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25 10:17:25

두브로브니크

라구사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옛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구축함에 대한 내용은 두브로프니크급 구축함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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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뒷 산의 옛 동로마 요새에서 촬영한 시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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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항구. 크로아티아 관광 홍보에 곧잘 쓰이는 유명한 사진이다.


아드리아 해의 진주.
- 조지 고든 바이런
지상 낙원을 찾는 사람은 두브로브니크로 가라.
- 조지 버나드 쇼
1. 개요2. 자연 환경3. 역사4. 경제5. 교통6. 옛 시가지7. 미디어에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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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있는 관광 도시. 행정상으로 두브로브니크-네레트바 주(Dubrivnik-Neretva County)에 속한다. 2011년 인구는 42,615명. 고딕,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시가지와 그곳을 둘러싼 성벽의 경관으로 유명하다.

남북으로 긴 형태의 크로아티아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남쪽으로 갈수록 물가가 비싸진다는 말이 있는데, 최남단이나 다름없는 이곳은 물가가 가장 비싸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수도인 자그레브의 물가는 두브로브니크의 물가보다 크게는 절반, 적게는 30% 저렴하다. 두브로브니크는 관광도신 탓에 물가가 비싼 편인데 두브로브니크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해안 소도시 카브타트만 가도 물가가 두브로브니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1차 대전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라구사(Ragusa)라고 불렸다. 라구사는 구 시가지를 가로지는 플라차 대로를 기준으로 바다 쪽을 이르던 말로, 원래 섬에 가까웠던 이곳에는 로마계 주민들이 거주했다. 슬라브계 주민들이 거주지를 형성한 육지 방면의 이름은 두브로브니크였다. 어원에서도 양측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데, 라구사는 돌을 뜻하는 라틴어 Lausa에서, 두브로브니크는 떡갈나무를 뜻하는 크로아티아어 Dubrava에서 왔다. 1차 대전 이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외래어의 영향을 받은 지명인 라구사 대신 크로아티아어에서 나온 두브로브니크를 택했다.
참고로 이탈리아 시칠리아에도 스펠링이 똑같은 라구사라는 지역이 있는데, 여기는 이름만 같을 뿐 현 두브로브니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곳이다.

2. 자연 환경

아드리아 해를 따라 펼쳐진 좁고 긴 해안선에 위치한다. 육지 쪽으로는 산지가 계속되며, 해발 412m의 스르지(Srd) 산[1]이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앞바다에는 로크룸 섬이, 북서쪽에는 엘라피티 군도가 있다. 이 일대의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 전 계절에 걸쳐 따뜻한 날씨를 보이며 맑은 날이 연중 240일 이상이다. 강수량은 여름에 적고 겨울에 많다.

알프스-히말라야 지진대가 지나가는 곳으로 지진이 잦다. 지진 피해를 입은 기록이 숱하게 남아 있으며, 1667년에는 규모 10으로 추정되는 기록적인 대지진으로 도시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1979년 몬테네그로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진도 7의 피해를 받아 1,071곳의 건물이 손상되었는데, 이 중 대부분은 문화재에 해당했다. 1995년과 1996년에도 지진이 발생했다. 1996년 도시 북서쪽 20km 지점에서 규모 6의 지진이 발생, 두브로브니크로 통하는 도로가 차단되었다.

3. 역사

7세기 후반 라구사를 건설한 사람들은 아바르 슬라브 등의 이민족들에게 약탈당한 도시를 뒤로 하고 새 거주지를 찾던 인근 로마 식민시 거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요새를 건설했다. 시간이 지나 라구사인들은 좁은 해협 건너 스르지 산 기슭에 살던 슬라브 인과 차츰 동화되기 시작해, 나중에는 해협을 메워 대로를 건설한 뒤 성벽도 그 너머로 확장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던 866년에는 한창 세력을 뻗치던 아글라브 왕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15개월 동안 공격을 버티던 라구사는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바실리오스 1세는 선단을 보내 라구사를 구원했다.

라구사는 동로마 제국에 이어 베네치아 공화국 헝가리 왕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도시는 일찍이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성장하여 라구사의 상인들은 이탈리아와 발칸은 물론 영국까지 돌아다니며 상업 행위를 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에도 라구사 출신 선원이 끼어 있었다. 1358년 자다르 협약(Treaty of Zadar) 이후 시작된 헝가리 지배 당시 라구사는 금전을 바치는 대신 상당한 자치권을 위임받아 공화국 체제로 전환했다. 도시의 책임자는 렉터(rector)라고 불렸다. 상인 공화국 라구사의 부는 날로 늘어나 15세기에는 국고에 7백만 두카트를 보유할 정도였다. 전성기의 라구사는 4만 인구에 3백 척이 넘는 선단을 보유한 부유한 도시였다.

