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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총련 열차 강제 정차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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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1992년 5월 29일2.2. 1994년 6월 17일2.3. 1994년 6월 24일2.4. 1997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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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대협- 한총련 산하 전남 지역 학생회 연합체 남총련 학생들이 운행 중인 열차를 강제로 정차시켜서 서울에 올라온 사건.

유사한 사건이 한 번 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벌어졌다.

2. 상세

2.1. 1992년 5월 29일

MBC 뉴스 영상(1992. 5. 30.)
열차강제 정차사건, `南總聯'이 주도

2.2. 1994년 6월 17일

한총련과 함께 ' UR 국회비준저지를 위한 범국민대회' 참석을 위해 상경하려던 남총련 단원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한다는 구실로 23시 경 송정리역에서 500여m 떨어진 위치에서 열차를 강제로 세운 뒤, 무단으로 탑승[1], 서울로 진입했다.

새벽 4시에 영등포역에 도착한 이들은 하차하여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고, 5시 경 2호선 신촌역에 도착하여 경찰과 대치했다. 6시 경 홍익대학교 앞까지 진출한 이들은 40여 명의 경찰관을 납치하여 홍대 안으로 피신했고[2], 경찰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며 대치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한 후 일부 학생은 인근 서강대 관악산 방면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또 이들과는 별도의 멤버가 전날 밤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건국대 서울대 등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MBC 뉴스 영상(1994. 6. 19.)

2.3. 1994년 6월 24일

MBC 뉴스 영상(1994. 6. 24.)

2.4. 1997년 5월 30일

한양대학교에서 열리려던 한총련 제5기 출범식에 참여하려고 남총련 단원 약 2천여 명이 역시 열차를 세우거나 무임승차하고 서울시내로 올라온 사건. 그러나 출범식 자체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열리지 못했다.
MBC 뉴스 영상(1997. 5. 30.)[3]

이날 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연합(남총련) 소속 대학생 8백여명이 30일 한양대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에 참가하기 위해 달리는 열차를 강제로 세워 탑숭하는 바람에 열차운행이 지연되는 소동이 빚어졌다.

이날 하오 2시15분쯤 남총련 소속 대학생 50여명은 목포발 서울행 무궁화호 열차 244호가 함평군 학교면 함평농공단지 앞을 지날 무렵 갑자기 선로에 뛰어들어 달리는 열차를 강제로 세운 뒤 탑승했다.35분 뒤 이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자 또 다른 학생 3백50여명이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기차에 올라 이들과 합류했다.

이에 앞서 하오 1시40분쯤 무안군 일로역에서 대학생 1백50여명이 이 열차가 역내에 도착하자 제지하는 경찰에 화염병을 던지며 무임 승차했다.이어 하오 3시48분쯤 이 열차가 전북 신태인역에 진입하자 버스편으로 역에 미리 와 있던 대학생 2백50여명이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화염병 70여개를 던지며 시위를 벌이다 정차해 있던 열차에 올랐다.

이들 대학생은하오7시40분 영등포역에 도착,1m 높이의 철책을 넘어 전철선로를 건너가는 바람에 양방향 전동차 운행이 5분동안 중단되는 소동을 빚었다.

부산·경남지역 대학생 500여명도 하오 7시35분 영등포역에 도착,전철을 타고 한양대 등으로 진입했다.

학생들의 열차 강제정차는 94년 6월 남총련소속 대학생들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반대 집회에 참석키 위해 송정리역 근처에서 통일호를 정차시켜 탑승,상경한 이후 처음이다.[4]

이들이 광주역 송정리역이 경찰에 의해 차단되자 인원을 분산시켜 목포발 서울행 열차가 정차하는 역들 중 비교적 경비가 허술하고 한산한 중간역을 골라, 5월 30일 목포발 서울역행[5]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하는 무안군 일로역, 함평군 학교역(지금의 함평역), 나주시 고막원역, 심지어 일부는 도계를 넘어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신태인역으로 이동하여 역무원들의 제지를 뚫고 열차에 탑승했다.

남총련 인원 상당수가 고막원역에서 체포되기도 했으나, 이런 제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서울행 열차에 탑승한 이들은 열차를 점거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대전역, 천안역, 수원역 등의 중간 정차역은 무정차로 통과하거나 다른 승객들을 강제로 하차시키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6]

열차가 구로역을 지나 신도림역에 이르자, 이들은 열차를 강제로 정차시켜 일제히 하차하였다. 그리고 경찰의 제지를 피해 2호선으로 무단탑승하거나 신도림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시내로 도주했는데, 이 과정에서 무임승차까지 저질렀다. 게다가 이 일이 벌어진 시간이 하필이면 퇴근 시간대라서 신도림역 일대가 큰 혼잡을 빚었다.[7]

이 일로 인해 서울시내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들을 해산시키는데 1주일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8] 당시 경찰은 한총련 출범식에 참석하려던 남총련 대학생들이 열차를 강제로 점거한 것은 지도부의 치밀한 사전모의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열차 강제점거 용의자 7백여명 가운데 121명을 붙잡아 92명을 구속했다. 검찰은 또 신원이 확인된 180여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서는 한편, 아직 신원이 파악되고 있지않은 학생들도 끝까지 추적해 처벌한다고 밝혔다.[9]

그 당시 정세도 이들의 준동을 일으키는데 기름을 붙였는데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신한국당 의원들과 꼬리곰탕 만찬을 하며 신한국당 이회창대표의 사퇴문제를 놓고 1시간 10분동안 신한국당 의원들과 신경전이나 벌이고 있었다.[10]


[1] 남총련 측은 나중에 제대로 운임을 지불했다고 주장했다. [2] 남총련 측은 붙잡힌 학생들과 교환하기 위한 인질이라고 밝혔다. [3] 1997.6.10 KBS 뉴스 영상 [4] 남총련 1천여명 열차 강제정차/무안·함평·나주·신태인서 1997.5.31 서울신문 [5] 당시에는 호남선 열차도 서울역에서 시종착을 하였다. [6] 이에 대해 남총련 측은 "자신들은 전부 기차요금을 지불했고, 다른 승객들이 대신 기차요금을 내주는 경우도 많았으며, 철도청 직원들과 시민들이 동조해서 자신들을 안전하게 서울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주장했다. [7] 1997.6.10 KBS 뉴스 영상 [8] 1997.6.10 KBS 뉴스 영상 [9] 1997.6.10 KBS 뉴스 영상 [10] 심판없는 난타전 청와대 70분 경향신문 1997.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