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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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width=230><tablebordercolor=#E7E6D2> 丹陽 張氏 단양 장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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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colbgcolor=#fff,#191919> 충청북도 단양군 | ||
시조 |
장순익(張順翼)[1][2] 장갑용(張甲用), 장무용(張戊用)[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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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충청북도
단양군,
음성군 경기도 화성시, 용인시 경상북도 안동시, 의성군, 영주시 강원도 횡성군 충청남도 예산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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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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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양 장씨(丹陽 張氏)는 충청북도 단양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두 계통(系統)이 있다.
2. 시조
도시조(都始祖)는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로 중국 절강성 소주용흥부(蘇州龍興府) 사람으로 신라 말에 우리나라에 건너 왔다고 한다. 그는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에 앞장선 개국공신으로서 태사공에 봉해졌고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있으며, 안동 권씨와 안동 김씨 및 안동 장씨의 시조를 함께모신 삼태사묘 (三太師廟)에 제향 (祭享)되었다.그의 아들 장보천(張寶千)은 이부상서와 대장군 및 좌복야를 지냈고, 손자 장금용(張錦用)은 판도판서와 평장사 및 상장군에 올랐으며, 후에 인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4세인 장지현(張之賢)은 한림으로 중국에서 이부시랑을 지냈고, 고려에 귀국하여 좌정승을 역임하였다. 단양장씨의 관조(貫祖)는 장정필의 4대손인 5세 장순익(張順翼)이다.
선단양(先丹陽)으로 불리는 계통(系統)은 장순익(張順翼)을 시조로 모시는데, 그는 안동 장씨 시조 장정필(張貞弼)의 증손인 장지현(張之賢)의 셋째 아들로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졌다. 이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단양(丹陽)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단양 장씨(丹陽 張氏)를 중흥(中興)시킨 실질적(實質的)인 시조(始祖)라 할 수 있는 중시조(中始祖)는 충현공 장하(忠顯公 張夏)이다. 그는 공민왕(恭愍王)조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侵入)했을 때 개경을 수복(修復)하고, 우왕(禑王) 때 의성에서 왜적(倭敵)을 격퇴(擊退)하는 등(等) 많은 공(功)을 세우고 벼슬이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으나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되자 단양산(端陽山)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후단양(後丹陽)으로 불리는 둘째 계통(系統)은 태사공(太師公) 정필(貞弼)의 14세손(世孫)으로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에 봉(封)해졌던 장 사(張 사)의 둘째 아들 장갑용(張甲用)과 셋째 장무용(張戊用)을 관조(貫祖)로 하는 계통(系統)이다.
3. 인물
단양 장씨(丹陽 張氏)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두 계통(系統)이 있다.선단양(先丹陽)으로 불리는 첫째 계통(系統)은 장씨(張氏)의 도시조(都始祖)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의 증손(曾孫)인 지현(之賢)의 아들 장순익(張順翼)이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단양군(丹陽君)에 봉(封)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삼게 되었고, 후단양(後丹陽)으로 불리는 둘째 계통(系統)은 태사공(太師公) 정필(貞弼)의 14세손(世孫)으로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에 봉(封)해졌던 장 사(張 사)의 둘째 아들 장갑용(張甲用)과 셋째 장무용(張戊用)을 관조(貫祖)로 하는 계통(系統)이다.
각(各) 계통별(系統別)로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代表的)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단양군(丹陽君) 순익(順翼)의 아들 재일(載鎰)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상장군(上將軍)을 역임(歷任)했고, 그의 아들 한문(漢文)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歷任)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조선조(朝鮮朝)에서 황해감사(黃海監司)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歷任)했던 중란(仲蘭)의 아들 윤화(允和)는 정용낭장(精勇郎將)으로 한양환도(漢陽還都)에 공(功)을 세워 단산군(丹山君)에 봉해졌으며, 태종(太宗)과 동갑계원(同甲契員)으로 친분(親分)이 두터웠다. 그의 아들 지(祉)는 강원 감사(江原監司)를 지내고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며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장충범(張忠範)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원년인 1592년(선조 25)에 충주에서 왜군과 싸우다 부상하여 향리인 삼생리로 피신했다. 1597년에 의병을 일으켜 생극면 생리 구지테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1605년(선조 38)에 전지로 복권이 하사되고 1857년(철종 8)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의 충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윤덕(胤德)이 의병(義兵)을 규합(糾合)하여 영주(榮州)·풍기(豊基) 등지(等地)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던 중(中) 부상(負傷)하여 체포(逮捕)된 뒤에도 계속 항거(抗拒)하다가 총살(銃殺)당했다.
후단양(後丹陽) 계통(系統)에서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 초기(初期)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歷任)한 덕랑(德郞)과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던 계증(繼曾)이 유명(有名)했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웠던 온(溫)은 정국3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단양군(丹陽君)에 봉(封)해져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강(綱), 공조참판(工曹參判) 석규(錫奎),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준(準) 등(等)과 함께 단양 장씨(丹陽 張氏)를 빛냈다.