라구사는 비교적 자유로운 이념을 가진 도시로도 유명했다. 비슷한 시기 유대인을 추방한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라구사는 쫓겨온 유대인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1389년 오스만 베이국과 기독교 연합군이 격돌한 코소보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세르비아 왕족도 받아들인 적이 있다. 여기에 분노한 오스만에 대한 라구사의 반응은 당신네가 도망쳤어도 받아 줬어. 라구사는 이러한 이념과 충분한 재원을 바탕으로 각종 사회 제도를 정비했다.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보건, 교육, 요양 부문에서 공공 서비스를 제공했다. 건축에도 많은 예산을 투자해 성벽을 보강하고 도로와 급수 시설 등을 정비했다. 필레 게이트 바로 안에 있는 오노포리오 급수대도 이 시기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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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의 지진을 묘사한 그림.

시간이 흐르면서 정세는 라구사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오스만이 헝가리의 힘을 압도하면서 라구사는 더욱 오스만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라구사는 스페인 아르마다 함대에 선박을 보내기도 했는데, 아르마다가 영국에게 무참히 깨지면서 라구사와 영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무역에 지장을 받기 시작했다. 지중해 대신 대서양 항로가 주목받으면서 라구사는 무역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라구사의 쇠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667년의 대지진이었다. 4월 7일 오전 8시경 발생한 지진 지진해일로 도시와 선단이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공화국의 최고위층을 포함한 수천 명의 시민이 희생당했다. 살아남은 시민들의 노력으로 도시는 복구되었지만 라구사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는 재현하지 못했다. 지금의 도시는 당시 행해진 대대적인 복원 계획의 산물이다.

19세기 발칸을 둘러싼 강국들의 쟁탈전은 라구사 공화국 멸망의 신호탄이었다. 라구사는 러시아 제국 몬테네그로 군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1806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를 받아들였다. 한번 들어온 나폴레옹 군대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고, 1808년 나폴레옹은 공화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시켰다. 나폴레옹 휘하 지휘관 오귀스트 마르몽은 라구사 공작에 봉해졌다. 도시는 이후 프랑스 일리리아 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나폴레옹이 실각한 다음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넘어갔다. 20세기 초 두브로브니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 치하에 있었다. 전후 유고 연방의 구성국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중인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몬테네그로 국토방위군이 도시를 포위해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JNA는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고, 이 지역을 모두 차지해 세르비아인의 지배 아래 둘 계획이었다. 국제 사회는 도시 근교를 약탈하고 세계유산에 포격을 퍼붓는 행위에 비난을 쏟아냈지만 유고 측은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 수용소[2]에서 죽어갈 때 국제 사회는 무엇을 했는가?'라며 무시해버렸다. 포위는 7개월 동안 이어졌지만 크로아티아군은 끝까지 도시를 지켰고, 유고 측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내전 종식 후 공격 행위의 책임자들은 전범 재판에서 최대 7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유고 연방의 대통령으로 이 사태의 최고책임자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재판 도중이던 2006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경제

두브로브니크를 먹여살리는 것은 단연 관광업이다. 2015년 두브로브니크를 찾은 관광객은 2백만 명에 육박했다. 국적별로는 영국, 미국, 독일 순. # 관광의 중심인 옛 시가지는 말그대로 굴뚝 없는 공장인 셈이다. 두브로브니크 주민들은 관광업을 제외하면 수산과 선박 정비 등 해양에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대학은 이러한 산업 인력 수요에 맞춰 수산, 요트와 마리나 기술, 선박 운용과 선박 공학, 문화재 복원 등의 학과 과정을 갖추고 있다.

5. 교통

시내를 운행하는 버스는 필레 게이트 앞에서 출발한다. 버스 티켓은 사용 후 1시간 동안 유효하다. 시내 버스 노선 중에는 새벽까지 운행하는 것도 있다.

보스니아 네움이 중간에 있어 크로아티아의 다른 영토와 육지로 연결되지 못하지만 자동차로 보스니아 영토를 통과해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3] 페리와 크루즈선을 이용해 두브로브니크를 찾는 관광객도 많다.[4] 두브로브니크 공항에서는 크로아티아 항공이 오시예크, 스플리트, 자그레브로 가는 국내선을, 프랑크푸르트, 파리 등지로 가는 국제선을 운항하고 있으며, 아시아나항공이 국제선 노선에 터키항공과 함께 공동운항을 시행중이다. 공항에서 옛 시가지의 입구인 필레 게이트까지는 버스로 대략 30분 정도 걸린다.

