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1 15:02:54

릴 공방전

파일:lille1708_image1.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8년 8월 12일 ~ 12월 10일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연합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 프랑스 국경지대의 핵심 요충지인 요새를 포위 공격하면서 벌어진 공성전. 연합군은 4개월에 걸친 공성전 끝에 릴 요새를 공략하면서 프랑스 국내로 진입할 발판을 마련한다.

2. 배경

1708년 7월 11일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은 플랑드르 전선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연합군이 마냥 유리한 입장인 것만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오우데나우데 패전으로 상실한 병력을 빠르게 충원할 만한 저력을 갖추고 있었고, 겐트를 중심으로 플랑드르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군은 언제든지 연합군의 보급로를 노릴 수 있었다. 연합군은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첫번째는 겐트를 향해 곧장 진격해서 짧은 포위 공격 후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의 변경 지대의 최대 요충지인 릴을 포위해 프랑스군이 겐트를 자발적으로 떠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겐트를 포위 공격하는 것은 무난한 선택이긴 했지만 프랑스군이 겐트에서 도피한 뒤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게릴라 전술을 벌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할 위험이 존재했다. 반면 릴 요새를 함락시킨다면 프랑스는 더이상 플랑드르 전선에서 버티지 못하고 본국으로 후퇴해야 하므로 결정적인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지만, 릴 요새는 유럽에서 가장 웅장한 요새로 방어력이 대단했기에 쉽사리 공략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말버러 공작 존 처칠 사부아 공자 외젠은 두 가지 옵션을 가지고 논의한 끝에 릴 요새 공략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1708년 8월, 연합군은 릴 요새를 향한 포위 공격을 감행한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

3.2. 프랑스군

  • 요새 수비군 지휘관: 부플레르 공작 루이 프랑수아
  • 구원군 지휘관: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부르고뉴 공작 루이
  • 병력: 요새 수비군 16,000명, 구원군 100,000명, 대포 159문.

4. 전투 경과

릴은 당시 57,500명의 인구를 수용해 프랑스에서 5번째로 큰 도시였고 최근에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에 의해 요새화되어 유럽 최고의 성곽을 갖췄다는 평판을 얻었다. 릴 요새는 전형적인 성형 요새로서 포격에 대한 대비가 철저히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 포격을 받아도 끄덕없이 버틸 수 있는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성곽과 도시 성벽 전면엔 큰 해자가 설치되어 있었고, 도시 자체도 포대가 잘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릴의 수비대 지휘관인 부플레르 공작 루이 프랑수아는 국왕 루이 14세에 대한 충성심이 극진했고 용맹했으며 큰 도시를 방어하는 데 능숙한 인물이었기에 연합군이 대규모 병력으로 장기간 포위하더라도 쉽사리 굴복할 사람이 아니었다.

1708년 8월 12일, 11만에 달하는 연합군이 릴 요새와 그 주변 일대를 포위했다. 사부아 공자 외젠이 3만 5천 명을 이끌고 요새 공략을 맡았고,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7만 5천 명을 이끌고 릴 부근 일대를 장악하며 프랑스 구원군을 요격할 태세를 갖췄다. 8월 13일, 외젠은 도시 주변에 15km 길이의 방벽 2개를 설치했다. 8월 21일에 작업이 끝난 이 두 방벽 안에는 포위군이 안팎으로 포진했다. 외젠은 생 마틸렌과 생 안드레 수문 사이의 구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8월 24일 저녁, 마그달렌 예베당에 있던 프랑스 전초병들은 적의 공격으로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8월 26일 저녁 반격에 나서 일시적으로 예배당을 되찾고 120m 가량의 도랑을 파괴했지만 연합군이 반격을 가해오자 다시 성채로 퇴각했다. 그날밤 연합군은 포대 설치를 완료하고 요새를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또한 그들은 적의 식량 공급을 완전히 차단해 수비군이 보급난을 겪도록 유도했다.