* 장온(張溫) : 아버지는 교동현감(喬桐縣監) 장계손(張季孫)이다. 1470년(성종 1)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注簿)가 되었다. 이후 오위도총부도사 겸 내금위장(五衛都摠府都事兼內禁衛將)을 역임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올랐고 이어 단양군(丹陽君)으로 봉해졌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옹원판관(行司饔院判官), 호조참판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여주군 홍천면 신근 2리에 있고, 사당과 신도비도 함께 있다. 아들 장국정(張國禎)은 1528년(중종 23)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25위로 합격하였다.
* 장충범(張忠範, ? ∼ 1597년)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단양(丹陽). 장언구의 아들로, 음보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忠州)에서 적과 싸우다 부상당하고 향리(鄕里)인 삼생리에 와서 치료하였다. 그 후 1597년(선조 30)에 창의현 생극면 생리 구진터에서 왜병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 공으로 1605년(선조 38)에 임금의 명으로 공신임을 인정하는 문서가 하사되고, 1857년(철종 8)에 증이조참판선무원종군(贈吏曹參判宣武原從軍)의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졌다. 또 1971년 생극면 생리에 임난공신장충범장군기념비(壬亂功臣張忠範將軍記念碑)가 건립되었다.
* 장호리(張浩利, 1895년 ~ 1971년) : 독립운동가
* 장우성(張遇聖, 1912년 ~ 2005년) : 현대 화가
* 장광근 (張光根, 1954년 ~ 2023년) : 국회의원
* 장옥주 (張玉珠, 1959년 ~ ) : 제5대 보건복지부 차관
* 장현성 (張鉉誠, 1970년 ~ ) : 배우
* 장지현(한자 불명, 1973년 ~ ) : 축구 해설가
* 장현진 (張玄塡, 1976년 ~ ) : 카레이서
* 장하나(張하나, 1977년 ~ ) : 국회의원
* 장나라(張나라, 1981년 ~ ): 가수, 배우
* 장진호(張津豪, 2000년 ~ ) : 진리를 찾는 사람
4. 계파 및 분파
- 단양백파(丹陽伯派)
- 청계공파(淸溪公派)
- 사헌공파(司憲公派)
- 정헌공파(正憲公派)
- 판서공파(判書公派)
- 호부공파(戶部公派)
- 제학공파(堤學公派)
5. 과거급제자
단양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고려 문과
장덕량(張德良) 장자숭(張子崇) 장한문(張漢文)
문과
장강(張綱) 장규홍(張逵鴻) 장우추(張宇樞) 장익(張翼) 장적(張籍) 장형운(張亨運) 장흡(張洽)
무과
장경(張景) 장계손(張季孫) 장계재(張繼載) 장덕문(張德文) 장도웅(張道雄) 장득신(張得信) 장만상(張萬翔) 장만핵(張萬翮) 장성철(張性喆) 장세만(張世萬) 장시원(張時元) 장애운(張愛雲) 장언량(張彦良) 장영수(張永水) 장영재(張永載) 장용한(張龍翰) 장우진(張友軫) 장웅건(張雄建) 장응룡(張應龍) 장응삼(張應三) 장의원(張義元) 장인원(張仁元) 장진급(張振及) 장진익(張鎭翼) 장진충(張振翀) 장천강(張天江) 장충국(張忠國) 장치한(張致漢) 장하룡(張河龍) 장한근(張漢根) 장한제(張漢濟)
생원시
장규정(張奎井) 장기중(張基中) 장달근(張達根) 장석구(張錫耉) 장세균(張世鈞) 장용(張墉) 장윤재(張胤載) 장응두(張應斗) 장지순(張志淳) 장진(張溍) 장칙(張侙) 장학룡(張學龍) 장한봉(張漢鳳) 장흡(張洽)
진사시
장국정(張國禎) 장석오(張錫午) 장수철(張壽鐵) 장승봉(張昇鳳) 장언구(張彦玖) 장옥(張鋈) 장용오(張容五) 장우한(張祐漢) 장윤(張綸) 장적(張籍) 장지묵(張志默) 장치상(張致祥) 장칙(張侙) 장회근(張會根) 장효영(張孝永) 장후보(張後輔) 장흡(張洽)
율과
장세창(張世昌) 장수철(張守哲)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6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6. 주요 세거지
단양 장씨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 일원에 70여 호가 세거하고 있다.시조 장정필의 20세손 진사(進士) 장언구(張彦玖)가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로 와 세거하였다.
음성에 세거하는 단양장씨 가운데 임진왜란 때의 충신 장충범(張忠範)이 유명하다.
장충범은 1592년(선조 25)에 충주에서 왜군과 싸우다 부상하여 향리인 삼생리로 피신했다. 1597년에 의병을 일으켜 생극면 생리 구지테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1605년(선조 38)에 전지로 복권이 하사되고 1857년(철종 8)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의 충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장충범의 묘가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 있고 정려는 음성읍 삼생리에 있으며, 1886년(고종 26)에 내린 효자 장석영(張錫永)의 정려가 음성읍 삼생리에 있다.
그 외
충북 단양군 일원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
경북 의성군 단북면 연제리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초원리
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
경북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등이다.
[1]
선단양시조
[2]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 단양군(丹陽君)
[3]
후단양시조
[4]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에 봉해졌던 결성 장씨 장사(張楒)의 둘째 아들, 셋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