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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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에시엔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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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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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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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 2006 · 2008 · 2009
}}} ||
마이클 에시엔의 기타 정보
{{{#!folding ▼ 연도별 전 세계 축구 이적료 1위
2004
디디에 드록바
(3850만 €)
2005
마이클 에시엔
(3800만 €)
2006
안드리 셰브첸코
(4330만 €)
}}} ||
FC 노르셸란
F.C. Nordsjælland
파일:michael-essien-e1611237666858.jpg
이름 마이클 에시엔
Michael Essien
본명 마이클 코조 에시엔[1][2]
Michael Kojo Essien
출생 1982년 12월 3일 ([age(1982-12-03)]세)
가나 아크라
국적
[[가나|]][[틀:국기|]][[틀:국기|]]
|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 체중 85kg
주발 오른발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3], 라이트백 / 은퇴)
축구 코치
소속 선수 SC 바스티아 (2000~2003)
올랭피크 리옹 (2003~2005)
첼시 FC (2005~2014)
레알 마드리드 CF (2012~2013 / 임대)
AC 밀란 (2014~2015)
파나티나이코스 FC (2015~2016)
페르십 반둥 (2017~2018)
FK 사바일 (2019~2020)
코치 FC 노르셸란 (2020~ / 코치)
국가대표 58경기 9골 ( 가나 / 2002~2014)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클럽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여담
5.1. 이름의 발음 문제

[clearfix]

1. 개요

가나의 前 축구 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이며, 필드 위의 들소라는 별명으로 한국에 유명하다. 가나인의 절반 정도되는 아칸족 출신이기도 하다.[4]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자금으로 당대 유망한 선수들을 사 모아서 푸른 보석함이라고 불린 첼시에서도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손꼽히던 선수이다.

2. 클럽 경력

2.1. 올랭피크 리옹

2003년 SC 바스티아에서 파리생제르망의 제안을 거절한후 리옹으로 이적하여 합류한후, 플레이메이커였던 주니뉴를 보호하면서 도와주는 룰을 수행하였고,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에드미우송과 마하마두 디아라는 수비를 보조하고 공 배급을 맡았다. 리웅에서 첫시즌 좋은 활약을 펼친후 두번째 시즌이었던 2004-05 시즌에는 한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 출전하여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2005년 프랑스 선수협회 선정 올해의 선수와 리그앙(리그1) 올해의 선수를 차지하면서 여러 클럽의 관심을 받게 되지만 그중에서도 첼시의 주목을 받게된다. 그리고 첼시로 약 2,500만 유로로 이적이 성사되었다.

2.2. 첼시 FC

에시엔의 최전성기

2005/06 시즌에 올랭피크 리옹을 떠나 첼시 FC로 이적했다.[5] 에시엔이 첼시에 오면서 기존의 주전 중앙 미드필더 자리에 있던 티아구 멘데스는 에시엔이 오자마자 올랭피크 리옹으로 떠났다. 당시 인지도에 비해 워낙 비싸게 영입한 에시엔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으나, 에시엔은 얼마 안 가 뛰어난 피지컬과 일대일 마크 능력을 보여주며 첼시의 주전 자리를 꿰찼다.

가공할 체력을 바탕으로한 무시무시한 활동량, 빼어난 수비력, 수준급의 슈팅으로 중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중원 장악력 또한 대단해서 첼시의 피지컬 축구의 핵심이었다. 중미부터 센터백까지 소화 가능한 멀티플레이 능력을 갖춘 현역 최고의 꾸르소레로 세계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포진한 첼시에서도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었다.

보통 허리를 책임지지만 수비수들이 줄부상으로 실려나갈 때는 센터백도 보고 풀백도 보지만, 대체로 결과는 참담하다. 에시엔이 센터백으로 나온 06-07 시즌의 리버풀전은 2:0 완패였고, 이 경기는 머리뼈 부상으로 힘든 재활과정을 거친 골키퍼 페트르 체흐의 복귀전이었다.