6. 옛 시가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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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두브로브니크 옛 시가지
영어 Old City of Dubrovnik
프랑스어 Vieille ville de Dubrovnik
국가·위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네레트바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79년 (1994년 확장)
등재기준 (i)[5], (iii)[6], (iv)[7]
지정번호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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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가지 동쪽. 왼쪽 건물은 성 블레이세 성당, 오른쪽 건물은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두브로브니크 옛 시가지는 1979년에 플리트비체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유산의 영역은 성벽 안쪽 뿐만 아니라 성벽 바깥에 있는 로브리예나츠(Lovrijenac) 요새와 로크룸 섬 전체를 포괄한다. 1991년에는 지진과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 '위험에 처한 유산목록'에 올랐다가 복구 작업이 상당히 진척된 1998년에야 비로소 이 목록에서 해제되었다. 필레 게이트와 항구를 잇는 플라차 대로[8]가 시가지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 두브로브니크 성벽
    약 2km에 걸쳐 옛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성벽이다. 필레 게이트 근처의 입구를 통해 성벽 위로 올라가 도시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성벽은 최고 25m 높이를 자랑하며, 가장 견고한 곳의 두께는 6m에 이른다. 육지 쪽에는 해자를 파 접근을 더욱 어렵게 했다. 성벽 곳곳에는 탑과 요새를 배치했는데, 이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북서쪽에 있는 민체타 탑이다.
  •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 성 블레이세 성당
    두브로브니크의 수호 성인인 성 블레이세를 기려 만든 성당. 그가 수호 성인이 된 것은 친선 목적으로 방문한 베네치아인들이 사실은 함대를 바깥에 숨겨 놓고 도시를 침략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이곳의 성직자에게 알려 주어 도시를 지켰다는 전설 때문이다.
  • 렉터 궁전
  • 해양 박물관
  •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
  • 스폰차 궁전
  • 프란체스코 수도원
  • 도미니크 수도원
  • 로브리예나츠 요새
    작은 만을 두고 성벽과 떨어져 있는 절벽 위에 세워진 요새. 베네치아인들이 이 장소에 요새를 세우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이 미리 요새를 세워버려 베네치아인들이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시 바깥을 향한 요새 벽은 무려 12m나 되는 철통 방어를 자랑하지만 도시 쪽의 벽 두께는 고작 60cm에 불과하다. 입구 위쪽에는 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세상의 모든 금에도 자유를 팔아넘기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두브로브니크 여름 축제 때에는 이곳에서 연극이 상영되기도 한다.
  • 로크룸 섬
    두브로브니크 항구에서 배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섬. 베네딕토회 수도원 유적과 정원이 섬을 채우고 있다. 영국 왕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귀환하는 길에 로크룸 섬에서 폭풍우를 피한 것에 감사드리며 두브로브니크에 교회를 설립할 금전을 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작은 요새가 있는데 프랑스 지배 당시 세워진 것이다. 로크룸 섬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어갔다가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크로아티아의 영토가 되었다.

7. 미디어에서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졌다. 여러 시즌에 걸쳐 킹스 랜딩으로 등장했으며 콰스에 있는 언다잉의 집은 두브로브니크 성벽의 민체타 탑이 배경. 등장인물들이 자주 거닐던 성벽도 두브로브니크 성벽이다. 조프리 바라테온 마저리 티렐의 결혼식, 서세이 라니스터가 알몸으로 거리를 걷는 장면 등 킹스 랜딩을 무대로 하는 중요한 야외 씬들이 촬영되었다. 시즌 2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시즌 6에서는 킹스 랜딩의 야외 씬이 적어 촬영도 줄어들었다. 도시 외곽의 몇몇 장소들도 활용되었는데, 오베린 마르텔과 거산의 결투는 인근의 옛 호텔 건물에서 촬영되었다. 도시 안에는 드라마 관련 상품을 파는 상점이 여러 곳 있고 드라마에 나온 장소를 둘러보는 투어까지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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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스타워즈: 에피소드 8이 구 시가지 곳곳에서 촬영되었다. 약 일주일간 몇몇 장소들은 문을 닫고 스타 워즈의 컨셉에 맞게 조형물을 설치했다. 플라차 대로 변에 늘어선 상점도 미래 느낌이 물씬 나는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어떤 스타워즈 팬들은 이곳까지 찾아와서 위와 같은 코스프레를 시전하기도. 몇몇 장면은 벌써 새어 나왔다. #

코에이의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라구사가 더 친숙할 것이다. 게임 상에서는 베네치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중요 항구인데, 보통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아 술집이 없어 선원 보충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 정상까지 운행하는 케이블 카가 있다. [2] 크로아티아 독립국 시절 수십 곳의 크로아티아 수용소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3] 크로아티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를 거치기 때문에 짧은 시간동안 국경검문소를 두번 만난다. [4] 스플리트 등지에서 성수기 주말에 온다면 고속도로 보다는 배를 타고 오는게 훨씬 더 빠르다. [5]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6]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7]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8] 스트라둔(Stradun)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