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1:42:18

김진호(군인)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

{{{#!wiki style="margin: 0"
파일:general_white.png
||<-4><tablewidth=100%><bgcolor=#254170>
이승만 정부
||<bgcolor=#000080>
장면 내각
||
초대

이형근
제2대

정일권
제3대

유재흥
제4대

백선엽
제5대

최영희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0080> ||<bgcolor=#000000> ||<-3><bgcolor=#835B38> ||
제6대

김종오
제7대

김종오
제8대

김종오
제9대

장창국
제10대

임충식

||<-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835B38> ||
제11대

문형태
제12대

심흥선
제13대

한신
제14대

노재현
제15대

김종환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808080> ||<-4><bgcolor=#004c97> ||
제16대

류병현
제17대

윤성민
제18대

김윤호
제19대

이기백
제20대

정진권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4c97> ||<-2><bgcolor=#0A84E9> ||<bgcolor=#003990> ||
제21대

오자복
제22대

최세창
제23대

정호근
제24대

이필섭
제25대

이양호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3990> ||<-3><bgcolor=#00aa7f> ||
제26대

김동진
제27대

윤용남
제28대

김진호
제29대

조영길
제30대

이남신

||<-3><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ffd918> ||<-2><bgcolor=#008cd7> ||
제31대

김종환
제32대

이상희
제33대

김관진
제34대

김태영
제35대

이상의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8cd7> ||<-2><bgcolor=#c01920> ||<bgcolor=#004ea2> ||
제36대

한민구
제37대

정승조
제38대

최윤희
제39대

이순진
제40대

정경두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04ea2> ||<-2><bgcolor=#e61e2b> ||<|2><-3> ||
제41대

박한기
제42대

원인철
제43대

김승겸
제44대

김명수
}}}
{{{-2 {{{#!wiki style="margin: -0px -1px; margin-top: -3px; display: block; background: #801a24; padding: 5px"}}}
※ 초대~현재: 대장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222268><tablebgcolor=#222268> 파일:대한민국재향군인회 심볼.svg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역대 회장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백홍석
제2대
박승훈
제3-4대
신태영
제5대
김일환
제6대
이선근
제7대
이대영
제8대
이형근
제9대
김홍일
제10대
김성은
제11-12대
이성호
제13-17대
김일환
제18-21대
이맹기
제22대
김종환
제23대
백석주
제24대
최경록
제25-26대
소준열
제27-28대
장태완
제29-30대
이상훈
제31-32대
박세직
제33-34대
박세환
제35대
조남풍
제36대
김진호
제37대
신상태
}}}}}}}}}

{{{#!wiki style="margin: -7px -10px"
{{{#!wiki style="margin:-6px 0px; display:inline-table"
<tablebordercolor=#2e3192><tablebgcolor=#2e3192> }}}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 <tablebordercolor=#2e3192><tablebgcolor=#2e3192>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181818,#e5e5e5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대장.svg
초대
강문봉
2대
최영희
3대
장도영
4대
최경록
5대
민기식
6대
장창국
7대
김용배
8대
박경원
9대
정래혁
10대
문형태
11대
한신
12대
채명신
13대
박원근
14대
이병형
15대
박희동
16대
김종수
17대
진종채
18대
차규헌
19대
이기백
20대
김홍한
21대
오자복
22대
이종구
23대
민경배
24대
이필섭
25대
김연각
26대
김진선
27대
박세환
28대
조성태
29대
김진호
30대
조영길
31대
김인종
32대
홍순호
33대
양우천
34대
권영기
35대
박영하
36대
조재토
37대
이철휘
38대
조정환
39대
김요환
40대
이순진
41대
박찬주
42대
박한기
43대
황인권
44대
김정수
45대
신희현
46대
고창준
명칭 변천: 제2군사령관(초대~35대) ▸ 제2작전사령관(35대~현재)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wiki style="margin: -7px -10px"
{{{#!wiki style="margin:-6px 0px; display:inline-table"
<tablebordercolor=#009944> }}}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 <tablebordercolor=#009944>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81818,#e5e5e5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초대
함덕선
2대
김연각
3대
장병용
4대
함덕선
5대
김진호
6대
박용득
7대
노연웅
8대
박준근
9대
홍갑식
10대
박영하
11대
방효복
12대
황의돈
→ 부대 해체
관련 직위 둘러보기 }}}}}}}}}}}}}}}
대한민국 제28대 합동참모의장
김진호
金辰浩 | Kim Jinho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2011031j0397_P2.jpg
<colbgcolor=#801a24><colcolor=#ffffff> 출생 1941년 11월 13일
경기도 경성부 전농정
사망 2022년 9월 30일 (향년 80세)
학력 전농초등학교 (졸업)
배재중학교 (졸업)
배재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학 / 학사)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부동산금융CRO과정[1] / 수료)
경력 한국토지공사 사장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
새천년민주당 안보위원장
군사 경력
임관 학군사관 (2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4년 ~ 1999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합동참모의장
주요 보직 제37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제11군단장
제2야전군사령관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군인 초기2.3. 장군으로2.4. 합참의장 시절2.5. 전역 이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군인으로 최종계급은 대장, 최종보직은 합동참모의장이다. 2017년 8월부터 2022년 초까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냈다.

