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1 12:30:52

더 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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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Generation
1965.12.03.
A Quick One
1966.12.03.
The Who Sell Out
1967.12.15.
Tommy
1969.05.23.
Who's Next
1971.08.14.
Quadrophenia
1973.10.26.
The Who By Numbers
1975.10.03.
Who Are You
1978.08.18.
Face Dances
1981.03.16.
It's Hard
1982.09.04.
Endless Wire
2006.10.30.
WHO
201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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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Mojo.com, "The History of The Who"
1. 개요2. 초창기 (1959년 – 1966년)
2.1. 1959년 - 1964년 1월 : 디투어스의 출범2.2. 1964년 2월 - 1964년 10월 : 디투어스에서 더 후로2.3. 1964년 11월 - 1965년 12월 : 첫 번째 유럽 투어와 My Generation의 발매2.4. 1966년 1월 - 1966년 8월 : 멤버들 간의 작은 불화
3. 전성기 (1966년 – 1971년)
3.1. 1966년 9월 - 1967년 12월 : 브리티시 인베이전3.2. 1968년 1월 - 1970년 4월 : 최초의 록 오페라를 제작하다3.3. 1970년 5월 - 1971년 10월 : 10대들의 불모지
4. 황혼기 (1972년 – 1982년)
4.1. 1971년 11월 - 1974년 12월 : 6집 제작과 영화 Tommy4.2. 1975년 1월 - 1977년 8월 : 활동을 잠정 중단하다4.3. 1977년 9월 - 1978년 8월 : 기적적인 재결합
5. 해체 (1983년)
5.1. 1978년 9월 - 1983년 : 키스 문의 죽음과 해체
6. 이후의 이야기 (1983년 – 현재)7. 부록
7.1. 주요 공연 목록

1. 개요

영국의 록 밴드 더 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초창기 (1959년 – 1966년)

2.1. 1959년 - 1964년 1월 : 디투어스의 출범

파일:디투어스.jpg
▲ 디투어스 시절의 피트 타운젠드, 존 엔트위슬, 로저 달트리의 모습.

록 음악에 관심이 많던 소년인 로저 달트리는 1959년에 더 후의 베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디투어스”라는 포크 송 밴드를 결성하여 리드 보컬, 그리고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로저는 유능한 베이스의 필요성을 느껴 베이스를 구하고 있었는데, 그때 로저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액튼 문법 학교 시절의 동창인 존 엔트위슬이 베이스 기타를 들고 있던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로저는 존을 베이스 멤버로 영입하게 된다. 이때 영입 일화가 골때리는데, 로저는 존에게 “우리 밴드에 들어오면 돈을 더 많이 주겠다”며 회유하여 존을 영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개 학생이었던 로저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고(…), 존은 빡쳤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디투어스에 계속 남았다.

1961년 존은 로저에게 리드 기타리스트로 피트 타운젠드를 추천해준다. 영국 일링 아트스쿨에 재학하던 피트는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라며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키워가고 있었다. 또한 피트는 로저와 존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동네 친구이기도 했다. 로저는 존의 추천을 받고 존과 같은 방식으로 피트를 영입하였으나, 당시 피트는 스타일이 거친 로저와의 밴드 활동이 내키지는 않았다고 한다. 로저는 예쁘장한 외모 때문에 어릴 적부터 계집애 같다는 놀림을 받았는데, 이것이 싫어 대장간처럼 힘쓰는 곳을 전전하며 거칠게 살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세 사람이 모이면서 디투어스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리듬 앤 블루스, 컨트리 뮤직의 영향을 받은 밴드였기에 인기는 그냥저냥이었다.

디투어스는 벽돌공으로 일하던 더그 샌덤을 드러머로 영입하였고, 콜린 다우슨을[1] 보컬로 영입하여 연습을 시작한다. 연습이라 해봐야 하교 시간 후에 교실 하나 빌려서 연주하는 정도였는데, 워낙 재능이 있었던지라 얼마 안 가 학교 축제나 동네 등에서 콘서트를 열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드러머 더그는 1940년대에 태어난 나머지 주축 셋과는 달리 1930년에 태어났기에, 당시 10대 후반의 파릇한 소년이었던 분위기에 겉돌아 밴드에 녹아들기 어려워 했다. 또한 더그는 드러머로서의 야망은 크게 없었으며, 그냥 직장 생활을 하면서 드럼은 취미로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2]

그동안 한 연습을 바탕을 1963년 초부터 디투어스는 첫 번째 영국 투어를 개최한다. 이 공연 당시 디투어스는 자작곡이라고 할 만한 곡들은 없었기에 당시 유명했던 밴드들의 곡들을 커버하면서 명성을 키워 나갔는데, 주로 비틀즈의 곡들을 커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메인 보컬인 콜린 다우슨이 로저와 언쟁을 벌이다가 밴드를 탈퇴하였고, 결국 로저가 다시 메인 보컬이 되었으며, 피트가 로저를 대신하여 리듬 기타리스트를 맡게 된다.