한편 릴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루이 14세는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와 부르고뉴 공작 루이에게 10만 대군을 맡기고 릴을 구원하게 했다. 프랑스군은 9월 2일 투르네에 도착한 뒤 릴로 접근하면서 릴을 구원할 방안을 모색했다. 말버러 공작은 적 구원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시 군대를 이끌고 9월 4일 프레틴에서 노예엘레스까지 이르는 전선을 형성하면서 외젠에게 일부 병력만 남기고 자신과 합세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프랑스군은 말버러 공작이 전선을 형성한 걸 목격했고, 아직 적이 전선 형성을 완비하기 전에 공격할지를 의논했다. 그러나 오우데나르데 전투의 악몽에 짓눌러 있던 프랑스 지휘부는 2대 1의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아군이 모두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 밤 외젠은 26개 보병 대대와 72개 기병 대대를 이끌고 말버러 공작과 합세했다. 이로서 프랑스군은 릴을 구원할 수도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군과 연합군은 서로 대치했으나 적이 수비에 유리한 위치를 점거하고 충천한 사기를 과시하는 걸 본 부르고뉴 공작은 부담감에 사로잡혔다. 부사령관인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과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릴을 구하려면 어서 공격해야 한다고 재촉했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말버러 공작과 외젠을 두려워하며 공세를 차일파일 미뤘다. 이에 방돔 공작과 베릭 공작은 8월 6일 저녁 베르사유에 편지를 보내 공격을 할 지를 문의했다. 루이 14세는 즉각 공격을 해야 한다고 대답하고 미셸 데 샤미야르를 아군 진영으로 급파했다. 한편 외젠은 적이 좀처럼 공격하지 않자 자신이 이끌고 왔던 병력 일부와 함께 릴 요새로 돌아갔다.

9월 9일 숙영지에 도착한 샤미야르는 국왕의 지시를 전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미 적의 방비가 굳건한 이상 공세를 감행하는 건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국왕을 만족시키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던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약간 전진했다. 말버러 공작은 적이 공세를 드디어 개시하려 한다고 판단하고 최전선에 위치한 에네티에르 마을에 중포 20문을 배치하고 적과 포격을 주고받았다. 그는 적이 12일 새벽에 공세를 감행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정작 프랑스군은 9월 12일에 포대를 2배로 늘리고 에네티에르 마을에 사격을 가하는 것에 그칠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그들은 적의 전선을 돌파하려 시도했지만 적이 워낙 강고해 릴을 구원할 수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루이 14세에게 보냈고, 루이 14세는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지시했다.

한편, 외젠은 요새의 북동쪽에 설치된 3개의 방루에 집중 포격을 가해 방어력을 떨어뜨려 함락시켰다. 이후 그는 9월 9일경에 요새 북쪽을 공격했지만 적의 맹렬한 저항으로 공략에 실패하고 수천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요새 수비대는 9월 9일과 9월 12일 오전에 역습에 나섰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요새로 퇴각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비대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고 물자도 갈수록 부족해졌다. 이 무렵 프랑스군은 릴을 직접적으로 구원하는 건 포기하고 스헬데 강으로 행진하여 오우데나르데 마을을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했다. 그들은 연합군의 보급 거점인 브뤼셀과 릴 간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서 적을 고달프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9월 초 영국 본토에서 파견된 6천 명의 영국군이 9월 21일에 도착해 레핑허를 점령하고 거기에 다리를 건설하고 요새화하면서 레핑허에서 릴까지 이어지는 보급로를 형성하는 바람에 프랑스군의 이같은 작전은 무위로 돌아갔다.

9월 21일 저녁, 외젠은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새의 생 마틸렌 수문과 생 안드레 수문 사이의 외벽을 향한 공세를 감행했다. 그들은 처음엔 많은 보루를 공략했지만 곧 수비대의 맹렬한 반격으로 대부분의 구역을 상실했고 천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하며 패주했다. 또한 외젠은 이 공격을 이끌던 중 중상을 입었다. 이에 말버러 공작이 9월 23일에 직접 야습을 감행해 수비대에게 타격을 입혔고 10월 1일에 마침내 생 마틸렌 수문과 생 안드레 수문 사이의 외벽을 공략했다.

