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12:58:52

김택수(탁구)

<colbgcolor=#131230><colcolor=#eee156> 김택수
金擇洙|Kim Taek-soo
파일:김택수 미래에셋증권 탁구단 프로필 사진.png
출생 1970년 5월 25일 ([age(1970-05-25)]세)
전라남도 광산군 본량면 양산리 양곡마을
(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양산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광산 김씨 (光山 金氏)[1]
학력 광주서석초등학교 (졸업)
광주무진중학교 (졸업)
광주숭일고등학교 (졸업)
경원대학교 (체육학 / 학사)
신체 175cm, 72kg
직업 탁구 선수 (오른손 펜홀더 드라이브 / 은퇴)
탁구 감독
기업인
소속 대우증권 탁구단 (?~2001)
KGC인삼공사 탁구단 (2001~?)
김택수 탁구클럽&아카데미 이사장 (?~ )
미래에셋증권 탁구단 감독 (2007.05.~ )[2]
가족 배우자 김조순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이후5.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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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탁구 선수 출신 감독.

2. 선수 경력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1988 서울 올림픽 유남규에 이어 한국의 단식 금메달을 기대했으나, 당시 세계를 씹어먹던 탁구계의 영원한 전설 얀오베 발드네르에게 패해 아쉽게도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이때 발트너 선수는 금메달을 따기까지 단 한 세트만 패배하는 괴력을 보였다.[3] 김택수는 이후에도 최고의 펜홀더 중 한 명으로서 오랜 기간 동안 세계 최상위권의 기량을 유지했다. 김완, 김기택, 유남규, 유승민 과 함께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메달리스트로써 한국 탁구계의 역대 최강자 중 한명으로 불리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4] 올림픽 우승도 한 류궈량 감독의 선수 시절에 자주 맞붙었으며, 로빙 방어에서 역습으로 드라이브를 꽂아넣는 영상이 유명하다. 특히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단식 결승전에서 류궈량과 벌인 32구 랠리는 전설로 남아있다.[5]

이후 중국식 펜홀더의 이면타법이 점점 완성되고 마린 등의 사기급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밀리게 된 후 2004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6] 그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코칭한 유승민 선수는 천적인 왕하오를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이후에도 세계구급에선 점차 보기 드물게 된 일본식 펜홀더 전형의 마지막 주자가 되었다. 유승민 선수 이후 일본식 펜홀더는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던 이정우 선수가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현재는 국제대회에서 보기가 어려워졌다.

3. 플레이 스타일

빠른 풋워크와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 스매시 등 일본식 펜홀더로서의 강점 뿐만 아니라, 전형상 고질적 약점인 백핸드마저 상당히 안정적인 백핸드 드라이브와 빠른 쇼트로 커버했을 정도로 많은 강점을 보유했던 선수였다. 오히려 안정감 면에서는 유승민보다 한 수 위였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유승민 선수라고 백핸드 방어와 역습이 없지 않았고, 그 역시 미라클 워커라고 불릴 만큼 인상적인 풋워크를 보였으나, 백핸드의 완성도와 전체적인 테크닉은 김택수가 한 수 위였다. 다만 기술적으로 뛰어났던 김택수와 달리 유승민은 당대 최고 수준의 파워를 보유했다.[7] 중국의 위키에서도 김택수의 기술의 완성도를 칭찬하며 그가 천하제일펜홀더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갖고 있다고 평했고, 유승민 선수의 문서에선 '그의 보법(풋워크)은 김택수와 비할 바는 아니나'라는 언급이 있다. 유승민처럼 올림픽 단식 금메달 같은 킬러 타이틀은 보유하지 못했으나[8] 10년을 롱런하며 최정상급에서 꾸준히 인상적인 활약을 보인 그에 대한 시선이 우호적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4. 은퇴 이후