2.2. 1964년 2월 - 1964년 10월 : 디투어스에서 더 후로

파일:하이 넘버스.png
키스 문 합류 이후의 더 후.

디투어스는 메이저에 정식으로 데뷔를 하기 위해 밴드명을 바꾸기로 한다. 피트 타운젠드는 ‘헤어(The Hair)’라는 이름을 제안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더 후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된다. 더 후는 매니저 피터 미든과 계약을 맺어 당시 유행하던 모드족 컨셉을 받아들여 밴드의 방향을 전환한다.[3] 당시 하이패션이던 모드 패션은 이들에게 있어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R&B 음악을 시끄럽고 강렬하게 연주하면서 점차 이름을 알려나갔으나, 전체적으로 구닥다리 블루스를 연주하는 느낌이라 큰 음악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 때 피터 미든이 써준 싱글 I'm The Face를 발매하지만, 당시에 넘쳐나던 R&B 곡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에 상업적으로 큰 빛을 보진 못했다.
키스의 첫 공연 때 밧줄을 갖고 드럼 세트를 꽁꽁 묶어서 고정시키길래 왜 이러나 싶었지만 공연이 시작되자 그 의문이 사라졌다. 키스가 드럼을 치자 드럼 세트가 앞뒤로 요동을 쳤기 때문이다.
존 엔트위슬

이러한 상황에서 나머지 세 멤버와 같은 학교의 학생이던 키스 문이 더 후의 최종 멤버로 합류한다. 키스는 학교에서 싸움을 자주 벌이는 말썽꾼이었는데, 멤버들은 키스와 같은 학교였으나 그와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밴드가 한창 연습에 열을 올리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난다. 만취 상태인 어떤 더벅머리 하나가 술병을 들고 막무가내로 연습실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드럼 세트로 가서 더그 샌덤에게 고함을 지르며 강제로 그를 내쫓은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이 드럼을 치기 시작했는데, 후에 피트의 증언에 따르면 거의 실성 직전의 발광적인 연주였다고 한다. 더그 샌덤이 구매한 지 얼마 안 된 새 페달을 연주 한 곡으로 박살냈다고 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다른 멤버들에게 욕설과 몰매를 맞고 쫓겨났다. 그러나 키스의 연주 실력은 멤버들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얼마 안 가 그는 탈퇴한 더그 샌덤을 대신하여 정식으로 밴드에 가입하여 1964년 5월 2일 공연부터 드럼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더 후는 최종적으로 4인조 밴드가 된다.

키스를 영입한 밴드는 다시 새롭게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모드 컨셉은 유지했지만 음악적 감각은 없었던 매니저 피터 미든을 해고하였고, 킹크스의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던 미국인 프로듀서 셀 타미와 계약을 맺게 된다. 또한 1964년 1월부터 열린 2차 영국 투어에서 피트는 거친 느낌의 R&B를 연주했던 특성을 잘 살려서 Maximum R&B이라는 슬로건을 매 공연마다 붙였고, 더 후는 호텔 공연장과 여러 클럽들에서 공연을 하면서 리스너들의 입소문을 타게 된다.
▲ 1964년의 공연 모습.

한편 1964년 6월 어느 공연에서 피트 타운젠드는 기타를 연주하다가 실수로 기타를 부숴먹게 된다. 피트는 이에 당황했으나, 오히려 관객들의 반응이 좋은 것을 보고서는 이내 기타를 계속 박살냈다. 이 공연 이후로 피트는 공연이 끝날 때마다 기타를 부수기 시작했고, 피트뿐만 아니라 혈기 왕성하던 키스 문도 본인의 드럼 세트를 발로 걷어차고 마구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악기 부수기는 더 후의 상징이 된다.

2.3. 1964년 11월 - 1965년 12월 : 첫 번째 유럽 투어와 My Generation의 발매

피트 타운젠드는 1964년 I Can't Explain이라는 곡을 작곡하였고, 이듬해 11월 이 곡을 A면으로, Bald Headed Woman이라는 곡을 B면으로 하여 첫 번째 싱글 ‘I Can't Explain’을 발표한다. 당시 유명했던 기타리스트인 지미 페이지 등 여러 유능한 세션들이 곡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싱글이 발매되고 1965년 즈음에 BBC 등 각종 라디오에서 I Can't Explain이 나오는 등 인기를 얻었다. 또한 천천히 인기가 올라 UK 차트 탑 10 안에 들기도 하였으며, 미국에서도 소소한 인기를 끌었다.
파일:더 후 1965.jpg
▲ 1965년, 데뷔 직후의 더 후.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밴드는 1965년 초중반에 My Generation의 작업에 착수하였고, 그 해 9월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투어를 개최하면서 처음으로 영국 밖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피트는 My Generation을 느린 블루스 음악으로 작곡하려고 하였으나, 이내 존의 파워풀한 베이스 솔로를 곁들인 하드한 곡으로 작곡 방향을 바꾼다. 이듬해 10월에 싱글로 발매된 My Generation은 발매된 후 UK 차트 2위라는, 신인 록밴드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며 상업적으로 성공하게 된다. 또한 더 후는 이 곡으로 동년에 발표된 롤링 스톤스 (I Can't Get No) Satisfaction과 함께 하드 록의 시작을 알렸으며, 빌보드 핫 100에서도 74위를 차지하는 등, 신인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도 소소한 성공을 거두었다.
I hope I die before before get old.
난 늙기 전에 죽기를 원해
My Generation