학군사관후보생(ROTC 2기) 최초로 대한민국 국군 서열 1위인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합참의장 시절인 1999년 조성태 당시 국방장관과 함께 제1연평해전 승리에 공헌했다.

퇴역 후인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맡아 개성공단 사업을 주도하며 남측을 향한 북한군의 배치를 후퇴시키는 군사적 이익을 창출했다.

2. 생애

2.1. 초기

1941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전농동에서 김삼봉과 심학실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울 전농동에서 살아온, 평범한 집안이었고, 비교적 유복한 가문이었으나, 1950년에 6.25를 맞이하여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 당시 작은 형님이 국군을 죽이는 인민군이 싫다며 따발총의 실탄을 빼서 땅에 파묻어버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54년에 전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시절에 공부를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했다. 한때는 가출을 한 적도 있었고, 고교 시절에는 우열반을 나눠서 편성했는데, 열반에 배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암기과목 위주로 노력했다. 잠을 쫓는 약인 ‘카페나’라는 각성제까지 먹어가며 새벽 2시, 3시까지 공부하였다. 그 덕분에 1960년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진학했다. 사학과에 진학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역사교사였던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렇게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후 럭비선수로 크게 활약했다. 그리고 과대표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낙마하였다.

2.2. 군인 초기

그 후 리더십과 순발력을 배우기 위해 ROTC에 지원하여 1964년에 2기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강원도 양구군 제2보병사단 31보병연대의 어느 소대였다. 소대장의 임무를 다 하면서도 군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다. 징계를 면하기 위해 권투 선수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의무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할 무렵에 당시 지휘관에게 "네가 제대하면 선수로 출전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전역명령을 취소시키며 그냥 군에 눌러 앉아 버렸다. 처음에는 대령까지 진급하는 게 목표였다.

그 뒤 1968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군사장교로 참전하였다. 베트남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부친이 별세했지만, 모든 가족이 ‘흔들림 없이 군대에서 성실히 복무하라’는 의미에서 이를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드리려고 서울로 보냈던 라이터를 보며 통곡했다.

소령 시절에 장세동과 같이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했고, 이후 제5보병사단 제35보병연대 대대장[2] 수경사 제30경비단 부단장[3]을 거쳐, 자신의 목표였던 대령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대령에 진급하고도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다.[4] 당시 특전사 제3공수특전여단 부여단장이었다. 이것이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견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벽 일찍부터 장세동 대통령경호실장에게 직접 전화로 따졌다.[5] 하나회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전방 지오피( GOP) 담당인 제3보병사단 22연대장으로 발령을 받고 지오피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는 내무반 사고를 없애기 위해 전방 근무자를 세심하게 가려서 뽑는 한편 병영부조리 척결 및 선진병영문화에 온 힘을 쏟았다. 관련 기사 이후 국방부 인사과장과 제51보병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했다.

