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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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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성숙
金成淑[1]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다.]
파일:김성숙(1896).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회을(悔乙)
본관 경주 김씨[2]
출생 1896년 6월 4일[3]
제주부 대정군 우면 가파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59번지[4])
사망 1979년 12월 18일 (83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376-27번지 자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26호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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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전 정치인이다.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6년 6월 4일 제주부 대정군 우면 가파리(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59번지)에서 김용석(金龍錫)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가파리 96번지[5]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12세 되던 1908년까지 한문을 수학하다가 19세 때 상경해 경성고등보통학교(現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일어나자 당일 밤과 이튿날인 3월 2일, 이틀에 걸쳐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했으며, 스스로도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3월 5일 체포되었다. 그해 3월 17일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관련 학생들의 평소 성품과 행실을 조사한 '학생성행조사서'에서는 김성숙에 대해 '평소부터 반항적 기질이 있고, 때때로 교관에게 반항하는 태도를 나타내어 훈계당한 일이 있다. 말을 할 때에도 격렬한 말버릇과 건방진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기숙사에서도 3월 1일 밤과 2일에 기숙사생을 선동하여 퇴사하도록 권유한 형적이 역력하다.'라고 설명해 김성숙의 민족의식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강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고 곧 방면되었다. 그러나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고,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감시받는 처지가 되자 1920년 고향 가파도로 돌아왔다. 이후 1922년 4월 2일 고향 가파도에 가파신유의숙(加波辛酉義塾, 現 가파초등학교)[6]을 설립해 초대 숙장(塾長)을 역임하고 교사로서 2년간 근무했다. 또한 1924년 대정공립보통학교의 부설학교를 대정면 하모리 모슬포항에 설립하는 등 문맹퇴치 및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이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니혼대학 예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과에 입학했으며, 1926년 7월 조선 민중의 구제를 목표로 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와세다대학 졸업 후 귀국해 1929년 신간회에 가입해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협동조합운동사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해 협동조합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1930년 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조하는 학생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구금된 바 있으며, 석방된 뒤 1931년 7월에 중화민국에서 발생한 만보산 사건과 관련해 이 사건을 널리 알리고 일제를 규탄하고자 격문을 작성해 배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8일간 구금된 뒤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협동조합운동사 활동의 실천방향에 대해 고심하면서 신문 및 잡지에 다수의 글을 게재했다. 이후 협동조합경리사 이사장을 역임했다.

1947년 민족자주연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해 중앙정치위원 겸 중앙조직국장을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족자주연맹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강경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진보당 창당에 참여했다. 1958년 진보당이 해산되자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친여 무소속 현오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에는 한국사회당 창당에 준비위원회 총무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사회당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현오봉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7] 1961년 통일사회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그해 1월 26일 동료 의원들과 함께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민의원에 제출했다. 이때 김성숙은 제주 4.3 사건 및 6.25 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적어도 4만에서 5만명의 양민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후 구속, 정당은 해체되었다.

1965년 7월에는 통일사회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였고, 무산되자 이듬해 5월 9일 민주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967년 대중당과 합세하여 그해 시행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중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신민당 서범석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79년 12월 18일 새벽 1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376-27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83년에 건국공로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06년 10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고향에 소재한 가파초등학교 앞에는 회을공원과 그의 동상이 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제주 남제주군)
[[민족자주연맹|
민족자주연맹
]]
2,603표 (7.47%) 낙선 (8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제주 남제주군)

[[무소속(정치)|
무소속
]]
10,203표 (25.12%)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제주 남제주군)
[[한국사회당(1960년)|]]
13,114표 (31.57%) 당선 (1위) 초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구 을)

1,430표 (1.45%) 낙선 (4위)

4. 둘러보기

파일:제주특별자치도 구 휘장.svg 제주도 제5대 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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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 [3] 1919년 8월 30일 판결문에는 6월 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4] #. 현재 이 지번에는 제주서귀포경찰서가파치안센터가 위치해 있다.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4년 당시 이 지번의 필지는 강기정(姜己貞)의 소유였다. 이후 1983년 10월 6일 내무부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5]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4년 당시 이 지번의 필지는 강기정(姜己貞)의 소유였다. [6] 당시 교사진은 김한정(金漢貞)· 강창거(姜昌擧)· 고경수(高京守)· 강문범(姜文範) 등의 독립유공자를 비롯해 이신호·송종현(축구 지도)·장종식·이도일·박창계·김호천·조응호·문달진·강성화·이치화·김옥천·강종호· 김태능(金泰能, 김성숙의 조카)·이병호·김창일·이창효·김창하·이원정·정재경·박용후·문시욱·송병길·이정백·강문석·정호명·이두옥·김태순·허기린·이원함· 이원오·김동우·강군섭 등이 있었다. [7] 당시 가파도 주민 중 4명을 제외한 나머지 유권자들이 모두 김성숙에 투표했다고 한다.