사실 모드 붐에 묻어간 면이 없진 않았으나,[4] 오히려 당시 모드족 붐을 적절히 반영하며 "시대를 반영한" 밴드가 된다. 단순히 묻어가는 차원이었다면 시대의 흐름에 쓸려 내려갔을텐데, 그만큼 당대 젊은이들의 분위기를 잘 반영했고, 이러한 점이 공감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모드족의 대변자이자 스스로 모드족으로 칭한 밴드는 거의 없었다.

싱글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동년 12월에 동명의 1집 앨범 My Generation을 발매한다. 이 앨범은 피트의 자작곡부터 제임스 브라운 등의 선배 가수들의 곡들을 커버한 커버곡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전에 싱글로 인기를 얻었던 더 후 답게 이 앨범도 UK 차트 5위를 기록하는 등 매우 인기를 끌었으며, 현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데뷔 앨범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명작이다. 1집의 여러 하드 록 넘버들로 인해 당시 더 후는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밴드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또한 이들의 독특한 패션은 모드로부터 출발했지만, 모드에게 다시 영향을 미쳤다. 로저 달트리의 화려한 의상은 당시 영국의 청년들의 유행을 선도했고, 피트 타운젠트는 영국 국기 유니언 잭으로 자켓을 만들어 입었다. 이는 록 역사에서 일종의 패션 코드가 되었고, 존 엔트위슬은 군복 셔츠나 자켓을 입고 나와 록 역사상 최초로 밀리터리 룩을 선보이기도 했다.

2.4. 1966년 1월 - 1966년 8월 : 멤버들 간의 작은 불화

1966년 더 후는 크림, 비 지스의 매니저인 로버트 스티그우드와 계약을 맺고 Substitute, I’m a Boy라는 싱글 두 개를 발매한다. Substitute는 UK 싱글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였고, 특히 네덜란드에서 2위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으로 성공하였다. I’m a Boy는 전작보다 성적이 더 좋아져서 UK 싱글 차트에서 2위를 기록하였으며, 아일랜드에서도 7위를 기록하는 등 유럽 각지에서 성공하였다. 그러나 두 싱글 모두 미국에서는 차트에 등재되지 못하는 등 미국 시장에서는 유럽에서보다 약세를 보였다.

한편 싱글 발매 이후 피트 타운젠드와 키스 문이 공연하다가 모종의 이유로 서로 다투게 된다. 성격이 불같은 멤버들이 모였다 보니 이는 곧 물리적인 싸움으로도 이어졌는데, 피트가 기타로 키스의 얼굴을 때려(…) 키스의 눈에 커다란 멍이 생기게 되었고, 키스는 이에 빡쳐서 밴드를 탈퇴하고 제프 벡,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와 음악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몇 주 후 키스는 다시 더 후에 복귀하게 된다.

3. 전성기 (1966년 – 1971년)

3.1. 1966년 9월 - 1967년 12월 : 브리티시 인베이전

1집으로 유럽 각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미국에서도 소소한 팬층을 확보하면서 이름을 알린 더 후는 본격적으로 2집 작업에 착수한다. 밴드는 2집 발매 이전이 2집에 수록될 곡들인 Boris the Spider과 A Quick One, While He's Away를 차례대로 싱글 발매하였고, 1966년 12월 9일 2집 A Quick One을 발매한다. 이 앨범은 UK 차트에서 4위를 거두는 등 1집에 이어서 다시 상업적으로 성공하였다. 2집에서 더 후는 기존의 음악 스타일에서 한층 진일보한 모습을 선보인다. 키스의 드럼 사운드가 돋보이는 Happy Jack이나, 존 엔트위슬의 베이스 라인과 묵직한 그로울링[5]이 돋보이는 "Boris The Spider"가 싱글로 발매된다. 당시 수많은 비트 밴드들이 명멸하던 시기에 이 앨범으로 인해 더 후는 록스타의 지위를 더욱 굳히게 된다.
초창기의 우리는 크림,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와 공연을 하면서 음악적으로 발전해 나갔어요.
로저 달트리[6]

2집 발매 직후 1967년 3월, 더 후는 유럽에 이어 북미에서도 Happy Jack을 싱글로 발매한다. 이 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30위권 안에 들었으며, 특히 캐나다에서는 무려 1위를 기록하는 등의 성공을 거두어 더 후의 브리티시 인베이전 참전 소식을 성대하게 알렸다. 또한 당시 영국에서는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밴드인 크림,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와 더 후 간의 라이벌 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67년 당시 이 세 밴드는 같이 공연을 하고 음악적으로 협력하는 등 선의의 라이벌로서 서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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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더 후의 첫 번째 미국 방문 당시.