램파드-에시엔-마케렐레의 황금 미들진에 미하엘 발락이 가세하자 첼시 미드필드는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 처음에는 꾸역꾸역 이 넷을 다 쓰는 다이아몬드 시스템을 돌렸지만 그러자니 윙포워드들의 자리가 줄어들어[6] 다시 4-3-3으로 회귀한다. 게다가 06-07 시즌부터 수비진의 줄부상이 이어지다보니 넷 중 가장 멀티능력이 뛰어난 에시엔이 수비쪽으로 땜빵을 서는 일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다. 06-07 시즌에는 발락이 램파드의 조력자 역할을 잘 하지 못 했고 부상으로 인해 조기 시즌 아웃을 당해 다시 미드필더로 굳혀졌지만 07-08시즌에는 발락이 부상 복귀한 후 램파드-발락의 조화가 호흡을 맞춰가며 상당한 위력을 보이자 에시엔은 그대로 07-08 시즌 당시 포백에서 가장 불안정한 오른쪽 풀백으로 굳어진 것이다.[7]

첼시가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만났을 당시 오른쪽 풀백이 에시엔이었다. 그때 호날두는 왼쪽 돌파만 죽어라 했고 전반전에는 에시엔이 거기에 무진장 털렸다. 물론 호날두를 막을 풀백이 전세계에 얼마나 있겠냐만, 상대가 호날두가 아니더라도 에시엔은 전문 수비수가 아닌 만큼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첼시는 후반전에 조 콜 미하엘 발락의 수비가담을 늘리면서 호날두를 어느정도 틀어막는 데 성공했고, 에시엔을 중원 싸움에 가담하게 하여 그 덕에 동점골이 나긴 했다.[8]

다만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에시엔의 수비력이 좋기는 하지만 전문 수비수급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시엔은 기본적으로 우월한 피지컬과 흑인 특유의 탄력을 매우 잘 살려 중원을 초토화시키고, 넓은 활동량으로 공수 양면을 모두 지원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보여준 모습은 제 몫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08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클로드 마켈렐레 파리 생제르맹 FC로 떠난 후에는 발락, 램파드와 함께 중원을 형성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시즌 전반기에는 장기 부상으로 인해 출전이 거의 없다시피하여[9] 후반기부터 제대로 뛰기 시작한다. 20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이 조합은 이 시즌 트레블팀인 바르셀로나를 경기 내내 압도했으며 에시엔은 이 경기에서 선제골까지 넣었다. 그러나...

09-10 시즌부터는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과 함께 했는데, 안첼로티 감독은 중앙 미드필더 4명을 두는 다이아몬드 4-4-2 전술을 채용하였다. 이에 따라 데쿠, 프랭크 램파드, 미하엘 발락과 중원을 형성,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12월에 부상을 당하면서 그 이후 시즌을 통으로 날렸다. 원래 4주 진단을 받았으나 부상이 덜 회복된 상태에서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가나 대표팀에 나갔다가 거기서 무릎 부상을 입는 바람에 잔여 시즌 아웃과 함께 월드컵 출전도 무산되었다.

10-11시즌엔 발락마저 첼시를 떠났고, 그동안 장점이었던 패스, 활동량, 수비력, 중거리 슈팅 중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며 그야말로 '머릿수 채우러 나온 선수'정도의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같이 망한 미켈은 아예 선발로 나오지도 않았으며, 적응기가 많이 필요해 보였던 하미레스, 한 시즌 공격스텟 최소 20을 찍어주는 램파드도 기어코 시즌 10골 이상은 넣었지만 기량 자체는 하락한 모습을 보인 것을 보면, 사실 당시의 첼시 미드필더 중 제일 준수했던 게 에시엔이었다.