2.3. 장군으로

그 뒤 비육사 출신으로 받을 수 있는 좋은 보직을 받으며 계속 승승장구했다. 준장으로 진급한 뒤 육군3사관학교 참모장을 지냈고,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제37보병사단장의 자리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1991년에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6]으로 승진했고, 1993년에는 중장 진급과 함께 제11군단장을 역임했다.[7] 1996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제2야전군사령관[8]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98년 3월에는 제28대 합동참모본부 의장 겸 통합방위본부 본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학군 출신으로는 전례 없는 승진이었다. 학군 1기인 박세환이 4성 장군으로 제2야전군사령관까지 올랐지만, 합참의장은 김진호가 처음이었다.

배재고등학교에서 배출한 4명의 4성 장군 중 한 명이다. 나머지 3명 중 육군대장은 2명으로 김계원 전 육군참모총장[9](육사 2기)과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 및 전 국정원장(육사 25기)이 있다. 다른 1명으로는 현 공군참모총장인 정상화 공군대장(공사 36기)이 있다.

2.4. 합참의장 시절

합참의장으로 재임하면서 동해안 잠수정 침투, 여수 반잠수정 격침, 제1차 연평해전 등 다수의 북한 군사도발에 맞섰다. 그때 유난히도 북한 측의 공세가 더 거셌던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 정책을 시험하고,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북한이 화전양면전술을 썼기 때문이었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90166-00_01160516.jpg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당시, 존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과의 회동 모습

다행히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에 우리 상하급부대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1999년 제1연평해전을 압승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김진호는 북한 경비정의 NLL 도발 시 교전규칙에 따라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10]

2.5. 전역 이후

1999년 10월에 명예로운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지냈다.

2003년 4월 30일 개성공단 착공식을 한 뒤 북측에서 당초 80억원에 약속한 50년치 임차료를 갑자기 1200억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근거도 없는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 분양가가 3.3㎡당 10만원에서 40만원으로 급증, 조성 계획에 큰 차질이 발생할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통일부는 북한과의 다른 사업까지 막혔다며 모든 책임을 미뤘고, 김진호는 계약내용을 바꿀 수 없다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1200억원이 무슨 큰돈이냐. 군 출신의 고집”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김진호 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 김진호는 리언 J 러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을 만나 개성공단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훌륭한 사업”이란 평가를 받아 미국 측 협조를 이끌어낸 뒤 북한과 협상하여 보상비 120억원에 출입국관리사무소 건축비 40억원 등 160억 원으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2017년 8월 재향군인회장에 선출되어 2022년 초까지 재임후 퇴임하였으며, 2022년 9월 30일 별세했다. 생전 마지막 인터뷰

* 학군 출신의 동명의 후배 장군 김진호(학군31기)가 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6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6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

[1] 최고위과정 [2] 노태우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손위 처남이자 당시 5사단장이었던 김복동에게 ‘아끼는 부하이니 잘 돌봐달라’는 손 편지까지 써주었다고 한다. [3] 이 당시 30경비단장이 바로 장세동이었다.고려대 동기인 박상범 경호관을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했다. [4] 물론 이 당시만 해도 연대장은 대령 2~3차 보직이었다. 하지만 부지휘관을 두 번 연속으로 보낸 것은 충분히 좌천성 승진에 가깝다. [5] 소령에서 대령까지 그와 세차례 같이 근무한 장세동은 그 즉시 하나회 핵심 관계자에게 “차라리 김진호를 전역시켜 버려라”고 강경한 어조로 항의했고, 그 덕분에 인사 불이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 육본 소장 보직 중 요직으로 많은 중장, 대장들이 이 보직을 거쳐갔다. [7] 당시 하나회 숙청으로 인해 중장 자리가 많이 비던 상황이었다. [8] 주로 비육사 출신 대장에게 돌아가는 T/O다. [9]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들을 거쳤는데 참모총장 끝나고 중앙정보부장, 다시 주 대만 대사를 거쳐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다만 마지막에 10.26 사건이 터지면서 더 이상의 공직을 맡을 수 없었다. [10] 그 후 김진호는 자서전에서 제1차 연평해전 당시 북측 피해 규모에 대해 "우리의 통신정보기관에서 북한의 교신 내용을 파악한 바로는 1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종전에는 북한군 사상자가 수십명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