이듬해 6월 더 후는 첫 번째 미국 투어를 갖게 된다. 이 투어에서 밴드는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폭탄인 ‘체리 폭탄’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ADHD끼가 다분히 있던 키스는 체리 폭탄을 구매하여 투어 도중 호텔 방 안에서 폭탄을 터뜨리면서 놀았고, 다이너마이트까지 구해서 호텔 화장실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문을 닫아 화장실을 초토화 시켜놓는 등(…)의 기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특히 미시간 공연 이후에 열린 키스의 21번 째 생일 파티가 아주 압권이었는데, 키스는 그야말로 호텔을 아주 박살을 내고, 마약과 술에 취해 차 한 대를 호텔 풀장에 박아버렸다고 한다. # 이 호텔은 무려 24,000 달러의 손실을 입었지만(…), 상업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더 후 답게 호텔 측에 이를 복구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두둑한 팁을 줬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투어에서 돌아온 후 밴드는 3집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피트는 3집을 하나의 콘셉트 앨범으로 제작할 구상을 하고, 앨범의 컨셉을 가상의 상품을 홍보하는 라디오 방송으로 잡고 3집을 작업하기 시작한다. 1967년 9월 피트는 3집에 수록될 곡 중 하나인 I Can See for Miles를 싱글로 발매한다. 이 싱글은 더 후의 커리어 중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싱글로, 빌보드 핫 100에서 무려 9위를 차지하였으며, UK 차트에서도 10위를 기록하는 등의 상업적 성과를 거두었다.

I Can See for Miles 발매 이후, 밴드는 3집 발매 전 홍보를 하기 위해 애니멀스와 함께 미국 투어에 나선다. 이 투어에서 더 후는 TV 쇼에도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했는데, 한 코미디 쇼에서 키스가 사고를 저지르고야 만다. My Generation을 연주하던 중 키스가 숨겨 놓았던 폭탄이 예상보다 빨리 터지게 된 것. 꽤 큰 폭발이었기에 방송 장비들마저 박살나 키스는 이에 놀라서 도망쳤고(…), 폭발을 직격으로 맞은 피트는 한쪽 귀의 청력에 이상이 생겼다. 그럼에도 피트는 그 자리에서 부수던 기타를 마저 부쉈고, 급기야 MC의 통기타마저 빼앗아서 그것도 부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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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뉴멕시코 공연에서

이런저런 해프닝들이 있었으나 두 번째 미국 투어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1967년 12월 3집 The Who Sell Out이 발매된다. 이 앨범은 비틀즈 페퍼 상사와 더불어 최초의 콘셉트 앨범으로 평가받으며, 빌보드 차트에서는 50위 권 이내에 들었고, UK 차트에서는 20위 권 안에 드는 등 실험적인 앨범임에도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1967년 더 후 멤버들의 친구이자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인 지미 페이지는 존과 키스에게 제프 벡과 넷이서 슈퍼밴드를 결성하는 것이 어떻냐고 물어본다. 그러나 당시 존과 키스는 더 후의 활동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로저, 피트와의 불화도 딱히 없었기에 지미의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 이 대화에서 짖궂은 존과 키스는 지미에게 “네가 결성한 밴드는 납(Lead)으로 만든 비행선(Zeppelin)처럼 추락할거야” 라는 농담을 하면서 미래에 지미가 결성할 밴드의 이름으로 레드 제플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그리고 1년 뒤 지미 페이지가 결성한 밴드의 이름은 레드 제플린이 된다. 추락하기는 커녕 완전히 솟구쳐 버렸다

3.2. 1968년 1월 - 1970년 4월 : 최초의 록 오페라를 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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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뉴질랜드 공연에서

밴드의 세계구급 성공에 1968년 더 후는 스몰 페이시스와 함께 오세아니아 투어에 나선다. 주로 뉴질랜드, 호주 시드니, 멜버른 등의 도시에서 공연을 개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멤버들은 호텔을 또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아(…) 뉴질랜드, 호주 당국과 마찰을 맺었고, 경찰들은 멤버들을 거칠게 다루었다. 급기야 호주와 뉴질랜드 신문들은 “거친 부랑자들을 추방해야 한다”라는 헤드라인을 걸었고, 결국 더 후 멤버들은 멜버른에서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더 후는 호주 공연에 오고 있지 않다.[7]

전작의 성공에 고무받은 피트 타운젠드는 인도 힌두교 요가 사상가인 메헤르 바바(Meher Baba)의 가르침을 받고 마약을 끊게 된다. 또한 피트는 바바의 영향을 받아 아예 앨범 하나를 통째로 스토리 라인으로 구축해 하나의 오페라처럼 만들 계획을 세운다. 이에 구상해 낸 스토리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한 젊은이가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드라마였다. 이러한 계획을 바탕으로 멤버들은 4집 작업에 착수한다.
이 앨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토미가 귀머거리, 벙어리, 그리고 장님이라는 사실이에요. 그는 우리가 음악적으로 해석하는 파동으로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죠. 앨범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 소년을 직접 인지할 수 있게 하고, 그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게 하는 것이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피트 타운젠드, 1968년 롤링 스톤에서.
파일:더 후 서커스.jpg
▲ 1968년, 롤링 스톤스 로큰롤 서커스에서

1968년 12월, 더 후는 동료 밴드인 롤링 스톤스와 함께 롤링 스톤스 로큰롤 서커스를 개최하여 참가하였다. 더 후는 3집 발매 후 1년 넘게 신보를 내지 않고 있었기에, 신작의 곡들은 공연하지 않고 이 공연에서는 2집의 A Quick One, While He's Away를 연주했다.