그러나 11-12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십자인대 부상으로 또 한번 6개월을 끊은 뒤 돌아온 에시엔은 옛날의 그 에시엔이 아니라는 듯이 맥없는 플레이, 죽은 스피드, 떨어진 활동량 등을 보여주었다. 각종 축구 커뮤니티에서의 슬픈 별명은 고인 에시엔.[10] 본래 피지컬로 거의 먹고 사는 스타일의 선수였기에 이 부상은 정말 뼈아팠다. 그래도 노련미로 커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으나 첼시에서는 에시엔이 공백 기간을 겪는 동안 하미레스, 하울 메이렐레스, 오리올 로메우 등의 삼각 조합이 좋은 성적을 보인 탓에 에시엔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후반기를 맡던 로베르토 디 마테오 체제에서는 하미레스가 라이트 윙으로 빠지고 로메우는 에시엔에게 밀렸지만 전술을 4-2-3-1로 바꾸고 메이렐레스의 파트너로 프랭크 램파드, 존 오비 미켈이 선택되어[11] 후반기에도 에시엔은 주전 자리를 놓쳤다.
파일:에시앙 챔스 우승.png

그래도 팀은 결국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2.1. 레알 마드리드 CF (임대)

2012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에서 홀딩 미드필더와 라이트백으로서 쏠쏠한 활약을 해 주던 라사나 디아라가 갑작스럽게 FC 안지 마하치칼라로 이적을 하게 되면서, 스쿼드 운영에 커다란 차질이 생긴 무리뉴 감독은 긴급하게 자신의 애제자 에시엔을 불러들여 1년 임대 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12-13 시즌에 마르셀루, 세르히오 라모스 , 사미 케디라등 수비진 줄부상에 시달린 레알 마드리드에서 수비형 미드필더, 레프트백, 라이트백 가리지 않고 뛰면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11월 03일 라리가 10라운드 레알 사라고사과의 홈 경기에서 선발 출전해서 리그 데뷔골을 넣었다

챔피언스리그 16강 갈라타사라이와의 홈 경기에서 벤제마에게 1어시스트하였다

시즌 마지막 경기이자 레알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면서 레알과의 짧았던 동행을 마무리하였다.

12-13 시즌 35경기 2골 1도움을 기록하였다.

2.3. 첼시 복귀

13-14 시즌 시작 전 임대를 마치고 첼시로 다시 복귀하였다. 로테이션 자원으로 경기에 출장했지만, 선발로 나올 때마다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말 그대로 교체 자원으로서는 꽤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덕분에 당시 첼시의 3선은 PL 상위권 팀들 중 맨유와 더불어 최악을 달렸다.

2.4. AC 밀란

2014년 1월 25일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한 때 첼시 중원을 오랫동안 책임져 주었던 그의 밀란행에 많은 첼시팬들이 상당히 안타까워 했다.[12] 계약기간은 18개월이었다. 레알에서 돌아온 카카도 밥값을 하게 만든 밀란인 만큼 에시엔도 부활할 수 있을지 주목받았다.

하지만 1월 26일 1차 메디컬 테스트에서 무릎이상으로 계약이 파토날 위기에 처했다. 알리 시소코의 전례가 있듯이 이적료를 깎으려는 언플일 수도 있지만 부상경력이 경력이라 당연하다는 의견이 대다수.

1차 메디컬 테스트에서 탈락했지만, 2차 테스트에서는 문제 없다는 결과를 받아 이적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만약 이 이적이 취소되었다면, 첼시, 밀란, 에시엔 셋 모두가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13]

결론적으로 밀란에서는 실패했고, 2015년 6월 2일, 파나티나이코스 이적을 확정지었다. 계약 기간은 2년으로 알려졌다. 링크

2.5. 파나티나이코스 FC

2015-16 시즌을 소화했으나, 2016년 11월 자유계약 신분이 되었음이 알려졌다.

2.6. 페르십 반둥

2017년 3월 14일 인도네시아 슈퍼 리그의 팀인 페르십 반둥으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5번을 달았다.