  • 은퇴 이후 김택수의 가장 큰 공은 유승민을 지도해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단식 금메달을 일구어냈다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올림픽 개막을 몇 달 앞두고, 당시 탁구대표팀 선수단 구성의 문제로 코치진과 선수들 사이에 마찰이 생겨 결국 선수단 중 일부가 선수촌 입촌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국가대표 선발전 1위로 가장 먼저 대표팀에 선발되었던 김택수는 돌연 태극 마크를 반납했다. 선발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본인이 중국 대표팀 선수들을 이기기는 힘들 것 같으며 메달권 진입 가능성이 더 큰 후배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 본인이 직접 밝힌 이유이다. 직후 코치로 보직을 변경해 유승민을 전담 지도했으며, 왕하오를 결승에서 만날 것임을 미리 예측하고 최적의 전략[9]을 구상했다. 이때 실업팀 선수들 중 이면타법을 구사했던 이정삼을 선수촌으로 불러와 유승민의 전담 파트너로 붙여 하루에 평균 10000개의 볼을 치게 했으며, 김택수 본인도 이면타법을 연구하다 손목 인대가 늘어나는[10]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 올림픽이 열리자 스웨덴의 노장 얀오베 발드네르가 유승민의 또 다른 천적이였던 마린과 티모볼을 각각 16강과 8강에서 잡아주고 올라와 준결승에서 유승민에게 패하는 등 금메달까지의 여정에서 유승민은 중국 선수를 결승에서 만난 왕하오 단 한 명만 상대하는 천운도 따랐고,[11] 결승에서 드디어 마주친 왕하오에게 김택수가 구상한 전략을 유승민은 번개와 같은 풋워크를 이용해 충실히 수행했다. 실제로 김택수의 예상은 적중해, 유승민의 백사이드를 집요하게 공략하려는 왕하오의 이면드라이브를 백푸쉬 하나만으로 무력화시켰으며 힘과 힘의 맞대결인 포핸드 맞드라이브 싸움에서 왕하오는 유승민을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결과는 금메달. 성인 무대에서 0승 6패로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었던 왕하오를 처음으로 꺾었다. 또한 유승민은 같은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굳이 김택수를 졸라 김택수의 라켓을 빼앗아 들고 올림픽 경기에 임했다. 대단한 실력자였음에도 올림픽 금메달이 없었던 스승의 천추의 한을 제자가 풀어준 셈이다. 실로 대단한 사제관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 현재는 미래에셋대우의 감독을 맡고 있으며,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마룽, 장지커 등 현 세계 최강 랭킹 선수들을 상대로 인상적인 경기로 분전한 정영식 선수를 길러냈다. 정영식은 리우올림픽에서 마룽을 맞아 초반 2세트를 선취해 마룽을 패배 직전까지 몰았으며, 비록 역전당해 패배했으나 이때의 경기력으로 중국 탁구 코치진들에게 인정받아 중국 슈퍼리그로 임대를 떠나기도 했다.
  • 2017년 8월, 본인의 이름을 내건 김택수 탁구클럽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에 오픈하였다. 생활체육 동호인들 위주로 운영되는 타 탁구장들과 다르게 유소년 선수반도 같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탁구단 감독으로 재직 중이기 때문에 김택수가 직접 탁구장을 운영하거나 정기레슨을 진행하지는 않지만, 유튜브에 탁구장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원포인트 레슨 영상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동메달 1992 바르셀로나 남자 복식
동메달 1992 바르셀로나 단식
세계선수권
동메달 1991 지바 단식
동메달 1993 예테보리 남자 복식
동메달 1995 톈진 단체전
동메달 1997 맨체스터 단체전
동메달 1999 아인트호벤 남자 복식
동메달 2001 오사카 단체전
동메달 2001 오사카 남자 복식
동메달 2003 파리 남자 복식
동메달 2004 도하 단체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0 베이징 단체전
금메달 1998 방콕 단식
은메달 1994 히로시마 남자 복식
은메달 1998 방콕 단체전
은메달 2002 부산 단체전
은메달 2002 부산 남자 복식
동메달 1994 히로시마 단식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96 칼랑 단체전
은메달 1990 쿠알라룸푸르 혼합 복식
은메달 1996 칼라 남자 복식
은메달 1998 오사카 단체전
은메달 2000 도하 단체전
은메달 2000 도하 혼합 복식
동메달 1990 쿠알라룸푸르 단식
동메달 1996 칼랑 혼합 복식
동메달 1996 칼랑 단식
동메달 1998 오사카 남자 복식
월드컵(단식)
은메달 1998 산터우 단식
동메달 1992 호치민 단식
월드컵(복식)
금메달 1990 서울 남자 복식
금메달 1992 라스베가스 남자 복식
월드컵(단체전)
금메달 1995 애틀랜타 단체전
주니어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86 나고야 단체전
금메달 1986 나고야 남자 복식
은메달 1987 케디리 단체전
동메달 1987 케디리 남자 복식
동메달 1987 케디리 단식


[1] 36대손인데 다른 광산 김씨들에 비해 항렬이 높다. [2] 기사 [3] 당시 발트너는 중국의 1, 2인자 마웬거, 왕타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탁구 황제였다. 참고로 김택수는 발트너와의 경기를 하루 앞두고 극심한 정도의 담에 시달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4] 전술한 올스타 서킷에서 중국의 1, 2인자 마웬거, 왕타오, 류궈량, 쿵링후이를 개밟듯이 밟아줬고, 발트너, 페르손, 가티엥, 세이브 등 당시 유럽 최강의 선수들도 올스타 서킷에서는 김택수에게 대부분 패한 바 있다. [5] 사실상 김택수 최대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4강전에서는 당시 세계 랭킹 3위였던 쿵링후이를 이기며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에선 당시 세계 랭킹 2위였던 류궈량을 이기며 우승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인 유남규와 더불어 유이한 아시안게임 단식 금메달 리스트이다. [6]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했지만 국가대표를 반납하였다. [7] 둘 모두가 선수였던 시절 상대전적은 5승 2패로 김택수의 우위. [8] 이는 김택수의 컨디션 문제이기도 한데, 김택수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항상 무릎, 담석등의 고통에 시달렸고 체력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 되었기 때문에 정상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만 김택수는 1992년~1996년에 있었던 올스타 서킷대회에서 진가를 발휘했는데, 이는 올스타 서킷이 최대 3경기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택수는 전체 대회에서 1/4을 우승으로 장식하였다. [9] 왕하오는 이면드라이브로 유승민의 백사이드를 집중 공략할 것이므로 이는 백핸드 푸쉬로 대응하고, 쇼트와 푸쉬를 제외한 다른 백핸드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대신 포핸드 파워드라이브의 공격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 어떻게 보면 가장 펜홀더 전형 탁구의 기본에 충실한 전략이기도 하다. [10] 본래 펜홀더 라켓은 손가락 3개만을 이용하여 잡기 때문에 굉장히 가벼운데, 이면타법을 구사하려면 백사이드에 러버를 하나 더 붙여야 하므로 라켓 무게가 1.5배 가량 늘어난다. 즉, 손목에 무리가 굉장히 많이 가는 타법이다. [11] 준결승에서 발트너를 잡은 뒤 유승민은 김택수에게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이거 결승에서 무조건 이깁니다. 정말 무조건 제가 이길 게임입니다. 근거도 없이 본인이 금메달을 딸 것임을 확신하는 이 발언을 들은 뒤 김택수는 이미 유승민의 기세가 최고조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