1969년 5월 드디어 록 역사상 최초의 록 오페라인 4집 Tommy를 발매하였다.[8] 총 24곡으로 구성된 두 장짜리 LP는 1969년 영국 앨범차트 2위에 오르는 성공을 이루었고, 미국에서는 첫 2주 동안 20만 장이 넘게 팔리는 등 전작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록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도는 이후 핑크 플로이드, 예스, , 그린 데이 등의 후대 밴드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훗날 오페라 버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도 연주된다.

그러나 이 때를 기점으로 더 후는 더 이상 젊은 층의 패기를 대변하는 밴드가 아니었고, 이를 싫어한 과거의 팬들과 모드족들은 더 후에게서부터 상당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것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큼 더 후의 음악성은 날로 진보해 나갔다.

앨범을 발매하고 더 후는 앨범 홍보의 일환으로 3차 미국 투어를 나선다. 공연장은 항상 만석이었으며, 관객들은 밴드가 Tommy에 수록된 곡들을 연주할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열띤 환호를 보냈다. 이 투어 당시 밴드의 스케줄이 워낙 빡빡했는데, 시카고에서 공연하다가 쇼를 찍으러 런던으로 다시 돌아가고, 런던에서 쇼를 찍고 후술할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뉴욕으로 오는 등 그야말로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파일:더 후 우드스탁.jpg
▲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1969년 8월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리고, 당연히 세계적인 밴드인 더 후도 페스티벌에 참가하였다. 이 공연에서 더 후는 신보인 4집의 여러 곡들을 연주하였으며, My Generation 등 과거의 히트곡들 또한 연주하였다. 더 후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의 공연은 레전드 공연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북유럽 신을 떠올리게 하는 로저의 의상과[9], 공연이 끝난 후 피트가 기타를 관객을 향해 던졌던 것은 매우 유명하다.

4집 Tommy의 성공으로 더 후는 그야말로 영국 최고의 밴드의 위치에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함께 올라섰다. 한편 피트는 1970년 12월까지 열릴 4집 투어 공연 중 라이브 앨범을 제작하기로 한다. 스튜디오보다 더 풍성한 라이브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피트는 2월 14일에 열릴 웨스트요크셔 리즈에서의 공연을 녹화하여 라이브 앨범을 제작하기로 하였고, 1970년 5월에 첫 번째 라이브 앨범인 Live at Leeds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에서 4위를 기록하였고, UK 차트에서는 3위를 기록하는 등, 정규 앨범이 아님에도 상업적으로 매우 성공하였다. 평론가들 또한 웬만한 정규 앨범들 이상의 퀄리티라며 호평하였고, 현재까지 발매된 록밴드의 라이브 앨범 중 가장 훌륭한 앨범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3.3. 1970년 5월 - 1971년 10월 : 10대들의 불모지

록 오페라인 4집의 성공으로 피트는 5집 또한 록 오페라로 만들 구상을 한다. 피트는 5집을 사이언스 픽션을 컨셉으로 잡아 스토리를 세웠고, 이내 Lifehouse 프로젝트를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밴드 내에서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주제가 상당히 심오하고 난해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Lifehouse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되고 5집은 일반적인 스튜디오 앨범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저는 5집 제작 당시 밴드 멤버들에게 엄청난 지지와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나 슬프게도 매니저 램버트의 도움은 받지 못했어요. 그는 제 아이디어를 절대적인 의미에서 전달하는 데에 가장 필요했던 사람이었는데도 말이죠.
피트 타운젠드

멤버들은 매니저 키트 램버트의 제안을 수용하여 뉴욕의 플랜트 스튜디오로 곡을 녹음하러 떠난다. 그러나 녹음 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램버트가 극심한 마약 중독에 빠지는 바람에 녹음할 때 도움이 거의 안 되었다. 그렇기에 멤버들은 녹음을 끝내고 바로 런던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멤버들은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에릭 클랩튼 등의 스타들과 협업하는 프로듀서인 글린 존스와 의논하여 플랜트 스튜디오에서의 녹음본들은 전부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녹음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밴드는 유럽 투어 중이었기에 스튜디오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밴드는 롤링 스톤즈 이동식 스튜디오를 대여하여 이 곳과 런던 올림픽 스튜디오를 병행해 가면서 앨범을 녹음했다. 또한 앨범 커버도 구상해야 했는데, 당시 나왔다가 퇴짜맞았던 시안 중에는 키스가 코르셋을 입고 채찍을 든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무산되었고, 최종 커버로는 어떤 콘크리트 기둥에 멤버들이 오줌을 갈긴[10] 모습이 커버로 채택되었다.
파일:keith_moon_with_whip.png
파일:1971-Whos-Next.jpg
▲ 당시 퇴짜맞은 OME 커버(왼쪽)와 5집의 커버(오른쪽).