2018년 1월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K리그 클래식 전남 드래곤즈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루머가 퍼졌으나, 폼 저하로 인해 실제로는 성사되지는 않았다. #

2.7. FK 사바일

인도네시아 슈퍼 리그에서의 계약이 만료된 이후 옛 소속팀인 첼시 FC의 훈련장인 코밤훈련장에서 무직 신분으로 훈련하다가 2019년 03월 16일 아제르바이잔 프리미어 리그의 팀인 FK 사바일로 이적했다. 사바일에서 플레잉 코치로 뛰면서 19세 이하팀을 맡아 코치 자격증 취득에도 힘을 쏟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위에 언급된 대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기 전에는 그야말로 만능이었다. 피지컬이 매우 뛰어난 선수여서 활동량이나 몸싸움, 스피드 어느 것에도 딱히 밀리지 않았고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센터백, 풀백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다.

180에 살짝 못미치는 키로 밀리지 않고 오히려 180cm 이상의 선수들을 압도해버리는 피지컬, 흑인 특유의 유연성과 탄력, 준수한 패싱력과 볼키핑, 이따금 터지는 중거리 슛팅 등이 그의 장점이었다. 특히 에시앙의 체력은 그 중에서도 발군인데, 120분을 엄청 뛰어다니고도 한 게임 바로 더 뛸 수 있다고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 엄청난 체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수면이라고 밝혔다.

사실 그 모든 포지션을 다 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급시에 다용도로 활용가능한 멀티 플레이어가 있다는 것은 팀에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완전히 공격적인 역할을 맡고 앞선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상기한 장점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역할도 능히 소화해낼 수 있는 선수였다. 실제로 국가대표팀에서는 훨씬 공격적인 역할을 맡으며 플레이하기도 했다.

애초에 첼시는 에시엔을 마켈렐레의 대체자로 데려왔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켈렐레의 대체자가 아니라 아예 첼시 4-3-3에서 미들 3인 중의 한 명을 맡아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그야말로 박투박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였다.

첼시 시절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게 되면 수비에 집중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중앙 미드필더를 보게되면 수비가담에 버금갈 정도로 공격 가담도 활발히 했다. 워낙 킥력이 좋고 공격적인 재능도 출중하기 때문에, 마케렐레의 대체자로서 영입되었음에도 그의 포지션보다 조금 위에서 같이 뛰는 일이 많았던 것.

이렇듯 뛰어난 미드필더였기에, 십자인대 부상을 당한 후의 그를 팬들은 더욱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런 눈부신 장점들을 잃고, 무색무취의 선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는 의학이 많이 발전해, 과거와는 달리 십자인대 부상을 겪고도 훌륭히 재기하는[14] 사례가 늘어났기 때문에 에시엔의 경우가 더욱 씁쓸히 느껴지기도 하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 리그 1 올해의 선수: 2004-05
  • 리그 1 이달의 선수: 2004년 10월
  • UNFP 올해의 팀: 2002-03, 2004-05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토너먼트의 팀: 2008
  • CAF 올해의 팀: 2005, 2006, 2008, 2009
  • 옹즈 드 옹즈: 2005, 2008, 2009
  • 가나 올해의 선수: 2007
  • 첼시 올해의 선수: 2006-07
  • 첼시 올해의 골: 2006-07, 2008-09
  • BBC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2006

5. 여담

  • 한 국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공할 체력의 원천으로 잠을 꼽았는데, "시간만 남으면 열심히 잔다"면서 자신의 체력 유지 비법을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취미 또한 잠자는 것이라고 한다. 거의 11시간 가까이 자는 것으로 알려졌다.
  • 한국 팬 한정 별명으로는 '섹시앙'이 있다.[15] 영국에서는 GBH라는 별명으로 불린다.[16]
  •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직전, 대한민국 대표팀은 가나와 평가전을 가졌다. 이 경기에 에시엔 역시 출전했으며, 가나 대표팀이 3:1로 이겼다. 스코어 그대로 한국 미드필더진이 압살을 당한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에시엔은 골까지 기록했다.
  • FIFA 20에 신규 아이콘으로 추가되었다.