이무렵, 프랑스군은 레핑허를 공략해 적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감지한 말버러 공작은 리핑허로 12개 보병 대대와 12개 기병 대대를 파견해 보급 부대를 보강하게 했고, 9월 25일에 12개 보병 대대를 추가로 파견했다. 9월 28일, 프랑스군은 22,000명의 분견대를 파견해 8천 명의 연합군 보급부대를 위즈넨다알 인근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연합군 보급부대가 제빨리 전열을 갖추고 수비에 유리한 지점을 확보한 뒤 반격하는 바람에 막심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이리하여 보급부대는 무사히 도착하여 25만 파운드에 달하는 탄약을 포위군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그날 밤 룩셈부르크 용기병대가 연합군으로 위장해 포위망을 뚫고 요새로 진입한 뒤 6만 파운드 가량의 화약 가루를 전달하면서, 수비대 역시 적과 맞서 싸울 보급품을 얻을 수 있었다.

10월 3일, 방돔 공작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우텐데 근처까지 진군한 뒤 니유포르트, 이브르 등지에 설치된 운하의 수문을 열어 오스텐데 인근을 완전히 침수시켰다. 이에 외젠은 6개 보병 대대와 130개 기병 대대를 이끌고 방돔 공작과 맞서고자 로셀라레로 진격했다. 방돔 공작은 말버러와 대결하려 했지만 휘하 장군들이 모두 반대하자 어쩔 수 없이 브뤼헤로 후퇴했다. 이후 연합군은 배를 총동원해 보급로를 근근히 이어가게 했고, 프랑스군은 갤리선으로 이 배들을 공격했지만 적이 충분한 물자를 보급받는 걸 막을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월 22일, 연합군은 요새를 향한 최후의 공세를 준비하면서 부플레르 공작에게 지금이라도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부플레르 공작은 수비대가 더이상 싸울 기력이 없고 구원군이 올 가망도 없자 어쩔 수 없이 사흘간의 휴전에 동의했다. 그 후 부플레르 공작은 4.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도시를 버리고 릴 요새로 들어갔고, 연합군은 릴 시에 입성했다. 이때 프랑스 구원군이 10월 24일 레핑허를 공격해 적군을 격퇴하고 점거함으로서 연합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때는 이미 릴 시가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릴 시가 함락되었고 부플레르 공작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요새에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군 수뇌부는 릴 시 탈환 작전을 감행할 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지만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베릭 공작이 자기가 라인강 전선으로 가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함께 라인강 전선으로 가서 스헬데 강으로 북상하겠다고 제안했고, 부르고뉴 공작과 방돔 공작은 동의했다. 이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11월 21일 14개 보병 대대와 18개 기병 대대를 이끌고 할레에서 출발해 다음날 브뤼셀을 포위했다. 그러나 수비대 10개 보병 대대는 끝까지 저항했고, 막시밀리안 2세는 공성전을 이끌어갈 물자가 부족했기에 10여 일 동안 본격적인 공세를 차일파일 미루다가 연합군 구원대가 근처까지 이르자 퇴각했다.

12월 9일, 물자난이 극심해져 병사들이 굶주리자 더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부플레르 공작은 연합군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명예롭게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준다면 항복하겠다고 밝혔다. 연합군이 이 조건에 동의하자, 부플레르 공작은 12월 10일 요새를 개방하고 연합군에게 항복한 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로서 릴 요새 공방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연합군은 릴 공방전에서 16,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반면 프랑스의 릴 요새 수비대는 7천 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9천 명이 포로로 전락했으며 대포 159문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연합군은 겨울 공세를 감행해 겐트, 브뤼헤 등지를 탈환했고, 프랑스군은 플랑드르 일대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로서 연합군은 플랑드르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국내로 진입할 발판을 마련했다. 루이 14세는 전쟁을 더 지속해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연합군에게 평화 협약을 제의했지만, 연합군 측이 가혹한 요구 조건을 걸어오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양측은 말플라케 전투에서 격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