앨범의 모든 작업을 끝낸 멤버들은 발매 전 홍보 일환으로 5차 미국 투어를 시작한다. 이 투어에서는 5집에 수록된 Baba O'Riley, Won't Get Fooled Again 등의 곡들이 셋리스트에 수록되어 시범적으로 공연이 펼쳐졌다.

1971년 8월 14일, 5집 Who's Next가 발매되었고, 5집은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차트에서는 4위를 기록하였고, UK 차트에서는 더 후 커리어 사상 최초로 1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앨범에서는 신디사이저를 적극 도입해 더욱 더 진일보한 음악성을 보여주었으며, 이전부터 쌓아오던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곡들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5집 홍보 투어도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관객들은 밴드가 5집의 곡을 연주할 때마다 큰 호응을 했으며, 특히 Baba O'Riley, Won't Get Fooled Again이 가장 인기를 끌어 이 두 곡을 연주할 때의 환호가 장난 아니었다고 한다. 관객들은 공연 때마다 Baba O’Riley의 구절인 Teenage Wasteland(10대들의 불모지)를 떼창했다. 특히 9월에 열린 런던 공연에서는 무려 35,000 명의 관객들이 공연을 관람하였으며, 매 공연마다 표가 매진이 될만큼 더 후 커리어 사상 가장 높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나 5집이 발매된 1971년에는 Sticky Fingers, Imagine, Led Zeppelin IV, Blue, Hunky Dory, Ram 등 대중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수많은 명반들이 발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 언론사에서 Who's Next를 1971년 최고의 앨범 1위로 꼽기도 했을만큼 Who's Next의 음악성은 어마어마했다.

4. 황혼기 (1972년 – 1982년)

4.1. 1971년 11월 - 1974년 12월 : 6집 제작과 영화 Tommy

5집 투어를 끝내고 피트 타운젠드는 밴드에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디 시절이던 6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밴드는 쉬지도 않고 영국 투어 및 세계 투어를 다녔고, 음반들도 쉴 새 없이 계속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밴드 멤버들도 동의하여 투어가 종료된 후 멤버들은 1972년 중순까지 8개월이라는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1972년 피트는 6집 Rock Is Dead—Long Live Rock을 구상하게 된다. 그러나 밴드 내에서는 불화의 조짐이 생기고 있었다. 먼저 키스 문은 술과 마약을 너무 많이 복용하여 매번 사고를 치고 다녔으며, 피트는 로저 달트리가 그저 돈만 밝힌다고 생각했으며, 로저는 피트의 계획에 불만을 표출했다. 이렇게 되어 6집은 구상으로 끝나게 된다.

1973년 밴드 멤버들은 새롭게 6집 앨범을 다시 구상하게 된다. 멤버들은 프랭크 자파의 조언을 수용하여 6집은 록 오페라 앨범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스토리를 구상하게 된다. 피트는 이 앨범에서 1960년대 본인들의 컨셉이었던 모드족과 10대 팬들에 대해 다루기로 하고, 앨범 구상이 끝난 1973년 3월부터 6집 홍보 투어를 시작한다. 그리고 1973년 10월, 더블 앨범으로 기획된 록 오페라 앨범 " Quadrophenia"를 발매되었고,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차트 2위를 기록하였고, UK 차트에서도 2위를 기록하면서 상업적으로 다시금 또 성공하였다.

그러다 6집 투어 도중에 일이 생겼는데, 캘리포니아 공연에서 약을 과다복용한 키스가 그만 쓰러지고 만 것. 그러나 이대로 공연을 끝낼 수는 없었기에 피트는 “관객들 중에 드럼을 칠 수 있는 분이 있나요? 웬만하면 잘 치는 분으로요” 라고 물었고, 한 청년이 무대로 나오게 된다. 이 청년은 엄청난 더 후의 덕후였어서 더 후의 모든 곡들의 드럼을 칠 줄 알았기에, 밴드는 키스의 대타로 이 청년을 세워 공연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해프닝이 일어난 것을 빼면, 런던 공연에서 8만 명의 관중을 동원하는 등 6집 투어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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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mmy의 포스터

한편 1974년 켄 러셀이 감독으로 4집 Tommy를 바탕으로 한 실사 영화가 제작이 된다.[11] Tommy역으로 보컬 로저 달트리, 사이비 교주 역에 에릭 클랩튼, Acid Queen역에 티나 터너, Pinball Wizard역에 엘튼 존이 출연하는 등 더 후와 친분이 있는 뮤지션들이 배우로 나온다. 영화는 1975년에 개봉되었으며, 앨범의 기본 스토리가 좋기에 영화 평론가들에게도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2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는 등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또한 영화의 사운드 트랙이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라가는 등 인기도 상당히 높았다.