5.1. 이름의 발음 문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미카엘 에시앙”으로 불렸다. 지금과 비교해 볼 때 당시에는 해외 축구선수들의 이름 발음과 관련된 정보를 얻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거기에다 에시엔이 리그 앙에서 뛰던 시절 프랑스의 스포츠 미디어에서 이름을 프랑스어 식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해당 이름이 널리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피파 온라인 4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 발음이 모두 섞인 '마이클 에시앙'이라는 혼종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1] /ˈmaɪkəl koʊdʒoʊ ɛsjɛn/. Michael은 영어식 이름으로 가나에서는 /ˈmaɪkəl/'마이클'로 발음되며 Kojo와 Essien은 가나 아칸족의 이름과 성으로 각각 /koʊdʒoʊ/'코조', /ɛsjɛn/'에시엔'으로 발음된다. 국내에서는 '미카엘 에시앙', '마이클 에시앙'이라는 프랑스어식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외래어 또는 차용어로 여겨지는 이름은 원래 발음을 존중한다. [2] 이름을 프랑스어식으로 부르면 영어식 이름인 'Michael'은 프랑스어식 이름인 'Michaël', 'Mickaël', 'Mikaël'처럼 /mikaɛl/'미카엘'로 발음되고, 성 'Essien'은 프랑스어에서 'ien'은 /jɛ̃/'이앵'(모음 뒤에 올 경우 '얭'으로 표기)으로 발음되고 프랑스 북부 지역, 특히 파리에서는 /ɛ̃/'앵'을 /ɑ̃/'앙'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어 '에시앵' 혹은 '에시앙'으로 발음된다. 그러나 선수의 이름은 프랑스어에서 온 이름이 아니고 프랑스어는 가나의 공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선수의 이름에 프랑스어식 표기를 적용할 이유가 전혀 없다. [3]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4] 국내에서는 샘 오취리가 아칸족 출신으로 알려져있다. [5] 이 때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에시엔을 로이 킨의 후계자로 여겨 그를 맨유로 데려오려했다. 그러나 이적료 문제로 인해 영입에 실패했고, 마침 챔스 8강에서 PSV 에인트호번과 리옹이 맞붙었는데, 그 때 퍼거슨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경기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한 동양인 축구선수였다. [6] 조 콜은 일찌감치 시즌 아웃되었지만 첼시에는 여전히 아르연 로번, 숀 라이트필립스, 살로몬 칼루 등의 윙어 자원들이 남아있었다. [7] 기존의 주전이었던 파울루 페레이라는 06-07 시즌부터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그 자리를 메꾸러 온 줄리아노 벨레티는 시즌 초반에만 괜찮은 활약을 보이다 금방 활약이 사그러들었다. [8] 아무튼 FM에서는 이를 반영해 현존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영역에 "능숙함" 이상이 뜬다. [9] 그 공백은 존 오비 미켈로 메꾸려 했지만 미켈의 기량은 에시엔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10] 유명한 축구 게임인 FM 2012에서는 그래서 에시엔이 십자인대 부상을 이기고 돌아오면 그야말로 처참하게 능력치가 깎여나가 있다. 에시엔이 돌아오기 전에 팬들은 이런 FM의 시스템을 비판했지만 막상 에시엔이 돌아오자 그런 말은 사라졌다. [11] 메이렐레스가 시즌 초중반에 워낙 많이 뛰다 보니 시즌이 진행될 수록 지칠 때도 있었기에 교체로 시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도 램파드와 미켈이 우선이었고 에시엔은 후보였다. [12] 밀란과의 재계약시 권한이 대부분 바르바라에게 넘어갔다. [13] 첼시 입장에서는 고액 주급자이자 잉여 자원인 에시엔을 처분했어야 했고, 밀란은 에시엔의 영입을 위해 노체리노를 웨스트햄으로 임대 이적 시킨 상황이었다. 에시엔도 경기 출전을 위해서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밀란에 이적해야 했다. [14] 라다멜 팔카오, 버질 반 다이크, 니콜로 차니올로 [15] 이 별명은 국대경기가 끝난 후 상대 선수와 유니폼을 교환하는 장면에서 유래한다. 에시엔이 직접 나서서 상대선수의 유니폼을 벗겨줬는데, 그 모습이 섹시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 이런것도 있다. [16] 에시엔의 머리가 큰 것을 가지고 놀리는 별명. Great Big H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