4.2. 1975년 1월 - 1977년 8월 : 활동을 잠정 중단하다

1975년 10월, 밴드는 7집 The Who by Numbers를 발매한다. 그러나 로저 달트리와 피트 타운젠드는 7집 발매 이전부터 앞으로의 밴드의 미래 등에 대해서 의논하던 중 의견이 충돌하였고, 결국 1976년 투어가 종료된 후 밴드는 활동을 잠정 중단하게 된다.
저는 작사 외에 제가 앨범에 얼마나 많이 기여했는지 몰라준 로저에게 화가 났어요. 그리고 로저가 제 작품이 쓰레기 같다며 내쳤을 때에 다시 화가 났죠.
피트 타운젠드, 1977년 롤링 스톤에서.

활동을 중단한 데에는 키스 문의 지속적인 마약 복용으로 인해 건강이 쇠약해져 공연이 어려워진 것도 있었으나, 가장 큰 원인은 로저와 피트의 불화였다. 이들은 사소한 의견 충돌에서부터 시작되어 불화가 점점 커졌으며, 밴드가 활동을 중단했던 기간 동안 서로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고 한다.

4.3. 1977년 9월 - 1978년 8월 : 기적적인 재결합

파일:더 후 1977.jpg
▲ 재결성한 당시의 모습

약 2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1977년 9월 어느 날, 로저 달트리와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던 피트 타운젠드는 로저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다. 그런데 그 편지가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지 로저가 펑펑 울며 피트에게 사과 전화를 했고, 둘의 불화가 종식되어 더 후는 기적적으로 활동이 재개된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8집 앨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당시 드러머 키스 문의 건강은 매우 쇠약해져, 드럼도 제대로 못 치는 판이었다. 그렇기에 나머지 멤버들은 키스의 해고까지 논의하였으나, 키스가 투혼을 발휘하여 결과적으로는 없던 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8년 8월에 8집 Who Are You가 발매된다. 오랜 기간동안 활동을 중단했음에도 더 후는 더 후였기에 빌보드 차트에서 2위를 기록하였으며, UK 차트에서는 6위를 기록하는 등의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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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문 사망 직전 마지막 공연.

상업적으로 성공하였음에도 밴드는 투어를 할 수 없었는데, 이는 키스의 악화된 건강이 가장 컸다. 키스는 호르몬 과다 분비 증세로 인해 말 안정제 등 온갖 종류의 약물을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건강에 악화가 된 것이다. 멤버들은 키스에게 마약 복용을 중단하라고 수 차례 권했으나, 키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8집 발매 이후에 공연은 딱 한 번 밖에 못 했는데, 이 공연이 바로 셰퍼튼 스튜디오에서의 공연이다. 이 공연 영상은 유튜브에도 풀려 있으며, 현재 공개된 키스 생전 더 후의 라이브 영상 중 가장 영상 퀄리티가 높은 라이브이다.

5. 해체 (1983년)

5.1. 1978년 9월 - 1983년 : 키스 문의 죽음과 해체

1978년 9월 키스 문은 버디 홀리의 전기 영화 시사회에 초대 손님으로 참석한 이후, 폴 매카트니와 린다 매카트니를 만나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약을 복용하였고, 결국 다음 날 아침 숨진 채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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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스 문의 비보를 알린 기사.

키스가 사망한 뒤 밴드는 새로운 드러머 케니 존스를 영입해 여러 앨범을 냈지만, 키스 문의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으며, 예전의 기량을 보이는데 실패하였다 1979년 더 후 콘서트 압사 참사를 겪기도 했다. 결국 1983년 밴드를 해체하게 된다.

6. 이후의 이야기 (1983년 – 현재)

이후 각자 솔로 활동을 펼치다가 1985년 Live Aid 공연에선 생존한 멤버들이 모여 공연하기도 했다. 1989년 투어를 끝내고 90년대 들어서 재결성 후 1996년과 1997년에 투어 공연을 하고 1999년부터 공연을 다시 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2002년 존 엔트위슬이 코카인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바람에 비틀즈처럼 현재 오리지널 멤버는 단 두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 하지만 그 뒤에도 여전히 세션 멤버들을 대동하고 종종 라이브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 중 오아시스 세션으로 활동했던, 링고 스타의 아들 잭 스타키가 드러머로 있으며, 2010년 슈퍼볼 하프타임쇼에 서기도 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록밴드인 만큼 2012 런던 올림픽 폐회식에 마지막 무대를 멋지게 장식하였다. "Baba O' Riley", "See Me Feel Me", "My Generation" 세 곡을 연주했다.

2014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영국 투어에 돌입했고, 두 멤버에 따르면 "이번 투어는 긴 이별의 시작"이라 밝혔고, 로저 달트리는 "이번 투어는 정말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공연을 할 수는 없다. 나는 내 목소리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 빌보드 등 외신에 따르면 밴드는 2015년 11월~12월을 마지막으로 런던, 더블린, 벨파스트 등에서 9회에 걸쳐 공연을 펼친다. 영국 공연이 끝나면 미국에서 투어 공연이 이어질 전망. 출처는 이곳. 2014년 11월 3일 데뷔 50주년 기념 히트앨범인 "The Who Hits 50"이 발매되었다.
2015년 미국 투어는 로저의 뇌수막염으로 연기되고 2016년, 로저가 회복하며 런던을 시작으로 연기되었던 미국, 캐나다투어 일정을 소화하였다. 그 후 유럽 국가들의 공연을 끝으로 2016년의 일정이 끝이 났다. 이후 2017년 로열 알버트 홀에서의 청소년암 환자 지원 콘서트를 시작으로 투어 공연을 할 예정. 2019년 새로운 공연을 하는 듯 하다. 2019년 5월 7일부터 미국 순회공연, 7월 6일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며 더불여 영국 한정으로 새로운 엘범(LP&CD(지금은 구매할수 없는 Exclusive CD 와 Standard CD이 있다.)(영국을 제외한 다른나라로의 배송은 안되는듯 하다.)구매대행지를 써보자 2019년 5월 7일부터 Moving On! Tour 를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 Moving On! Tour 참조.

7. 부록

7.1. 주요 공연 목록

<rowcolor=#fff> 연도 공연 명 주요 참가자
1967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라비 샹카르
1968 롤링 스톤스 로큰롤 서커스 롤링 스톤스, 더티 맥, 제쓰로 툴
1969 우드스톡 페스티벌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제퍼슨 에어플레인, 라비 샹카르
1971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 조지 해리슨, 밥 딜런, 에릭 클랩튼, 링고 스타
1973 에릭 클랩튼 레인보우 콘서트 에릭 클랩튼
1979 캄푸치아를 위한한 콘서트 더 클래시, , 폴 매카트니, 엘비스 코스텔로
1985 라이브 에이드 엘튼 존, 레드 제플린, U2, , 데이비드 보위, 폴 매카트니
2001 뉴욕시를 위한 콘서트 롤링 스톤즈, 폴 매카트니, 빌리 조엘, 본 조비
2005 라이브 8 마돈나, 핑크 플로이드, 폴 매카트니, U2, 딥 퍼플
2007 라이브 어스 메탈리카, 마돈나, 로저 워터스, 린킨 파크, 제네시스, 듀란 듀란
2012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폴 매카트니, 악틱 몽키즈, , 에드 시런, 원디렉션, 스파이스 걸스
2012 허리케인 샌디 자선 콘서트 로저 워터스, 카녜 웨스트, 브루스 스프링스틴, 빌리 조엘, 폴 매카트니

[1] 이 인물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정보가 거의 없다. [2] 더그는 이후 더 후의 산증인으로서 인터뷰도 여러 차례 진행했는데, 후술할 키스 문을 접한 뒤로는 더그의 실력에도 멤버들은 의문을 품으며 더그 본인에게 탈퇴를 권고했을때 상당히 서운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특히 타운젠드가 더그 탈퇴에 제일 앞장섰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은 드러머로서 큰 야망은 없었다고 인정하면서도 탈퇴 후에도 멤버들이랑 마냥 틀어진건 아닌건지 종종 만나며 같이 찍은 사진들도 더러 발견되고 더그의 자서전에도 타운젠드가 기고하는 등 나름의 교류는 있었다고 한다. 재회한 더 후 멤버들과의 인증샷 더그는 2019년자로 노환으로 별세했으며, 그가 밴드 활동동안 남긴 녹음본들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3] 그 전까지는 딱히 방향성이라 할 것도 없었고, 패션도 신경쓰지 않았다. [4] 모드족이 등장한 것이 1950년대 후반인데(50년대 비트닉 문화가 계승, 발전되었다. 50년대 테디보이 문화가 계승, 발전된 것이 로커), 1960년대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런던의 급진적 보헤미안 문화가 합쳐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모드족 붐이 절정에 도달한 것이 1964년이고 더 후의 첫 싱글은 1964년에 발매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5] 당시 록계 최초의 그로울링 창법이었다. [6] 참고로 이 말은 레드 제플린을 칭찬하던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7] 현재까지 이탈리아 공연을 오지 않고 있는 레드 제플린과 유사한 면이 있다. [8] 이전에 헤어같은 훌륭한 록 뮤지컬이 있기는 했으나, 정식으로는 더 후의 Tommy가 최초다. [9] 여담으로 피트 타운젠드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가슴을 다 드러낸 로저의 의상이 꼴보기 싫다고 빡쳤다고 한다(…). 찐친 [10] 당연히 진짜 오줌은 아니다. [11] 일설에 따르면 본래 이 영화에 스탠리 큐브릭을 감독으로 초청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멤버들은 이에 빡쳤는지 5집 Who's Next에서 모노리스로 추정되는 콘트리트 물체에 오줌을 갈긴 모습을 커버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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